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교재/십자가의복음

제8단원 4과 십자가에 의한 삶(2)

발의무리 2007. 8. 23. 09:31
 

제8단원 십자가에 의한 삶

제4과 

십자가에 의한 삶 (2)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사는 방법

 

 1.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뿐입니다.

 2.모든 율법주의 가치관을 철저히 버려야합니다.

 3.오직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합니다.

 4.성령의 조명이 필수적입니다.

2.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을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의 반대는 자기의 헌신과 행실, 즉, 자기-의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실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우리들이 구원을 얻을 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율법주의적인 가치와 사고를 철저하게 깨뜨려야 합니다.


더 나가기 전에 제2단원 2과 자기-의에 관한 부분을 복습하십시오. 


⑴ 사도 베드로의 예


율법주의적인 사고가 얼마나 무섭고, 또 그것을 얼마나 철저히 깨뜨려야 하는가에 대한 좋은 예를 갈라디아서 2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11-21을 읽고 다음의 물음에 답하십시오. 


(갈라디아서 2:11-21)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面責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베드로의 어떤 행동을 두고 바울이 그를 책망했습니까? (12-13절)


                                                                      


바울은 이 행동을 복음과 관련해서 어떠한 행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14절)


                                                                      


베드로가 이 행동을 취한 주된 원인은 무엇입니까? (12절)


                                                                      


16절을 세 번 읽고 아래에 써 보십시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여기에서 16절은 무엇과 관련하여 쓰이고 있습니까? 옳은 것에 표 하십시오.


  □ 우리가 처음 구원 얻는 것과 관련하여

  □ 12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행동과 관련하여


그렇다면 16절은 사도 베드로가 행함으로 구원 얻는다는 교리를 가르쳤기 때문에 이를 올바로 잡아주는 구절일까요? 사도행전 10:44, 15:7-11을 참조하십시오.


(사도행전 10:44)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사도행전 15:7-11)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당신은 이 사건이 왜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갈라디아서가 말하고 있는 전체적인 메세지를 참조하십시오. 옳은 것에 표 하십시오.


 □ 바울 자신이 베드로보다 더 뛰어난 사도임을 자랑하기 위하여

 □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망신을 주셔서 그를 겸손케 하기 원하셨기 때문에

 □ 율법주의적인 모든 사고와 가치관이 철저히 깨어져야 함을 보여주기 위

    하여


이 사건은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이방인 성도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이 내려오자 자리를 떠나 따로 식사하는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법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이방인들과 섞여 식사함으로써, 율법에서 부정하다고 선포된 음식들을 먹을 위험이 있으며, 그렇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부정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교의 배경으로부터 온 기독교인들도 여전히 이러한 관습과 전통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하자 베드로와 동행하던 유대교의 배경을 가진 성도들도 똑같이 했으며, 심지어 바나바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이 사건을 두고 베드로를 심하게 질책했습니다. 사도로서 어떻게 이렇게 복음을 대적하는 행동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의 이 행동을 복음을 따라 행치 않는, 즉 복음에 대적하는 행동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왜 이 행동이 복음에 대적하는 행동이었을까요? 이 행동이 겉으로 보기에는 그 당시 전통과 습관에 따른 단순한 행동인 것처럼 보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치관과 사고에 있어서 그것은 십자가의 복음을 정면적으로 대적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사람이 거룩케 되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이것은 예수를 처음 믿을 때 뿐 아니라, 우리의 날마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이 행동은 사람들이 어떤 음식을 먹지 않고, 또 어떤 종류의 사람들과 식사를 같이 하지 않음으로써 거룩케 되어진다는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율법주의적인 사고를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베드로의 이러한 행동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16절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이 구절을 구원에 관한 구절로 이해합니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구절은 보다 근본적으로 12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행동과 관련하여 쓰여진 구절입니다.


그러면 16절의 이 말은 사도 베드로가 그 동안 십자가의 복음도 모르고,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율법주의 신앙을 가르쳤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당연히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실, 이방인들에게 가장 먼저 복음을 전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곳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습니다(행 10:43 참조). 그리고 할례의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므로 주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할례와 같은 종교적인 의식을 믿음에 덧붙여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던 것입니다(행 15:7-11 참조).


이렇게 볼 때, 이 구절은 단순히 구원의 교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구절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모든 행동과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 구절은 우리들이 날마다 그리고 순간마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삶에서 오직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만 의지하여 서야 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 사건이 여기에 기록되었을까요? 사도 바울이 자신은 사도 베드로까지 꾸짖은 사도로서, 베드로보다 더 우월한 사도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사건을 여기에 기록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 뿐 아니라, 이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 사건이 여기에 기록되었을까요?  갈라디아서 전체의 맥락을 살펴보면 이 점은 너무나 선명합니다.


성경은 우리 삶에서 모든 율법주의적인 사고를 철저하게 버리고, 우리의 모든 삶과 사역이 철저하게 오직 십자가 복음의 토대에만 세워져야 할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사건을 여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사도 중의 사도인 베드로의 체면이 깍이는 것을 허락하시면서도 하나님은 이 사건을 이곳에 싣게 하셨습니다. 그만큼 성경은 이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십자가의 복음을 올바로 알고 올바로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율법주의적인 사고를 반영하는 행동에 빠진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우선 우리가 얼마나 쉽게 율법주의적인 사고에 빠질 수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중의 사도요, 가장 먼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복음을 전한 베드로, 그리고 그토록 십자가의 복음을 강력하게 전한 베드로가 율법주의적인 사고에 빠질 수 있다면, 하물며 저와 여러분은 어떠하겠습니까? 또한 이것을 보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과 사역이 십자가 복음의 토대 위에 세워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삶과 사역에서 율법주의적인 모든 가치관과 사고를 철저하게 버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예수님을 따르던 12 제자들에게까지 그토록 반복적으로 바리새인의 누룩 곧 율법주의 신앙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셨던 것 같습니다.


끝으로 베드로가 이렇게 행동한 데에는 사람을 두려워함이 주된 요인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사람을 두려워하면 율법주의적인 행동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복음위에 서는 데는 참으로 믿음과 담대함이 요구됩니다.


⑵ 우리 속에 어떠한 선한 것도 없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모든 율법주의적인 사고를 버리고, 오직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는 삶을 사는 것을 배우기 위해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우리 속에 어떠한 선한 것도 없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믿습니다. 제가 믿기로는 만약 우리들이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베드로도 바로 이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사도 베드로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사도 베드로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과거에는 그가 자기 스스로 띠 띠고 다녔으나, 이제 다른 사람이(성령께서) 그를 띠 띠우고 그를 인도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이것을 배웠습니다. 그 첫 번째 사건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26:69-75을 읽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어떻게 부인했는지를 써 보십시오.


(마태복음 26:69-75)

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맹세하며, 심지어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 엄청난 충격의 사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 더 열심으로 주님을 따랐던 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두었을 뿐 아니라(눅 18:28 참조), 주님을 따르는 데는 그야말로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캄캄한 밤중에 물위로 걸어오시던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자, 그 풍랑이 심한 밤바다 위로 발을 내디뎠던 자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두려움에 가득 차서 배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던 그 상황에서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는 절대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으며, 차라리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예수님과 동료 제자들 앞에서 장담했을 때(마태복음 26:33, 35 참조), 그 말이 전혀 빈 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능히 그렇게 하고도 남을 수 있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렇게 장담을 해놓고, 하찮은 종들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것입니다. 그것도 저주하며 맹세하면서까지 부인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입니까?


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닭이 울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정신을 차려 자신이 한 일을 깨닫고, 밖에 나가서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저는 이 눈물이 회개의 눈물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회개의 눈물도 되겠지만, 그보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의 눈물이었다고 믿습니다. 그 순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신뢰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토록 열심으로 주님을 따랐다고 생각해 왔는데, 자신이 고작 하찮은 종들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면서까지 부인한 자였던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일어난 두 번째 중요한 사건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회복시켜 주신 사건입니다. 그 당시 베드로는 몇몇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예수님께서 찾아가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다시 베드로를 찾아가 그를 회복시켜 주시지 않았더라면, 그는 절대로 일어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엄청난 죄책감과 수치심과 자신에 대한 환멸감을 가지고 어떻게 주를 위해 설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찾아가신 것입니다(요 21장 참조).


찾아가셔서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을 먹이신 다음,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씩이나 물으셨습니다(15-17절). 왜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이 질문을 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그 사건을 상기시키시면서 그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기 원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예수님의 그 질문을 들으면서,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사건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는 것 외에는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예수님은󰡒�내 양을 먹이라󰡓�,󰡒�내 양을 치라󰡓� 라고 말씀하시며 다시 소명을 주셨습니다.


바로 이 사건입니다. 그 전에 베드로는 누구보다 열심으로 주님을 따랐으되, 자기 열심으로 따랐습니다. 열심으로 치면,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베드로를 따라갈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사건을 통해서 자기 힘으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자기의 그 모든 열심은 결국 주님을 그렇게 부인하는 결과 밖에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지해서 서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이 베드로로 하여금 베드로 되게 한 것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베드로는 자기의 열심과 노력을 의지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서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이것을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께 붙들린 바 되어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보다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길지는 몰라도 주님의 은혜에 의지해서 믿음으로 사는 삶은 배울 수 없습니다. 아울러 성령께서 주관하셔서 인도하시는 진정한 삶도 살 수 없습니다. 당신 속에는 어떠한 선한 것도 없습니다. 그것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만약 당신 속에 어떠한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 속에는 어떤 선한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신의 모든 자기-의를 철저히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서는 것을 배우십시오. 그래야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오직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공로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항상 오직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서야 합니다. 이것은 순간순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2:16절에서 살펴본 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만 가능한데, 이것은 순간순간의 삶에서 의지하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믿음에 의한 삶에 대해서는 다음 단원에서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4. 성령의 조명이 필수적입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사는 데에는 성령의 조명이 필수적입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공로를 순간순간 믿음으로 의지하여 서야 하는데,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즉, 십자가의 공로가 우리에게 선명하게 깨달아져야 우리는 그것을 의지하고 설 수 있습니다.


⑴ 이길수 목사의 예


제가 아는 목사 중에 이길수 목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세워가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는 항상 아침마다 `십자가 아래로 기어 들어가려고󰡑�애쓴다고 합니다. 그 말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주님의 공로만을 의지하여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서려고 애쓴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 머무르는 동안 그는 승리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아무리 `십자가 아래로 들어가려고󰡑�해도 들어가지지 않는답니다. 그런 때는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면서 그 원인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발견하여 회개하고 나면, 하나님의 임재는 다시 회복되고,󰡐�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로 들어갈 수󰡑�있게 된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시겠다구요. 우리의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재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사실들을 알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진실로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조명이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와 능력을 선명하게 깨닫고, 오직 믿음으로 그 십자가 아래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설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놀라운 평안과 안식을 갖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아무리 십자가에 대한 이론을 잘 알고, 또 여러 차례 십자가를 의지하여 서는 경험을 하였다 할지라도, 그 순간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우리는 󰡐�십자가 아래로 들어가지지󰡑� 않습니다.


약간 다른 표현이긴 합니다만, 제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동안에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저에게 선명하게 깨달아집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그 분 안에 있는 것을 알고, 그 분도 제 안에 있는 것을 압니다. 저는 제가 오직 십자가의 공로에 의해 믿음으로 그 분 앞에 서 있는 것을 압니다.  그 때 저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안식과 평안이 있습니다. 그 분만이 목적이요 목표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욕심은 다 내려집니다. 어떠한 환경 가운데 있든지 주님이 저와 함께 계신 것을 알기 때문에, 저에게는 안식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는 믿음이 넘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제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가운데 있지 않으면, 아무리 애써도 예수님이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선명하게 `보이지󰡑�않습니다. 󰡐�인식되지󰡑�않습니다. 머리와 생각은 복잡합니다. 마음은 분주할 따름입니다. 마음의 평안이 없습니다.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저는 모든 것을 다 제쳐놓고,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힘씁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혼자서 기다리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생각나는 모든 죄를 회개하며, 막힌 부분이 있으면 알려 주시도록 하나님께 구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그 분의 마음을 구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까지 저는 구하고 또 구하고 찾고 또 찾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곧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 가운데로 저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산 십자가에 의한 삶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동일한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 중에서도 10곡 이상을 지은 분 중에 Fanny Crosby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지은 찬송들을 보면, 그가 주님과 가졌던 그 친밀한 교제가 어떠했나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그의 찬송들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는 장님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사고로 두 눈을 잃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그토록 놀라운 주님과의 교제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종종 그가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깝게 얘기할 때, 그는 󰡒�내가 처음으로 눈을 뜨는 그 날, 누구의 얼굴을 맨 처음으로 보게 될 것인지 아느냐?󰡓�고 묻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지은 찬송가 496장의 가사를 보면, 우리는 그가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았던 것을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그토록 친밀한 주님과의 교제 가운데 살았던 것입니다. 두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찬송가 496장을 가사의 내용을 곰곰히 생각하시면서 한 번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있는 보혈로 정케하옵소서


후렴 :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십자가에 가까이 내가 떨고 섰네 거기 있는 새벽별 내게 비추시네


십자가로 가까이 행케하옵소서 몸소 받은 고생도 알게 하옵소서


십자가에 가까이 의지하고 서서 게서 천국 가도록 항상 머물겠네






  이과의 요점


♡ 십자가의 의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모든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이 철저히 깨어져야 합니다.

♡  자기 속에는 어떠한 선한 것도 없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 오직 십자가의 공로를 순간순간 믿음으로 의지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 십자가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이 필요합니다.

♡ 성령의 조명을 위해 항상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