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설교/중보기도

2장. 신앙의 본질과 중보기도

발의무리 2008. 7. 7. 13:20

                       2장. 신앙의 본질과 중보기도


중보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우리가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가운데 우리가 먼저 서는 것이 핵심이고, 그 가운데서 중보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중보기도는 어떤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방법적인 면도 다룰 겁니다. 그러나 방법이 아니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그 다음에 우리의 자세입니다. 사실 목회자들은 이런 세미나를 하면 많은 경우에 어떤 방법을 배우려고 옵니다. 왜냐면 방법을 배워서 교회에 접목해서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돌리기 원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고,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자세고,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실질적으로 통치하시고 운행하시고 앞서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만 하더라도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서는 것이 중보기도의 가장 핵심입니다.

1. 이사야 하반부의 유업과 신앙의 본질

어제 첫 시간에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회복과 부흥의 유업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저는 하나님께서 그 유업을 오늘날 이 시대에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볼 때 이 시대가 참으로 귀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하반부에 약속된 하나님의 유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서는 것입니다. 제가 ‘신앙의 본질’ 이렇게 표현하면 저는 그 안에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제가 말하는 십자가의 복음하면 저는 그 속에 크게 세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첫째는 거짓신앙체계가 철저하게 파괴되는 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거짓신앙체계만 해도 아주 심각한 부분입니다. 그 다음에 십자가복음 안에 신앙의 본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은 인격체이신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혹은 친밀한 교제가운데 거하면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우리의 온 삶으로 동참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는 삶, 하나님과 실질적으로 동행하는 삶, 이것을 신앙의 본질이라고 표현하고, 그 다음에 십자가 복음에는 좁은 의미의 십자가의 복음이 한 요소입니다. 이것을 저는 십자가복음 two(2)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게 뭐냐면 우리 신앙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해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십자가, 오직 성령에 의한 삶을 사는 겁니다. 사실 이 삶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도 가능하고, 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처럼 큰 세 가지가 그 속에 이해되는, 이것을 제가 십자가복음이라고 그러는데, 이사야 하반부에 보면 이사야 하반부의 유업이 주어지기 위해서 지금 말한 그 부분이 반드시 되어야 될 것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철저하게 거짓신앙체계가 버려지고, 우리 의가 버려지고, 율법주의가 버려지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 오직 십자가의 공로만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십자가의 삶, 혹은 은혜에 의한 삶, 믿음의 삶이 우리 가운데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그것이 필수인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하반부만 보더라도 말씀드린 대로 좁은 의미의 십자가에 서는 것이 이사야 하반부의 유업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사야서 54장 1-3절, 그 다음에 갈라디아서 4장 27-30절을 보면 이 부분을 알 수 있습니다.
“1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3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여기 이 부분만 하더라도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회복과 부흥의 유업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그 부분에 세 개가 섞여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올 것, 둘째는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 백성의 구속, 셋째는 교회회복과 부흥, 세 개가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는 이 예언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하는 구절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바로 이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이 이루어질 것을 말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2000년 기독교 역사동안 하나님께서 부흥을 통해서 이루셨듯이 회복된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부흥을 보내시고, 하나님께서 이 일을 정확하게 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유업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면서 이 유업이 누구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십자가의 복음에 선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게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4장 27-30절을 보면 선명하게 나옵니다.
“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여기에 보면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의 두 아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을 두 신앙체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삭을 십자가의 복음, 이스마엘을 율법주의, 인본주의, 기복주의로 대변되는 거짓신앙체계로, 그러면서 이사야서 54장 1절을 인용하면서 이 유업이 이삭에게 주어질 거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복음에 주어질 거라는 겁니다. 또 이스마엘에게는 이 회복과 부흥의 역사가 유업으로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한 가지 참고로 말씀드리면, 여러분 2000년 기독교 역사를 읽어보세요. 하나님의 부흥이 이스마엘로 대변되는 거짓신앙 체계를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온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성경말씀 그대로입니다. 물론 율법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 신앙관을 통해서 교회는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끌어 모을 수는 있습니다. 교회가 이런 저런 많은 프로그램은 돌릴 수 있고, 또 많은 예산을 가지고 놀라운 행사들도 할 수 있습니다. 또 기독교 신문이나 기독교 방송에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2000년 기독교 역사를 한번 자세히 연구해 보세요. 이스마엘로 대변되어진 거짓신앙체계를 통해서 회복과 부흥의 역사가 이 땅에 일어난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2000년 역사가 증명합니다. 그만큼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올 때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복음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이처럼 이사야 하반부의 그 유업이 주어지되 누구에게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느냐면 십자가의 복음에 선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누구에게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냐면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선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55장 1-2절에 나옵니다.  
“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1절에 보면 “값없이 와서 사서 먹으라” 이런 말씀이 있으니까 우리는 그저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 이렇게 이해하는데, 당연히 이 구절이 그렇게 이해될 수 있지만,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이사야서 55장은 이사야 하반부 전체가 다루고 있는 회복과 부흥의 한 유업의 한 부분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5절입니다.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4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 5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여기 보시면 바로 이사야 54장과도 연결됩니다. 정확하게 이 구절도 가장 먼저는 바벨론 포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올 것에 대한 언급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예수님에 관한 예언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세울 거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그 영향력이 어디까지 임하게 할 것이냐면 땅 끝까지 임하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2편에 보면 온 열방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유업으로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땅 끝까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그것만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안에 있는 예언적인 백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시대 시대마다 바로 정확하게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사실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민족이 예수님께 주어진 것이 누구를 통해서 이루어지느냐면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 구절만 하더라도 이사야 하반부의 유업이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유업에 대해서 말하면서 하나님이 영광으로 거기 임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땅 끝까지 이를 거라고 말합니다. 열방을 터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사야서 54장에서는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설 것을 강조하고 있다면, 55장은 철저하게 신앙의 본질 위에 설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사야 55장 6절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시면 알지만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은 우리가 문제가 생기니까 그 문제를 도와달라고 하나님을 구하는 그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을 알기를 구하여 그분 자신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이사야서 55장 7절입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기 보시면 하나님을 구하라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타락의 본질인 자기중심적인 삶을 철저히 버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칠십 년 후에 돌아올 것을 시간까지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시면 아무리 하나님께서 시간까지 약속하셨을지라도 하나님 백성이 그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을 보았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나누어지지 않은 한 마음을 가지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며 하나님의 모든 길을 따라 행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여기도 보면 하나님이 회복과 부흥의 유업을 보내시되 그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라도 그 유업을 받기 위해서는 여기 말씀드린 대로 철저하게 신앙의 본질위에 서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을 존재를 다해서 사랑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운데 거하며 오직 믿음으로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삶 가운데 서서 그 토대 위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엘리야처럼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오르기까지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그 일이 정확하게 그대로 일어났던 것을 봅니다. 우리가 부흥에 대해서 말할 때,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부흥’책을 많이 인용합니다. J.I 패커가 우리 시대에 이 책만큼 부흥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 책은 없다고 할 만큼 추천한 귀한 책입니다. 그 책에 보면 ‘하나님의 부흥은 반드시 예비단계가 있다. 준비되는 단계가 있다. 갑자기 임하는 것 같지만 그 부흥이 임하도록 준비되는 단계가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물밑작업으로 준비되는 과정이 있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준비되는 과정에 핵심적인 두 가지가 뭐냐면 십자가의 복음과 신앙의 본질이 회복된다는 겁니다. 제가 이분 책을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먼저 ‘부흥’ 책 51p를 읽습니다. “언제나 부흥 이전에 예비적인 조짐이 있기 마련입니다. 갑작스럽게 부흥이 오는 것같이 보입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조용하게 진행되는 예비적인 단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한 준비단계가 있음을 언제나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준비 단계는 어김없이 장엄하고 영광스럽고 중추적인 진리들을 재발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핵심이 뭐냐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게 되는 진리,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그 예를 들면서 “프로테스탄트(개신교)부흥이 임한 것은 마틴 루터가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진리를 문득 깨달은 그 후의 일이었습니다.” 18세기 요한 웨슬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웨일즈로 가면 “그 당시 가장 위대한 설교자 다니엘 로렌드는 어느 날 그리피스 존스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진리를 인식하고 나서 몇 개월 동안은 그 진리의 능력을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찬 예식에 참여하고 있을 때 그는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여 그를 충만케 했고 그로부터 웨일즈 내에서 18세기에 위대한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부흥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북아일랜드에서도 그랬고 항상 그랬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뭘 말하느냐? 그것은 철저하게 자기 의가 내려지고 거짓신앙체계가 파괴되고 오직 믿음에 의한 삶, 오직 십자가에 의한 삶, 오직 은혜에 의한 삶, 오직 성령에 의한 삶을 가리킵니다. 한 가지 기억하실 것은 우리가 혼동되기 쉬운데, 이 저자가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러한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마틴 루터건, 요한 웨슬리건, 다니엘 로랜드건, 누구건 그 진리를 이론적으로 깨닫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철저하게 그 진리 위에 선 것을 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그 삶 가운데 선 것을 말합니다. 철저하게 자기 의가 버려지고 오직 십자가만이 자기의 유일한 의와 능력이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이 자기의 지혜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는 그 삶 가운데 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부흥은 항상 그런 자들을 통해서 왔습니다. 그러한 설교를 여러 번 들은 자들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삶 가운데 선 자들을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부흥의 예비단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느냐? 아까 말씀드린 신앙의 본질이 회복되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117쪽을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해지기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19쪽에도 보면, ‘주님 자신을 추구하는 데는 어떠합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임재가 우리 삶 속에 나타나는 것, 그것이 참된 기독교입니다. 부흥시에 언제나 하나님께 사용되었던 사람들이 바로 그것을 추구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제 말을 들을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언제나 부흥의 예비적인 단계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크게 사용되었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라오디게아교회의 사람들과 같다고 느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임재 앞에 압도되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친밀한 교제가운데 동행하는 그러한 우리 신앙의 올바른 관점에서 자신들을 비춰볼 때, 자기들이 라오디게아교회처럼, 가난하고, 벌거벗고, 눈멀고, 가련한 존재인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말입니다. 그들은 신앙적인 지식이 뛰어난 사람들이었고, 열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루터나 요한 웨슬리, 다른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봉사는 오늘날 우리가 발 벗고 따라가도 못 따라 갈만큼 진짜 헌신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주님을 아는 것,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 주님의 사랑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 그분의 임재 앞에 압도되는 것, 이러한 신앙의 본질적인 차원에서 자기들의 삶이 비춰질 때, 자기들이 라오디게아교회처럼, 가난하고, 벌거벗고, 눈멀고, 가련한 존재인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보여주셔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흥의 첫 단계는 인식입니다. 하나님의 기준 앞에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하시는 게 부흥의 첫 단계입니다.

122쪽에도 이렇게 말합니다. “부흥에 이르는 불가피하고 부단한 예비적인 단계는 하나님에 대한 갈증,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갈구하는 생생한 갈증입니다. 그리고 역사하시며,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시며,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일어나서 당신의 원수들을 쇄파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불타는 간절한 바램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나 부흥의 필연적인 예비단계였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러한 진리를 여러 번 들은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 가운데 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을 향하여 진실로 애통하며 갈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까 이 가운데 서면 유업 중에 하나가 열방을 얻게 될 거라고 그랬는데, 그게 하나님이 주신 유업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수년 전에 이러한 부분들을 보게 하시고, 돌이키게 하시고, 집중적으로 하나님만을 알기를 추구하게 하시고, 그러면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가운데 그러한 것을 비추시고, 서게 하시고, 그러면서 제 의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열방을 열어 가십니다. 어제 저녁에 말씀드린 대로 해외 스케줄을 짜는데, 해외 훈련원 스케줄만 하더라도, 중국은 아예 건드리지도 못했습니다. 중국은 여러 곳입니다. 그리고 중국은 한족들도 더 급속도로 열어 가시는 것 같습니다. 조선족 같은 경우는 주요 지역마다 선교회에서 섬기게 하셔서 영향을 미치게 하고 계신데, 그거는 스케줄을 잡지도 못한 상황인데도 국내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훈련원 스케줄만 잡는데도 거의 일 년 달력이 꽉 차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을 추구하며 자기 의를 철저히 버리고, 오직 십자가의 공로만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서서 주와 동행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사역은 순식간에 열어 가십니다. 문제는 사역이 확장되어질 때, 우리가 마음이 높아져서 당연히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분을 알기를 간구하지 않고, 추구하지 않는 그러면서 우리가 아는 것이 이론적인 지식으로 변질되어갑니다. 이렇게 되어지면 사역은 여전히 놀라웁게 확장되어지는데 근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심각한 안일함과 나태함으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영적인 눈이 가리워지고, 그리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우리 속에 점점 더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그러한 자리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회복과 부흥의 약속을 보내시는데, 그 가장 핵심이 뭐냐면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서는 겁니다.

이렇게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설 때, 하나님의 유업이 주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20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먼저는 철저하게 자기 의가 완전히 파괴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삶,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는 그 삶, 십자가의 복음을 의미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의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과 신앙의 본질, 두 가지를 말하는 겁니다. 그 가운데 설 때,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예가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 가운데서 떠나면 하나님의 약속은 거두워집니다. 이처럼, 이사야 하반부의 그 유업은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선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중보기도만 하더라도 신앙의 본질 가운데 먼저 서는 것이 핵심입니다.

2. 무너진 데를 막아서는 것은 신앙의 본질이 전제됩니다.

무너진 데를 막아서는 것은 신앙의 본질이 전제됩니다. 우리가 흔히 중보기도를 무너진 데를 막아서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면서 그에 대한 대표적인 구절로 에스겔서 22장 29-31절을 인용합니다. 거기를 보시면 오늘날 우리들의 삶과도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저는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 시대에 이 나라와 관련해서도 아주 중요한 부분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9 이 땅 백성은 강포하며 늑탈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였으며 우거한 자를 불법하게 학대하였으므로 30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31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한 것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러기 전에 하나님이 어떤 자를 찾으셨냐면,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는 자를 찾으셨다고 그랬습니다. 여기에 보시면 만약에 찾으셨다면 하나님이 심판을 안하셨을 것이다. 그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나라 상황에서도 여기서 말하는 무너진 데를 막아설 사람의 위치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왜냐면 하나님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심판이 올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이렇게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서는 자들을 하나님이 발견하시면 그들로 인하여 내리기로 한 심판을 돌이킬 수 있기 때문에 너무나 중요합니다. 시실 놀랍기도 한 말씀이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이 말이 정확하게 해당된다고 믿습니까? 우리는 안일한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것이 잘되겠지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 보면 희안하게 생각합니다. 북한의 핵 문제만 하더라도 미국은 우리보다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더 많이 신경을 씁니다. 과거에 카터 대통령이 특사로 김일성을 만나기 전에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려고 계획했었습니다. 만약에 그때, 미국이 계획대로 북한을 쳤더라면 우리나라는 지금 매우 심각한 상태에 있을 겁니다. 절대 이 상태로 안남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그 당시에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그 뒤로도 우리가 모르는 많은 그러한 일들이 우리나라와 관련해서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참 안일하기 쉬운데, 모든 면이 그렇게 절대로 안일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어떤 지도자의 한 번의 결정이 우리나라 전체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국에 어떤 사역자들만 하더라도 우리나라가 기로에 서 있다고 말하면서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이 임할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도 올 수 있다고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8차부터 13차까지 넓은 장소에서 십자가와 성령 컨퍼런스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면서 간절하게 기도하게 하셨던 부분이 3년만 하나님께 기다려달라고 그러면서 이 나라 모든 목회자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한번이라도 듣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게 하셨는데, 그러니까 우리가 모르는 많은 부분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만 하더라도 실제로 우리가 지금 처해있는 상황과도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 또 하나 보면 하나님이 한 사람이라도 찾았다면 하나님이 심판을 유보하셨을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영어성경에 보면 명백하게 단수입니다. 그러니까 “a man” 한명도 못찾았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못찾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죄 값대로 그대로 심판하셔서 예루살렘이 완전히 패망되게 되고,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불타고, 그 나라 그 민족은 완전히 흩어지게 되고, 나라 전체를 빼앗기고 이방나라로 대부분이 포로로 잡혀가서 노예 생활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이러한 결과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살펴볼 것은 여기 한사람도 찾지 못했다 그 말은 문자 그대로 한명도 발견하지 못했다. 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성경에 ‘모든 사람’, 이렇게 말할 때, 진짜 문자 그대로 한사람도 빠짐없이 100%라는 그 말이 아니라 많은, 대부분을 말할 때, 모든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 한사람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한사람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예레미야가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서에 보시면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 하나님이 실제로 그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가 보기에도 두 차례 이상 강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시냐면 모세와 사무엘이 와서 기도할지라도 안 들을테니까 이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레미야 15장 1절, 7장 16절, 11장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치라”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너를 듣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곤액을 인하여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을 듣지 아니하리라”

물론 기도하지 말라는 말은 진짜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기 보다 제가 보기에는 그만큼 하나님이 분노하고 계시면서 기도하지 말라고 하나님 마음을 표출하신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한사람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한사람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건 뭘 말하느냐? 아주 작은 소수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때, 아브라함이 의인 50명이 있으면 멸하시겠습니까? 그러면서 10명까지 내려갑니다. 결국 하나님은 의인 10명만 있으면 그 땅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런데 그 구절을 연결시켜 보더라도 소수라도 그 가운데 이런 자들이 있었다면 하나님이 그 땅을 고치셨을 텐데,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회복과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셨을 텐데, 소수도 발견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셨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볼 때에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는 자들을 우리가 흔히 중보기도자들이라고 그러는데, 하나님이 이들을 찾으셨다고 그러는데, 이들은 어떤 자들을 가리키는가? 이들은 십자가의 복음, 신앙의 본질에 선 자들입니다. 단순한 중보기도자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뭘 보면 알 수가 있느냐면 지금 에스겔서만 하더라도 가장 먼저는 이스라엘의 패망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고, 그들의 회복에 대해서 예언합니다. 그러면서 그 회복 속에 이스라엘의 회복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통한 구속에 대한 예언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예언들이 뭐와 밀접한 관련이 있냐면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유업과도 서로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두 구절만 보더라도 이들이 단순히 중보기도하는 자들이 아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구절들이 어디냐면, 이사야서 58장 12절과 61장 4절입니다.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여기 이사야서 54장만 하더라도 ‘네 자손은 좌우로 퍼져서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회복과 부흥을 위해 그러한 도구로 쓰임 받을 예언적인 백성의 한 중요한 요소가 금식하는 삶입니다. 그것은 식사를 금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삶이 금식하는 삶입니다. 그러면서 네게서 날 자들, 여기서 날 자들이란 말은 그 자손들을 말하는 게 아니고 그러한 신앙의 가치관 가운데 세워지는 자들을 말합니다.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하리라.” 이렇게 말함으로써 여기에 무너진 성을 막아서며 성을 쌓는 자들이 누군가 하면,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거와 같은 예언적인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예언적인 백성의 가장 본질적인 핵심이 십자가의 복음에 선 자들,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선 자들입니다. 61장 4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61장에도 역시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유업에 대해서 계속 말하는 겁니다. 그 유업 중에 하나가 뭐냐면,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실 것이기 때문에 열방이 그 영광을 보고 몰려오게 될 것이다. 이게 그 유업 중에 하나입니다. 55장, 54장, 61장에 나온 내용이기도 하고, 61장에서는 그것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성령께서 강력하게 그곳에 부어질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이사야서 61장을 읽고 오늘날 너희 귀에 이 말씀이 응하였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회복과 부흥이 가장 근본적으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이제 예수님 안에 있는 무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하나님이 주신 유업이 뭐냐면 성령이 대규모로 부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그게 부흥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영광으로 인하여 열방이 그곳으로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도구가 되는 겁니다. 4절입니다.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이렇게 말합니다.

62장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시려다가 그들 가운데서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는 자들을 찾으셨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는 자들은 단순히 기도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중보기도로 모여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 이전에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선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에 선자들입니다. 이사야 하반부가 말하는 예언적인 백성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그렇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운데 거하는 자들, 하나님만이 유일한 목적된 자들, 하나님이면 족한 자들, 그리고 자기 의가 철저히 내려지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선 자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자기의 자랑인 자들, 그 한마디 속에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자들을 찾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당연히 중보기도도 포함됩니다. 이사야 하반부의 유업을 받을 자들 중에 중보기도가 포함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밤낮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열방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다시 찬송을 받는 그날까지, 그 약속으로 하나님을 상기시켜 하나님을 쉬지 못하게 하나님께 부르짖을 그런 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자들을 찾으셨다는 겁니다. 이 시대가 그런 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자들이 소수만 발견되어도 하나님이 그들로 인하여 심판을 유보하시겠다는 겁니다. 사실 너무 중요한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중보기도를 강의하면서도 참 부족함을 많이 느끼는 게 제가 초기에는 중보기도를 정기적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그게 아주 좋았고 그랬는데 제가 사역이 바빠지고, 또 외부로 많이 나가다보니까 정기적으로 중보기도를 참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어떤 때는 시간이 있어도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있는데 내가 가면 신경쓰이니까 그리고 내가 매번 정기적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성도들이 인도하고 있는데, 내가 왔으니까 내가 인도한다고 들어가기도 꺼림칙하고, 그래서 거의 못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2주 전에 제 아내가 인도할 시간인데 바쁘다고 저에게 좀 인도해 달라고 해서 가서 인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날 많은 것들을 보이셨습니다. 가서 앉아 있기만 해도 하나님께서 많은 것들을 보이십니다. 교회 상태를 보이시기도 하고, 우리의 모습을 보이시기도 하고, 그래서 사실 특별기도회가 시작된 겁니다. 그리고 특별기도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많은 부분을 보이신 겁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는 ‘이 나라 민족의 죄악과 기도 없는 삶을 고백합니다.’ 그 찬양을 드리게 하시고,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 나라만 하더라고  하나님의 교회가 신앙의 본질 가운데, 십자가의 복음 가운데 회복되어지고 그래서 그걸 통해서 하나님의 부흥이 이 땅에 임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어지고, 우리나라 산간 도서벽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어지고 또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그렇게 기도하라고 목적과 의도를 보이시고, 하나님의 뜻을 보이셨는데,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여 서지 못하는 저의 모습을 보이셔서 제가 많이 회개했습니다.

3. 부드러운 메시지로서는 절대로 무너진 데를 막아설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살펴볼 게 있습니다. 오늘날 이런 부분을 왜 살펴보냐면 우리의 신앙의 가치관과 자세는 너무나 이스마엘적인 인본주의, 기복주의, 율법주의로 대변되어지는 그러한 거짓신앙체계 가운데 있으면서 또 메시지는 부드러운 메시지가 판을 치는 가운데 있으면서 올해가 평양 부흥 100주년 기념의 해니까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기를 또 하나님의 성령이 부어지기를 기도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중보기도는 그게 아닌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같이 살펴보기 원하는 게 뭐냐면, 부드러운 메시지로는 절대로 무너진 데를 막아서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는 것과 관련해서 중요한 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좀 살펴보기 원합니다.

여러분, 부드러운 메시지는 금간 벽에 페인트칠해서 그것을 단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 말씀이 적나라합니다. 예레미야에서 보면 하나님 백성들의 신앙 상태를 말하면서 여자가 자기 안방에다가 외간 남자들을 그것도 복수로 여러 명 들여서 자기 안방에서 음란한 짓을 하면서 그것을 기뻐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얼마나 적나라한 표현입니까? 그런데 그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어떤 때는 표현들이 아주 적나라하고 너무나 선명합니다. 그런데 부드러운 메시지와 관련해서도 하나님은 너무나 적나라한 표현을 쓰고 계십니다. 여기 에스겔서 22장 28절을 보겠습니다.
“28 그 선지자들이 그들을 위하여 회를 칠하고 스스로 허탄한 이상을 보며 거짓 복술을 행하며 여호와가 말하지 아니하였어도 주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였으며”

에스겔서 13장 1-5절입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의 예언하는 선지자를 쳐서 예언하되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에게 화 있을진저 4 이스라엘아 너의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 같으니라 5 너희 선지자들이 성 무너진 곳에 올라가지도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 족속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에 전쟁을 방비하게 하려고 성벽을 수축하지도 아니하였느니라”

전쟁할 때 성벽이 든든히 세워져 있어야 이기잖아요. 성벽이 무너져 있으면 적들이 쳐들어오면 패망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성벽이 무너져 있고, 헐어가지고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이 그것을 수축하기 위해,(수축=신앙의 본질, 십자가의 복음에 세우는 것) 거기에 올라가지도 않고 거기다 뭐하느냐? 부드러운 메시지로 페인트칠하면서 단장시킨다는 겁니다. 지금 곧 무너질 담인데, 그 성벽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데, 성벽이 무너지면 나라가 언제 패망할지 모르는데, 그것을 페인트로 가려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시면 부드러운 메시지를 무너져가는 성벽에 페인트칠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부드러운 메시지가 뭐냐? 그게 같은 시대에 예레미야에 나오는 거짓의 문제입니다. 쭉 보시면 다 연결됩니다. 혹시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알기 원하시면 제가 쓴 거짓신앙체계란 책이 있는데, 거기에 거짓신앙체계와 거짓의 문제가 나옵니다. 그리고 여기 에스겔서를 쭉 읽어보시면 정확하게 똑같은 것을 얘기하는 것을 보실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드러운 메시지를 예레미야에서는 거짓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를 보면 예레미야 6장 12-14절입니다.
“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13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여기를 보면 뭐를 거짓이라고 그러느면 평강이 없는데 평강하다고 한다는 겁니다. 평강은 오늘날로 말하면 샬롬, 축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평강을 외쳤던 데는 나름대로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몇 구절만 보면, 열왕기상 2장 33절입니다.
“33 저희의 피는 영영히 요압의 머리와 그 자손의 머리로 돌아갈지라도 다윗과 그 자손과 그 집과 그 위에는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다윗의 가문과 자손과 집과 그 왕위가 영원한 평강을 얻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무엘하 7장 12-17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17 나단이 이 모든 말씀과 이 모든 묵시대로 다윗에게 고하니라”

제가 몇 가지만 읽었습니다.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이 다윗의 가문과 다윗의 왕위와 다윗의 나라에 영원한 평강과 그 나라가 영원히 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예레미야 시대에 그리고 에스겔 초반에 그 당시 있던 유다나라는 다윗의 나라였습니다. 왕도 다윗의 자손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강을 외쳤습니다. 성경에 기초해서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그 백성과 그 왕위와 그 나라에게 영원한 평강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평강을 외쳤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예레미야 시대에 심판이 세 차례에 걸쳐서 왔습니다. 서기전 605년에 첫 번째로 왔고, 서기전 597년에 두 번째로 대규모로 포로로 잡혀갔고, 최종적으로 서기전 586년에 패망했는데, 이렇게 이미 두 차례에 걸쳐서 특별히 11년 전에는 거의 나라가 초토화되다시피 했는데, 그렇게까지 하나님이 말씀하신 심판이 왔을 때에도 그들은 성경에 나온 그 약속을 붙들고 평강을 외쳐대고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곧 돌아올 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었으면 예레미야 말을 믿겠습니까? 그 선지자들의 말을 믿겠습니까? 그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다 이구동성으로 똑같이 말하는데, 그것도 성경을 기초해서 말하는데, 누구의 말을 믿었겠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거짓이라고 그럽니까? 다 성경에 기초해서 하는 말인데, 예레미야만 하더라도 그들의 거짓을 믿지 말라. 그 헛된 거짓말을 믿지 말라. 서기관의 거짓 붓이 거짓되게 했다. 계속 거짓이라. 거짓이라. 거짓이라. 이렇게 말했는데, 왜 이게 거짓입니까? 그것은 성경에 기초한 말씀이라도 영적인 분별력이 가리워지면 거짓이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인가? 성경에 보시면 알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하게 타락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거짓신앙체계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들의 삶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기복신앙이 팽배했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식으로 대신해버린 율법주의가 팽배했고, 삶의 방법은 세상적인 방식을 따라 자기 방법대로 따라가는 인본주의가 가득했고, 그렇게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또 왔는데도 성경에 있는 약속이라고 해서 성경에서 좋은 약속들만 자기들 임의로 택하여 주기 바쁘니까 거짓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신앙의 본질 가운데 거해야 주어집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23장 16-17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1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17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여기에 멸시한다는 말은 그냥 대놓고 멸시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시대만 하더라도 저들이 인도까지 가서 특별한 향품을 사다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진짜 하나님을 존중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성경적인 의미에서 존중한다고 말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요 목표인 하나님 중심적인 삶 가운데 사는 그 신앙의 본질과 십자가의 복음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떠난 게 하나님을 멸시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2장 13절에 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범했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버렸다고 말합니다.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한 구절 더 읽으면, 그들의 문제가 뭐였습니까? 선지자와 제사장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 있으면서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보고 그 백성을 향해서 그 말씀을 전한 게 아니라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해서 그들이 원하는 메시지만 채워주기에 급급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요구에 부응해서 그들이 원하는 말을 주기에 바빴습니다. 이처럼 부드러운 메시지의 성격이 그걸 말하는데,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있으며 진짜 하나님은 그들의 삶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자기중심적인 삶이 전혀 내려지지 않고, 자기 목적을 위해 살며, 자기 개인적인 야망과 세상에 대한 집착, 탐심이 그대로 벌겋게 살아있고, 하나님은 그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러면서 의식 잘하면 그것이 신앙생활 잘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랑의 교제도 의식이 그 자리를 대신해 버리고 하나님의 실제가 전혀 없는 가운데 삶의 방식은 세상적인 방법대로 자기 방법대로 살아가는, 그러니까 예레미야시대 못지않게 철저하게 타락한 가운데 있는데 사람들이 원한다고 해서 성경에 나와 있는 좋은 구절들만 택해서 전하는 그것을 정확하게 거짓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것을 회칠하는 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심각한 게 뭐냐면, 이 부드러운 메시지는 절대로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담을 쌓지 못한다는 겁니다. 예레미야 23장 22절을 보십시오. 먼저 18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18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21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이 말은 뭐냐면, 그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 나와서 진실로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깨닫고 그 시대를 향하신 의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임의대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주기에 바빴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22절입니다.
“22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여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여기 보시면 뭘 알 수가 있는가 하면 부드러운 메시지는 절대로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지는 무조건 강하게 쳐야 한다. 그 말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서만 하더라도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심판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올바른 메시지를 전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부드러운 메시지를 전한다고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위로해야할 자들을 쳤다고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강하게 말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백성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인도해야 되는데, 하나님 백성들을 하나님을 존재를 다하여 사랑하는 자리로 인도해야 되는데, 다시 말하면 신앙의 본질로 인도해야 되는데, 하나님 백성을 십자가의 복음으로 인도해야 되는데, 그것이 무너진 데를 막아서는 길인데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기준이 비춰짐으로 그 기준 앞에 비춰진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중심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길로 돌이킬 때에 삶이 변화되게 되는데, 그들이 지금 하나님이 수단이 되는 삶을 살고 있고, 세상의 탐심과 욕심은 너무나 가득한 가운데 있고, 의식은 가득할지 몰라도 진정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하나님을 경외함도 없는 가운데 있는데, 그러한 가운데 삶은 세상적인 방법과 자기중심적인 자기 방법을 따라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타락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원하는 성경에 나오는 좋은 메시지만을 전하는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가를 성경은 말하고 있고, 그걸 통해서는 절대로 사람이 변하지 않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또 우리가 하나님의 회의에 참여한다. 그 부분만 하더라도 그런 것 같습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 교회에서 특별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첫날 같은 경우에는 제가 찬양인도하면서 주님 앞에 서는데 찬양 자체를 못드리겠는 겁니다. 그래서 한두 곡 하다가 그냥 내려놓고 깨닫게 하시는 대로 회개하고 돌이키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좀 더 찬양이 되어졌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비추시는 대로 돌이키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떠나있고,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나태함을 보이시고, 그러면서 6일쯤 되어서 하나님이 그러시는 것 같습니다. 찬양하는 것 그만하고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들으라. 그러니까 요한 계시록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했는데 그 말씀이 그렇게 실감나는 겁니다. 그런데 저에게 그렇게 하라고는 하셨는데 뭐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잠잠히 주님 앞에서 기다리면서, 제가 성도들에게 우리 주님을 찾자.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자. 주님이 포도나무교회에 주신 말씀을 듣자. 그러면서 작은 감동이라도 무시하지 말고 나누라. 그랬더니 하나님이 우리의 껍데기 하나하나를 벗겨 가시는 것처럼, 우리가 얼마나 마음이 높아져 있고, 교만하고, 우리가 섬김은 전혀 없이 하나님 앞에 멀어져있는 것을 적나라하게 말씀하시고 껍데기를 벗겨 가시는 것 같았습니다.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을 구하여 나갈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의도와 목적을 알기를 구하고, 그분의 길을 구하여 그 앞에 나아가 주님을 찾는 가운데 자신들의 지금 현재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상태에 있으며, 얼마나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나있는가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길로 하나님의 목적으로 삶을 돌이키기 위해, 회개하고 돌이키고 애통하고 나아가는 것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회의에 참여했더라면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돌이켜 살게 했을 텐데..., 그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부드러운 메시지는 절대로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절대로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부분적으로 몇 가지 도덕적인 규례들은 지키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하나님을 존재를 다해 사랑하는 자로, 자기중심적인 자세와 태도와 가치관을 철저히 내려놓고, 하나님 중심적인 자세로 서게 하는 그 자리로 인도하지는 못합니다.

여기 또 한 가지 살펴볼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회칠한 담은 무너질 거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담이 무너질 때, 부드러운 메시지가 절대로 도움이 되지 못할거라는 겁니다. 왜냐면 하나님 떠난 삶을 오히려 부드러운 메시지로 정당화시켜 주고, 부드러운 메시지로 그들을 포장해 줘버리기 때문에, 삶이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아니고 다만 페인트를 칠한 것에 불과하니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에스겔서 13장11-12절을 보십시오.
“11 그러므로 너는 회칠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그것이 무너지리라 폭우가 내리며 큰 우박덩이가 떨어지며 폭풍이 열파하리니 12 그 담이 무너진즉 혹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것에 칠한 회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겠느냐”

이처럼 회칠한 담은 무너질 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무너질 때, 부드러운 메시지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예레미야 시대에 그 수많은 선지자들과 그 수많은 율법사들과 그 수많은 제사장들이 동일하게 부드러운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평강이라고 회칠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아무리 외쳐도 저들이 듣지 못한 그 가장 주된 이유 중에 하나는 그 부드러운 메시지로 인하여 전체적으로 그들의 눈이 더 가려져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적인 눈이 가려진 것은 자기들의 중심에 탐심 때문에 가려졌으니까 핑계치 못하겠지만 부드러운 메시지가 영향력을 미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회칠한 부드러운 메시지가 하나님이 정작 그 나라에 심판을 보내실 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을 봅니다. 에스겔서 13장 12-14절입니다.
“12 그 담이 무너진즉 혹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것에 칠한 회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겠느냐 13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분노하여 폭풍으로 열파하고 내가 진노하여 폭우를 내리고 분노하여 큰 우박덩이로 훼멸하리라 14 회칠한 담을 내가 이렇게 훼파하여 땅에 넘어뜨리고 그 기초를 드러낼 것이라 담이 무너진즉 너희가 그 가운데서 망하리니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

사실 이런 걸 볼 때에 우리가 중보기도와 관련해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단순히 모여서 그냥 기도한다고 되는 게 아닌 걸 볼 수 있습니다. 지금 교회들이 평양 대 부흥 100주년 기념을 전후하여 많은 교회들이 부흥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어떤 때는 사람들을 기도회로 끌어오기 위해서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 자체가 다 나쁘다. 잘못됐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분들은 다 잘못됐고, 우리들만 옳다. 절대 그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건 그분들이건 누구건 제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기도만 가지고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담 무너진 데를 막아서는 것은 신앙의 본질, 십자가의 복음가운데 서는 것을 말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2000년 기독교 역사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부흥은 그들을 통해서 왔습니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서 부드러운 메시지는 절대로 담을 세우지 못하고 담 무너진 데를 막아서지 못합니다. 그것은 무너지는 담을 페인트로 단장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셔야 합니다.

4. 신앙의 본질에 서서 간절한 기도가 부흥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순절을 부흥의 모델이라고 말합니다. 또 일부에서는 오순절은 구속사적인 사건으로써 반복되지 않는 것인데 어떻게 오순절을 부흥의 모델이라고 하느냐 그건 잘못된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 오순절은 분명히 구속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오순절은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을 구속사적인 사건으로만 보면 저는 그것을 매우 협소하게 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오순절은 구속사적인 사건뿐만 아니라 오순절은 성령세례가 임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니’ 그랬습니다. 성령세례라는 말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순절 날 이후로 예수를 구세주와 주로 영접하는 그 순간에 성령님이 우리 속에 오십니다. 그래서 오순절 날 성령침례(세례)가 임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은 또한 성령 충만의 관점에서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혹은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이 대규모로 임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령 충만의 의미로써의 오순절은 반복되는 겁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때마다 그것이 반복되었습니다. 한 나라에, 한 지역에 때로는 여러 나라에 동시에 부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오순절을 부흥의 모델이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오순절을 부흥의 모델로 볼 때, 여기에 아주 중요한 공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뭐냐면 먼저 예언적인 백성이 준비되고, 그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그리고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먼저 예언적인 백성이 준비되었습니다. 이들이 누구냐?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120명의 성도들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세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할 때, 어떤 때는 수천, 수만 명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결국 마가의 다락방에 남은 것은 120명 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잘못된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보면 하나님 나라를 자기의 전존재로 사는 그러한 사람을 3년 반 만에 120명을 양육한다는 것은 예수님이시니까 가능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일군들을 교회에서 세우려고 한 번 해보세요. 저는 이건 예수님이니까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120명이 준비되지 않았더라면 부흥의 소망도 없습니다. 아무리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셨다고 할지라도 이들이 준비되지 않았더라면 쏟아져 버렸을 겁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올 때마다 반드시 예언적인 백성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준비되지 않으면 부흥의 소망도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부흥에는 예비 단계가 있습니다. 그 예비단계는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바로 그 예언적인 백성이 준비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120명을 보면 그들은 예언적인 백성으로써 신앙의 본질과 십자가의 복음에 선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인데 무슨 십자가의 복음에 선 자들이냐? 십자가 복음은 나중에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되어 진거지 그 당시에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는데 그러는데 맞습니다. 여러분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삶의 한 부분이 뭐냐면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선함을 위해 자기의 선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함만이 예수님이 의지하는 선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16-17절입니다.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이것이 하나님 자원으로 사는 삶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그게 정확하게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예수님에게서 이렇게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삶, 하나님의 자원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는 것을 배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한 사건 후에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로 그를 찾아가 다시 그를 회복시킨 사건을 보시면 베드로는 그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자기 열심히 따랐던 자기 의가 산산조각 나고 그때부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서는 삶을 배워가기 시작합니다. 아직 확실하게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정확하게 그들은 십자가의 복음에 서가는 자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앙의 본질에 선자들이었습니다. 또 하나님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3장 44-46절입니다.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신앙의 본질이 그겁니다. 예수님 혹은 하나님나라가 가장 값진 보화로써 우리의 모든 것을 주고 사는 겁니다. 요즈음 ‘내려놓음’책이 나왔는데, 그분은 서울대와 서울대 대학원 졸업하고 미국까지 가서 공부하고 와서 선교사로 가신 분입니다. 저는 그 책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처음에는 그 책을 대수롭지 않게 봤는데, 오며가며 몇 차례 봤더니 한편으로는 참 귀한 점이 있더라고 하면서 그 얘기를 저한테 해주는 겁니다. 그분은 자기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혹은 어떤 중요한 시점마다 하나님만이 내 유일한 만족인가를 보았다는 겁니다. 그게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게 우리의 모든 것으로 보화를 사는 겁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만족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은 쉽지만 우리가 실제로 그 가운데 서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이론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부흥을 예비하는 자들은 그 가운데 서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씨 뿌리는 비유만 하더라도 좋은 밭이 뭡니까? 예수님 안에 있는 보화를 발견하고 자기들의 모든 것으로 그 보화를 산 자들입니다. 그게 바로 120명입니다. 마가복음 10:28절과 요한복음 6장 68절입니다.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정확하게 신앙의 본질에 선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 같습니다. 신앙의 본질에 그들이 먼저 섰고, 십자가의 복음은 나중에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과 만족이 되는 신앙의 본질이 먼저 옵니다. 왜? 그 가운데 서야 영적분별력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십자가의 복음, 십자가의 능력도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십자가의 복음이 먼저가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이 먼저입니다. 주님만이 유일한 만족되는 자리에 가야 내 의가 철저히 벗겨지고 주님만이 나의 의가 되는 자리가 가능합니다. 그 다음에 이들이 집중적인 기도를 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장 14절입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영어 RSV 성경을 보니까. with one accord 한 마음으로 devoted themselves to prayer, 자신들을 기도에 헌신했다. 기도에 전념했다. 바로 이겁니다. 예언적인 백성이 세워지고,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선 자들이 세워지고, 이들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엘리야처럼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 그 기도, 이것이 합해지게 될 때에 오순절이 임한 겁니다. 제가 미국에서 신학대학원에 있을 때, 택했던 과목 중에 하나가 성령론입니다. 그때 저희가 썼던 교재가 둘인데 그중에 하나가 뭐였냐면 프레드릭 브루너라고 하는 분이 쓴 ‘성령의 신학’이라는 책입니다. 우리나라 장신대 교수님이 번역해서 나왔습니다. 그 프레드릭 브루너가 하이델 베르그에서 박사학위 받으면서 오순절과 은사주의 성령론을 연구해서 그것이 성경적으로 어떠한 문제점이 있는지를 제시함으로써 박사학위 받은 논문을 요약해낸 책입니다. 참고할게 참 많고 참 귀한 책입니다. 거기에서 그분이 뭐라고 얘기를 했냐면 제자들이 간절히 기도한 것은 맞지만 그들이 기도를 했기 때문에 성령이 온게 아니었다. 오순절 날이 이르렀을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임하신거고 하나님의 때에 보내신 거지 그들이 기도했기 때문에 온게 아니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들이 기도했기 때문에 성령이 왔다면 그들이 기도했기 때문에 왔다고 말했을 텐데 그 말이 없다. 하나님의 그 유업은 약속으로 주어진거다. 갈라디아서를 봐라. 우리가 어떤 율법적인 헌신을 통해서 그 대가로 하나님이 약속을 주신 게 아니다. 갈라디아서 3장만 하더라도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당연히 듣고 믿음이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 얘기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말이 맞습니다. 우리가 기도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주신 게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오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부흥을 보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간과한 게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겁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회복과 부흥을 주시되 성경은 뭐라고 말하고 있느냐면,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36장 37절입니다.
“37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또한 누가복음에 뭐라고 표현하고 있냐면, 3장21절입니다.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여기 보시면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립니다. 다른 어느 복음서에도 그 말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11장 13절에도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마태복음에서는 똑같은 것을 말하면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랬는데, 여기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랬습니다. 누가복음 전체가 강조하고 있는 게 뭐냐면,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임하시되 기도의 중요성을 말한 겁니다. 이 말은 바꿔 말해서 우리의 기도 때문에 그러신다. 그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부흥을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보내십니다. 십자가의 공로 때문에 보내십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을 그렇게 하시되 여전히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할지라도 너희가 내게 구하여야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만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렇게 비를 보내주시겠다고 두 차례나 걸쳐서 확인까지 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이 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예언적인 백성들이 예비 되고, 그들이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때에 하나님의 성령이 대규모로 임하시는 것, 그게 부흥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고 십자가의 복음에 서기를 실제로 추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를 붙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하나님의 목적하시고 의도하신바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까지 특별히 이 시대에 제시하고 계시는 회복과 부흥의 유업이 한국의 모든 교회와 열방 가운데 주어지는 그날까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를 붙들고 밤낮으로 하나님께 그 약속을 상기시키며 기도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습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여러분들이 이렇게 나아갈 때에 실제로 가장 먼저 그 은혜를 누가 경험하느냐? 여러분이 경험합니다. 그래서 중보기도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약속하신 하나님의 유업을 저와 여러분 가운데 주시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참으로 기쁨과 감격과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그 복된 삶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