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교재/십자가의복음

제4단원 4과 주님을 아는 것과 성화

발의무리 2007. 8. 23. 09:18
 

제4단원 주님을 아는 것

제4과 

주님을 아는 것과 성화


주님을 아는 것은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도 필수입니다.


성화는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당신은 성화라는 말은 들으면, 무슨 생각이 가장 먼저 마음에 떠오릅니까?  해당하는 것에 ○표 하십시오.


□ 설레고 가슴 벅차고 기대되는 생각이 든다. 

□ 부담감이 들고 죄책감이 앞선다.

□ 내가 해야 할 의무들이 생각나 마음이 무겁다. 


왜 그런 생각이 듭니까?


                                                                        


많은 사람들이 󰡐�성화󰡑� 하면, 가장 먼저 무거운 부담감이나 죄책감부터 갖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화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들은 성화를 자신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이루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화라는 단어를 들을 때, 더 열심히 노력하고, 순종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자신들을 보면서 그렇게 느낍니다.  그러나 성화는 전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화는 절대로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우리는 그저 가만히 있어도 성화가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만큼 성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성화는 전적으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고린도후서 3:18은 성화에 관해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 구절을 읽고 다음의 질문에 답하십시오.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화는 우리들이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어떻게 할 때 성화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까?                             


󰡒�거울을 보는 것 같이󰡓�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고전 13:12 참조)

(고린도전서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성화는 결국 누구의 역사입니까?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보는 만큼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즉 성화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다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볼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성화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성화나 참된 영성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선 성경이 말하는 참된 영성이나 성화는 우리가 하거나 혹은 하지 않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참된 영성은 성수주일하고 십일조하고 전도하고 기도하는 것이라거나 혹은 술 안 먹고 담배 안 피우고 욕 안 하고 거짓말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우리 신앙의 열매들이며, 또한 성도들의 삶 속에 있어야 할 중요한 열매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 자체가 참된 영성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참된 영성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이런 것들을 잘 하거나 혹은 안 하는 사람들을 성숙한 성도들이라고 이해하게 되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율법주의 신앙이요, 우리는 필연적으로 잘못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잘 지키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영적인 교만에 빠지게 되어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높게 평가하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 겉으로는 매우 겸손한 모양을 갖출 수 있으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반면에, 이러한 것들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죄책감과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정확하게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영성관이며, 따라서 그들은 필연적으로 그 엄청난 영적 교만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영성은 무엇입니까?

참된 영성은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가 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유일한 주님이 되시며 동시에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입니다. 그리고 이 교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헌신과 이웃을 향한 섬김으로 표현됩니다.

이처럼 참된 영성은 우리가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인격체 되신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입니다. 따라서 성화는 오늘날 교회가 세워 놓은 기준과 규칙들을 성도들이 잘 따라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통해서 성령의 역사로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보는 만큼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보는 만큼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즉, 영광의 주님을 깨닫고 그 분을 신뢰하는 것만큼 우리는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본다는 말은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성령님의 조명으로 실체이신 주님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의 조명으로 주님을 알고, 그 분을 신뢰하는 것만큼 그 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⑴ 스데반의 예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도 예수님을 닮은 스데반을 잘 압니다. 그리고 그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살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옆 차가 갑자기 끼어들기만 해도 우리는 화를 내며 때로는 욕을 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서도 예수님처럼 할 수 있었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작은 일에도 잘 되지 않습니까?  문제는 성화에 대한 그릇된 이해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7:59-60을 읽고,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했는지 요약해 보십시오.


                                                                       


(사도행전 7:59-60)

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의 이 자세와 기도는 누구의 그것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합니까?

(눅 23:34 참조)


                                                                       


바로 이 일이 있기 전에 스데반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행 7:55)

(사도행전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자세와 행동은 정확하게 십자가에서 그렇게 하신 예수님의 그것과 일치했습니다. 그 일이 있기 전에, 스데반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어떻게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의 용서를 위해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성품이 더 좋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평소 때 주님을 닮으려고 누구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일까요? 그 무엇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어떠한 것으로도 주님을 닮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그렇게 용서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심에 있어 사람들의 그 모든 멸시와 모욕도 기쁨으로 참으신 예수님,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들을 용서하신 예수님, 그 모든 것을 이기시고 부활하사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 그리고 거기에서 자기를 기다리다 못해 서 계시는 주님을 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처럼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중심에서부터 용서하고, 예수님처럼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영광을 볼 때 우리가 성화됩니다. 그러므로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설교자라고 불리우는 조나단 에드워드는 󰡒�하나님이여 내 눈에 영원한 세계의 인을 쳐 주옵소서. 그리하면 세상의 모든 영화가 내 눈에는 희미하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라고 기도하곤 했다고 합니다.


⑵ 두 가지 종류의 변화


두 가지 종류의 변화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변화와 화학적인 변화입니다. 물리적인 변화는 나무로 의자를 만든 것과 같이 그 물질의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은 채 그 모양이 변하는 변화를 말합니다. 반면에 화학적인 변화는 두 가지 다 독소인 염산과 나트륨이 합하여 염화나트륨(소금)이라는 우리 몸에 필수적인, 전혀 새로운 물질이 되는 것과 같은 변화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성화에 비교해 본다면, 󰡐�우리가 하는 그 무엇󰡑�의 관점에서 나온 영성은 오로지 물리적인 변화만을 가져올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가서는 이렇게 행동하고, 또 종교적인 면에서는 저렇게 행동하는 등 우리의 모양들을 바꿀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전혀 변함이 없이 육신적인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정확하게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반면에󰡐�주님과의 사랑의 교제󰡑�측면에서의 참된 영성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우리의 가치관, 사고, 삶의 방법, 삶의 목적 등 우리의 모든 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독소와도 같은 육신적인 삶이 변하여 소금과도 같은 영적인 삶으로 지속적이고도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이사야나 스데반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본 적이 없다’라고 말하며 낙심할지 모릅니다.  사실 이사야나 스데반과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은 성경에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나 스데반과 같은 경험을 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18에 나오는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라는 말은 오늘날을 모세로 대변되는 구약시대와 대조하여 하는 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자신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듯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인 오늘날에는 수건을 벗은 것처럼 우리 모두가 다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요 은혜입니까!


비록 우리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주님의 영광을 보되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부분적으로 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당시 거울은 오늘날과는 달리 구리를 잘 닦아서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에 비친 형상은 매우 희미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희미하게 보는 주의 영광도 우리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켜서, 우리를 주의 형상으로 변화시킬 것이며, 영광에서 더 큰 영광으로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통해서 그 분을 더욱 알기를 간절히 열망해야 할 것입니다.


⑴ 하나님 나의 아버지


1999년 중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교회에서 금요 철야기도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찬양 시간이었는데, 갑자기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깨달아졌습니다. 그 분은 저의 육신의 아버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전능하시며 거룩하시면서도 동시에 온전히 사랑하시고 친절하신 아버지셨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 날 처음으로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을 알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떠나 객지에서 혼자 공부하면서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늘 곁에 계신다는 생각이 나를 지켜 주었습니다. 그 이후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한지도 벌써 1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그동안 나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을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이 더욱 선명하게 깨달아진 것입니다. 그 분이 나의 어떠한 아버지가 되신가 하는 것이 선명하게 깨달아진 것입니다. 그 날 이후로 자주 그 생각만 해도 내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요. 그리고 종종 󰡐�아버지󰡑�라고 한마디만 불러도 하나님의 강한 임재가 나를 감싸시는 것을 느낍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의 일입니다. 그 당시 저는 기도원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설교를 점검하려고 내 방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My Father󰡑�s business is my business󰡓� 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깨달아졌습니다. 그 말은 󰡒�내 아버지의 사업 혹은 일이 바로 내 사업이요 내 일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일을 대하는 아들의 마음이 내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구멍가게에서 일을 할 때에도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과 아버지의 사업에 기쁨으로 동참하는 아들이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종들과 백성들을 하나님의 길로 회복시키시고, 그들을 만지시는 것은 정녕 나의 아버지의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곧 나의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일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는 것, 내가 받는 보수, 내가 가지고 있는 직함 등 그 어떠한 것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나는 어떠한 보수도 받지 않고 또 어떠한 직함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일들은 내 아버지의 일들이었고, 따라서 그것들은 내 일들이었습니다. 그 어떠한 대가가 없다 할지라도 나는 내 아버지의 일에 기쁨으로 동참하기 원하는 마음이 생겼으며, 진실로 아버지만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나의 만족이 되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아버지의 일과 그 일에 동참하는 자신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조금이나마 이해되는 것 같았습니다(예, 요 4:34).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아버지의 일󰡓� 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이과의 요점


♡ 주님을 아는 것은 우리의 성화에 있어서도 필수입니다.

♡ 성화는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보는 만큼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 우리 모두가 다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