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설교/교회회복

제2장 다가오는 승리의 교회

발의무리 2007. 9. 5. 16:47

                                        제 2 장 다가오는 승리의 교회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네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네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17]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혹은 이 나라 가운데  멀지 않은 장래에 더 놀랍게 임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심을 위해 어떻게 우리 자신을 준비하며 또 하나님의 행하심에 우리 자신이 협력하여 순종할 것인가 하는 부분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지난 첫 번째 시간에는 교회 회복의 필요성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오늘은 두 번째 시간으로 다가오는 승리의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처해 있는 상황은 여러 가지 면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와 너무 비슷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말세지말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놀랍게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실 교회 모습에 대해 살펴보기 원하는데,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를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는 교회의 모습을 상고해 보기 원합니다.


1. 예수님의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질 예언적인 기도입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이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한 구절이 요한계시록19장 7절입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우리 주님이 오실 때,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대해서 예언하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이 구절에서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하면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비하였으니”라는 말은 현재 능동태형이고, 시제가 완료형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구절을 보면 우리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교회가 예비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준비 될 것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그 외에도 성경 여러 곳에서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말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준비 되어 있을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요한계시록 19장을 보면 교회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전에 신부로 준비되어 있을 것을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세지말에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될 것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데, 특별히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 속에서 우리는 그 부분을 가장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를 원하는데, 첫 번째로 이 예수님의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질 예언적인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왜 예언적인 기도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삶이나 사역의 성격을 보면 선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그 전에 우리들의 기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의 기도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우리가 기도 할 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거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 14-15절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 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로 또한 아느니라” 여기에 보시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 때에 그 기도를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실 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 즉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을 알 뿐만 아니라 이 말은 믿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확실히 알고 신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또한 이루실 것을 알고 믿는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성경은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성령을 따라 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성령을 따라 구하라고 말하는가 하면 우리는 마땅히 어떻게 구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되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아시기 때문에 성령을 인도를 따라 구하게 되면 곧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라고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18절과 유다서 20절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고, 성령께서 우리의 깊은 것을 아시는 것은 고린도전서 2장 10-11절, 로마서 8장 26-27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2장 10-11절부터 먼저 보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 속에 있는 영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들을 우리로 깨닫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로마서 8장 26-27절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아시고 그  성령이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되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게 하시고,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드리는 그 기도를 들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성령을 따라 구하라고 말합니다. 사실 성령을 따라 기도하는 것은 이미 응답된 기도를 드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미리 예비해 놓으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구하게 하심으로서 우리에게 받게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부족한 인간의 경우에도 성령을 좇아 기도하게 될 때,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행동이나 그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도 임의로 하지 아니하시고 철저하게 성령님께 민감한 삶을 사셨습니다. 대표적으로 두 구절만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 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아멘. 그 외 여러 구절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또 한 구절, 요한복음 14장 17절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네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행하신 그 모든 사역, 자신이 말씀하시는 그 모든 말씀에 있어서 아무것도 임의로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의도 하신 바를 깨닫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대로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과 사역이 철저하게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아니하시고, 임의로 하지 아니하시고 성령님께 민감한 삶과 사역이셨는데, 예수님의 기도 또한 당연히 성령님께 민감해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인데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타락한 인간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도 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하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하물며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철저하게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께 드린 이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너무너무 어리석은 거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반듯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기도입니다.

또 한 가지 여기 나와 있는 기도는 단순히 단편적인 기도가 아니라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다 마치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마지막 며칠간을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같이 지내면서 성찬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14장부터 16장까지 쭉 저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모든 내용이 다 소중하지만 이 땅에 제자들을 두고 떠나시는 시점에서 저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치는 이 내용이 얼마나 더 중요했겠습니까. 그리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 집중적으로 기도한 내용이 바로 17장에 나와 있는 이 내용인데, 이 예수님의 기도가 반드시 응답되어질 예언적인 기도 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 기도에 나와 있는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이 기도의 위치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처럼 예수님께서 그 마지막으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이렇게 하나님 앞에 집중적으로 드리는 기도의 내용이 뭔가? 여기 기도의 내용을 한마디로 줄이면 다가오는 승리의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우선 하나는 예수님이 기도하는 대상의 가장 먼저는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열두제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얻어질 모든 제자들을 위한 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계속 저희, 저희, 저희 이렇게 나와 있는데 이렇게 기도한 내용을 한마디로 줄이면 예수님은 지금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또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되, 그 당시 제자들을 위해서 혹은 앞으로 얻어질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기 보다는 다가오는 놀라운 승리의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은 기도하는데, 이 교회는 어떤 특징들을 가진 교회가 될 것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교회가 어떠어떠한 교회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시는데, 종합해 보면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바라시고 추구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어떠한 모습인가를 볼 수 있고, 그리고 그러한 교회가 이 땅에 도래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시면 다가오는 놀라운 승리의 교회, 혹은 회복된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시는데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가장 중요한 것임을 우리가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기도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승리의 교회의 모습인 예언적인 기도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9장에 주님이 다시 오시기전에 ‘어린 양이 예비하였으니’라고 말함으로서 하나님의 교회가 준비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그러한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그 말입니다.


2. 다가오는 승리의 교회 모습은 다섯 가지 특징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이 오늘 여기 본문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첫째, 다가오는 승리의 교회에는 ‘전례 없이 주를 깊이 아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여기 요한복음 17장 26절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여기에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였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이 ‘여호와’라 혹은 ‘엘로힘’이라, 혹은 ‘여호와 라파’, ‘여호와 닛시’라 이러한 것을 알게 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 이름은 ‘성품’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보면 예수님에 관해서 말씀하신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었냐면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시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알게 하실 것이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가오는 승리의 교회에 있어서 가장 첫 번째 특징은, 전례 없이 주를 깊이 아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 11장 3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또한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 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그러니까 말세에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무너지는 자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때에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이 있어서 그들이 강하여 용맹을 발하는 일이 있을 것을 말씀하심으로서 말세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놀랍게 부으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요한복음 10장 14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나도 양을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여기를 보시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목자요, 그리고 우리를 양으로 비교하시면서 목자와 양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주된 목표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시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아시는 것처럼, 양인 우리가 목자이신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우리를 아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가 수없이 살펴본 대로 하나님에 관해서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게 중요하지만 바로 그 성경이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성령의 조명을 따라 개인적이고 실제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본질이요, 우리 신앙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떠나면 그것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1장에 보면 그 당시에 수많은 제사, 그 수많은 예물, 수많은 제물, 그래서 무수한 짐승, 살찐 양, 수송아지, 어린양, 살찐 짐승 등 무수한 제물을 드렸고, 안식일, 모든 절기, 대회, 월삭 등 그 많은 예배를 드렸고, 또 많이 기도했으나, 그래서 그들이 그 많은 의식은 풍부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에 이사야서 1장은 그들에 대해서 하나님을 버렸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4절에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하나님의 전에 나와서 철저하게 그 모든 절기를 지키고, 그 모든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전에 나올 때 빈손으로 나오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 많은 제물들을 하나님께 그렇게 드리고, 하나님께 그렇게 많이 기도했는데, 그들에게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다는 말이 전혀 이해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우리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드리는 소위, 의식과 희생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아는 신앙의 본질이 없으면 그는 실재로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성경적으로 하나님에 관해서 누구 보다고 더 잘 알고, 성경을 누구보다도 더 소중히 여기고, 누구보다도 성경말씀을 많이 연구하고, 그 가운데 있는 말씀들을 나름대로 지키려고 노력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성경이 말하는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고 실재로 하나님을 대적했고, 그들이 정해진 규례와 규칙을 따라 정해진 범위 내에서 하나님을 섬겼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중심은 전혀 변하지 않은 하나님과 상관없던 삶을 살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떠나면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고, 그래서 호세아 6절에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또한 신앙의 본질을 떠나면 하나님이 주신 모든 약속들이 다 거두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9장에 4-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그러면서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리라” 고 말씀하시는데, 호세아 4장 6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아는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너희가 제사장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할 것을 말씀하심으로서 신앙의 본질을 떠나면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다 거두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회복시키시고 전례 없이 주를 깊이 아는 교회로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실 교회의 모습은 전례 없이 주를 사랑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주를 아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목표는 요한복음 10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나라 갈 때까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깊이 알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예수님이 우리를 알고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를 원하시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면서 하나님의 목표는 무엇인가? 26절에 나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영어 NIV 성경에는 “내가 아버지를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지속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알리시는 목적이 뭐냐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있기를 원하시는 것이 목표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우리가 예수님을 그렇게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되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것만큼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목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그만큼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여러분,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십시오. 마르다는 참 헌신적인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친구라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자매들을 참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 지역을 지날 때면 부잣집에 가기 보다는 거기에 머물러서 그들과 함께 있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면, 예수님을 위해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서 그는 수고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실 때면 혼자만 오는 게 아니고, 제자만 해도 열두 명에다가 같이 다니는 여인들과 다른 제자들을 합하면 족히 20-30명은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도 불시에 20-30명 점심을 한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 당시 무슨 큰 부엌 시설에 가스레인지다 있는 것도 아니고, 거기다 중동의 무더운 날씨에 땀도 많이 흘렸을 것이고 고생도 많이 되고, 그래서 열심히 부지런히 분주하게 섬기는데 동생인 마리아는 그 상황을 뻔히 다 알면서도 주님의 발 앞에 앉아서 예수님의 얼굴을 쳐다보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만 듣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깐 마르다가 화가 나지요. 처음에는 동생에게 도와달라고 얘기도 하고 눈짓을 보내도 들은 척도 안하니까 참다 참다가 드디어 예수님에게 큰 소리로 “40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의외였습니다. “41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마르다는 주를 위해 헌신을 한 사람입니다. 주를 위해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하나님의 의중을 알기 원하고 주님의 마음을 알기 원하고 주님이 계신 곳에 같이 있기를 원하고 주님 그분 자신을 알기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실 것이 이것입니다. 두 사람 중에 옥합을 깨뜨린 사람은 마리아였습니다. 마르다도 헌신적인 사람이어서 나름대로 그 당시 어떠한 누구보다도 헌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열심히 봉사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주님 앞에 옥합을 깨뜨린 사람은 마르다가 아니라 마리아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옥합을 깨뜨리는 거와 같이 우리의 삶을 다 드려 우리의 모든 것으로 주님을 사랑 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은 주님을 깊이 아는 사람만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가서에 보면 주를 향한 열정이 나옵니다. 그런데 아가서에 나오는 그 열정이 이제 교회 가운데 회복될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 일들을 오늘날 놀랍게 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회복시키시는 모습 중에 하나가 바로 그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되 전례 없이 하나님을 아는 교회를 세우실 것입니다.

셋째, 전례 없이 거룩한 교회입니다.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목표는 에베소서 5장 25절-27절에 나와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대해서 얘기 하면서 예수님과 교회 사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서 내어 주심으로 교회를 세우셨는데,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한 가지 목적 중의 하나는 교회를 세우시되 이러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함 이라고 말합니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러한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 주신 목표요, 목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 요한계시록 19장에 보면 어린양의 신부가 예비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신부가 예비되되 거룩하게 예비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거룩함 속에 주를 향한 열정도 포함됩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교회를 데리러 오시되, 그저 부정적인 몇 가지 일을 안하는 그러한 교회를 데리러 오시는 게 아니라 열정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신부를 데리러 오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9장에 보면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교회가 또한 거룩하게 예비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 요한복음 17장에서도 예수님은 여러 차례 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7장 19절에서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였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되 전례 없이 거룩한 교회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전례 없는 거룩함이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는 교회의 중요한 한 특징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순서입니다. 여러분 제가 아까 이 순서를 말씀드렸는데 이 순서가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전례 없이 주를 아는 교회, 전례 없이 주를 사랑하는 교회, 전례 없이 거룩한 교회. 왜 이순서가 중요하냐면 전례 없이 주를 아는 지식과 주를 사랑하는 열정이 없으면 거룩함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거룩함은 우리가 행하는 그 무엇이나 행치 않은 그 무엇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내가 예수 믿은 다음에 술 끊고 담배 끊었다 내가 술집 가는 것 끊었다. 내가 극장가는 것 끊었다 내가 만화 보는 것 끊었다. 그것들은 거룩함의 열매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룩함은 아닙니다. 여러분 거룩함은 우리가 하는 그 무엇이나 우리가 하지 않는 그 무엇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율법을 613가지로 요약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중에 365가지는 하지 않는 것이고요 나머지는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안식일을 그렇게 철저하게 지키고 그들은 금식하고 그렇게 철저하게 구제하고 그렇게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전혀 거룩하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회칠했다는 말은 페인트칠했다는 말입니다. 겉으로는 아주 아름답게 단장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매우 그럴듯한 종교적인 모양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회칠한 무덤 속에는 온갖 사람의 썩은 것이 가득하듯이 그들의 마음 중심에는 불법과 불의와 음란과 사술과 죄악이 가득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거룩함을 무엇을 하는 것 안하는 것 이렇게 외부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될 때 종교적인 모양은 갖출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중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우리의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다시 말하면 하나님 그 분만이 나의 유일한 목표요 목적이요 열정이며 하나님 그 분만이 나의 유일한 소망이요 하나님 그 분 만이 나의 모든 것 되시는 그때에만 우리는 거룩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나눠지게 되어있고 나눠진 것이 우상숭배요 세상사랑이 영적인 간음이요 하나님과 원수 되는 거라고 그랬기 때문에 우리가 정해진 규례를 따라 몇 가지하고 안하는 것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하나님을 전 존재로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삶에는 절대로 거룩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외부적으로 거룩한 모습을 가질지 모르지만 내부적으로 세상 사랑과 탐심과 탐욕과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다툼과 음란과 사슬이 것은 절대로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거룩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정해진 규례를 따라 그렇게 이해하면 그것을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잘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영적인 우월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게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율법주의의 영적인 우월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초점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안 하고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초점이 우리가 주님을 알기 원하고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전존재로 사랑하기 원하고 그것만이 우리의 목표와 목적과 열정이 되기를 원하고 열망이 되기를 원하고 내 삶의 모든 것 되기 원해서 주님이 계신 곳에 내가 있기 원하고 주님의 의도와 의중을 알아서 내가 내 삶을 그곳에 드리기 원하고 주님이 계신 곳에 내 삶을 투자하길 원하여 주님을 추구 하게 될 때, 거룩한 열매도 우리에게 있게 될 것입니다. 죄와 세상도 이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 것들도 버리게 될 것이고 기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들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거기에 주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 순서가 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야 이 삶이 가능합니다. 주님을 아는 만큼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만큼 우리는 거룩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넷째, 전례 없이 하나 되는 교회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 또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가장 많이 기도하시는 것 중의 하나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반복적으로 기도 하신 것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보시면 하나님의 목표는 주님을 아는 것에 대한 목표, 주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목표, 거룩한 것에 대한 목표, 이 하나 되는 것에 대한 목표가 나오는데, 여기 하나된 것에 대한 목표도 나옵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21-22절에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내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절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우리가 (여기 우리는 아버지와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하나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여기에 보시면 하나 됨의 목표가 뭐냐?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된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목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 모습은 어떻습니까?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은 한편으로 잘 했습니다. 그런데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킨 후에 오늘날 지구상에는 32,000개의 교단이 있답니다. 교단이 32,000개 우리나라에도 많은 교단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단은 심지어 장로교회만 하더라도 200개가 넘는 교단이 있습니다. 그럼 같은 교단 내에서는 하나 되었습니까? 같은 노회나 지방에서는 하나 되었습니까? 심지어 같은 교회 내에서조차 우리가 하나 되었습니까? 그런데 이 하나 되는 것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너무 너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되 무엇보다 하나 되는 것을 더 많이 강조한 것을 보아도 하나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는 그 당시 고린도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다루는데 거기에 보면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부활’은 없다. 예수 믿어도 죽으면 끝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에 잘 살아야 된다고 하는가 하면, 심지어 자기 계모를 데리고 살면서 그게 자유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고,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고 그것을 안 믿는 재판관에게 가서 판결을 받고, 성찬식을 한다고 하면서 부자들은 먼저 와서 실컷 다 먹고 마시고 술취해있는 반면에 낮에 일하고 저녁에 온 지체들은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을 때가 허다하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몸을 분별하지 아니함으로 저들 중에 약하고 병들고 죽은 자들이 있었다고 말했고, 은사는 강하게 나타나는데 그 은사를 가지도 서로 비교해서 자기 은사가 더 크다고 상대방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자기 은사는 열등하다고 생각해서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사는 강하게 나타나되 아직 영적으로 어린아이인, 그래서 굳은 음식을 먹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젖을 먹여야 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 많은 문제들을 하나하나 다루고 있는데, 다루면서 제일 먼저 다룬 것이 분파의 문제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 4절부터를 분파의 문제에 대해서 다룹니다. 나는 바울 파요, 나는 아볼로 파요, 나는 베드로 파요, 나는 예수파라. 왜 다루냐면 그 만큼 하나 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 되지 못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임하지 못합니다. 징그러운 얘기인데 생각해 보세요. 사람 몸이 있는데 다 조각이 나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손가락은 손가락대로 머리는 머리대로 입은 입대로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부품은 다 있는데 이렇게 조각조각 나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거기에는 어떤 생명도 없을 겁니다. 은혜가 흐를 수 없습니다.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흐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역사를 추구하면서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면 거기에 성령님의 역사가 임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성령님의 역사가 임하는 주된 목적 중의 하나도 하나 되기 위함입니다. 그만큼 하나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과거에 첫 번째 교회를 개척해서 교회가 아주 작았을 때 입니다. 새벽기도 하는데 3명이 나왔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나면 각자 기도하다 돌아가는데, 문제는 제가 설교할 때까지는 좋았는데 기도만 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싹 걷히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하기가 너무너무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날에도 또 그러는 겁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니까 경각심이 생겼습니다. 왜냐면 우리의 예배나 우리의 모임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분이 떠오르면서 어떤 관계의 문제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세 번째 날에는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그 날 설교를 하고 난 다음에 그 얘기를 했습니다. 지난 이틀 동안 이런 일이 있었다라고. 웬만하면 넘어가려고 그랬는데 이런 것이 반복되어지면서 그렇게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말씀을 드린다고. 그런데 제가 여기서 누구라고 말씀은 안들이겠지만 관계의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하나님이 회개하라고 그러신다고. 그리고 저는 와서 기도했습니다. 나중에 들리는 얘기론, 이 세분이 나란히 앉아 있는데 우측 분도 가운데 분하고 서로 얘기하고 좌측 분도 가운데 분하고는 얘기하는데 양쪽 분은 서로 미워하는 겁니다. 이 세분이 다 같은 아파트단지 내에 살면서 두 분은 한 동에 살고 한분은 바로 옆 동에 사는 겁니다. 그런데 이분이 이쪽으로 오면 이분이 저쪽으로 돌아가는 그런 사이입니다. 어떻게 서로 새벽예배에 나왔는지는 몰라도 관계가 서로 문제가 있으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거두시는 것 겁니다. 3명 중에 가운데 분은 양쪽 2명보다 신앙이 더 성숙한 분인데, 자기는 여태까지 신앙생활하면서 ‘나만 신앙생활 잘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의 죄 때문에 자기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경각심을 가지고 양쪽을 다 전화하고 찾아가서 서로 화해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그 부분을 회복시키는 것 같더라고요. 여러분!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이렇게 차단시킵니다.

이처럼 하나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 되는 것도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순서를 따라 세워지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 되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 소중함을 다 얘기합니다. 목회자들은 다 하나 됨의 소중함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우리가 몰라서 잘 안 됩니까? 하나 되는 게 중요한 걸 몰라서 안 됩니까? 왜 안 됩니까? 자기가 내려지지 않기 때문에 안 되는 겁니다. 다 하나 되기를 원하는데,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나 되기를 원하고, 다 하나 되기를 원하는데 자기가 내세워지는 가운데 하나 되기를 원하고, 다 하나 되기를 원하는데 자기가 지도하는 범위에서 하나 되기를 원하는데 어떻게 하나가 되겠습니까? 심지어 교회 내에서 하나 되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다 자기 편 삼습니다. 만약에 두 그룹이 있다면 이 그룹은 이 그룹대로 하나님을 자기편 삼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처럼. 그리고 성경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을 얘기합니다. 저 그룹은 저 그룹대로 하나님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을 자기편 삼습니다. 성경말씀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을 인용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자기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하나 될 수 없습니다. 하나 되는 것은 언제 비로소 가능 하느냐? 1번과 2번이 이루어져야 가능합니다. 여러분 하나 되려면 철저하게 하나님중심적인 삶이 되어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되기를  원한다고 다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중심적인 된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자기중심적인 삶이 내려져야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중심적인 삶이 전혀 내려지기를 원치 않고 그것을 그대로 붙들고 있으면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인 삶이 내려지지 않으면, 실재로 하나님 중심적인 삶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라고 해도 자기중심적인 삶이 내려지지 않으면 그것은 실제로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또 “자기 아내나 자식이나 남편이나 부모를 나보다 더 사랑하면 내게 합당치 않다.” 마지막으로 “네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합당치 않다” 왜 그렇게 말씀한 줄 아세요. 예나 지금이나 우리 각자에게 가장 소중한 게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자기 자신 아닙니까? 우리 각자에게 가장 소중한 게 자기 식구 아닙니까? 남편, 아내, 부모, 자식 가장 중요한 식구 아닙니까? 그 다음에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게 돈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이 주라고 말할지 몰라도 이 부분에서 실제로 내려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전혀 주가 아닌 겁니다. 우리가 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주가 되신 삶을 산다고 해도 그것이 내게 유익이 되고 내가 원하고 내 마음에 흡족할 때만 하나님이 주가 되신 삶을 살지. 내게 대가가 치러지고, 내 자신이 내려지고, 내 자신에게 손해를 가져오고 이러할 경우에 주님이 주가 되신 삶이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내려진다는 말은 자기 자신과 자기의 식구와 돈이 내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14:33]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고 나를 좇으라.” 고 했습니다. 만약 반만 팔아서 주고 좇으라고 했으면 벌써 좇았을 겁니다. 그런데 다 팔라서 다 주라는 겁니다. 여러분! 그 부자청년에게 예수님께서 십계명 중에 5-10계명을 지키라고 했을 때, 그는 그것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한 사람입니다. 그만큼 도덕적으로 경건하게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었는데, 탐심인 돈에 대한 집착이 문제였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구원 받으려면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그런데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모실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주로 모시는 것인데,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신다는 말은 우리의 물질에 있어서도, 돈에 있어서도 그 분의 주권이 인정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는 “너희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내게 합당치 않다”는 말은 이 말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우리의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 모든 재산, 내가 가지고 있는 집, 내가 가지고 있는 퇴직금, 내가 가지고 있는 돈, 내가 가지고 있는 통장, 땅,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아무 때라도 그 분이 원하시면 그 분의 나라를 위해 드릴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도 내 이름을 내세워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오른 손이 한 것을 왼 손이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실제로 돈에 대해서 주권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드뭅니다.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서요. 우리가 다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을 살기 원한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렇게 실제로 돈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권 앞에 실제로 드린 사람 드뭅니다.

이것은 돈이 많고 적고의 차이가 있는 게 아니고 돈에 대한 집착 내려놓고 내 모든 소유권을 하나님께 드려서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기꺼이 살기 원하는 마음으로 산 사람, 다시 말하면 우리의 돈에 대한 주권도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말합니다. 그게. 우리의 신앙 속에 포함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세상과 돈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 그것을 내려놓으면 죽을 것 같아요. 여러분! 실제로 안 해봤을 거예요. 죽을 것 같아요. 그것을 내려놓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것만큼 어렵습니다. 그게 자기의 마지막 보류 같아요. 그게 있어야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줄 것 같고, 그게 있어야 내 편안한 미래가 보장될 것 같고, 그게 있어야 내 노후가 보장될 것 같고, 그게 있어야 사람 앞에 존경받을 것 같고, 그게 있어야 나도 안락한 삶이 유지될 것 같고, 그게 있어야 마음에 평안도 있을 것 같고, 그래서 그 것 내려놓으면 죽을 것 같지요. 그러니까 실재로는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고 돈이 주인이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분이 아니고 돈이 우리에게 위안을 주지요. 하나님이 우리의 반석이 아니고 돈이 반석이지요. 하나님이 산성이 아니고 돈이 산성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삶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돈 못지않게 우리에게 강한 게 무엇인지 아세요. 우리 자신입니다. 자기의 목표, 자기의 미래, 자기의 주장, 자기의 사역,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 자기 명예, 자기체면, 자기의 안락, 이 것 내려놓는 것, 십자가에서 죽는 것과 같습니다. 식구들 내려놓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우리는 다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재로 하나님이 우리의 삶과 사역에서 실재의 주인 된 점은 너무너무 찾아보기 힘듭니다. 왜냐면, 우리는 우리 중심적인 사고를 전혀 내려놓지 않고, 내 자신 내려놓지 않고, 세상에서의 물질에 대한 집착 내려놓지 않고,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관계 내려놓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실재 하나님이 이것을 위한 수단인 상태에서 말이 하나님 중심적이지 실재로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기 때문에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 실재로 안되어 집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 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언제 비로소 하나 되는 게 가능한지 아십니까? 그것은 전례 없이 주를 깊이 아는 교회,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아는 것이 자기의 유일한 목표요, 목적이요.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사람들 앞에 보이기 위해 인정받을 수 있는 종교적인 배경과 헌신과 열심, 그 당시에 사람들 앞에 내놓이면 다 인정받을만한 것이지만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김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고귀함을 인함이라. 주님을 아는 것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주님을 알기 위해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말한 것처럼, 주님 한분이면 족한, 주님이 자기의 원하는 모든 것임을 또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전 존재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서 있을 때, 우리 자신이 내려지고, 하나 되는 것이 비로소 가능합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대단히 열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풍랑이 이는 밤에 함께 배에 탔던 다른 제자들도 그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어부출신들이 다모였는데도 그들이 두려워했을 정도니까 상황이 어떠했겠습니까? 이때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오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유령인줄 알고 놀라며 무서워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를 보십시오. “선생님, 선생님이시거든 나로 하여금 오게 하소서” 그랬더니 “오라” 그랬더니 그 풍랑에 두려워 떨던 베드로가 발을 바다에 내리잖아요. 이런 대단한 열심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를 위해서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 베드로가 만약 그대로 있었더라면 그는 절대 이방인인 고넬료 집에 들어갈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그는 유대인으로 이방인의 집에 갈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베드로가 자기 열심으로 그렇게 주님을 따랐으나, 그 결과는 조그마한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그것도 저주까지 해가면서 예수님을 부인하는데 까지 갑니다. 그래서 완전히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과 절망 상태에 빠져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다시 찾아 오셔서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그것도 세 번씩이나,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태까지 네가 스스로 띠 띠고 네가 원하는 데로 다녔으나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이 너를 띠 띠우고 네가 원치 아니한 곳으로 너를 인도하리라.” 여태까지 자기 나름대로 주를 위해 열심히 살았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비전이 있었고, 자기 나름대로 의식도 있었고, 자기 나름대로 메시아관도 있었고 열심히 따랐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지고 자기 속엔 어떠한 선한 것도 없음을 인식하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로, 오늘날로 말하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서는 그 삶, 그래서 이젠 성령이 그를 띠 띠우고 그가 원치 않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보내실 때에도 그는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기까지도 순종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 됨이 가능한 겁니다. 인류의 역사 중에서 가장 큰 차별이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별이라고 합니다. 흑 백 보다 훨씬 더 큰 차별이라고 합니다. 그 엄청난 갭도 주님을 따르되, 자기 나름대로의 열심, 자기주장, 자기 의가 철저히 파괴되고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 세워지니까 그 엄청난 갭도 무너지고 하나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 되는 것, 십자가의 복음위에 서지 아니하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 되는 것,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세워 지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구호에 불과하지 실제의 삶은 되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중심적인 삶이 내려지지 않는 한 우리가 원하는 우리가 기대하는 내게 유익이 되는 범위 내에서 하나가 되지 내 자신이 내려 진 가운데서 하나 되는 것은 절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되 전례 없이 주를 깊이 아는 교회, 전례 없이 주를 사랑하는 교회, 전례 없이 거룩한 교회, 전례 없이 하나 된 교회를 세우십니다. 에베소서 4장11-13절에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것,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하나 되어야 비로소 하나 됨이 가능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섯째, 전례 없이 강한 능력의 교회입니다.
주님은 지금 전례 없이 강한 능력의 교회를 세우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 됨과도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2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3절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하나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첫째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세상이 알게 되고, 둘째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될 거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어떻게 하면 안 믿는 세상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야 말로 성인중의 한명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것을 알게 될까요?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한 것 같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세상이 알게 될까요? 어떻게 될 때 알게 될 거라 생각하십니까? 출애굽기에 좋은 예가 나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심으로 바로왕과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이 만군의 여호와임을 알게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인가? 언제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알게 될 것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만이 하 실 수 있는 일들이 교회가운데서 놀랍게 나타나게 될 때 세상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을 볼 때 세상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교회가 하나 되게 될 때 거기에 전례 없는 능력이 부어질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6절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될 때, 그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게 될 때, 주님이 우리 가운데 운행하시게 될 겁니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운행하신다는 말도 역시 출애굽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여 두루 행하시므로 그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시므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실 거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말세지말에 참으로 놀라운 능력이 나타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전형적인 예가 어디냐면 로마서 11장입니다. 로마서 11장은 이스라엘의 관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성경입니다. 그들이 참 감람나무인데 하나님이 그 참 감람나무 가지를 베어버렸다. 그리고 거기다 돌 감람나무를 접 붙였다. 돌 감람나무는 이방인을 말합니다. 그렇게 접붙인 이유는 참 감람나무인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 나게 하사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대규모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라 이렇게 말하면서 말세지말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게 여기 로마서 9-11장까지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로마서 11장 12절에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저희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무슨 말이냐면 초대교회 때 일어났던 놀라운 성령의 역사로부터 시작해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 사도 바울만 하더라도 불과 30년 이내에 그 당시 전 세계의 주요도시에 다 복음이 전파되어졌고,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고린도 교회나 에베소 교회 같은 경우는 그 숫자가 3만에서 5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 많은 교회들이 짧은 기간에 세워지고 엄청나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죽은 자들이 살아난 것은 수없이 많이 있었고 하나님의 기적과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성경을 읽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패로 주어진 거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무너짐을 통해서 나타난 거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말세지말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올 텐데, 이것이 저들의 넘어짐으로 인해서 나타난 결과라면 저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통해서는 얼마나 더 놀라운 충만함이 주어지겠느냐 라고 말하는 겁니다.

학개서 2장 9절에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고 말한 것처럼, 초대 교회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보다 말세지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비교도 안 될 만큼 더 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확정적으로 보여 주는 성경구절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여기를 보십시오. “저희의 실패와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었다면 하물며 저들의 풍요함은 저들의 돌아옴은 얼마나 놀라운 풍성함을 낳겠느냐.” “이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옳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희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일도 하리라”라고 하셨는데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요한계시록 11장 3절-6절 요엘서 2장 28-32절 이러한 구절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전례 없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부으실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씀드린 대로 여기에서 계속적으로 순서가 중요합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능력을 구합니다. 은사를 구합니다. 예,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합니다. 은사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초점이 능력에 가있으면 절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전형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여기에 이 다섯 가지 특징 중에  순서가 중요합니다. 우리 신앙은 주님을 아는 것이고 사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전례 없이 주를 깊이 아는 교회를 세우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주님을 알기를 구해야 합니다. 진실로 하나님 그 분이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면 족한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그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원하는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 되시는 그러한 삶을 추구해야합니다. 그래서 그 주님을 알기 원하여 그렇게 주님을 사모하는 그 삶, 그리고 우리의 전 존재로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함을 부으실 것이며 하나 되게 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때에 전례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으셔서 다가오는 하나님의 부흥을 이 땅 위에 보내실 것이고 그래서 성경에 이미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이사야 59장 19절에 보시면 “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편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같이 오실 것임이로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임하시는 역사가 일어 날 줄로 믿습니다.

*교회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의중
마지막으로 이 교회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의중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제가 과거에 교회 회복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교한 시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설교해 왔던 부분들이 많이 얽혀져 있는데, 이번기회에 그런 부분들을 다시 정리하면서 한편으론 전체를 다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특별히 이사야서 하반부에 나오는 교회회복에 관한 부분, 성전 건축 위에 나타난 교회회복에 대한 부분, 예수님의 삶에 나타난 교회회복에 대한 부분, 사도들의 삶에 나타난 교회회복에 대한 부분, 성전 됨 삶의 대한 교회회복에 대한 부분,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시는 것에 대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부흥과 교회회복에 대한 부분, 이러한 부분들을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지금 출발하고 있는데, 특별히 새물결선교회 초기 때, 교회회복에 대해 설교하다보면 제가 뭘 많이 느꼈느냐하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치 하나님이 옆에 계신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래, 그렇게 전해 내가 밀어줄게 전해.”

교회회복에 대해서 중요한 부분은 우리 신앙이 회복되어지고 예배가 회복되어지는 것인데, 이번 12차 집회 주제가 예배회복입니다. 그 전에는 교회회복 세미나라고 그랬는데 4차 교회회복 세미나를 할 때 제가 느낀 게 뭐냐면 하나님이 그것을 너무너무 기뻐하시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뒷받침하신 것을 느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볼 수가 있냐면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중대한 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느끼는 것으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스가랴서 1장 14절입니다.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여” 여기 예루살렘은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도 되지만 구약의 예루살렘은 신약의 교회를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시온을 향하여 하나님이 질투를 가지고 질투하십니다. 스가랴 8장 1-2절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가라사대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하므로 질투하노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질투하셔서 회복시키실 거라는 말입니다. 다시 3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사는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기를 위해서 질투하십니다. 스가랴 3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나옵니다. 여호수아와 그 동료들이 예표의 인물이라고 말함으로서 그 당시 2번째 성전을 짓는 일에서 더 나아가 영적인 상징적인 의미가 있음을 성경이 직접 말하고 있습니다.

스가랴서 3장에 보면 여호수아는 대 제사장입니다. 2번째 성전을 지어가는 일에 있어서 너무 너무 중요한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시면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사단도 있는데 사단이 계속해서 여호수아를 대적하여 하나님께 고소합니다. 그 이유는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결치 못합니다. 그게 사단에게 고소의 빌미가 되어서 사단이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고소합니다. 그랬더니 여호와께서 그 사단을 책망하십니다.“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슥 3:2] 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뭐라고 여호수아 주위에 있는 천사들에게 그 더러운 옷을 벗기고 깨끗한(이름다운) 옷을 입히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위에 정한 관을 씌우게 합니다. 이 말은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그 열정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그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가 앞으로 거룩함인데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열정을 가지고 그에게 거룩한 삶을 위한 기름을 부으십니다. 우리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 때문에, 그리고 그 더러운 옷으로 인해서 사단이 고소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질투를 가지고 그 사단을 꾸짖으십니다. 여러분 여기만 나와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에스겔 36장은 아주 중요한 부분들입니다. 교회회복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열정과 관련해서 중요한 부분들입니다. 에스겔 36장 17-27절입니다. “17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 고토에 거할 때에 그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소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18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의 위에 쏟아 19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열방에 헤쳤더니 20 그들의 이른 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니라 21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에 대해서 말합니다. 자장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이고, 두 번째는 예수님을 통한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하나님의 교회회복에 대한 예언도 들어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종합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백성들로 인해서 세상에서 조롱과 멸시를 당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도 그들 때문도 아니고 그들 때문에 더럽혀진 하나님의 이름을 향한 하나님의 질투 하나님의 이름을 아끼는 하나님의 질투 하나님의 명예를 아끼시는 하나님의 질투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키실 뿐만 아니라 저들에게 정한 심령을 주시고 정한 은혜를 주시고 정한 마음을 주시고 저들에게 성령을 부으실 것이며 저들을 정결케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스가랴서에 나오는 내용과 똑같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늘 날 많은 은혜를 붓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과 저 때문이 아님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절대로.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 볼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입술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제 자신의 삶을 돌아 볼 때,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진짜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고 계시는가 하면 너희 때문도 아니요 너희를 위해서도 아니요, 예루살렘을 아끼는 하나님의 그 질투로 인하여 혹은 우리로 인하여 열방 가운데 더럽혀진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질투하사 은혜를 붇고 계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교회회복, 하나님이 하나님의 질투를 가지고 일하실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느 때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붇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붇고 계시기 때문에 그럼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그 일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가? 아닙니다. 자동적으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부으시고 초청하실 때, 믿음으로 결단하고 여러분의 삶을 조정해서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그 일에 놀라웁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