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단원 2과 믿음의 성격
제9단원 믿음에 의한 삶
제2과
믿음의 성격
믿음에 의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믿음의 성격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믿음에 의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는 믿음의 성격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인격체이신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어떤 사실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인격체이신 주님께 두는 것입니다.
⑴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의 차이를 살펴보았습니다(4단원 제1과).
⑵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믿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다음과 같이 묻는다면, 당신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그 답변을 오른쪽 빈칸에 써 보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습니까? ( )
당신은 하나님이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 )
당신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능히 채우시는 분이라고 믿습니까?
( )
모두 다 예 혹은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셨지요. 잘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잘 믿으면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것이 전혀 믿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은 귀신들도 이러한 종류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특히 야고보서 2장은 참다운 믿음의 성격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이론적으로 믿는 것이 전혀 믿음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 귀신들은 영적인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사실들을 우리들보다 훨씬 더 잘 압니다. 마가복음 1장에 나오는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사건에서도 귀신이 그 곳에 있는 어느 누구보다 예수님에 대해서 더 잘 알았습니다(막 1: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귀신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약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소위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일점일획도 의심이 없이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5:46-47). 이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믿음이 그 의미에 있어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나오는 진리들을 이론적으로 잘 믿으면, 그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다운 믿음은 그 이상임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46-47)
46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⑶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인격체이신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에 기초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성령의 조명으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 혹은 보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성령의 조명으로 발견한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참다운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성령의 조명으로 발견한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중요한 한 가지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되 부분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전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다른 것을 동시에 의지하는 것은 전혀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야고보서 1:6-8을 읽으십시오.
(야고보서1:6-8)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성경은 의심하는 자를 무엇에 비유하고 있습니까? (7절)
의심하는 자를 어떠한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8절)
성경은 의심하는 자를 바람에 따라 이쪽저쪽으로 요동하는 파도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또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두 마음을 품는다는 말은 마음속에 하나님과 다른 것을 함께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는 주께로부터 어떤 것도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러한 사람들은 어떠한 하나님의 영광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⑴ 헨리 블랙가비 목사의 예
앞에서도 살펴보았습니다만, 헨리 블랙가비 목사는 그의 책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12단원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나열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다 걸고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한다.
2.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권에 완전히 순복해야 만 한다.
3. 우리는 하나님을 실질적이고 개인적으로 경험해야만 한다.
4.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히 의지해야만 한다.
저는 헨리 블랙가비 목사가 여기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의 참다운 의미에 대해서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자기가 원하는 만큼 사랑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에 순종하되 자기가 생각하기에 좋게 보이는 부분만 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되 다른 것과 겸하여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도,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으로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친밀한 사귐을 가질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완벽하게 의지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전혀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있어, 오직 그 분만을 완전히 의지하지 않으면, 그것은 전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경우에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통해서 채우실만한 수단들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단들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거는 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의 경우를 보면 우리는 이 점을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실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여호수아 2:8-11)
8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기생 라합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십시다(수 2:8-11).
믿음은 어디에서 나옵니까?(로마서 10:17)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라합은 어떻게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까?
여리고 성에서 하나님의 행적에 대해 듣고, 그 사실을 믿은 사람이 라합 뿐이었습니까?
여리고 성의 다른 사람들과 라합의 차이는 무엇이었습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나옵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들음으로써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행적을 들은 사람은 라합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모든 여리고 거민은 다 그것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그 사실을 들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간담이 녹을 만큼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한 사람은 오직 라합 뿐이었습니다. 즉, 라합만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히 11:31). 다른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한 이론적인 사실을 그대로 믿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믿음은 매번 새롭게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거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 때마다 새롭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한 번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했다고 해서 그것이 계속적으로 지속되지 않습니다. 다음 순간 하나님의 인도에 전적으로 순복하려면, 우리는 또 다시 그 때까지의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다음의 물음에 답하십시오.
여호수아 3:8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여호수아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까?
(여호수아 3:8-12)
8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9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10 또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 11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나니 12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십 이명을 택하라
하나님의 명령대로 백성들에게 명령하던 여호수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여호수아 3:9-12을 읽고, 그의 입장이 되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요단강을 건넌 후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수 6:2-5)
(여호수아 6:2-5)
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3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그 명령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나가는 여호수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요단강을 이미 건너왔기 때문에, 그것이 이번 일을 위해 승리를 조금이라도 보장해 주었습니까?
두 차례 모두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신실하신 하나님께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순종해야 했습니다. 만약 그 일들에서 실패한다면, 그것은 여호수아에게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백성들 앞에서의 망신은 말할 것도 없고, 그는 모든 지도력을 잃게 되고, 백성들의 희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여호수아가 가진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약속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알았기에 신실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고, 그 분의 인도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히 여리고성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수아는 바로 얼마 전에 요단강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앞에 섰을 때 그는 또 다시 그 때까지의 그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 앞에 새롭게 서야 했습니다. 얼마 전의 승리가 이번의 승리를 전혀 보장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번 싸움에서 실패한다면, 이전의 승리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에 의한 삶은 매번 새롭게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고 서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믿음에 의한 삶을 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부분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대단한 영적인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쉬운 길을 택하기 원합니다. 예측 가능한 길을 택하기 원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서기보다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의지합니다.
⑴ 분당 개척 초기
몇 년 전 제가 포도나무 교회를 개척할 당시의 일이었습니다.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당시 섬기던 교회에 사표를 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분당에서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개인적으로 단돈 백 만원도 없었습니다. 사택을 비워주고 이사갈 날짜가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의 채우심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돈을 꿔서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닐 뿐 아니라, 설령 돈을 빌리려고 한다 할지라도 빌릴 곳도 전혀 없었습니다. 특히 그 당시는 이미 하나님께서 그 분의 일하시는 방법 등에 대해서 저에게 보여 주신 후였기 때문에, 그래서 요한복음 15:5의 신앙생활에 기초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교회 이름도 포도나무 교회로 주신 후였기 때문에, 저는 인간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일을 시작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저의 모습이 옆 사람의 보기에는 답답했던 모양입니다. 나중에 안 일입니다만, 그 당시 우리들과 같은 건물에 다른 교회에 나가는 성도가 살고 있었는데 그가 우리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교회를 그만두고 새롭게 일을 시작하려고 준비하는 것 같은데, 집 안에 가만히 있는 것을 보니 돈이 없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을 신뢰하며, 그 분을 기다리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평소에 알고 지내던 한 치과의사 부부가 3천만원을 헌금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섬겼던 교회의 성도도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놀라웠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우선 사택을 찾아 나섰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지역을 중심으로 집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래서 주신 집이 얼마 전까지 거하던 집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지금의 교회가 있는 건물을 주셨습니다. 사택과 교회의 거리는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생겼습니다. 이제 사택의 잔금을 위해 3천만원의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것도 한 달 이내로 그 돈이 필요했습니다. 전에는 안 채워지면 길거리로 쫓겨나면 됐지만, 이제는 계약금도 뜯기고 길거리로 쫓겨나게 될 형편이었습니다. 시간은 자꾸 지나갔지만,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겨우 며칠 남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불안하기도 하고 또 조바심이 나기도 했습니다. 또 왜 그렇게 시간은 빨리 지나가는지요. 나의 믿음 없는 소치였습니다. 그러던 중 어떤 사건을 계기로, 저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하시겠지라고 생각하면서 그 분에게 완전히 맡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전에는 그렇게도 시간이 빨리 지나 갔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시간이 왜 그렇게 안 가는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지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라는 말만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잔금 치룰 날짜를 이틀 앞두고 하나님은 한 성도를 통해서 3천만원을 채우셨습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저는 믿음은 매번 새롭게 모든 것을 걸고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임을 더욱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번의 승리가 이번의 승리를 전혀 보장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나중에 그렇게 하지 못해서 넘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이과의 요점
♡ 믿음은 인격체이신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믿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 믿음이 있기 의해서는 성령의 조명이 필수적입니다.
♡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 믿음은 매번 새롭게 하나님께 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