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자료/영적성장과성숙
출애굽의 영성
발의무리
2008. 1. 7. 18:32
출애굽의 영성 |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출애굽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지긋지긋한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에 들어가 땅을 얻는것, 이것이 전부일까?
아니다.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이 있다. 무엇인가?
<하나님 알현>이 그것이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으로 직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뵙기 위하여 하나님의 산인 시내산(호렙산)으로 갔다.
하나님의 산으로 가서 그분을 뵈옵고 무슨 일을 했나?
그분의 말씀을 받고 계약을 맺었다. 하나님을 뵈옵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것, 이것이 출애굽 사건의 핵심이다.
출애굽은 애굽에서 나오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현하러 가는 길이다.
애굽에서 나오는 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더 중요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졸업식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거창한 졸업식을 진행시키셨다.
애굽의 열 가지 기적(애굽사람에게는 재앙)은 졸업식이며, 홍해바다를 건너서 시내산으로 가는 광야길은 졸업여행과 같은 길이다.
출애굽은 지금도 내면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영성수련을 통하여 가장 낮고 천한 하비루 의식의 절정에 이르게 되면 세상이라는 애굽에서 하나님의 면전에 실제로 불림을 받는다.
꿈이나 환상으로서가 아니라, 의식이 멀쩡한 상태에서 그분 면전에 서서 그분을 뵙고 말씀을 듣는 일이 영성의 길에서 일어난다.
하나님께로, 하나님 면전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영적인 하비루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비루만 만나주시는 하비루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출애굽 사건은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과거의 일에 대한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
지금 우리의 사건으로 다시 살려내야 한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과거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끝나서는 안 된다.
내가 지금 여기서 아브라함처럼 준비하는 사람으로 그 사건에 다가가고, 아브라함을 부르시던 사건이 내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을 뵙고 계약을 맺는 시내산 계약사건, 가나안 입주 사건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4천 년 역사 가운데는 이런 긍정적인 사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정적인 사건들에 대해서는 반대로 다가가서 반대로 일어나게 해야 하는 사건들이 있다.
실패한 사건의 역사들이 그런 것들이다.
실패했던 역사의 원인을 분석하여 그들이 다가갔던 것과 반대로 다가가서 그들의 실패가 오늘 우리에게 되풀이되지 않도록 반대로 살려내야 한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내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문자로 기록된 성경의 말씀들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금 내게 들려지고, 내 안에서 그 말씀들이 육화되어야 한다.
하나님 체험은 곧 성경 말씀의 체험과 병행된다.
성경에서 기록된 사건들이 내 안에서 다시 체험되어야 한다.
내가 출애굽 현장에 가 있어야 하고, 시내산 계약의 자리에 있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심정으로 안타깝게 눈물로 호소하고 책망하며 갈 길을 제시하던 예언자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먼 옛날에 있었던 예언자들의 사상, 신학, 행동을 책상에서 책으로 연구하는 정도로는 되지 않는다.
내 안에 예언자들이 가졌던 영성, 하나님의 심정으로 채워져야 한다.
예수님의 행적이 기록된 복음서의 말씀을 읽으며 묵상하는 정도 가지고는 안된다.
그 말씀에 젖어 들어가야 한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 넘어서 산상수훈을 선포하시는 갈릴리 바닷가로 가야한다.
예수님의 육성이 문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으로 내 영혼 속에 전달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 자리에 내가 있어야 한다.
바라보는 자로서가 아니라 십자가를지고 가는 자로서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실 때 내가 맞아야 하고, 예수님께서 넘어지실 때 내가 넘어져야 하고, 예수님께서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내가 못 박혀야 한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순간 내가 죽어야 하고, 그리고 다시 살아나야 한다.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타락한 아담의 죄성이 내 안에서 정화되고 주님의 성품으로 채워져야 한다.
출애굽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내가 주님을 알현하러 가는 내면의 여행이 되도록 해야 한다.
내가 주님을 뵈옵기를 원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주님은 우리 모두를 지금 여기서 보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이 주님의 고민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