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에 대하여 (신명기 12:6-19; 14:22-29; 26:12-15)-김경래교수
우선 레위기 27:30-33에 십일조에 대하여 짤막하게 언급된 내용을 살펴 보도록 하자. 레위기의 부록인 27장은 전체적으로 서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서원물로서는 사람 (1-8절) 자신을 비롯, 생축 (9-13절), 집 (14-15절), 밭 (16-25절) 등을 들고 있다. 27장 26절 이하 33절까지에서는 세 가지 특별한 조항을 들고 있다. 첫째, 생축의 첫새끼인데, 그것은 이미 여호와의 것이므로 서원물로 쓰일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26-27절). 둘째로, ‘아주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거룩하기 때문에, 사람, 물건 할 것 없이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아주 바친 것’이란 표현은 히브리어 ‘헤렘 (םרח)’을 번역한 것으로서, 그 존재를 죽이거나 불에 살라서 완전히 소멸시켜야 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서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치기 직전에 그 성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헤렘’으로 선언한다 (여호수아 6:17-19). 셋째가 십일조에 대한 규정이다. 본문에서는 ‘땅의 소산과 가축중 그 십분일이 여호와의 성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농사와 목축을 주업으로 하던 당시 사람들로서는 땅의 소산과 가축이 그 전체 소득이 되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이들의 전체 소득 십분일이 자기 것임을 여기서 처음으로 밝히신 것이다.
따라서 레위기 27장 전체를 통하여 우리는 사람이 서원하여 바친 것들과 더불어, 첫 태생, 헤렘, 십일조는 하나님께 거룩한 것이므로 사람이 그것을 건드릴 수 없음을 배우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천지의 ‘주재’ (=소유주) 되시는 하나님께서 (창세기 14:19 참조) 이처럼 우리에게 주신 것의 일부만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심은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에 대한 자신의 최소한의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행위라고 간주할 수 있다.
선지자 말라기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말라기 3:8-9)고 외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하나님의 이러한 주장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십일조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느냐 아니하느냐에 대한 좋은 시금석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십일조가 자신의 것인만큼 그것을 자신의 의사대로 쓰실 권리가 있다. 민수기 18장은 과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자신의 소유인 십일조를 어떻게 쓰셨는지에 대하여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바치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주라고 명령하셨다 (18:21). 레위인은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하나님의 회막에서 봉사하였기 때문이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특별히 성막에서의 봉사를 위하여 구별된 지파이다. 그들에게는 특정한 기업이 분배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위한 생업 활동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수기 18장에서는 전체적으로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돌아갈 댓가 (=응식, 應食)를 설명하고 있다. 대부분의 성물 (聖物)이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반면, 십일조만은 레위인에게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레위인은 그 십일조중의 십일조를 다시 제사장에게 드려야 한다.
민수기 18장에서는 백성에게 십일조를 내라는 명령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이 바친 십일조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문제를 다룰 뿐이다. 따라서 민수기 18장에 언급된 십일조가 자원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법적 명령에 의한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나 ‘거제 (擧祭)로 드리는 십일조’ (24절)라는 표현을 통하여 볼 때, 여기서 말하는 십일조는 자원에 의하여 바쳐졌을 기능성이 크다 (‘거제’는 히브리어로 ‘트루마’인데, 문자적으로 ‘들어 올린 것’이란 뜻이며, 본문에서는 ‘헌물’의 뜻으로 쓰였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십일조를 강요하지 아니하시고, 자원하여 헌물로 바치는 것을 원하심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모아진 십일조는 그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성막에서 수종드는 레위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후에 하나님의 이러한 뜻이 제대로 실천에 옮겨지지 아니하자, 뜻있는 지도자들은 강권력을 발동하여 이를 실천에 옮긴다. 히스기야왕은 대대적 종교 개혁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칭찬을 들은 왕이다. 그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무를 재정비하고, 그들의 봉사 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백성에게 명을 내려, 그들의 댓가를 주도록 하였다 (역대하 31:4-19). 포로 이후 시대의 느헤미야 역시 이 일이 제대로 실천에 옮겨지지 아니 함으로써 종교상 문제가 발생하자, 백성과 언약을 세우고 십일조를 거두어 레위인에게 주도록 하였다 (느헤미야 10:37-38; 12:44-47).
신명기는 전체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예배의 중심지가 설정된 후에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광야에서와는 달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 (12:5, 11, 14, 18, 21, 26; 14:23, 24, 25 등 신명기 여러 곳에 이 표현이 나옴)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며, 거기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또 그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며 즐길 것 등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제사장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이 거룩하다고 확산하여 가르쳐 주며, 하나님께 드리는 성물을 일반 백성도 먹을 수 있도록 기회를 넓혀 준다.
십일조에 관한 신명기의 기록은 12:6-19; 14:22-27; 14:28-29; 26:12-15에 산재하여 있다. 레위기 27장에서 모든 십일조는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어서 거룩하다고 규정한 반면에, 신명기에서는 다른 여러 제물과 더불어 십일조 역시 각자가 좋은 뜻으로 사용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민수기 18장에서 헌물로 바쳐진 십일조는 레위인에게 일한 댓가로 줄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반하여, 신명기에서는 십일조를 떼는 사람들더러 레위인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는 형편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최소한의 소유권인 십일조를 특정인에게만 돌리신 것이 아니라, 이제는 모든 백성이 그 혜택을 누리고 즐길 수 있도록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서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과 상치되는 것도 아니요, 또한 레위인에게 십일조를 일한 댓가로 주시겠다고 한 약속이 취소된 것도 아니다.
신명기에서는 소득의 십분일을 떼어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하여 두 가지 경우로 가르쳐 주고 있다. 첫째로 각 사람이 매년 자기 소득의 십분일을 떼어 가지고,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으로 가서 거기서 그 십일조를 가족과 더불어 먹으며,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면서 이를 즐기는 것이다. 이때 자기 동네의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다. 레위인에게는 분깃이나 기업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족이 먹고 누릴 수 있는 십일조에 대한 사항은 신명기 14:22-27과 12:6-19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 개역 성경의 번역상 오류를 하나 지적하고 넘어 가고자 한다. 14:22에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는 “십일조를 떼어”라고 수정하여야 한다. 여기서 필자가 ‘떼어’라고 번역한 낱말은 ‘열’을 뜻하는 히브리어 명사를 동사화한 것이다. 그리고 이 동사는 십분일을 ‘떼다’ 또는 ’갈라내다‘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 십분일을 드린다는 의미는 결코 내포되어 있지 않다.
둘째로 14:28-29과 26:12-15의 기록에 의하면, 매 3년 째의 십일조는 각자가 이를 떼어 성문에 내놓고,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외로운 자들을 위하여 이처럼 명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이렇게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에게 복을 베풀겠다고 약속하신다.
첫 번 째의 경우 반드시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에서 이를 시행하여야 한다. 자기 동네나 집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조건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 다시 말해서 성전이 서는 곳으로 십일조를 가져와 거기서 이를 먹고 즐기라 함은 다분히 예배적 요소를 의미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레위기 27:30). 그래서 “십일조를 먹으며.....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신명기 14:23)고 말할 수 있기도 하다.
현대 우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상황은 신명기에서 그리고 있는 상황과 가장 비슷하다고 하겠다. 비록 그것이 예루살렘의 성전이라는 특정의 장소 개념에 있지는 않지만, 성전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요한 복음 2:20-22 참조)를 중심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창세기 14장과 28장, 그리고 레위기 27장에서 가르치는 원리 원칙을 근거로 하고, 신명기에서 가르치는 구체적 실천 방법을 토대로 하여 현대 교회의 십일조 방법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다. 우주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되 하나님께서는 십일조를 통하여 자신의 최소한의 권리를 주장하고 계시는 것이다. 오늘은 과거와는 달리 산업의 형태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경제 유통 구조가 돈이라고 하는 하나의 상징에 의존하기 때문에, 성경의 원칙에 근거를 두되 기술적으로 약간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농업 사회에서 한 해에 한 차례 십일조를 뗀 데 반하여, 우리는 모든 소득에 대하여 매월 또는 매주 단위로 십일조를 뗄 수 있으며, 그리고 물품이 아닌 돈으로 십일조를 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 예배할 때에 미리 준비한 십일조를 거두어, 그 돈으로 교회가 다 같이 즐기며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배우며, 자기 생업을 갖지 아니하고 하나님 일에 전념하는 이들을 보살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교회가 다 같이 즐기며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배운다 함은, 교회의 제반 예배 및 전도 활동 및 애찬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운용될 십일조는 매 3년 중 2년으로 하기 보다는, 현대의 상황을 고려하여, 모든 십일조 중 삼분이로 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리고 매 3년 째의 십일조를 다 떼어 가난한 이와 외로운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으니, 다시 오늘의 실정에 맞게, 모든 십일조 중 삼분일을 구제 사업과 교회 일꾼들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구제 사업에 있어서 믿는 이웃이 첫 번 째 대상이 됨은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한 가지 덧붙여서, 오늘 교회의 일꾼 (소위 말하는 교역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레위인이 객과 고아 및 과부와 더불어 보살핌의 대상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많은 수가 구제 사업의 명목은 있되 실제 운용면에 있어서 매우 빈약하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십일조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쓰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음과 같이 기도할 수 있겠는가: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가난한 자와 외로운 자들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치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참된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십일조를 떼어 이 일을 행하였사오니, 원컨대 하늘에서 저희를 보시고 한국 교회에 복을 주옵소서” (신명기 26:13-15 참조).
참고적으로 십일조에 대한 성경 최초의 기록은 창세기 14장에 담겨 있다. 아브람(후에 아브라함으로 개명)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그를 영접하였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소개된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제사장다운 말투로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이 축복의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노략품 중 좋은 것을 골라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모든 사람들을 대표한다. 그는 제1호 선민 (選民)인 것이다. 그리고 왕 겸 제사장인 멜기세덱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시편 110편; 히브리서 7장 참조).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분이다. 그러나 그는 선택 이상의 자격을 갖추신 분으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에 계시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은 영원하신 제사장,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축복을 받으며, 또 그에게 자기 모든 이득의 십분의 일을 감사함으로 드린다. 이것은 모세 율법 이전의 사건으로서,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는 율법의 요구에 의한 복종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감사의 표현인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주재’라고 번역된 낱말은 히브리어로 ‘코네’인데, ‘얻다’ 또는 ‘구입하다’를 뜻하는 동사 ‘카나’에서 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명사 ‘코네’의 일반적인 뜻은 ‘사는 이’, ‘구입자’, ‘소유주’가 된다. 그래서 ‘천지의 코네’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다 소유하신 분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늘과 땅을 소유한다고 할 때, 그 안에 있는 것도 모두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멜기세덱은 이 진리를 아브라함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아브라함은 그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렸을 것이다. 그의 깨달음과 깨달은 진리의 실천은 거기서 멈춘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물품은 네가 취하라’는 소돔왕의 제의를 깨끗이 거절한다. 불의한 인간을 통하여 부자가 되기보다는, 천지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천지의 코네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손을 들어, 불의한 자의 재물을 결코 취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었다.
천지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진정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는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올바른 재물관이 세워질 것이다. 그는 모든 소득에 대하여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감사의 표시를 할 줄 아는 사람이요, 재물 때문에 불의와 타협하는 일을 멀리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십일조를 통하여 우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간접적으로나마 선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