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하나님의 부흥과 섬김
제8장 하나님의 부흥과 섬김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사42:1)
이사야서 하반부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에 관한 약속 가운데 우리에게 아주 중요하고 절실하게 필요한 부분이 섬김입니다.
이 부분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저 개인적으로도 더 선명해지는 것 같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그동안 해 오셨던 일, 또 우리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이런저런 감동들을 주셨는데 그러한 감동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을 더 알겠고, 특별히 하나님께서 행해가시는 일들을 이제는 말씀(성경)을 가지고 지금 하나님이 이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이라고 성경에 이렇게 약속되어 있다고 제시할 수 있도록 선명하게 보여 지는 것 같아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너무 좋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시키기 원하시고 또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귀한 일을 우리 가운데서 이루고 계신데 거기에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의 교회의 회복과 관련된 섬김에 대해서 살펴보기 원하십니다.
제가 두 번째 쓴 책이 부흥을 위한 하나님의 군대라는 책입니다. 한번은 필리핀에서 신학교를 운영하시고 계신 어떤 분이 그 책을 읽고 난 다음에 하시는 말씀이 그 책을 번역해서 신학대학원에서 교재로 써도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책이 하나님의 다가오는 부흥과 관련해서 중요한 부분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거기에 복음에 대한 부분이 나오고, 신앙의 본질에 대한 부분들이 나오고, 또 하나님의 음성 듣는 부분 등 여러 가지 하나님의 군대로서 하나님을 따라가는데 필수적인 요소들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부분들을 그동안 많이 강조하고 그동안 많이 염두에 두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섬김에 대한 부분을 다시 살펴보면서 한편으로는 제 자신이 이 부분에 대해서 더 선명히 인식하며 그 가운데 서 있지 못했구나 하는 것을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더 선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 같고, 더 선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 같고, 더 선명히 제 머릿속에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을 것 같고, 늘 자신의 삶을 더 비춰볼 필요가 있는 것 같고, 그래서 거기에 늘 나 자신을 비춰보면서 하나님의 기준 가운데 더 서려고 주님 은혜를 구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그것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임을 개인적으로 더 보게 되었습니다.
한 편으로 이 부분이 쉽지 않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살펴보면 알지만 이 메시지가 절대로 가벼운 메시지는 아닙니다. 항상 그래왔듯이 우리 자신들을 돌이켜볼 때,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이 너무나 여기에서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어쩌면 듣기 싫을 수도 있고,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 그 가운데 서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하나님의 기준을 우리 마음속에 늘 염두에 두고 우리의 힘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길에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절실하게 구하는 그 마음이 저와 여러분 속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이 운행하실 때 우리가 잘 섬겨갈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을 몇 절 보겠습니다.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사49:1-3)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롬11:11-12)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 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롬11:25-27)
여기에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거역함으로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롬 9장, 11장은 이스라엘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러면서 참감람나무인 이스라엘은 가지가 꺾이고 그 자리에 돌감람나무인 이방인이 접붙이게 되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이 꺾어진 것이 하나님의 계획에서 완전히 무산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방인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여 저들로 시기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12절에 보시면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다시 말하면 오순절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사도들을 통해서 그 당시 세계로 퍼지게 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고, 놀라운 은사가 나타났고, 놀랍게 교회가 세워졌는데 이것을 두고 저렇게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이방인들의 풍요함이 되고,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었다면, 말세지말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텐데 저들이 돌아옴은 어떠하겠느냐 라는 얘기입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보다 훨씬 더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예언사역자들이 학개서 2장 9절에 나오는 “이 전에 나중 영광이 처음 영광보다 크리라.”는 말씀처럼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하나님의 역사보다 말세지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훨씬 더 강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언 사역자들을 통해서 주어질 뿐만 아니라 성경적인 근거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의 수가 차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이사야서 59장에 19절입니다. “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돋는 편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같이 오실 것임이로다” 이 말은 동쪽에서 서쪽, 땅 끝에서 땅 끝까지 온 세상에서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고 여호와의 영광을 경외할 때가 있을 것인데,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같이 오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 ‘기운’, ‘하나님의 호흡’은 여기에서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이제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이사야서 59장의 이 예언은 어느 때보다도 말세지말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큰 부흥을 온 세상에 보내실 것을 볼 수 있고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실 날이 있을 것을 말해주고 있고, 그것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대규모로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과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고, 앞에 구절들과 같이 살펴보면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때 초대교회에 나타났던 그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가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 가운데 부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 중 하나가 뭐냐면 섬기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42장, 49장도 마찬가지입니다. 42장에 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신을 부으실 텐데. 누구에게 붓겠다고 말하고 계신가면 종에게 부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섬기는 자에게 부으실 거라고 말씀합니다. 49장 2절도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이처럼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부으시되 날카로운 칼과 강한 화살처럼 말씀의 권세를 주심으로 흑암의 권세와 진지들이 다 무너져 내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에 관한 하나님의 예언이 가장 먼저는 예수님의 삶에서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을 보면 예수님의 삶 속에 말씀의 권세가 아주 날카롭고 예리하게 역사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에 사람들이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고 권세있는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인해서 놀랬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10장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견고한 진은 사단의 진지를 가리키는데 사람들의 사고체계, 즉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입으로 뭐라고 말하던 상관없이 그들의 가치관을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고 말할지 몰라도 유일한 신이라고 말할지 몰라도 날짜를 잘 받아서 이사를 해야 귀신에게 침해를 안 받는다고 그렇게 믿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무당을 찾아 갑니다. 왜냐면 사람들은 자신의 사고체계를 따라 행동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고체계가 사단의 견고한 진지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행동을 좌우합니다. 그래서 사고체계가 하나님의 기준으로 서 있지 않으면 사단이 사람을 지배하고 행동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삶이 그리스도께 복종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합니다. 이것이 견고한 사단의 견고한 진입니다. 예를 들면 율법주의 기복신앙 인본주의만 하더라도 율법주의는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율법주의가 어디에 있느냐면 사고체계에 있습니다. 가치관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러니까 할례를 받는 것, 그 자체가 율법주의가 아니고 무슨 의미로 할례를 받느냐는 그 이해에 율법주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사고)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은 그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행동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가치관이 하나님의 기준에 합한 가치관이 아니면 그것이 사단의 견고한 진으로서 그 사람은 그 삶이 그리스도께 실제로 복종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가치관이 그릇된 가치관이니까요. 아무리 신앙의 모양이 가득하다 할지라도 행동은 그렇게 안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릇된 가치관이 있게 될 때, 하나님을 아는 것은 대적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 종교지도자들만 하더라도 그들은 예수님을 대적하되 무엇보다 하나님을 대한 열심을 가지고 대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하나님께 복종되지 않고, 아무리 자기들이 열심히 노력해도 그릇된 가치관을 따라 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리워집니다. 그래서 본인들은 하나님께 대해서 열심히 행한다고 하지만 사도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지식을 따라 행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6장 2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하며 회당에서 쫓아내며 또한 너희를 죽이는데 넘겨주면서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할 때가 올 것이라”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심지어 죽이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라 그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냐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의 가장 견고한 진은 사고체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섬기는 종들에게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부으시되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예리한 화살같이 기름부음을 주시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의 권세를 주셔서 말씀의 권세로 하여금 그 사단의 견고한 진들을 무너트리고 파해지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되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어지는 그러한 길로 인도될 것을 말하고 이것이 가장 먼저는 예수님의 삶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42장에 보더라도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이렇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성령을 놀랍게 부으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니까요. 그러면서 이사야서 61장에서도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 말씀을 읽으신 다음에 오늘날 너희 귀에 이 말이 응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을 부으시되 누구에게 부으시겠다고 말하고 계신가 하면 종에게 부으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섬기는 자에게 부으시겠다는 그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이러한 놀라운 역사를 기다리며 그 가운데 우리가 동참하기를 원할 때, 거기에 중요한 한 부분이 뭐냐면 섬김입니다. 이 섬김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예수님의 삶에서 가장 표본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예수님은 무엇보다 섬기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섬김과 하나님의 능력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몇 군데 성경을 보겠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섬기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22장 27절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막10:4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예수께서 침례(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6-17]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눅4:18-21]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3:34]
여기 요한복음 3장에 ‘주심이니라’라는 말은 현재형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예수님께서 침례(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그 위에 머무신 사건을 말하는 게 아니고 그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성령을 한량없이, 제한 없이 부어주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증거로 사도행전 10장 38절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이렇게 말함으로서 예수님의 삶 속에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놀라운 성령의 기름을 부으셨는데 무엇보다 예수님은 섬기는 종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개가 밀접하게 관련이 있고 그리고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받기를 원할진대 중요하게 요구되는 한 가지 자세는 섬기는 자세라 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하나님은 섬기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섬김에 대해서 중요한 몇 가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자기가 비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섬김이 되려면 자기가 비워져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사도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말하면서 섬김에 대한 부분을 예수님을 예로 듭니다. 그러면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여기에 자기를 비웠다는 말은 신학적으로도 많이 얘기가 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온전한 하나님이시자 온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무엇을 비웠는가?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어떠한 부분들을 포기하셨는가? 이러한 책들도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그러한 부분들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무소부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계실 때는 예루살렘에만 계셨지 동시에 갈릴리에는 안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셔서 지금 중국에도 계시고 여기도 계시고 필리핀에도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살펴보고자 하는 부분은 이 부분입니다. 빌립보서 2장은 예수님의 섬김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인데 우리의 섬김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다운 섬김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자기가 비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폴 케인 목사님을 아주 많이 존경합니다. 제가 그 분 테이프를 들으면서 많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분 같은 경우는 지금 70세가 넘으셨는데, 태어날 때부터 기적적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어머니가 자궁암 외에도 암이 3가지가 더 있었는데, 의사들이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는데 임신을 하게 되었고, 또 임신을 했어도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해서 집에 돌아왔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그녀의 어깨위에 손을 대시면서 네가 죽지 않고 살리라 그러면서 네 배속에 있는 아이는 남자인데 이름을 아무개라고 지으라고 그리고 그 아이가 앞으로 이러이러한 일을 할 거라고 말하고 천사가 떠나갔는데 그 즉시 암이 다 낫고 그리고 건강한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참고로 잭 디어 목사님이 쓴 ‘놀라운 성령의 능력’이란 책에 그런 얘기들이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폴 케인 목사님이 태어났는데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자기에게 주신 말씀을 어머니가 아들에게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원하시면 직접 말씀해주시기를 기다린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를 갔다 왔는데 예수님이 자기 방에 찾아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무서워서 침대 밑으로 숨었는데 자기하고 자기 누나가 듣는 그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그분의 소명을 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 누나는 평생 믿음의 반려자로서 그분을 위해서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강권적으로 세우셔서 결혼도 하지 않고 오늘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10대 때 하나님의 성령의 강력한 기름부음이 임해가지고 그 당시 치유사역이 미국 전체를 휩쓸고 있던 때입니다. “Healing movement"라고 해서. 집회하면 3000명, 4000명 모이는 곳에 가서 설교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집회 중에 환자를 위해서 그 자리에서 기도해 주었는데, 어떤 한 분이 나중에 뭔가를 알콜에 담아가지고 왔는데 그 분이 하는 말이 자기가 위암이었는데 그날 기도 받고 집에 돌아갔는데 뭔가가 넘어오려고 해서 토했는데 암 덩어리가 넘어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지고 가서 검사해 보았더니 암 덩어리 중에 일반 세포, 즉 암이 안 걸린 세포는 하나도 안 붙어 있을 만큼 암세포만 딱 도려내다시피 해가지고 토해내서 그분이 너무 놀라워서 그것을 알콜에 담아가지고 찾아온 겁니다. 또 얼마나 강하게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시는지 서 있으면 사람들의 죄가 보였다고 합니다. 한 번은 오클라호마에 있는 교회의 초청으로 집회에 갔는데, 어떤 여자 한 분과 남자 한 분이 서로 놀아나는데 이 집회가 끝나면 둘이 도망가려고 하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일으켜 세워놓고 당신 지금 저 여자하고 놀아나면서 이 집회가 끝나면 도망가려고 하지, 그렇게 말했더니 그 남자가 성질을 내면서 얼굴이 울그락 붉그락 하면서 무슨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해서 사람을 모함 한다고 그러면서 죽일 기세로 달려 나오더랍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붙잡는 것을 가만 놔두라고 했데요. 그랬더니 쫓아 나오다가 그 앞에 와가지고 엎드러져가지고 고백하고 내가 진짜로 그랬었다고 회개하고..... 그런데 그 분이 그 교회에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집사님이었답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집회를 마쳐야 되는데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갑자기 없어졌더래요. 그때는 축도도 어떻게 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그래서 목사님이 집회를 끝내야 할 텐데 갑자기 없어진 겁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라디오로 설교하는 분이라 그 다음날 라디오를 틀었더니 그 목사님이 하는 말이 여러분, 어제 밤에 집회에 와 봤습니까?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어디 있었는지 모르셨지요. 사실 피아노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더래요. 그때까지 하나님 앞에 이미 자기가 아는 죄를 다 회개하였지만 혹시라도 그 집사님처럼 또 들어 날까봐 무서워서 담임 목사님이 축도하고 집회를 끝내야 되는지 알면서도 피아노 뒤에 숨어서 안나온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이 강력하게 임했던 분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말세지말에 내가 새 분류의 일꾼들을 세울 거니까 그 때까지는 숨어있으라고 하셔서 그때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 시점에서 모든 사역을 그대로 내려놓고 25년 가까이를 자기 어머니와 살면서 있다가 80년대에 하나님이 다시 그 분을 드러내신 겁니다. 그랬는데 과거에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미국만 하더라도 놀라웁게 임했던 것을 직접 목도한 분이고, 그 가운데 있었던 여러가지 문제점들도 직접 경험한 분인데, 하나님이 그분에게 사역을 그만 두고 뒤로 물러나라고 할 시점에도 몇 만 명이 들어가는 큰 텐트를 치고 집회를 많이 했는데, 오랄 로버츠 목사님의 책을 보면 그 분이 집회할 때 한번은 광풍이 불어서 텐트가 뒤집혀 지면 사람이 많이 다칠 상황인데 바람이 너무 강해가지고 텐트가 그대로 들려서 하늘로 올라갔다가 그대로 내려와서 한 사람도 안다친 그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한참 그럴 때입니다. 그 때 사람들이 자기 사역을 홍보하기 위해서 ‘세계에서 제일 큰 텐트의 사역자’ 이렇게 광고한다는 겁니다. 만 명이 들어가는 텐트를 만들면 다른 사람은 만 이 천명이 들어가는 텐트를 만들어서 홍보하기 시작하고, 그래서 사람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자기들을 내세우기 시작하니까 변질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폴 케인 목사님에게 아귀다툼 하는데 있지 말고 사역을 중단하고 뒤로 물러서라고 앞으로 하나님이 세우실 새 부류의 일꾼들 앞에 세울 거라고 그러면서 sign으로 새 부류의 일꾼들 앞에 내가 너를 세울 때까지 너의 어머니를 데려가지 않을 거라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하나님께서 그 분을 새롭게 세우신 이후 한참 있다가 어머니가 103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서 25년 기다리면서 기다릴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그 분에게 세상일을 못하시게 하셨답니다. 그러면 어떻게 먹고 살았느냐? 우리로서는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어떤 때는 길을 가면 하나님께서 우체국에 들어가서 ‘네 앞으로 온 편지를 달라고 하라.’ 그러신데요. 미국은 General delivery라고 보내는 사람이 어떤 우체국으로 보내면서 그 사람 이름으로 보내면 주소가 따로 정해지지 않았을 경우에 그 사람이 자기 신분증을 가지고 가서 자기 이름 대고 찾는 그런 제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데 하나님이 가라고해서 자기 신분증을 제시하면서 나한테 온 편지 달라고 했더니,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러면서 편지를 가져와서 받아서 열어보니까 자기가 아는 친구 사역자인데 그 분이 보내면서 ‘이 편지가 당신께 어떻게 도착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리로 돈을 보내라고 해서 보낸다고 그랬다고 그러면서 돈을 그 우체국으로 보낸 겁니다. 그렇게 해서 채워주시고. 또 어떤 때는 일 년에 두 차례씩 집회를 나가게 하신답니다. 그러면 많지는 않지만 사례비를 주는데, 집회 가운데 하나님이 그렇게 놀라웁게 함께 하셔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어먹게 하셔서 더 이상 그 분을 초청하지 않도록 딱 막아버리시는, 이러한 과정으로 25년을 기다리게 하신겁니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의 부흥의 때에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실 때를 경험했고, 또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걷히는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쏟아져 버리는지 역사적으로 목도한 분이고, 그 가운데 있었던 분이고, 그래서 그 분의 설교 중에 보면 과거의 부흥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들 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시키는 요소들, 이러한 부분들을 하나님이 주신 감동을 따라서 실제적인 사역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보이신 부분들을 나눈 부분들이 있는데 이러한 것은 참 소중한 것입니다. 왜냐면 긴 시간 하나님이 역사하신 그 중심에 같이 있었던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 역사를 직접 경험하며 자라온 오늘날 까지 있었던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소중한 부분인데. 그분이 하시는 말씀중의 하나가 예를 들면 이사야 하반부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이사야 하반부를 알게 된 계기가 미국의 켄사스 지역의 한 교회에서 있었던 세미나를 참석했고, 그 후로 거기를 종종 갔었는데 거기에 ‘릭 와일리’ 라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 몇 년 뒤에 가니까 뇌 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그래서 못 만나고 왔는데, 그분이 기도 사역자중의 한 명이였는데 저보고 이름이 뭐냐고 그래서 제가 이름을 댔습니다. 그랬더니 한국에 있는 어느 한 목사님을 아냐고 당연히 안다고 했지요. 그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분인데, 그러면서 하나님이 주신 감동을 나누는데 하나님께서 미국에 가기 얼마 전부터 저에게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서 보여 가신 부분들을 그대로 얘기 하는 겁니다. 그 목사님과의 관계도 그렇고 우리나라 전반적인 부분. 그러면서 이사야 49장 1-2절을 저한테 주신다고 그러면서 이것은 간단한 내용이 아니고 아주 중요한 내용이라고 그러면서 끝났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사역 중에 놀라운 일들도 있었고 그랬는데 그 뒤로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모님을 밤중에 깨우셔서 어떤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모님이 밤중에 저한테 전화를 하는 겁니다. 여자가 남자한테, 그리고 자기 목사님 몰래 전화한다고, 하나님이 자기 목사님에게 말하지 말라고 그랬다고, 그 때 어떤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느 교회 집회를 갔는데 거기서 어떤 사모님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을 열어주셔서 그림을 쫙 보이시고, 그러고 나서 제가 그 다음 주에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 집회를 갔다 오다가 ‘폴 케인’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는데 이사야서 49장에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이 세우실 무리들에 대한 약속을 주셨는데 이 모든 게 하나로 연결 되었습니다. 이사야 49장에 나오는 마광한 화살이니 날카로운 칼, 그러한 부분들도,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설교를 통해서 성도들의 왜곡된 가치관이 끊어지게 하시고, 어떤 때는 율법주의가 무너지게 하시고, 어떤 때는 날카로운 칼처럼 역사하십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의 삶에 근본적으로 변화를 일으키신 적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 게 전혀 아닙니다. 저하고는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기름부음 차원에서 이해하지 못하면 저를 보고 제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아는데 제 아내한테 물어보면 아시겠지만 저는 전혀 그런 사람이 못 됩니다. 어떤 때는 설교 듣고 포도나무교회에 와가지고 실망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괜찮은 사람인 줄 아는데 저는 전혀 그런 사람이 못됩니다.
새물결 선교회를 세우면서 말씀하셨던 부분들이 저한테만 말씀하시면 그렇다 치더라도 최근만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어떤 분에게 보이셨다고 하면서 말씀하시는데 그 내용들이 다 연결되는 겁니다. 한 마디도 제가 그 분들에게 안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셨던 말씀을 보이십니다. 그러면서 이사야 하반부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이런 부분들을 하고 계시는구나. 이런 부분들이 중요하구나하는 것을 부분적으로 알게 되었고, 그러면서 이사야서 54장만 하더라도 갈라디아서와 연결해 볼 때 그 말이 선명하게 이해되어집니다. 그러한 전반적인 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런 통로를 통해서, 감동을 통해서, 성경을 보는 중에 하나님께서 비추신 겁니다. 깨닫게 하신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렇게 정리하면서도 더 선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춰지는 겁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어떠한 예언에 기초해서 어떠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을 토대로 해서 어떤 때는 감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행해가시는 것을 말할 정도였다면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게 바로 하나님이 이 일을 하고 계신거라고, 하나님이 이런 일을 오늘날 이루고 계신거라고, 이 일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도록 선명히 말씀을 통해서 보이신다는 겁니다. 그 얘기입니다.
그러한 어떤 차원에서 이사야서 49장을 그 분도 강력하게 강조하신 게 말세에 어느 때보다 강력한 성령의 능력을 부으실 텐데 누구에게 주어지느냐? 섬기는 종들에게 주어질 거라는 겁니다. 섬기는 종들에게 주어질 거라 말하면서 그 분이 빌립보서 2장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예를 들며 자기를 비워야 되는데 자기를 비운다는 말은 이러한 네 가지가 비워진 것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당연히 그 네 가지뿐만 아니라 보다 더 많은 것들을 비우는 겁니다. 이 네 가지는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역을 할 때에 흔히 경험하는 중요한 요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네 가지는 첫째는 교만이 비워져야 허고, 둘째는 탐심이 비워져야 되고, 셋째는 앞서고자 하는 게 비워져야 되고, 넷째는 사람들 앞에 잘 보이고자 하는 것이 비워져야 합니다.
자존심이 비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게 간단한 것 같지만 너무 너무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기도사역을 하나 감당하더라도 이 부분이 비워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절대 안됩니다. 하나는 자존심이 비워져야 합니다. 이번에 집회를 가면서 제 아내와 같이 갔는데, 같이 얘기를 나누는 중에 제 아내가 신문기사에 나온 두 영화평론을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두 영화가 공통점이 있는데 일본군이 영국군을 포로로 잡아서 다리를 건설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군인 영국군이 그 다리를 파괴해야 되기 때문에 파괴하러오는 옵니다. 그럼 영국군은 포로이니까 그 다리를 짓지 말거나 자기들이 도와서 파괴해야 될 텐데 자기들이 짓고 있던 다리라는 자존심 때문에 자기네 국군인 영국군과 싸우면서 그 다리를 짓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끝나는 두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우리가 무슨 짓 했나?” 하는 겁니다. 우리가 자존심이 내려지지 않으면 그들과 똑같을 수 있습니다. 주의 일 하면서 당연히 탐심이 내려져야 됩니다. 3층에 있을 때 어떤 목사님을 초청해서 집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기도사역자 목사님들을 앞으로 부르더니 사람들을 기도해 주라는 겁니다. 그런데 한분이 기도해주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니까 손을 들으세요. 그리고 손을 대니까 뒤로 쓰러지는 겁니다. 참고로 위로 손들라고 하고 가만히 밀면 쓰러집니다. 그런데 저는 이쪽에 있고 그 분은 저 쪽에 있는데 사람들이 줄을 섰다가 전부 다 그 쪽으로 가는 겁니다. 사역하다보면 사람들 앞에 잘 보이고자 하는 생각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감동을 주셔도 그렇습니다. 옆에서 둘이 같이 기도 사역하는데, 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감동을 주시되 따발총처럼 막 주십니다. 그런데 자기에게는 감동을 전혀 안주십니다. 이럴 때 하기 쉬운 게 자꾸 비교되는 겁니다. 기도 받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를 평가할까 싶을까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 자기도 감동 받았다는 것을 자꾸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역은 절대 오래가지 못합니다.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A만큼 받았는데 거기에 자기 생각을 부풀려 자꾸 덧붙이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말을 많이 해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게 아니면 첫째는 유익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세우지 못합니다. 또 하나 그 자세가 버려지지 않으면 절대로 오래 못갑니다. 왜냐면 자기가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 중심적으로 앞서고자 하는 자세, 비교하는 자세, 남보다 낫고자 하는 이러한 자세가 있기 때문에 금방 코너에 부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들을 때는 나는 안 그런 것 같지만 여러분이 막상 기도 사역해보면 여러분이 안 그러려고 해도 그러한 자세가 들어가기 쉽습니다.
앞서고자 하는 것이 비워져야 합니다.
앞서고자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홍보의 영입니다. 왜냐면 홍보의 영 배후에는 사단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하나님만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홍보의 영은 자기가 드러내기 위한 겁니다. 자기가 안 비워져서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 사역을 홍보한다면, 집회할 때 알려야합니다. 그러므로 집회하는 것을 알리는 차원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사람들에게 홍보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것, 혹은 그 말의 진실성과는 상관없이 그저 사람들을 오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전혀 자신이 비워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자세를 성경에 보면 너희가 시기와 개인적인 야망이 너희 속의 있으면 그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은 사단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이라고 그랬는데 이러한 자세가 내려지지 않으면 미혹되기 싶습니다. 그리고 절대 오래 못갑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도 금방 타락하게 되고, 하나님의 예언이 강력하게 임해도 하나님께로 나온 것만 분별되어져서 날카로운 칼같이 예리해야 되는데, 하나님께로 나온 것 + 자기에게 나온 것이 섞여지게 되면 술에다 물탄 것과 같아서 실제로 사람을 전혀 세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래가지 못해서 자기의 소리를 듣게 되고, 사단의 소리를 듣게 되고, 타락하게 됩니다. 그런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오늘 날도 적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면 자기가 비워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자기가 비워진다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 비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탐심이 비워져야 합니다.
신구약을 통틀어서 구약의 발람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참다운 선지자에서 거짓 선지자로 전락한 표본입니다. 또 신약에 고린도전후서에 나오는 거짓 사도들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나 빌립보서에 나오는 모든 거짓 선지자들, 또 유다서나 베드로 후서에 나오는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을 보면 그 속에 탐심이 있습니다. 사역이 자기들의 탐심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럼 폐망의 선봉입니다. 그래서 저 개인적으로도 우리 선교회 목사님들도 이런 부분들을 하나님께서 다루어 가십니다. 그런데 다뤄 가심을 나중에 보면 아- 성경에 하나님의 기준에 이러한 것이 있기 때문에 이걸 위해서 다뤄가신다는 것을 봅니다. 그 한 예가 섬김만 하더라도 예전에는 설교하기 전에 예언사역을 했는데, 그때마다 거의 한번도 빠짐없이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셨던 말씀이 에베소서 6장 7절 말씀입니다.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그런데 여러분 쉽지 않습니다. 안 섬겨 봐서 그런데, 예를 들면, 화요일 날 기도 사역을 하는데 목사님들이 기도 사역으로 섬긴다고 자기 교회 부흥됩니까? 여기 온다고 자기 이름이 나옵니까? 앞에 나와 설교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또 기도해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기에게 뭐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 한 사람 한사람에 대해서 섬기되 섬기다 보면 피곤하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짜증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주께 하듯 단 마음으로 하라는 겁니다. 자기가 비워져야 된다는 겁니다. 제가 어떤 기도원 원장님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분이 얘기하기를 그 놈의 집사 꼴 보기도 싫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놈의 집사는 자기가 어려우면 찾아온다는 겁니다. 생활이 어렵고, 또 남편한테 얻어맞으면 찾아온다는 겁니다. 그럼 그때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기도해 주고 보살펴주면 좀 나아져서 돌아간답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면 명절이고 뭐고 인사도 없다가 또 어려우면 찾아온답니다. 여러분 우리가 당연히 주를 위해 섬긴다고 말하지만 섬기면서 기대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기대한 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원망합니다.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비웠다는 것은 그게 내려졌다는 겁니다. 자기의 섬김의 대가로 우리가 뭘 받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섬김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목회자로서 성도를 섬기되 그 성도가 우리 교회에 등록할 가능성이 있으면 잘 섬기고, 그 분이 다른 교회 등록하게 되면 안 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그 분이 다른 교회에 등록하면 그 질서 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가 나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의 자세에 우리는 섬기되 끈 달린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를 비웠다는 것은 그게 버려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가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받기를 다 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속한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 지역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만지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지시려면 당연히 목사님이 제일 먼저 그래야 되지만 그 성도들에게 아버지의 일이 이루어지도록 섬기는 그 자체가 기쁨인 그 자세를 가지고 섬기는 자세가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개인이건 교회건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함께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할렐루야 아멘, 기쁘고 감사하고 하나님께 찬양하고 또 성도들을 잘 돌봅니다. 그러나 내가 속해 있는 교회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교회를 하나님이 그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승리가 하나님의 생명이 회복되도록 그렇게 섬기고자 하는 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본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지는 몰라도 그 지역의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쓰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섬기려면 자기교회 중심적인 자세가 내려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교회 중심적이어야 합니다. 제 얘기는 이것이 내 교회에 이득이 있으니까 섬기는 그 자세를 가지고는 절대로 안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섬기는 자에게 은혜를 부으십니다. 이건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들을 놀랍게 이루어가시면서 이런 부분들을 더 비추시는 것 같습니다. 어떤 A라는 분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몰려오고, 그래서 교회도 놀랍게 성장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참 강해서 하나님 앞에 말씀도 강력하고 좋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속에 자기가 섬기는 교회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다른 하나님의 세우신 종들과 교회가 동일하게 아버지의 교회로서 그 아버지의 은혜가 저들에게 임하고 아버지의 생명이 저들에게 임할 수 있도록 그 아버지의 마음이 그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해서 그것이 아버지의 일이기에 사람들 앞에 자기교회가 더 성장하거나 이득이 오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알아주거나 전혀 상관없이 아버지의 그 일에 자기와 자기가 섬기는 교회가 기꺼이 동참하고자 하는 자세가 없으면 그 교회에서 하나님이 귀한 일을 할지는 몰라도 그 분은 그 지역의 리더로는 쓰임받지 못합니다. 왜냐면 그 자세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성령의 역사가 은사가 강해도 그 자세가 없이 만약에 그 지역의 리더로 세워지면 사람들이 안 따를 겁니다. 왜냐면 자기교회로 성도들을 다 데려 갈 텐데, 자기교회 사람 만들려고 일하는 것인데 누가 따르겠습니까? 그래서 이처럼 섬기는 자세는 개인이건 교회이건 필수인데, 예수님의 예에서 우리는 자신이 비워지는 게 중요한 한가지라 그 말입니다.
2. 사환으로서의 섬김입니다.
이 부분은 모세의 예에서 잘 볼 수 있는데 모세만이 아니고, 동일한 자세가 사도 바울과 침례(세례)요한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환으로서의 섬김의 자세는 하나님의 회복에 특별히 주님의 길을 예배하는 이 일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히브리서 3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 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라” 여기에 보면 모세와 예수님을 대조하면서 모세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론 여기에 초점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보기를 원하는 것은 대조 가운데 나타나는 모세의 삶을 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한 것 같으니, 그러면서 5,6절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이게 모세의 섬김입니다. 민수기 12장 1절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참고로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의 친형과 친누나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세 사람을 부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미리암과 아론을 책망하시고, 미리암은 모세를 책망한 벌로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문둥병은 치유되었는데 그가 부정하게 되었기 때문에 일정 기간이 지나기 까지는 진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 세 사람 앞에서 영광 중에 임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4-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삼인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삼인이 나아가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출애굽기 33장을 보면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해서 사람이 친구와 대화하듯 얘기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의 형용을 보는 것과 연관이 7절에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는 말씀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했기 때문에 모세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친밀함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환으로 충성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먼저 하나님의 온 집이 뭔가를 알아야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온 집은 성전(성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3장 6절에 “우리가 그의 집이라”고 했듯이 하나님의 온 집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성전(건물)에 거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전삼고 거하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했다는 겁니다. 이 말은 모세는 자신이 사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했다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과 말다툼하는 듯한 내용이 나옵니다. 나쁜 의미에서 말다툼이 아니라 좋은 의미에서 입니다. 출애굽기 32장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 대해서 모세에게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한 네 백성이 부패했다.”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한 네 백성을 데리고 올라가라.” 그러면 모세는 하나님께 뭐라고 그러냐면,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출32:11) 서로 싸우는 겁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인도한 네 백성이라고 그러시고, 모세는 반복적으로 이는 내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도하신 주의 백성입니다. 라고, 이게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그러면 그들이 진짜 모세의 백성이라 하나님이 그러시는 건가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가? 하나는 하나님이 모세를 시험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제 생각인데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이해했다는 겁니다. 한 예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저들이 자신들의 인도자를 모세로 이해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들을 구원하고 인도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모세가 없어지니까. 바로 다음 인도자를 찾다가 그 대체물로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한편으로는 모세를 시험하기 위함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 당시 그들의 마음의 생각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분명히 볼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모세는 늘 그들이 자기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도해 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인식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말로는 쉬운 것 같은데 쉽지 않습니다. 우리 목회자는 놔두고라도 구역장만 하더라도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 구역에서 어떤 얘기 엄마를 예수 믿게 하려고 주일 날이면 아침 일찍부터 그 집에 가서 얘 기저귀 빨아주고. 씻겨주며, 업고 옵니다. 그러면서 성경도 처음부터 자세히 가르쳐 주고, 같이 기도해 주고 섬깁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섬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무엇을 기대합니다. 그가 자기를 잘 따르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자기 말 잘 듣는 자기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하면 내가 어떻게 해서 저를 키웠는데 배은망덕하고 배신했다고 그럽니다. 구역장도 그럴진데 하물며 목회자는 더 안 그러겠습니까? 우리는 말은 그렇게 안 해도 저들을 자기 사람 삼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사람 삼기 위해서 희생하는 것,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지금 여자와 아이들까지 200만 명이 넘는 목회자입니다. 얼마나 더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그렇게 생각할 정도니까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반복적으로 그가 가지고 있었던 이해는 그가 사환에 불과하다는 거였습니다. 이 백성은 자기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참 존경했던 한 목사님이 계시는데, 세계적으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셨던 분입니다. 그 분이 세계 여러 나라에 걸쳐 사역이 엄청 확장됐을 때, 한번은 그 분의 아들과 무슨 얘기를 나누는 중에 그분의 아들이 하는 말이 아버지 어차피 이 모든 사역은 다 아버지 것이잖아요 라고 그러더래요. 그런데 그분이 그 말이 틀린 줄 알면서도 마음속에서 그게 당연히 받아들여지더랍니다. 그러면서 속에 무슨 생각이 드냐면 “그래 이 모든 사역들이 하나님이 하신 것이지만 내 모든 헌신과 내 모든 희생과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졌지”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그런 가치관을 가졌다기보다는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받아들인 겁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때부터 그의 마음을 다루기 시작하시는데, 견딜 수 없어서 열 시간 동안을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그 마음을 깨뜨리면서 하나님 용서해 달라고 회개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다루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열 시간 후에 그러시기를 “이 사역이 언제부터 네 사역 되었느냐”고 그러시더래요. 여러분 절대로 웃을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비추신 것이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이 사역이 커지든지 작아지든지 그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되 하나님의 사역으로만 남아있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모세는 이스라엘 전체의 목회자였습니다. 사람들은 모세가 훌륭해서 그의 헌신 그의 희생들이 참으로 훌륭해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그 엄청난 일을 이루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반복적으로 모세에게 얘기하기를 네가 애굽에서 인도해 낸 네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네 백성이 범죄했다. 그랬더니 모세는 반복해서 주님, 이들은 주의 백성입니다. 주님이 주의 능력의 손으로 인도하신 주의 백성입니다. 이게 사환의 자세입니다. 이 자세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바울 속에도 이 자세가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 함이로다” 바울은 사환을 중매쟁이로 이해했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중매해서 둘이 만나서 결혼했는데, 결혼한 첫날밤에 둘 사이에 들어와서 계속 참견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바울은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들의 소유는 주님이고 자기는 그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중매쟁이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섬기더라도 그 사람이 내 사람으로 남아 있기를 원하고, 섬기는 그 자체가 기쁨이 아니라 내 사람으로 남아있지 않으면 우리는 배신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신부를 취하는 분은 신랑이지 중매쟁이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정결한 처녀로 중매하는 그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여러분 침례(세례)요한의 자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요3:29] 똑같은 내용입니다. 초대교회 때 거짓 사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많은 영적인 체험을 간증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영적인 체험을 왜 강조했느냐면 자기들이 사람들 앞에서 위대한 종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홍보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들을 지극히 큰 사도라고 부르는 겁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슈퍼사도들이라고 하면서 “”따옴표가 붙어 있습니다. 진짜 저들이 슈퍼사도들이라는 말이 아니고, 자신들이야말로 그 시대에 하나님이 쓰시는 시대의 위대한 종으로 스스로 내세울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았기에 그래서 슈퍼사도라고 “”따옴표가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많은 체험들을 강조하고 내세우는 중심에는 뭐가 있냐면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을 자기 종 삼고 자기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을 적당히 칭찬하고 올려주면서 저들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잘 용납한다고 성도들을 꾸짖습니다.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고후11:20] 사람들을 섬기되 자기의 이득을 취하고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 사람들을 자기 종 삼고 자기편 만들고 하는 것은 거짓 사도들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사환으로 충성했다고 성경이 증언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을 항상 인식했다는 겁니다.
사환으로 충성했다는 말의 두 번째 의미
오늘날 목회자들 가운데 이렇게 인식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회사를 예를 들면 하나님이 회장인 것은 압니다. 하나님이 소유주인 것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그 회사(교회) 사장으로 임명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사장으로써 내가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면서 나름대로 도움을 구하면서 많은 것을 남기면 소유주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준 것이기 때문에 내가 내린 결정은 하나님이 내린 결정이니까 당신들이 이것을 어기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런 인식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전혀 그런 관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역이란 그 자리에 하나님이 앉아 계셔서 하나님이 직접 운영하십니다. 그러면 목사는 비서로, 사환으로 그 옆에 서서 회장님이 하시는 얘기를 잘 듣고 그대로 가서 순종하고 다시 돌아와서 그 자리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섬겼다는 것은 말씀드린 대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철저하게 인식했고, 그 하나님 앞에 들어가고 나가며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깨달아 하나님 백성들한테 전하고 그리로 저들을 인도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그렇게 친밀함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침례(세례) 요한이 가졌던 자세고, 이것이 바로 바울이 가졌던 자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자세를 갖지 못한 것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목회자뿐만 아니라 전도사님들, 구역장님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섬김을 요구하시는데 첫째는 예수님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자기가 비워지는 것이고, 둘째는 모세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사환으로서의 섬김인데, 사환은 충성하는 겁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런 게 있습니다. 결국 내 일이 아니고 아버지의 일이니까 아버지가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어떤 때는 방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 그랬습니다. 아버지의 일이 자신의 일로써 예수님은 아버지의 행하심에 자신의 전 존재로 동참했습니다. 아버지의 일이 이루어지는데 그것을 양식으로 여기실 만큼 적극적으로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환으로서 섬김입니다.
3. 질그릇에 담긴 보화입니다.
그러니까 질그릇에 담긴 보화의 의미를 이해해야 됩니다. 지금부터 제가 살펴 볼 세 가지는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서에서 참 능력의 길로서 우리들에게 강력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섬김과 관련이 있습니다. 먼저 그것은 질그릇에 담긴 보화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입니다. “우리가 이 보화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보화는 하나님의 비추심, 하나님을 아는 지식, 보다 광범위하게 말하면 성령의 능력, 성령의 기름부음, 성령의 은사 등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얼마 전에 신문 보니까 10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밀수하다 걸렸는데, 10캐럿이면 두께가 손가락보다 더 큰 것 같습니다. 만약에 10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사는 사람은 그 다이아몬드를 담는 그릇을 무엇으로 만들까요? 옹기로 만들까요? 아닐 겁니다. 보석 값만큼은 안되어도 그에 못지않게 대단히 아름답고 화려하고 안전하고 만들어서 담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보화를 질그릇에 두셨습니다. 왜 질그릇에 두셨냐면 능력의 지극히 큰 것이 그릇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보이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럼 질그릇이 뭡니까?
우리가 질그릇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깨닫는 게 너무 중요합니다. 두 가지 면에서 살펴봅니다. 그 중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가 보화라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은사만 해도 그렇습니다. 때로는 우리 주변에 은사 받았다. 능력 받았다고 하면서 하는 행동은 기본적인 상식도 안 통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삶은 나두고라도 예수 안믿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상식으로도 이해가 안되게 행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걸 잘못 사용할 지라도 은사 자체는 보화입니다. 야고보 1장 17절입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보화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어느 날 자기에게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해서 강하게 예언의 은사를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해 주는데, 감동이 있어서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그러네요. 머리가 좀 아프세요? 그 정도가 아니라 기도 받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비밀과 그 사람의 문제의 핵심들이 쫙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얘기 했더니 그분이 펑펑 울면서 회개하고 돌이키고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면서 문제가 확 해결 되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고나면 여러분 속에 무슨 생각이 드냐면 당신들이 감동을 알아? 이렇게 되어갑니다. 몇 번만 되어 보세요. 겉으로는 제가 뭘 합니까 다 하나님이 하시지요. 그러지만 여러분 마음속에 그것이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처럼 생각할 때, 여러분은 그것 때문에 넘어집니다. 그것 때문에 은사가 강하게 나타났던 수많이 사람들이 넘어졌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께 쓰임받던 사람들이 수없이 넘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 값진 보화를 질그릇에 두셨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 능력의 지극히 큰 것이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보화가 여러분에게서 나온 게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은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옹기는 떨어지면 금방이라도 깨질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오늘 믿음으로 서 있습니까? 다음 순간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철저하게 타락할 수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보다 더 타락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걸 전혀 모르신다면 여러분은 특이한 변종이거나 아니면 전혀 자신을 못 보는 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겁니다. 그래서 섬기되 우리는 질그릇에 담긴 보화라는 것을 수시로 인식해야 합니다.
4.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비결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너의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하므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전12:7-10)
고린도후서 10-13장을 보면 거짓 사도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그들의 특징은 자기의 강함을 자랑하는 겁니다. 왜 자랑했냐면 큰 사도로 인정받기 위해서인데, 큰 사도로 인정받기 위한 그 배경에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사람들을 자기 종 삼고 자기의 이득을 추구하게 하고, 자기 영향력을 확보하고, 사람들 앞에서 다른 사람들을 주도하기 위해서라고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저들은 사도 바울을 참다운 사도가 아니라고. 약한 사도라고 비방했습니다. 그 당시 거짓 사도들은 너무나 호소력이 있고, 웅변력이 강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웃겼다 가지고 노는데, 사도바울의 얘기는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의 서신을 보면 매우 강력한 것 같은데 실재로 보면 말에 졸하고 외모도 별로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늘 자기의 약함만 자랑하니까 별 볼일 없는 사도라고 전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이 전한 십자가의 복음이 훼손되기 시작합니다. 그랬더니 바울은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서 자기가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간 얘기를 말합니다. 그것도 자기 얘기로 안합니다.
“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곤전12:1-5)
그러면서 곧 바로 돌아서서 하는 말이 내가 어리석은 말을 하거니와 내가 미친 짓 할 텐데 좀 용납해라 저들이 그렇게 말하고 생각하니까 할 수 없이 내가 미친 짓 한다 그러면서 그것을 자랑합니다. 그 다음에 그러나 내가 자랑하려니와 내가 약한 것으로 자랑하리라. 그러면서 자기는 사도인데 사도인 자기 몸에 사단의 가시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의 치유자가 무좀에 걸려서 약 바르고 있는 것을 보면, 저게 무슨 능력의 사역자야 자기 발도 못 고치면서 그렇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것을 감추기 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도인 자신에게 사단의 가시가 있는 것을 오히려 자랑합니다.
약함을 자랑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이 말은 무조건 나는 병신이고 못났어요. 그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질그릇 됨을 드러냄으로서 자기에게 함께 하신 모든 보화가 하나님께 있음을 자랑하는 겁니다. 그걸 표현하는 겁니다. 자신이 낮아질수록 주님이 높임을 받는 겁니다. 이렇게 약함을 자랑하게 될 때,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에게 머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폴 케인 목사님도 재미있습니다. 그 분은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이 심장병 때문에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그런대요. 그러면 성도들이 열심히 기도하면 나아져서 사역하면 하나님이 놀랍게 역사하십니다. 그 다음에 또 병원에 가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또 그런대요. 여러 차례 그랬습니다. 우리가 일부러 말도 더듬더듬 하고, 아는 것도 모른다고 하고, 자기 몸이 건강한데 자기는 그야말로 허약해 빠져서 못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겁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저에 대해서 이런 저런 칭찬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것을 알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께서 기도 받을 때 왜 그 칭찬을 그냥 그대로 받았느냐고 꾸짖습니다. 그러면 그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모르고 얘기하나요. 아니지요. 다 압니다. 그분은 인사로 수고 했다 말하는데, 제가 일일이 그 말을 끊고, 경색을 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거니까 하나님께 감사하세요. 그러면 교제도 안되고, 융통성도 너무 없고, 그분도 하나님이 주신 거 몰라서가 아니고 다 알고 하는 건데 그것을 구태여 말을 끊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느냐 싶어서 안하면 왜 그렇게 했느냐고 하나님이 지적하십니다.
제가 리더십 책을 읽다 보니까 무디 목사님에게 하루는 어떤 분이 찾아와 가지고 칭찬을 하더랍니다. 그러니까 무디 목사님이 땅에 엎드리더니 흙을 한줌 집어가지고 날리면서 하나님이 쓰신다는 것 외에는 나는 이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더래요. 그러니까 상대방이 얼마나 무안했을까요? 상대방이 무안한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그게 왜 중요하냐면 우리들의 관점이 하나님을 봐야 하니까요. 그런데 우린 너무나 사람 중심적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는 겁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부분을 저는 잘 못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더하려고 그러는데 기도만 받으면 기도 사역자들이 저한테 그런 감동을 주신다고 자꾸 얘기합니다.
폴케인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중에 하나님이 그 분을 통해서 역사하실 때는 우리가 들으면 어떤 때는 성경에 나와 있는 그런 규모만큼 너무너무 놀랍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사람)를 보지 않고 하나님만 볼 수 있는 때가 되면 훨씬 더 강력한 역사가 일어날 텐데, 여전히 사람을 보니까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역사를 제한하신다는 겁니다.
5. 하나님의 권세와 세상에서의 특권은 반비례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능력이나 은사를 자신의 부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소위 능력을 받으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겁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세상에서의 특권은 반비례합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의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도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 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 즉 참고 비방을 당한 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기 같이 되었도다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4:7-16)
여기에 보면, 우리는 가난하고 너희는 부자고, 우리는 미련한데 너희는 지혜롭고, 우리가 같이 왕 노릇하자, 너희만 왕 노릇 하냐, 이런 내용이 나오니까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실 겁니다. 여러분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부족함 없이 나타나는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질서상 사도가 제일 위입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전12:28)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 중에 사도가 제일 먼저입니다. 심지어 선지자들도 사도의 권위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특권에 있어서는 사도가 제일 마지막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인 자기를 만물의 찌기같이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 초대교회 때, 로마의 네로 황제가 기독인들을 핍박해서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 밥이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죽이려고 끌려가는 줄의 마지막의 선 사람들처럼 하나님이 자기를 두셨다는 겁니다. 세상의 특권에서는 제일 하위라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린도 교인들이 능력과 은사가 강하게 나타났는데, 하나님의 평가보다 사람들의 평가를 좋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지혜롭게 여김을 받기를 원하고, 사람들 앞에서 부요하기를 원하고, 사람들 앞에서 왕 노릇하는 자세로 세상에서의 잘 받아들여지기를 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 저들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건 책망하면서 하는 얘기입니다. “아비가 자녀를 권하는 거다. 스승은 많지만 아비는 많지 않다. 나는 너희들의 아비다. 그러면서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말하면서 저들이 세상에서의 평가를 소중히 여기는 나머지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 부음이 저들에게 걷히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처럼 그렇게 올바른 신앙으로 돌아서도록 지금 사도가 권면하고 있는 겁니다.
60-70년대 보면 많은 교회에 성령의 은사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방언도 나타나고, 치유도 나타나고, 믿는 사람들에게서 이단이라고 손가락질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로 교회는 성장했는데, 그러면서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어떠한 노력을 했느냐면 이단 꼬리표 떼기를 많이 노력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를 노력했습니다. 결과가 뭔지 아십니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는 했는데, 그 성령의 기름부음은 걷혔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이단의 괴수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는 자들에게선 당연히 칭찬을 받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율법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일은 육신의 눈으로는 어리석게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비방하기도 하고 손가락질하기도 하고 대적하기도 합니다. 예수님 때에도 그랬고, 사도 바울 때에도 그랬고, 부흥이 일어 날 때에도 그랬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사람들 앞에 인정받기 위해서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들 앞에서 왕 노릇 하기 위해서 지혜롭게 하기 위해서 그들과 동화되었는데 그래서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기름 부음은 떠났습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가 그러한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쉽지 않습니다. 제가 최근에 어떠한 분이 꿈을 꾸었다고 얘기를 하는데 제가 얘기하면 대부분이 다 알 수 있는 우리나라에 유명한 목사님인데 그 분이 꿈에 보이더래요. 그러니까 꼭 그렇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 분이 그런지 안 그런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에게 경고하는 메시지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그 분이 나귀를 탔는데 나귀가 비대해서 언덕을 올라가지 못하더래요. 그러다가 나귀가 토하고 꼬부라지니까 그분이 낙마한 것처럼 위에서 떨어져 꼬부라지더래요. 그러니까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다친데 없냐고 물어보더래요. 제가 그 얘기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 부음과 세상의 특권은 반비례한데, 그래서 우리가 목회자라로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때로는 사람들이 잘 대접해 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차도 좋은 차 탈 수 있습니다. 제 얘기는 그게 잘 되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렇게 될지 몰라도 그 마음에서부터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권세와 세상의 특권은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서 그 자세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되는데 그 자세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기도했던 분들입니다. 앞서간 믿음의 선배들 하루에 2-3시간 기도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기도 많이 하고 헌신적 이였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세상적인 특권들이 주어질 때 그 가운데서 자기를 비워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은 반대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은 진짜 쉽지 않습니다. 6.25 직후처럼 우리가 어려울 때 사람들이 살 안찌는 것은 쉬습니다. 그땐 다 살 안찌니까. 그런데 오늘날처럼 먹을 게 풍부한 상황에서 살 안찌고 자기 몸매 유지한다는 것은 특별한 각고의 노력 없이는 안 됩니다. 영적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에 사울 왕처럼 하나님의 임재가 걷혔어도 외부적인 사역은 당분간 나타날지 몰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은 언제든지 떠날 수 있고, 그러면 우리는 예전처럼 성령이 강권적으로 임하셔서 운행하심으로 이루어진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 이제는 인간의 조직과 방법으로 이루는 사역들이 되어져서 사람 눈에 보기에는 그럴듯한 모양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은 걷히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와 세상에서의 특권은 반비례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꺼이 자신이 만물의 찌기와 같이 죽임을 당하고자 끌려가는 미말에 선자처럼 그 자세 가운데 서 있었다고 말했는데, 하나님의 사도로써 그 기름부음이 머물러 있기 위해서, 주님의 신실한 종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그랬는데 쉽지 않습니다. 우린 조금만 뭐하면 무슨 차타지, 어떤 사람이 무슨 차 탔지 그럽니다. 돌이켜보면 너무나 끔직한 얘기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거기까지 가 있다는 것이.... 그런데 금방 거기 빠지기 쉽습니다. 진짜 두렵습니다. 그분이 꾼 꿈만 하더라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영향력을 확대 시키시고 가능성이 많아질 때 과연 깨어 있을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자기가 쓰임받고 버림받지 않기 위해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케 한다고 그랬는데 우리가 그 내용을 잘 알지만 비대해져서 더 이상 몸의 살을 빼려고 해도 뺄 수없는 그 지경에 이르기 전에 우리가 인식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올바른 관점에 서있는 다는 것이 과연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없어도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면 그래서 중요한 게 숨겨진 기간을 수시로 활용하라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때로는 그 모든 사역 가운데서도 그 모든 것을 때로는 내려놓고 주님만이 목적이 되어져서 주님 앞에 설 각오 그 기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임의로 하는 것은 절대로 안됩니다. 물론 하나님이 지금 일하고 계시고 지금 일하라고 그러시는데 전 지금 쉬러 갑니다. 그건 옳지 않지요. 그러나 사역에서 초점이 내려져서 순간순간 주님 앞에 서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 주님이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 중에 하나가 여러분 주위에 가시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말입니다.
지금까지 섬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앞으로 다가오는 부흥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한 성령의 능력을 부으실 텐데, 그 능력은 섬기는 자에게 주실 겁니다. 능력을 부어 주셔도 제가 살펴 본 그 섬김의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게 절대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금방 변질되고 금방 타락하고,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멀어지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섬기는 자세가 중요한데 이 부분을 저와 여러분이 선명하게 인식 했으면 좋겠습니다. 늘 그 기준을 우리 머릿속에 기억해 두고 비춰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절박하게 구하면서 늘 우리 자신을 그 하나님의 기준에 비춰 보아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대로 섬김으로 하나님이 일하실 때 우리가 귀하게 쓰임 받을 뿐만 아니라 쓰임 받고 버림받지 않는 그 자리에 영원토록 머물러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