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강 - 억압적 환경과 죽음을 이기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
억압적 환경과 죽음을 이기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 |
이 장에서는 억압적인 환경을 이기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죽음을 이기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살펴보겠습니다. 두 가지 부분을 살펴봄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대한 두 가지의 기본적인 이해를 복습하면 도움이 될 것같습니다.
기본적 이해의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차례 강조하지만 예수님에게 있어서 사역이란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 선포와 하나님 나라의 능력사역이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일컫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신 것을 예수님은 메시지를 통해 “이미 임하였노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능력사역을 통해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억압적인 환경들을 푸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기본적인 이해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단계 혹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 그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에 살펴볼 예정입니다만 잠깐 설명하자면 하나님 나라는 두 단계로 임합니다. 흔히 ‘하나님 나라’ 하면 ‘하늘나라’로 이해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늘 나라’는 같은 곳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 하면 보통 죽으면 가는 나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와 ‘하나님 나라’는 같은 말이니까 ‘하나님 나라’ 하면 죽으면 가는 나라로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성경에는 죽어서 가는 미래의 나라만이 아닌 것을 보여줍니다. ‘이미 임한 나라’ 그리고, ‘죽어서 가는 나라’ 라는 의미가 모두 하나님 나라에 담겨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두 단계로 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경에 보면 동시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임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임했고 또 주님 재림하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두 개는 다른 나라가 아니라 같은 하나님 나라가 두 단계로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침투하듯 임했고, 재림을 통해 완성될 것입니다. 마지막 장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서 자세히 보겠습니다.
억압적인 환경을 이기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
먼저, 억압적인 환경을 이기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먼저 봅니다.
자연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이 땅을 창조하시고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땅을 다스릴 권세를 아담에게 주셨습니다. 창세기 2장 19절과 20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위 구절에서 아담은 만물의 이름을 지을 권세를 가졌습니다. 이는 아담에게 땅을 다스릴 권세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보다는 마귀에게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 땅을 다스릴 권세를 마귀에게 내어주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4장 5절부터 8절입니다.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 가로되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 내게 넘겨준 것” 이라고 말을 할 때, 예수님께서는 사단의 그 말을 반박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같은 사실을 보면서 사단이 땅을 다스릴 권세를 쥐고 있음을 봅니다. 아담에게 있던 권세가 마귀에게 넘어간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땅을 다스릴 권한이 마귀에게 주어진 것과 더불어 이 땅은 저주를 받게되었습니다.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었습니다. 또 모든 피조물들은 신음하며 종살이하듯 살게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부터 19절과 로마서 8장 19절부터 22절입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 땅은 인간의 죄를 인하여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단의 주권이 자연계 위에 임함으로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십니다. 구원의 섭리를 이루십니다. 저주받은 자연계 위에 예수님께서 신적인 침투자로 임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침투하신 후 하신 일은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가지시고 사단의 세력을 멸하시고 사단의 억압 아래있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 사역 속에는 억압적인 환경을 치유하시는 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셨노라고 선포하신 배경에는 잃은 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사단의 억압으로 부터의 구원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병의 사슬이 끊어진 것과 귀신의 세력들의 영향력이 끊어진 것과 아울러 억압적인 환경으로부터의 승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역을 통해서 이 승리가 이 땅에 임한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아까 하나님 나라는 두 단계로 임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에는 억압적인 환경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봅니다. 로마서 8장 21절과 계시록 21장 1절입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보십시오. 사단의 저주와 억압 가운데 있는 하늘과 땅은 사라질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새하늘과 새땅이 임할 것을 말씀합니다. 억압적인 환경이 끊어지고 온전한 회복이 그 때에 있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두 단계로 임하되,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는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특성, 특징들을 부분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라는 말 속에는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 부분적으로 임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그같은 사실을 주님은 메시지의 선포와 능력사역을 통해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특징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억압적인 환경을 자유케하신 하나님의 승리가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임한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까지 설명드린 내용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 35절부터 41절입니다.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위구절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광풍을 만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광풍’이란 말 그대로 미친 바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항상 부는 바람을 일컫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예수님을 향해 자신들이 죽게되었노라고 울부짖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단의 억압적인 환경을 볼 수 있습니다. 사단이 자연계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억압하는 모습입니다. 사단은 지금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억압적인 환경을 통해서 죽이려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 단어를 통해 사단의 억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광풍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압니다. 예수님은 귀신의 세력들이 드러날 때마다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입니다. ‘꾸짖으셨다’는 말은 ‘강하게 내리치셨다’는 뜻입니다. ‘하던 일을 멈추라’는 강한 명령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내용은 “잠잠하라”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광풍을 향해 예수님은 “잠잠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광풍을 대하는 이 장면을 보면서 광풍의 배경에 귀신의 세력이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잠에서 일어나신 다음 바람을 보시고 꾸짖으셨으며 바다를 보고 잠잠하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랬더니 바람과 바다가 잠잠해지고 하나님의 통치가 그곳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장면을 보면서 억압적인 황경 뒤에는 사단의 세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려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이 땅을 다스릴 권세를 사단에게 내어준 이래로 사단이 인류에게 행한 역사를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억압으로인해 신음하고 있는 인류 역사 가운데 주님이 찾아 오셔서 억압의 주체인 사단의 세력들을 멸하시고 깨트리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사역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사단의 억압적인 환경을 깨트리셨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능력 중 하나는 억압중에 있는 권세들을 파하고 억압의 환경을 자유케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억압적인 환경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통해 이러한 승리를 미리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억압적인 환경은 율법주의 신앙이 철저하게 분쇄될 때 깨어지는 것을 성경을 통해 수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믿는 사람들 중에 수많은 억압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억압적인 환경을 깨트린다면 왜 수많은 성도들이 여전히 억압적인 환경에서 신음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율법주의 신앙관이 깨어져야 합니다. 이 거짓신앙이 깨어져야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수 있습니다. 어둠의 사슬을 부서뜨리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능력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해서 저절로 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들어가게 될 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때라야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승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거짓 신앙관을 깨트리고 하나님의 지배 가운데 들어가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이 땅에 아직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지 않은 이유로 억압적인 환경에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 있으면서도 억압적인 환경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경우에도 그는 하나님과 친밀했으며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성령충만했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억압적인 환경으로 인해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억압적인 환경이 바울을 붙잡아두지는 못했습니다. 도리어 억압적인 환경을 통해 하나님은 더욱 더 놀라운 역사들을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우리 가운데에서 거짓 신앙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들어가면 전에 알지 못하던 놀라운 승리를 경험할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음에도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중에 어둠의 세력들에 의해서 반격를 당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많은 성도들이 당하는 억압적인 환경이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친밀하게 동행하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순종함으로 그들을 대적하는 어둠의 세력들의 방해로 인해 억압을 받기 보다는, 주님의 통치와 주권 아래 들어가지 아니한 결과로 인해 승리를 경험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거짓 신앙관에 의해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으므로 승리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놀라운 승리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하나님의 백성들은 승리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승리보다는 억압가운데에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이유로 인해 첫번째 이유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억압적인 환경을 깨트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의 통치 아래 있기를 힘쓰면 승리는 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환영하고, 하나님 나라를 초청하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사모할 때 더욱 놀라운 승리를 경험할 줄 믿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와 하나님과의 친밀한 가운데 머뭄으로 그 능력을 더 경험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죄와 죽음을 이기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
이 부분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단계를 이해하면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8절 후반절입니다.
…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사단의 일을 멸하실 때 사단의 무기인 죄와 사망을 파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통해서 그 일을 하셨을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궁극적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죄와 사망을 멸하셨습니다. 골로새서 2장 13절부터 15절입니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14절의 “의문에 쓴 증서”의 의미를 설명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어거스틴(Augustine)은 훗 날 회개하며 어머니의 젖꼭지를 물었던 죄까지 참회했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낱낱이 기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정확하신 분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거스리고 법도를 어기며 뜻을 거역한 모든 일들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을 때 우리를 대적하는 우리의 죄가 기록된 증서를 함께 못박으셨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우리의 죄를 도말하셨다고 기록합니다. 15절의 “정사와 권세”는 사단의 세력들을 일컫는 단어들입니다.
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도말하시고 사단의 세력을 물리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부터 58절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56절을 보면 사단이 죄와 사망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57절을 보면서 우리는 십자가가 사단의 세력을 궁극적으로 파하셨다는 것을 또한 압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하셨던 말씀입니다.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사역을 통해 죄를 멸하시고 사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에 종교지도자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죄를 용서하는 말씀선포와 함께 그의 병을 고쳐주심으로 죄와 죄의 결과로 인해 생긴 병을 그에게서 끊어놓으셨습니다. 중풍병자의 경우, 죄로 인해 병이 온 것입니다. 주님은 사역을 통해 죄의 결과를 도말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파하셔서 죽음을 이기는 말씀을 선포하실뿐만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심을 통해 죽음을 이기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는 더 이상 죽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은 “죽음이 다시 있지 않더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승리가 아직은 부분적이지만 이미 임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 죽음을 이기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은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절부터 6절입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이 전한 메시지는 그저 말만 전파한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말만 전했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듣기만 했어야죠. 예수님은 메시지를 전하신 다음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죽음을 이기신 증거를 죽은 자를 다시 실리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죽음을 이기는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죽음을 이기는 승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사역을 통해서 그 승리를 보이셨습니다. 장차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이미 임한 사실을 보이신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이 성경에 몇 군데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11절에서 16절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 보셨다 하더라
나인성 과부에게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독자 외아들이 급작스럽게 죽습니다. 과부는 더 이상 살아야할 이유를 상실했습니다. 모든 게 끝이 났습니다. 이것이 죽음이 갖는 위력입니다. 살 길이 막막합니다. 여자들은 당시에 참으로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땅의 분배도 남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졌지 여자들은 제외되었습니다. “과부와 고아를 불쌍히 여기라”는 말씀은 이런 내용을 반영합니다. 제도적으로 부(富)가 그들에게는 돌아가지 않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추수할 때에 고아와 과부들이 먹을 수 있도록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도록 성경은 권하고 있습니다. 포도를 딸 때에도 다 따지 않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과부에다 아들마저 죽었으니까 참으로 환경적으로 억압이 대단히 심한 상태의 여인이었습니다. 모든 게 끝났습니다. 이 사건은 사단의 일을 보여줍니다. 인간을 훔치고 멸망시키고 파멸시키는 것을 통해 인간을 지배해 온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반면 예수님이 이런 사단의 지배 아래 있던 이땅에 신적인 침투자로 오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온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죽음의 권세로 세상을 지배하던 사단의 세력을 파하시고 과부에게 생명과 소망을 주신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죽음을 이긴 사건입니다. 이외에도 야이로의 딸 사건, 나사로의 사건 등이 성경에 나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의 사역에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죽은 자를 살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죽은 자를 살리는 사역을 명령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사역에도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역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을 증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은 자를 살려놓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한 것을 나타내 보이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한 사실을 드러내는 일이기에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 제자들의 사역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7절과 8절입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수님이 당시의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증거하라고 명령하셨으면 우리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당시보다 지금은 훨씬 더 하나님 나라를 확고히 세우셨으며 사단의 권세를 더 파하셨으며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뿐만 아니라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을 보여주라고 하셨습니다.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한 것을 보여주는 선포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은 메시지와 사역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습니다. 8절에는 “죽은 자를 살리며”라고 적고 있습니다. 명령하신 하나님 나라의 사역 중 하나가 죽은 자를 살리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열방으로 나가 죽은 자를 살리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9장 32절부터 42절입니다.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지 팔 년이라 ◇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놀랍지 않습니까? 사람이 죽었습니다. 다비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체를 다락에 뉘이고는 베드로를 청합니다. 고쳐달라고 청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살려달라고 초청한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오늘날 이런 일이 여러분에게 찾아온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황당하다고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살려달라고 청한 사람들을 따라 베드로는 따라 나섭니다. 죽은 자를 살리러 말입니다. 물론 성령의 감동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믿음을 보십시오. 40절입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이 모습은 예수님의 그것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의 일입니다. 마가복음 5장 22절부터 23절, 35절부터 43절입니다.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 두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장례식 때 우는 것은 다 끝난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는 사람들을 내어 보내시고 제자들을 따로 데리시고 집 안에 들어 가십니다. 믿음의 분위기를 만드신 겁니다. 하나님의 역사하도록 분위기를 만드신 겁니다. 불신으로 가득한 분위기를 깨트리시고 사역을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역하시는 방법과 똑같은 모습으로 했기 때문에 베드로 역시 죽은 자를 살린 것은 아닙니다. 방법이 중요하지만 방법이 죽은 자를 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역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배웠을 것입니다. 어떻게 사역을 하는지를 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 사역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사역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나가서 그대로 사역을 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초상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죽은 자를 살리겠다고 설치지지는 않았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 사역 중에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0장 7절부터 12절 입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 우리의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사도 바울이 설교 시간에 졸다가 죽은 유두고를 살린 사건입니다. 재미있는 상황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 습관적으로 조는 분이 계십니까? 설교 시간에 습관적으로 조는 분은 치유받으셔야 합니다. 대개의 경우 신앙적인 관점에 문제가 있던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던지, 아니면 무언가가 하나님과 조는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유야 어떻든지 성령의 능력으로 끊어주어야 합니다.
포도나무교회 주일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번은 주일학교 수요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간 한 아이가 엄마가 보는 앞에서 눈물을 그렇게 많이 흘렸다고 합니다. 아이의 엄마는 놀라 교회로 전화를 했고 그 바람에 알게된 일입니다. 아이가 울면서 엄마에게 말하기를 일년전에 엄마와 함께 인형가게를 간 적이 있었는데 마음에 드는 인형이 있었지만 엄마가 사 줄 것같지가 않아 훔쳤다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회개하며 우는 것이라고 아이가 말했습니다. 엄마는 인형가게에 가서 주인에게 값을 치루면 될테니까 그만 울라고 아이를 달랬습니다. 그런데 이 때 알게된 사실은 그 아이가 아이인데도 예배 시간만 되면 졸았다고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일이 있은 이후로 아이가 졸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교회를 나가지 않던 그 아이의 동생까지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이 동생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동생은 그 전에 교회 다니기를 아주 싫어했던 아이였습니다.
졸다가 죽은 유두고를 바울이 살렸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죽은 자를 살리는 사역이 제자들에게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기에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사건입니다. 즉 오늘날의 우리 역시 이 사역을 그대로 감당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확장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습니다. 우리가 전할 메시지는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했으니 하나님 나라 가운데로 들어오라’는 선포입니다. 또한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을 증거하는 일이 우리의 사역입니다. 이 사역에는 죽음을 이기는 사역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사역에는 반드시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 포함됩니다.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죽음이 없는 그 나라가 이미 임했습니다. 우리 속에는 부활의 생명이 흐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도 이 사역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죽은 자들이 실제로 살아나는 사건들이 전해내려 오고 있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들을 듣곤 합니다. 특히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 나라에서는 이런 일을 가끔 선교사님들이나 외신을 통해 듣습니다.
우리의 사역 중에 치유와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니까 환자들을 찾아 다니며 기도해주거나 초상집마다 찾아다니며 죽은 자를 살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사역은 병든 자들을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기도했다고 해서 사역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와 그 능력을 의지하여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여 하는 것이 사역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가운데에서 죽은 자를 살리고 억압당하는 자들을 자유케하는 일이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모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