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 선 예배자/매트 레드맨
하나님 앞에 선 예배자 매트 레드맨 지음/홍순원 옮김 죠이선교회출판부/2002년 12월/108쪽/6,500원
▣ 저 자 매트 레드맨 매트 레드맨은 현재 온 세계가 관심을 갖고 있는 예배자이며, 예배 인도자이다. 그는 1993년부터 최근까지 ‘소울 서바이버’에서 예배 인도자로 섬기고 있었고, 새로운 세대의 경배 문화를 이끌어 갈 분명한 차기 지도자이다. 매트 레드맨의 노래들은 열정적이고 순수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는 찬양들이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찬양이 무엇인지 그는 알고 있다. 그는 많은 곡을 쓰면서 사람들이 좀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로 나아가도록 돕고 있으며, 교회에서 사역하는 새로운 예배 인도자들을 이끌고자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특히 ‘The Heart of Worship'은 수많은 예배 인도자들을 감동시킨 귀한 고백의 곡이다. 그의 음반 속에 담겨진 강력한 메시지와 젊은이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찬양들은 거의 죽어 가는 많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바람과 놀라운 예배의 부흥을 경험케 하였다.
▣ 역 자 홍순원 홍익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현재 죠이선교회 간사로 있다. 찬양집 <많은 물소리>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경배와 찬양 및 예배 그리고 이와 관련한 도서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역서로 『당신이 주를 사랑한다면』 『이야기가 있는 경배와 찬양』 『하나님이 네게 복 주시기 원하노라』가 있다.
▣ Short Summary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예배 인도자 혹은 회중의 자세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책이다. 음악에만 사로잡혀 창조주 하나님이 빠진 예배, 혹은 마땅히 하나님에게만 드려져야 할 마음이 다른 적들에게 빼앗기는 요인들에 대해 요목조목 짚어주고 있다. 음악으로 드러나는 음악 예배자의 노래가 어떤 모습으로 구세주와 주파수를 맞출 수 있는지, 스스로 많은 찬양을 작곡하고 수많은 회중집회를 인도해 온 저자 자신의 생생한 고백이 담겨 있다. 부록으로 그가 직접 부른 노래와 그가 참여한 집회 실황 음반이 실린 CD가 한 장 수록되어 있다.
▣ 차 례 서문 1. 억누를 수 없는 예배자 2. 망한 예배자 3. 천한 예배자 4. 예측할 수 없는 예배자 5. 수건을 벗은 예배자 6. 멈출 수 없는 예배자 7. 주목받지 못하는 예배자 8. 한마음을 가진 예배자 9. 만족하지 못하는 예배자 10. 영원한 예배자 하나님 앞에 선 예배자 매트 레드맨 지음/홍순원 옮김 죠이선교회출판부/2002년 12월/108쪽/6,500원
서문 레드맨은 전 세계 많은 교회에서 부르고 있는 수많은 찬양을 작곡했다. 내가 이끈 청소년 모임에 열세 살이었던 레드맨이 참석한 그 순간부터 나는 그와 함께 사역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경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매주 토요일 밤 두세 시간 동안 예수님을 찬양하려고 모였다. 우리는 배울 수 있었고, 임재에 관한 것이었기에, 사랑할 수 있었다. ‘소울 서바이버(Soul Surviver)’는 그 밤에서 시작하여 성장했다.
그런 날들을 지내며 레드맨에게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3,000명이 모이든 3명이 모이는 곳이든 동일한 열정으로 예배를 인도했다. 레드맨은 일찍이 경배가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것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끄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그는 항상 그 한 분의 관중 앞에서 공연했다. - 마이클 밀라비치
1. 억누를 수 없는 예배자 성경은 억누를 수 없는 예배자들로 가득하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기가 꺾이거나 낙담하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리 황량한 시절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지라도 하나님의 가치를 따라 선택하기로 결정한 하박국 선지자의 마음 자세를 좋아한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 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 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최근에 19세기 미국 찬송가 작사가인 화니 크로스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가 아기였을 때 일어난 사고로 삶이 변해 버린 이야기였다. 영원히 시력을 잃게 된 그녀는 “그러나 나는 ‘만족’이라고 부르는 작은 보물을 마음에 담아 두겠다.”라고 속으로 다짐한다. 그리고 이 만족하는 예배자는 대략 8,000곡의 찬송가 가사를 썼다. 이 수천 개의 곡들은 단지 그녀의 마음속에서 예수님을 향해 타올라 꺼질 수 없었던 불의 결과였다. 한번은 누군가가 그녀에게 물었다. “화니, 당신은 장님이 아니었기를 원하죠?” 그녀는 늘 말하던 대로 대답했다. “글쎄요, 장님이어서 좋은 점은 내가 맨 처음 볼 얼굴이 예수님의 얼굴이라는 것입니다.”
돌아가서 마지막에 억누를 수 없는 경배에 대한 환상적인 선포가 나온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아 8:6-7)” 난 하나님을 향한 나의 불이 심지어 가장 강한 반대 물살에서도 꺼지지 않고 씻겨 내려가지 않는 곳, 즉 결코 사라져 버릴 수 없는 경배 가운데 있기를 열망한다.
불을 끄는 사람들은 불이 계속해서 타오를 때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요소, 즉 열과 산소와 연료 중에 하나를 차단한다. 우리가 지닌 경배의 마음도 이와 유사하다. 첫째, 물이 불을 끄는 것처럼 우리 삶의 무거운 압력과 시험들이 경배하려는 우리의 마음을 저하시킬 수 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인내하는 경배자의 제물을 사랑하신다. 비록 많은 문제들이 억누른다 해도, 그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훨씬 더 압도당한다. 둘째, 산소 차단은 경배에서는 성령의 소멸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을 버리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셋째, 연료 공급이 중단되면 불이 꺼지는데, 하나님의 계시는 경배의 불을 타오르게 하는 연료이다. 우리가 마음의 눈을 열 때, 하나님의 계시는 여러 가지 다른 각도에서 우리에게 날아온다. 이 계시를 받을 만한 곳에 우리 자신을 계속 두어야 한다.
시편은 사실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에 드리는 찬양’으로 설명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감사해 하는 것 같더니 그 인자하심이 어디에 있냐고 의아해 하지 않는가? 그러나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셨던 일들을 자세히 조사했고, 그것이 완벽하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믿음과 신뢰의 노래를 억누르지 못하고 올려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에서 끔찍하게 고난을 받으셨을 때, 시편의 애가들을 사용하셨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 이것은 고통의 외침이지만, 이상하게도 복종하는 헌신의 외침이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아들은 또 다른 시편의 애가인 31편에 나오는 구절과 함께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5절)” 놀랍게도, 극도로 고통스런 이 순간에 예수님은 그 당시에 일반적이던 경배의 노래를 올려 드리고 계셨다. 그리고 이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우리에게 격려자가 되신다. 우리는 삶에 어떤 시험이 닥쳐오더라도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끊이지 않는 경배의 찬양을 억누를 수 없는 경배자들을 알아보게 된다.
2. 망한 예배자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섰을 때 이사야는 망한 예배자가 된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깨지고 놀라고 떤다. 그러나 이러한 깨짐은 파멸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를 더 강하고 더 순수한 예배자로 다시 회복시키시려고 그를 모조리 드러내셨다. 이 회복된 예배자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8절)”라고 마음에서 부르짖는다. 리처드 포스터는 이것을 ‘하나님의 면밀한 사랑’이라고 불렀다. 그분은 거룩한 백성을 강조하시는 거룩한 왕이시자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하는 자들을 훈련시키시는 완전한 아버지이시다.
최근 나는 미국에서 열린 워십 투게더 집회에 예배 인도자의 한 사람으로 참석했다. 회중 가운데 섰을 때, 하나님의 임재가 내 마음에 새롭고 강력한 방식으로 임했다. 부드럽게 위안을 주는 그런 시간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회개하고 싶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마음을 언짢게 했던 작은 무언의 태도들과 행동들이 내 마음의 표면에 떠올랐다. 나는 자존심도 버리고, 그 자리에서 하늘 아버지의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나는 망한 예배자였다. 그분은 내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다거나 혹은 특별하게 드릴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깨지고 의지하는 마음을 원하셨던 것이다.
그분은 종종 우리에게 몰락의 계절을 주신다. 이 시간에 우리는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다시 초점을 맞추고 점검하게 된다. 몇 년 전 나 자신이 이런 계절 가운데 있었다. 집회를 위해 기타를 나르던 중 팔에 통증이 시작되는 것을 알았다. ‘피곤해서 그렇겠지’라고 생각했으나 주말 내내 기타를 칠 때마다 통증은 더 심해졌다. 팔 전체가 부어오르기 시작하더니 조금만 움직여도 괴로웠다. ‘어찌된 일입니까, 주님? 우리는 마쳐야 할 음반이 있어요. 저는 지금 일어난 이 일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그러자 내 손이 경직되기 시작했다. 일주일 후 하나님의 놀라운 예비하심으로 최고의 손 전문의가 있는 외과 병원을 방문했다. 그 전문의는 내가 매우 심각한 건염 증상을 보인다면서, 때맞춰 자기가 보지 않았다면 내 손은 영원히 못 쓰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끔찍한 순간이었다.
이후 7주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기타를 칠 수 없다는 것이 나를 가장 절망케 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내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예배 인도자는 대체할 수 있다. 그러나 자녀는 대체할 수 없다.” 그때부터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더 나은 관점을 가지기 시작했다. 망한 예배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 번 그분은 나에게 가르치셨다. 7주가 지나고 내 팔이 훨씬 좋아졌을 때,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훈련 방식으로 나에게 복 주시려고 그 계절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셨는지 알게 되었다. 이따금씩 나의 건염은 아직도 재발하지만 이 병은 내가 다시 무릎을 꿇고 망한 예배자로 남으라는 초대인 것이다.
3. 천한 예배자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삼하 6:21-22)” 다윗은 마침내 주님의 법궤를 메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매우 흥분해서 미친 사람처럼 춤을 춘다. 그는 이 사건에서 단지 군중들 가운데 한 명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공적인 입장을 ‘잊어버리고’ 찬양의 불로 활활 타올랐다. 참다운 경배는 항상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다. 이것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아드레날린이나 마약 때문도 아니었다. 그의 마음에 있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풍성하게 흘러 넘쳤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사랑에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기쁨 속에 자신을 드리는 일을 이상하게 여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시간들을 열망한다. 나는 거리낌없는 경배가 흘러 넘쳐서 내 마음이 예수님으로 그렇게 타 버리는 계절이 있기를 기대한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열정적이기를 원하시는지 기억해야만 한다. 예수님의 탕자 비유에서는 고귀한 아버지가 모든 지위를 잊고서 아무것도 거리끼지 않고 자기 아들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그린다. 우리는 그 모습에서 거리낌없는 엄청난 사랑을 보게 된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도 이와 똑같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에 대한 우리의 유일한 반응은 열정적이고 천한 예배이다.
그러나 예배 인도자들에게 주의할 점이 있다. 미칠 정도로 힘이 넘칠 때,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 때 풍성한 마음에서 나왔던 순수한 행동은 무대에서 다른 사람들 앞에 섰을 때 너무나 쉽게 하나의 공연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하늘 보좌 앞에서 사람들을 인도할 때 슬그머니 기여 들어오는 공연의 요소들을 경계해야 한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주의를 흐리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도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을 마음으로 알게 된다. “우리의 음악으로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실 때, 예배는 자만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4. 예측할 수 없는 예배자 십자가에 차츰 다가가는 주간이었고, 긴장감으로 예수님은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가혹하고 부정적인 태도들에 둘러싸였으며 배신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 압박은 날마다 가중되었다. 곧 이어 겟세마네와 골고다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괴로운 가운데에서도 ‘쓰디쓴 사막에서 달콤한 오아시스 같은’ 아름다운 행동이 일어났다.
예수님은 시몬이라 부르는 사람의 집에 계셨고, 그때 갑자기 한 여자가 향유 옥합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녀는 옥합을 깨뜨려, 부끄러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머리 위에 옥합의 향유를 전부 쏟아 부었다. 예기치 못한 특별한 행동이었지만,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냉소적인 종교적 태도에 물들지 않은 한 여자의 행동이었다. 그녀는 그날 종교적 태도들과 마주쳤지만, 그런 태도들 때문에 영향 받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것을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이 행위를 그런 식으로 보지 않으셨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막 14:6)”
하나님은 그의 신부인 교회의 마음을 얻었다. 이것은 메마르고 예측 가능한 관계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생명과 활력이 충만한 ‘신과의 연애’이다. 진정한 연애는 결코 예측할 수 없다. 연애의 마음은 마음을 두드리는 이에게 다가가기 위해 새롭고 창조적인 방법들을 찾아 나선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정신나간 짓을 많이 한다. 가끔은 심지어 그들의 주위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날 향유 옥합을 들고 예수님께 온 여자도 아마 그 방에 있던 모든 독신자들을 당황하게 했을 것이다. 물론 예수님만 제외하고 말이다.
이러한 방식은 예배 인도자들에게 어떤 큰 암시를 하고 있다. 첫째로, 이 방식은 압력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성령으로만 경배한다. 둘째로, 이 방식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의지하게 된다는 점이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전적으로 연약하여 의지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영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실 기회가 될 것이다.” 이것은 예배 인도자들에게도 실제적인 교훈이 된다. 셋째로, 모든 경배가 무대로부터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예배 인도자 뿐 아니라 그 밖의 사람들을 통해서도 인도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적이 많았고,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회중 가운데 일어나기 시작했다.
5. 수건을 벗은 예배자 출애굽기 34장 마지막에 모세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 능력 있는 만남을 가진 후 시내 산을 내려온다. 모세는 믿을 수 없는 계시의 차원으로 인도함을 받았다.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깊이 들어가 그의 얼굴은 실제로 빛나고 있었다. 사실 너무나 빛나서 사람들은 그를 쳐다보기도 두려웠다. 그때부터 모세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려고 수건을 둘렀다.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었다.” 아무것도 심지어 한 겹의 천도 그가 하나님을 응시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없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의 통찰력을 준다. 하나님의 깊은 계시와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변화이다. 그리고 계시가 크면 클수록 변화도 크다. 경배를 드리며 수건을 벗고 하나님 앞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간 모세도 변화된 예배자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났다.
신약은 우리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우리도 수건을 벗은 예배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하나님은 우리가 경배할 때 믿을 수 없는 대단한 장소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분은 능력과 거룩으로 빛나며 타오르는 소멸하는 불로서, 더 깊은 영광의 차원으로 우리 각자를 인도하시고자 갈망하신다. 그것은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는 불타는 마음이다. 더 깊은 영광의 차원은 우리가 그분의 형상으로 더 깊이 변화되는 곳이다.
예의 없고 불경한 시대에, 참으로 수건을 벗은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타자성’을 인식하고, 또 그분과 친해지자는 부르심을 소중히 간직한다. 그분의 영광으로 못 박히고 그분의 임재로 변화된 우리는 훨씬 더 그분을 닮아 가게 된다. 수건을 벗은 예배자들은 다른 사람이 되어 산을 내려온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며, 보는 이에게 빛을 발한다.
6. 멈출 수 없는 예배자 멈출 수 없는 예배자는 하나님께 예배할 때가 오면 결코 조용하지 않는다. 반대나 위험, 심지어 죽음에 직면해서도 그들은 계속 예배한다. “그들이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았기에.(행 5:41)”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그리스도인이었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가 사람을 부르실 때, 그분은 그에게 가서 죽으라고 명령한다.” 분명히 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아의 죽음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나 본회퍼 자신에게 있어서 이것은 더 많은 문자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서른아홉 살에 그는 감옥에서 붙들려 나와 히틀러와 나치당에 맞서 용감하게 교수형을 당했다. 그는 옥중 서신을 남겼다. “이것은 삶의 끝이지만, 내게는 삶의 시작이다.” 그들은 그의 몸은 죽일 수 있었지만, 그의 경배는 멈추게 할 수 없었다.
멈출 수 없는 예배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어디에서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용감한 복음 전도자이다. 그들이 드리는 경배의 제물들은 그들이 교회 안에 있을 때처럼 교회 바깥에서도 그렇게 진동한다. 그들은 담대한 마음을 갖고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증거할 모든 기회를 잡는다. 사도 바울의 평생의 사역은 자신의 영광스런 예수님을 알리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 자신이 고통에 휘말린다면,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스데반의 이야기는 이에 대해 더 많은 빛을 던져 준다. 그는 들으려고 하지 않는 냉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선포하면서 그 일에 자신의 생명을 걸었다. 그러나 그가 돌에 맞아 죽기 직전, 하나님은 스데반에게 놀랍도록 깊은 계시를 허락하신다. 아마도 그 계시가 이 그리스도인 첫 순교자를 끝까지 강하게 견디도록 도왔을 것이다. 스데반은 하늘 보좌가 있는 방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고,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본다. 이상한 것은 여기서 예수님이 서 계신다는 점이다. 신약에서 그 밖의 다른 모든 때에는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서 계시는가? 또한 예수님 자신도 이 땅을 걸어다니시는 동안 하늘 아버지의 마음에 드리는 멈출 수 없는 헌신의 행동으로 살아가셨다. 유다의 배반이 큰 소리로 문을 두드리고 있고, 겟세마네 동산이 손짓하고 있으며, 십자가의 그늘이 정확히 드리워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예수님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26번이나 선포할 수 있었다. 이 어둠의 시간 속에서도 하늘 아버지에 대한 그분의 헌신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분의 경배하는 마음은 위협받기를 거부한다. 이것은 경배에 관한 어떤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가? 멈출 수 없는 예배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어서 아무 것도 그들을 막지 못하게 한다. 그들은 고난의 시기에도 물러서지 않으며, 그 대신 신뢰와 찬양의 힘찬 시편을 올려 드린다.
7. 주목받지 못하는 예배자 우리가 살면서 주목하는 대부분의 것은 많은 형태의 무대에서 일어난다. 사람들은 눈에 띄기를 좋아하고, 우리의 문화는 명성을 사랑한다. 반면에, 하나님은 매우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신다. 그분은 그 광경을 지켜보시겠지만, 무대 뒤에서 일어나는 일에 훨씬 더 관심이 많으시다. 우리는 너무나 겉모습을 자세히 보지만, 하나님은 바로 중심을 보신다. 우리는 사물의 드러나는 면에 몰두하게 되지만, 하나님은 항상 감춰진 은밀한 면에 훨씬 관심이 있으시다.
예수님은 부자들이 성전 보물 창고에 자기들의 예물들을 놓고 가는 것을 지켜보고 계신다. 그때 작고 은밀한 경배의 행동이 그분의 시선에 잡힌다. 어느 가난한 과부가 걸어 올라와서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거의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작은 구리 동전 몇 개를 바친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포하신다.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주목받지 못하는 예배자는 이 세상에서 주목을 받고자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할 수 있으면 아주 은밀하게 예물을 드린다. 그러나 그들이 가져온 것과 그것을 드린 방법 때문에, 하늘은 추가로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아마도 그들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목받지 못하겠지만, 하나님의 마음에는 주목받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이 책에 나온 대부분의 예들은 공개적으로 행하는 경배의 행동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지켜보지 않을 때 경배드리며 은밀한 장소에서 그분께 헌신하는 것을 가장 먼저 찾으신다.
1,700년대에 프랑소아 퍼넬롱은 어느 예배 인도자를 위해 위대한 충고를 적었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자아를 없애라.” 우리가 정말 이렇게 한다면, 우리의 행동과 태도는 자연스럽게 따라갈 것이다. 우리가 숙여 절하고 있다고 마음에 확신이 든다면, 우리가 인도하는 예배의 외적인 방식도 더 적당해져야 할 기회들이 된다. 잠언 25장 6절은 이렇게 요약한다.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모든 경배 음악 운동에서 우리가 정말 왕의 기쁨을 보려고 한다면, 거기에는 우리가 따라가야 할 어떤 좁은 길이 있다. 때때로 사람들에게서 기쁨을 찾는 것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목적을 위해 순수하고 진실하게 나아가는 것이 바로 과제이다. 그분 앞에 그리고 오직 그분께만 썩지 않은 제물을 가져갈 때, 왕의 기쁨이 당신에게 넘친다는 것을 이 여행이 끝날 때까지 항상 명심하라.
8. 한마음을 가진 예배자 잠재적 최면술에 걸린 세상에서 한마음을 가진 예배자가 추구하는 것은 단순하다. 바로 자신들의 눈을 예수님께 고정하는 것이다. 주위의 모든 구석마다 정신을 산란하게 하는 것들이 새로 생겨나서 우리의 주의력과 싸우고 있다. 너무 많은 일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우리의 시간과 정력을 빗나가게 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소리쳤다.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 86:11)”
예수님 자신의 경우를 보면서, 우리는 어떤 위대한 영감을 발견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이 땅을 걸어가신 이야기는 한마음을 가진 경우로서, 그분은 완전히 하늘 아버지와 그 뜻에 순종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 가시밭길에서 자신을 딴 곳으로 유혹하는 그 어떤 것도 모두 거부하시며,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완성자이시고, 참되게 한마음을 가진 경배자들이 따라야 할 모범이시다.
여러 가지 면에서 경배는 ‘방어’와 ‘공격’ 이 둘을 포함한다. 내 삶에서 무언가가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고 있다면, 어떤 순간에 나는 책임을 지고 어떤 변화를 일으켜야만 한다. 어느 누구도 나를 위해 이것을 해줄 수 없을 때가 온다. 따라서 ‘내 마음을 정케 하소서’라는 옛 기도 뿐 아니라, 최근 나는 ‘내 삶을 단순하게 하소서’라고 새로운 기도를 한다. 중요한 것은 방해받지 않는 헌신의 시간과 열심히 일하는 시간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이 헌신의 시간은 조용하게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아는 순간이다. 흥미롭게도 나는 정기적으로 하나님과 만나는 ‘경건의 시간’을 할 때, 일상생활 속에서 그분을 훨씬 더 인식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언젠가 토저(Tozer)는 우리가 ‘정말 바라는 것 없이 전적으로 하나님과 사랑에 빠져서 애정을 바꿀 생각이 저 멀리에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 그 장소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한마음을 가진 예배자들의 진정한 표시이다. 아주 단순한 삶은 ‘예수에 관한 모든 것’이 된다.
9. 만족하지 못하는 예배자 예수 그리스도의 예배자로서 우리는 ‘지금’과 ‘아직’의 긴장 속에 살고 있다. 우리가 그분을 모셔들인 그날부터 우리 영혼들은 각각의 삶의 이유와 가치를 찾았다. 그분의 사랑과 임재가 실제로 우리 마음에 들어왔고, 우리는 성취되는 것을 보았다. 성경은 “좋은 것으로 우리 소원을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그림이 아니다. 우리는 또 만족하지 못하는 예배자들이다. 단지 부분만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하늘 아래에서 우리는 항상 우리 마음에 거룩한 좌절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에 있는 신음소리인 것이다.
만족하지 못하는 예배자의 마음에는 세 가지의 풀리지 않는 긴장이 있다. 첫째, 우리는 단지 하나님 영광을 살짝 엿본, 그분의 찬란한 바다에 떨어진 아주 작은 물방울에 불과하다. 우리는 삶에서 더욱 그분을 알고자 하는 지속적인 갈망으로 살아간다. 둘째, 우리는 자신이 상처받은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갖고 산다. 부분적으로 치유를 받았지만, 여전히 너무나 상처받기 쉽다. 우리는 온전하기를 열망하는 미완성의 예배자들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낯선 땅에서 이방인들로서 존재한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환난과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 많은 잃어버린 심령들을 쓰린 마음으로 끌어안는다. 하늘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런 상황들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열망한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긴장들이 우리를 나쁜 예배자들로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긴장들은 믿음으로 인내하려는 우리의 결심을 강화시키기에, 우리를 더욱 헌신하게 한다. 우리는 부분만을 보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여행하는 동안 우리에게 소망과 목적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언젠가 그 불완전함이 사라지고 충분히 알게 될 것을 확신하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경배를 부지런히 드릴 때, 우리는 아득히 먼 곳에 한쪽 눈을 고정시키게 된다. 루이스는 이것을 가장 잘 요약한다. “내가 이 세상의 그 어떤 경험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열망을 내 안에서 발견한다면,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내가 다른 세상을 위해 지음받았다는 것이다.”
10. 영원한 예배자 “영광 중에 설 때 주 얼굴 뵈옵고, 왕되신 주, 그곳에서 영원히 섬기리.”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하게 보지 못한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을 볼 것이다. 비록 그때까지 우리가 충분히 볼 수 없다고 해도, 우리는 지금 적어도 부분적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루이스는 이것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물론 잠시 동안 우리는 단지 자신들의 악기를 조율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정도는 교향곡을 기대할 수 있는 이들에게만 가능한 일이기에, 오케스트라가 악기의 음조를 맞추는 것은 그 자체로 기쁜 일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단지 자신의 악기들을 조율하는 경험만 할 뿐이다. 이것은 이상하고 알 수 없는 잡음이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울려 퍼지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관한 어떤 것을 듣기 때문에, 묘한 매력이 있다. 우리는 언젠가 그 일원이 되어 연주하게 될 완전한 영감을 받은 교향악의 메아리를 듣는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조율하는 것 그 자체에 모든 놀라운 아름다움이 있다.
찰스 웨슬리는 여든한 살에 연약하게 자신의 죽음을 맞는 침대에 누워, 마지막 찬송가 하나를 작곡했다. 작곡하기에는 너무 쇠약했기에 그는 이 짧은 여섯 줄을 아내에게 받아 적도록 했다.
나이와 극도의 연약함 속에서 벌레 같이 무력한 인간을 누가 구속하겠는가? 예수 당신은 나의 유일한 소망이시니 나의 쇠약한 육신과 마음을 강하게 하소서 오, 내가 그분을 한 번 미소짓게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영원 속으로 떨어졌으면
그는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 바쳤던 사람이었다. 웨슬리에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고 있는 곳을 알았기에, 더 분명히 말해 누구에게 가고 있는지 알았기에, 죽는 것도 유익했다. ‘오, 내가 그분을 한 번 미소짓게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영원 속으로 떨어졌으면’하는 마지막 소절은 만족하지 못하는 예배자의 마지막 한 마디이자 영원한 예배자의 첫 마디였다.
우리가 보기에 예수님과 함께 하는 영원 동안, 우리는 모두 영원한 예배자이다. 단호하게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자. 앞을 향해 애쓰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상을 얻도록 밀고 나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