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우리가 아는 야베스의 기도는 없다(대상4장9절)
17. 우리가 아는 야베스의 기도는 없다. (대상 4장9절)
몇년전에 히트를 친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은 기도의 강력함을 말해주는 구절로 우리에게 인식된 구절이다.
이 구절이 많은 기도를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많은 비판의 여지도 많이 만들어내었다.
단순한 물질적인 부유만을 추구하는 기도라는 한편에서의 비판의 맥락이다.
그런데 내가 보는 성경은 우리가 아는 야베스의 기도는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야으베츠라고 말하는데 남성형으로 쓰인 것을 볼때 남자다.
그리고 이 남자는 존귀한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이름을 짓는 고대에 어머니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준 것으로 볼때 아버지가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거기에 아이 이름이 고통이라는 뜻의 아베스라는 것을 볼때 더더욱 아버지 없는 아이라 생각할 수 있다.
고통스럽게 낳은 아이라는 뜻의 야베스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을 자세히 보면, 누가 고통인지 거론하고 있지 않다.
한번은 어머니에게 고통이라고 거론하고, 한번은 아이에게 고통이라고 거론하기때문이다.
아마 둘다 고통이지 않은가 생각해볼수 있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은 것이 고통이고, 아이는 고통을 가지고 살아갈수
밖에없는 인생이기에 고통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이름이 고통이라고 지어진 것이나,
그가 기도하는 것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것을 볼때
그는 장애인일 가능성이 매우높다.
그의 기도는 아주 강력히 기도하기 보다는 말끝을 흐리며 기도한다.
이렇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해주신다면 하며 불완전한 문장을 사용한다.
그는 한계가 많은 사람이고, 그것을 극복할 힘이 없지만, 그래도 기도하는 인물로 나온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응답이 되었다고 한다.
더 많은 구절을 말해야 겠지만 쉽게 말하면 그는 그의 기도로 몸이 낫거나 치료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스티븐 호킹 박사나, 오체불만족의 오토다케 히로타다와 같은 사람인 것이다.
그는 여전히 고통을 수반하고 그렇게 있지만, 아무도 그를 장애인으로 대하지 않을만한 인생이 된 사람이다.
고통을 극복한 인생인 것이다.
그래서 기도가 응답된 인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그는 장애를 지닌 인물로 평가 받지 않는다.
그것을 극복한 사람이고, 그보다 훨씬 나은 인생이기에 그는 존귀한 자로 여김을 받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야베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히 기도해서 많은 것을 얻은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 저주받은 인생을
극복한 한 사람의 이야기인 것이다.
야베스의 이야기는
단순한 기도의 역전 드라마의 인물이 아니라,
고통을 이겨낸 아니,
장애인으로서 여전히 고통을 가지고 있지만,
고통의 한계를 넘어서서 누구보다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기에
고통이 그에게 장애처럼 여겨지지 않은 인물의 이야기,
인생을 극복한 고통극복의 인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