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숨겨진 기간 2부
제6장 숨겨진 기간 2부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사55:1-13)
앞장에서는 숨겨진 기간 동안에 우리가 주님 안에서 주님을 기다리면서 주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되 반드시 수치의 기간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반드시 이 기간을 통과하게 되어 있고, 그것이 왜 있고, 그 기간 동안에 무엇을 추구해야 되는가 하는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번 교회회복 시리즈를 설교하면서 과거에도 이사야서 하반부를 몇 차례 살펴보았지만, 이번에 또 보면서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이 더 선명히 밝혀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제 개인의 삶을 뒤돌아보더라도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고,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고 계시는지 선명히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국내외 사역자들을 통해서 기도 받을 때도, 이런 저런 약속들을 주셨는데 제가 그런 부분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이해했던 것들을 더욱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한편으론 아주 신나고 한편으로는 더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하고 절박한 부분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이사야서 55장은 ‘숨겨진 기간’ 두 번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장과 연결되는 부분인데, 하나님이 세우신 일꾼들은 어떻게 주님을 추구해야 될 것인가? 특별히 숨겨진 기간 동안에 어떤 부분을 집중적으로 추구해야 될 것인가? 라는 부분을 더 선명히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겠습니다마는 이사야서 하반부에 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교회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오시는데 하나님이 오심은 항상 복과 심판이 같이 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을 보면 정확하게 그 일들이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다음 장에서는 주님의 오심과 아울러 나타나는 심판은 뭘 의미하고 어떠한 종류의 사람들에게 심판이 올 것이고, 우리는 거기서 어떻게 돌이킬 것인가? 하는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실 제 개인적으로 이사야서 55장, 그러면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55:1-2)”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생명의 양식을 얻으라. 이런 정도만 이해했는데, 제가 이사야서 하반부를 다시 보면서 이사야서 55장이 아주 핵심적인 내용이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사야서 하반부인 40-66장까지는 전체적인 주제가 회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회복을 위해서 쓰임 받을 하나님의 종들이 어떠한 자들인가? 제가 십자가를 옆으로 뉘어서 그린 그림을 통해서 살펴본 것처럼, X를 기점으로 오른쪽은 이스라엘이 종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들은 불충한 종들이고, 그 만나는 지점이 예수 그리그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성이고, 그리고 왼쪽은 교회로 예수님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무리들이 교회인데,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회복도 담겨져 있고 예수님을 통한 구속의 회복에 대해서도 담겨져 있고, 하나님의 교회회복에 대한 예언도 담겨져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일에 쓰임 받을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서도 말하면서 특별히 예수님 안에서 시대 시대마다 하나님의 교회회복을 위해서 혹은 다가올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예언도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관점에서 이사야서 하반부 전체를 보면 아주 중요한 부분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55장만 하더라도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목마른 자들아 하나님께 나와서 생명의 양식을 마시라.’ 이런 단순한 말씀이 아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특별히 오늘날 이 시대에 하나님의 교회가 절실히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 그것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부흥을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 주시도록 간절히 열망하고 사모하는 이 시점에 우리에게 너무 중요한 한 부분이 이사야서 55장에 나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같이 좀 살펴보기 원합니다.
우선 하나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많은 예언들이 예수님에 관한 예언입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고난의 종으로 오실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라고 말하는 많은 구절들이 예수님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61장은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고난의 종에 관한 구절이라고 말하지 않는 구절인데,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셔서 바로 이사야 61장을 인용하시고 난 다음에 오늘날 너희 귀에 이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심으로서 그 구절이 예수님의 삶 속에서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분도 일부 그렇습니다. 또한 그 구절들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주시는 약속이기도 하듯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 시대별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회복시키시고, 다가 올 하나님의 부흥을 준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꾼들을 세우셨는데 그럴 때마다 그러한 자들에게 주는 약속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 때 보다도 하나님께서 강한 부흥을 보내실 것을 여러 통로를 통해서 예언하고 계시고 이사야 59장만 하더라도 그 부분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이사야서 55장에 나온 이 말씀 가운데 쓰임 받을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많은 예언이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 55장을 보면 또 하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회복을 위해 하나님의 종들에게 부으시는 기름부음은 다윗의 기름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절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 에게 영영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여기에 너희가 누구냐 할 때, 아무나 갔다가 붙일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가장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가장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기도 하고, 그리고 예수님의 안에 거하는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말씀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자들에게 언약을 세우시되 다윗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를 그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름부음은 다윗의 기름부음입니다. 다윗의 기름부음이라고 하는 것은 리더로서의 기름부음입니다. “4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자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 이러한 리더의 기름부음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들에게 부으실 거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다윗에 기름부음은 그 영향력이 열방에 미칠 거라는 겁니다. “5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이사야서 49장을 보면 이 기름부음을 가장 먼저는 예수님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2장 5절입니다. “이르되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a ruler’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4절을 보면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동방에서 박사들이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 있느냐?” 이 말씀도 다 기름부음에 대한 겁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구세주로 오셨을 뿐만 아니고 통치자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목자이셨습니다. 다윗은 목자였고, 통치자였고, 왕이었습니다. 그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메시야적 기름부음이 있었습니다.
이사야서 하반부에 나오는 “다윗에게 주신 허락한 확실한 은혜라”는 말씀은 가장 먼저는 예수님 안에 성취된 겁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이야 말로 다스리는 자로 오셨고, 그리스도로 오셨고, 구주로 오셨고, 왕으로 오셨고, 목자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말씀드린 대로 이사야서 하반부에 동일한 성령의 기름부음에 대해서 말하면서 나중에 하나님의 종들에게 주신 약속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 종은 복수형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단순히 예수님에게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많은 종들에게 시대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입니다. 성경을 보거나 기독교 역사를 보면 너무 너무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이 기름부음이 바로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기름부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오늘날 다윗의 기름부음의 부류를 세우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요즘 들어와서 예언하는 많은 분들이 “사울의 기름부음이 지나고 다윗의 기름부음이 주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저도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사실 그 분들은 예언 사역자들이니까 하나님이 감동 주시면 얘기하는 것인데, 더 정확하게는 오늘 본문에 보시면 우리가 너무나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회복을 위해서 부으시는 기름부음이 뭐냐면 다윗의 기름부음입니다. 이것이 가장 먼저는 가장 온전히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폴 케인 목사님이 설교 중에 자주 예수님과 같은 기름부음을 가진 자들을 하나님이 세우실 거라는 그런 얘기를 종종 하곤 했는데, 우리가 예수님처럼 된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함께하셨던 종류의 능력들이 함께 할 하나님의 종들을 세우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12절에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기름부음을 부으시되 다윗과 같은 종류의 기름부음을 부으시고, 이 기름부음은 그러기 때문에 열방을 얻게 될 기름부음입니다. 같이 갑니다. 이사야서 49장을 다시 한번 봅니다. “6 그가 가라사대 내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존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사야 49장 6절은 예수님에 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그 다윗에게 함께 하셨던 그러한 종류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셨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께로 회복시키시고 땅 끝까지 이르러 그 열방을 구원 할 구원의 빛으로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번에도 살펴보았듯이 바울이 정확하게 이 구절을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말씀으로 인용합니다. 그럼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할 때, 예수님에게 주신 예언을 우리 임의로 취할 수 있느냐? 그건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가 임의로 취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의 감동이라고 그러면서 예수님에게 해당되는 구절을 자기에게 주셨다고 말할 때에 그게 진짜 하나님이 주신건지 아니면 내 생각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성경을 그렇게 해석해도 될 수 있느냐? 할 때, 성경 해석상의 문제다 이렇게 대두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이 성경적이라고 믿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가장먼저는 이 예언들이 예수님 안에 성취되지만 그 예수님 안에 거하는 그 시대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종들에게 예수님 안에 주셨던 약속들과 기름부음을 동일하게 주셨습니다. 바울만 하더라도 그에게 목자의 기름부음이 있고, 통치자의 기름부음이 있고, 왕의 기름부음이 있었습니다. 물론 신약시대에는 왕은 사도를 가리킵니다. 동일한 기름부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돌아오는 것에 쓰이게 하실 뿐만 아니라 땅 끝까지 주의 구원을 전할 자로 쓰셨습니다. 이처럼 다윗의 기름부음에는 자기 백성을 주께로 회복하실 뿐만 아니라 그 기름부음의 영향력이 땅 끝까지 미치게 될 겁니다. 왜냐면 다윗에게 허락하신 기름부음을 이 들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영향력이 땅 끝까지 미치게 하실 겁니다. 그런데 왜 땅 끝까지 미치게 되냐면 하나님이 거기에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여기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이 말을 NIV 성경에서는 “fore he has endowed you with splendor." 그로 번역되어 있는데, 우리말처럼 내가로 번역한다면 “왜냐하면 내가 너를 찬란함으로 옷 입혔기 때문이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영화롭게 하였다. 혹은 찬란함으로 옷 입혔다. 이 말은 이사야서 하반부를 보면 하나님이 그곳에 영광으로 임할 것을 말합니다. 종들에게 다윗의 기름부음을 부으시고 그 영향력이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십니다. 왜냐면 그렇게 열방이 몰려오게 될 것이고, 또 열방까지 가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셔서 그 곳에 같이 계실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올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여기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한번에 이사야서 40-60까지를 읽어 보시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세우실 종들이라는 말은 소수의 사람들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 모들에게 다 해당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자동적으로 포함되는 건 아닙니다. 그건 분명히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두에게 다 하나님이 초청하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름부음에 대해 말하면서 제가 오늘 설교를 숨겨진 기간 2부라고 말씀드렸는데, 오늘 이사야 55장에 보면 하나님이 세워 가시는 자들에게 있어야할 아주 중요한 몇 가지 요소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게 한편으로는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할 부분입니다. 제가 숨겨진 기간 1부를 지난 시간에 다루었는데, 반드시 배워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무리를 세우시는데, 새물결선교회 찬양 169장은 데이빗 루이스라는 분이 작곡한 것을 제가 번역한 것입니다. “창조의 아버지 주 계획 펼 치사 선택된 세대 세우소서. 온 땅에 나갈 세대....” 2절은 “열방의 왕이여 세계는 기다려요. 온전한 약속을 승리의 교회를...” 여기에 보면 ‘주 계획 펼 치사’ 그런 내용도 있고 ‘선택된 세대 세우소서 온 땅에 나갈 세대’, 그런 내용도 있고 ‘세계는 기다려요 온전한 주의 약속을 승리의 교회를’ 이런 얘기도 있는데, 지금 제가 말씀드린 이런 종들을 세워달라는 겁니다. 똑같은 내용입니다. 이 찬양 사역자도 지금 그 부분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부흥과 회복을 위해서 성경이 약속하신 그 백성을 세워달라는 겁니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 집 154장은 케빈 크로스라는 분이 지었는데 ‘이 나라 민족의 죄악과...’ 후렴 ‘이 세대를 그냥 버려두지 마소서’ 그런데 영어 가사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빗겨가지 마소서 이세대로 바로 그 세대가 되게 하소서 온 땅에서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들을 구원하소서 주를 위해 한 백성을 세우소서 주를 경외함이 우리의 깃발이 되게 하소서 우리들을 구원하소서 우리들의 신실하지 못함을 정결케 하시고 우리가 사는 이 땅으로 기도의 집 되게 하소서’ 이게 영어 가사의 내용입니다. 그럼 거기에 나오는 ‘하나님 이 세대를 빗겨가지 마시고 바로 그 세대가 되게 하소서 혹은 주를 위해 한 백성을 세우세요.’ 이 말은 다름이 아니라 성경에 약속된 그 세대, 그 무리들을 말합니다. 동일한 내용들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찬양 자주 하면서도 무슨 내용인지 모르고 그냥 찬양했을 텐데 저자들은 그런 내용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러한 무리들을 세우실 것을 여러 통로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예언 사역자들을 통해서 수 없이 많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시대가 어느 세대보다 그러한 약속들이 함축된 시대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세지말에 땅 끝까지 이르는 전례 없는 부흥이 임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그 부흥을 담을 수 있는 무리들을 세우고 계십니다. 찬양 가사처럼 그렇게 세우는데. 그들에게 주실 기름부음이 다윗의 기름부음이라는 겁니다. 이사야서 하반부는 그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에게 성취 되었고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시대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부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자들에게 있어야할 자세를 이사야서 55장은 몇 가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1. 가장 핵심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겁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이사야서 하반부는 따로 따로 떼어서 보면 여러분이 잘 이해를 못합니다. 이사야서 하반부는 40-66장까지 연결됩니다. 그래서 그 연결된 전체를 회복의 맥락에서 55장 1-13절을 읽으시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의도와 자리가 어디인가를 더 선명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이 약속에 대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회복의 놀라운 계획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약속을 제시하시며 하시는 말씀이 내게 하나님께 나오라는 겁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돈은 없어도 됩니다. 그러나 갈급함이 없으면 안됩니다.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그러면서 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할 때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 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그래서 이 구절들을 따로 떼어서 볼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행하실 놀라운 계획과 하나님이 이루실 놀라운 비전을 펼쳐 보이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함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시면,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오라” 또 6절에 보시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라” 또 7절에 보시면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부르시는 것이 ‘내게 가까이 나오라, 내게로 돌아오라, 나를 찾으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라, 하나님을 찾으라, 하나님을 부르라’ 이 말이 무슨 말인가를 이해해야 됩니다. 물론 오래전부터 나오신 분들은 제가 이런 부분을 여러 번 설명했기 때문에 무슨 의미인지 아시지만, 근래에 나오신 분들이 많이 있어서 제가 좀더 설명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여기 ‘하나님께 나온다.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분이 사업을 하는데 규모가 작았을 때는 새벽기도도 안 빠지고 주일날도 안 빠지고 십일조도 잘 드리고 봉사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점점 커지고 바쁘니까 점점 기도회도 빠지게 되고, 주일날도 빠지게 되고, 십일조도 액수가 늘어나니까 떼먹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업에 어려움을 왔습니다. 그럼 사람들은 그분을 보고 주께로 돌아오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께로 돌아오라고 하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냐면 이제 다시는 주일날 교회 빠지지 말고, 새벽기도도 다시 열심히 나오고, 십일조 떼먹지 말고, 다시 예전처럼 열심히 봉사하는 것을 주께로 돌아온다고 생각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게 전혀 주께 돌아오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주일날 예배 잘 드리는 게 중요하고, 십일조 잘 드리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게 주께로 돌아오는 게 아닙니다.
이사야서 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절기를 다 지켰습니다. 안식일은 말할 것도 없고 한달을 하나님 앞에서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매월 첫날을 드리고 모든 절기와 대회를 지키고, 하나님께 나올 때 그냥 나온 게 아니고 살찐 짐승, 수 염소, 숫 송아지, 어린양 무수한 제물을 드렸습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헌금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많이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의식을 다시 열심히 하는 것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너희가 나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나를 버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한다는 말은 단순한 종교적인 활동으로 돌아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주일날 예배 안 빠지고 드리는 것 중요하고 십일조를 안 빼먹고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게 하나님께 돌아오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하나님 그분)을 구하여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호세아서 6장 1절을 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세아 시대나 이사야 시대는 같은 시대입니다. 그렇게 많은 제사와 제물과 예배와 기도와 헌신이 있을 때에 호세아서도 정확하게 이사야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3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처럼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은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을 알기를 구하여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을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우리의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일날 빠지지 않고 아무리 십일조를 떼먹지 않아도 하나님 그분을 알지 못하고 우리의 전존재로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떠나있는 것이고, 전혀 하나님께 돌아온 게 아닙니다.
또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을 보세요. 그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보다 100배는 더 잘했습니다. 오늘날 50%이상의 성도들이 주일날 한번 예배드린다고 합니다. 오늘날 십일조 떼먹는 사람 많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안식이을 지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수확의 알갱이 까지 세어서 십일조를 드렸고 선물의 십일조까지 드렸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일년 내내가도 금식 한 번 안하는 사람 많은데, 바리새인들은 한 주에 두 번은 반드시 금식했고 하루에 세 차례씩 기도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 돈 벌면 그저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자랑하는 사람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와 자기 식구들 잘 먹고 살면 되고, 이웃이나 다른 형제에 대해서는 관심 없는 사람 많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기 소득의 일부는 반드시 구제했습니다. 이렇게 따진다면 바리새인들이 오늘날 한국에 있는 성도들 보다 훨씬 더 신앙생활 잘 했습니다. 열배 백배는 더 잘했습니다. 아니 그 이상 잘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 잘 한다는 것은 뭘로 이해합니까? 주일날 예배 잘 드리고 기도 열심히 하고 헌금 잘 드리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의식 잘하는 것을 신앙생활 잘 하는 거라고 믿지 않습니까? 그래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몇 가지 규례와 규칙을 잘 지키면 신앙생활 잘한다고 합니다. 그게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면 바리새인들은 우리보다 뺨치게 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저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날 성도들 중에 성경 읽는 사람 거의 드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기껏 해봐야 일주일에 한번 주일날 교회 올 때 먼지 털털 털고 가지고 오지 성경을 별로 읽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지식에서부터 성경적인 지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그들의 직업일 만큼 성경을 잘 알았습니다. 의식적인 면에서나 무엇을 보더라도 우리보다 훨씬 종교생활을 잘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이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왜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인격체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성령의 조명으로 그 분의 영광을 보고 그 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하나님을 우리의 전 존재로 사랑하는 거시니까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 그 분이 우리의 모든 것 되신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은 뭐냐? 바로 이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게 하나님께도 돌아가는 겁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은 우리가 보다 많은 종교적인 의식으로 돌아오라는 게 아니고 지금 말씀드린 대로 신앙의 본질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내게 와서 젖을 사서 먹으라.’ 생명의 양식을 먹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서있지 않으면 아무리 신앙적인 모양이 많다 할지라도 생명이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서 55장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젖이라든가 생수라든가 양식이라든가 이러한 것들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무리 풍부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아무리 놀라운 계획을 펼치신다 할지라도 신앙의 본질로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약속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은 신앙의 본질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호세아서 5장 15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나오되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여 나아가는 그러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여러분의 필요가 있을 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게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겁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 다 똑같은 것인데 내 삶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것, 도움을 구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기 오시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기 왜 오셨는지 모르지만 여기 부지런히 다니다 보면 뭔가 내가 은사도 더 받게 되고 문제도 해결 되고 내가 능력도 받게 되고 뭔가 사역도 좀 열리겠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오셨다면 여러분은 전혀 하나님을 찾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여 왔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 그분 자신을 구하는 것,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인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변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사야서 하반부에서 약속하신 놀라운 하나님의 유업을 위한 가장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은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과 대조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의 삶에서 선명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데로 광야 생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유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과 기적으로 애굽에서 빼내셨고, 그리고 그 시대에 그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가시면서 그들을 가나안의 놀라운 약속과 유업을 위해서 초청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에서 저들은 제외되었습니다. 그리고 좀 심한 말 같지만 하나님이 이제 그들에게 기다리셨던 것은 그들이 죽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전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저들은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 시편 103편 7절을 보시면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 길(행위)들을 모세에게 그 행사(능력)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또 히브리서 3장을 9절 보시겠습니다.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왜? 행사를 보았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저들에게 행사만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또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우선 저들은 하나님의 길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왜 저들은 하나님의 길을 몰랐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보이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럼 누구에게 하나님의 길을 보이셨습니까? 똑같은 상황에서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길을 보이셨습니다. 이걸 보시면 더 선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저들에게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행사를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행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는 천지창조 이래로 오늘날까지 예수님 시대의 제자들 외에는 그 보다 많은 기적을 경험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들은 날마다 기적 가운데 살았습니다.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은 말할 것도 없고 홍해를 갈라 육지처럼 건너고, 사막 가운데 반석에서 물이 터지고 40년 동안 저들의 신발이 닳지 않고, 날마다 새로운 만나를 먹고,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막에서 인도와 쓴 물을 달게 되고, 이 하나하나의 기적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그 많은 행사(능력)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그 많은 행사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몰랐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시대에 행하시는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의도와 의중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근심케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저들은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행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다림줄(기준) 외에는 통하지 않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모르니까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환경만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배반했고, 하나님의 노가 활활 타오르게 했다는 그 모든 것은 불신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하는 불신은 다른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저들을 의도적으로 홍해 앞으로 인도하셨는데, 그냥 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갑자기 바로의 군대가 다시 저들을 붙잡아가려고 쫓아오는 겁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400년 노예생활 끝에 겨우 탈출했는데, 아무리 돌아봐도 살아날 방법이 없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빠져나갈 길이 없고, 꼼짝없이 죽을 상황입니다.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었기 때문에 지금 복수하러 오는 겁니다. 죽지 않으면 다시 노예로 끌려가는 겁니다. 도망갈 배도 없고, 배를 만들 시간도 없고, 싸울 무기도 군대도 없습니다. 죽지 않고 끌려가면 옛날 하고는 비교도 안될 만큼 심한 고초를 당해야 되는 것은 뻔한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 죽이려 데려 왔습니까?’ 그러다가 모세에게 ‘아니,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다 데려다 죽이느냐?’ 이렇게 부르짖으면서 기도했는데, 이것을 두고 하나님은 ‘저들이 하나님을 배반했다 대적했다 하나님의 노가 활활 타오르게 했다 하나님을 거역했다 하나님을 시험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 오늘날 예수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이들의 당한 문제의 10분의 1도 안되는데도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믿음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전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환경에 기초한 믿음일 뿐입니다.
그러면 왜 이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느냐?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그대로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 분을 우리의 전 존재로 신뢰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같은 경우에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길과 의도와 목적,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즉 한마디로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40년 동안 하나님의 그 놀라운 능력과 역사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전혀 알지 못하니까 자신들이 일이 잘 될 때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려움이 닥치면 금방 불평할 수밖에 없고, 원망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면서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지도 몰랐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에서 끊어지게 되고 광야에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저들은 하나님의 길을 몰랐느냐? 성경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안 보이셨기 때문에 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보시면 알지만. 그러면 왜 저들에게 하나님의 길은 보이시지 않고 행사(능력)만 보여 주셨을까요? 그것은 저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마다 행사만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행사를 보여 주셨습니다. 행사를 구했다는 말은, 자신들이 먹을 것이 없을 때 먹을 것을 구했고,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구했고, 마실 것이 없을 때 마실 것을 구했고, 고기가 먹고 싶을 때 고기를 구했고, 이렇게 자신들의 삶의 있어서 그 필요를 따라 하나님께 구하되 하나님은 자기의 삶의 필요를 채워 주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이 똑같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 압니다. 대부분의 기도 내용이 하나님 자신을 구하기보다는 자기중심적인 기도일 뿐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따라 그저 하나님의 도움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이 말은 그런 기도는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필요가 있을 때 구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리 밤을 새워 철야기도하고 아무리 작정기도하고 아무리 금식기도해도 그것은 하나님 찾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의 도움, 즉 자기의 필요를 위해서 하나님의 손(도움)만을 구할 뿐입니다. 목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에서 우리의 필요와 우리의 도움만을 구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을 구하는 것 아닙니다. 목회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구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구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어 주셨지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몰랐습니다. 왜냐면 그들이 구하는 것은 고작 하나님의 손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행사였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몰랐습니다. 시편 106편 15절에 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그러므로 이러한 삶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영이 서서히 죽어가기 때문에 영적인 분별력이 가리워져서 하나님의 길을 더 못 보게 된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길을 모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은 모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3장에 나옵니다. 이 부분이 가장 핵심입니다. 여러분들이 많이 들으셨지만 듣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진실로 돌이켜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들어가지 못합니다. 지금 하나님이 엄청난 계획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찾으라고 우리에게 초청하시는 겁니다. 여러분이 화요정기집회에 와서 잘 배워가지고 교회에 접목하면 교회가 잘 세워지겠지 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아닙니다. 그리고 그 일은 절대 안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잘 나와서 잘 배우면 하나님의 능력도 임하고 주님 안에서 잘 세워지겠지 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런 일은 절대로 안 일어납니다. 그러면 여기에 뭐 하러 오느냐? 여러분 각자가 하나님을 찾으셔야 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찾는 길을 도와 줄 뿐입니다. 출애굽기 33장 12-13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모세는 무엇을 구했습니까? ‘주의 길’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왜요? 그는 주의 길을 구했으니까요. 모세는 하나님 그 분 자신을 구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의 길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길을 보여주심으로 내가 그 길에 행함으로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시고, 그래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머물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총은 하나님의 신임인데, 하나님의 신임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 그 무엇보다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더 이상 너를 기뻐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셨다면 모세는 그 말을 듣는 것은 자기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 치명적이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 그 분 자신이 가장 소중했으니까요. 잘 들으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기뻐하는지 안기뻐하시는지 거기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기대하는 바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지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그 분 자신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임을 잃는다는 것은 그에게는 자기의 모든 것을 잃는 것보다 더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길을 구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머물기를 구했습니다.
출애굽기 33장 1절입니다. “이 백성을 끌고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내 사자를 명해서 저 원수들을 쫓아내리라.” 그러면서 3절에 “나는(내 임재는) 너희와 함께 안 가겠다. 가는 도중에 너희를 충돌할까 하노라”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도움과 능력뿐인데,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그냥 주신다는 데 얼마나 신납니까.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2년 동안 날마다 먹은 것이라고는 만나뿐이고, 맨 날 텐트에서 자면서 나그네로 살았는데, 거기는 포도 한 송이를 장정 두 명이 맬 정도로 풍요로운 땅인데, 그것도 하나님께서 천사가 앞서 보내서 싸워 물리치시고 그냥 주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안 가시려거든 올려 보내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모세에게는 하나님 그분 자신이 가장 소중했습니다. 하나님 그분이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그 모든 복과 모든 능력 모든 사역의 확장이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그 분 자신이 소중했으니까요.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계획을 말씀하시면서 어디로 우리들에게 나오라고 말씀하시냐면 “여호와를 찾으라. 내게로 돌아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제가 이렇게 길게 말한 것은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갔을 때 그 말 몰라서 못했다라고 아무도 핑계대지 못하도록 여태까지 설명했습니다. ‘주께로 나오라’는 말은 새벽기도 빠지는 것 이제 빠지지 말고, 주일예배 빠지는 것 빠지지 말고 나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단입니다. ‘주께로 나오라’는 말은 모세처럼 하나님 그분 자신이 나의 삶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인, 하나님 그 분이 나의 유일한 삶의 이유인, 그래서 그 하나님을 구하여 나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은 여기에 선 것 같지만 다음 순간 얘기하는 내용을 보면 거기에 안 서 있습니다. 하나님을 구하여 나오는 것, 그게 비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쓴 ‘부흥’ 책을 보면, 부흥의 길을 예비한 자들은 동일하게 하나님 얼굴을 구하며 나온 자들입니다. 한 번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하나님만이 그들의 유일한 목표요 목적인 하나님 그 분 자신을 구하여 나왔던 자들입니다.
2. 두 번째는 P.L.O의 삶이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에 있어서 P.L.O의 삶은 핵심입니다. P.L.O라는 말은 Pray Listen and Obey로써 ‘Pray=기도하다’ ‘Listen=듣다’ ‘Obey=순종하다’는 말입니다. 바울을 전도했던 아나니아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 얼굴을 구하며 그 분의 길을 구하며 그 분의 마음과 의중을 구하며 기다리는 중에 주님이 명령하시면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P.L.O의 삶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전국에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치유도 받기 위해 몰려왔을 때에도 예수님은 그들을 놔두고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자주 그렇게 하셨다고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기도하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얼굴을 구하고 아버지의 의중을 구하고 아버지의 행하심을 보기를 원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신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이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을 보고 그것만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셔서 아버지의 행하심을 보이셨습니다. 즉 'Listen' 예수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온 사건은 그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날 38년 된 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여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고 해서 바리새인들이 대적할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을 대적하는 그들에게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사 아버지의 행하심을 다 보이셨다고 그러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그 일은 예수님이 혼자 임의로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 주위에는 어떻게 하면 꼬투리를 잡아서 대적할까 하고 쌍심지를 켜고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일 많이 비방한 말이 바알세불 지폈다. 사탄을 지폈다. 이단의 괴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그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순종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가 행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오늘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심으로서 아버지의 일이 곧 자신의 일이기에 사람들의 평가가 어떠하든 예수님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행했습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P.L.O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사야서 55장 1-2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 이처럼 하나님께로 나아오라고 말하는 것은 이 P.L.O의 삶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3절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즉 P.L.O의 삶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숨겨진 기간’을 살펴보면서 반드시 그 기간에 배울 것이 P.L.O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보내신 것은 저들을 시험하기 위함인데 그들을 시험하는 것 중에 하나가 여호와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성경 말씀이 우리의 양식이기 때문에 그것을 읽고 배우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듣고 순종하는 것이 생명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아침에 나가서 이슬이 굳어진 만나를 걷어다가 먹으라고 했을 때, 그들은 그대로 해야만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만나를 하루 분만 거두라고 하면 하루 분만 거뒀어야 했는데, 그들이 생각하기를 다음날 혹시 안 내릴까 해서 이틀 분을 거둬오면 썩어서 구더기가 생겨 버렸고, 안식일 전날에는 안식일에는 내리지 않을 것이니까 이틀 분을 거두라고 그랬는데 한 번 썩어서 구더기가 생긴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경험을 의지하다가 안식일 날 쫄쫄 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철저하게 P.L.O의 삶을 가르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처럼, 모세처럼 하나님의 마음과 의중을 구하며 하나님 앞에 기다리며 주님을 구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자기의 삶을 조정하여 때로는 많은 대가가 요구될지라도 사람 앞에 비방과 조롱이 포함될지라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면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계신 곳에 같이 있는 그 삶을 배우는 것이 필수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이 놀라운 계획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시되 하나님을 찾는 삶의 핵심이 바로 P.L.O의 삶이라고 것입니다. 이것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배우지 않으면 절대로 주와 동행하는 삶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목사님들이 많이 와 계신데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여기 와서 배워가지고 교회에 접목시키면 교회가 성장할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게 안 됩니다. 제가 미리 말씀드리는데 안됩니다. 낭패만 볼 것입니다. 오히려 있는 성도들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와서 듣고 배우고 돌아가서는 옛날 그대로 할 것인가? 그러면 아무런 변화도 없겠지요. 그러면 평신도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구하시되 그렇게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배워야 하나님이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를 세워 가시고 여러분의 삶에서 운행하시지 배운 것 갖다가 적용한다고 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론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변화되지 않습니다. 10년 해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을 구하고 P.L.O의 삶을 배워야 그분이 그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그 분이 세워 가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삶을 배워야 합니다. 여기에서는 어떻게 이 삶을 살 것인지 도움을 주는 것뿐입니다.
3. 세 번째는 갈급함으로 구해야 합니다.
제가 이사야서 55장을 쭉 보면서 하나님이 행해오신 일을 더 보겠더라고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누구보고 오라고 하시냐면 목마른 자들에게 오라는 겁니다. 돈이 없는 자도 올 수 있는데 갈급함으로 와야 된다는 겁니다. 이사야서 하반부를 보면 하나님께서 다가오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놀라운 약속을 여러 곳에서 말씀하십니다. 마치 퍼즐처럼 말씀하시는데 한 가지 반복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약속이 애통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한 예를 봅니다. 이사야서 61장 1-3절입니다. “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보시면 하나님께서 회복의 역사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게 하실 것은 경한 일이라 땅 끝까지 이르러 구원의 빛이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회복의 역사를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을 3절에 보면 누구에게 주실 거라고 말씀하고 있냐면 “and provide for those who grieve in Zion.” 시온에서 ‘grieve’ 애통하는 자들을 위하여 이러한 것들을 예비하실 것이요. 그 위절에 보면 “to comfort all who mourn.” 역시 애통하는 모두를 위로하며, 그래서 자세히 보시면 이 약속을 애통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보면서 더 선명히 이해가 되는 것이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그 약속이 예수님의 삶 속에서 가장 먼저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5-7장까지를 산상수훈이라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데 이게 하나님 나라 메시지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8-9장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대한 마태의 관점에서의 요약입니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5장 3-11절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팔복이 나오는데 팔복은 복골 복처럼 이렇게 하면 이런 복을 주신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를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이러한 자의 것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 질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가 주어질 것이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유업이 주어질 거라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 중의 하나가 바로 애통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마음의 자세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때론 집회를 인도하는 중에 이러한 부분들을 이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러한 부분들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우리 화요모임 가운데 한편으로는 그것이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이루어지는 이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 보면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선명하게 우리 처지를 하나님 관점에서 보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하나님의 길에서 멀어져 있는가를 인식하게 하시고, 그래서 가슴을 치며 애통해 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어떤 분은 인터넷을 통해 설교를 듣는데 한 번은 자다 보니까 목사님이 없더래요. 그래서 보니까 옆방에 가서 무릎 꿇고 엎드려 울고 계시더래요.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의 모습이 너무나 하나님을 떠나 있는가가 보이는 겁니다. 어떤 분 같은 경우에는 밤중에 누가 막 엉엉 우는 소리가 나서 깜짝 놀라서 깼더니 자기 속에서 울부짖고 있더래요.
하나님의 관점이 비춰지고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진 자신의 모습을 보며, 가슴을 치며 애통해 하는 것을 저는 이 구절을 보며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거기에 은혜가 계시는구나 하나님이 그들을 세우실 거라고, 그러한 애통함이 없는 자들은 세워지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십시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부흥 책만 하더라고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모습이 얼마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났으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얼마나 하나님의 임재가 걷혀 있으며 신앙의 실제가 자기들에게서 멀어있는가를 인식하고’ 그들은 지금 제가 말하는 이러한 것처럼 주님 앞에 애통해 하며 엎드렸습니다. 저는 그러면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습니다. 바로 그 애통함이 하나님이 바로 이 약속으로 저들을 초청하고 계시는 싸인 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애통함 없이는 주 앞에 세워지지 않는 것을 더욱 더 선명히 보게 되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우리 가운데 그 애통함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하반부에 보면 반복적으로 하나님이 애통하는 자들을 세우심을 말씀하셨고, 예수님의 삶에 정확하게 그 일이 일어났고 하나님의 부흥이 이 땅에 임할 때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사람들 중에 정확히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 가운데 하고 계신 일이 무슨 일인가를 더 선명하게 알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게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 이렇게 애통함으로 구해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연결되는 것이지 나눌 수 없는 겁니다. 제가 나누어서 했을 뿐이지 이것들은 나누어 지지 않는 것들입니다. 실제로 다같이 갑니다.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가 없습니다.
네 번째는 인본주의가 철저히 버려져야 합니다.
이사야서 55장을 7절입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 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나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기보시면 우선 내 생각 내 방법이 인본주의입니다. 이게 버려져야 주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내 생각 내 방법이 내려지지 않으면 주 앞에 못 나갑니다. 그 다음에 “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 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우리말에는 번역이 빠진 게 있습니다. 8절 앞에 "for" 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앞의 7절과 연결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 갈 때에는 반드시 자기생각 자기방법이 내려져야 되는데, 왜냐면 하나님의 생각은 내 생각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높기 때문에 내 생각 내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법을 좇아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복된 길이라는 겁니다. 내 생각과 내 방법보다 하나님의 생각과 방법이 훨씬 크고 높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이렇게 나와 있는데, 영어에 보시면 “forsake his ways” ‘악한자로 하여금 그의 길을 버리고’ “and the evil man his thoughts” ‘사악한 사람은 그의 생각들을 버리고’ 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자기 길, 자기 생각을 버려야 됨을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길과 생각이 내 길과 생각보다 훨씬 더 비교도 안될 만큼 높기 때문에 그런 걸 볼 수 있고, 또 하나는 자기 길, 자기 생각이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악한 자는 다른 자가 아니라 자기 길, 자기 생각에 따라 행하는 자를 말합니다. 인본주의가 죄입니다. 인본주의가 악입니다. 그러니까 주 앞에 나아가려면 반드시 인본주의적인 내 생각과 내 방법이 내려져야 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악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P.L.O의 삶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에서는 인본주의가 철저히 버려지는 것이 반드시 같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고 말하면서 우리 사역과 우리 삶에서 여전히 내 생각과 내 방법에 따르는 것은 전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속는 것입니다. 인본주의는 세상과의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흔히 하는 그런 세상적인 방법과 세상적인 생각에 따르는 그러한 인본주의적인 삶을 살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11절에 보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라고 말씀한 것처럼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이 생각을 따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입에서부터 나오는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P.L.O의 삶을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인본주의가 버려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떠나는 것은 우리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상은 우리 마음에 있는데, 돈이나 자기 자신이나 쾌락이나 이런 것만 우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나 성경공부나 전통적인 신앙도 우상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우리의 전 존재로 사랑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에게 하나님의 길을 제시하신 책인데, 성경공부를 통해서 하나님 그분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기를 구하기보다 성경공부를 통해 성경적인 지식이 인격체이신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해 버리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 된 것입니다. 그 특징이 삶에는 어떠한 변화도 열매도 없고 바리새인들처럼 됩니다. 그것은 예배도, 전통적인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주일날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만남인데 그래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그분의 얼굴을 구하고 그분을 추구하지 않으면 그 예배는 하나의 의식으로 전락하고 습관이 되어지고 형식으로 전락해서 바리새인처럼 정성을 다해 드릴지는 몰라도 그 속에 하나님을 알기를 열망하고 자신의 모든 것으로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하는 그래서 그 예배를 통해서 주 앞에 자신의 삶이 드려지며 주님의 뜻을 발견하여 같이 있기 원하는 자세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형식적인 예배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일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너무너무 심각하게 타락해 있음을 보이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타락하면 예배가 반드시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둘이 같이 가는데 이 부분을 보이신 겁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설교한 다음에 기도사역을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예배드리는데 설교를 끝나고 보니 벌써 12시 50분인 겁니다. 이제 10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냥 끝내기보다 기왕이면 10분이라도 주 앞에서 기다리면서 각자 하나님이 비추신대로 회개하는 그런 시간을 가졌으면 해서 성령님이 오셔서 각자에게 만져주시도록 기도하고 기다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제가 서 있는데 하나님께서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데 제가 그것을 나누면 시간이 많이 가서 그때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나누는 것도 사실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그래서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게 뭐였냐면 마태복음 23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성전을 깨끗케 하신 일입니다.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이처럼 예수님이 분을 내시고 저들을 쫓아내셨는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쫓아내셨는지 아세요? 우선 한 가지 여러분이 기억할 것은 지금 여러분의 입장에서는 이해를 잘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점은 예수님이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고 구약시대입니다. 그 시대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사 드리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될 일입니다. 예수님이 제사 드리는 자들을 쫓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제사를 드리려면 짐승이 흠이 없어야 됩니다. 흠이 있으면 제물로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예루살렘 근처에서만 오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 전국에서 왔고, 또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제사를 드렸는데, 그들이 그 먼 거리를 양을 끌고 올 수 없었을 겁니다. 양을 끌고 오다보면 몸이 축나거나 상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돈으로 사는 것이 당연히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동전 바꾸는 것도 그 당시에 동전에는 로마황제 시저의 형상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고 성전에서 쓰는 아무 형상도 없는 돈으로 바꿔서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지금 짐승을 파는 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필요한 것이고,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고 돈을 바꾸는 것도 성경에는 돈을 바꾸라는 말은 없지만 성경적인 관점에서의 그 일을 실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그들을 쫓아 내셨느냐는 겁니다. 당연히 필요한 것이고, 예배드리는데 도움이 되는 것인데, 왜 그렇게 하셨냐는 겁니다. 이게 관건입니다.
제가 지금 이 말씀을 인본주의와 우상숭배를 얘기하다가 했는데, 문제는 이겁니다. 우선 첫째는 그 당시의 신앙이 이것 하나만 보더라고 얼마나 타락되어 있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장들이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를 모릅니다. 무슨 말이냐면 우선 하나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용하신대로 이사야서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나와 있을 뿐만 아니라,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놓고 봉헌하면서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행7:49]”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왕상8:27]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왕상8:30]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전의 주된 목적은 저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본질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고, 예루살렘에서의 제사를 포함해서 모든 의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이라는 겁니다. 성전만 하더라도 의식이 드려지도록 성경에 명령되어 있지만 그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가장 주된 목적은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고,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면서 기도하는 내용이 그겁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66장 1절만 하더라도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이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몰랐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제사는 본질이 없는 채 의식을 잘하는 것이 본질로 대체한 율법주의 신앙이 가득하니까 눈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을 쫓아내시면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우선 저들이 성전 안에서 짐승을 팔고 돈을 바꿔 주었는데 어디에서 팔았겠느냐? 주석가들은 이방인의 뜰에서 팔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성전 안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남자들이 갈 수 있는 곳이 있고, 여자들이 들어 갈 수 있는 곳이 있고, 이방인들이 들어 갈 수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신앙의 본질에서 멀어지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의도와 의중이 가려집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한 것은 저들이 뛰어나서도 아니고 저들이 하나님 앞에서 특별해서도 아니고 오히려 약한 저들을 택한 것은 저들을 통해서 모든 이방나라에 주의 복음이 증거 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관점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모르니까 그들 속에 교만이 가득차서 이방인들은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들이 아침마다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 중의 하나가 사마리아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는 것을 감사했다고 합니다. 하늘을 찌르는 교만에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니까 영적인 눈이 가리워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을 위한 자리가 없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쫓아내시면서 뭐라고 말씀 하셨냐면 ‘내 집을 너희가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독점 아닙니까? 전국에서 열방에서 다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제사를 드릴 텐데, 부르는 게 값이죠! 여러분 우리나라 명절날 제사 지낼 때도 장례 치룰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 돈 따집니까? 그 때 좋다고 하면 빚을 내도 할 건데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서 그 먼 나라에서 왔는데 좋은 것 드린다고 하는데 부르는 게 값이죠. 그리고 그 많은 돈이 왔다 갔다 하는데 당연히 제사장들과 결탁이 된 것은 뻔합니다. 무슨 얘긴지 아시지요? 그게 필요한 일이었고, 성경에 명령된 일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이 가리워지니까 그들이 전혀 하나님의 길로 행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채찍을 들어 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를 오늘날 우리 삶에 적용하려면 적용할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 개인과 교회가 나름대로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을 한다고 말할지는 모르지만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져서 하나님의 의도와 의중을 모른 채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의 것들은 할지 몰라도 전혀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지 않음으로 하나님 앞에 우상숭배와 악한 행위를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주님이 주께로 돌아오라는 얘기는 그 악한 길 인본주의, 자기 방법, 생각에서 떠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거기서 돌이킴 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 그분 자신을 구하는 것이고, 그 핵심이 말씀드린 대로 P.L.O의 삶이고, P.L.O의 삶은 하나님의 의중을 구하여 주 앞에 기다리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5. 애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P.L.O의 삶과 밀접하게 같이 가는 것이 아까 말한 애통함입니다. 나눌 수 없이 같이 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악한 길에 불과한 자기 개인의 생각과 인본주의적인 방법들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우리 삶에 하나님의 길에 합하지 않은 것들은 과감하게 예수님이 채찍을 들어 물리치셨던 것처럼 버려야 합니다. 부흥의 역사 때마다 반드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부흥’ 책에 보면 부흥이 임할 때 마다 반드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중에 한 가지가 뭐냐면 분리됨의 요소라는 겁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목회자로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목회자로서 오해 받을 수 있지만 그러나 부인 할 수 없는 이것이 사실이기에 성경적인 진리요, 역사적인 사실이기에 부인할 수 없는 거라 말하면서 나눠짐의 요소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32장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우상숭배로 인해 진이 오염되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나와 함께 할 자들은 나오라고 하니까 레위인들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저들에게 앞뒤로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죽이라고 해서 그 날 3000명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저들에게 축복 하실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나눠짐을 말합니다. 이 말은 다른 교단을 만든다는 게 아니라 기존의 오염된 가치관과 신앙적인 방법과 신앙적인 태도와 자세와 사역에서 분리될 것을 말합니다. 반드시 그게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보면 모세가 다니면서 레위인 들에게 닥치는 대로 죽이라고 그랬는데, 그것은 자기 형제, 자기 자식, 자기 부모, 자기 친구를 죽이라는 거였습니다. 이 얘기는 분리되되 그 만큼 철저하게 분리될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은 부르지만 우리의 신앙적인 자세와 태도에 있어서 마치 예수님의 시대에 우리 신앙의 본질에서부터 율법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로 전락됨으로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성경에 명령된 일을 할지라도 그 가치관과 자세와 태도가 전혀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말씀에 상반되는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그러한 가운데 있을 때, 거기에 적당히 어울려 그러한 자세로 태도로 살아가면서 주님을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주님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길에 쓰임 받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게 분리됨의 요소입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구분되기를 말하는가 하면 성경에는 각자가 죽이되 자기 부모와 자식과 형제를 죽이라고 말합니다. 철저하게 분리될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따로 교단을 새로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물리적인 분리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외부적인 분리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 가치관과 자세와 태도에서의 분리를 말합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너무나 두려울 만큼 철저하게 하나님의 길에 합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분리 될 것을 말합니다. 그게 같이 가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겁니다. 그것이 기독교 역사를 통해 증명되고 있고, 예수님 시대에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채찍을 들어 내쫓으셨습니다.
6. P.L.O의 삶의 성취입니다.
그것이 특징이 될 것입니다. 이사야서 55장 10절 이하를 보면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이 말씀이 P.L.O의 삶을 말합니다. 너희가 인본적인 방법을 버리고 내게로 나오라. 너희는 내게 와서 내 길을 배우며 내 말을 들으며 내 말을 청종하며 그 길로 행하라.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각자가 주님 앞에서 기다리는 중에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그 분이 이루실 텐데, 하나님의 보내신 말씀이 그 사람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 그것이 하나님이 그를 세운 표징이 될 거라는 겁니다. P.L.O의 삶의 완성입니다. 그게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영영한 표징이 될 거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삶 가운데 있을 때 진정한 평안과 안식이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삶 가운데 살 때 저들에게 놀라운 열매가 맺힐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삶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대로 이것이 저들에게 표징이 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데 핵심은 P.L.O의 삶을 배우는 것인데, 애통함 가운데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우리 삶에서 모든 인본주의와 하나님의 길에 합하지 않는 것들을 철저하게 구분하여 버리되 이 시대의 신앙생활 중에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 그러한 사람들이 그저 그럭저럭 받아주는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그 말씀에 합하지 않으면 그것을 철저하게 끊되 레위인들에게 자기 부모와 자식과 형제를 죽이라고 할 만큼 그 가치관과 자세와 태도에서 분리되어 인본주의적인 것을 버리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기 시작하면, 즉 P.L.O의 삶을 살아가면 주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이실 것이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말씀을 따라 순종해 나갈 때, 그 하나님의 목적과 목표들을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텐데 이게 표징이 될 거라 그 말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평강이 있을 것을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시고 이것이 바로 신앙의 열매입니다. 이게 바로 요한복음 15장에 말씀하신 열매입니다. 이 모든 표징이 가장 첫 번째로 예수님의 삶에서 이루어졌고, 그리고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 이루어질 거라 그랬는데 이게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무리의 표징이 될 거라 그 말입니다.
이사야서 55장뿐만 아니고 이사야 하반부 전체가 다 그것을 말씀하고 계신데 이사야서 55장은 또한 이러한 전체적인 문맥에서 하나님이 세우실 무리들이 너무너무 중요한 한 부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무너무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은 이러한 무리들에게 다윗의 기름부음을 붓고 계시다는 겁니다. 이것은 너무 놀라운 일입니다. 이 기름부음이 바로 예수님에게 함께하셨던 기름부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 그러한 기름부음이 임하실거라고 많은 분들이 얘기했는데 그것과 똑같은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 기름부음은 땅 끝까지 미치게 될 텐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 곳에 임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이리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가운데 어떻게 설 것인가는 이미 길은 다 선명히 제시되었고 이제 저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행하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로 우리가 그 가운데 서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도와주시기를 끝까지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