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거짓 신앙체계의 실체
제1장 거짓 신앙체계의 실체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거짓 신앙체계의 실체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거짓 신앙체계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대마다 거짓 신앙체계가 존재하고 있는 것을 선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대와 배경은 각각 다르지만, 거짓 신앙체계의 성격은 항상 똑같습니다.
거짓 신앙체계의 정의에 대해서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성경에 나오는 거짓 신앙체계에 대한 몇 가지 실례를 살펴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예
대표적인 한 가지 예는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철저히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성경을 연구하고, 금식하고, 기도하고,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믿는다고 자부했습니다.
로마서 2장에서 우리는 그들의 그러한 자부심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예수님 사역 약 25년 후에 쓰여진 책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2장에 나오는 유대인들은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과 거의 같은 그룹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17)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19)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롬 2:17-20). 그들은 율법 안에 하나님의 진리와 지식의 결정체가 들어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 율법으로 철저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율법을 신뢰하고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한 빛,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인도자, 어리석은 자들과 신앙이 어린 자들을 위한 선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큰 자부심입니까!
그런데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7)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38)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요 5:37-38). 더 나아가,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 5:42).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46)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요 5:46-47).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본인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믿고 의지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 신앙체계의 실체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 등 우리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에서부터 그들의 이해와 하나님의 이해가 달랐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이해, 즉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
우리는 이사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속에서도 동일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의 구절들을 읽으면서, 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예배를 드리고, 얼마나 정성껏 희생을 드렸으며, 얼마나 많이 기도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10)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10-15).
그들은 모든 예배를 철저하게 드렸습니다.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고, 월삭 예배를 드렸습니다. 월삭은 유대력으로 매월 첫 날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한 달을 하나님 안에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매월 첫 날 하나님께 특별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월삭 예배입니다. 또한 그들은 모든 절기와 대회를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나올 때 빈손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많은 희생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수염소, 어린 양, 수송아지 등 무수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것도 그들은 말라기 시대처럼 병든 짐승, 쓸모없는 짐승을 드린 것이 아니라, 살진 짐승을 드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좋은 것들은 자기를 위해 아껴두고, 값어치 없고 쓸모없는 것들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들을 하나님을 위해 드렸습니다. 또한 그들은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금식일에는 전 국민이 금식에 동참했습니다(사 58:1-5 참조).
이것이 그들의 신앙생활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당연히 그들은 자신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니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신다고 자부했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 줄 알면서도 그렇게 많은 희생들을 드릴 사람들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신앙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소돔의 백성이요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님께 혐오감을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더욱 더 나아가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으며, 하나님을 멸시하여 멀리 떠나갔다고 말씀하십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4).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또 다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것이 바로 거짓 신앙체계의 실체입니다. 신앙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하나님의 이해가 완전히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관점에서 자신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천리만리 떠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관점을 몰랐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떠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거짓 신앙체계의 정의.
그럼 거짓 신앙체계란 무엇입니까? 저는 거짓 신앙체계를 한 마디로 말해서,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이해로 정의합니다. 거짓 신앙체계는 신앙을 왜곡되게 이해함으로써, 전혀 신앙이 아닌 것을 올바른 신앙이라고 이해합니다. 거짓 신앙체계는 신앙의 모조품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하나님의 생명도 없는 가짜 신앙입니다.
거짓 신앙체계는 교리가 잘못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 신앙체계가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이해라고 말하니까, 교리적으로 잘못된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교리는 전적으로 옳으면서도, 철저하게 거짓 신앙체계에 빠져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경우에도 그들이 가르치는 교리에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말을 지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 23:1-3). 만약 그들이 가르치는 바가 잘못되었으면,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그것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특히 여기의 “지키되” 라는 말은 반드시 지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 NIV 성경에는 이 말을 “must obey”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책 『부흥』에서 제가 말하는 이 거짓 신앙체계를 죽은 정통주의라고 부릅니다. 죽은 정통주의는 교리적으로는 전적으로 정통인데, 전혀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독교 역사에서 이단 못지않게 가장 위험한 것이 죽은 정통주의라고 말합니다. “ 인용” (『부흥』 81쪽 결함이 있는 정통)
거짓 신앙체계는 신앙이 미성숙한, 어린 상태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든 예배를 철저하게 드렸습니다. 그들은 많은 희생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많이 기도하고, 많이 금식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결코 신앙이 미성숙한 어린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문제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경우를 보면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소위 신앙이 어린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반대였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을 신앙이 어린 자들을 위한 스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동일하게 신앙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이 거짓 신앙체계는 소위 어린 성도들만이 빠지는 함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짓 신앙체계에 가장 잘 빠지는 사람들은 목회자와 신학생, 장로와 안수집사 등 소위 신앙생활 잘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자신의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 라는 말로 이 위험성을 수없이 강조하셨습니다(마 16:6, 11; 막 8:15. 눅 12:1 참조).1
거짓 신앙체계는 성경적인 지식이나 지능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에 대한 왜곡된 혹은 그릇된 이해라고 할 때, 이것은 성경적인 지식이 부족하거나 지능이 부족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5장 4-5절에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우준한 것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 내가 귀인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그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 이는 ‘이 가난하고 무식하고 배우지 못한 평민들은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법도를 알지 못하니, 많이 배우고, 유식하고, 부유한 귀인들에게 가서 알아보리라’ 그 말입니다. 더욱이 그 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법도를 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가서 살펴보니 그들도 똑같이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똑같이 영적으로 눈먼 가운데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먹고 지낸다고 비방했습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에 보면, 죄인이라는 단어에 따옴표(“”)가 붙어 있습니다. (예, 마9:10 “sinner")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즉,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배우지 않아서 모르고, 율법의 내용들을 잘 지키지 않는 일반 평민들을 죄인들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열심히 연구하고, 잘 알고, 나름대로 잘 지키는 자기들은 그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보다 바로 그들이 거짓 신앙체계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적인 지식뿐 아니라, 지능이나 학식 면에서도 누구보다 뛰어난 자들이었습니다.
거짓 신앙체계는 성경적인 지식이나 지능의 부족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 신앙체계는 영적 분별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 분별력은 성경적인 지식이나 지능과 관련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각자의 마음 자세와 관련이 있습니다.
거짓 신앙체계에서는 어떠한 참 신앙의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거짓 신앙체계에서 가장 무서운 점 중 하나는 그것이 신앙의 모조품이기 때문에 거기에 참 신앙의 어떠한 열매도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고, 누구보다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리고, 누구보다 철저하게 성경을 연구하고, 누구보다 철저하게 기도하고 금식하고, 누구보다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참 신앙의 어떠한 열매도 없었습니다.
우선 그들은 하나님과의 어떠한 친밀한 교제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뛰어난 성경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격체이신 하나님과의 어떠한 교제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하나님)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하나님)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요 5:37).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참 신앙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기도하고, 금식하고, 성경을 많이 읽어도, 거짓 신앙체계에 빠져 있는 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열리지 않습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그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전혀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을 대적했습니다. 그 시대는 특별히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계신 시대였습니다. 어느 때보다 더 놀랍고 귀한 시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누구보다 성경을 열심히 상고하고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께 나오기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이것 또한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 신앙체계에 빠져 있으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할 따름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삶에는 진정한 거룩함도 없었습니다. 거룩함은 참 신앙의 열매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통치하실 때, 우리에게 거룩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신앙체계는 가짜 신앙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정한 통치와 임재가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진정한 거룩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단지 거룩함의 모양만 있을 따름입니다. 즉, 외식만 있을 따름입니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 23:4-8).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마 23:16-19). 보십시오. 그들의 삶에는 개인적인 야망, 명예욕, 돈을 사랑하는 탐심 등이 전혀 내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삶에는 거룩함이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5-28).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어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오늘날 우리들의 삶이 바리새인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강하게 질책하신 마태복음 23장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 중에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나 살펴보십시오.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 온갖 신앙적인 언어와 형식과 모양은 가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실재와 능력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열매는 거의 나타나고 있지 않는 반면, 세상 사랑함과 죄는 가득합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의 가장 큰 고민은 성도들의 삶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모든 노력을 다해보아도 성도들의 삶이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은 지 30년, 40년, 50년이 되었는데도, 이전보다 달라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목회자들 중에는 목회에 대한 회의를 가지고 목회를 그만 두는 분들도 있습니다. 반면에 성도들의 고민은 목회자들의 삶이 거룩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오늘날 목회자건 일반 성도건 우리 모두는 자기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상대방의 모습만 봅니다. 우리 모두의 모습에는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전혀 없습니다.
또한 거짓 신앙체계에서는 진정한 성령님의 통치와 임재가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성경을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이 예수님에 관해서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나오기는 커녕, 예수님을 대적하고 핍박했습니다. 그 가장 주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2 그런 그들이 하나님을 모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거짓 신앙체계에서는 진정한 성령의 임재와 통치가 전혀 함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거짓 신앙체계의 가장 무서운 점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회 가운데 진정한 성령의 임재와 통치가 철저하게 걷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정도는 참으로 심각한 수준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예배 가운데도 성령의 임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저는 현재적으로 하나님께 참으로 놀랍게 쓰임 받고 있는 수많은 외국의 종들이 한국에 와서 사역을 해도 거의 아무런 성령의 역사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저는 그 원인이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 가운데 가득한 거짓 신앙체계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 가운데 팽배한 열매들만 보아도 우리는 우리 가운데 얼마나 거짓 신앙체계가 가득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 신앙의 열매를 보면, 우리의 신앙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16)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6-18).
우리 가운데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참다운 열매들이 맺혀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거짓 신앙체계를 철저하게 버리고, 참 신앙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기도도 중요하고, 금식도 중요하고, 성경공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거짓 신앙체계를 버리고 참 신앙으로 돌이키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기도와 금식과 성경공부가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 참다운 열매들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기도나 헌신이 적은 것이 아닙니다. 세계에서 우리나라처럼 많은 종류의 기도와 많은 종류의 헌금이 있는 나라도 드뭅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는 신앙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거짓 신앙체계가 가득한 것입니다. 성령의 사역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성령에 대해 강의해 달라고 어떤 목회자 세미나에 초청 받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집중적으로 복음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져야 거기에 진정한 성령의 통치와 임재와 운행하심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들이 참다운 신앙으로 돌이키면, 거기에 하나님의 실재, 하나님과의 친밀함, 하나님의 거룩함 등등 참 신앙의 열매들이 반드시 맺힐 것입니다. 여기 좋은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것을 충주에 있는 좋은 밭에 심고 잘 가꾸었습니다. 그럼 열매가 맺힐까요, 맺히지 않을까요? 당연히 좋은 사과들이 주렁주렁 열릴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참다운 신앙으로 돌이키면, 거기에는 거룩한 삶, 죄와 세상에 대한 승리, 변화된 삶, 주님의 실제적인 임재와 생명, 주님 안에서의 안식과 평강 등 참 신앙의 열매들이 반드시 주렁주렁 맺힐 것입니다. 참다운 신앙 가운데 거하면서, 그러한 열매들을 맺히지 않는 것이 오히려 기적입니다.
1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룩은 율법주의 혹은 거짓 신앙체계를 가리킵니다. 성경은 우선 이 누룩을 교훈이라고 말합니다(마 16:11-12). 그러나 이 교훈은 교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리는 절대로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또 다른 성경은 이것을 외식이라고 표현합니다(눅 12:1). 정확하게 거짓 신앙체계 혹은 율법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2“37)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38)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39)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40)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7-40). 여기 38절의 “이는”이란 단어는 헬라어의 “가르”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영어로는 “for”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이유’를 가리키기도 하고 ‘결과’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유’ 보다는 ‘결과’로 보는 것이 문맥적으로 더 옳습니다. 만약 이 단어를 ‘이유’로 이해하면 이런 말이 됩니다.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다(완료형). 아무 때에도 그분의 형용을 보지 못하였다(완료형). 그리고 지금도 그분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않는다(현재형). 그 이유는 너희가 지금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현재형).” 말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반면에 결과로 보면 이런 말이 됩니다.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다(완료형). 아무 때에도 그분의 형용을 보지 못하였다(완료형). 그리고 지금도 그분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않는다(현재형). 그 결과 너희가 지금 나를 믿지 않는다(현재형).” 이것이 정확하게 맞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이론적으로나 교리적으로는 하나님에 관해서 누구보다 더 잘 알았을지 모르지만, 인격체이신 하나님과의 어떠한 개인적인 친밀한 교제도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시대에 행하고 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한 것입니다. “2)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3)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요 1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