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교수님의 요한복음 강해
1. 요한복음의 서론 만일 마가나 누가를 보고 썼다면 공통점이 있는 것 당연하고, 만일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요한이 고쳐 쓴 것이라 설명한다. 그렇다면 왜 고쳤는가? 그것은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그래서 자연히 요한복음은 역사적인 책이라기 보다는(역사성은 별로 없고), 그리스도의 의의를 강조하는 신학적인 책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역사적 재구성을 위해서는 별로 가치가 없고 신학적인 책이다. 그래서 첫 비평(전제)이 나머지 비평(전제)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자료가 중요하다. J가 기초한 자료가 중요한 것이다. 1938년에 P. 가드너 스미스란 사람이 조그마한 책을 출간. 이 사람이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공통점을 자세히 분석해 보았다. 요 6장의 5000명 먹이신 이적 등을 분석해 보았더니, 공통자료에서도 차이점이 나타났다. 이 차이점은 미세하다. details. 풀이 많다거나. 거기에는 무슨 신학적인 의미가 담긴 것 같지 않다. 앞의 논리에서 J가 차이점들은 신학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details에는 신학적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 요한복음이 독자적인 자료를 가지고 썼다. 이 견해에서는 독자적인 자료와 공관복음의 자료 모두가 예수에 대한 전승이므로, 서로 비교해 보면, 같은 자료가 있겠고, 그 다음에는 차이점도 있다. 특히 지리적인 차이점, 즉 팔레스타인의 사역을 많이 다루는 특징들이 있다. 그렇다면 J에 담긴 자료가 무조건 역사성이 없는, 즉 공관복음의 자료를 고쳐서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결론. 즉 J의 자료가 역사성이 있는 것이다. 물론 J은 새로 해석되어지고 다듬어진 층이 깊다. 그래서 해석의 층을 벗겨봐야 원래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조건 J에 있다고 해서 비역사적인 것이라 할 수 없다는 인식이 나타났다. 그래서 이 연구에 기초해서 요한복음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제안되었다. New Look on Jn이 성립. 가드너의 제자 존 로빈슨(John Robinson). 1960년에 ‘하나님에게 정직하자’란 책으로 성공회 감독직에 의해서 사임하고 캐임브리지에서 교수하다가 죽었다. 이 사람은 이중적인 사람이다. 신약학자이면서 신학자였다. 신학자로서는 대단히 보수적인 사람이다. 신학연구에서는. 그러나 신약의 케리스마를 오늘의 카테고리로, 그리고 사고구조로 번역해야 한다는 해석(허메누틱스)한다는 면에서는 과격파이다. 신약학자로서는 보수적이고 대단히 꼼꼼하다. C.H. Dodd도 함께. 로빈슨의 주장 - AD 30년 직후부터 복음서에 자료들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J이 제일 먼저 쓰여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 마지막은 다른 공관복음보다 늦게 쓰여졌지만. 그래서 어떤 자료들은 J이 더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다. 옥스퍼드에서 강연하고 죽었는데, 이런 영향에 의해서 영미에서는 이 새 관점이 강하고(즉 역사성, 독자성을 강조), 유럽대륙에서는 이전 관점이 강하다. 그래서 60년대 일어난 편집사비평에서 보니까 요한복음이 바로 복음. 설교. 그래서 이 복음이 역사성과 신학성을 겸비한 것이다. 그렇다면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없다. 복음. 즉 역사성과 신학성 모두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J을 잘 연구해서 역사성을 잘 파악하고 그 역사성 재구성을 통해서 어떤 복음을 전하려고 했는가를 잘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해석학적 관점이고, 지난 3-40년 동안 확산된 것이다. ■Dodd가 큰 책 두 권을 썼다. 이 사람의 제자인 스몰리(번역되었다)는 J의 저작 과정을 3단계로 말한다. 제일 탁월한 주석 브라운의 책. 아직까지도 제일 좋고 방대한 주석이다. 영어로 쓰여진 주석 중. 이 사람은 오단계 주장. ■헬라적 카테고리로 해석한 책이다란 주장. 일리가 있다. 읽어보면 공간적 이원론을 발견하게 된다. 요한 3장을 보면 니고데모가 왜 Jx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느냐. 니고데모는 아래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위에서 오는 힘으로 나야 한다. 즉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이차적인 의미고, 일차적인 의미는 위에서 오는 힘이다. 요한복음의 특징은 이중적인 의미가 많다. 아노센이란 말이 나오는데, 위로부터 라는 말이 일차적인 말, 두 번째가 이차적인 의미이다. 즉 위로부터 오는 힘으로 다시 나아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가능한가? 바로 Jx께서 위에서 아래로 오신 분.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오신 분이시기에 아래에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게 함을 가능하게 했다. ‘들어올려짐’도 이중적인 의미이다. 십자가에 들려짐이 영광 받으심인데, 이것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길을 뚫은 것이다. 아래에서 위의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은 위에서 아래로 왔기 때문에, 즉 인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란 얘기이다. 아래에서 위로 들어올려져서 위 아래 길을 뚫어서, 위의 지식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헬라적 인생관을 보여주고 있다. 첫 사도들에 의해서 팔레스틴을 배경으로 한 복음을, 헬라적 사람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헬라적 개념으로 번역한 책, 즉 그들이 알아듣기 쉽게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사고구조로 번역한 토착화한 책, 상황화한 책이다. 기억나는가? 학교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플라톤의 이원론이다. 위-idea. 본질. 아래-본질, idea의 모조품, 그림자이다. 위는 진리, reality, 진짜이고, 아래는 환상 (illusion), 가짜이다. 가짜인데 진짜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현상의 세계이다. 여기서는 참 지식이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암흑의 세계이다. 페노메나. 위에는 영원의 세계이고, 아래는 시간의 세계이다. 시간의 세계는 변화의 세계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있다. 이것이 플라톤이 정의한 전형적인 헬라적 세계관인 것이다. 인생은 소우주(microcosmos)이다. 이 영혼이 타락한 물질인 몸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인생이다. 몸이 바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고 그 속에 영혼이 갇혀 있다는 것이다. 몸은 물질적인 것이며, 가짜이다. 그래서 몸이 악하다란 것까지 나간다. 왜? 진정한 우리의 본질인 영혼을 가두기 때문. 몸은 영혼의 무덤이고 감옥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전제에서는 구원론은? 영혼이 몸에서 해방되어 위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혼이 깨어있는 사람은 아래의 세계가 가짜인 것을 안다. 그래서 위의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기억이 있고 동경이 있다. 영혼이 약한 사람은 몸 속에 갇혀서 알지 못한다. 몸으로부터 해방되어 위의 세계로 복귀하는 것이 구원인데, 이 복귀는 어떻게 하는가? 바로 지식이다. 이 지식은 철학이다. 이 지식은 아래의 현상의 세계가 가짜인 것을 아는 것이다. 위의 세계를 동경할 수 있어야 한다. 권력이든, 돈이든, 아래에서의 아름다움이든 진짜가 아니고 가짜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그런 가치들에 의미를 부여하겠는가? 오히려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영혼이 몸으로부터 점점 분리되고 자유로워진다. 그래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무엇으로? 지식으로. 이것이 헬라사상의 대표적인 사상이다. 이것은 인도철학과 비슷하다. 인도 힌두교. (불교는 개혁 힌두교). 불교 용어로 말하면 삼라만상이 시간적 세계로서 가짜이다. 구원이란 이 시간적 존재를 벗어나서 영원의 세계로 가는 것. 방법은 지식. Veda를 통해서. 베다는 지식을 의미한다. 베다=오이다. 헬라말과 같은 것이다. 이 지식을 깨달아야 한다. 각(覺). 삼라만상에 대한 의미부여를 끊고, 연(우리를 속박하는. 권력, 색욕, 가족관계 등)을 끊고 내 영혼이 본질의 세계에 들어간다. 이것이 열반이라 하는 것이다. 입적. 몰아 등. 현상으로서의 내가 없어지는 것이다. 헬라적 이원론의 체계나 힌두교적 세계나 유사하다. ■이런 사고구조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려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이다.
1) 서론: 1장 3. 서론 A. 서시 (1.1-1.18) ■그런데 왜 logos로 시작하는가? 헬라철학에서 중심적인 개념이다. 이 개념은 합리적인 생각과 그 생각의 외적 표현 모두를 표현하는 것이다. 생각과 말을 함께. 이 로고스가 우주의 편만한 이치. 그것의 씨가 우리의 영혼 속에 있어서 우리 영혼이 우주에 나타난 로고스를 이해하고 그 지식을 터득할 수 있다. 우리 속에 있는 로고스가 우주에 있는 로고스의 씨(혹은 쪼가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양 로고스가 합치되어서 우주에 있는 로고스을 이해하고 지식을 얻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로고스 사상은 얼핏보면 헬라사상과 비슷한 것처럼 보이는데 조그만 들어가면 구약과 히브리의 사상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이다. 이것은 계시의 수단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으로 잘 드러났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에 의하면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수단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빛이 있으라. 이 세상이 말씀을 띤다. 그래서 이 세상이 이해하게 된다. 특별히 주신 것이 율법인데, 이것이 말씀을 띤다. 그래서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 - G께서 지혜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온 세상이 하나님의 지혜를 띤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오묘한 질서와 조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G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지혜의 근본은 G을 아는 것이다. 시편 14편에 보면 바보는 그 마음 속에 G이 없다 하는 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대로 살면 구원을 받는다. 지혜가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수단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를 인격화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남성명사로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지혜는 여성명사로서 하나님의 딸. 잠언 8장에 보면 지혜가 G의 딸로 그려진다. 보좌 앞에서 애교를 떠는. 이 말씀과 지혜가 아래로 보냄을 받아서(에이전트가 된다는 의미), 하나님의 역할을 대행한다. 이것이 초월자의 내재함이다. 이것이 이위일체론적 신론이라 한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말씀, 혹은 딸로서 지혜. 이 보냄을 받은 자는 일꾼이다. 하나님의 일꾼. 그것을 보고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래서 서시의 로고스에는 헬라에 플라톤 사상이나 로고스 사상으로 이해해도 잘 이해되고, 구약의 G 말씀과 지혜로 이해해도 잘 이해된다. 구약의 유대교적 신학적 배경에서 생성된 복음이 헬라적 배경으로 완벽하게 번역된, 토착화․상황화의 가장 좋은 모델이다. 요즘 토착화한다는 사람들이 성경을 안본다. 그렇게 하는 모델이 성경에 잘 나와 있는데 바울서신, 요한복음, 요한계시록 등. ■내용 *세 평면에서 이 말씀들을 이해해야 한다.
12절. 영접한 다는 것은 그 이름을 믿는 자를 의미한다. 세상 전체가 거부하는 가운데 그 중 일부가 예수를 영접했는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자녀는 언약 개념이다. 원래는 유대인들이었는데. 여기서 분리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자녀되는 자격을 박탈당하는 유대인 다수와 믿어서 자녀가 되는 자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유대인 중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는 자는 이스라엘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다른 유대인들은 예수를 대적하는 세상의 대표가 된다.
13절. 이러한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님의 의한 새 창조에 의해서 이다. 14절. 성육신. 아버지의 독생자. 독생자가 아니라 독종작이다. 獨種子. 그 종류로서는 하나 밖에 없는 자란 의미이다. Unigue Son. 동시에 사랑받는 이란 의미도 있다. beloved Son. 즉 11-12-13-14절이 복음의 요약이다. --Statement이다. 즉 위에서 진리(알레세이아), 이데아가 아래로 물질로, 시간 속으로 오셨다. 그래서 육신이 곧 가짜가 실체를, 진리를 띄게 되었다. 그래서 빛을 띄게 되었다. 생명이 아래의 죽음의 세계에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다. 아래 세상에서는 진리가 가능하지 않다. 15절 빼고(이는 요한의 이야기이다). 모세 체계로 말해보자. 17절.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았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온 것. 모세와 율법은 하나님의 뒷 그림자만 담고 있다. 오직 진정한 것은 Jx. 이것을 뒷 부분에서 서술하겠다는 것이다. 헬라사상, 모세체계에서의 자력구원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온 것을 통해서 구원이 가능. 이것이 바로 Jx 사건이다. 그래서 아래 세상에서 G을 볼 수 있는, 지식을 가질 수 있어 구원이 가능한 세상이 열렸다. 이것을 바로 헬라 세계에 사는 디아스포라인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14절이 또 하나의 복음의 요약이고 프로그램 statement이다. ■이 서시에서 2장부터 20장까지 서술하는 특별한 그리스도의 사건이 바로 이런 G의 계시와 구원의 사건임을 말한다. 그래서 비로소 육신이 영을 띄고, 시간 속에 영혼이 있고, 가짜 세상 속에 진리가 있고, 암흑의 세상 속에 빛이 있고, 그래서 성육신한 로고스. 몸을 가지고 물리적 세상에 살지만, 그러나 신적 하나님의 실체를 띈다. 우리 세상에서 영을 띈다. 그가 하시는 아래 세상에서의 관점에서만 보면 육신적 행위밖에 본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의 육신적 행위가 진리를 계시함을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표적들의 책에서는 이런 구조를 갖는다. 둘째 강의 요약 a. 1.1-1.18 서시 ■세례 요한 - 어린 양, 구약성경에서 예언되신 분으로서 그 약속과 예언을 성취한 신 분이다. ■또 하나의 programmatic statement = 51절 cf.1.11-12, 1.14 그런데 이런 신앙고백이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야 하는데, 51절은 이것을 약속한다. 그래서 또 하나의 statement가 되는 것이다. 사실 단 7장도 그러한 해석이다. 꿈에 환상들도 그러하다. 9절. 또 보니 어좌들이(복수다) 열리고 하나님이 등극하신다. 옛 적부터 계신 이가(6절) 등극하신다. 천사들이 옹위하고 예배하는 가운데 책을 펼치고 마지막으로 불로 심판. 13절. 또 하나의 신적 존재가 구름을 타고 하나님께 나아오니, 그 모습이 사람같이 생겼다. “한 사람의 아들 같으니”(번역: 인자 같으니)가 구름을 타고. 13절부터 대권을 위임받고. ‘사람의 아들’은 숙어이다. 셈족 숙어. 한 사람이란 의미. 하나님으로부터 대권, 통치권을 위임받는 등극식이다. 이게 다니엘이 보는 비전이다. 18절ff. 천사가 해석.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멸하시는 이방 민족들을 다 멸하시고, 한 사람이 등극하는 이 장면을 해석하기를, 이는 종말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받는 장면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언약에 끝까지 남는 신실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높임을 받아서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에 참여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그러니 단 7장도 언약에 근거한 복음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바벨로, 페르시아, 헬라 등의 통치에 직면해서 언제까지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하고 고통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의 약속이다. 대 심판날에 G의 참 백성을 높일 것이다라는게 복음인 것이다. 그래서 창 28장의 랍비식 해석과 단 7장의 내용이 동일한 얘기이다. 이 이야기를 예수께서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더 이상 야곱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을 대체하여 자신이, 즉 다니엘에서 말한 그 인자, 그 사람의 아들 위에서이다(인자는 당시 예수 시대의 하나의 칭호였다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즉 단 7장의 그 인자라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는 것이다. 구약의 숙어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아들이란 말의 기본 의미는 상속자이다. 대권을 위임 받는 것이다. 그 아들이 우리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을 셈 족의 언어로 ‘사람의 아들’이다 하는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보좌 위에 앉아 있는가?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 사건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야곱이 이스라엘의 육신적 후손들이 하나님 어좌에 앉아 영광과 권세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 대표하는 ‘남은 자’들, 즉 끝까지 남아 있는 남은 자들이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인정하는 자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우편에 앉아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2-20장에서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위에서 아래로 오셔서 그의 새 이스라엘, 그의 새 백성, 그의 새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고 모으셔서 그들을 위해서 사다리를 놓아서, 고별사 13-17장까지에서 사다리를 놓아서 아래에 있는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의 영광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인 것이다. 그의 영광에 참예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다. 아래의 가짜의 세계에서 위의 영광, 본질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다. 이 창조되는 새 백성들은 옛 야곱의 후손들을 대체하는 것이다. 참 이스라엘. 바로 나다나엘에게 말한 바와 같은 참 이스라엘. 옛 야곱의 사악함이 없는 진짜의 이스라엘. 바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왕으로 고백하는 이들로 구성된 것이다. 예수가 옛 야곱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새로운 후손들의 조상으로서. 이들을 창조하여 모아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여 상속자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그들에게 성취되게 하리라 하는 의미인 것이다. 이 성경을 잘 읽으면 바로 나다나엘과 같은 사람이 될 것이다 하는 것이다. 그런 고백을 하는 사람. 어떤 의미로. 나단의 신탁의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정치적으로 다윗의 왕조가 되는 것.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구원이 아니다), 아래에서 초월에 참여하는, 인간의 피조목적, 한계성을 극복하여 하나님의 무한에 참여하는, 그래서 신성을 입는 일들이 나타날 것이다 하는 것이다. ■20장 30-31절. 결론 그래서 서론과 결론이 만난다. 서론은 나다나엘과 같은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 결론에서도 동일하게 말한다. 종말의 구원의 실체. 사람들이 하나님 같이 되고, 하나님의 초월에 도달한다.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런 구원을 가능하게 한 그런 메시아를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51절은 전체의 결론이기도 하고, 2-20장의 programmatic statement라 하는 것이다.
■이 책의 구조는 이적을 예수께서 행하면(이적은 아래 세상에서 물리적인 현상으로 일어난다. 예수가 위에서 오신 성육신으로서, 이적은 예수의 위에서 오신 실체를 포인트하는, 가리키는 표적들이다. Signs이다. 나타난다. 계시한다.), 아래 사람들은 아래의 관점 밖에 없으므로 환상들에 사는 사람들이기에 오해를 한다. 그 이적이 표적한 바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 긴 강해로 해석을 해준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만 어긋나는데, 바로 물위를 걷는 사건인 6.16-21만 어긋난다. 물 위를 걷는 사건. 이것은 표적이 아니라고 한다. 위 구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이적이라 할지라도, 표적은 아니다. 그렇다면 7의 숫자는 어떻게 된 것인가? 이것을 빼면 무엇이 표적인가? 바로 뒤에 21장의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은 사건이 7번째 표적이 아닌가 하는 주석을 하기도 한다. ※이런 것에 대해서 벌벌 떨지 마라. 근본주의만 생각하면, 그렇게 되면 성경을 읽지 않게 한다. 깊게 해석하면 문제가 되는데 누가 읽으려 하는가? 성경을 읽고 자유롭게 나가야 한다. 괜히 사본적 불확실한 것인 여자를 잠잠하라만 붙잡고 고집하는 그런 바보같은 일을 벌이고 있다. 지금 한국교회는 중세 천주교 같다. ※ I am 말씀 ■ 8.24절에 보면 ‘내가 그이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그’는 없는 말이다. 영어에서는 이탤릭체, 한글에서는 소문자형으로 쓰기도 한다. 성경에 없기 때문에. You will know that I am. 이런 말을 보니 구약의 원구절이 생긴다. 하나님의 이름.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라고 한글로 번역. 여러 가지로 주석한다. ‘내가 존재케 하는 자이다.’ 등. 이 말을 헬라어로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내가 -이다’(에고 에이미).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분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언제 아는가? ‘너희가 나를 십자가로 들어 올릴 때.’ ■보어와 함께 나오는 7개의 용법이 있다. 이 모든 보어는 예수가 참 계시이며 참 생명을 줄 수 있는 분임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빛은 계시이다. 떡은 생명. 문, 길 등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다. 참 포도나무는 내가 새 하나님 백성의 조상(야곱과 같은)이고 너희는 가지이다. 이로인해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에게 약속된 생명을 얻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의 지식이다. 요한복음에서는 믿음과 앎은 동의어이다. 이적을 설명하는 강의가 바로 이 에고 에이미의 7개의 보어를 말한다. 예수 자신이 계시임을 강의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하나님을 알게 하도록 한다. 5. 제2권 영광의 책 제2권 영광의 책은 바로 예수를 받아들인 소수를 위한 것이다. 13장 1절. 예수의 사람들. His own (people). 바로 나다나엘 같은 사람들. 예수의 제자들. 그들에게 예수가 계시한 것으로 영광은 책은 나타난다. 이 2권은 1.12절과 1.51에 해당된다. ■영광의 책 주제: “어떻게 그를 믿어서 영접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하여 그들에게 구원, 곧 영생을 주는가” 하는 것을 담은 책이다. ■구분 - 세 부분 ■에필로그.
제1권 표적들의 책 1. 완성의 새 시대(2-4장) 제1표적 가나안 혼인 잔치 새성전이 필요하다. (=성전의 완성) 새성전은 예수 자신이다. 예수 자신이 중보자로 해서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가 내 안에, 내가 저희 안에.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연합. 이로인해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한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잔치이다. 성전은 제사라는 잔치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교제를 한다. 이 교제를 방해하는 죄를 제물의 피로 덮어 버린다. 이것이 성전의 제사인데, 이것을 예수가 종말론적인 죽음과 부활로 완성해서 참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로 창조하는데 이것이 참 성전이다. 이것이 공관복음의 성전 개념과 일치한다. 물론 요한복음이 신학적으로 관점이 좀 다르기 때문에 앞에 갔다 놓았을 뿐이지 공관복음과 완전히 일치한다. 성전 제사의 종말론적 완성=성전 기능의 종말론적 완성. 이로써 하나님의 백성과 교제가 가능해졌고, 그 안에 하나님이 내주하신다. 성령 내주를 통해서. 이렇게 되면 그들 자체가 성전이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신성과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며, 신적 생명을 얻게 되고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이것이 바로 영생이다. 영생은 문자적으로 오는 세상의 생명이며, 의미상으로는 신적 생명이다. 성전체제를 완성했다. ■2장-4장. 가나안 혼인 잔치와 성전사건 등이다. 성전청결사건이 아니라 성전 시위 사건이라 한다. 성전이 파괴될 것과 자신의 성전이 회복될 것을 시위하는 것이다. 자신이 종말의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임을 시위. 구약과 유대교를(성전 중심의) 완성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잔치를 가져올 것임을 시위. 그래서 일종의 표적인 셈이다. 완성(Fulfillment). 그래서 구약과 유대교를 능가(Supersession), 그래서 구약과 유대교를, 야곱적 이스라엘을 대체(Replacement)한다. 누가? ‘그 사람의 아들이’. ‘참 이스라엘’로 대체함. 5장에서부터는 각론적으로 이것을 보여준다. [3장] 밤에 나온다. 3.3 거듭남=anothen. 두 의미. ①의로부터. ②다시. 이것은 위의 의미이다. 그래서 아래의 사람인 니고데모는 이해하지 못하고 물리적으로만 이해한다. 오해. 그래서 Jx가 대답하여 강의한다. 위로부터 난다는 말은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이다. 물로 세례를 상징한다. 위로부터 오는 힘=성령. 이것은 세례 때 이루어진다. 이것으로 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아래에서 아무리 정진을 해도 불가능. 어디까지나 아래의 육이기 때문. 헬라의 체계로 말하면 아래의 현상의 세계에서 이치를 터득해도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사람의 아들’이 위에서 아래로 왔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서 들림받게 된다. 14절. ‘모세처럼 들어올려져야 한다.’ 이 들어올려진다는 것은 이중 의미이다. double meaning이기도 하고, 역설이기도 하다. 십자가의 들어올려진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로, 그의 영광으로 돌아감, 즉 영광 받는 사건으로 이해한다. 십자가 사건이 수난으로 말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영광으로 들어가는 사건으로. ※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비교되는가? 아래에서 불가능한 것이다. 니고데모라 할지라도. 율법 지킴이나 플라톤 철학의 지식으로도. 오늘날 현대인의 모든 과학으로도 다 죽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높이 들어올려진 그 십자가.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그 구원의 방도에 철저히 의존해서만 이루어진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또 설명한다. 그런데 3.16절. 이 모든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사랑(은혜)의 형식이다. ‘내어줌의 형식’(the giving-up formula). 하나님 + 그의 아들 + (내어)주셨다 + 목적. ■십자가는 ■유대교, 유대교의 최고봉인 니고데모. 이 모든 것에는 구원을 불가능하다. 오직 위에서 보냄의 사건과 위로 올려진 내어줌의 사건으로 가능하다. 여기서 창조주의 사랑이 나타난다. 아래 세상에서의 과학, 철학, 인격적 종교적 수양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복음이다. 이 복음은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면-모든 인간들의 노력에 대한 부정. 다른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면-하나님에 의한 구원. ■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인간의 반응이 갈린다. 다수-소수. 그래서 다수는 심판과 멸망에 이른다. 3.18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주려함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지만, 심판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이것은 스스로 심판을 선택해서 나타난다.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전위예술을 전시하는 곳에 가서는 입을 담고 있어야 한다. 무식을 폭로하기 때문. 그림을 판단함으로써 자신의 정체, 무식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의 계시가 이런 것이다. 암흑 속에서 그리스도의 빛이 나타났다. 암흑 속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빛으로 나오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암흑임을 증명한다. 이것이 역설이다. [4장] 적 예배가 성령으로 가능하다. hendiadys. 물론 역사적 호기심으로 그 중에 누가 더 나은가 하면 예루살렘 예배가 낳지만. 그러나 다 소용없다. 최고봉인 니고데모. 최하위인 사마리아 여인. 이 모두가 구원을 받았다. 은혜로만. 오직 은혜로만. 둘 다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6명이었다. 이는 사마리아인을 상징한다. 혼혈로서, 그리고 이방신을 혼합해서 섬기는 사마리아를 상징한다. 그런데 은혜로 구원이 오기에 아무 공로 없는 이들도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쩍한다고 이 여인이 야곱의 우물을 말한다. 생명을 준다는 그 예수의 말씀에 대해. 야곱의 우물은 ‘신의 언약체계’를 의미한다. 율법이라도 좋고. 즉 신의 언약에 담긴 은혜로 우리가 산다는 주장을 한다. 성경의 우물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오아시스를 의미한다. 사막에서 이 오아시스는 한 부족의 생명을 좌우한다. ‘아라비아 로렌스’란 영화를 기억하는가? 오스만 터어키 지배 하의 사막 부족들 간에 전쟁이 오아시스 한 모금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남의 부족의 오아시스의 물을 마셨다고. 예수님은 야곱의 우물은 곧 목마르다. 즉 진정한 구원이 될 수 없다. 즉 그것은 포도주가 떨어진 가나안 혼인잔치와 같다. 거기에는 목마름의 진정한 해소가 없다. 내가 주는 영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cf. 상담하는 이들이 4장을 성경적 상담을 한다고 이용하는데, 이 성경은 상담 자료가 아니다. 4장은 그렇게 기록되지 않았다. 그것은 위험천만하다. 꼭 성경에서 인용해야 하는가? 그것은 Biblicism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물인데 반드시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엉터리 해석을 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일반계시, 일반은총을 무시하는가? 성경에 안쓰였다고 전기를 안쓰며, 의사를 안찾아가는가? 성경에 안쓰였다고 베토벤의 음악을 즐기지 못하는가? 오히려 성경적으로 되려면 성경 신학을 깊이 이해하고 그 원리를 배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꼭 성경구절을 들이대어야만 기독교적인가? 프로이드도 마르크스도 하나님의 진리를 부분적으로나마 발견했다고 봐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전체적으로 틀렸지만. 정리 여기서 설명된 기쁜 소식(복음-여기에는 양면성. 즉 구원과 심판이 있다)을 복음이라고 한다. 이는 바로 모세가 뱀을 든 것과 같다. 위에서가 아니라 아래에서 구원을 받으려고 아등거리면 바로 죽음밖에 없는 것이다. 아래 세상에 구원이 없는데, 이제 구원이 가능해졌다. 이것을 5장에서부터 각론적으로 보여준다.
[5장] 유대교의 제도를 완성하는 것이다. ■고관의 아들 고침(4.43-54)과 베데스다 못가에 병자를 고침(5:1-18) 베데스다 못가의 여인은 우리 인생을 잘 보여준다. 자기 자신으로는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 남이 아니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 이것은 자력구원이 불가능한 것을 잘 보여준다. 이런 치유에 대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아래적 관점에서 해석하여 오해한다. 즉 ‘안식일의 범함’이다. 이에 대해 긴 강연으로 답변. 5.17 ※안식일의 의미-6일 동안에 완성된, 그래서 심히 아름다운 창조에 대한 Celebration이다. 더 이상 하나님이 할 일이 없고 생명이 충만한 창조를 즐기고 누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죄를 범죄함으로 사단의 통치 아래로 떨어지고 아담은 자신의 내재의 자원으로 자신의 안녕과 존재의미와 행복을 찾겠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아담이 하나님이 되려는 것이다. 이를 교만=Hubris라 한다. 하나님과 단절. 하나님으로부터의 공급이 단절. 자신을 자신에게 닫아버리는 행위. 그런데 자신의 내재적인 자원은 한계에 부딪힌다. 부족함. 결핍. 이 결핍에서 모든 고난이 나온다. 가난, 쇠약해짐, 고난, 사회적 갈등 등. 결국은 죽음. 이 고난은 죽음의 증상들이다. 생명의 대지에서 뿌리뽑힌 나무와 같다. 서서히 죽어 가는, 죽음의 권세 아래 놓여서 잎이 시들고 하는 죽음의 증상들이 나타난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아담이 하는 일이 바로 ‘일’이다. 일을 해서 자신의 생명을 확보하고 안녕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문명이라는 것이 이렇게 생명을 확대하는 면이 있다. 그런데 이 일이 죽음까지도 확대한다.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확대하는 변증법적인 관계이다. 18세기 산업혁명. 생명을 참 많이 확대.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인간성을 황폐화시키고 물질화시키고 얼마나 많은 죽음을 우리에게 가져왔는가? 공해, 첨단무기 등의 피해는? 들고 다니는 휴대폰도 그러하지 않는가? 그래서 문명사에서 보면 주기적으로 생명을 확대하려다가 죽음을 확대하는 경향에 반발하여 주기적으로 낭만주의가 등장하여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경향이 나타난다. 자연으로 돌아가면 구원이 있는가? 마지막 낭만주의가 히피운동이었는데. 결국 우리는 일을 해야 한다. 생명을 확대하기 위해서. 이것이 우리의 본질이다. 그래서 참된 안식이 없다. 그래서 제 4계명은 태초의 안식을 기념하고, 종말에 있을 참된 안식을 희구하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타락의 구조 속에서 종말을 향해 가면서 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생명을 일로 이룰 수 없다. 그러니 설혹 6일동안 일로 생명을 확대하려는 자세로 살았어도 하루는 그 삶의 방식을 중단한다. 꼼지락거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업을 중단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일을 통해서 생명이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이 온다는 것이다. 일을 통해서 생명을 확대하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이 되려는 것이다. 안식일의 참된 의미가 이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에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찬양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일로 생명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일을 상대화한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이 옴을 믿는다. 소명사상으로 일을 생각하여 죽어라 일하지 않는다. 죽어라 일하는 태도는 이웃에게 착취의 태도로 나타난다. 반대의 태도로 사회정의, 이웃에 대한 도움이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샬롬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태도는 바로 다음 6일에도 안식일을 지키는 태도로 살겠습니다 하는 태도이다. 안식일에 이 병자들이 나타난 것은 이 병자는 ‘원래 안식이 없음’을 극단적으로 상징. 심히 아름다운 상태, 생명이 충만하는 상태를 희구하는 하나의 극(劇)이다. 예수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해서 고난과 죽음을 제거해서 영원한 안식을 가져오시는 분이 아닌가? 바로 안식을 있게 하는, 안식을 가져오는 그런 분이다. 그래서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dramatic하게 보이기 위해서 바로 안식일에 고치신 것이다. 랍비들이 안식일에 하나님이 쉬시는가 안 쉬시는가 하는 것을 가지고 많이 토론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쉬셨다고 했는데, 사람이 죽고 새 생명이 태어나는 일들이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는가? 그래서 생명을 내어주시고 심판하는 일에는 쉬지 않는다고 결론. 그러나 예수께서 이것은 엉터리이다라고 선언. 하나님은 일하신다(5.17). 이미 영생을 맛본다. 즉 종말을 실현. realized eschatology. 이 실현된 종말론이다. 물론 요한복음에는 이 종말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적 종말론도 있다. 종말에 무덤에서 불러내어 미래적 구원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양자가 긴장 가운데 요한복음에 진술되어 있다. 미래적 종말론, 즉 ‘not yet'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실현된 종말론 ’already'을 더 강조한다. cf. 바울은 이것을 설명한다. 벌써 얻는 구원을 ‘첫열매’라고 한다. 완전한 수확을 위한 보증금이라고도 한다. 이것이 바로 실현된 종말론이다. ■가업의 계승
[6장] 6장은 유월절에 광야에서 5천명을 먹이신 표적으로 시작된다. 6.1-6.15 바로 이 관점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바라보았다. 유월절에 이렇게 먹이니까. 유월절은 종말에 구원을 고대하는 그런 절기이다. 시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시듯, 광야에서 5천명을 먹이시니까 그런 연결이 가능한 것이다. 제2의 모세로서. 그래서 그가 첫 출애굽의 구원을 이루시려는구나. 출애굽의 구원론으로 모형을 삼아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구원을. 바울도, 히브리서도, 요한계시록도. 출애굽의 구원을 종말에 예수께서 이루시려는 구원의 모형으로 본 것이다. 예수도 제2의 모세로. 기독론과 구원론에서 연결이 가능하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예수를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출애굽의 구원의 문자적 재현으로 보는 것은 오해라고 본다. 그것은 아래에서의 관점이다. 물론 유사하지만 그러나 더, 그것을 뛰어넘는 구원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께서 긴 강론으로 해석해준다. 하여튼 유대인들은 이렇게 문자적으로 출애굽의 구원을 재현한 것으로 오해하고, 로마사람으로부터 정치적으로 해방, 경제적 풍요, 율법에 의한 사회적 정의 등을 재현하는 것으로 메시아를 생각하고 예수를 왕으로(모세와 같은) 세우려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는 이들이 표적은 보아서가 아니라 떡을 먹어서이다라고 평가. 즉 그 표적이 의미하는 바는 모르고, 단지 그런 정도로만 보는구나 하는 평가이다. 아래 세상으로서의 물질적 구원이며, 그것은 다시 너희들을 배고프게 하고 목마르게 한다는 것이다. 어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한 말과 비슷하다. 야곱의 우물은 다시 목마른 것이다. 너희들이 추구하는 이런 가치는 진정한 본질적은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다시 배고프고 목마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윗 세상의 영생(시간적으로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신적 생명을 의미)이 아니다. 만나를 먹은 출애굽의 세대는 다 죽지 않았는가? 그것은 신적 생명이 아니다. 내가 지금 광야에서 5천명을 먹인 것은 내가 바로 영생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즉 저 윗 세상의 신적 생명, 하나님적 생명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표적한다. 내 자신이 그러한 생명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내가 하늘에서 온 생명의 떡이다. ‘에고 에이미’. 위에서 온 진짜, 진리의 실체인, 하늘에서 온 생명의 떡이다. 여기서 떡은 우리의 밥으로서 생명을 가능케함이다. 구체적으로 더 뭐냐? 예수가 해석한다. 6.53에 ‘인자의 살과 피다.’ 즉 ‘그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다. 예수 자신의 살과 피가 신적 생명, 영생을 주는 것이다. 광야에서 먹인 표적은 그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말씀은 바로 13장에 나오는 최후의 만찬의 말씀들에 대한 해석이다. 13장에는 그에 대한 설명이 없다. 성만찬 제정도 없다. LK 그러면 어떻게 해서 자신의 십자가상의 잔인한 죽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유월절 구원의 종말론적 재현인가? 사 53.10의 인용. 주의 종이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씻어 버리기 위해서 자신을 대속의 제사로 바친다 하는 내용이다. 자신의 영혼을 백성의 죄를 씻어 버리고 덮어 버리기 위해서 쏟아 붇는다. 그렇게 해서 죄가 용서되며, 그 백성들을 의롭게 한다. 예수께서 바로 자신의 죽음을 이사야서에서 인용된 주의 종의 이야기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 해주심에 의존하여 살게 하는 언약의 피이다. 언약의 피는 출 24.8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본문은 출애굽한 백성을 두고 제사를 드리고 그 피를 회중에 뿌리면서 그것을 언약의 피라 한다. 그 언약의 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언약은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형식이다. 언약을 세운다는 것은 이 땅의 사람들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삼는 약속을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백성 창조이다. 구원하시고 복주시고 인도하시는 것 모두가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 해주심이다. 이것을 얻는 것이다. 언약이란 아비노릇 해 주심 등의 그림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은 왕이시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다. 목자와 양. 시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 그럼으로 내게 부족함이 없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잔이 넘치나이다. 남편-신부. 포도원 농부-포도원. 이 그림들의 짝은 모두 언약신학이다. 신의 언약에 의해. 언약의 피에 의해. 사내 아이가 출생 8일만에 하는 할례 때 흘리는 것도 언약의 개별적 적용으로 보았다. 할례가 언약 백성의 표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언약의 피로 보았다. 그래서 새 언약이 된다. 옛 언약의 피와는 다른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는 언약의 피인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내일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출애굽 때 언약 제사에 상응하는 종말론적 새 언약의 제사로 본다. 사 42.8 (42장에서 53장까지가 ‘주의 종의 노래들’로 학자들이 구분한다)에 보면 백성들을 위한 언약의 피로 바친다로 연결. 그래서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이사야에 나오는 주의 종에 연결시킨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대속, 하나는 새 언약의 제사. 대속은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 언약의 제사는 새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새 언약의 제사는 새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로 해석. 그렇게 해서 결과된 것이 ‘새 언약’이다. 여기서 ‘새’라는 것은 ‘종말에’이다. 죄가 용서되었다는 부정적 언어이고 긍정적 언어는 의롭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의 창조. 이것이 예수의 죽음의 의미이다. 이것을 주의 만찬의 상징성, 극을 통해서 표현하려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이 새 언약의 죽음, 대속의 죽음으로서, 의로운 새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아담의 죄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 되겠다는 그런 선언을 통해 자기 자신의 내재의 자원에 갇혀 버렸다. 자신의 존재 의미, 안녕, 행복을 자신의 재원으로 도모해 보려는 것이 바로 아담의 시도이다. 이것을 휴머니즘, 인본주의라고 한다. 이것을 ‘아담적 실존’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아담적 실존은 결핍성에 빠진다. 결핍성. 피조물의 한계. 시공간의 한계. 결핍성은 고난을 낳는다. 고난은 죽음의 증상들이며, 결국은 죽음. 이런 신학적 배경을 잘 모르더라도 예수는 직관적으로 비유를 주셨다. 바로 탕자의 비유이다. 눅 15장. 탕자가 누군가 하면 아담이야기이다. 바로 여러분과 나, 모든 인간. 모든 인간이 창조주로부터 받은 조그마한 내재적 자원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고자 해서, 자신의 분깃을 달라고 해서, 아버지로부터 등을 돌렸다.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가? 창조주로부터 분리된 것이다. 생명의 대지에서 뿌리뽑힌 나무인 것이다. 잎이 마르고 가지가 시들고, 바로 죽음의 증상들. 이를 성경은 죽었다고 한다.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6.23에서 죄의 품삯은 사망이다. 품삯은 용병이 받는 돈이다. 사단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하여 무엇으로 품삯을 주는가? 바로 죽음이다. 아담이 결국 얻은 것이 무엇인가? 죽음이다. 구원은 다시 한번 대지에 나무가 뿌리 박히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의 대지에서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는 것이다. 다시 한번 창조주 초월의 무한하신 하나님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분의 무한함을 공급받는 것이다. 탕자가 부유한 아버지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아들이 다시 된다. 그것은 상속자를 의미한다. 아들=상속자. 아버지의 무한한 부유함을 상속받는다. 그리고 큰 잔치를 배설한다. 성겨은 구원을 잔치로 묘사한다. 예수는 자기 죽음이 바로 우리의 아담적 죄를 씻어버려서 우리를 의롭게 한다. 그래서 다시 창조주와 올바른 관계를 회복시킨다. 그래서 우리를 다시 한번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로 만든다. 이것을 예수의 죽음이 가능케한다. 6.53-‘그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가 영생을 주는 하늘로부터 온(위로부터오는) 떡이다.’ 이 살과 피는 자신의 죽음을 상징한다. 자신의 죽음이 대속의 제사이고, 새 언약의 제사이기에, 우리 죄를 씻어 버리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 하나님의 아빠 노릇 해주심이 회복. 아래 세상의 우리 피조물들이 위의 창조주의 무한에 참예하게 된다. 이런 삶을 성경적 숙어로 ‘영생’이라고 한다. 문자적으로는 ‘오는 세상의 삶’이라 해석된다. 그런데 무엇을 전제하냐면, 이것은 히브리적 시간적 이원론을 전제로 한다(공간적 이원론은 헬라적). 히브리적 이원론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으로 구분되어 있다. 사단이 지배하는, 죽음을 품삯을 주는 이 세상의 시대를 종결하고, 하나님이 통치하는 오는 세상이 시작된다. 오는 세상의 하나님의 통치 아래의 생명을 오는 생명, 영생이라 한다. 영생이란 헬라말을 번역하면 시간적으로 영원히 되는 것을 이해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오는 세상에서의 삶이 무엇이냐면,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과 분리된 삶, 아담적 삶, 결핍된 자원으로 사는 삶, 죽음의 증상들인 고난들로 누더기가 된 삶이 아니고, 하나님의 무한한 부유함으로 이루어진 삶이니까 바로 신적 삶이다. 이것을 숙어로 오는 세상의 삶=영생이라 한다. 영생=신적 삶. 거기에는 죽음이 없다. 죽음의 증상들이 없다. 하나님의 전지하심, 영원에 힘입어 사기에, 물론 시간의 존재로서 늙고 죽어가지만, 지혜가 부족하여 내일이 염려함도 없고 등등 ‘충만한 삶’이 되는 것이다. 신성에 동참하는 삶. 이것을 생명이라 한다. 이 생명은 신적 생명이다. 이런 성경의 숙어들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하여간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이 우리로 하여금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창조주의 무한한 부유함의 다시 한번 참여하도록 한다. 아담적 소외를 단절시키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항상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 7장의 성취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각나는 구절. 3.14 물론 이런 것은 종말론적 유보 상태에 있다. ‘벌써’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덕을 입는다. 이것을 덕 입는 것이 바로 기도이다. 기도란 초월적 하나님의 무한함을 끌어쓰고자 하는 것이다. 주기도문의 내용을 살펴보라. 종말엔 완성될 것이다. 바로 예수께서 광야에서 5천명을 먹이신 사건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여 자기 백성을 창조주의 무한한 신성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 그래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다. ‘하나님 같이 됨’이 구원이다. 바울적 용어로 ‘하나님의 형상이 됨’이다. 죄의 용서=의롭게 된다, 입양됨(자녀됨) 라는 구원론적 그림들은 다 그림들이다. 무엇을 말하려는? 피조물이 창조주의 무한함을 얻는다는 구원을 그리는. 신적 생명을 얻는 것을 그리는. 이것을 예수께서 약속하신 것이고, 광야에서 먹이신 것으로 표적 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오해했다. 그리고 예수는 이 오해를 피하고자 하셨다. 옛 출애굽 구원은 진정한 구원의 모형, 그림자였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그림자로서의 구원을 진정한 구원으로 오해했다. 사마리아 여인의 예배 주장도 마찬가지다. 그것도 그림자이다. 이러한 이해를 기반으로 또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즉 영생은 내세에 영혼의 안녕을 입는 것이다. 헬라적 영혼과 물질을 구분하는 존재론적 이원론을 결합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영생은 신적 생명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우리 영혼의 평면에만 나타나는 것만이 아니고, 우리 존재의 모든 영역(몸과 영혼)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벌써 나타났다. ‘실현된 종말론’이다. 이것을 특별히 강조하는 곳이 요한복음이다. 그러므로 이 두가지 모두가 극복되어야 한다. 시간적으로도, 존재론적으로도 틀렸다. 우리 전체에 나타나며(영혼 뿐만이 아니고), 지금 현재에도 나타났다. 영혼만 관련되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 존재의 전 영역. 우리의 관계(이웃과의 화해, 사랑), 정치적 영역, 내면의 평온, 경제적 빈곤의 해결(부의 재분배) 등. 그래서 죽어라고 일하지도 않고, 너무 많이 먹어 다시 빼려고 돈을 투자하는 일도 없고 등등. 우리 한국교회가 너무 잘못 가르쳤다. 그래서 추상화, 미래화, 관념화로 이루어졌고, 구원이 내세의 영혼의 안녕으로만 이해. 우리 존재의 모든 영역에서의 하나님 신성에의 참여. 나의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 온전케 되는 것이 구원이다. 자유의 확대, 사회정의 확대, 평안의 확대 등. 물론 완전치 못하며 종말의 완성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죽음의 증상들과 함께 구원의 첫 열매를 누린다. 유대인들이 오해한 것을 ‘열혈당식 신학’(출애굽의 문자적 재현)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적, 경제적 문제 해결만 생각하는 신학이다. 그런데 이러한 바램은 이 아래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방신학에서의 노력으로 경제적, 정치적 문제의 해결은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존재에서의 해방은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함으로. *결국 공관복음과 동일하다.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을 헬라적으로 잘 번역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 같이 됨이다. 이것이 아래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아래의 것만을 추구하면(즉 출애굽의 문자적 재현만 추구하면), 그것도 충족되지 않는다. 만나가 다시 있더라도, 다윗 왕조가 다시 세워진다 한들, 경제적인 풍요와 정치적인 자유가 조금이나만 이루어진들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는가? 모든 혁명은 자리바꿈에 불과하다. 피자와 통치자의 자리바꿈에 불과하다. 1789년 불 혁명 때 시민들이 행진하는 것을 보고, 루이 16세 마리 앙뜨와네트가 묻기를, 혁명이 무엇인가? 시녀가 대답하기를 내가 여왕이 되고 당신이 시녀가 되는 것이다. 오직 진정한 구원을 통해서. 바울은 이를 통해서만 옛 창조의 구분들도 사라진다. 남녀의 구분, 상전도 없고 하인도 없고, 유대인도 이방인도 없고 등. 얼마나 위대한 예수인가? 다만 우리가 그동안 신학을 너무 편협화해서 관념화시키고 머리 속에만 머물고 미래로 넘겨 버리는 오해를 가져왔다. 이것이 보수주의적 맹점이다. 물론 반대로 해방신학에 영향을 받고 아래의 세상에만 머물기도 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진정한 자유와 해방이 이루어진다. 유신 때 교회가 구령사업만 해야지, 무슨 정치적 자유나 구로공단에서 고통당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고 주장했다. 여성의 해방도. 반상의 해소도. 오늘날 기독교문명이 약화하여 복고문명으로 돌아가고 있다. 인도에서 모슬람들이 더 강해지고, 교회를 불사르고 등등. 중동도. 세속화를 추구했던 터어키쪽에서조차도 복고풍이 불어 이슬람이 강해졌다. 한국도 유교, 도교 등의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종교들이 진정한 종교인가? 진정한 여성 해방을 이룩했는가? 종교의 이름으로 낮은 계급을 종으로 부리는 것이 진정인가? 모든 인간의 창조주에서 동등하게 창조되었는데, 이것이 링컨의 노예혁명이며, 국제적으로 적용한 것이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원칙(윌슨은 위대한 기독교인이었다. 복음의 정치적 현실화),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나타난 것이 카터의 인권정치이다.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이 무엇인가? 이것은 중국이 자신들만이 문명이이고 주변인들은 다 오랑케인데, 동방의 오랑케(동이)중 하나가 조금 문화가 있다는 의미이다. 조금 인정해주는 것이며 결국 모멸 아닌가? 유교에 의한 문명이 그래서 인권이 있었는가? 오히려 여성이 해방되고, 민족이 독립하고, 민주주의가 나타난 것은 다 기독교문명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느틈에 해방과 자유의 복음을 왜곡하여 교회가 여성을 잠잠하게 만드는 일이 나타났다. 그래서 교회가 유교의 마지막 보류가 되어버렸다. 교회가 공자 도덕을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정치인들에게 배운 것인데, 교회가 유교 이중대가 되어 버렸다. 담임 목사가 왕, 군주가 되어 버리고 평신도는 종이 돼버리고. 윤리적으로는 가부장적 구조가 되버렸다. 영성으로는 교회가 샤머니즘의 이중대가 돼버렸다. 성경도 모르고 열광주의에 빠져서 누구인지도 모르는 미친 사람들에게 머리를 숙이는 등 급격히 타락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구원의 진정을 모르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사고하고 문명사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야 하는데…. 여성해방, 인권증진, 정의, 자유. 교회가 이제 여기서 멈추면 안된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포괄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이것을 보수해야 한다. 유교 가부장적 질서를 보수하는가? 여성을 부엌에만 두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인가? 갈 3.28이 그 사람들에게 성경도 아닌가?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66절
7-8장 [7장] 여기에 요한복음의 역설들이 있다. 당시 메시아의 기준들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예수가 다 이런 조건들을 충족시킨다. 모세율법을 지킨다.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서 다 지킨다. 물론 인간적 전승들을 무시하지만. 모세율법은 아래 세상에 있는 그림자이다. 그러나 위의 것을 지킨다. 두 번째로 기원을 모른다는 항목. 초월해서 온다. 위에서 하나님 편에서 온다는 의미. 내재에서 오면 구원을 할 수 없다. 우리 같은 인간적 한계를 지니면 안된다. 우리 중의 하나이다. 부모, 형제도 알고. 그런데 그것은 아래적 관점이다. 요한복음에서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시며, 위에서 오신 분들이다. 세 번째로 예수는 나사렛 출신이 아니라 베들레헴 출신이다. 아래 세상에 속한 가짜의 관점에서 보니 오해가 생긴다. 아이러니가 있다. ■7.37-39 대단히 중요한 구절이다. 초막절에 실로암에서 물을 길러 성전에 붓는 의식이 있었다. 올 한해도 하나님께서 목축과 농업을 풍성히 해서 농사가 잘 되는 것을 기도한다. 동시에 모든 유대의 축제는 출애굽 때의 기념이면서 종말에 재현될 출애굽을 기대하는 것이다. 종말에 부어질 물에 대한 기대이다. 물은 성령에 대한 상징이다. 에스겔, 요엘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의식을 배경에 두고 예수가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곧 그 물을 공급한다. 에스겔서 47: 사12.3 등. 내가 그 물을 공급하는 자이므로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릴 것이다. 생수-생명을 주는 물. 이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주실 성령을 상징한다. 초막절에 물 깃은 행사가 고대하는 바가 죽음의 세계 속에 생명을 주는 그런 상황. 내가 곧 그 물을 준다. 성령의 물. 초막절이 모형론적으로, 그림자로 그려내는 바의 종말론적 실체가 바로 나인 것이다. ■이 예수의 주장에 대한 찬반이 일어난다. ■[8장] 8.12 내가 세상의 빛이다. 에고 에이미 말씀. 빛은 곧 지식이다. 지식은 현상에 대한 깨달음인데 무엇이 가능하게 하는가 빛이다. 내가 곧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하는 주장이다. 하나님을 보고 알게 하는 자라 그 말이다. 초막절 그 행사가 포인트하는 바를 완성하신 분이 바로 예수 자신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세상의 빛이다. 그래서 이 암흑(=무지)의 세상에. 암흑은 Angst를 가져온다. 두려움, 불안을 가져오고. 이런 것들은 다 죽음의 증상들이다. 예수께서 이 암흑을 몰아내는 빛으로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보고, 앎을 가능케 함. 지식은 현상을 보는 것에서 온다. ‘본다’는 헬라어 thoerein. 여기서 theory가 나온다. 즉 지식은 현상을 보는 것에서 가능. 이게 헬라 사상. 지식으로 구원 받는다. 앎으로 구원 받는다. 여기까지는 헬라 사람도 이해 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히브리 사상이 나타난다. 히브리 사상은 앎은 관계를 가져오고 연합을 가져온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헬라적으로 신성에 대한 이론과 그 분의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고, 히브리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 연합한다는 그 말이다. 하나님과 연합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상호내주로 나타난다. 14.20을 보라.(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19-20)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그럼으로 예수를 중보자로 해서 제자들과 하나님이 연합한다. 상호내주. 그래서 인간들이 하나님과 연합한다. 헬라적 언어로 말해졌지만 그러나 히브리적 사상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는 메시아. 계시-하나님을 앎-영생(신적 생명) 8.28부터 읽자. ‘그’인 줄 알리라. 그=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자. 이름은 본질의 표현. 그래서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계시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아버지는 보내신 자(Sender, commissioner)요, 아들은 보냄을 맏은 이(agent). Beratath 5.5 보냄을 받은 이는 보낸 이와 같다. 전권대사. 보낸 이의 권한을 고스란히 행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아들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전권대사로서 종을 보낸 경우와 동일. 하나님을 온전히 대행함. plenipotentiary. 아버지 곧 나를 보내신 이란 언급을 많이 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위들로 보고 알게 된다. 그러니까 오해가 나온다. 종노릇함에 대해. 아브라함의 자손인데하는 반발. 예수의 종노릇함에 대한 정의는 정치적으로 로마 속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종노릇함에 의한 것이다. 8.49-50. [9장] 예수는 이에 대해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소경에게 빛을 주었다. 부모는 이를 알면서도 유대인들이 무서워 잘 말하지 못한다. 유대인은 편협하게 받아들인다. 이사야서 61.1-3(눅 4장 나사렛 회당에서 처음 설교한 내용)에 보면 암흑에서 구해내고 소경을 눈을 뜨게 하고 등등. 세례 요한이 물어 보았을 때도 이것으로 대답하셨다.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는 중요하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맥락을 알지 못했다. 예수는 이 기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을 계시하는 자임을 드러낸다. 그것을 표적한다. 유대인은 그 표적을 알기는커녕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도 모른다. 그리고 부모를 협박해서 거부하게 한다. 그것도 성경을 인용하면서 부인하는데, 바로 여기에 요한복음의 역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경인줄 모르고 빛 가운데 살고 있는 줄 알고 있다. 그래서 결국은 이들이 소경이다. 예수께서 성경을 성취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성취는 예언이나 약속보다 크다. 이를 겸손히 받아들이는 자는 예수가 메시아인데 바로 하나님을 계시하는 메시아임을 알게 된다. [9장] 9장 말미. 이런 축출 당한 자들을 예수가 가만 두지 않는다. 다시 돌아와서 위로하고 돌본다. 왜? 그는 선한 목자이기 때문에. 선한 목자로서의 메시아이다. 아비-자녀, 왕-백성, 목자-양떼 등. 예수는 다윗 가문의 왕이다. 나단 신탁의 성취이다. 왕은 목자. 왕만 목자는 아니다. 지도자들 모두가 목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억압하고 사익을 취하고 도둑놈들이 되었다. 삯군이 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선한 목자. 선한 목자는 어떤 목자인가? 양떼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자를 의미한다. 바로 예수 십자가상의 대속의 언약의 제사를 의미한다. 이를 통해 그들을 진정한 하나님의 양떼가 되도록. 하나님이 진정한 목자가 되도록. 이 양떼가 참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 창조주 하나님 노릇해주심을 먹이로 삼는 자들이다. 그래서 영생을 얻는다. 즉 신적 생명을 얻는 것이다. 참 메시야: ①하나님을 계시, ②성령을 주심(참 생명을 주시는), ③대속, 언약의 제사. 이 세 가지로 썼는데 사실은 세 가지가 아니다. 3번에 의해서 1,2번이 가능하다. 3번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된다. 그의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임을 알게 하는 사건인 것이다. 예수의 메시야적 행위(예수의 Christ-act)와 사건이 무엇인가? 그것은 십자가상의 죽음이다. 이 대속적 죽음과 부활이 나올 때는 항상 그리스도로 칭한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이다. 사랑만이 치유의 힘이 있다. 그런데 ‘초월자’ 하나님의 사랑이 진정한 힘. 양떼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 참 메시아이다. 유대인의 율법에 매몰된 그 조그마한 안목으로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것은 모세 율법이 가져오는 조그마한 촛불에 불과하다. 이를 3장에서는 유대교 최고봉인 니고데모를 통해서 보여준다. 아무리 활용해도 암흑의 사람이요, 아래의 사람이다. 밤에 암흑의 사람이 빛으로, 예수께로 나와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보이신 거대한 계시로만 이해한다. 오늘날의 인본주의가 그러하다. 지금 서양 사상은 한계에 부딪혀서 동양 사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노자, 공자, 논어 등을 배우고자 하는가? 그것에서 무엇이 왔는가? 나라가 부국해 졌는가? 아니면 민주주의, 인권이 신장되었는가? 이는 다 오랑캐라 치부하는 서양사상에서 온 것이 아닌가? 바로 기독교문명에서 온 것이다. [11장] ■(요 11:45-52) 『[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9]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것이 아주 역설이다. 나사로 부활은 예수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절정이다. 또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또한 예수께 저항하는 유대인들의 저항의 절정이기도 하다. 예수의 메시아 운동을 가만히 두었다가는 큰일 나겠다. 우리가 다 죽는다. 페르시대부터 유대인들은 당시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자치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으로 사두개인들과 귀족들이 상당한 재미를 보겠다. 이 예수 운동을 그냥 두어 심해지면 로마인들이 쳐서 우리의 자치권도 빼앗길 것이라 염려. 그래서 이 예수를 제거하기로 의논. 그런데 이에 대한 요한의 해석이 중요. 이 말은 그 사람이 자연인으로 한 말이 아니라, 그가 대제사장이므로 그 말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모든 이를 위해서 지성소에 들어가서 대속의 제사를 드리는 자가 누구인가? 대제사장이다. 그런데 대제사장 가야바가 온 민족을 위한 제물로 바친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하는가? 그 깊은 뜻을. 물론 자신은 그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순전히 정치논리로만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해 대제사장 가야바가 민족을 살리기 위한 대속 제물로 예수를 바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비록 그가 적대해서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지만, 그 가야바를 이용해서 신의 법에 맞게 하시는 것이다. 온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바울도 똑같이 말한다. 고전2.8 인간의 지혜가 천박. 만일 알았더라면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승한가?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가? 우리는 악한 자들의 승승장구를 하는 것을 보면서 언제 하나님이 뜻을 이루시려는가? 하고 염려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놀라운 것이다.
11.55-12.1 cf. 빌 2.6-11. 낮아짐과 높여짐. 이 패턴으로 설명하는 것이 신약성경의 공통적 설명인데, 요한은 더 심오한 묵상 끝에 십자가의 못 박힘 자체가 낮아짐이 아니고 예수의 수난이 아니고 낮아지고 높여지는 동시적인 것,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수난이 아니고 영광으로 묘사. 장사됨이 곧 왕으로서 십자가에 등극함이며, 발에 기름 붓는 것이다. 12장 전반부 입성. 1.11-12절의 진리가 이 열방에의 빛으로 현실화. 1.51의 내용-야곱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탈락하고, ‘그 사람의 아들’에 의해서 창조되는 하나님의 백성이 참예한다.
1. 예수의 고별사 (13-17장) 이제 남은 소수에게 말씀하신다. 남은 소수는 His own이다. 자신의 제2의 자아인 성령. 제2의 자아=보혜사(파라클레토스)로 번역되는 단어이지만, 지금까지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모르는 단어이다. 성령을 보내신다. 제2의 자아로서 부활하신(그래서 하나님께 돌아가신) 예수의 그의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는 형식이다. 이를 설명한다. 긴 고별사로. [13장] 이렇게 새롭게 탄생하고 창조되는 하나님의 공동체는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고, 이웃과 새로운 관계로 들어간다. 이 관계의 정의는 ‘사랑’이다. 바로 새계명이다. 예수께서 모든 계명을 두 가지로 요약. 일단은 여기서 이웃 사랑을 강조한다. cf. 십계명 중 1-4계명은 하나님 사랑, 5-10계명은 이웃 사랑이다. 그의 속죄와 새언약의 제사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에게 새계명을 주는데 바로 사랑. 그리고 예수의 섬김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모범이다. 물론 예수의 발 씻음은 겸손과 사랑이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차적. 일차적인 것은 새 계명 차원에서의 사랑의 모범이다. 원래 미쉬나 법에 의하면 유대인 상전은 같은 유대인 종에게 발 씻지 못하게 했다. 발 씻는 것이 너무나 낮은 행위이기 때문. 유대 사회에서 선생은 상전 대접을 했다. 그런데 이것이 거꾸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을 모범으로 제시했다. 이 시점에서 유다가 빛이신 예수를 떠났고, 요한은 그것을 아주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곧 밤이더라.’
[13.31-14.31]과 [15-17장]까지 이 양자에서 같은 주제들이 반복된다. 몇 가지만 예를 들면 = 그래서 이 양자가 서로 같은 자료를 반복해서 참조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같은 내용들의 두 판으로 둔 것이 아닌가? 서로 통합하지 않고. 그렇게 볼 수 있다. [14장]
[15장] [16] 위의 얘기들이 반복 그리스도의 관계? =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아버지로부터 나온다. 또한 그래서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동방 서방의 갈라짐의 한 원인. 서방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온다고 해야 삼위일체가 된다고 주장한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요청하여 나오는데, 성령은 그리스도의 제2의 자아(the alter ego of X)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영, 아들의 영 다 된다. 성령의 기능? = 아들의 가르침을 상기시키고 터득하게 하고(깨닫게 하고), 그래서 아들의 계시를 계시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들은 누구의 가르침을 가르쳤는가? 바로 ‘나를 보내신 이, 아버지’의 가르침을 가르쳤다. 그런데 성령은 아들의 가르침을 깨닫게 하고 알게 한다. 그래서 제자들은 후에 깨달은 바를 주석으로 복음서에 달아 놓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성령에 의해서 재생된다. 이를 tandem relationship이라 한다. 모세. 모세와 여호수아. 여호수아. 세례 요한과 예수 등의 관계. O. Betz의 교수의 논문 등이 쿰란 글들을 통해 성령의 기능을 해석하려 한다. 불완전하다. 하여튼 기능적 관점에서 접근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가르침’을 아들이 ‘그대로’ 가르친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자와 같다. 요한의 표현대로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아들은 아버지, 보내신 이를 계시한다. 계시의 제1원칙: ‘계시자는 계시되는 자와 같다.’ 그래야 계시가 가능하다. 원숭이와 사람이 동물학적으로 99% 같다 할지라도, 원숭이를 보고 사람을 알 수 있다. 사람만 사람을 계시할 수 있다.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한다는 것은 아들이 하나님과 같다는 의미. 그래서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들이 행하는 모든 이적은 아버지의 막강한 치유의 힘을 계시한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같다. ontological Unity. 같다, 혹은 상호내주란 용어들이 존재론적 동일성. 이를 오해하면 여호와의 증인들의 아리우스적 이단적 주장을 하는 것이다. 위의 표현들은 양자가 같다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완전히 일치됨을 보여준다. 의지에서의 하나이고(Unity in Will), 합치시킨다. 조그만 합치가 안되어도 일치가 없다. 그래서 아리우스 논쟁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일어난 계시와 구원이 ‘오늘 나에게’ 계시되게 하고 구원의 실제가 일어나게 하는 분이 성령님이시다. 요한복음의 표현으로 ‘나의 가르침을 상기시키고 터득하게 하는 분’이다. 보냄을 받은 자와 보낸 자가 같다. 계시 제1원칙: 같다. 아들은 아버지가 보냈다. 같다. 성령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요청하여 아버지가 보냈다. 그래서 성령은 아버지와 같고, 아들과 같다. 그래서 성령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안다. 이것이 삼위 일체이다. 초월자이신 하나님, 우리 안에 내재하신 아들, 그리고 우리에게 오늘 적용하는 성령님. 이것을 설명하려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 신론이다. 초월하시면서 내재하신 하나님, 그래서 구원을 베푸실 수 있는 하나님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 삼위일체를 셋이 하나된다는 식으로 설명함으로써 이상한 비유를 만들어내는 이상한 숫자 놀음을 한다. 쇠덩어리, 빛, 달구어진 열 등으로 설명. 이것이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무엇이 도움되는가? 어떤 유명한 신학교 토착화 신학자가 우리나라 국민의 정신이 풍류정신이며, 한 멋진 삶을 추구한다. 그런데 이 한 멋진 삶이 삼위일체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면서부터 삼위일체을 잘 이해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을 이해시키는가? 서양인은 한 멋진 삶을 추구하지 않는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삼위일체론을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며, 헬라적 존재론에서 부가된 것이라 주장한다. 무슨 소리인가? 성경을 쓴 이들은 모두 유대인이고, 어렸을 때부터 유일신 사상을 배운 사람들이다. 내재하시고 스스로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을 어떻게 conceptionalize하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가 하면 바로 요한이 하는 식, 바울이 하는 식으로밖에 안되는 것이다. 초월하신 분이 어떻게 그 구원의 방법을 이루시고 그것을 계시하시는가를 설명하는 방식이 삼위일체신론이며, 그로 인해 초월자의 내재하심을 설명한다. 이것을 숫자적 문제로 설명하려니까 어렵고, 그래서 ‘경륜적 삼위일체’를 설명한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구약엔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제는 신약시대에 교회 안에 성령님. 그런데 구약엔 초월하신 하나님 아버지만 있으면 내재하신 하나님은 없는 것인가?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이 경륜적 삼위일체는 삼위일체론의 원래 정신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이단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숫사적 개념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바른 관점 = 바울이, 요한이, 마태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그 구원을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즉 초월하신 하나님이 내재적으로 구원을 이루어나가시는 것을 인간의 말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님으로 붙이고, 보내심, 보냄을 받음 등의 말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게 왜 이렇게 귀중한가? 바로 초월과 내재가 동시적으로 되어야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초월은 구원할 수 있는 전능자를 의미한다. 내재 밖에서만이 구원할 수 있다. 그런데 초월 상태로만 머물면 구원이 불가능. 내재로 오셔야 한다. 그래서 초월자로서 내재하시려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의 귀중함을 알려면 세 가지 고등종교 신론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구원론은 영겁의 윤회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자아가 없어야 한다. 우주의 본질에 뛰어들어 본질과 하나가 되고 자아가 없어져야 한다. 무아. 그럼 누가 그렇게 해야 하는가? 아무도 밖에서 도울 수 없다. 내가 해야 한다. 자력구원. 어떻게? 지식으로. 이 현상의 세계가 가짜임을 아는 지식. 이 지식을 베다(Veda). 플라톤 철학과 동일. 2) 이신론(deism) - 이슬람식 신론. 초월을 너무 강조해서 내재를 부인한다. 신이, 알라가 너무 거룩해서 이 피조세계에 오지 않는다. 이것을 부재의 신론이라고도 한다. 신이 세계를 정교하게 만들어놓고. 마치 시계공이 시계를 잘 만들어서 놓아두듯이, 신도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대로 돌아가도록. 완전한 숙명에 의해서 이루어짐. 인슐라=알라의 뜻대로. 숙명주의는 별로 소망이 없어서 구원을 말한다. 구원은 역시 자력구원. 코란을 잘 지키고 선행. 거의 모든 자력구원은 지식과 선행을 강조한다. 선행. 절하고, 성전에서 순교하는 것이 제일 좋음. 자력구원은 인간이 자신을 구원한다는 것이고, 결국 휴머니즘에 바탕한다. 결국 신이 필요없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인도계열의 종교에서는 신이 따로 없고, 그 내 안에 신이 있다. 이슬람에서는 신이 있는데 나에게 오지를 않는다. 내가 가야한다. 그럼으로 진짜 구원이 있으려면 초월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야 한다. 이러한 신론을 Theism이라 한다. 유대인의 theism은 불완전하다. 그러나 바울, 요한 등이 이것을 위의 삼위일체로서 그려낸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즉 Unity), 그 분이 초월하시고 내재하셔야 하니까, 그러한 설명을 한 것이다. 만일 이것을 숫자 놀음(셋이 어떻게 하나되는가)으로 접근하면 엉뚱한 결론이 나타난다. 숫자 놀음에 대한 답은 모름이며, 하나님의 신비이다.
한마디만 더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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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교수님의 요한복음 강해
발의무리
2008. 4. 21. 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