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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과 섬김의 삶 / 여주봉 목사
발의무리
2007. 7. 17. 08:09
금식과 섬김의 삶
설교: 여주봉목사
이사야서 49장입니다. 1절-4절까지 읽겠습니다.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나를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하였으며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숨기시고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우리가 이번 주간 동안에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사야 하반부에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부터 회복될 것을 예언하고 있고, 그 가운데 고난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나님 백성을 구속하실 것이 예언되어 있고, 그 속에 이제 하나님의 교회회복과 하나님의 부흥에 관한 예언이 들어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교회회복과 하나님의 부흥에 관한 예언은 예수님 오실 때부터가 말세고, 다시 오실 때까지가 말세인데 그 교회사의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그 부흥의 시대마다 이루셨던 일들이고, 특별히 그 역사는 말세지말에 어느 때보다도 강한 하나님의 교회회복과 하나님의 부흥이 이 땅에 오게 될 것인데, 그것에 대한 예언이 들어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이사야서 59장만하더라도 말세지말을 가리킵니다. 동쪽과 서쪽, 온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일이 있을텐데 이는 하나님이 급히 흐르는 하수처럼, 마치 해일과 같이 선 물결처럼, 하나님의 호흡, 성령이 몰아치시는 선 물결처럼, 임하실 것이기 때문이라 이렇게 말하고 있고, 그것을 로마서 11장에 인용하면서 바로 말세지말에 그러한 일이 일어남으로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규모 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이 말세지말에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이사야 하반부에 보면 하나님의 교회회복과 하나님의 부흥을 말하면서 특별히 교회시대에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말세지말에는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이러한 하나님의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말세지말인 이 때에 살고 있고, 하나님의 부흥의 조짐들이, 어느 때보다도 강한 부흥의 전조들이 여기저기 일어나고 있으며, 이번 집회만 하더라도 우리 기도할 때, 하나님의 부흥의 전조가 보이게 될 거라고, 그랬는데, 지금 마지막 시간입니다 만은 여러분 계속 참석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번 집회 기간 동안에 바로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실 것을 여러분 눈으로 보시지 않았습니까. 안 보이셨나요. 하나님이 하신 일들, 부흥의 전조라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일들, 이러한 일들이 이제 더 대규모적으로 지금보다 더 몇 십 배 강력하게 나타나면 그것이 하나님의 부흥입니다. 사실 이번 기간동안에도 하나님이 하신 이이 얼마나 놀랐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말세지말에 어느 때보다 강한 하나님의 부흥의 전조들이 전 세계적으로 보이고 있고, 우리나라에도 꾸준히 그러한 이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을 위해서 이제 어떻게 하나님께 쓰임 받아야 될 것인가 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사야 후반부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에 대해서 쓰임 받은 종이 세 종류가 나오는데, 첫째는 고레스라는 왕은 안 믿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 쓰임 받았고, 두 번째는 고난의 종인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백성을 구속하시는 일을 이루셨고, 그 다음에 바로 그 예수님 안에서 침노하는 무리를 하나님이 세우신다.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흥과 교회회복을 과거 교회사에서 이루어 오셨고, 말세지말에 있을 이 부흥에서도 바로 이러한 무리들을 하나님이 세우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다 하는 것을 지금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십자가를 옆으로 뉘어놓은 같은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의 종이라고 나오는데, 예수님이 종이라고 나오고, 침노하는 무리가 나온다고 말하면서 구약의 이스라엘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이스라엘이 완성되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불충한 종들이었다면, 예수님의 하나님의 신실하신 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이 모든 이스라엘의 완성이었다면, 이제 그 예수님 안에서 거하는 교회, 하나님 백성, 이 침노하는 무리들이 세워져서 하나님이 일을 이루신다 하는 것을 이렇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를 예수님의 사역을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시는 사역 관점에서 어떻게 세우셨는가, 정확하게 십자가에 복음과 성령의 사역을 감당하심으로서 세우셨다. 우리 가운데 사실 하나하나를 살펴볼 때에 여러분들이 아마보시면서 혹시 느끼셨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실재적으로 이 일들을 오늘까지 우리가운데 해 오시고 계십니다. 하나하나 모든 부분에 있어서,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그동안 십자가의 복음에 기초해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위해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전하고 우리가 주님을 따라 순종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그러한 일들을 행해오신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에 세워져야 되고, 두 번째, 이 침노하는 무리는 중보기도 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엘리야의 영으로 올, 하나님이 주의 길을 예비할 자들을 하나님이 항상 보내시는데, 그 엘리야의 영에 중요한 한 부분은 중보기도라 영이라 하는 부분을 어제 저녁에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어떤 부분을 살펴보기 원하느냐 면, 마지막 시간으로 섬기는, 이 침노하는 무리의 특징은 섬기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침노하는 무리의 첫 번째 특징은 십자가의 복음에 선 자들이고, 두 번째는 중보기도하는 자들이고, 세 번째는 섬기는 자들이고, 네 번째는 금식하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오늘은 그 두 가지 남은 부분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섬김, 이것이 침노하는 무리의 또 하나의 특징입니다. 저희가 분당에서 화요모임을 지속적으로 합니다 만, 공적인 예언 사역을 할 때가 있고, 안 할 때가 있기도 하는데, 공적인 예언사역 할 때마다 여태까지 한번도 빠지지 않고 계속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저 개인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반복적으로 주시잖아요. 그 이야기는 뭐냐 면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는데 잘 안 들으면 반복되어 주십니다. 그러신 것 같습니다. 제가 누구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데, 예를 들면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꾸 반복해서 사랑한다고 여러 번 주실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대부분이 어떠한 경우냐 면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참 놀라운 일입니까. 그리고 그 사실을 잊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기도 받는 분이 그것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꾸 넘어가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중요한 말이야. 이것은 의미가 있는 이야기야.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고 잘 들어, 내가 너를 사랑한다니까. 이런 의미에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화요일 모일 때마다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내용이 뭐냐 면 에베소서 6장 7절입니다. 섬김에 관한 부분인데, 그 마음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그러면서 너희가 그것을 읽었느냐? 살펴보았느냐? 왜 그대로 순종하지 않느냐? 이런 말씀도 예언 중에 나오고 그러는데, 우리가 예언의 말씀은 한마디, 한마디, 하나님의 음성으로 조금도 오차가 없는 하나님의 음성이라 그것은 아니라도 분별해 보아야 되지만, 반복적으로 그 말씀을 주시는 데는 한편으로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그만큼 중요하고요. 이것을 강조하는 대에는 이유가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시는 침노하는 무리는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할거거든요. 그것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어제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중보기도의 그 깊은 내막을 잘 이해하기 전에도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그 일을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 가운데 중보기도가 안되어지니까. 하나님께서 교회를 새롭게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라고 그러셨는데, 그 전에는 그 중보기도가 그렇게 중요성한지 모랐는데, 나중에 지나고 보니까. 그러한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것을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섬김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 의미를 미쳐 깨닫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귀가 달토록 말씀하심으로서 이 부분이 얼마나 침노하는 무리로서의 중요한 부분인가를 조금씩 알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그렇게 반복적으로 말씀하시고, 어떤 때는 한번에 몇 차례 말씀하시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사랑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연한 것을 가지고, 하면서 넘어가는 것처럼, 섬김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에베소서 6장 7절의 구절을 그렇게 말씀하심에도 우리가 그것을 잘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혹은 주위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혹은 그 중요성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같고, 또 성경이 의미하는 바를 진실로 깨닫지 못해서 그 가운데 행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이 아니라니까, 잘 들어, 똑바로 들으라니까. 이렇게, 그래도 안 들으니까. 너 왜 안 들어 똑바로 들어, 그렇게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이것이 중요한 말씀인데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렇게 듣고도 잘 안 되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침노하는 무리로서의 섬김은 그야말로 중요한 부분인데, 우리가 오늘 밤 이 부분에 대해서 같이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그 종에 대해서,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서 특별히 모델을 많이 살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거기 여러 가지 종이 나오는데, 불충한 이스라엘의 완성으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신실한 종, 그리고 침노하는 무리는 그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모델입니다. 그런데 오실 때, 정확하게 무엇으로 오셨냐 면, 섬기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여기 이사야서 49장 오늘 읽은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최근에, 지금 현 시범에서 하나님은 오늘날 이러한 무리들을 세우고 계십니다. 이것이 침노하는 무리의 한 특징입니다.
여러분 먼저 말씀드리면 이사야서 49장은 예수님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학자들이 이사야서 42장부터 66장의 이사야 후반부에 나오는 고난의 종으로 오실 메시야에 관한 구절을 네 구절을 뽑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사야서 49장 1절부터입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에 관한 예언입니다. 우선 하나는, 그런데 우리가 지난번에 살펴 본대로 예수님에 관한 예언임에도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 예언을 자기의 사역에 전용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6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이 구절이 예수님에 관한 예언인 것도 모르고 자기 임의대로 자기에게 적용시키고 있느냐? 아닙니다. 그는 우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소위 말하는 아무 구절이나 하나님이 감동 주셨다고 해서 자기에게 임의대로 적용할 수 있느냐? 아닙니다. 그런 성경해석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 우리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할 때,(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은 십자가 복음의 필수지요.) 예수님에게 주신 모든 약속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주신 모든 권세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에베소서 1장과 2장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구절은 예수님에 관한 예언인데, 침노하는 자들이 다른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늘날 이사야서 49장 1절과 2절과 같은 침노하는 무리들을 세우고 계십니다.
그 하나의 특징을 보시면, 그 입에 날카로운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은 예리한 칼을 주실 거라고 그랬는데, 이것은 말씀입니다.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가 그들에게 부어질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그 권세가 있었고요. 침노하는 무리들 가운데 그것이 주어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광한 화살을 주신다고 그랬습니다. 이 말은, 갈아 가지고 반짝반짝 빛나게 하는 그 뽀쪽한 화살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언의 말씀을 말합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주신 어떠한 감동, 정확한 예리한 말씀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언을 주시되, 원수의 염통을 꽤뚫 수 있는 그러한 말씀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군들을 오늘날 세우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체험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그냥 듣고 지나가시려면 지나가십시오. 성경 해석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성경을 올바로 해석한 것이고,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해 드렸으면 좋겠는데, 자칫 잘못하면 여러분들이 오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조심스럽습니다. 제가 몇 년 전입니다. 미국에 켄사스 시티에 마이클 비클 목사라고 있는데, 그 당시에 메츠 롤 Christian fellowship이라는 삼 사 천명 모이는 교회를 담임했었습니다. 지금은 이제 거기서 사임하고 24시간 중보기도하는 그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거기에서 집회가 있을 때, 갔는데, 윅 와일리라는 분이었어요. 이번에 가서 보니까 그분이 암 걸려서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그분이 기도사역자 중에 한 사람인데, 와서 기도를 해 주면서 내 이름이 뭐냐고 물어요. 그래서 내 이름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해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진도가 나가면 되는데,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제 개인에 대한 어떤 간증보다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좀 여러분에게 알게 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저도 이 부분에서 개인적으로 확신을 가지고 이런 부분을 알기 원하는데, 자칫 이야기하다 보면 두려운 것은 뭐냐 면 이것을 이야기하다 보면 여러분들이 혹시 잘못 이해 해 가지고, 혹은 이것이 저 개인의 이야기인 것처럼 들을 수도 있고, 혹은 여러분들이 그런 저런 오해 해 가지고 올바른 이야기의 취지를 잘 이해하지 못할 수가 있을 것 같아서 조심스러워 가지고 제가 지금 이야기를 못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이것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화요모임에서도 어떤 분 같은 경우는 저한테 대해서 막 칭찬합니다. 그러면 제가 칭찬한다고 설교 시간에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별 칭찬 다해도 나 대수롭지 않다고, 왜냐면 칭찬해 놓고 그 다음순간 돌아서는 사람 수없이 많다고, 그러니까 아무리 칭찬해 보아야 그런가보다 기다린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면 이제 실재로 그럽니다. 그런데 그분 같은 경우에는 자기는 그런 의도로 칭찬한 것이 아닌데, 앞에서 목사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는 사실 좋으니까. 존경하는 의미에서 뭐 들으라고 한 것도 아니고, 이렇게 칭찬하는데 앞에서 그렇게 깔아 뭉기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런 경우도 있거든요. 그래가지고 상처받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참 여기서 조심해야 될 것이 뭐냐 면, 한편으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고 계신 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동참합니다. 그것이 안 보이면 안됩니다.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이 아주 귀합니다. 여러분, 제가 귀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그것이 나에게서 나온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실지는 몰라도, 나 때문에 하신 것도 아니고, 나 자신만을 의해서 하신 것도 아니고, 혹은 내가 하나님 앞에 특별하기 때문에 하신 것도 아니고 더더욱, 내가 하나님 앞에 더 많이 기도하기 때문에 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으로 눌라운 일을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못 보시면 매우 안타까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런 관점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안목이, 하나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동참합니다. 또 하나는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고,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그런데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하기 쉽습니다. 그 하나가 뭐냐 면, 그냥 제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런 뜻으로 이야기 하니까. 왜냐 면, 저는 분명히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뭐냐 면 하나님의 행하심 자체를 못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뭐 그렇고 그런 것이지 그렇게 봅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위해서 대단히 손해입니다. 왜냐 면,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대단히 손해입니다. 이해하십니까?
그런데 또 다른 극단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면 그런 이야기하면 이제 사람을 높이는 것입니다. 새물결 선교회를 높이고, 여주봉 목사를 높이고, 아! 당신이 훌륭하다고, 아! 당신 같은 사람을 진즉 만났어야 되는데, 이런 이야기하고, 그런 이야기 들으면 제가 엄청 거부감 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싫습니다. 왜냐 면 틀린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틀린 말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안하고 계신다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해가 됩니까? 그 하고 계신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하시는 것이 나 때문이 아닌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시는 것을 보되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아야 되지 나를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해야되는데, 그 둘 중에 하나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둘 다 틀린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 둘 다 저는 안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제 막 칭찬하다가도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별로 이렇게 안 기뻐하는 경우가 당연히,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예를 들면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에도, 여러분들이 자칫 잘못하면 저는 그냥 사실 그냥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하나님께서 자꾸 하라고 그러시는 것 같아서 제가 진도를 못나가고 있는데, 뭘 여러분들이 보기를 원하느냐 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깅 원합니다. 그래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또 하나 여러분들이 반드시 해야 될 것은 이것은 나와 관계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 때문이 아니고, 설교하는 저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여러분이 저를 보면 잘못 본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그 둘 중에 하나를,...........
그래서 와서 제 이름을 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름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것을 제 복중에서부터 이름을 주셨답니다. 그러면서 이사야서 49장 1절과 2절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그래요. 그러면서 그분이 배경을 알고 있었어요. 왜냐 면 바로 그 전 세미나에 폴 케인 목사님이 설교를 이 구절을 가지고 하면서 毬ご纛?이 시대에 세우시는 예언적인 백성에 대해 설교했는데, 그분을 그것을 알고 있고, 저는 원래 그 세미나 갈려고 했는데 안 갖기 때문에 전혀 그런 배경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그러면서 그분이 또 뭐라고 그러냐 면 우리나라에 한 목사님의 얼굴을 떠오르게 하신대요. 그런데 그 목사님이 과거에 제 꿈에 여러 번 나타났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어떤 때는 그 꿈에 여러 번 나타났었어요. 그러면서 제가 미국 가기 전에 제 아내하고 그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쭉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면서, 그런데 분명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뭐라고 그러냐 면 목사님이 생각난다고 그러면서 그분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데, 제 아내하고 이야기했던 부분들을 그대로 그분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감동을 주신거지요. 그대로 라고 하니까 토시하나 틀리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한 같은 맥락 똑같은 내용을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것은 맞는 것 같더라고요. 왜냐 면, 하나님께서 저에게 예리한 말씀을 주신 것은 분명하신 것 같더라고요. 집회 같은데 가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날카롭게 느껴지면서, 특별히 하나님이 기름부음으로 함께 하시면, 그 앞에 있는 율법주의 같은 이러한 견고한 진들이 있더라도 예리한 칼처럼 쪼개서 무너뜨리게 하시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만지시면 제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기름부음을 주셔서 어떤 때는 하나님 말씀 전하는데, 마치 화면으로 영상이 나타난 것처럼 선명하게 하나님의 길을 보게 하심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말씀 앞에 꼬꾸라지게 하시지 않습니까. 그렀지요. 그런데 그것은 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이 하시는 겁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이 하십니다. 제가 하지 않습니다. 그건 누구보다 제가 제일 먼저 압니다. 제가 설교하는 자니까 제가 아닌 것을 압니다. 물론 제가 준비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연구하는 부분도 있고, 그러나 그 연구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제가 설교할 때 하나님께서 감동을 많이 주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앞뒤가 맞춰지게 하십니다. 그렇게 할 때, 이렇게 쫙 인도해 가십니다.
그래서 그 말씀 참 맞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이 주일날인데, 그 날은 데이빗 피치스라고 영국의 성공회 주교, 우리나라에 능력은사라고 하는 책 번역 된 분, 지금 하나님이 이 시대에 참 귀하게 쓰시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많이 영국까지 그분 세미나 인도하는 곳에 간다고 그럽니다. 데이빗 피치스 그분이 강사 중에 한 명이었는데, 이제 세미나는 끝나고 주일날이니까 사람들이 많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 받으러 나오라고 하는데 본 교회 성도들은 사모한다 해도 매번 하니까. 그래서 안 모여서 제가 나갔습니다. 쭉 줄서있는데, 기도해 주면서 뭐라고 그러냐 면, 아까 말씀드린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드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해 주더니 그러더라 고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 말 딱 한마디 주고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저는 그때만 해더라도 그것이 당연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여자도 다 포함되고,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말도 여자들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상속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래가지고 제가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돌아와서 그 주간이던가 하나님께서 갑자기 밤에 깨우셨습니다. 그래서 일어났더니 하나님께서 갑자기 저에게 뭐라고 감동하느냐 면, 이런 것이 쭉 생각나게 하시면서 이사야서 49장 그 이하를 쭉 읽어보래요. 그래서 아까 1절, 2절 다음에 예를 들면 4절만 하더라도, 쭉 읽어갔거든요. 그런데 너무너무 놀라운 것이 하나님께서 해오신 일이 그동안 여기 그대로 있더라고요. 제 삶 속에, 그래서 4절만 하더라도 그럽니다. “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이렇게 일군들이 거쳐가는 기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제 숨겨진 기간입니다. 저도 그 기간이 자났습니다. 그 기간이 지나면서 저에게 느껴졌던 바가 뭐냐 면, 그냥 지금 생각하면 여러분 감동이 없을지 모르지만, 정확하게 이대로 느껴지거든요. 나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무익한 종, 아무리 수고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되지 않는, 이렇게 그러한 부분들을 쭉, 그리고 난 다음에 우리 박은길 목사님 여기 와 계신데, 그 다음 주간이 박은길 목사님 교회에서 집회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집회를 다 마치고, 이제 같이 이렇게 기도를 받았습니다. 왜냐 면 저도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하고 하니까요. 그런데 기도를 받는데, 박은길 목사님 사모님에게는 하나님께서 예언의 기름부음을 주셔서 예언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분에게 환상을 많이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그 사모님에게 특별히 새물결 선교회에 관한 환상을 많이 보여주십니다. 왜 하필이면 정태희 사모님에게 선교회에 관한 환상을 많이 보여주시는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그 날 이렇게 기도 받는데, 사모님이 기도하시면서 숨을 헉헉거리면 하나님이 임하신 것입니다. 눈은 감았지만 소리는 들리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이 환상을 쫙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때 정보응 목사, 권구현 목사 최광식 목사도 계셨는데 생각이 나십니까? 제가 지금 누가 환상 한번 본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연결해서 쫙 하나님께서 그 기간동안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제 개인을 위해서도 그것이 늘 생각이 됩니다. 그것이 한 두 주간에 걸쳐서 차례대로 척.척.척 하신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이것은 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데 여러분들이 오해할까봐 조심스럽습니다. 환상이 보이는데, 제가 앞서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손에 뭐가 있냐 면 홀이 들려있고, 그 외에 예수님이 제 옆에 가시는데, 저보다 한발 앞서가시면서 그분이 손으로 저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군대가 따르는데, 일렬로 정렬 쫙 선 군대가 따르고, 그런데 군대가 가는 것처럼 발이 척.척.척 맞춰서 가면 홍해와 같이 물이 쫙 갈리지는 것이고, 그러면서 가는 곳마다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임하는데 교회들이 척.척 세우지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수는 많지 않다고 그랬습니다. 가는데 그 뒤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빛 가운데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누구도 보이고, 누구도 보이고 그런다고,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주에 제가 광명시에 있는 영성원에 집회를 같다 왔습니다. 같다 오면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 켄사스 시티에서 6개월 전에 있었던 그 테이프를 듣게 되었습니다. 폴 케인 목사님의 설교를 그때 사오기만 했습니다. 주문해서 그때는 못 갔으니까. 그런데 그 테이프 속에 하나님께서 여태까지 말씀하신 것이 다 들어있었습니다. 그 이사야 49장의 이야기, 아까 말한 꿈의 환상의 이야기, 이런 부분들, 무슨 이야기냐 면 하나님께서 오늘날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고 계십니다. 그들에게 무슨 은혜를 주실 것이냐 면, 이사야서 49장 1절-2절의 은혜를 주십니다. 거기 예수님이 진두지휘(陣頭指揮) 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군대를 일으켜 세우고 계시고, 주님이 군대장관으로 함께 하십니다. 그들이 가는 곳에 어두움이 물러가게 될 것이고, 교회가 세워지게 될 것이고, 그리고 그리로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또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면, 제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으면, 제 개인만 알고 있으면 되지 뭐 하러 여러분 설교 시간에 이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야합니까? 아무런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저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저 개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왜 했느냐?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해 오셨고, 오늘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제가 이번에 같이 사역자 모임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이번에 오기 전에도 기도 받는데 어떤 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저한테 뭐라고 그러셨느냐 면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은사를 나눠주시라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뭐냐 면 지금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침노하는 무리로 저를 먼저 세워주셨다면 하나님께서 동일한 은혜를 여러분들에게 나눠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 일을 우리 가운데 해 오셨단 이야기는 이 말씀 그대로 해 오셨습니다. 실제로, 그리고 준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일을 이루실 줄로 확신합니다. 우리가 주안에 거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전재 조건입니다.
또 한번은 연합교회 사모님이 새벽기도 나가서 기도하는데 갑자기 환상을 여셨는데, 제가 가운데 있고 벌집 같이 육각형처럼 있는데, 그런데 위에서 빛이 저에게 쫙 임하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빛이 여섯 각으로 쫙 퍼져 나가면서 전체적으로 확 퍼져나가더랍니다. 그 화요일 날 간증하신 날 어떤 분이 와 가지고 가면서 뭐라고 그런 줄 아십니까? 여주봉 목사는 교주야! 그러고 갔습니다. 저는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간증하라고 할 때에는, 그럼 여태까지 제가 설명 드리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저 보라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태까지 침노하는 무리를 정확하게 준비해 오셨고, 그 일을 해 오시고, 그러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복음, 그 부분만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부분을 조명해 주시고, 비춰오게 하시고, 실제로 그대로 전하면서 제 자신이 변하게 하시고, 교회가 그렇게 세워지게 하시고, 거짓신앙인 율법주의, 인본주의, 기복신앙이 깨어지게 하시고 교회들이 빛 가운데 세워지게 하시고, 실제로 그 숫자가 많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직접 교회 세우는 집회하는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지금은 개인적으로 교회세우는 집회 안 나갑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러면 아까 임한다는 것은 뭐냐 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것입니다. 부흥으로 임할 것이라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저를 먼저 세워주셨다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나누어지기 위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임해서 나눠지면서 그것이 전체로 퍼져 가시게 하실 것입니다.
또 그래서 오늘 저녁에도 나옵니다만, 그리고 제가 화요모임을 인도하면서 여러 번 깨달은 것이 하나님께서 어떤 부분을 저에게 깨닫게 하셨잖아요. 예를 들면 하나님이 제 속에 아무런 선한 것도 없다든지, 철저히 주님만 의지하게 한다든가, 이렇게 깨닫게 하시는 것이 제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도 되지만, 그것만이 아니더라고요. 왜냐하면 지금 하나님이 하신 것을 보니까. 제가 그것을 깨닫고 전하게 되면, 그대로 다른 분들이 깨닫고 똑같이 동일한 은혜를 경험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무엇을 해 오셨냐 면,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서 깨달은 부분마저도 하나하나 돌이켜 보면 화요모임에서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더라고요. 뭐냐 면, 제가 개인적으로 특별나기 때문에 저에게 깨닫게 하시는 그것이 아니고 혹은 저만 하나님 알고 좋아하라고 깨닫게 한 것도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그야말로 여러분 보다 훨씬 더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저에게, 하나님이 택하시면 연약한 자를 택한다고 그랬습니다. 성경에 써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만약에 저를 먼저 세웠다면 이유가 간단합니다. 제가 여러분보다 훨씬 연약하기 때문에 그럽니다. 진짜 그럽니다. 어제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몇 십 년 만에 보는 사람이 앞에 지나가도 소리를 안 지른 다니까요. 지나가게 놔두고 다음에 만나겠지 그러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 있으면 나와보세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저를 먼저 세우셨다면, 제가 여러분보다 약하기 때문에 먼저 세우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하신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어떤 부분을 보게 하셨다면 그 이유는 저 자신만을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여러분 전체에게 그것이 나누어지도록, 여러분들이 정확하게 그 하나님 은혜 가운데 세워지도록, 그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이 이야기를 하라고 그랬을까? 예수님이 제일 먼저 모델입니다. 우리 모델은 여주봉 목사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모델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린 대로 저 자신도 이번에 이러한 것을 더 보면서 예수님의 삶을 배우기 원합니다.
여태까지는 사실 없어도 될 이야기인데 괜히 하나님께서 하라고 그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잘못 들었는지는 몰라도 그러니까 여러분 가로로 넣고 넘어 가세요. 지금부터 설교 다시 들어갑니다. 테이프를 편집해 버렸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모델입니다. 예수님이 무엇보다 무엇으로 오셨냐 면 섬기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섬기는 종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섬기는 종으로 오셨다면 저와 여러분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섬기는 종 위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부어질 것입니다. 아까 그 모든 약속들은 제가 섬기는 자가 되어야 됩니다. ‘섬기는 자가’ 그리고 나름대로 그렇게 해오려고 노력했습니다. 노력하고 그렇게 따라왔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물론 더 섬기는 자가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직분이 종이었습니다. 여러분 선지자란 말은 종이라는 말입니다. 내 종 선지자에게 나가 하는 일을 먼저 알리지 않고는, 선지자가 종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능력을 부으실 것입니다. 여기도 보시면 이렇게 날카로운 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예리하게 쪼갤 수 있도록 심령과 골수를, 그 중심에 생각까지 들어 나게 하시도록 하나님의 눈 앞에 화면처럼 선명하게 보이게 하도록 예리한 말씀을 주시고, 더 나아가서 마광한 살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 시점에서 주시는 말씀을 주셔서 원수의 염통, 심장을 꽤뚫게 하시는 말씀도 앞으로 더욱 주실텐데 누구에게 주실거냐 면 종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여기보시면 “네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여기에 종은 누구보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종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침노하는 무리가 종으로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종으로 섬기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을 보아도 종으로 오셨는데, 그 종 위에 능력이 부어집니다. 우선 두 구절만 보십시오. 마태복음 3장 16절-17절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예수님, 이것이 어디와 어디의 말씀이 합해진 것이라고요. 시편 2편에 왕으로 오실 메시야와 이사야 42장 1절에 종으로 오실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 합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한 분이십니다. 여러분 또한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될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가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종이라는 이야기고, 거기에 권세가 함께 할 것을 말합니다. 아직 이해가 안되시는 모양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은 오실 자가 종으로 오신 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사야 42장 1절, 49장도 마찬가지고, “나의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내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성령을 부으시는데 종에게 부으신다니까요. 섬기는 종, 그 종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그 종이, 아까 예수님에 대해서 뭐라고요. 왕으로 오실 메시야에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왕, 예수님이 홀을 가지고 계십니다. 왕권, 권세, 그런데 그 권세를 누구에게 주십니까?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주시는데, 종으로 섬기는 자에게 주십니다. 이 두 개가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합니다. 예수님의 침례 때부터 성령이 임하시는데, 누구에게 임하시냐 면 종에게 임합니다. 아까 종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그랬고, 종에게 그러한 말씀의 권세와 마광한 화살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주신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침례 시에 보더라도 그 종으로 오신 분에게, 또한 만왕의 왕으로 철장 권세를 가지고 오신 왕이시듯이, 예수님 안에 우리가 종으로 섬기게 될 때, 하나님의 권세가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침노하는 무리는 종으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보이시지요.
마태복음 12장 18절,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예수님에 관한 예언입니다. “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보세요. 종에게, 거기에 보면 이사야서 42장 1절을 염두 해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종, 예수님을 종이라고 부르고 있고, 그를 하나님이 마음에서부터 기뻐하신다고 말하고 있고, 사랑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고, 그 위에 성령을 부어주실 거라 그 말입니다. 종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종으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 말세에 세우시는 침노하는 무리입니다. 여러분 항상 과거에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부흥 때마다 쓰임 받은 침노하는 무리를 보세요. 그들 중에 종으로 섬기지 않은 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것 아십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말세지말에는 더 그럽니다. 예수님이 모델입니다. 그리고 침노하는 무리는 다른 자들이 아니고 그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나타난 특징이 그대로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섬기는 종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질그릇에 불과함을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에게 있는 권세는 주님이 주신 권세입니다. 그런데 섬기는 종들에게 주님의 권세가 함께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왕의 권세가, 홀의 권세가 함께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기도 받을 때, 이길수 목사님이나 다른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말씀을 주신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제 손에 홀을 들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네 것이 아니라고, 네게 속한 것이 아니라고, 제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이나 똑같이 우리는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앞에 진토임을 기억하세요. 그것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섬기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그 권세로 뒷받침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아멘, 예수님은 참된 종이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 우리 잘 아는 내용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섬기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권세가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폴 케인 목사님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들을 예언적인 백성이라고 부르는데, 제가 부르는 침노하는 무리와 똑같은 의미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참된 섬기는 종인데, 섬기는 종들의 특징이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그런데 이것만이 아닌데, 그런데 실질적인 부분 같습니다. 그분이 말하는 특징들의 몇 가지가 devoid of pride, devoid of greed, devoid of wanting to go ahead, devoid of wanting to appear awesome, 무슨 말이냐 면, pride 교만이 없는, 참된 종의 모습이 교만이 없는, 그 다음은 greed 탐심이 없는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너희 가운데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 나는 복음만 전할뿐만 아니라 내 목숨도 너희를 위해 내어주기를 기뻐했다. wanting to go ahead 앞서기를 원하는 것이 없는,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종의 자세로서는, 이것이 안 다루어지면, 스스로 세우고자 하는 개인적인 야망이 안 다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비교의식, 앞서고자하는 것, 내세우고자하는 것, 다른 사람보다 앞에 가고자하는 것, 강단에 서고자하는 것,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가 되고자하는 것, 앞에서는 것, 이것이 개인적인 야망인데, 이것이 안 다루어지면 야고보서 2장에 말한 것처럼 그러한 지혜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요 세상적이라고 말하면서 섬기는 참된 종으로서 앞서기를 원하는 것이 내려진, 네 번째 특징이 뭐냐 면, appear awesome 사람들 앞에 훌륭하게 보이기를 원하는 것이 없는, 이 내용들이 단순한 내용 같지만 진정으로 섬기는 자의 자세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사환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저에게 먼저주신 은혜들을 이렇게 나눠지게 하십니다. 제가 나눠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고 해 가십니다. 그래서 그림을 보여줄 때에도, 오늘도 기도 받는데 그런 내용이 있는데, 앞서가다 보니까 공격도 많을 거라고, 알아요. 그럽니다. 그림으로 보여 주실 때도 여러 차례 말씀드렸는데 어떤 때는 가시밭을 지나서 가시가 다 찔립니다. 그런데 그 길을 지나면서 뒤에 길이 납니다. 그러니까 뒤에 오시는 분들은 들 찔립니다. 앞서 가면 그렇게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이해합니다. 어떤 때는 눈밭에 눈이 깔려 있는데 제가 맨발을 벗었습니다. 하나님 전 못 갑니다. 막 징징거리면서 한 발 밟아요. 그러면 눈이 녹고, 또 하나님 저는 못 가요 막 울면서 밟아요. 그러면 또 녹습니다. 그리고 산에 올라가 뒤를 보니까 길이 쫙 나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올 수 있도록, 그런데 사실 지금은 들 그럽니다만 제가 주님을 따라갈 때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다음 발자국을 몰라요. 우리가 사역자 모임에서 잠깐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연합만 하더라도 어떻게 하는 것이 무언지 잘 모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조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철저하게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따라와야 되고, 제가 개인적으로 친하게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잘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설명해서 될 것도 아니고, 왜냐하면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너무 많습니다. 그럼 저는 오해받을 것 그대로 각오하고 아무소리 안 합니다. 왜냐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득해서 될 것이 아니거든요. 그럼 몰라요. 솔직히 모릅니다 다음 발자국을,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뜻만은 알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징징거리며 발을 내디디면 기뻐하잖아요. 무슨 이야기냐 면 그렇게 하나님께서 오늘까지 오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은혜가 나눠지게 하신 것 같습니다. 그 중에 하나 저는 보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세워 가신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예를 들면 우리 김영식 목사님 여기계신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실례될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이 들으라고 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지를 여러분이 보기 원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뭐하고 계신지 여러분이 알기 원합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목사님이 이렇게 목회 해 오시면서 교회가 잘 성장하고 이렇게 같은 또래의 목사님 들 보다는 그야말로 선두주자라고 할 만큼 교회 건물도 짓고 이렇게 교회도 부흥하고 잘 나갔습니다. 그러다 선교회 오시면서 어떤 메시지의 방향이나 십자가의 복음이나 우리 신앙의 어떤 사역이나 이런 부분에서 많은 도전을 받으시고, 그래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되는데,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되는데, 또 성도들이 전 존재로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되는데, 성도들 삶이 변해야 되는데, 왜냐 면 성도들 삶이 안 변해서 고민해 오셨거든요. 그러면서 접목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많은 분이 교회를 떠났잖아요.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기준 아래 세워지기를 원해서, 그래야 성령이 임하시고, 그래야 부흥이 오고, 그래야 성도들 삶이 변하고, 그래야 하나님 기뻐하는 교회이니까 그 많은 어려움과 아픔 가운데서도 결단과 각오를 가지고 주님 따라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것보다 보기에는 실제로 훨씬 하나님을 잘 따라가시고 또 많은 대가와 아픔을 겪으면서도 주님 기뻐하시는 길만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필리핀 갔다 온 뒤로 몸이 좀 아프셨습니다. 그런데 아픈 것도 유익이라고, 아파서 이렇게 누워있는데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시냐 면, 네 젊음과 네 전 재산을 털어서 개척한 그 교회 나한테 양도해, 그러셨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개척하려면 우리의 젊음과 우리의 모든 재산을 다 털어서 개척하는 것 맞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목사님도 그전까지 하나님의 교회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아까 말씀드린 대로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그 아픔 가운데서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양도하라고 그러실 때는 이 교회가 주님의 교회이니까 마음 중심에서부터 하나님께 양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뭐라고 말씀하시냐 면, 너는 사환으로서 내 옆에 서서 내가 시키는 일만 해, 지금 하나님이 뭐하고 계신 줄 아십니까?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침노하는 무리는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단순한 하나의 그 뭐가 아니고 지금 하나님의 하고 계신 일을 보기 바랍니다.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고 계십니다. 보이십니까? 침노하는 무리는 전적으로 섬기는 자들인데, 교만이 비어진 devoid란 말은 다 비어진, 탐심이 비어진, 앞서고자 하는 원하는 것이 비어진, 사람들 앞에 잘 보이고자 하는 것이 비어진, 섬김 그 자체가 기쁨인 모세처럼 사환으로서, 모세가 사환이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늘 염두 해 두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새물결 선교회에서 회장으로 리더로 인도해가니까. 여러분 생각하기에 제 생각대로 많이 하는 것 같으십니까. 그러지 않겠지요. 저 개인적으로도 제 마음 속에는 늘 두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면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 정복을 앞두고 거기에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라는 말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분은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다른 천사하고 다릅니다. 그래서 성육신하기 전에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합니다. 그분이 오셨습니다. 여호수아가 말합니다. 당신이 우리편입니까? 적의 편입니까? 그러니까 답변을 보면 둘 다 아니라 그 말입니다. 아니 원수의 편이 아닌 것은 금방 알겠어요. 여호와의 사자가 오신 것이니까.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수아에게 뭐라고 그러냐 면, 나는 네 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냐 면,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여기에 왔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경우에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삼습니다. 목회자는 성도들과 마찰이 생기면 하나님이 자기편인 것처럼 생각하고, 성도들은 목회자하고 갈등이 생기면 하나님이 자기들 편인 냥 자기들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서로간에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자기편인 냥 자기편 삼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전쟁을 주관하러오신 분입니다. 그랬더니 여호수아가 납작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 하냐 면 종이 듣사오니 말씀하옵소서. 저는 개인적으로 늘 그 생각을 합니다. 선교회요, 주님이 주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리더로 세우셨을지 몰라도 저는 제 임의로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제 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 편이 아니라니까요. 예수님은 주관하시는 분이지 제 편이 아닙니다. 저는 여호수아처럼 그 앞에 납작 엎드리기 원합니다. 주님 이것은 주님의 사역입니다. 종이 듣사오니 말씀하세요. 이것이 사환입니다. 하나님은 사환들을 세우십니다. 하나님이 그 은혜를 제에게 주셨다면 하나님께서 세워 가시는 종들에게 그 은혜를 붙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 그 은혜가 있기를 사모하셔야 될 것입니다. 침노하는 무리로 세워지려면, 왜요? 그렇게 섬기는 자가 되지 않고는 침노하는 자의 자리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섬김에 있어서도 우리는 아까 말 한대로 예수님이 우리의 모델입니다. 제가 언뜻 언급한 예수님의 삶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섬김에 있어서도, 그래서 몇 가지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세우시는, 첫 번째가 뭐냐 면, 섬김은 예수님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나옵니다. 절대로 섬김이 먼저가 아닙니다. 우리 선교회 가운데도 어떤 분들은 그런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주님과의 친밀함은 소홀히 하고 섬기는데 앞장섭니다. 아니요 내려놓으세요. 여러분,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섬김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셨던 섬김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종으로 부르셨다고 하는데, 사환으로 부르셨다고 하는데 그 의미가 아닙니다. 사환으로 부르셨고, 종으로 부르셨는데 그 의미는 예수님의 삶을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는데, 성경이 말하는 종 된 삶은 아버지와의 친밀함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사랑하기에 예수님은 진실로 자신의 모든 것으로 섬기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것이 자기의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섬김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예를 들면 새물결 선교회 사역자나 혹은 여러분들 가운데, 포도나무교회 성도들 가운데, 다른 분들이야 저한테 이야기할 것은 아니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 목사님에게 이야기하시고, 여러분 가운데 섬김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방해하는 분 있으면 저한테 이야기하세요. 섬김을 당분간은 면제해 드릴테니까. 반드시 이야기하세요. 왜냐하면 이 섬김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섬기는 것이 너무나 소중하되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나와야합니다. 절대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먼저 갈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거 아십니까? 제가 과거 두 기간 동안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어떤 부분을 집중적으로 조명해오셨냐 면, 하나님이 저의 아버지 되심을 보이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화요모임에 하려다 자꾸 넘어가고 그래서 제가 파일을 따로 만들어서 제 테이블에 딱 얹어놨습니다. 그 부분을 늘 생각하면서 더 연구하려고, 더 하나님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부분들도 더 해야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렇게 해야 되는데 자꾸 넘어가니까 하나님이 반복적으로 하는 그것이 뭐냐 면 하나님이 저의 아버지 되심을 보이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말씀드린 대로 저한테만 은혜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지금 우리를 어디로 하나님께서 인도하고 계신가하면 침노하는 무리의 자리로 인도하고 계시는데, 거기에 포함되는 내용의 중요한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저에게 먼저 비춰주신 이유는, 그리로 들어오도록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모두에게 나눠주시기 위해서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전인데, 제가 지난번 집회에서 말씀드린 대로 경배와 찬양 중에 ‘예수의 이름은 참으로 놀랍네’ 그 찬양, ‘영원히 계시는 아버지’ 그렇게 끝납니다. 그렇게 그 찬양을 할 때, 금요일 날 철야기도 시간 인도하면서, 그래서 찬양이 참 중요합니다. 찬양시간이 마음을 다해서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을 경배하는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저의 아버지 되심을 선명히 깨닫게 하십니다. 저의 육신적인 아버지도 훌륭한 아버지였지만, 그러나 그 생각이 이것을 방해하더라고요. 그분은 저의 육신의 아버지와는 다릅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훌륭한 분이셨지만, 지금은 돌아가신지 오래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점도 있었고 나약함도 있었지만,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강하고 거룩한 분인데, 영원히 사랑하시고, 진실하신, 오류도 없으시되 진실로 긍휼하신 그분이 저의 아버지 되심, 육신적인 아버지 생각이 자꾸 방해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그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비춰주시는 대로 그것을 붙잡으려고 이렇게, 제가 그래서 그 다음 날 자리에서 일어나서 앉아서 아버지 그렇게 한마디 불렀는데 하나님의 임재가 저를 쫙 감싸더라고요. 왜요.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오는 것은 우리가 40일 금식기도 했기 때문에 오는 것도 아니고, 성경에 보면 우리가 뼈가 빠지게 섬겼기 때문에 오신 것도 아니고, 그 대가로,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임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이유도 우리가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성경 안 보셨어요.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그러면서 어제도 하나님 앞에 설 때는 기름부음 벗어놓고 서야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어떤 분들은 저를 대단한 사람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설교하다 보면 하나님 말씀이 놀라웁게 역사하시고, 성령이 역사하시니까. 그런데 그것은 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를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그것 때문에 여러분들이 저를 잘봐 주시는 것은 좋은데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그 기름부음 벗어놓고 서야 합니다. 왜냐 면 그것은 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니까 그것 하나님께 벗어놓고 서니까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사람들 섬길 때, 얼마나 사랑으로 섬겼는지, 얼마나 중심에서부터 그들을 섬겼는지 내놓을 것이 있어야지요. 너무너무 애통하는 마음이 있더라고요.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때 그러시는데 그것을 쫙 비추시면서 너는 내 아들이야! 뭐예요.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사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자녀 삼으셨기에 그 공로 때문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발판뿐입니다. 여러분의 직책도 아니고, 여러분의 기름부음도 아니고, 여러분의 헌신도 아닙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시냐 면, 바로 그 다음 순간에 ‘열방을 구하라 내 아들아 그것을 내가 네게 주리라’ 기도응답도 아들이기 때문에 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 되심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와의 친밀함 가운데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넌 내꺼야’ 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아버지 앞에 나아와 아버지의 의중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분만으로 만족하며, 그분만이 기쁨인, 그 아버지 하나님이면 족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그 무엇도, 아버지 계신 곳에 같이 있는 그 자체로만 충분한, 아버지의 열망이 나의 열망이 되면 충분한, 그것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이고 그리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버지 되심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권세도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자녀에게 권세가 있고, 유업도, 기도응답도, 다 거기 있습니다. 여러분의 노력으로 그것을 벌어드리려고 생각하면 율법주의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세요. 여러분의 노력으로 벌어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친밀함 가운데 나오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저에게 아버지이신 것을 계시하신 한 달쯤 후에 무엇을 계시하신 줄 아십니까. 몇 년 됐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지요. 그것이 뭐였냐 면, 실촌 수양관에서 제 2차 전국집회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숙소에 올라가 설교하려고 준비하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어떤 부분을 보이시냐 면, 그때는 영어로 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my Father business is my business 그 말은 우리말로 그대로 하면 내 아버지의 사업이 내 사업이다. 그러면서 탁 떠오르냐 면 여러분 구멍가게 할 때에도 월급을 받고 일하는 점원과 월급은 전혀 안 받을지 몰라도 자기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장의 아들은 일하는 자세가 다른 것 아십니까. 돈을 받고 일하는 종은 시간을 때우면 됩니다. 그리고 맡겨진 것 잘하면 됩니다. 그런데 자기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들은 돈을 하나도 안 받을지 모르지만 그 아버지의 일이 자기 일이기 때문에 합니다. 그 말은 그렇게 하면 앞으로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에 한다는 그 이야기는 아닙니다. 자기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이것이 아버지의 일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일은 곧 내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일하는 사람은 돈을 주건 안 주건, 알아주건 안 알아주건 상관없이 그는 월급 받고 일하는 사람과는 전혀 다르게 일할 것입니다. 그것을 비춰주시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뭐라고 그러시냐 면, 그때는 목회자들만 대상으로 했습니다.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길로 돌아서서 하나님 앞에서 회복되고, 교회가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의 일이기 때문에 이것이 내 일입니다. 내가 그것 한다고 해서 누가 돈주는 사람도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제가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그것은 나의 아버지의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곧 내 일입니다. 이것이 섬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섬김은 이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와의 친밀함 가운데 계셨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요한복음에 보면 아버지의 일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너희가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아버지의 일을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이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심을 너희가 알리라” 왜? 이것이 아버지의 일인데,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졌냐 면, 금방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전재되어서 그 가운데서 아버지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곧 자기의 일이라서 그러게 섬김으로 나간 것입니다. 이렇게 섬기게 될 때, 참된 종이 가질 수 있는 것처럼, pride가 비어지고, 개인적인 야망이 비어지고, 사람들 앞에 잘 보이고자 하는 것이 비어지고, 앞서고자 하는 것이 비어지고, 탐심이 비어진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길 수 있는, 아까 에베소서 6장 7절, 그 말씀 ‘사람에게 하듯 하지말고 단 마음으로, 온 마음으로 주께 하듯 섬기는 그 삶이 그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선교회 연합, 이 토대 위에서 되어야합니다. 그 연합만이 진정으로 튼튼한 연합입니다. 그 외에는 다른 어떠한 연합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외에 연합은 제도를 통한 연합일 것이요. 인간적인 끈을 통한 연합일 것이요. 자기의 자리를 위한 연합일 것이요. 자기의 사역을 위한 연합일 것이요. 사람들 앞에 잘 보이기 위한 것이고, 끈일 달린 연합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연합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연합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심, 아버지의 일이 내 일이기에 성경에서 말하는 그런 뜻들이 되어진, 아까 말씀드린 것들이 되어진, 아버지 일이 내 일이기에 기쁨으로 동참하는, 어디에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없이 아버지 일이 진행되면 되는 그 토대 위에서만 진정한 연합이 되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무리를 오늘날 세우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그 일에 동참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회자이건 성도이건 그러나 그 토대 위에서 그 가치관에서 세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첫째가 아버지와의 친밀함에서 섬김이 나와야 되는 것이고, 또 하나 예수님의 삶에서 볼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은, 제 개인적인 간증보다 아까 그 이야기를 했어야만 한 것 같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인도해 가시는 것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저는 왜 그것을 해야 되는지 몰랐는데, 시간은 조금 지났지만,
또 하나는 이 섬기는 삶과 관련해서 하나님이 세우시는 침노하는 무리는 그 특징이 금식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금식하는 삶이란 말은 이렇게 금식을 자주 밥먹듯이 하는 그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의 절제하는 삶을 말합니다. 지금 여러분 잘 이해가 안됩니다. 제가 그럼 성경을 보겠습니다. 이사야서 58장 5절, 참된 금식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어찌 나의 금식하는 금식이 되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제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 될 날이라 하겠느냐” 이 말은 뭐냐 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년에 한 차례씩 왕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금식을 하는데, 베옷을 입고 제 가운데 앉아 하루종일 고개를 숙이고 금식을 하는데, 하나님이 왜 응답 안 해주십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전혀 변하지 않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뭐냐 면 사람은 변하지 않고 그저 날짜만 정해서 제 가운데 고개만 숙이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금식이냐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냐 그것이 하나님께 열납 될 금식이냐?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금식은 외부적인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 있다. 그러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에게 주실 하나님의 약속, 복을 이야기합니다. 자 그러면서 6절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은 이렇게 인용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금식을 하면 기뻐하시고, 그렇게 하면 우리 가운데 흉악의 결박이 풀어진다고,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닐지 모르지만 이 구절은 그 구절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그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것을 풀어주는 것이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아까 말 한 대로 우리의 삶이 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다른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고, 다른 사람과 싸우고 다투고 이렇게 하면서 금식일 만 정해서 기도한다고 그것이 금식이냐. 그것이 아니고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것을 풀어주는 것이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참된 금식에 대하여 말하면서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제 이해가 되시지요? 그러면서 이러한 자들에게 어떤 복이 임할 것을 말합니까?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하나님이 부흥으로 임하시는 것과 똑같은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금식하는 삶이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 계속 보세요. 역시 금식에 대해서 말하면서 “ 만일 너희 중에서 멍에와(다른 사람 멍에 메는 것)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여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똑같은 약속입니다. 아까 침노하는 자에게 주신, “너는 역대에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보세요. 똑같은 약속입니다. 침노하는 자에게 주신 약속, 그럼 침노하는 자의 또 하나의 특징이 뭐예요? 제가 표현하기를 금식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냐 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여 내 목숨을 버리노라. 이것이 섬김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같이 다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리즈 하월즈 책에 보면, 리즈 하월즈는 웨일즈에 하나님이 부흥으로 임했을 때, 놀라웁게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거시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께 순종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어떤 때는 뭐냐 면, 그 당시에 남자들이 모자를 쓰지 않으면 아주 모욕적으로 받아드려 졌답니다. 수염도 안 깍고, 머리도 안 깍고, 모자를 안 쓰고, 그런 상태로 자기는 너무너무 죽겠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를 들면 런던에서 국회의원, 이런 장관급들이 초청하는 것인데, 그들 앞에 나갈 때 그렇게 가라는 것입니다. 집에서 부모님들도 이해를 못해서 그러는데, 장관들 앞에, 상류 사회에 가는데, 그렇게 훈련시키고 그랬는데, 그분 하나님이 다루신 것을 보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길거리에 지내는 사람을 위해서 숙소를 제공하고 이렇게 하라고, 그러다가 나중에 어디까지 같냐 면, 그 사람들을 집에 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몽땅 떨어서 섬기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자기 집에 들이라고 하니까. 식구들이 부모님이나 여동생이나 난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는데, 그러니까 아버지만 하더라도 다 예수 믿는 분들인데, 이게 도대체 뭐냐고, 이게 거지 소굴이냐고, 왜 집에까지 이래야 되느냐고, 그런데 그들이 와서 조심이나 하나요. 딱 걸치고 앉아 가지고 담배는 마음대로 필 것이고, 그들이 다 앉아버려서 식구들이 와서도 앉을 자리가 없어요. 비워주기를 하나, 자리를 비켜주기를 하나 미안해하지도 않아요. 그런데 하루는 아버지가 화를 내더니 돌아서가지고, 그래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렇게 해야지 그리고 식구들이 받아드렸는데, 그 순간부터 손님들이 끊어지더랍니다. 하나님이 훈련시키신 겁니다.
제 이야기는 무슨 말이냐 면, 금식하는 삶을 이렇게 표현하면 됩니다. 침노하는 무리일수록 세상의 특권을 포기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특권을 그대로 누리면서 침노하는 무리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 특권을 누리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세상에 특권을 누리는 것이 죄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당연히 아닙니다. 세상에 특권을 누리니까 제가 여러분을 정죄 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당연히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부에도 처할 줄도 알았고, 가난에 처할 줄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 이야기는 뭐냐 면 침노하는 무리로 세우는 자들은 세상의 특권을 기꺼이 포기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무리 중에서 리더가 될수록 더욱 더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서 권세가 클수록 세상에 특권은 더 적은 것을 아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세우신 일군 주에 첫 번째는 사도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 다음에 선지자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도 사도의 권위아래 들어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 중에 제일 높은 것이 사도입니다. 예수님 아래, 그런데 고리도전서 4장을 보면 알지만, 사도들은 하나님이 형장에 끌려가는 자들의 그 말미에 둔 자들과 같다고 그랬습니다. 만물의 찢기와 같다고 그랬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아세요. 하나님의 나라에서 권세가 클수록 세상의 특권이 작습니다. 그것이 기꺼이 포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루십니다.
하루는 예수님에게 어떤 사람이 제자가 되겠다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냐 면, 선생님, 선생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내가 선생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랬어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신 줄 아세요. 번지 수 잘못 찾았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거쳐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했어요. 종으로 오신 그분이 머리 둘 곳이 없었어요. 이 이야기가 뭐냐 면, 너희가 나를 통해서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고 한다면 너 번지 수 잘못 찾았다는 그 말입니다. 예수님은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고 계셨다고 그랬잖아요.
아까 사도들의 이야기도 말만 해서는 안되겠어요. 읽어야 겠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9절부터 보겠습니다. “내가 생각건데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이 말은 무슨 말이냐 면, 우리는 약한데 너희는 지혜롭다 그 말은 너희가 지혜롭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중에 보면 우리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그들이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보세요.’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기같이 되었도다”(고전4:9-13)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침노하는 무리,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그 권세가 클수록 세상의 특권을 포기한 자들입니다. 여러분 요한 웨슬러 아세요? 아까 제가 이길수 목사님에게 물어봤습니다. 요한 웨슬러가 50년 동안 사역했습니다. 부흥이 임한 뒤에, 아주 오래 장수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그의 남은 재산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포크+나이프하고, 돈 몇 푼 외에는 그야말로 재산이 없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면,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면서 침노하는 무리로 살면서 동시에 세상에서 얻을 것 다 얻고, 세상에서 구할 것 다 구하고,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갖는 것 다 가지려면 절대로 그 길은 못 가게 되어있습니다. 역대 기독교 역사에도 아무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세상을 포기하기 싫으면 못 가게 되어있습니다. 이 말은 여러분이 다 가난해져야 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부하건 가난하건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세상의 특권을 포기한 자들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리더가 될수록 더 그럽니다. 하나님 안에서 권세를 여러분에게 더 부어질수록 더 그럽니다. 그 모든 것의 모델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개인적으로 다루시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 약속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어떤 때는 갈등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면, 하나님께서 저에게 세상에서 재산을 가지지 말라고 그래요. 옛날에는 어차피 개척교회 때 가난하고 제 개인적으로 재산이 없으니까 가질 것도 없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안됐어요. 그런데 지금도 저를 다루시면서 드러나는 것이 뭔지 이세요. 지금은 교회에서 월급을 제가 생활할 만큼 받습니다. 물론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월급도 일부러 딱 정했어요. 체계를 정해서, 그러면서 어떤 때는 강의 비도 나오고 돈이 많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도 남기기 말게 하십니다. 그것 때문에 제 아내하고 많이 갈등이 있지만, 하나님이 저를 부르심을 제가 압니다. 그런대도 잘 안됩니다. 그렇다고 돈을 쌓고자하는 욕심은 없는데 괜히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참 희안해, 그러니까 사단이 지금도 설교하다 보니까 그래요 내가 집착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루어 가십니다.
저는 앞서간 믿음의 선배들의 삶을 보면 제 자신의 삶은 아주 부끄럽습니다. 진짜 부끄러워요. 이것은 제가 그냥 한 이야기가 아니고 진짜 부끄러워요. 리즈 하월즈의 책을 읽다가 얼마나 부끄러운지, 낮이 뜨거워서 못 보겠더라 고요. 제 자신이 부끄러워서, 그의 살았던 삶이 그렇게 참 하나님과 뭐 했는데, 전 오늘날 안일한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호의호신(好衣好食)하는 배부른, 배에 기름 낀, 너무나 부끄럽더라고요. 물론 우리가 일부러 금욕주의적인 삶을 산다고 그러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이야기를 잘 들으세요. 그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다 재산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는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잘살면 문제가 있다.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해하시지요. 그렇지요. 그러기 때문에 이제는 고기도 안 먹고, 일주일에 두끼만 먹어야 되고, 옷도 다 떨어진 것 입고 다녀야 되고, 그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침노하는 자의 무리의 삶의 특징은 금식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그리로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세상의 특권을 기꺼이 포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거기에 그만큼 권세가 뒷받침 할 것입니다.
여러분 제키 플린저 보시잖아요. 제키 플린저, 결혼도 안한 여인이 홍콩에 그야말로 마약, 갱, 매춘, 거기는 경찰들도 들어가지 않는 거기에 들어가서 젊음을 다 바치잖아요. 창녀에게서 낳아서 버려진 아이들, 20년, 30년 마약 중독으로 길거리에 버려진 사람들, 은퇴한 창녀들, 도박. 매춘, 폭력을 일삼는 갱단들, 이러한 사람들을 상대로 처녀가, 결혼도 안하고, 그야말로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경찰들도 못 가는 곳에 가서 자기 삶을 전부 바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고 그러면 그분은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당신은 어떻게 안 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이 있으라고 한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우리 김정길 목사님이 직접 갔다 오셨잖아요.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분에게 아-참 큰 희생한다고, 그분 몇 년 전에 한국에 왔었는데 그분이 한 이야기가 뭔지 아세요. it privilege 그것은 특권이라고, 이것이 특권입니다.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거니와’ 그 말씀 그대로 해당되는 것입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이것이 금식하는 삶이고, 이것이 침노하는 무리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어떠한 의미 감에서 죄책감에서 나온 거라면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일을 통해서, 헌신을 통해서 나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그분이 나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나가는 것입니다. 그 친밀함 가운데,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동참한지 아세요. 복음을 위해서 주의 나라를 위해서 동참한 것입니다. it privilege 그것은 특권이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침노하는 무리는 세상의 특권을 기꺼이 포기한 자들입니다. 그라고 권세가 더 클수록, 하나님의 리더의 자리에 세울수록, 그것은 더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특권입니다. 그것이 부담이 아니고, 그것이 짐이 아닌, 그것이 기쁨이며, 그것이 열망이며, 그것이 특권입니다. 특권이 되게 하십니다. 주님이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삶을 통해 하나님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하십니다.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거니와 죽으면 수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침노하는 무리의 삶의 본보기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이 시대마다 그러한 무리들을 세워오셨습니다.
또 한지 더 있습니다. 그냥 마치려고 했는데,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섬기되, 하나님의 능력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능력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섬김 자체가 친밀함에서 나오고, 그 자체가 특권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거듭 말씀하시기를 나는 내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잃은 영혼을 구원하시고, 그 일을 다 이루어 가시는 것도 다 아버지의 일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버지의 일, 아버지의 일, 아버지의 일, 그럼 자신은 뭐만 했느냐? 아버지를 사랑하며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동참할 때, 아버지가 자신을 통해서 아버지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동역자의 삶’, 바로 오늘날 침노하는 무리의 삶도, 때로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세상의 특권을 기꺼이 포기하며,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렇게 섬기는 삶을 살 때,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짐, 의무감에서 나온, 그야말로 하긴 해야 되겠는데 죄책감에 늘 쌓여있는 그러한 그릇된 섬김이 아닌, 그것이 전혀 아닌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분이 나의 아버지 되시기에 나의 모든 것으로 사랑하며, 그것이 아버지의 일이 내 business이기에 기쁨으로 동참할 뿐만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동참할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그 섬김의 삶, 금식하는 삶, 이것이 침노하는 무리의 특징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무리를 오늘날 세우고 계십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그러한 무리 가운데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이미 초청을 안 받으셨다면, 이번 집회를 통해서 이미 그렇게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 삶은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하나님 안에서는 참으로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기를 사람들 눈에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나는 항상 기뻐하는 자요. 사람들 눈에 보기에는 내가 없는 자 같으나 나는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요. 나는 모든 것을 주안에서 가진 자라 이렇게 말한 진실로 복된 삶입니다.
여러분 특별히 우리 나라에도 하나님께서 부흥이 예비 되고 있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이번 집회를 통해서 징조를 보여주셨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고, 그리고 이번 여름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섬기면서 또한 그런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처럼 그렇게 섬김도 그러한 섬김으로 더 나아가는 십자가 복음에서 중보하는 삶을 사는 섬기는 삶, 금식하는 삶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부어져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따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일에 동참하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 하나님의 부흥이, 또한 이 세계적으로 임할 때, 그 자리에 함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여주봉목사
이사야서 49장입니다. 1절-4절까지 읽겠습니다.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나를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하였으며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숨기시고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우리가 이번 주간 동안에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사야 하반부에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부터 회복될 것을 예언하고 있고, 그 가운데 고난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나님 백성을 구속하실 것이 예언되어 있고, 그 속에 이제 하나님의 교회회복과 하나님의 부흥에 관한 예언이 들어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교회회복과 하나님의 부흥에 관한 예언은 예수님 오실 때부터가 말세고, 다시 오실 때까지가 말세인데 그 교회사의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그 부흥의 시대마다 이루셨던 일들이고, 특별히 그 역사는 말세지말에 어느 때보다도 강한 하나님의 교회회복과 하나님의 부흥이 이 땅에 오게 될 것인데, 그것에 대한 예언이 들어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이사야서 59장만하더라도 말세지말을 가리킵니다. 동쪽과 서쪽, 온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일이 있을텐데 이는 하나님이 급히 흐르는 하수처럼, 마치 해일과 같이 선 물결처럼, 하나님의 호흡, 성령이 몰아치시는 선 물결처럼, 임하실 것이기 때문이라 이렇게 말하고 있고, 그것을 로마서 11장에 인용하면서 바로 말세지말에 그러한 일이 일어남으로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규모 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이 말세지말에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이사야 하반부에 보면 하나님의 교회회복과 하나님의 부흥을 말하면서 특별히 교회시대에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말세지말에는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이러한 하나님의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말세지말인 이 때에 살고 있고, 하나님의 부흥의 조짐들이, 어느 때보다도 강한 부흥의 전조들이 여기저기 일어나고 있으며, 이번 집회만 하더라도 우리 기도할 때, 하나님의 부흥의 전조가 보이게 될 거라고, 그랬는데, 지금 마지막 시간입니다 만은 여러분 계속 참석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번 집회 기간 동안에 바로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실 것을 여러분 눈으로 보시지 않았습니까. 안 보이셨나요. 하나님이 하신 일들, 부흥의 전조라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일들, 이러한 일들이 이제 더 대규모적으로 지금보다 더 몇 십 배 강력하게 나타나면 그것이 하나님의 부흥입니다. 사실 이번 기간동안에도 하나님이 하신 이이 얼마나 놀랐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말세지말에 어느 때보다 강한 하나님의 부흥의 전조들이 전 세계적으로 보이고 있고, 우리나라에도 꾸준히 그러한 이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을 위해서 이제 어떻게 하나님께 쓰임 받아야 될 것인가 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사야 후반부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에 대해서 쓰임 받은 종이 세 종류가 나오는데, 첫째는 고레스라는 왕은 안 믿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 쓰임 받았고, 두 번째는 고난의 종인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백성을 구속하시는 일을 이루셨고, 그 다음에 바로 그 예수님 안에서 침노하는 무리를 하나님이 세우신다.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흥과 교회회복을 과거 교회사에서 이루어 오셨고, 말세지말에 있을 이 부흥에서도 바로 이러한 무리들을 하나님이 세우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다 하는 것을 지금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십자가를 옆으로 뉘어놓은 같은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의 종이라고 나오는데, 예수님이 종이라고 나오고, 침노하는 무리가 나온다고 말하면서 구약의 이스라엘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이스라엘이 완성되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불충한 종들이었다면, 예수님의 하나님의 신실하신 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이 모든 이스라엘의 완성이었다면, 이제 그 예수님 안에서 거하는 교회, 하나님 백성, 이 침노하는 무리들이 세워져서 하나님이 일을 이루신다 하는 것을 이렇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를 예수님의 사역을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시는 사역 관점에서 어떻게 세우셨는가, 정확하게 십자가에 복음과 성령의 사역을 감당하심으로서 세우셨다. 우리 가운데 사실 하나하나를 살펴볼 때에 여러분들이 아마보시면서 혹시 느끼셨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실재적으로 이 일들을 오늘까지 우리가운데 해 오시고 계십니다. 하나하나 모든 부분에 있어서,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그동안 십자가의 복음에 기초해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위해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전하고 우리가 주님을 따라 순종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그러한 일들을 행해오신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에 세워져야 되고, 두 번째, 이 침노하는 무리는 중보기도 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엘리야의 영으로 올, 하나님이 주의 길을 예비할 자들을 하나님이 항상 보내시는데, 그 엘리야의 영에 중요한 한 부분은 중보기도라 영이라 하는 부분을 어제 저녁에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어떤 부분을 살펴보기 원하느냐 면, 마지막 시간으로 섬기는, 이 침노하는 무리의 특징은 섬기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침노하는 무리의 첫 번째 특징은 십자가의 복음에 선 자들이고, 두 번째는 중보기도하는 자들이고, 세 번째는 섬기는 자들이고, 네 번째는 금식하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오늘은 그 두 가지 남은 부분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섬김, 이것이 침노하는 무리의 또 하나의 특징입니다. 저희가 분당에서 화요모임을 지속적으로 합니다 만, 공적인 예언 사역을 할 때가 있고, 안 할 때가 있기도 하는데, 공적인 예언사역 할 때마다 여태까지 한번도 빠지지 않고 계속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저 개인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반복적으로 주시잖아요. 그 이야기는 뭐냐 면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는데 잘 안 들으면 반복되어 주십니다. 그러신 것 같습니다. 제가 누구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데, 예를 들면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꾸 반복해서 사랑한다고 여러 번 주실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대부분이 어떠한 경우냐 면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참 놀라운 일입니까. 그리고 그 사실을 잊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기도 받는 분이 그것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꾸 넘어가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중요한 말이야. 이것은 의미가 있는 이야기야.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고 잘 들어, 내가 너를 사랑한다니까. 이런 의미에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화요일 모일 때마다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내용이 뭐냐 면 에베소서 6장 7절입니다. 섬김에 관한 부분인데, 그 마음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그러면서 너희가 그것을 읽었느냐? 살펴보았느냐? 왜 그대로 순종하지 않느냐? 이런 말씀도 예언 중에 나오고 그러는데, 우리가 예언의 말씀은 한마디, 한마디, 하나님의 음성으로 조금도 오차가 없는 하나님의 음성이라 그것은 아니라도 분별해 보아야 되지만, 반복적으로 그 말씀을 주시는 데는 한편으로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그만큼 중요하고요. 이것을 강조하는 대에는 이유가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시는 침노하는 무리는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할거거든요. 그것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어제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중보기도의 그 깊은 내막을 잘 이해하기 전에도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그 일을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 가운데 중보기도가 안되어지니까. 하나님께서 교회를 새롭게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라고 그러셨는데, 그 전에는 그 중보기도가 그렇게 중요성한지 모랐는데, 나중에 지나고 보니까. 그러한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것을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섬김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 의미를 미쳐 깨닫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귀가 달토록 말씀하심으로서 이 부분이 얼마나 침노하는 무리로서의 중요한 부분인가를 조금씩 알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그렇게 반복적으로 말씀하시고, 어떤 때는 한번에 몇 차례 말씀하시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사랑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연한 것을 가지고, 하면서 넘어가는 것처럼, 섬김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에베소서 6장 7절의 구절을 그렇게 말씀하심에도 우리가 그것을 잘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혹은 주위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혹은 그 중요성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같고, 또 성경이 의미하는 바를 진실로 깨닫지 못해서 그 가운데 행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이 아니라니까, 잘 들어, 똑바로 들으라니까. 이렇게, 그래도 안 들으니까. 너 왜 안 들어 똑바로 들어, 그렇게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이것이 중요한 말씀인데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렇게 듣고도 잘 안 되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침노하는 무리로서의 섬김은 그야말로 중요한 부분인데, 우리가 오늘 밤 이 부분에 대해서 같이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그 종에 대해서,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서 특별히 모델을 많이 살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거기 여러 가지 종이 나오는데, 불충한 이스라엘의 완성으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신실한 종, 그리고 침노하는 무리는 그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모델입니다. 그런데 오실 때, 정확하게 무엇으로 오셨냐 면, 섬기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여기 이사야서 49장 오늘 읽은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최근에, 지금 현 시범에서 하나님은 오늘날 이러한 무리들을 세우고 계십니다. 이것이 침노하는 무리의 한 특징입니다.
여러분 먼저 말씀드리면 이사야서 49장은 예수님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학자들이 이사야서 42장부터 66장의 이사야 후반부에 나오는 고난의 종으로 오실 메시야에 관한 구절을 네 구절을 뽑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사야서 49장 1절부터입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에 관한 예언입니다. 우선 하나는, 그런데 우리가 지난번에 살펴 본대로 예수님에 관한 예언임에도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 예언을 자기의 사역에 전용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6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이 구절이 예수님에 관한 예언인 것도 모르고 자기 임의대로 자기에게 적용시키고 있느냐? 아닙니다. 그는 우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소위 말하는 아무 구절이나 하나님이 감동 주셨다고 해서 자기에게 임의대로 적용할 수 있느냐? 아닙니다. 그런 성경해석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 우리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할 때,(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은 십자가 복음의 필수지요.) 예수님에게 주신 모든 약속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주신 모든 권세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에베소서 1장과 2장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구절은 예수님에 관한 예언인데, 침노하는 자들이 다른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늘날 이사야서 49장 1절과 2절과 같은 침노하는 무리들을 세우고 계십니다.
그 하나의 특징을 보시면, 그 입에 날카로운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은 예리한 칼을 주실 거라고 그랬는데, 이것은 말씀입니다.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가 그들에게 부어질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그 권세가 있었고요. 침노하는 무리들 가운데 그것이 주어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광한 화살을 주신다고 그랬습니다. 이 말은, 갈아 가지고 반짝반짝 빛나게 하는 그 뽀쪽한 화살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언의 말씀을 말합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주신 어떠한 감동, 정확한 예리한 말씀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언을 주시되, 원수의 염통을 꽤뚫 수 있는 그러한 말씀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군들을 오늘날 세우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체험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그냥 듣고 지나가시려면 지나가십시오. 성경 해석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성경을 올바로 해석한 것이고,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해 드렸으면 좋겠는데, 자칫 잘못하면 여러분들이 오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조심스럽습니다. 제가 몇 년 전입니다. 미국에 켄사스 시티에 마이클 비클 목사라고 있는데, 그 당시에 메츠 롤 Christian fellowship이라는 삼 사 천명 모이는 교회를 담임했었습니다. 지금은 이제 거기서 사임하고 24시간 중보기도하는 그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거기에서 집회가 있을 때, 갔는데, 윅 와일리라는 분이었어요. 이번에 가서 보니까 그분이 암 걸려서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그분이 기도사역자 중에 한 사람인데, 와서 기도를 해 주면서 내 이름이 뭐냐고 물어요. 그래서 내 이름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해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진도가 나가면 되는데,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제 개인에 대한 어떤 간증보다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좀 여러분에게 알게 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저도 이 부분에서 개인적으로 확신을 가지고 이런 부분을 알기 원하는데, 자칫 이야기하다 보면 두려운 것은 뭐냐 면 이것을 이야기하다 보면 여러분들이 혹시 잘못 이해 해 가지고, 혹은 이것이 저 개인의 이야기인 것처럼 들을 수도 있고, 혹은 여러분들이 그런 저런 오해 해 가지고 올바른 이야기의 취지를 잘 이해하지 못할 수가 있을 것 같아서 조심스러워 가지고 제가 지금 이야기를 못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이것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화요모임에서도 어떤 분 같은 경우는 저한테 대해서 막 칭찬합니다. 그러면 제가 칭찬한다고 설교 시간에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별 칭찬 다해도 나 대수롭지 않다고, 왜냐면 칭찬해 놓고 그 다음순간 돌아서는 사람 수없이 많다고, 그러니까 아무리 칭찬해 보아야 그런가보다 기다린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면 이제 실재로 그럽니다. 그런데 그분 같은 경우에는 자기는 그런 의도로 칭찬한 것이 아닌데, 앞에서 목사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는 사실 좋으니까. 존경하는 의미에서 뭐 들으라고 한 것도 아니고, 이렇게 칭찬하는데 앞에서 그렇게 깔아 뭉기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런 경우도 있거든요. 그래가지고 상처받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참 여기서 조심해야 될 것이 뭐냐 면, 한편으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고 계신 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동참합니다. 그것이 안 보이면 안됩니다.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이 아주 귀합니다. 여러분, 제가 귀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그것이 나에게서 나온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실지는 몰라도, 나 때문에 하신 것도 아니고, 나 자신만을 의해서 하신 것도 아니고, 혹은 내가 하나님 앞에 특별하기 때문에 하신 것도 아니고 더더욱, 내가 하나님 앞에 더 많이 기도하기 때문에 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으로 눌라운 일을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못 보시면 매우 안타까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런 관점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안목이, 하나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동참합니다. 또 하나는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고,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그런데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하기 쉽습니다. 그 하나가 뭐냐 면, 그냥 제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런 뜻으로 이야기 하니까. 왜냐 면, 저는 분명히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뭐냐 면 하나님의 행하심 자체를 못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뭐 그렇고 그런 것이지 그렇게 봅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위해서 대단히 손해입니다. 왜냐 면,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대단히 손해입니다. 이해하십니까?
그런데 또 다른 극단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면 그런 이야기하면 이제 사람을 높이는 것입니다. 새물결 선교회를 높이고, 여주봉 목사를 높이고, 아! 당신이 훌륭하다고, 아! 당신 같은 사람을 진즉 만났어야 되는데, 이런 이야기하고, 그런 이야기 들으면 제가 엄청 거부감 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싫습니다. 왜냐 면 틀린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틀린 말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안하고 계신다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해가 됩니까? 그 하고 계신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하시는 것이 나 때문이 아닌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시는 것을 보되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아야 되지 나를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해야되는데, 그 둘 중에 하나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둘 다 틀린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 둘 다 저는 안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제 막 칭찬하다가도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별로 이렇게 안 기뻐하는 경우가 당연히,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예를 들면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에도, 여러분들이 자칫 잘못하면 저는 그냥 사실 그냥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하나님께서 자꾸 하라고 그러시는 것 같아서 제가 진도를 못나가고 있는데, 뭘 여러분들이 보기를 원하느냐 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깅 원합니다. 그래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또 하나 여러분들이 반드시 해야 될 것은 이것은 나와 관계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 때문이 아니고, 설교하는 저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여러분이 저를 보면 잘못 본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그 둘 중에 하나를,...........
그래서 와서 제 이름을 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름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것을 제 복중에서부터 이름을 주셨답니다. 그러면서 이사야서 49장 1절과 2절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그래요. 그러면서 그분이 배경을 알고 있었어요. 왜냐 면 바로 그 전 세미나에 폴 케인 목사님이 설교를 이 구절을 가지고 하면서 毬ご纛?이 시대에 세우시는 예언적인 백성에 대해 설교했는데, 그분을 그것을 알고 있고, 저는 원래 그 세미나 갈려고 했는데 안 갖기 때문에 전혀 그런 배경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그러면서 그분이 또 뭐라고 그러냐 면 우리나라에 한 목사님의 얼굴을 떠오르게 하신대요. 그런데 그 목사님이 과거에 제 꿈에 여러 번 나타났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어떤 때는 그 꿈에 여러 번 나타났었어요. 그러면서 제가 미국 가기 전에 제 아내하고 그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쭉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면서, 그런데 분명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뭐라고 그러냐 면 목사님이 생각난다고 그러면서 그분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데, 제 아내하고 이야기했던 부분들을 그대로 그분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감동을 주신거지요. 그대로 라고 하니까 토시하나 틀리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한 같은 맥락 똑같은 내용을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것은 맞는 것 같더라고요. 왜냐 면, 하나님께서 저에게 예리한 말씀을 주신 것은 분명하신 것 같더라고요. 집회 같은데 가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날카롭게 느껴지면서, 특별히 하나님이 기름부음으로 함께 하시면, 그 앞에 있는 율법주의 같은 이러한 견고한 진들이 있더라도 예리한 칼처럼 쪼개서 무너뜨리게 하시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만지시면 제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기름부음을 주셔서 어떤 때는 하나님 말씀 전하는데, 마치 화면으로 영상이 나타난 것처럼 선명하게 하나님의 길을 보게 하심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말씀 앞에 꼬꾸라지게 하시지 않습니까. 그렀지요. 그런데 그것은 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이 하시는 겁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이 하십니다. 제가 하지 않습니다. 그건 누구보다 제가 제일 먼저 압니다. 제가 설교하는 자니까 제가 아닌 것을 압니다. 물론 제가 준비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연구하는 부분도 있고, 그러나 그 연구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제가 설교할 때 하나님께서 감동을 많이 주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앞뒤가 맞춰지게 하십니다. 그렇게 할 때, 이렇게 쫙 인도해 가십니다.
그래서 그 말씀 참 맞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이 주일날인데, 그 날은 데이빗 피치스라고 영국의 성공회 주교, 우리나라에 능력은사라고 하는 책 번역 된 분, 지금 하나님이 이 시대에 참 귀하게 쓰시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많이 영국까지 그분 세미나 인도하는 곳에 간다고 그럽니다. 데이빗 피치스 그분이 강사 중에 한 명이었는데, 이제 세미나는 끝나고 주일날이니까 사람들이 많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 받으러 나오라고 하는데 본 교회 성도들은 사모한다 해도 매번 하니까. 그래서 안 모여서 제가 나갔습니다. 쭉 줄서있는데, 기도해 주면서 뭐라고 그러냐 면, 아까 말씀드린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드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해 주더니 그러더라 고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 말 딱 한마디 주고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저는 그때만 해더라도 그것이 당연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여자도 다 포함되고,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말도 여자들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상속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래가지고 제가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돌아와서 그 주간이던가 하나님께서 갑자기 밤에 깨우셨습니다. 그래서 일어났더니 하나님께서 갑자기 저에게 뭐라고 감동하느냐 면, 이런 것이 쭉 생각나게 하시면서 이사야서 49장 그 이하를 쭉 읽어보래요. 그래서 아까 1절, 2절 다음에 예를 들면 4절만 하더라도, 쭉 읽어갔거든요. 그런데 너무너무 놀라운 것이 하나님께서 해오신 일이 그동안 여기 그대로 있더라고요. 제 삶 속에, 그래서 4절만 하더라도 그럽니다. “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이렇게 일군들이 거쳐가는 기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제 숨겨진 기간입니다. 저도 그 기간이 자났습니다. 그 기간이 지나면서 저에게 느껴졌던 바가 뭐냐 면, 그냥 지금 생각하면 여러분 감동이 없을지 모르지만, 정확하게 이대로 느껴지거든요. 나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무익한 종, 아무리 수고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되지 않는, 이렇게 그러한 부분들을 쭉, 그리고 난 다음에 우리 박은길 목사님 여기 와 계신데, 그 다음 주간이 박은길 목사님 교회에서 집회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집회를 다 마치고, 이제 같이 이렇게 기도를 받았습니다. 왜냐 면 저도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하고 하니까요. 그런데 기도를 받는데, 박은길 목사님 사모님에게는 하나님께서 예언의 기름부음을 주셔서 예언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분에게 환상을 많이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그 사모님에게 특별히 새물결 선교회에 관한 환상을 많이 보여주십니다. 왜 하필이면 정태희 사모님에게 선교회에 관한 환상을 많이 보여주시는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그 날 이렇게 기도 받는데, 사모님이 기도하시면서 숨을 헉헉거리면 하나님이 임하신 것입니다. 눈은 감았지만 소리는 들리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이 환상을 쫙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때 정보응 목사, 권구현 목사 최광식 목사도 계셨는데 생각이 나십니까? 제가 지금 누가 환상 한번 본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연결해서 쫙 하나님께서 그 기간동안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제 개인을 위해서도 그것이 늘 생각이 됩니다. 그것이 한 두 주간에 걸쳐서 차례대로 척.척.척 하신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이것은 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데 여러분들이 오해할까봐 조심스럽습니다. 환상이 보이는데, 제가 앞서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손에 뭐가 있냐 면 홀이 들려있고, 그 외에 예수님이 제 옆에 가시는데, 저보다 한발 앞서가시면서 그분이 손으로 저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군대가 따르는데, 일렬로 정렬 쫙 선 군대가 따르고, 그런데 군대가 가는 것처럼 발이 척.척.척 맞춰서 가면 홍해와 같이 물이 쫙 갈리지는 것이고, 그러면서 가는 곳마다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임하는데 교회들이 척.척 세우지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수는 많지 않다고 그랬습니다. 가는데 그 뒤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빛 가운데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누구도 보이고, 누구도 보이고 그런다고,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주에 제가 광명시에 있는 영성원에 집회를 같다 왔습니다. 같다 오면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 켄사스 시티에서 6개월 전에 있었던 그 테이프를 듣게 되었습니다. 폴 케인 목사님의 설교를 그때 사오기만 했습니다. 주문해서 그때는 못 갔으니까. 그런데 그 테이프 속에 하나님께서 여태까지 말씀하신 것이 다 들어있었습니다. 그 이사야 49장의 이야기, 아까 말한 꿈의 환상의 이야기, 이런 부분들, 무슨 이야기냐 면 하나님께서 오늘날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고 계십니다. 그들에게 무슨 은혜를 주실 것이냐 면, 이사야서 49장 1절-2절의 은혜를 주십니다. 거기 예수님이 진두지휘(陣頭指揮) 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군대를 일으켜 세우고 계시고, 주님이 군대장관으로 함께 하십니다. 그들이 가는 곳에 어두움이 물러가게 될 것이고, 교회가 세워지게 될 것이고, 그리고 그리로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또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면, 제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으면, 제 개인만 알고 있으면 되지 뭐 하러 여러분 설교 시간에 이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야합니까? 아무런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저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저 개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왜 했느냐?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해 오셨고, 오늘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제가 이번에 같이 사역자 모임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이번에 오기 전에도 기도 받는데 어떤 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저한테 뭐라고 그러셨느냐 면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은사를 나눠주시라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뭐냐 면 지금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침노하는 무리로 저를 먼저 세워주셨다면 하나님께서 동일한 은혜를 여러분들에게 나눠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 일을 우리 가운데 해 오셨단 이야기는 이 말씀 그대로 해 오셨습니다. 실제로, 그리고 준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일을 이루실 줄로 확신합니다. 우리가 주안에 거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전재 조건입니다.
또 한번은 연합교회 사모님이 새벽기도 나가서 기도하는데 갑자기 환상을 여셨는데, 제가 가운데 있고 벌집 같이 육각형처럼 있는데, 그런데 위에서 빛이 저에게 쫙 임하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빛이 여섯 각으로 쫙 퍼져 나가면서 전체적으로 확 퍼져나가더랍니다. 그 화요일 날 간증하신 날 어떤 분이 와 가지고 가면서 뭐라고 그런 줄 아십니까? 여주봉 목사는 교주야! 그러고 갔습니다. 저는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간증하라고 할 때에는, 그럼 여태까지 제가 설명 드리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저 보라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태까지 침노하는 무리를 정확하게 준비해 오셨고, 그 일을 해 오시고, 그러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복음, 그 부분만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부분을 조명해 주시고, 비춰오게 하시고, 실제로 그대로 전하면서 제 자신이 변하게 하시고, 교회가 그렇게 세워지게 하시고, 거짓신앙인 율법주의, 인본주의, 기복신앙이 깨어지게 하시고 교회들이 빛 가운데 세워지게 하시고, 실제로 그 숫자가 많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직접 교회 세우는 집회하는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지금은 개인적으로 교회세우는 집회 안 나갑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러면 아까 임한다는 것은 뭐냐 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것입니다. 부흥으로 임할 것이라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저를 먼저 세워주셨다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나누어지기 위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임해서 나눠지면서 그것이 전체로 퍼져 가시게 하실 것입니다.
또 그래서 오늘 저녁에도 나옵니다만, 그리고 제가 화요모임을 인도하면서 여러 번 깨달은 것이 하나님께서 어떤 부분을 저에게 깨닫게 하셨잖아요. 예를 들면 하나님이 제 속에 아무런 선한 것도 없다든지, 철저히 주님만 의지하게 한다든가, 이렇게 깨닫게 하시는 것이 제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도 되지만, 그것만이 아니더라고요. 왜냐하면 지금 하나님이 하신 것을 보니까. 제가 그것을 깨닫고 전하게 되면, 그대로 다른 분들이 깨닫고 똑같이 동일한 은혜를 경험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무엇을 해 오셨냐 면,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서 깨달은 부분마저도 하나하나 돌이켜 보면 화요모임에서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더라고요. 뭐냐 면, 제가 개인적으로 특별나기 때문에 저에게 깨닫게 하시는 그것이 아니고 혹은 저만 하나님 알고 좋아하라고 깨닫게 한 것도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그야말로 여러분 보다 훨씬 더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저에게, 하나님이 택하시면 연약한 자를 택한다고 그랬습니다. 성경에 써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만약에 저를 먼저 세웠다면 이유가 간단합니다. 제가 여러분보다 훨씬 연약하기 때문에 그럽니다. 진짜 그럽니다. 어제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몇 십 년 만에 보는 사람이 앞에 지나가도 소리를 안 지른 다니까요. 지나가게 놔두고 다음에 만나겠지 그러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 있으면 나와보세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저를 먼저 세우셨다면, 제가 여러분보다 약하기 때문에 먼저 세우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하신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어떤 부분을 보게 하셨다면 그 이유는 저 자신만을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여러분 전체에게 그것이 나누어지도록, 여러분들이 정확하게 그 하나님 은혜 가운데 세워지도록, 그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이 이야기를 하라고 그랬을까? 예수님이 제일 먼저 모델입니다. 우리 모델은 여주봉 목사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모델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린 대로 저 자신도 이번에 이러한 것을 더 보면서 예수님의 삶을 배우기 원합니다.
여태까지는 사실 없어도 될 이야기인데 괜히 하나님께서 하라고 그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잘못 들었는지는 몰라도 그러니까 여러분 가로로 넣고 넘어 가세요. 지금부터 설교 다시 들어갑니다. 테이프를 편집해 버렸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모델입니다. 예수님이 무엇보다 무엇으로 오셨냐 면 섬기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섬기는 종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섬기는 종으로 오셨다면 저와 여러분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섬기는 종 위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부어질 것입니다. 아까 그 모든 약속들은 제가 섬기는 자가 되어야 됩니다. ‘섬기는 자가’ 그리고 나름대로 그렇게 해오려고 노력했습니다. 노력하고 그렇게 따라왔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물론 더 섬기는 자가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직분이 종이었습니다. 여러분 선지자란 말은 종이라는 말입니다. 내 종 선지자에게 나가 하는 일을 먼저 알리지 않고는, 선지자가 종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능력을 부으실 것입니다. 여기도 보시면 이렇게 날카로운 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예리하게 쪼갤 수 있도록 심령과 골수를, 그 중심에 생각까지 들어 나게 하시도록 하나님의 눈 앞에 화면처럼 선명하게 보이게 하도록 예리한 말씀을 주시고, 더 나아가서 마광한 살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 시점에서 주시는 말씀을 주셔서 원수의 염통, 심장을 꽤뚫게 하시는 말씀도 앞으로 더욱 주실텐데 누구에게 주실거냐 면 종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여기보시면 “네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여기에 종은 누구보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종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침노하는 무리가 종으로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종으로 섬기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을 보아도 종으로 오셨는데, 그 종 위에 능력이 부어집니다. 우선 두 구절만 보십시오. 마태복음 3장 16절-17절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예수님, 이것이 어디와 어디의 말씀이 합해진 것이라고요. 시편 2편에 왕으로 오실 메시야와 이사야 42장 1절에 종으로 오실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 합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한 분이십니다. 여러분 또한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될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가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종이라는 이야기고, 거기에 권세가 함께 할 것을 말합니다. 아직 이해가 안되시는 모양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은 오실 자가 종으로 오신 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사야 42장 1절, 49장도 마찬가지고, “나의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내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성령을 부으시는데 종에게 부으신다니까요. 섬기는 종, 그 종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그 종이, 아까 예수님에 대해서 뭐라고요. 왕으로 오실 메시야에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왕, 예수님이 홀을 가지고 계십니다. 왕권, 권세, 그런데 그 권세를 누구에게 주십니까?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주시는데, 종으로 섬기는 자에게 주십니다. 이 두 개가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합니다. 예수님의 침례 때부터 성령이 임하시는데, 누구에게 임하시냐 면 종에게 임합니다. 아까 종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그랬고, 종에게 그러한 말씀의 권세와 마광한 화살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주신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침례 시에 보더라도 그 종으로 오신 분에게, 또한 만왕의 왕으로 철장 권세를 가지고 오신 왕이시듯이, 예수님 안에 우리가 종으로 섬기게 될 때, 하나님의 권세가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침노하는 무리는 종으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보이시지요.
마태복음 12장 18절,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예수님에 관한 예언입니다. “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보세요. 종에게, 거기에 보면 이사야서 42장 1절을 염두 해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종, 예수님을 종이라고 부르고 있고, 그를 하나님이 마음에서부터 기뻐하신다고 말하고 있고, 사랑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고, 그 위에 성령을 부어주실 거라 그 말입니다. 종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종으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 말세에 세우시는 침노하는 무리입니다. 여러분 항상 과거에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부흥 때마다 쓰임 받은 침노하는 무리를 보세요. 그들 중에 종으로 섬기지 않은 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것 아십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말세지말에는 더 그럽니다. 예수님이 모델입니다. 그리고 침노하는 무리는 다른 자들이 아니고 그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나타난 특징이 그대로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섬기는 종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질그릇에 불과함을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에게 있는 권세는 주님이 주신 권세입니다. 그런데 섬기는 종들에게 주님의 권세가 함께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왕의 권세가, 홀의 권세가 함께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기도 받을 때, 이길수 목사님이나 다른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말씀을 주신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제 손에 홀을 들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네 것이 아니라고, 네게 속한 것이 아니라고, 제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이나 똑같이 우리는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앞에 진토임을 기억하세요. 그것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섬기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그 권세로 뒷받침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아멘, 예수님은 참된 종이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 우리 잘 아는 내용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섬기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권세가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폴 케인 목사님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들을 예언적인 백성이라고 부르는데, 제가 부르는 침노하는 무리와 똑같은 의미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참된 섬기는 종인데, 섬기는 종들의 특징이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그런데 이것만이 아닌데, 그런데 실질적인 부분 같습니다. 그분이 말하는 특징들의 몇 가지가 devoid of pride, devoid of greed, devoid of wanting to go ahead, devoid of wanting to appear awesome, 무슨 말이냐 면, pride 교만이 없는, 참된 종의 모습이 교만이 없는, 그 다음은 greed 탐심이 없는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너희 가운데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 나는 복음만 전할뿐만 아니라 내 목숨도 너희를 위해 내어주기를 기뻐했다. wanting to go ahead 앞서기를 원하는 것이 없는,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종의 자세로서는, 이것이 안 다루어지면, 스스로 세우고자 하는 개인적인 야망이 안 다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비교의식, 앞서고자하는 것, 내세우고자하는 것, 다른 사람보다 앞에 가고자하는 것, 강단에 서고자하는 것,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가 되고자하는 것, 앞에서는 것, 이것이 개인적인 야망인데, 이것이 안 다루어지면 야고보서 2장에 말한 것처럼 그러한 지혜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요 세상적이라고 말하면서 섬기는 참된 종으로서 앞서기를 원하는 것이 내려진, 네 번째 특징이 뭐냐 면, appear awesome 사람들 앞에 훌륭하게 보이기를 원하는 것이 없는, 이 내용들이 단순한 내용 같지만 진정으로 섬기는 자의 자세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사환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저에게 먼저주신 은혜들을 이렇게 나눠지게 하십니다. 제가 나눠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고 해 가십니다. 그래서 그림을 보여줄 때에도, 오늘도 기도 받는데 그런 내용이 있는데, 앞서가다 보니까 공격도 많을 거라고, 알아요. 그럽니다. 그림으로 보여 주실 때도 여러 차례 말씀드렸는데 어떤 때는 가시밭을 지나서 가시가 다 찔립니다. 그런데 그 길을 지나면서 뒤에 길이 납니다. 그러니까 뒤에 오시는 분들은 들 찔립니다. 앞서 가면 그렇게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이해합니다. 어떤 때는 눈밭에 눈이 깔려 있는데 제가 맨발을 벗었습니다. 하나님 전 못 갑니다. 막 징징거리면서 한 발 밟아요. 그러면 눈이 녹고, 또 하나님 저는 못 가요 막 울면서 밟아요. 그러면 또 녹습니다. 그리고 산에 올라가 뒤를 보니까 길이 쫙 나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올 수 있도록, 그런데 사실 지금은 들 그럽니다만 제가 주님을 따라갈 때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다음 발자국을 몰라요. 우리가 사역자 모임에서 잠깐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연합만 하더라도 어떻게 하는 것이 무언지 잘 모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조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철저하게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따라와야 되고, 제가 개인적으로 친하게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잘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설명해서 될 것도 아니고, 왜냐하면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너무 많습니다. 그럼 저는 오해받을 것 그대로 각오하고 아무소리 안 합니다. 왜냐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득해서 될 것이 아니거든요. 그럼 몰라요. 솔직히 모릅니다 다음 발자국을,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뜻만은 알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징징거리며 발을 내디디면 기뻐하잖아요. 무슨 이야기냐 면 그렇게 하나님께서 오늘까지 오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은혜가 나눠지게 하신 것 같습니다. 그 중에 하나 저는 보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세워 가신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예를 들면 우리 김영식 목사님 여기계신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실례될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이 들으라고 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지를 여러분이 보기 원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뭐하고 계신지 여러분이 알기 원합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목사님이 이렇게 목회 해 오시면서 교회가 잘 성장하고 이렇게 같은 또래의 목사님 들 보다는 그야말로 선두주자라고 할 만큼 교회 건물도 짓고 이렇게 교회도 부흥하고 잘 나갔습니다. 그러다 선교회 오시면서 어떤 메시지의 방향이나 십자가의 복음이나 우리 신앙의 어떤 사역이나 이런 부분에서 많은 도전을 받으시고, 그래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되는데,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되는데, 또 성도들이 전 존재로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되는데, 성도들 삶이 변해야 되는데, 왜냐 면 성도들 삶이 안 변해서 고민해 오셨거든요. 그러면서 접목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많은 분이 교회를 떠났잖아요.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기준 아래 세워지기를 원해서, 그래야 성령이 임하시고, 그래야 부흥이 오고, 그래야 성도들 삶이 변하고, 그래야 하나님 기뻐하는 교회이니까 그 많은 어려움과 아픔 가운데서도 결단과 각오를 가지고 주님 따라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것보다 보기에는 실제로 훨씬 하나님을 잘 따라가시고 또 많은 대가와 아픔을 겪으면서도 주님 기뻐하시는 길만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필리핀 갔다 온 뒤로 몸이 좀 아프셨습니다. 그런데 아픈 것도 유익이라고, 아파서 이렇게 누워있는데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시냐 면, 네 젊음과 네 전 재산을 털어서 개척한 그 교회 나한테 양도해, 그러셨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개척하려면 우리의 젊음과 우리의 모든 재산을 다 털어서 개척하는 것 맞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목사님도 그전까지 하나님의 교회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아까 말씀드린 대로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그 아픔 가운데서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양도하라고 그러실 때는 이 교회가 주님의 교회이니까 마음 중심에서부터 하나님께 양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뭐라고 말씀하시냐 면, 너는 사환으로서 내 옆에 서서 내가 시키는 일만 해, 지금 하나님이 뭐하고 계신 줄 아십니까?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침노하는 무리는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단순한 하나의 그 뭐가 아니고 지금 하나님의 하고 계신 일을 보기 바랍니다.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고 계십니다. 보이십니까? 침노하는 무리는 전적으로 섬기는 자들인데, 교만이 비어진 devoid란 말은 다 비어진, 탐심이 비어진, 앞서고자 하는 원하는 것이 비어진, 사람들 앞에 잘 보이고자 하는 것이 비어진, 섬김 그 자체가 기쁨인 모세처럼 사환으로서, 모세가 사환이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늘 염두 해 두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새물결 선교회에서 회장으로 리더로 인도해가니까. 여러분 생각하기에 제 생각대로 많이 하는 것 같으십니까. 그러지 않겠지요. 저 개인적으로도 제 마음 속에는 늘 두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면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 정복을 앞두고 거기에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라는 말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분은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다른 천사하고 다릅니다. 그래서 성육신하기 전에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합니다. 그분이 오셨습니다. 여호수아가 말합니다. 당신이 우리편입니까? 적의 편입니까? 그러니까 답변을 보면 둘 다 아니라 그 말입니다. 아니 원수의 편이 아닌 것은 금방 알겠어요. 여호와의 사자가 오신 것이니까.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수아에게 뭐라고 그러냐 면, 나는 네 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냐 면,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여기에 왔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경우에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삼습니다. 목회자는 성도들과 마찰이 생기면 하나님이 자기편인 것처럼 생각하고, 성도들은 목회자하고 갈등이 생기면 하나님이 자기들 편인 냥 자기들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서로간에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자기편인 냥 자기편 삼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전쟁을 주관하러오신 분입니다. 그랬더니 여호수아가 납작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 하냐 면 종이 듣사오니 말씀하옵소서. 저는 개인적으로 늘 그 생각을 합니다. 선교회요, 주님이 주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리더로 세우셨을지 몰라도 저는 제 임의로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제 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 편이 아니라니까요. 예수님은 주관하시는 분이지 제 편이 아닙니다. 저는 여호수아처럼 그 앞에 납작 엎드리기 원합니다. 주님 이것은 주님의 사역입니다. 종이 듣사오니 말씀하세요. 이것이 사환입니다. 하나님은 사환들을 세우십니다. 하나님이 그 은혜를 제에게 주셨다면 하나님께서 세워 가시는 종들에게 그 은혜를 붙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 그 은혜가 있기를 사모하셔야 될 것입니다. 침노하는 무리로 세워지려면, 왜요? 그렇게 섬기는 자가 되지 않고는 침노하는 자의 자리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섬김에 있어서도 우리는 아까 말 한대로 예수님이 우리의 모델입니다. 제가 언뜻 언급한 예수님의 삶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섬김에 있어서도, 그래서 몇 가지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세우시는, 첫 번째가 뭐냐 면, 섬김은 예수님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나옵니다. 절대로 섬김이 먼저가 아닙니다. 우리 선교회 가운데도 어떤 분들은 그런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주님과의 친밀함은 소홀히 하고 섬기는데 앞장섭니다. 아니요 내려놓으세요. 여러분,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섬김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셨던 섬김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종으로 부르셨다고 하는데, 사환으로 부르셨다고 하는데 그 의미가 아닙니다. 사환으로 부르셨고, 종으로 부르셨는데 그 의미는 예수님의 삶을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는데, 성경이 말하는 종 된 삶은 아버지와의 친밀함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사랑하기에 예수님은 진실로 자신의 모든 것으로 섬기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것이 자기의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섬김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예를 들면 새물결 선교회 사역자나 혹은 여러분들 가운데, 포도나무교회 성도들 가운데, 다른 분들이야 저한테 이야기할 것은 아니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 목사님에게 이야기하시고, 여러분 가운데 섬김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방해하는 분 있으면 저한테 이야기하세요. 섬김을 당분간은 면제해 드릴테니까. 반드시 이야기하세요. 왜냐하면 이 섬김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섬기는 것이 너무나 소중하되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나와야합니다. 절대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먼저 갈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거 아십니까? 제가 과거 두 기간 동안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어떤 부분을 집중적으로 조명해오셨냐 면, 하나님이 저의 아버지 되심을 보이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화요모임에 하려다 자꾸 넘어가고 그래서 제가 파일을 따로 만들어서 제 테이블에 딱 얹어놨습니다. 그 부분을 늘 생각하면서 더 연구하려고, 더 하나님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부분들도 더 해야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렇게 해야 되는데 자꾸 넘어가니까 하나님이 반복적으로 하는 그것이 뭐냐 면 하나님이 저의 아버지 되심을 보이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말씀드린 대로 저한테만 은혜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지금 우리를 어디로 하나님께서 인도하고 계신가하면 침노하는 무리의 자리로 인도하고 계시는데, 거기에 포함되는 내용의 중요한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저에게 먼저 비춰주신 이유는, 그리로 들어오도록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모두에게 나눠주시기 위해서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전인데, 제가 지난번 집회에서 말씀드린 대로 경배와 찬양 중에 ‘예수의 이름은 참으로 놀랍네’ 그 찬양, ‘영원히 계시는 아버지’ 그렇게 끝납니다. 그렇게 그 찬양을 할 때, 금요일 날 철야기도 시간 인도하면서, 그래서 찬양이 참 중요합니다. 찬양시간이 마음을 다해서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을 경배하는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저의 아버지 되심을 선명히 깨닫게 하십니다. 저의 육신적인 아버지도 훌륭한 아버지였지만, 그러나 그 생각이 이것을 방해하더라고요. 그분은 저의 육신의 아버지와는 다릅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훌륭한 분이셨지만, 지금은 돌아가신지 오래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점도 있었고 나약함도 있었지만,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강하고 거룩한 분인데, 영원히 사랑하시고, 진실하신, 오류도 없으시되 진실로 긍휼하신 그분이 저의 아버지 되심, 육신적인 아버지 생각이 자꾸 방해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그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비춰주시는 대로 그것을 붙잡으려고 이렇게, 제가 그래서 그 다음 날 자리에서 일어나서 앉아서 아버지 그렇게 한마디 불렀는데 하나님의 임재가 저를 쫙 감싸더라고요. 왜요.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오는 것은 우리가 40일 금식기도 했기 때문에 오는 것도 아니고, 성경에 보면 우리가 뼈가 빠지게 섬겼기 때문에 오신 것도 아니고, 그 대가로,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임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이유도 우리가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성경 안 보셨어요.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그러면서 어제도 하나님 앞에 설 때는 기름부음 벗어놓고 서야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어떤 분들은 저를 대단한 사람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설교하다 보면 하나님 말씀이 놀라웁게 역사하시고, 성령이 역사하시니까. 그런데 그것은 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를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그것 때문에 여러분들이 저를 잘봐 주시는 것은 좋은데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그 기름부음 벗어놓고 서야 합니다. 왜냐 면 그것은 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니까 그것 하나님께 벗어놓고 서니까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사람들 섬길 때, 얼마나 사랑으로 섬겼는지, 얼마나 중심에서부터 그들을 섬겼는지 내놓을 것이 있어야지요. 너무너무 애통하는 마음이 있더라고요.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때 그러시는데 그것을 쫙 비추시면서 너는 내 아들이야! 뭐예요.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사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자녀 삼으셨기에 그 공로 때문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발판뿐입니다. 여러분의 직책도 아니고, 여러분의 기름부음도 아니고, 여러분의 헌신도 아닙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시냐 면, 바로 그 다음 순간에 ‘열방을 구하라 내 아들아 그것을 내가 네게 주리라’ 기도응답도 아들이기 때문에 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 되심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와의 친밀함 가운데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넌 내꺼야’ 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아버지 앞에 나아와 아버지의 의중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분만으로 만족하며, 그분만이 기쁨인, 그 아버지 하나님이면 족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그 무엇도, 아버지 계신 곳에 같이 있는 그 자체로만 충분한, 아버지의 열망이 나의 열망이 되면 충분한, 그것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이고 그리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버지 되심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권세도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자녀에게 권세가 있고, 유업도, 기도응답도, 다 거기 있습니다. 여러분의 노력으로 그것을 벌어드리려고 생각하면 율법주의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세요. 여러분의 노력으로 벌어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친밀함 가운데 나오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저에게 아버지이신 것을 계시하신 한 달쯤 후에 무엇을 계시하신 줄 아십니까. 몇 년 됐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지요. 그것이 뭐였냐 면, 실촌 수양관에서 제 2차 전국집회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숙소에 올라가 설교하려고 준비하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어떤 부분을 보이시냐 면, 그때는 영어로 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my Father business is my business 그 말은 우리말로 그대로 하면 내 아버지의 사업이 내 사업이다. 그러면서 탁 떠오르냐 면 여러분 구멍가게 할 때에도 월급을 받고 일하는 점원과 월급은 전혀 안 받을지 몰라도 자기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장의 아들은 일하는 자세가 다른 것 아십니까. 돈을 받고 일하는 종은 시간을 때우면 됩니다. 그리고 맡겨진 것 잘하면 됩니다. 그런데 자기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들은 돈을 하나도 안 받을지 모르지만 그 아버지의 일이 자기 일이기 때문에 합니다. 그 말은 그렇게 하면 앞으로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에 한다는 그 이야기는 아닙니다. 자기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이것이 아버지의 일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일은 곧 내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일하는 사람은 돈을 주건 안 주건, 알아주건 안 알아주건 상관없이 그는 월급 받고 일하는 사람과는 전혀 다르게 일할 것입니다. 그것을 비춰주시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뭐라고 그러시냐 면, 그때는 목회자들만 대상으로 했습니다.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길로 돌아서서 하나님 앞에서 회복되고, 교회가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의 일이기 때문에 이것이 내 일입니다. 내가 그것 한다고 해서 누가 돈주는 사람도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제가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그것은 나의 아버지의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곧 내 일입니다. 이것이 섬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섬김은 이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와의 친밀함 가운데 계셨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요한복음에 보면 아버지의 일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너희가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아버지의 일을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이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심을 너희가 알리라” 왜? 이것이 아버지의 일인데,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졌냐 면, 금방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전재되어서 그 가운데서 아버지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곧 자기의 일이라서 그러게 섬김으로 나간 것입니다. 이렇게 섬기게 될 때, 참된 종이 가질 수 있는 것처럼, pride가 비어지고, 개인적인 야망이 비어지고, 사람들 앞에 잘 보이고자 하는 것이 비어지고, 앞서고자 하는 것이 비어지고, 탐심이 비어진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길 수 있는, 아까 에베소서 6장 7절, 그 말씀 ‘사람에게 하듯 하지말고 단 마음으로, 온 마음으로 주께 하듯 섬기는 그 삶이 그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선교회 연합, 이 토대 위에서 되어야합니다. 그 연합만이 진정으로 튼튼한 연합입니다. 그 외에는 다른 어떠한 연합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외에 연합은 제도를 통한 연합일 것이요. 인간적인 끈을 통한 연합일 것이요. 자기의 자리를 위한 연합일 것이요. 자기의 사역을 위한 연합일 것이요. 사람들 앞에 잘 보이기 위한 것이고, 끈일 달린 연합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연합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연합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심, 아버지의 일이 내 일이기에 성경에서 말하는 그런 뜻들이 되어진, 아까 말씀드린 것들이 되어진, 아버지 일이 내 일이기에 기쁨으로 동참하는, 어디에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없이 아버지 일이 진행되면 되는 그 토대 위에서만 진정한 연합이 되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무리를 오늘날 세우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그 일에 동참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회자이건 성도이건 그러나 그 토대 위에서 그 가치관에서 세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첫째가 아버지와의 친밀함에서 섬김이 나와야 되는 것이고, 또 하나 예수님의 삶에서 볼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은, 제 개인적인 간증보다 아까 그 이야기를 했어야만 한 것 같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인도해 가시는 것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저는 왜 그것을 해야 되는지 몰랐는데, 시간은 조금 지났지만,
또 하나는 이 섬기는 삶과 관련해서 하나님이 세우시는 침노하는 무리는 그 특징이 금식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금식하는 삶이란 말은 이렇게 금식을 자주 밥먹듯이 하는 그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의 절제하는 삶을 말합니다. 지금 여러분 잘 이해가 안됩니다. 제가 그럼 성경을 보겠습니다. 이사야서 58장 5절, 참된 금식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어찌 나의 금식하는 금식이 되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제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 될 날이라 하겠느냐” 이 말은 뭐냐 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년에 한 차례씩 왕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금식을 하는데, 베옷을 입고 제 가운데 앉아 하루종일 고개를 숙이고 금식을 하는데, 하나님이 왜 응답 안 해주십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전혀 변하지 않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뭐냐 면 사람은 변하지 않고 그저 날짜만 정해서 제 가운데 고개만 숙이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금식이냐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냐 그것이 하나님께 열납 될 금식이냐?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금식은 외부적인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 있다. 그러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에게 주실 하나님의 약속, 복을 이야기합니다. 자 그러면서 6절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은 이렇게 인용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금식을 하면 기뻐하시고, 그렇게 하면 우리 가운데 흉악의 결박이 풀어진다고,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닐지 모르지만 이 구절은 그 구절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그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것을 풀어주는 것이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아까 말 한 대로 우리의 삶이 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다른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고, 다른 사람과 싸우고 다투고 이렇게 하면서 금식일 만 정해서 기도한다고 그것이 금식이냐. 그것이 아니고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것을 풀어주는 것이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참된 금식에 대하여 말하면서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제 이해가 되시지요? 그러면서 이러한 자들에게 어떤 복이 임할 것을 말합니까?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하나님이 부흥으로 임하시는 것과 똑같은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금식하는 삶이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 계속 보세요. 역시 금식에 대해서 말하면서 “ 만일 너희 중에서 멍에와(다른 사람 멍에 메는 것)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여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똑같은 약속입니다. 아까 침노하는 자에게 주신, “너는 역대에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보세요. 똑같은 약속입니다. 침노하는 자에게 주신 약속, 그럼 침노하는 자의 또 하나의 특징이 뭐예요? 제가 표현하기를 금식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냐 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여 내 목숨을 버리노라. 이것이 섬김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같이 다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리즈 하월즈 책에 보면, 리즈 하월즈는 웨일즈에 하나님이 부흥으로 임했을 때, 놀라웁게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거시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께 순종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어떤 때는 뭐냐 면, 그 당시에 남자들이 모자를 쓰지 않으면 아주 모욕적으로 받아드려 졌답니다. 수염도 안 깍고, 머리도 안 깍고, 모자를 안 쓰고, 그런 상태로 자기는 너무너무 죽겠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를 들면 런던에서 국회의원, 이런 장관급들이 초청하는 것인데, 그들 앞에 나갈 때 그렇게 가라는 것입니다. 집에서 부모님들도 이해를 못해서 그러는데, 장관들 앞에, 상류 사회에 가는데, 그렇게 훈련시키고 그랬는데, 그분 하나님이 다루신 것을 보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길거리에 지내는 사람을 위해서 숙소를 제공하고 이렇게 하라고, 그러다가 나중에 어디까지 같냐 면, 그 사람들을 집에 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몽땅 떨어서 섬기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자기 집에 들이라고 하니까. 식구들이 부모님이나 여동생이나 난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는데, 그러니까 아버지만 하더라도 다 예수 믿는 분들인데, 이게 도대체 뭐냐고, 이게 거지 소굴이냐고, 왜 집에까지 이래야 되느냐고, 그런데 그들이 와서 조심이나 하나요. 딱 걸치고 앉아 가지고 담배는 마음대로 필 것이고, 그들이 다 앉아버려서 식구들이 와서도 앉을 자리가 없어요. 비워주기를 하나, 자리를 비켜주기를 하나 미안해하지도 않아요. 그런데 하루는 아버지가 화를 내더니 돌아서가지고, 그래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렇게 해야지 그리고 식구들이 받아드렸는데, 그 순간부터 손님들이 끊어지더랍니다. 하나님이 훈련시키신 겁니다.
제 이야기는 무슨 말이냐 면, 금식하는 삶을 이렇게 표현하면 됩니다. 침노하는 무리일수록 세상의 특권을 포기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특권을 그대로 누리면서 침노하는 무리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 특권을 누리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세상에 특권을 누리는 것이 죄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당연히 아닙니다. 세상에 특권을 누리니까 제가 여러분을 정죄 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당연히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부에도 처할 줄도 알았고, 가난에 처할 줄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 이야기는 뭐냐 면 침노하는 무리로 세우는 자들은 세상의 특권을 기꺼이 포기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무리 중에서 리더가 될수록 더욱 더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서 권세가 클수록 세상에 특권은 더 적은 것을 아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세우신 일군 주에 첫 번째는 사도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 다음에 선지자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도 사도의 권위아래 들어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 중에 제일 높은 것이 사도입니다. 예수님 아래, 그런데 고리도전서 4장을 보면 알지만, 사도들은 하나님이 형장에 끌려가는 자들의 그 말미에 둔 자들과 같다고 그랬습니다. 만물의 찢기와 같다고 그랬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아세요. 하나님의 나라에서 권세가 클수록 세상의 특권이 작습니다. 그것이 기꺼이 포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루십니다.
하루는 예수님에게 어떤 사람이 제자가 되겠다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냐 면, 선생님, 선생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내가 선생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랬어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신 줄 아세요. 번지 수 잘못 찾았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거쳐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했어요. 종으로 오신 그분이 머리 둘 곳이 없었어요. 이 이야기가 뭐냐 면, 너희가 나를 통해서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고 한다면 너 번지 수 잘못 찾았다는 그 말입니다. 예수님은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고 계셨다고 그랬잖아요.
아까 사도들의 이야기도 말만 해서는 안되겠어요. 읽어야 겠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9절부터 보겠습니다. “내가 생각건데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이 말은 무슨 말이냐 면, 우리는 약한데 너희는 지혜롭다 그 말은 너희가 지혜롭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중에 보면 우리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그들이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보세요.’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기같이 되었도다”(고전4:9-13)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침노하는 무리,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그 권세가 클수록 세상의 특권을 포기한 자들입니다. 여러분 요한 웨슬러 아세요? 아까 제가 이길수 목사님에게 물어봤습니다. 요한 웨슬러가 50년 동안 사역했습니다. 부흥이 임한 뒤에, 아주 오래 장수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그의 남은 재산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포크+나이프하고, 돈 몇 푼 외에는 그야말로 재산이 없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면,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면서 침노하는 무리로 살면서 동시에 세상에서 얻을 것 다 얻고, 세상에서 구할 것 다 구하고,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갖는 것 다 가지려면 절대로 그 길은 못 가게 되어있습니다. 역대 기독교 역사에도 아무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세상을 포기하기 싫으면 못 가게 되어있습니다. 이 말은 여러분이 다 가난해져야 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부하건 가난하건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세상의 특권을 포기한 자들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리더가 될수록 더 그럽니다. 하나님 안에서 권세를 여러분에게 더 부어질수록 더 그럽니다. 그 모든 것의 모델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개인적으로 다루시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 약속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어떤 때는 갈등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면, 하나님께서 저에게 세상에서 재산을 가지지 말라고 그래요. 옛날에는 어차피 개척교회 때 가난하고 제 개인적으로 재산이 없으니까 가질 것도 없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안됐어요. 그런데 지금도 저를 다루시면서 드러나는 것이 뭔지 이세요. 지금은 교회에서 월급을 제가 생활할 만큼 받습니다. 물론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월급도 일부러 딱 정했어요. 체계를 정해서, 그러면서 어떤 때는 강의 비도 나오고 돈이 많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도 남기기 말게 하십니다. 그것 때문에 제 아내하고 많이 갈등이 있지만, 하나님이 저를 부르심을 제가 압니다. 그런대도 잘 안됩니다. 그렇다고 돈을 쌓고자하는 욕심은 없는데 괜히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참 희안해, 그러니까 사단이 지금도 설교하다 보니까 그래요 내가 집착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루어 가십니다.
저는 앞서간 믿음의 선배들의 삶을 보면 제 자신의 삶은 아주 부끄럽습니다. 진짜 부끄러워요. 이것은 제가 그냥 한 이야기가 아니고 진짜 부끄러워요. 리즈 하월즈의 책을 읽다가 얼마나 부끄러운지, 낮이 뜨거워서 못 보겠더라 고요. 제 자신이 부끄러워서, 그의 살았던 삶이 그렇게 참 하나님과 뭐 했는데, 전 오늘날 안일한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호의호신(好衣好食)하는 배부른, 배에 기름 낀, 너무나 부끄럽더라고요. 물론 우리가 일부러 금욕주의적인 삶을 산다고 그러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이야기를 잘 들으세요. 그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다 재산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는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잘살면 문제가 있다.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해하시지요. 그렇지요. 그러기 때문에 이제는 고기도 안 먹고, 일주일에 두끼만 먹어야 되고, 옷도 다 떨어진 것 입고 다녀야 되고, 그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침노하는 자의 무리의 삶의 특징은 금식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그리로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세상의 특권을 기꺼이 포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거기에 그만큼 권세가 뒷받침 할 것입니다.
여러분 제키 플린저 보시잖아요. 제키 플린저, 결혼도 안한 여인이 홍콩에 그야말로 마약, 갱, 매춘, 거기는 경찰들도 들어가지 않는 거기에 들어가서 젊음을 다 바치잖아요. 창녀에게서 낳아서 버려진 아이들, 20년, 30년 마약 중독으로 길거리에 버려진 사람들, 은퇴한 창녀들, 도박. 매춘, 폭력을 일삼는 갱단들, 이러한 사람들을 상대로 처녀가, 결혼도 안하고, 그야말로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경찰들도 못 가는 곳에 가서 자기 삶을 전부 바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고 그러면 그분은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당신은 어떻게 안 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이 있으라고 한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우리 김정길 목사님이 직접 갔다 오셨잖아요.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분에게 아-참 큰 희생한다고, 그분 몇 년 전에 한국에 왔었는데 그분이 한 이야기가 뭔지 아세요. it privilege 그것은 특권이라고, 이것이 특권입니다.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거니와’ 그 말씀 그대로 해당되는 것입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이것이 금식하는 삶이고, 이것이 침노하는 무리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어떠한 의미 감에서 죄책감에서 나온 거라면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일을 통해서, 헌신을 통해서 나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그분이 나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나가는 것입니다. 그 친밀함 가운데,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동참한지 아세요. 복음을 위해서 주의 나라를 위해서 동참한 것입니다. it privilege 그것은 특권이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침노하는 무리는 세상의 특권을 기꺼이 포기한 자들입니다. 그라고 권세가 더 클수록, 하나님의 리더의 자리에 세울수록, 그것은 더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특권입니다. 그것이 부담이 아니고, 그것이 짐이 아닌, 그것이 기쁨이며, 그것이 열망이며, 그것이 특권입니다. 특권이 되게 하십니다. 주님이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삶을 통해 하나님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하십니다.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거니와 죽으면 수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침노하는 무리의 삶의 본보기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이 시대마다 그러한 무리들을 세워오셨습니다.
또 한지 더 있습니다. 그냥 마치려고 했는데,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섬기되, 하나님의 능력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능력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섬김 자체가 친밀함에서 나오고, 그 자체가 특권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거듭 말씀하시기를 나는 내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잃은 영혼을 구원하시고, 그 일을 다 이루어 가시는 것도 다 아버지의 일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버지의 일, 아버지의 일, 아버지의 일, 그럼 자신은 뭐만 했느냐? 아버지를 사랑하며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동참할 때, 아버지가 자신을 통해서 아버지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동역자의 삶’, 바로 오늘날 침노하는 무리의 삶도, 때로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세상의 특권을 기꺼이 포기하며,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렇게 섬기는 삶을 살 때,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짐, 의무감에서 나온, 그야말로 하긴 해야 되겠는데 죄책감에 늘 쌓여있는 그러한 그릇된 섬김이 아닌, 그것이 전혀 아닌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분이 나의 아버지 되시기에 나의 모든 것으로 사랑하며, 그것이 아버지의 일이 내 business이기에 기쁨으로 동참할 뿐만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동참할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그 섬김의 삶, 금식하는 삶, 이것이 침노하는 무리의 특징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무리를 오늘날 세우고 계십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그러한 무리 가운데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이미 초청을 안 받으셨다면, 이번 집회를 통해서 이미 그렇게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 삶은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하나님 안에서는 참으로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기를 사람들 눈에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나는 항상 기뻐하는 자요. 사람들 눈에 보기에는 내가 없는 자 같으나 나는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요. 나는 모든 것을 주안에서 가진 자라 이렇게 말한 진실로 복된 삶입니다.
여러분 특별히 우리 나라에도 하나님께서 부흥이 예비 되고 있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이번 집회를 통해서 징조를 보여주셨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고, 그리고 이번 여름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섬기면서 또한 그런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처럼 그렇게 섬김도 그러한 섬김으로 더 나아가는 십자가 복음에서 중보하는 삶을 사는 섬기는 삶, 금식하는 삶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부어져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따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일에 동참하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 하나님의 부흥이, 또한 이 세계적으로 임할 때, 그 자리에 함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