제6장 거짓 신앙체계의 뿌리
신앙의 본질?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
우리의 모든 예배, 기도, 헌금, 구제, 성경공부, 전도 봉사...는 의식으로 ①본질을 담는 그릇이요 ②본질을 위한 수단 ③본질을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질이 없는 의식은 의미가 없다.
이 말은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데 이 십일조 속에 본질이 담겨 있는가, 안 담겨있으면 이 헌금이 의미가 없단 말인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이 말은 우리의 신앙이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내 전 존재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고, 이 신앙의 본질이 우리의 예배, 헌금, 기도를 통하여 나타나한다는 것이다.
의식 하나하나는 다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십일조 안 드리면 성경은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함, 물질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자랄 수 없습니다.
의식 하나하나가 중요하지만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으로 이것이 의식들을 통하여 표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1:6 “6-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8-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병든 것을 드렸음 -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님, 도리어 멸시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살펴 본 것이 거짓신앙체계였음.
거짓신앙체계? 신앙에 대한 왜곡된 잘못된 이해가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음.
거짓신앙체계에는 크게 3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율법주의 -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 버린 것(사1:10-15)
기복신앙 - 하나님이 내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된 것
인본주의 - 자기자원, 자기목적, 자기방법
이사야1장에 보면 그 많은 희생, 제사, 모든 절기를 철저하게 지킴, 안식일 뿐 아니라 월삭, 대회, 절기, 정기적으로 기도와 금식을 하였음.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 4절, 범죄 한 나라, 허물진 백성, 행악의 종자, 부패 한 자식
10절, 소돔의 관원, 고모라의 백성이라 하심.
왜 그랬는가? 여러분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안 사랑한다고 생각했겠느냐는 겁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였음.
그럼 무엇이 잘못? 신앙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잘못이해하고 있음.
어떻게 잘못되었는가? 의식 잘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잘못 이해함.
성경에 보면 의식은 중요하지만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되며 이 삶을 표현하는 것이 의식을 통하여 표현되어지는데 신앙이 잘못이해되어지면 의식을 잘하는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왜곡되어 버리는데 이것이 거짓신앙체계의 하나인 율법주의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바리새인의 예를 들면서 그들은 그토록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지키고 구제하고 말씀을 연구, 말씀을 지켰는데 그래서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을 알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고 하심.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해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의식을 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겁니다.
신앙의 본질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이 우리의 목적, 목표가 되는 삶이요, 그리고 그 삶이 의식을 통해 표출되어야 하는데 신앙에 대한 이해가 왜곡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세 번째 시간으로 거짓 신앙체계의 뿌리에 대하여 살펴봄.
이 거짓신앙체계의 뿌리에는 탐심이 있습니다. 세상 사랑이 있음. 그래서 거짓신앙체계가 율법주의, 기복신앙, 인본주의가 삼위일체처럼 결합되어있음.
양파껍질을 벗기고 벗기면 맨 안에 심이 있듯이, 율법주의를 벗기면 맨 안에 남는 것이 탐심임.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렘6:10-21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기자가 사건을 취재하듯 읽어야 함.
우리는 이렇게 읽음 - ‘에고~~이스라엘 백성이 타락 했네 그러니까 심판이 왔지 라고’ 생각함. 그러면서 생각하기를 우리는 저들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함.
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거절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들을 귀를 가졌으니까, 우리는 가증한 일을 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저들은 당연히 심판이 와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이 구절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함.
왜? 우리는 바쁜데 오늘 교회에 왔고, 생활이 어려워도 헌금을 드리고, 말씀듣기 원하며 그 말씀을 마음에 품고 나름대로 살아가기 원하기 때문에 이들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함.
우리는 하나님이 저들을 심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는 말씀이라고 그렇게 읽습니다. 왜? 표면적으로 읽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그렇게 읽으면 안 됨.
저들이 처한 상황이 어떠했으며, 왜 하나님께서 저렇게 말씀하셨는지, 무슨 의미로 말씀하셨으며, 왜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는가를 이해해야 그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비춰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이 20절입니다. 위와 똑같은 문맥에서 하시는 말씀으로 렘6:20 “시바에서 유향과 먼 곳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찌함이냐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제물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시바 - 에티오피아 (한국 필리핀 까지 가는 거리로 약 2.000키로) 비행기로 3:40분 거리.
예루살렘에서 에티오피아 까지 먼 거리에서 사온 것이라면 얼마나 큰 희생이 들었을까요? 그들이 사온 향품이 얼마나 값비싼 것일까요? 이렇게 큰 희생을 드린 이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했을까요? 안했을까요?
이러한 큰 희생과 귀한 향품을 드려 특별한 예배를 드렸다면 하나님을 사랑했을까요? 안 사랑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도리어 심판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기자가 사건을 취재하듯 읽어야 합니다. 보세요.
렘6: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 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
그들이 듣는다고요? 못듣는다구요? 못 듣는다고 함, 들을 귀가 없다고 함. 이것이 무서운 것.
16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 하였으며”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야, 배짱도 좋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단도직입적적으로 거절할 수 있어,
또 17절을 보세요.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 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워 경고의 말씀하셨는데 한 마디로 안듣겠다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 성경구절을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거절하고, 대적하고 그러니 당연히 심판이 온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그런데 이걸 생각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20절을 보면서 이 말을 보아야 이해가 됩니다.
보세요, 여러분이 그들의 입장이라면 그렇게 큰 희생을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너희가 이렇게 해라 그러면 평강을 얻으리라’ 하셨으면 그 말씀을 안 듣겠어요? 당연히 듣지요. 그들은 이랬을 겁니다. 아니 하나님 우리에게 언제 말씀하시고 안 들었다고 그러십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당연히 듣지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이토록 많은 헌신을 드리는데 우리가 왜 하나님 말씀을 안 듣겠습니까? 하고 말씀을 겁니다.
20절 “시바에서 유향과 먼 곳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찌함이냐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제물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하나님은 그들의 희생을 받지 않겠다고 하심,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받는다고 생각했을까요? 안 받으신다고 생각했을까요? 당연히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예물을 드렸지요, 아니 하나님이 안 받으시는데 이 많은 희생을 드렸겠습니까? 당연히 받으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안 받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저들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보아야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그토록 하나님께 헌신한자들이라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왜 안 듣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들을 귀가 없다는 겁니다. 깨닫는 지혜가 없다는 겁니다.
예) 17절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 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하나님께서 그 시대 예레미야를 세웠어요. 그리고 말씀하셨어요. 7: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 하였느니라” 새벽부터 부지런히 경고하게 하셨어요. 그런데 저들이 안 들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토록 큰 희생을 드리는 그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면 왜 안 들었겠습니까?
그럼 왜 하나님은 안 들었다고 말씀하느냐, 왜 저들은 그렇게 하고 있느냐? 이해가 다르다는 겁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많은 거짓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와 예레미야가 말하는 바가 달랐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짓선지자들이 말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에 쏙쏙 와 다았습니다. 기쁨으로, 아멘으로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예레미야가 하는 말은 너무 부담스러웠어요. 그래서 그들은 예레미야를 거짓 선지자로 취급했습니다.
문제는 눈이 닫히고 귀가 닫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그들이 못 깨닫는다는 거예요.
바리세인들을 보세요. 그토록 신앙생활을 잘했는데 그토록 성경을 잘 알고, 철저히 신앙생활을 했기에 누구보다도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한다 이사야가 너희에 대하여 잘 말했다, 이사야 시대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보세요. 귀가 막히니 듣지 못해요. 그러니 자기들의 생각에서, 자기들의 관점에서 보고 판단하는 거예요. 그러니 그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함, 그러니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자기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안보이니까..
제가 왜 반복적으로 이 말을 하는가하면 신앙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보기를 원합니다. 예레미야 시대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완전히 타락했고, 안식일도, 십일조도 드리지 않으니 벌 받았고 우리는 안 그러니 그들과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성경을 전혀 잘못보고 있는 겁니다.
렘6: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겼다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듣기 좋은 말을 들으려고 하지마세요. 그러면 예레미야 사람들과 같이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길을 듣기를 원하셔야 되요. 하나님의 기준, 의도, 의중,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셔야 됩니다. 신앙이 타락할 수 록 자기 귀에 즐거운 말을 들으려 합니다.
사29, 30장에 보면 “우리 귀에 즐거운 말을 하게하라” 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말로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으로 요구한 거예요.
오늘날 성도들도 말로하지 않아요, 목사님 우리에게 즐거운 말만 하십시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그들의 마음을 대변합니다.
정직하게 전하면 눈감고 자든지, 자기를 친다하고, 자기가 원하는 설교를 하면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가 그들과 똑 같은 줄을 몰라요, 너무나 똑 같은데도...눈이 가리고, 귀가 가리워져있으니...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통하여 그들을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욕으로 여겼습니다. 왜? 듣기 좋은 말만 듣기를 원했기 때문에... 근데 그들이 하나님이 말씀을 욕으로 여긴 줄 알았겠느냐 말이예요. 몰랐어요. 왜? 본인들은 누구보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왜 욕으로 여겼느냐?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니까...
자~~하나하나 핵심을 살펴봅니다.
그럼 문제는 어디에 있었느냐? 그 많은 희생을 드렸는데 왜 하나님은 심판을 말씀하시는가, 왜 그토록 강력하게 왜 그러시는가? 심판을 말씀하신 이유가 뭔가?
13~14절이 답입니다. “13-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14-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무슨 말입니까? 탐남=탐심이 가득했다는 겁니다.
보세요, 요5:46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경도 안 믿으면서 어떻게 내 말을 믿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 성경을 믿는다고 자부한 자들입니다. 성경의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믿는 지극히 보수주의자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을 의심하지 않고 믿을 뿐 아니라 그 말씀대로 행하려고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그들을 향하여 성경을 안 믿는다고 하십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바리새인들은 무엇을 믿음이라 생각했느냐? 머리로 믿는 것을 믿음으로 생각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 거룩하신 분, 천지를 창조하신 분, 10가지 재앙을 내린 분, 홍해를 가르신 분인 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어요. 머리로, 교리로
그런데 하나님은 머리로 믿는 것을 믿는다 하지 않으시고 마음으로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십니다.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여기 마음으로 믿는 다는 것은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마음)으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성령의 조명이 같이 갑니다.
예)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떠나면 하나님 앞에 설 것을 믿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한 대로 심판 받을 줄을 믿습니까? 우리는 다 믿는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머리로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론적, 교리적 긍정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실제 위의 세 가지를 믿는다면 이렇게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믿는다구요? 거짓말입니다.
야고보서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 말은 믿음이 참되기 위해서 열심히 행해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믿음이 참되면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믿음이 머리로 아는 믿음은 행함이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실제를 보면 우리의 삶을 걸게 되어 있는데 그것은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어느 목사님 돌아가시면서 “오늘이 제게 있을 줄 알았다면 이렇게 안 살았을 텐데” 여러분, 이 목사님이 내가 죽는 날이오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몰랐을까요? 안 믿었을까요? 머리로 믿는 믿음이었지요. 그러니 그런 말을 하지요.
우리도 언젠가 죽을 때가 있다는 것 다 알아요, 그런데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전혀 그날이 없는 것처럼 살잖아요. 머리로 알기 때문에..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시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이 말은 다윗이 미련하여 자기가 죽을 줄도 몰랐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지식은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가슴으로 아는 지식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 머리로 아는 지식을 보지 않습니다. 신학적 지식으로 믿는 다는 것을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중심, 가슴의 믿음을 보십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칼로 내리치려는 순간 창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그 결단 그 마음의 자세를 몰랐을 까요?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을 멀리서도 아신다고 하셨는데 아브라함의 그 마음자세를 몰랐을까요? 아니에요.
여러분 하나님이 안다는 것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경험으로 알 때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리적으로 이론적으로 알면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잘못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전혀 그것을 보지 않습니다.
여러분 교리가 왜 중요한가? 그렇게 살기 위해서 중요한 거예요. 성경적 지식은 그렇게 살기위한 방편에 불과 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시기에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기준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자세가 없으면 똑 같이 눈 먼 자들인 거예요. 똑 같이 들을 귀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몰라요. 저들이 모르고 바리새인들이 몰랐듯이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의 고백이나 생각을 보지 않습니다. 그것을 믿음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심으로 실제를 성령의 조명으로 아는 그 믿음, 그래서 하나님을 알기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알기에 행동으로 나타나는 그것을 믿음으로 보십니다.
여기 제사장들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 무엇이 문제인가요? 그들은 평화 평화를 외쳤습니다. 평화를 외친 것이 잘못이 아니라 평화가 없는데 평화를 외친 것이 잘못이라는 겁니다.
보세요, 지금 예레미야의 시대는 시대말 적인 상황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코앞에 와있는 상황인데 낭떠러지 앞에 와있는 상황입니다. 얼마나 시대가 타락했으면 우상 숭배가 가득 했을까요?
보세요,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나의 유일한 현제적인 열망이요 살아있는 이유요 목표인 그 상황 가운데 머물지 않으면 죄를 못 이기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다른 것이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게 되어있습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섬기게 창조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피가 가즉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시대에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하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대 말 적인 상황으로 우상숭배가 가득, 음란이 가득, 세상 사랑이 가득, 영적억압이 가득, 탐욕, 시기, 질투, 미움, 다툼이 가득한 시대, 가정이 파괴되고, 자녀들이 죄에 팔려가는 시대, 지금상황이 이러한데 상처가 말기 암 환자와 같은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겁니다. 직무유기죠, 그러면서 평화평화 외친 거예요. 왜? 탐심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인기가 있으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그래야 교회가 성장하니까.
예레미야 시대를 보면 오늘날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피터 와그너 우리나라에 와서 한말, 80년대 초를 보면 우리나라 성도 수 25%였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25%입니다. 중직들의 자녀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가정이 파괴되어가고 있습니다. 영적 억압이 가득합니다. 예배에 가도 하나님의 임재가 없습니다. 세상사랑, 탐욕, 미움, 시기, 질투가 가득합니다.
성도들이 삶에서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 삶의 목적과 이유, 그것을 추구하는 것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너무너무 탐심과 탐욕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우상숭배인줄 모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와서는 하나님을 주인이라 하지만 돈을 버는데 있어서는 하나님은 온대간데 없습니다. 돈의 법칙만 있을 따름입니다. 이것이 바로 금송아지입니다. 실제 삶에서 돈이 그들에게 힘을 주는 근원입니다. 돈이 있어야 힘이 생기고, 큰 소리치고, 자부심을 가지고, 안정감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 돈을 벌려면 돈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거죠, 그들의 신은 돈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하나님의 임재가 그치고, 세상과 교회가 구별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은 무너지고, 신앙은 형식과 껍데기뿐인데 오늘날 강단의 메시지를 보세요, 평강하다평강하다, 축복을 외친다는 거예요. 왜? 그래야 교회가 성장 하니까. 이것을 두고 거짓이 가득하다, 탐심이 가득하다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왜 그런가?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말씀을 욕으로 듣고, 왜 거짓선지자들의 설교를 그렇게 좋아했는가? 똑 같습니다. 탐심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들이 세상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채워주는 수단에 불과 합니다. 그것 달라고 새벽기도하고, 철야기도하고, 작정기도, 금식기도하고 일천번제 드립니다. 문제는 자기가 세상에서 얻고자 하는 그것이 목적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채워주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많이 해도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자들이 원하는 것을 부추기는 메시지를 듣기 원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길은 관심 없습니다. 자기가 복 받고 존 많이 벌면 되는 거지 그것이 다예요.
오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취급해요, 자기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그러니 우리 신앙이 타락된 거예요. 거짓신앙으로 가득해요, 그것은 신앙이 아니에요, 그런데 본인은 신앙생활 잘한다고 생각해요, 왜 십일조 잘하고, 주일성수하니까...
문제는 그 중심에 하나님을 알고 전 존재로 사랑하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가치관이 너무너무 세속적입니다. 추구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의식하는 것 외에는 안 믿는 사람과 전혀 구별이 안 돼요.
(아내와 파출부가 구분의 분제)
지식해봐야 성경적인 지식밖에 없어요. 하나님을 실재로 아는 지식은 전혀 없어요. 실제로는 눈멀었는데 눈먼 것을 몰라요, 의식을 많이 해서 익숙하니까...
뭐가 문제입니까 탐심입니다.
그러면 구약 성경에 나오는 복은 뭐냐?
복 - 하나님이 복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복이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소유하면 다 소유한 것입니다.
엡1장을 보세요, 여기에 나오는 1가지 복만 소유해도 빌게이츠가 갖는 것보다 큰 복입니다.
예수님이 복입니다. - 그 예수님을 소유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신앙이 뭐냐?
1.하나님과 친밀한 교제(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
다른 말로 하면그분을 우리의 모든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분이 울의 목표와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을 우리의 모든 것으로 사려면 그분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구세주이심을 발견하면 그 분을 사게 되어있습니다.
2.앞서가신 주님을 보고, 행하심을 보고 우리의 전 존재로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는 이것이 주와 실제로 동행하는 삶입니다.
주님의 목적이 나의 목적이길 원하고
주님의 열망이 나의 열망이 되기 원하고
주님의 추구하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것이 되길 원하고
주님이 있는 곳에 내가 있기 원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바를 나도 원하고
주님의 행하심을 보고 우리의 전 존재로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일이 곧 나의 일이기에 하버지의 뜻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만족하고 내 이름은 아무것도 아닌...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보화인 것을 모르고 하나님이 수단되어져서 우리의 의식 몇 가지함으로 우리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려고 하나님을 수단 삶는 삶을 삽니다. 그리고 열심히 합니다. 그래야 목적이 이루어지니까. 그러면서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세요, 예레미야 시대 그 많은 희생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자세가 하나님이 수단이 수단에 불과했다니까요. 그들의 신앙은 실제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종교적 규례와 전통을 지키는 것이며,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복을 얻기 위한 수간에 불과하였습니다. 이것은 불교나 다름없습니다. 대상만 다를 뿐이지...
우리의 신앙은 이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은 살아있는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입니다. 이처럼 신앙에 대하여 왜곡되게 이해하는 이해가 있습니다. ->거짓신앙체계입니다. 신앙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구약에도, 신약에도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잘못이해한 중심에는 탐심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신앙체계에서는 세상 사랑이 절대 깨뜨려지지 않습니다. 왜? 실제 로는 탐심이 목적이고 이것을 부추겨 주는 것이 신앙이니까.
세상사랑은 하나님이 목적이 될 때에만 깨뜨려집니다. 우리가 어디에 잇던 어디서 무엇을 하던 하나님이 목적이 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뜻이 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움직여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에 살면서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핍박을 당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돌림, 멸시, 조롱...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 영광을 위해 주의 행하심에 동참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를 더욱 사랑하게 되길 원합니다.
주님을 구하되 그분이 보화이기에 숨겨진 보화를 찾는 것처럼 예수님을 구하게 되길 원합니다. 주님을 알고 사랑하고 그래서 인격체이신 주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기를 더 열망할 뿐 아니라 주님의 행하심을 보고 전 존재로 동참하는 그러한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눈멀고 벌거벗고 헐벗었지만 그 사실도 모른 이것이 우리의 모습인데,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길 원합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우리 중심에서부터 회복시키시고 신앙의 본질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거짓신앙 체계에 빠져있지만 알지도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으면서 거역한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욕으로 취급하는 그런 사실도 모른 채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눈 먼 채 죽음을 향해 가는데 그러면서도 신앙의 열매는 전혀 없는데 돌이키지도 못하는 이러한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그냥 이대로 버려두지 마시고 진짜 도와주셔서 우리 마음이 깨지고 하나님을 다시 찾고 우리를 다시 회복시켜주시고 교회를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하나님께서 교회 가운데 다시 임하시고 운행하심으로 다시 잃은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오고 주님 때문에 사회가 바뀌고 주님 때문에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그 날이 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끝입니다.
제8장 십자가에서 이루신일 (0) | 2016.09.19 |
---|---|
제7장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과 십자가로 사는 삶 (0) | 2016.09.19 |
제5장 거짓신앙체계 (0) | 2016.09.19 |
제4장 본질과 의식 (2) (0) | 2016.09.19 |
제3장 본질과 의식 (1) (0) | 2016.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