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단원 2과 율법주의 특징(1)
제2단원 율법주의
제2과
율법주의 특징(1)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자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깨어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율법주의 신앙에 빠져 있는 사람은 자신이 율법주의 신앙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이 그릇된 신앙체계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 점이 바로 율법주의 신앙의 무서운 점입니다.
또한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율법주의 신앙으로부터 면역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열 두 제자들에게까지 이 율법주의 신앙에 대해 반복해서 경고하신 것과 사도 바울이 편지하고 있는 초대교회의 대부분이 이 율법주의 신앙으로 인하여 홍역을 치룬 것을 보면, 율법주의 신앙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한 가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율법주의 신앙의 특징들입니다. 우리는 율법주의 신앙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우리의 삶에 비추어 봄으로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의 영향력
율법주의는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것을 바리새인의 누룩이라고 불렀습니다.
마태복음 16:5-12, 누가복음 12:1을 읽으십시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리새인의 누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마태복음 16:5-12)
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7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누가복음 12: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여기에서 말하는 바리새인의 누룩은 바리새인들의 교훈 곧 그들의 가르침입니다(마 16:12). 그런데 예수님께서 문제 삼고 계신 것은 가르침의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그들의 말하는 바는 행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마 23:2-3). 예수님은 여기에서 그들의 가르침의 자세와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곧 외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2:1).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율법주의 신앙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강력하게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율법주의의 특징
율법주의 신앙은 여러 가지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주의의 특징을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삶에서 가장 잘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들은 그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신앙적인 이해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들입니다.
1. 자기-의(self-righteousness).
율법주의 신앙의 가장 중심적인 특징은 ?자기-의?(self-righteousness)입니다.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정해진 규정들과 규칙들을 잘 지키는 자기의 헌신과 노력이 강조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대한 이러한 그릇된 이해를 가진 자들은 자기들의 행위에 의존합니다. 결국 자기-의(self-righteousness)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기-의란 자기의 행동을 의지하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자기-의를 의지하는 율법주의 신앙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들이 자기-의를 의지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진정한 의나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를 전혀 경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한 순간도 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율법주의 신앙은 우리를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끊어지게 만듭니다.
⑴ 기도하러 올라간 바리새인의 예
자기-의를 의지하는 율법주의 신앙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9-14을 주의 깊게 읽고 다음의 물음에 답하십시오.
(누가복음 18:9-14)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비유에 의하면, 누구와 누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까?
그 날 누가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받았습니까?
그 날 누가 하나님 앞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까?
버림받은 사람은 왜 버림을 받았다고 당신은 생각합니까?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 날 세리는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받은 반면, 바리새인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바리새인이 버림을 받았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의 바리새인은 오늘날로 치면 예수 믿은 다음 날부터 새벽기도 한 번 안 빠지고, 심지어 받은 선물의 값까지 계산해서 십일조를 드리고, 극장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밤마다 교회에서 철야하고, 1년에 성경을 3독하고, 1 주일에 정기적으로 이틀을 금식하는 목사님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리는 창녀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목사님은 왜 버림을 받고, 반면에 죄만 먹고살던 창녀는 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까? 이 점을 잘 이해하기만 하면, 율법주의와 십자가의 복음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매우 중요한 비유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창녀와도 같은 세리는 어차피 자기가 지은 것은 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왔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눅 18:13). 반면에 바리새인은 세리에 비하면 비교 자체가 무색할 만큼 소위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자기의 행위, 즉 자기-의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의 기도를 보십시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누가복음 11:12)
우리가 세상적으로 혹은 신앙적으로 아무리 훌륭한 삶을 산다 할지라도 자기의 행실 혹은 자기-의를 의지해서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공로 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율법주의 신앙은 자기-의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결과를 낳습니다.
⑵ 부분적으로만 자기-의를 의지해도 그것은 전체적으로 자기-의를 의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 매우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만 자기-의를 의지해도 그것은 전체적으로 자기-의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입니다.
갈라디아서 5:2-4 읽고, 다음의 물음에 답하십시오.
(갈라디아서 5:2-4)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바울은 할례 받은 사람에게 어떠한 결과가 초래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네 가지)
바울이 여기에서 말한 할례는 그 행위 자체를 말합니까 아니면 할례를 받은 의미를 말합니까? 맞는 답에 표 하십시오. 갈라디아서 5:6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 준 사건(행 16:3)을 대조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 할례의 행위 자체를 말한다.
□ 할례를 받는 의미를 말한다.
바울이 할례 받는 자에게 초래된다고 말한 결과들은 생각하기조차 싫을 만큼 끔찍한 것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자에게 아무 유익이 없게 될 것이고,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며,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게 되고, 다시 모든 율법을 행할 의무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이 말하고 있는 할례는 할례를 받는 그 행위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구절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할례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할례는 할례 행위 그 자체보다는 할례를 무슨 의미로 받는가 하는 그 의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음 구절인 갈라디아서 5:6을 보아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의 도구가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할례의 경우에도 할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무슨 의미로 할례를 받았느냐에 따라 율법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할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는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다른 복음? 즉 거짓 복음이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보면 그것은 정확하게 율법주의 신앙이었습니다. 그 거짓 선지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지 않고, 구약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면, 그 당시의 교회는 그들을 즉시 배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덧붙여서 할례를 가르쳤습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 맞다. 그러나 우리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대로 언약의 징표인 할례를 받아야 한다.?라는 식으로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의미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의 주장은 이렇습니다.?만약 성도들이 이러한 의미로 할례를 받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근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근거로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에 덧붙여서 그들이 한 행위 즉 자기-의를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이 부분적으로라도 자기-의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그것은 전체적으로 자기-의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서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무 유익이 없으며,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전적으로 자기의 노력을 통해서 의롭게 되어야 한다.? 그래서 여기에서 말하는 할례는 바로 자기-의(self-righteousness)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공식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 ? = 율법주의 혹은 거짓 복음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수단으로서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추가되면, 그것은 자기-의요, 그러한 신앙관은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다음의 문장을 읽고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에 ?율?이라는 말을 써 넣으십시오.
1. 신부님께 가서 고해성사를 했더니, 죄 용서를 선포해 주시면서 주기도문을 50번 외우라고 하셨다. ( )
2. 이 집사님 부부는 극심한 어려움에 처한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200일 작정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자신들이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작정기도를 한 번 빠졌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았다며, 하나님은 참 너무한 분이라고 말했다. ( )
3. 김 장로님은 우리의 모든 예배, 특히 주일 대예배 시간에는 반드시 신앙고백의 순서가 들어가야 한다고 믿는다. ( )
4. 김 집사님은 자신의 죄를 회개했는데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 )
5.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것 ( )
6. 시간을 정해놓고 성경을 읽는 것 ( )
7.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 ( )
처음 네 가지 문장 모두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십자가의 공로로 인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것에 덧붙여서 주기도문을 외운다든가, 선한 일을 한다든가, 감사헌금을 드린다든가 하면, 우리 죄의 댓가로 무엇인가를 한 것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후련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하게 할례와 같아서 자기의 의를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끊어지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 응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몇일 동안의 헌신을 드렸기 때문에, 그 댓가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기 위한 중요한 수단입니다. 기도는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공이 아닙니다. 기도가 그렇게 변질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율법주의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은혜를 전혀 알지 못하는 종의 삶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참된 예배 될 수 있는 것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뿐 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공로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고백에 나오는 내용들을 부인하면, 그 사람의 신앙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시간에 신앙고백이 들어가야만 예배가 참다운 예배라고 생각하는 것은 예배가 참된 예배되기 위한 조건으로서 우리가 행하는 어떤 의식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주님께로부터 끊어지는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신앙고백 시간을 갖는 것이 무조건 율법주의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신앙을 진정한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당연히 그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순서를 예배시간에 가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그 순서를 가져야만 예배가 올바른 예배가 된다고 하는 사고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도 오직 십자가의 공로에 기초한 하나님의 은혜뿐 입니다. 그런데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 깊은 배후에 자기의 의로움으로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는 자기-의가 있습니다. 사탄은 참으로 자기-의를 가지고 성도들을 넘어뜨리려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넘어뜨리지 못하면, 죄책감을 가지고 넘어뜨립니다. 이 두 가지는 정반대이지만, 똑같이 자기-의에 기초하고 있으며, 사탄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반면에 그 다음 세 가지는 모두 율법주의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열심히 그리고 규칙적으로 잘하면 그것이 곧 율법주의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바른 신앙은 아무런 열정도 없는 미지근하고 무책임한 것이라는 말입니까? 율법주의의 가장 중요한 기초는 소위 공로사상입니다. 즉, 자기 행위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과의 요점
♡ 율법주의는 신앙에 빠져있는 사람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 아무도 율법주의의 신앙에 면역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 율법주의의 특징들을 살펴봄으로 자신을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 율법주의 가장 특징은 자기-의입니다.
♡ 자기-의는 자기의 행동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 부분적으로만 자기-의를 의지해도, 그것은 전체적으로 자기-의를 의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 + ? = 율법주의 신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