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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문화유산을 찾아서/ 강소

발의무리 2008. 4. 21. 08:03
잃어버린 문화유산을 찾아서/ 강소연 

잃어버린 문화유산을 찾아서

 

강소연

천국의 풍경에 취하다

황홀한 극락의 풍경

극락은 어떤 모습일까? 천상의 악기에서 저절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선율, 평화롭고 애틋한 금빛 극락조의 지저귐, 금강석이 가득 깔린 개울에서 흘러나오는 황금빛 물줄기, 허공에 흩날리는 꽃송이, 진주 그물 휘장 사이로 부는 청정 바람의 그윽한 향기, 피어오르는 꽃구름 찬연히 솟아오른 보석 누각…….

극락의 대지뿐 아니라 나무․물․누각 등 경전을 따라 극락의 정경을 따라가다 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아득한 화려함에 눈이 멀고 귀가 먹을 정도다.

아미타불의 구제를 설명한 세 경전 아미타3부경(『아미타경』, 『무량수경』,『광무량수경』)에 묘사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를 처음 접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영어로 번역된 경문을 통해서였다. 런던 대학 유학 시절, 동양학 도서관에서 우연히 접한 영문판 『관무량수경』을 읽어 내려가며 그 성스럽고도 아름다운 문구에 감동받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산스크리트어 원문에서 직접 옮긴 것이라 그런지, 한문 번역 경전이 주는 문학적 상상력에 전혀 뒤지지 않는 원문의 울림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왔다. 막연히 한역 경전이 우월하다는 고정관념이 있던 나에게 이 영문판은 신통하리만치 잘 읽혔는데, 나중에 보니 저명한 종교학자 막스 뮐러(Max Miller)가 옮긴 것이었다.

그 휘황찬란한 극락세계에 빠져 있다가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많은 대승경전들은 색깔․소리․향기․맛․촉감과 같은 거짓된 감각의 세계에 전도되지 말라고 역설한다. 오온, 즉 색․수․상․행․식의 모든 육체적 감각과 감정, 그리고 지적 인식 작용 등 일체가 모두 실체가 없으니, 이 현상계에 현혹되지 말라고 경계하고 또 경계한다. 그런데 여기 묘사된 극락은 시각․청각․후각 등 감각의 천국, 그것도 아주 감각의 극치에 다다른 천국이 아닌가?

그림으로 그린 극락정토 가는 길

일본 교토의 지온인에는 고려본(1323년, 충숙왕 10) <관경16관변상도>가 보존되어 있다. 거의 700년에 달하는 세월을 견디며, 고려인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천국’의 모습이 과연 어떠했는지를 우리에게 고스란히 보여 준다. 이 작품의 근거가 되는 경전인 『관무량수경』이 기록된 연유는, 마가다국 왕사성에서 왕위를 놓고 벌어지는 부자 사이의 참혹한 비극에서 비롯된다. 왕좌를 차지하려는 욕망에 눈이 멀어 아사세 왕자는 부모인 왕과 왕비의 생명마저 위협한다. 권력욕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는 아들의 횡포에 목숨까지 위태롭게 된 상황에서, 위제희 왕비는 깊은 비애감에 젖어 ‘괴로움도 번뇌도 없는 곳’에 태어나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구원을 호소하게 된다.

“원하옵나니, 부처님이시여!

고통도 번뇌도 없는 곳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이 인간세상같이 혼탁하고 사나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더럽고 악하기 짝이 없는 이 세상에는

지옥과 아귀와 축생이 가득하고, 못된 무리들이

득실거립니다.

마음은 어지럽고 삿되어 생로병사의 괴로움,

이별의 슬픔에 항상 시달립니다.

진정으로 원하옵건대

어찌 하여야 편하고 즐거운 극락세계를 볼 수 있을까요?”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무상한 행복의 땅’이라 하는 ‘서방극락’을 약속하고, 불가사의한 방편으로 왕비를 그곳으로 안내한다. 그리고 극락정토로 갈 수 있는 ‘열여섯 단계의 관상법을 가르쳐 주는데, 이것을 그림으로 도해한 것이 <관경16관변상도>다.

어머니가 아이를 품듯

대지의 어머니, 지장보살

지장보살이 나타나자 어마어마한 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뒤덮더니 억수같은 비가 퍼붓기 시작한다. 그러자 빗소리가 천지에 진동하고 흠뻑 젖은 대지는 살아나기 시작한다. 지장보살 3대 경전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꼽히는 『지장십륜경』에는 지장보살이 상징하는 바를 큰 비의 혜택에 비유하고 있다. 비가 내려 땅 위의 모든 만물을 윤택하게 하듯, 지장보살은 주변 모든 것들에게 무한한 은혜를 베푼다는 의미다.

그때 커다란 향구름과 꽃구름,

아름답고 오묘한 보배 장식 구름,

곱고 깨끗한 의복 구름이 몰려오더니,

커다란 향비․꽃비․보배 장식비․의복비를 흩뿌려

온 대지를 적십니다.

그러자 온갖 미묘한 큰 법음의 빗소리가 천지를 가득 울립니다.

이 빗소리는 용맹스럽게 정진하는 소리이며,

삼악도의 중생을 제도하는 소리이며…….

-『지장십륜경』「서품」중에서

‘지장보살(地藏菩薩)’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 ‘크슈티 가르바(Ksiti-garbha)'에서 유래한다. ’크슈티‘란 ’대지(大地)‘를, ’가르바‘란 ’생명을 품는 태(胎)‘를 뜻한다. 지장보살은 고대 인도의 ’대지의 신‘인 대모지신(大母地神)에 그 연원을 둔다. 어머니가 아이를 품듯, 대지가 세상 만물을 품어 발육 성장시키는 신성한 힘을 상징한다.

물론 지장보살은 우리에게 명부전의 주존, 즉 죽음의 세계를 관장하는 보살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근본 의미를 살펴보면, 지옥에 떨어진 영혼을 구하는 구원자로서의 의미에 앞서, 대지가 만물에 생명을 불어넣고 기르는 것과도 같이 중생을 윤택하게 하고 또 중생의 이익을 증장시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말하자면 ‘대지의 신’으로서의 기본 의미에서 나아가, 죽은 영혼에까지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지옥 속의 영혼까지 살려 낼 수 있다는 의미로 발전하게 된다.

워싱턴에서 만난 고려시대 지장보살

지장보살은 마치 어머니와도 같이 중생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내준다고 한다. 『지장십륜경』에는 지장보살의 역할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온갖 위험과 고난에서

구해 주기는 부모와 같고,

여러 가지 비겁하고 용렬한 것을

감싸주기는 우거진 숲과 같고,

여름에 먼 길을 가는 이에겐

쉬어 갈 큰 나무와 같고,

더위에 목마른 자에겐 맑은 샘물과 같고,

굶주린 이에게는

달디단 과실과 같고,

몸이 드러난 자에게는 의복과 같고,

더위에 시달리는 자에게는

두터운 큰 구름과 같고,

빈궁한 자에겐 여의보주와 같고,

두려워 떠는 자에게는

편안히 의지할 바가 되고,

갖가지 곡식을 가꾸는 이에게는 단비가 되고…….

이렇듯 아낌없이 주는 어머니와도 같이 여성적 느낌을 한껏 풍기는 지장보살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우아하고도 아름다운 자태의 고려시대 지장보살을 만날 수 있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스미소니언 프리어 갤러리는 한국․중국․일본의 동아시아 유물 컬렉션으로 매우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 소장된 한국화 조사를 마치고 돌아서려니, 공개되지 않은 작품이 하나 더 있다며 담당 학예관이 신주 모시듯 가지고 나와 펼쳐 보여 준 것이 이 <지장보살도>이다.

고려시대에는 지장보살 단독으로 그려지는 <지장보살도>,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함께 그려지는 <지장삼존도>, 지장보살과 저승을 관장하는 10명의 왕이 함께 그려지는 <지장시왕도> 등 다양한 형식의 ‘지장보살도’가 다수 유행하였다. 그런데 단독으로 그려진 지장보살도 중에서, 이렇게 유려한 자태의 지장보살은 참으로 보기 드물다.

붉은 보석이 알알이 박힌 금 석장을 왼쪽 어깨에 걸치고 석장대를 왼손으로 살짝 잡아 비치고 있다. 그리고 영롱하게 비치는 투명 여의주를 오른손 바닥에 맵시 있게 받쳐 들고 있다. 곁에 두른 남색 가사와 아래에 입은 붉은 색 치마에 수놓인 문양이 아직도 생생하게 금빛을 발한다. 지장보살의 발은 활짝 핀 금색 연화가 떠받치고 있다.

그 외의 장식으로는 둥근 귀걸이와 영락 목걸이를 하고 있는데, 주렁주렁 치장이 많은 다른 보살에 비하면 매우 간결하다는 느낌이 든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가락의 움직임, 왼발을 살짝 안으로 당겨 끄는 듯한 느낌, 이와 더불어 살짝 움직이는 옷자락의 탄력,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더없이 매력적인 자태다.

의상대사를 지킨 애틋한 사랑

두루마리 그림 속에서 펼쳐지는 원효와 의상의 파란만장 생애

일본 교토의 명승지 고잔지에는 화엄종조사회전(華嚴宗祖師繪傳), 일명 ‘화엄연기(華嚴緣起)’라고도 불리는 긴 두루마리 그림(일본어로는 에마키(繪卷)이 보존되어 있다. 사찰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자 일본의 국보다. 이 에마키에는 신라시대 두 고승인 의상과 원효의 일대기가 그림 설명(畵詞)을 곁들인 에피소드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그중 특히 선묘가 바다에 투신해 용이 되어 당나라에서 귀국하는 의상을 수호하는 장면은 현존하는 네 권의 <의상도(義湘圖)> 중 클라이맥스로 꼽힌다.

이 작품을 제작한 묘에쇼닌(明惠上人, 1173~1232)은 일본 나라시대에 도다이지(東大寺)를 중심으로 번창했던 화엄종을 계승하여, 가마쿠라 시대(1180~1333) 전기에 교토의 고잔지를 근거지로 화엄종을 부흥시켰던 유명한 스님이다. 그는 화엄종의 중흥을 꾀하면서 신라의 원효와 의상을 화엄종의 시조, 즉 조사(祖師)로서 높이 받들었다. 불교 경전의 철학적 깊이를 헤아려 주는 교학적 측면, 다시 말해 뛰어난 불교적 지식을 지닌 학승으로서만이 아니라, 그 인품과 덕행을 깊이 사모하여 두 조사의 행적을 삶의 표상으로 삼고 따랐다.

<원효도> 두 권을 포함해 이 <화엄연기>는 총 여섯 권으로 되어 있는데, 각 권 머리마다 “이것은 화엄종 조사에 대한 그림이다. 부정한 곳에 두고 보아서는 안 되며 잡스러운 그림과 섞이게 해서도 안 된다.”라는 엄한 경계 문구를 써 넣어, 한 치의 소홀함 없이 아주 경건하게 관리했다.

묘에스님의 꿈속에 나타난 선묘 낭자

묘에쇼닌은 괴짜 같은 행적으로도 유명하여 오늘날까지도 일본 대중에게 사랑받고 있는 매우 친근한 인물이다. 그의 기인적인 행적들 중 하나가 열아홉 살부터 환갑 때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자신의 꿈을 써 내려간 ‘몽기(夢記)’, 꿈의 일기이다. 이 일기에는 어느 날 현란한 꿈에서 깨어나 돌이켜보니 “뱀이기도 하고 돌이기도 한 것, 생각해 보니 선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묘에는 이 꿈을 꾸고 나서 ‘선묘의 희생이야말로 화엄을 지키고 부흥시킨 기적’이라 하면서 젠묘지(善妙寺)를 지어, 선묘를 화엄 도량인 고잔지의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권청신(勸請神)으로 모셨다. 당시 일본은 바쿠후(幕府) 정권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계급 간의 마찰과 권력 쟁투가 심했다. 이것이 표면적으로 불거진 사건이 조큐의 난(承久の亂, 1221)으로, 교토를 중심으로 한 수많은 사무라이들이 희생되는 참극이 벌어진다. 이때 묘에가 지은 젠묘지는 남편을 잃은 수많은 여인들의 위안처가 되었다. ‘비극적 운명은 오히려 기적을 낳는 힘’이라는 선묘의 교훈이 여인들에게 감화를 주어 힘겨운 난세를 견디는 버팀목이 되었던 것이다.

목숨과 바꾼 사랑, 선묘낭자 설화

이 <의상도>의 설화는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수록된 「당신라국의상전(唐新羅國義湘傳)」에서 가져온 것이다. 신라를 떠나 기나긴 여정 후 당나라 항구에 도착한 의상 법사는 부근 마을에서 걸식을 하다가, 마을에서 아름답고 단아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선묘라는 규수의 집에 이르렀다. 문 앞에 나타난 위풍당당하고 수려한 의상 법사의 모습에 선묘 낭자는 첫눈에 반하고 만다.

그녀는 “법사께서 욕망의 세계(욕계, 欲界)를 벗어나 널리 진리의 세계(법계, 法界)를 이롭게 하시려는 그 공덕을 공경하고 싶지만 법사의 모습을 뵈오니 제 마음이 홀연 흔들립니다. 자비를 내리어 제 헛된 욕정을 없애 주소서.”라며 숨길 수 없는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나 의상의 결심은 바위와 같아, “저는 먼저 부처님의 계율을 지키는 자이기에 저의 몸과 목숨은 그 다음으로 하였습니다.”라는 강직한 말로 그녀의 구애를 뿌리쳤다. 그런데 그 답에 오히려 선묘의 사랑하는 마음(애심)은 존경을 넘어 믿음(신심)으로 바뀌었고, 중생을 구제하려는 의상의 마음을 높이 받들어 그를 돕겠다고 마음속 깊이 다짐을 한다.

이후 의상은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대사 문하에서 수행 정진하여 모든 중생과 함께 성불하는 경지인 일승법계(一乘法界)의 최고 경지를 성취한다.

한편 선묘는 어떻게 되었는가? 두루마리 그림에는 선묘가 의상을 오매불망 그리며 정성 들여 법의(스님의 옷)와 발우(스님의 공양 그릇)의 법구 상자를 마련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는 의상이 고향 땅 신라국으로 돌아갈 때 분명히 이 마을을 다시 지나게 될 테고, 그러면 그때 다시 만나 볼 수 있으리란 소망을 품고 집 안의 재물을 팔아 법구 상자를 준비한다.

의상이 당나라에 머문 기간이 10년이니, 그녀는 자그마치 10년을 기다린 셈이 된다. 그런데 막상 그 외 재회하던 날, 아…… 야속하게도 짙은 안개가 앞을 가로막아 간발의 차이로 의상이 탄 배는 먼저 떠나고 만다. 멀어지는 배를 보고 해안 절벽까지 달음질쳐 쫓는 그녀, 결국 주저앉아 엉엉 울고 만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든 그녀는, “대사께서 받지 않으시면 다시 누가 받겠는가!”라고 되뇌며 정성껏 준비한 법구 상자를 바다에 던진다.

 

그런데 법구 상자가 파도를 가르더니 의상의 품에 닿는 것을 보고, 선묘는 “저는 내세를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바로 지금 현재의 몸으로 법사의 큰 뜻을 돕는 몸이 되게 하소서.”라며 돌연 바다에 풍덩 뛰어들었다. 그러자 집채만한 검은 파도가 일고 번개가 치더니 그녀는 한 마리 거대한 해룡으로 변했다. 해룡이 된 그녀는 거친 비바람과 높은 파도로부터 의상이 탄 배를 지켜 무사히 신라 땅에 닿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