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왕권 형성
엘리의 아들들이 타락한 덕택에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사무엘도 나이가 들자 똑같은 경험을 하게된다.
사사들이 된 사무엘의 아들들이 뇌물을 받고 재판하는 등 백성의 원성을 사게 된다(삼상 8:1-3).
이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와서 왕을 세워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른다.
왕을 세워달라는 요구에 사무엘이 순순히 응할 리가 없다. "지상의 왕을 요구하는 것은 야웨를 거역하는 것"이라는 사무엘의 말에도 백성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왕을 요구한다.
사무엘은 왕제도의 폐단을 들어 백성들을 설득한다. 왕을 세우면 그 왕은 백성들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군인을 만들고 왕궁을 위해 노역하게 하며, 딸들은 시녀로 전락하게 될 것이란다.
백성들과 사무엘 사이의 실랑이는 결국 사무엘의 양보로 결말지어 지고,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선택하기에 이른다(삼상 8:4-22)
마지 못해 사울을 왕으로 세운 사무엘은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사울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해 갈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사무엘과 사울의 앞날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고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을 요구하게 된 배경을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내부적인 요인으로서 백성들이 처음에 왕을 요구하게 된 배경은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사가 되어 바른 정치를 하지 못한 사실에 기인한다(8:3).
약 250여년에 걸쳐 왕제도를 거부하면서 평등사회를 구축하고자 노력했던 이스라엘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오히려 경제적인 불평등을 느끼게 된다. 특히 므낫세, 에브라임, 베냐민 지파 중심으로 부가 편중되었으며, 엘리와 사무엘의 아들들이 제사장의 직권을 남용하고 백성들을 위해 정당한 재판을 행하지 않자 공동체의 일체감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내부적으로 치안부재와 부조리가 판을치게 되면서 위기감을 느낀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하게 된다.
외부적 요인으로 블레셋의 침략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들에게 법궤를 빼앗긴 사건은 이스라엘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깨버렸으며, 민족의 장래를 어둡게 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우리도 다른 나라와 같이 왕을 세워 그들과 싸울 것이라"고 요구하기에 이른다(8:20).
당시 블레셋은 다른 가나안의 도시국가와는 달리 과두지배체제를 형성하고 있었고 철제무기를 이용하여 기동성있는 공격력을 갖추고 있었다.
블레셋의 강력한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스라엘도 사사중심의 부족 연합체에서 왕권중심으로 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내적으로 민심이 이완되고, 대외적으로 블레셋의 위협에 직면한 이스라엘은 급기야 왕정제도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북왕국의 왕조들
① 931-909 여로보암 왕조(22년간)
연 대 |
왕 |
특 징 |
성 경 |
931 -910 |
여로보암 |
북왕국의 초대왕,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룰 세워 자신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도록 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음 |
왕상11:42-14:31 |
910 -909 |
나 답 |
|
왕상15:25-28 |
② 909-885 바아사 왕조(24년간)
909-886 |
바 아 사 |
잇사갈지파 아히야의 아들이다. 수도는 디르사였으며, 나답의 부하로 있다가 쿠테타를 일으켜 왕이 되었다. |
왕상15:27-16:7 |
886-885 |
엘 라 |
바아사의 아들로서 2년을 통치했으며, 궁중 대신 아르사의 집에서 술에 취해있을때 시므리에게 살해당하였다. |
왕상16:6-14 |
③ 885년 시므리 왕조(7일간)
885 |
시 므 리 |
엘라의 장관에 있다가 왕 엘라를 쳐죽이고 왕이 되었다. 군대장관 오므리에 의해 공격을 받자 불을 놓고 자살을 하였다. 그의 이름은 주인을 살해한 자에게 붙여졌다. |
왕상16:15 |
④ 885-841년 오므리 왕조(14년간)
885-874 |
오 므 리 |
엘라왕의 군대장관으로 있었다. 시므리의 반란시에 백성들의 지지로 왕이 되었다. 세멜에서 산을 사서 그 위에 성을 건축하고 사마리아라 하고 수도로 하였다. 북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강대한 때였다. |
왕상16:15-28 |
874-853 |
아 합 |
오므리의 아들이다.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바알 숭배를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종교로 받아들이고 신전을 짓기도 하였다. 엘리야와 동시대인. 시리아와의 전쟁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다. |
왕상16:28-22:40 |
853-852 |
아하시야 |
아합의 아들. 에시온 게벨에서 파선된 배를 재건하여 다시스와 무역하기 원함. 왕궁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심한 부상을 입었으며, 엘리야의 예언대로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음. |
왕상22:40-왕하1:1 |
852-842 |
여 호 람 |
아합의 아들. 엘리사가 활동하던 시기. 바알의 주상을 제거. 아람과의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장군 예후의 활에 죽임을 당하고 나봇의 포도원에 던져짐. |
왕하3:1-9:25 |
⑤ 841-752년 예후왕조(89년간)
841-814 |
예 후 |
아합과 이세벨의 바알 숭배를 근절.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숭배자들을 살해함. 그러나 잔인한 방법으로 비난을 받음.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완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난 받음(10:29,31) |
왕하9:1-10:26 |
814-798 |
여호아하스 |
아람군대의 공격을 받을때 기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음 |
왕하13:1-9 |
798-782 |
요 아 스 |
엘리사의 예언대로 부왕이 잃었던 성문들을 아람왕에게서 빼앗고 세번쳐 이김. 유다와 요아스와 싸워 승리함. |
왕하13:10-14:16 |
793-753 |
여로보암2세 |
황금시대. 악을 떠나지 못하였으나 통치자로서 유능한 자였음. 선지자 호세아,아모스 활동 |
왕하14:23-29 |
753-752 |
스 가 랴 |
위(位)에 오른지 6개월만에 반역이 일어나 살룸에게 죽음. |
왕하14:29-15:12 |
⑥ 752년 살룸 왕조(1개월)
752 |
살 룸 |
예후의 왕가를 무너뜨렸으나 불과 한 달동안 왕위에 있다가 혁명을 일으킨 므나헴에게 죽음 |
왕하15:10-15 |
⑦ 752-740년 므나헴 왕조(12년간)
752-742 |
므 나 헴 |
앗수르 왕 불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을때 일천 달란트를 조공으로 바침. |
왕하15:14-22 |
742-740 |
브가히야 |
부하인 군대장관 베가의 반란으로 죽음 |
왕하15:22-26 |
⑧ 752-732년 베가 왕조(20년간)
752-732 |
베 가 |
유다와 싸우려고 수리아와 동맹. 디글랏 빌레셀은 북방 팔레스틴을 침입하여 납달리를 점령. |
왕하15:27-31 |
⑨ 732-722년 호세아 왕조(10년간)
732-722 |
호 세 아 |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베가를 죽이고 왕이 됨. 앗수르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함 |
왕하15:30-17:6 | 북왕국 이스라엘(922-722)
솔로몬이 죽은 후에 여로보암은 북쪽의 10지파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건설하였다.
드는 세겜을 수도로 정하고 베델과 단에 성소를 세웠다(왕상 12:16-24). 성소의 금송아지는 바알신앙과 야웨신앙의 혼합된 종교상황을 반영한다(왕상 12:25-33). 북이스라엘에서는 사병제도가 발당하여 힘있는 자가 왕이 된으로 말미암아(왕하 11:20) 불안정한 왕정이 계속되다가 주전 722년에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하였다. 오므리왕조, 예후왕조, ...이스라엘의 역대왕의 성격
유다 왕국
1) 르호보암(931-913, 열왕기상14:21-31, 역대기하10-12장)
41세에 왕이 되어 17년간 다스렸다.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세웠으며 남색하는 자를 허락하였다(왕상14:23-24).
전쟁들에 시달렸는데 이스라엘의 여로보암과 애굽의 시삭의 침략이었다.
그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는 계속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나, 애굽의 시삭의 침략에는 큰 피해를 입었다(왕상14:25-26). 즉 그는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은 물론이요, 솔로몬 때에 만든 금방패까지 다 빼앗겼다.
2) 아비얌(913-911, 왕상15:1-8, 대하13:1-22)
아비얌은 북방 이스라엘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40만의 군대로 80만의 여로보암의 군대를 이겼다.
이 전쟁으로 가장 중요한 이스라엘의 남쪽 종교 중심지인 벧엘을 점령했고 몇 성읍을 빼앗았다.
3) 아사(911-870, 왕상15:9-24, 대하14-16장)
아사는 41년을 다스렸으며, 남방 왕국에서 처음으로 종교적으로 선한 왕이 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우상숭배를 꾸짖고 드디어 그의 태후의 위(位)까지도 폐하여 버렸다.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들을 찍어 불살랐으며, 열조의 모든 우상들과 남색하는 자들을 그땅에서 제거해 버렸다.
애굽 군대를 이기고 선지자 아사랴로 부터 사기를 얻은 후 그의 재임15년에, 그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다시 세우기 위해 유다와 베냐민 사람을 불러 모았는데 여기에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전투에서 노략하여 온 소 700마리와 양 7000마리를 번제로 드렸다. 또한 성전에 새로운 물품을 더 장비하고 하나님의 제단을 다시 세웠다. 그러나 그는 이전 가나안 사람의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
말년에 이르러 그는 자만심을 갖게 된다. 자기를 꾸짖는 선지자 하나니를 투옥한다.
또한 발에 병이 들었을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의원들을 의지하였다.
4) 여호사밧(873-848, 왕상22:41-50, 대하17-20)
25세에 왕이 되어 35년 간 다스렸다. 이중 3년간은 아버지와의 섭정기간이었다.
그는 부왕의 뒤를 이어 개혁운동을 계속했다. 바알 제단을 없앴으며 또한 산당을 어느 정도 제거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 레위인과 다른 사람들에게 특별명령을 내려 유다 전체에 "율법서"를 가르치게 하였다. 여호사밧의 훌륭한 신앙은 모압, 암몬, 에돔의 세 동맹이 공격을 가해온 데서 잘 나타난다.
이러한 침략을 알게 된 여호사밧은 실망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금식과 기도의 시간을 선포하였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응답하시고 한 선지자를 통해 승리를 약속한 말씀을 하셨다.
여호사밧은 재판절차를 개선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리고 오므리 가문과 동맹하였다.
그러나 이 동맹으로 인해 그 아들 여호람이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을 하게 하여 그의 어머니 이세벨의 방식을 좇음으로써 비극을 초래하였다.
또 세번이나 이스라엘 왕을 도와 주다가 죽을뻔 하기도 하였으며, 배가 파선되기도 하였다.
5) 여호람(853-841, 왕하8:16-24, 대하21장)
남왕국 유다(922-586) 지정학적으로 페쇄된 남쪽 유다는 신앙적으로 보수적이었으며, 다윗의 왕통을 계승하였다.
북이스라엘에 비해 비교적 안정된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유다도 앗시리아의 이스라엘 함락(722년)으로 말미암아 정치적인 위기를 맞게되었다.
유다는 앗시리아와 화친정책을 맺음으로 그의 속국으로 전락했으며(왕하 16:7-9), 이방종교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야웨신앙의 혼탁을 초래했다(왕하 17:5-23).
히스기아는 아하스의 친 앗시리아 정책에 반대하고 이교적인 의식을 제거하고 야웨신앙으로 이스라엘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나(예, 실로암터널; 왕하 18장) 실패하였다.
그 후 므낫세는 친 앗시리아 정책을 추구함으로써 반 야훼적인 풍토를 조성하였다.
요시아는 이에 반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함으로써(성전에서 신명기법전을 발견함; 주전 621년) 야뤠신앙의 철저한 정화를 이루고자 하였으나(왕하 22:8-14; 23:4-20)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앗시리아의 멸망(612)후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였다(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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