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구의 프랑스 문화 읽기
최연구의 프랑스 문화 읽기
1. 프랑스 문화와 정신의 코드 읽기 피에르나 소피 같은 보통의 프랑스인에게서 배울 점 프랑스를 프랑스답게 하는 사회적 가치, 톨레랑스와 솔리다리테 파리에서 본 한국의 세계화 프랑스의 반미 문화 세계 지성사 이끄는 프랑스 석학 속인주의와 속지주의, 그 사상적 간격
2. 프랑스인의 삶과 프랑스 사회 들여다보기 프랑스의 엘리트는 스무 살 전에 결정된다 프랑스의 대학교육과 학문의 풍토 2002년 프랑스 대선을 바라보며 프랑스 교통 환경 정책의 교훈 프랑스 언론과 「르 몽드」 프랑스 최고의 언론이 보는 21세기 - 장 다니엘과의 대화 지식의 앙가주망 그리고 페이르 부르디외 프랑스 석학, 부르디외 교수와의 인터뷰 프랑스의 여름, 바캉스와 페스티벌의 계절 프랑스인과 식탁 문화에 대한 단상 샹송, 그 감미로운 저항
프랑스의 반미 문화 냉전 시절 서유럽에서는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영세 중립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 자연스럽게 친미 반공 블록에 편입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군사적 동맹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나토(NATO : 북대서양조약기구)’이다. 원래 20세기 냉전의 산물이었던 나토가 냉전이 종식된 21세기까지도 여전히 건재하고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는 것은 역사적 모순이다. 어쨌거나 냉전 시절의 나토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서방형 자본주의를 수호하고자 했던 반공 군사 동맹 기구였던 것은 틀림없다.
나토를 탈퇴한 드골의 반미 자주외교 나토는 원래는 프랑스에 본부를 두고 있었고 회원 국가들은 대부분 서유럽 국가들이었다. 하지만 나토의 주도국은 냉전 시절에도 비유럽 국가인 미국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나토가 실질적으로 미국에 의해 움직이는 동맹체라는 점은 냉전 중이나 냉전 종식 후에나 차이가 없다. 특히 나토는 지휘 체계 면에서 지금껏 미국의 이해가 전일적으로 관철되어 온 군사 기구이다. 1949년에 나토가 창설된 이래 현재까지 역대 나토 사령관은 모두 미군 사령관이었고, 유럽군과 대서양군으로 이원화되어 있는 나토의 지휘권은 미국이 완전 장악하고 있다. 사실상 나토군은 미군의 하부 조직 정도에 불과하고 유럽의 안보는 미국이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나토의 본질을 일찍이 꿰뚫어 본 사람은 프랑스의 샤를르 드골 대통령이었다. 1958년 드골 대통령은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나토의 지휘권 체계가 전적으로 미국 중심적이라고 비판하며 미국, 영국, 프랑스 3자 간의 지휘 체계로 전환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입장은 절대 불가였다. 국제 정치에서는 역시 힘의 논리, 강자의 논리가 절대적이다. 이런 현실에서 발언권을 갖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해지는 길밖에 없음을 드골은 절실히 깨달았다. 미국의 헤게모니에 맞서기 위해서는 핵무장이 불가결함을 인식한 드골은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에 주력했다. 급기야 1960년에는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면서 정치 강대국으로 재부상한다. 미국 주도의 서방 동맹 내에서 독자 세력화를 꾀하던 드골은 1967년 나토의 통합사령부로부터 군사적인 탈퇴를 전격 단행한다. 그 뒤 프랑스는 나토 회원국의 지위는 유지하되 군사적으로는 참여하지 않는 독자 노선을 걸어왔다.
드골이 밝히 나토 탈퇴 이유는 ‘프랑스는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강화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외교적 드골주의의 핵심은 ‘자주와 반미’이다. 드골 대통령 이래 프랑스의 노선은 제3세계를 향한 ‘자주 노선’으로 일관했고, ‘반미’는 국제무대에서 프랑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동양에서 미국에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나라가 중국이라면 서양에서는 프랑스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의 반미는 단순히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에 오른 미국에 대한 시기나 질투로 축소 해석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프랑스의 반미는 단순한 감정이나 정서가 아니라 정치, 외교, 군사, 사회, 문화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는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미감정과 반미주의는 큰 차이가 있다. 문화로서의 반미주의는 미국이나 미국인이라면 무조건 싫다고 배척하는 ‘미국 싫어하기’는 아니다. 반미는 미국이나 미국인을 체질적으로 미워하고 혐오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 패권주의적 폭력성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만약 미국이 개과천선해서 호혜평등과 진정한 인권, 평화 운동에 나선다면 반미주의는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문화적 가치로서의 반미는 그런 의미에서 폭력적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진보적인 가치로 이해해야만 한다.
프랑스의 반미는 정서가 아니라 문화 프랑스에서 반미 공세의 대상이 미대사관이 아니라 코카콜라나 맥도널드라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프랑스인들은 코카콜라나 맥도널드를 다름 아니라 미국 문화의 상징이자 제국주의적 문화 침투의 첨병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의 반미 공세는 이렇듯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대한 정치적 대응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잠식하고 있는 미국식 문화에 대한 강한 거부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요컨대 미국에 대한 저항이 정치적 전략, 전술의 차원이 아니라 엄연한 반미 문화로 정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는 한 민족이 살아 온 역사이며, 그 민족의 생활양식의 총체이다. 한 민족의 생각하고 살아가고 행동하는 방식과 이로 인해 만들어진 모든 유무형의 산물이 바로 문화이다. 그렇다면 반미 문화란 단순한 정서적 거부감이 아니라 일상적인 저항의 생활화가 하나의 문화로 승화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현재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가 미국화라는 내용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직시할 때 반미 문화란 이런 미국화에 저항하는 일종의 대항문화(counter culture)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 반미주의가 광범위하게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프랑스의 반미주의는 적게 잡아도 반세기 이상의 전통을 갖고 있다. 프랑스가 미국의 패권주의에 맞서 자주 노선을 견지해 온 것은 직접적으로는 드골주의의 유산이다. 하지만 그 사상 문화적 연원을 추적해 보면 프랑스 반미주의의 뿌리는 드골주의 이전에 이미 사회적 연대와 진보, 보편성을 추구해 온 전통에 닿아 있다. 앵글로색슨 국가의 일반적 정서인 개인주의, 자유주의는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형성된 프랑스의 보편적인 인간 존중 이념이나 국가주의 전통과는 근본적으로 대조적이다.
‘반미주의(anti-américanisme)’라는 용어는 오늘날 프랑스어 사전에 아예 표제어로 수록되어 있다. “그랑 라루스 프랑스어 사전에 나오는 32개의 안티(anti) 항목 중 나라와 관계되는 것이 반미주의밖에 없다”는 역사학자 앙드레 카스피의 지적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반미주의가 감정적인 차원을 넘어 문화로 정착했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프랑스인들은 미국의 패권주의에 맞설 수 있는 나라는 프랑스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역사적으로 강한 프랑스가 구가해 온 조국에 대한 애국심이나 향수, 자존심의 문제는 아니다. 프랑스혁명이 만들어 낸 자유, 평등, 박애는 프랑스인들만의 자유, 프랑스인들만의 평등, 박애는 아니다. 그 이념은 유럽을 넘어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오늘날 인류 전체가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보편성이다. 따라서 보편적인 이념은 인류 전체에게 있어서도 하나의 진보인 것이다. 프랑스를 ‘만인의 조국’이라 말하는 것은 인류가 공유하는 보편적 인간 존중의 이념이 프랑스혁명을 통해 나왔기 때문이다.
미국에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나라 프랑스는 오늘날 반미 담론의 중심지이다. 문화 운동으로 자리 잡고 있는 반미주의를 지탱하는 두 개의 지주는 ‘지식인들의 비판적인 태도’와 ‘프랑스 국민들의 반미주의’이다. 유럽에서 코카콜라 판매량이 가장 저조한 나라, 맥도널드 지점이 생길 때마다 반미 시위가 조직되는 나라, TV 드라마 편성에서 미국 시리즈물이 가장 적은 나라, 미국식 패스트푸드를 배격하는 ‘슬로우푸드 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나라가 바로 프랑스이다. 이런 문화 현상의 바탕에는 반미 문화운동을 주도하는 지식인의 비판 의식과 민족 문화를 사랑하는 프랑스인의 민족의식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프랑스는 각 국민국가들이 보편적으로 본받을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민족 정체성 지키기 운동’이다. 오늘날 우리는 국민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위협받는 소위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형식 논리로 볼 때 세계화는 보편이고 민족주의는 특수일 수 있다. 세계화는 국경 없는 보편적인 지구촌을 만들자는 운동이기에 보편적이고, 자기 민족국가의 울타리를 튼튼히 하자는 프랑스식 반미주의는 세계화라는 보편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민족이나 국가가 각 민족이 고수해야 하는 자신의 자리라고 할 때 반미 반세계화 운동은 미국화의 강요로 위협받는 국민국가의 제자리 찾기, 제자리 지키기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프랑스의 반미 문화는 역설적이지만 오히려 각 민족국가들이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운동이다. 자유, 평등의 사상이 프랑스만의 문화가 아니듯이 반미 문화도 민족 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는 국민국가의 보편적인 문화가 될 수 있다.
프랑스의 대학 교육과 학문의 풍토 흔히 프랑스를 ‘개인주의’가 발달한 나라라고 한다. 이웃집에 누가 사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신경을 쓰는 지독한 개인주의자들이 모여 사는 이기적인 사회로 알려져 있다.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개인주의가 강한 사회인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프랑스는 필요한 경우에는 사회 문제나 소외 계층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과 참여가 두드러지는 나라이기도 한다. ‘솔리다리테(solidarité, 연대)’나 ‘앙가주망(engagement, 사회 참여)’ 같은 프랑스의 전통적인 가치는 프랑스 사회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사회적 가치이다. 어쨌거나 철저한 ‘개인주의 사회’라는 오명에 시달리는 프랑스 사회인지라 프랑스의 학문적 풍토도 개인주의적이고 폐쇄적이지 않겠는가 하고 섣불리 추측할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학문적 개인주의와 지나친 분화는 미국식 학제의 특징이다.
우리나라 대학 학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미국식 학제의 경우는 학문의 분야별 분화와 학문 간 분절 현상이 극심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때문에 학과 개설도 교과서적이고 천편일률적이다. 전국 어느 대학을 가더라도 학과 이름은 대동소이하고 커리큘럼도 거의 흡사하다. 또한 학과 간의 분절 현상이 두드러진 만큼 각 학과 간의 벽이 두텁고 학문 활동은 철저히 분야별로 이루어진다. 대학원 진학 시에 전공을 바꾸거나 석사, 박사의 전공이 다를 경우는 심각한 불이익을 당하기 쉽다. 하물며 학부 전공을 바꾸거나 학교를 옮기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반면 프랑스는 우리와는 다르다. 물론 대학입시제도가 우리나라처럼 수능 성적순으로 줄서기 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프랑스에서는 전공을 바꾸는 것이 비교적 자유로우며 학교를 옮기는 것도 흔한 일이다. 때문에 어느 대학 출신이냐 하는 딱지가 취업이나 진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또한 프랑스 대학의 학과 개설은 프랑스 사회의 분방함만큼이나 자유롭고 다양하다. 특히 본격적인 연구 과정인 대학원은 더더욱 그러하다. 프랑스는 우리나라와 근본적으로 학제가 다른데, 본격적인 연구는 예비 박사 과정인 DEA(심화학업학위) 과정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DEA 과정은 대학입학 자격시험(바칼로레아) 후 5년째의 과정(BAC+5년)으로 우리나라의 석사 과정 내지는 박사 과정의 워크숍쯤에 해당한다.
프랑스 대학원 과정은 개설 전공이 ‘여성과 사회’, ‘유럽학’, ‘동유럽 개혁과 사회변동’, ‘민족 간 비교문화’ 이런 식이다. 때문에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등의 전통적인 학과 구분은 별 의미가 없다. 그만큼 프랑스는 학제 간 연구나 통합을 중요시한다는 이야기다. 학제 간 연구나 협동 과정 학위는 대부분 연구소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연구소는 단과 대학과 똑같은 위상을 가지며 학위도 대학 연구소 이름으로 나간다.
앙가주망은 프랑스 지식인들의 뿌리 깊은 전통이다. 이 점 또한 우리나라와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대목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학계라는 것이 말하자면 ‘탁상 앞에서 공부만 하는 선비 집단’을 일컫는다. 대학 교수가 정치 활동, 사회 운동이라도 할라치면 원로 학자들은 으레 ‘학자가 공부를 해야지 정치는 무슨 정치!’라며 호통을 친다. 학자의 연구는 철저히 학술지나 학회 활동으로 제한되며 시민운동을 하거나 언론 매체에 기고하는 행위는 학자의 본분을 벗어난 탈선이요, 외도로 간주된다. 교수 채용이나 업적 평가에서도 SCI(Science Citation Index), SSCI(Social Science Citation Index)급 논문이니, 학회 회보니 하며 학자들끼리 하는 특화된 활동에 대해서만 순수한 ‘연구 업적’으로 인정한다. 물론 학자들에게 학회 활동은 중요하다.
하지만 학자들의 연구가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고 학계라는 틀 내에만 갇혀 있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탁상공론이 될 수밖에 없다. 공부하지 않고 무모하게 행동만 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공부만 하다가 결국 공부로만 끝나는 것은 무의미하다. 프랑스 지식인들은 ‘사회적 실천(praxis)’을 학자의 도덕적 의무로 여긴다. 그들은 한 편의 학술 논문보다는 「르 몽드」』지에 투고한 한 편의 논단을 오히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라는 마르크스의 명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프랑스의 지식인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특히 사회과학자라면 그들은 자신의 이론 활동을 부단히 이데올로기적 지향이나 사회적 실천과 연계시키려고 애쓴다. 사회적 실천과의 단절, 순수 학문 지향, 상아탑에의 안주 이런 한국적 대학상은 프랑스의 대학상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또 한 가지 큰 차이는 ‘기초 학문의 중요성’이다. 철학적 기초나 방법론 훈련은 사회과학, 인문과학에 관계없이 대학원 과정 이상에서는 반드시 철저하게 시키고 있다. 오히려 개인 전공 영역보다 더 중요시할 정도이다. 요컨대 프랑스식 학풍은 학문의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학문하는 본질적 방법과 학문의 근본적인 목적을 우위에 두고 교육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프랑스식 학풍이 근대 이후 서구 사상사를 이끌어 오며 볼테르, 몽테스키외, 토크빌, 푸코, 사르트르, 알튀세르, 부르디외 같은 걸출한 석학을 낳은 원동력이 되었다. 지성 선진국 프랑스로부터 배울 점은 복잡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내용이 아니라 그들의 독창적이고 분방한 철학적 사고방식이다. 철학적 사고나 사회학적 상상력은 외우고 가르치고 학회 활동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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