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설교/중보기도
6장. 중보기도와 예언
발의무리
2008. 7. 7. 13:24
6장. 중보기도와 예언
1.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일하십니다.
이 부분은 앞에서 많이 살펴보았습니다. 우선 우리가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은 인간을 통하여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일하실까?”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전에 감리교 목사로서 단독목회를 해야 안수를 받기 때문에 아주 시골교회에 간적이 있었습니다. 처음 제가 7년 동안 섬겼는데 거기는 자자유촌한 마을이고 전도가 그렇게 안 됩니다. 교인이 별로 없는데 제가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서 인사하면 “너 누구냐?”라고 합니다. 새로 온 전도사라고 하면 “수고 많네”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제 또래의 사람들에게 가서 인사하면 인사도 안 받습니다. 얼마나 거절감과 상처가 심한지요. 동네 사람들과 접촉점을 가져 보려고 아이스크림도 사가지고 가면 이상하게 교회에서 사온 아이스크림은 뭐가 묻었는지 사람들이 논 가운데서 일하면서 가까이 다가가면 한번 쳐다보고는 귀찮다는 듯이 더 이상 안 쳐다봅니다. 또 접촉점을 마련하려고 초상집에 가면 부조 가지고 가니까 받아 주기는 하지만 음식을 차려 줄때 딱 혼자만 독상을 주고 아무도 제 옆에 안 옵니다. 그나마 마을에 교인이라도 많으면 좋을 텐데 교인도 별로 많지 않은 상황에서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 내려갔습니다. 그러다가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많이 굿도 하고 점도하고 나가면 곳곳에 멥밥이 있습니다. 이 동네를 어떻게 전도를 해야 하겠는데 제가 전도에 강한 열정과 열망이 있으면 핍박을 받더라도 들어가서 그렇게 하겠는데 거절감이 전도의 열정을 완전히 꺾어버려 못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게 기가 막힌 생각이 났습니다. 그것은 18만 5천의 산헤립 군사도 천사 한명으로 쓸어버리신 하나님께서 천사를 부리는 종으로 우리를 수종들게 하신다고 하셨는데 천사 한명만 보내주십시오. 제가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윗마을부터 아랫마을까지 106가구였으니까 하루에 다섯 가정씩만 가정방문 하면서 밤에 목을 팍팍 밟으면서 “믿을래? 안 믿을래?” 하면 믿는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육일쯤 방문하면 주일날은 틀림없이 나올 것입니다. 질겨도 한 달이면 다 손들고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천사 한명만 보내주시면 어떨까요?” 이런 기도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성경을 보다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라는 구절을 보고 그만두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참 얼마나 좋을까?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추수를 원하시는 주님께서 “추수할 일꾼이 적으니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소서 하라.”라고 구하라고 말하고 있거든요. 왜 구하라고 하실까? 추수의 주인이 되시는 그분이 우리보다 더 추수하기를 원하실 텐데 왜 구하라고 하실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시지요. 그의 나라와 의를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더 원하실 텐데 왜 구하라고 하실까?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중보기도]는 더치 쉬츠라는 분이 쓴 책인데요. 이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 땅에서 인간과 독립적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을 통해서 일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분은 인간과 하나가 되는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그렇게 하셨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 책에서 잘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미 앞부분에서 많이 다루어졌기 때문에 제가 그 부분은 다루지 않겠습니다.
[예수와 하나님 나라]라는 책을 쓴 풀러 신학교의 교수님이었던 죠지 엘든 래드는 그분이 쓴 책에 보니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을 통하여 일하시는가에 대하여 논쟁하려면 그것이 너무나 큰 문제이기에 그것을 알려고 하지 말고 단순히 그것을 받아들이라”라고 권면합니다.
출애굽기 3장 7절 이하를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백성의 고통을 보고 그들의 우고를 알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내가 내려왔다.” 하나님께서 내려오셨다는 것이지요. 보고 듣고 알고 내려오셨다. 그러면서 모세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내려오신 이유는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아름답고 광대한 땅, 가나안 일곱 족속이 거하는 그 땅에 데리고 가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려오셨으면 하나님이 가시지 왜 모세를 보내시려 하십니까? 성경에서 제가 볼 때 하나님께서 참 많이 인내하시는 장면이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처음에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의중을 보이시고 모세가 못 간다고 하니까 구체적으로 손을 넣어보아라, 빼보아라, 지팡이를 던져봐라, 손을 내밀어 잡아봐라, 많이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못 간다고 하니까 “내가 네 형 아론을 대변인으로 붙이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동역자를 통하여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떤 글에서 보니까 어떤 신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쓰시지 않으시고는 일하신 적이 없다.” 또 열왕기상 18장 1절에도 보면 “내가 지면에 비를 내리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면에 비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하시면 당신의 뜻대로 일하시면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하시려고 하시는 모양이구나. 그분은 전능하고 능하시니까 우리는 그분이 행하시도록 ‘열중 쉬어’ 하고 뒤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18장 뒷부분에 가면 엘리야는 무릎사이에 머리를 집어넣고 기도를 했습니다. 사실 얼마나 절박하게 기도했을까요.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일곱 번 기도했습니다. 그 모습은 그 당시 해산하는 여인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절박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5장 17-18절에 보니까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비가오지 아니하고 저가 기도한즉 비가 내렸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여기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성경에 보면 엘리야의 기도가 비를 내리게 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 가운데 매우 중요한 부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기로 작정하셨다. 우리는 이 부분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2]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하여 그 백성들에게 계시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역자로 부르실 때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자신의 목적과 길을 계시하십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이 쓴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에 보면 그분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하실 때 세 가지를 계시하신다.”
①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심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다.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신뢰하여 서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론적인 사실에 능력이 있지 않습니다. 오늘 제가 찬양하는 가운데 있다가 끝날 때 그 부분을 나누도록 하나님이 초청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에 친밀한 교제로 우리를 초청하신다는 감동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단어만 해도 추상적입니다.
사실 제가 고아원에 가서 사역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집회를 인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참 함께하셨습니다. 그 고아원 보모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비추어지니까 막 의자에게 굴러 떨어지며 울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눈만 껌벅껌벅하며 가만히 있었습니다. 여자아이들만 있는 고아원이었거든요. 고등학생까지 있었고 고등학교 졸업한 아이들도 몇 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전혀 비추어짐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너무 고민스러워 가서 기도하면서 “하나님, 뭐가 문제입니까? 왜 저들이 모릅니까?”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사랑에 대한 이해의 개념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런 것 같았습니다. 어렸을 때 보모들 같은 사람들이 와서 “사랑해. 사랑해.”하며 마음을 빼앗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 가야돼”하고 떠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옵니다. 그리고 똑같은 경험을 합니다. 그 아이들의 생각에 “아 사랑은 어느 날 떠나는 것이구나. 떠나면 무척 아픈 것이구나.” 그러면서 사랑한다고 말해도 올인하지 않습니다. 한쪽 발만 주었다가 빠져 나가면 다시 걷어 들이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개념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잘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가 된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 하나님을 친밀한 교제 안에 온전히 신뢰하며 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② 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하심
두 번째 하나님의 목적을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나님의 목적에 초청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의중을 보이셔서 그 의도 가운데 서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목적에 우리를 헌신하도록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내가 또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 내가 가로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내가 또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 말씀을 하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너 이일을 좀 하면 어떻겠니?” 하는 초청이 아닙니까?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가 그 초청을 받을 때 “예, 쟤가 저기 있나이다. 쟤를 보내소서.” 이렇게 말하기가 쉽습니다. 아까 모세에게 보이신 것처럼 그 목적을 보이셔서 그 일에 우리를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길을 계시하심
그 다음에 하나님 자신의 길을 계시하십니다. 그 목적을 쫓아갈 때 우리의 방법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특별히 아모스 3장 7절을 찾아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그 일을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과 의중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신약성경에도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5절을 찾아보십시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에게 또는 자녀들에게 자신의 의중을 알리십니다. 주님의 백성인 우리를 친구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버지께로 들은 것은 다 너희에게 알린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알린다는 말은 ‘그노리조’라는 헬라어 동사인데 ‘사람들에게 널리 선포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중을 알리셔서 그 종들에게 선포하게 하시고 또 사역을 감당하게 하시고 또 에베소서 3장 10절 같은 곳에 보면 정사와 권세들에게 이러한 비밀을 선포하게 하심으로 영적전쟁을 하게 하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목적과 의중과 길을 따라서 나아가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가 개인적으로 아는 이 모든 것이 우리 가운데 있을 때 우리 삶에 놀라운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우리 삶에 필수라고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2. 예언과 중보기도
1] 예언과 중보기도와 관련해서 중보기도가 바로 예언을, 하나님이 주신 감동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중과 의도를 계시하실 때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중보 기도하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보기도 할 때 그것을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기도는 일한다, 특별히 중보기도는 일한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어떤 책에 보면 중보기도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물질도 없고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도 없어. 내가 할 일은 중보기도밖에 없어. 중보기도라도 해야지.”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하여 그 분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소총도 없어. 수류탄도 없어. 나는 대포도 없어. 나는 대륙 간 탄도 미사일만 가지고 있을 뿐이야.”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쏘아대는 이것이 중보기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미리주신 것들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중보기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중보기도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예언과 중보기도에 있어서 첫 번째로 우리는 이미 약속으로 주어진 성경에 기초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그 약속에 기초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예언과 중보기도라고 하면 성경은 뒤에 두고 하나님이 주신 감동만 따라 기도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우리가 제일 먼저 기본적으로 성경을 붙들고 그 말씀에 기초해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가 나누는 방향의 중보기도로 나가게 하신 시작점으로 어느 날 성경을 볼 때 마태복음 16장의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말씀이 들어오면서 특별히 오늘날 교회의 현실과 제가 섬기는 교회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초대교회의 모습과 너무나 멀어져 있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민하는 가운데 마태복음 16장의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님의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는데 오늘날 율법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 신앙이 팽배한 이러한 상태는 무엇인가? 죄를 이길 능력이 없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사들이 교회 가운데 거의 나타나지 않는 이러한 상태는 무엇인가? 초대교회의 능하신 역사가 어디 있는가? 그런 갈증 속에서 사실 이 구절들을 붙잡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위한 하나님의 소원과 열정을 제 마음에 많이 부어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다니엘은 B.C. 666년에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오랜 시간을 지낸 후 다니엘서 9장에 보면 성경을 읽다가 70년 만에 돌아오게 되리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보고 그는 그 약속을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때가되면 이루시겠지.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까 이루시겠지.”라는 생각으로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가 기도했기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의 기도는 매우 중요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약속을 보면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기들의 처지를 인식하고 중보기도를 합니다. 금식하며 21일 동안, 하나님의 응답이 오기까지 집중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보기도와 예언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은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약속된 말씀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죠지 뮬러는 그의 기도의 삶에서 항상 성경책을 펴놓고 기도했다고 하고, 설교의 왕 챨스 스펄젼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께 간구했고, 이 엠 바운즈는 그 말씀으로 인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기도를 강조하고 앤드류 머레이는 매일 말씀을 많이 읽으며 기도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에 기초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면 기록된 말씀에 근거하여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친밀함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친밀함에 기초하지 않으면, 시대를 분별하는 안목이 잘 안 주어집니다. 약속을 붙잡아도 그 약속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비추어지고 하나님이 선명하게 인식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그 약속을 붙들고 친밀함 가운데 중보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 같이 안정적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어떻게 그 약속을 붙잡고 그 약속을 따라 갑자기 획기적으로 삶을 전환하고 금식하며 기도의 자리로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가 아무 생각 없이 관직에 있다가 “이 나라가 빨리 회복되어야 될 텐데.”하고 생각하는 과정 가운데 있다가 이런 약속을 붙잡았으면 어쩌면 상당히 기쁨을 가지고 “주님이 이 일을 이루시겠구나. 주님이 빨리 이루셔야 될 텐데."라고 하며 끝났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그는 네 번의 큰 위기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는 위기 때마다 항상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리를 선택하는 사람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곧 생명임을 인식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약속하신 그대로의 하나님,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임을 알았기에 그 약속에 근거하여 그 삶을 조정하고 전환하는 자리에 섰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약속을 보지만,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에 따라 자신의 삶이 행동으로까지 옮겨지지 않으면 그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다면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삶을 조정하는 자리에까지 안 가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심각한 문제는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내가 기도했더니 이런 약속을 주셨다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따라 자기는 삶을 조정하지 않습니다. 왜?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곧 생명인 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곧 능력인 것을 알지 못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의 하나님이심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다면 삶을 전환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입술을 보지 않고 행동을 보십니다. 사실 우리는 믿는 바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믿는 바대로 살고 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때 그 약속을 붙잡으면 그리고 그것이 내게 주신, 오늘날 이 시대를 위한, 교회를 위한,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선명하게 보인다면 우리는 그것을 따라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입술로만 이야기하고 실제로는 그 자리에 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이 주셨다고 다만 말할 뿐입니다. 여기 아주 중요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중요합니다. 매순간 마다 하나님을 인식하고 매일 아침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의 보좌 앞에서 우리의 초점이 주님을 주시하여 보고 그분께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교회에서 설교하실 때도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성에 기초하지 못했는데 죄를 짓는 것에서 돌이키지 않는다고 책망하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나가든지 아니면 마음속으로 타협해 버리든지. 잘 안변합니다. 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잘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조정은 목사님의 설교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인데 그 하나님이 인식되지 않는데 어떻게 바뀔 수 있습니까?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이 개인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신앙의 본질에 서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서도록 이끌어 주고 그러는 가운데 스스로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돌이키도록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거기에 기초되지 않고 예를 들어 강력한 메시지만 선포하고 한 번 때리고 두 번 때리고 세 번 때리면 ”여기만 교회인가?“하고 나갑니다. 그러기 쉽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도록, 각자 개인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서도록, 하나님의 주권 앞에 서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가운데 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고 일해가십니다.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고 우리가 의도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그 일들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가 중보 할 때 예언의 기름부음을 주시고 예언을 따라 기도하게 하십니다.
① 성령님은 중보기도를 도우시고 친히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리라.”라고 하셨는데 그 보혜사가 우리 안에 계십니다. 로마서 8장 26-2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여기에 보면 우리에게 중보기도의 동기를 일으키시는 분, 우리에게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신 것을 말합니다. 여기 보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 연약합니까? 여기 문맥을 보면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연약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고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기력하고 연약합니다. 그 때 성령님께서 함께 붙들어 주심으로 인도해주시고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보이십니다. 이때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삶을 조정하게 하시고 때로는 깨닫게 하시고 때로는 삶을 전환하게 하시고 때로는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하게 하시고 그 일을 위해 함께 기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 1-3절을 보십시오.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2절에 보니까 주를 섬겨 금식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섬겼다는 말은 예배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예배는 다윗의 장막과 같은 예배입니다. 그들이 경배 찬양을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목적이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원하고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되 금식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예언의 기름부음이 누군가에게 부어져서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 당시 안디옥 교회의 담임목사는 바나바였고 수석 부목사는 바울이었습니다. 그런데 따로 세워서 선교사로 파송하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성령님께서 압도하여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담임목사, 수석 부목사가 선교사로 가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언의 기름부음을 통해 말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 보면 “함께 금식하며 기도했다.”라고 말씀합니다. 금식하며 기도하며 먼저 분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두 사람을 안수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교회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교회가 이렇게 함께 연합하여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당신의 의도와 의중을 보이시고 그 뜻을 알게 하실 때 그 뜻을 따라 교회가 기꺼이 그 삶을 조정하여 순복하고 모든 지체들이 함께 분별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영분별이 중요한데 영분별의 은사를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 중에 예언과 방언의 은사 사이에 두셨습니다. 원래 분별의 은사로는 지식의 은사, 지혜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앞부분에서 세 가지 은사 중 두 가지 은사만을 말하고 뒤에 가서 영분별의 은사가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와 방언의 은사 사이에 두셨습니다. 이것은 제가 볼 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 있는 방언은 일반적인 방언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방언도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는데 ‘예언으로서의 방언’과 ‘개인적인 기도로서의 방언’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향하는 예언적인 방언에는 반드시 분별이 필요하고 예언에도 반드시 분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고전14:29)”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모여서 그들이 함께 분변하는 일들을 하게 되었고 분변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선명히 깨닫게 해주시고 비추어 가시는 가운데 그 일들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이 어제도 보셨지만 다윗의 장막에는 신령한 노래로 화답했다고 했습니다. 즉 예언적인 기름부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다윗의 장막과 같은 기도가 중요한 것이 그러한 때에 예언적인 기름부음이 가장 풍부합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는가 하면 구약의 시편이 다윗의 시대에 가장 많이 써졌습니다. 다윗과 그의 찬양인도자, 예배 인도자였던 아삽, 헤만 같은 사람들을 통해 쓰인 시편이 시편전체의 절반 이상입니다. 많은 예언적인 기름부음이 함께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중보기도 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해 가시는 것을 경험해갈 수 있습니다.
② 중보기도 할 때 하나님께서 예언의 기름부음을 부어주십니다.
신디 제이콥스는 그의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중보는 정기적으로 예언할 자들을 하나님께서 훈련시키는 훈련장이다.” 그러니까 예언 사역자로 세우시기 위해 중보기도로 훈련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도실은 예언자가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을 배우는 곳이다. 모든 중보자가 예언자는 아니지만 그러나 모든 예언자는 중보기도자이다.” 중보기도로부터 예언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중보 기도자가 예언자는 아니지만 자라가는 중에 중보 기도자가 예언자로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보기도는 단순한 중보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이번에 배운 것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리고, 자신의 의제를 내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되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내려지고 다만 하나님 한분으로만 만족하는 하나님의 뜻 앞에 기꺼이 순복하기 원하는 그런 자세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가운데 나아가는 중보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언의 기름부음을 부으십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이 거기에서 자라게 됩니다. 모든 중보 기도자가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에 보면 “너희가 예언을 하려고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 모두가 예언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많은 선지자들이 중보자였던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다니엘, 에스겔, 예레미야 이런 분들이 다 가슴을 찢으며 애통하며 중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와 심지어 아브라함도 소돔과 고모라 성을 위해 중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안나와 시므온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입니다.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우선 그에게 예언적인 기름부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기도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거룩한 소원이 그 속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는 바로 메시야가 오는 것입니다. 그는 예언적인 기름부음으로 그 위로를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가 그런 소원을 가지고 기도했고 기도하는 가운데 그 약속을 받았고 그리고 그 약속이 오기까지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그러면서 34절 중반 이하에 보면,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의 마음을 들추어내십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죄가 드러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의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 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고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의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 말씀을 듣고 굉장히 화가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생각을 들추어내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는 의롭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 앞에서 그들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적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칼로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그는 예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보기도자는 하나님께서 예언의 기름부음을 부으십니다. 그 뒤에 나오는 안나를 보십시오.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그런데 이 안나를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예언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성전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중보기도자였습니다. 아주 가난하고 능력이 없는 그러나 평생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중보기도 할 때 그에게 예언의 기름부음이 임하였고 그의 삶에 놀라운 능력이 있는 역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중보기도 할 때 우리 가운데 예언의 기름부음을 부으셔서 방향을 전환하게도 하시고, 깨닫게도 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는 매우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저희가 몇 주 전에 교회 부지를 구입하고 교회 건축도 생각하고 그 전보다는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저는 여기 저기 계속 집회를 다니느라 새벽예배를 잘 못하고 저희 부목사님이 많이 하시는 편입니다. 한번은 추석 지난 바로 다음 주인데 새벽기도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새벽기도가 참 좋은 점은 하나님과 개인적인 친밀한 교제를 갖는 아주 좋은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담을 가지고 새벽기도를 하다가 추석 주간 한 3일 동안 가족들과 만나며 새벽기도를 못했더니 그 다음날 일어나기가 아주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못 일어나고 금요일 새벽이었습니다. 자는데 시계가 막 울어서 시계를 누르고 또 잤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게 또렷하게 “내가 깨어 기도하라고 하는데 왜 기도하지 않느냐, 나를 찾는 자가 별로 없다.” 제가 그 소리에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제 아내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그대로 옷을 주워 입고 머리빗을 생각도 않고 예배당으로 뛰어 갔습니다. 딱 들어갔더니 5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말씀을 나누고 엎드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날 그 시간을 기점으로 보여주신 것이 제가 섬기는 교회에 주신 비전, 또는 그 방향성에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을 선명하게 보이셨습니다.
그때 저희가 창세기를 읽었는데 33-34장을 읽었습니다. 기도하는데 야곱의 일생을 갑자기 필름처럼 보이십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자기 아버지 집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갈 때 하나님께서 “네가 이 땅에 반드시 돌아오리라. 돌아올 때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가지고 야곱이 외삼촌 집에서 20년 동안 지내며 그 약속을 잊어버립니다. 그가 부자가 되고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돌아오다가 생각하니까 형님과의 큰 갈등의 문제가 생각납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400명의 군사를 끌고 다가오는 형님의 문제를 어떻게 피해보려고 얍복강에서 씨름합니다. 그것을 통해 그는 두 가지 경험을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경험을 하고 또 하나는 형님과의 원한을 해결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어떻게 됩니까? 놀라운 축복을 경험한 후 세겜 족속에게 땅을 사고 집을 마련합니다. 에서가 같이 가자고 할 때 따라가겠다고 하고는 거기에 머물게 됩니다. 그가 가야할 곳은 벧엘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이 있는 곳, 그가 거기서 서원한 곳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은혜받은 후에 길을 잃어버리기 쉬운 것 같습니다. 저희가 딱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 하시니까 딱 길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로 안 가고 눌러 앉았습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가지 않습니다. 그의 인생의 문제가 이제 해결되었기에 처음으로 자기 가족끼리 편안하게 아무 문제없이 그 땅에서 땅을 사가지고 잘 살아볼 생각으로 야곱이 거기에 땅을 사고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해 우리를 만듭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디나가 세겜에서 강간을 당하고 수치를 경험합니다. 엄청나게 어려움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창세기 28장에서 “네가 이 땅에 돌아올 때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하나님이 함께 안 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건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거기서 길을 잃어버리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분별력을 완전히 상실합니다. 그러니까 아들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할례라는 의식을 빙자해서 그 사람들에게 큰 범죄를 저지릅니다. 그 결과로 야곱은 더 심각한 지경에 몰립니다. “이제 우리는 다 죽게 되었다. 이 사람들에게 우리가 냄새를 풍겼도다.” 이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한 마디를 주십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이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야곱은 분주해 집니다. 자기가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다 압니다. 그의 삶이 획기적으로 전환됩니다. 그리고 그가 벧엘에 올라갑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야곱의 일생은 창세기 28장부터 35장으로 끝납니다. 성경에서 더 이상 그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의 일생의 비전,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그 목적지로 이끄는데 그 목적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때 저희 교회는 주신 비전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길을 잃어버리고 땅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저희 교회 가운데 여러 가지 문제들이 일어나면서 그 문제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보게 하시고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수치를 당하는가?”하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제가 이 부분은 안 나누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같아서 나누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듣고 깨달을 분이 있으신가 싶어서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최종 목적까지 우리는 머무를 수 없다. 주저앉아서는 안된다. 줄기차게 가야한다. 길을 잃으면 하나님을 잃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같이 하나님의 목적을 잃으면 하나님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문제가 없으면 잘 되어가는 것 같지만 문제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일어나 벧엘로 가라.”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우상을 제하고 벧엘로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자에게 중보기도의 사명을 주시고 중보자들에게 예언의 기름부음을 부으십니다. 당신의 의중을 알려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고 그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일만 마디 말하는 것보다 주님이 주신 한마디 기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3. 예언적 중보기도
아까는 예언과 중보기도라면 이번에는 예언적인 중보기도라고 말을 붙였습니다. 제가 단계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예언적인 중보기도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예언을 따라 기도하면 처음에 성령님이 말씀을 비추어 주심을 따라 어떻게 가야할지 하는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다보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감동을 곧잘 받게 되고 그 감동을 따라 기도하게 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렇게 점점 기도하는 가운데 더 민감하게 될 때 성령님께서 우리가 기도하는 시간 외에도 우리에게 부담을 주고 성령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훨씬 넓은 사역을 감당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평상시에도 우리가 성령님께서 지금 어떤 일을 하기 원하시는지 그러한 예언적인 기름부음을 통해서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게 됩니다. 세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예언적인 중보기도의 정의
예언적인 중보기도란 무엇인가? 예언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페테이아’라는 말인데 하나님의 마음과 의중을 미리 말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중보기도는 헬라어로 ‘엔톡시스’라는 말로 “대화하기 위해 만나다. 중재하기 위해 말하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예언적인 중보기도의 뜻은 이와 같습니다. 영적 대화를 위해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고 그리고 중보기도의 의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구하고 만나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의중과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 대화를 위해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이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중보기도의 의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을 구하고 만나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다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자연상태에서는 사전지식이 없는, 알지 못하는 어떤 상태나 환경을 성령님께서 기도하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셔서 기도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일들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것을 기도합니다.
2] 예언적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언적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때와 함께 갑니다. “때”라는 단어는 헬라어에 보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두 가지가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규칙적인 시간을 의미한다면 카이로스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을 말합니다. 농부는 때에 따라 일합니다. 예언적인 기도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려는,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행하시는 카이로스의 시간에 맞추어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감동을 따라 기도하는 것이 예언적인 중보기도입니다. 적기에 중보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바른 때에, 바른 시간에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카이로스의 시간에, 적기에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런 경험을 많이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해 기도한 것이 언제입니까? 사단의 시험이 올 때였습니다. 이것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베드로를 공격하려고 할 때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그의 믿음은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경험을 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제일 먼저 중보기도를 하게 되는 과정이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서 ‘소원 없는 기도’를 한다는 표현을 합니다. 내 소원, 내 의제가 없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서기를 원하고, 기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되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을 내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고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내가 순복하기를 원하고,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찾는 기도입니다. 어떤 때는 가만히 앉아있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찬양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통 제가 시간을 많이 갖습니다. 하루에 제가 세 번을 기도할 수 있다면 첫 번째 시간에 그렇게 기도합니다. 두 번째 시간에는 보통 다른 중보기도를 하게 되고 세 번째 시간에는 교회를 위한 기도를 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제가 기도할 시간이 하루에 한번밖에 없다고 하면 이 부분을 주로 기도했습니다. 지금도 제가 많은 경우에 초점은 거기에 둡니다. 그런데 이것이 중보기도로 발전합니다. 소원이 없는 기도, 하나님 자신이 목적인 기도,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알기 원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다 보니까 어떤 순간에는 어떤 사람의 얼굴이 확 떠오르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어떤 교회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어떤 얼굴이 떠오를 때 처음에는 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훼방하는 것은 떠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왔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겠습니까? 그것은 중보기도 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부분을 잘 몰랐습니다. “왜 오늘은 이렇게 혼돈이 오지? 오늘은 기도가 잘 안되네, 이것은 나중에 기도해야지.” 하고 몰아내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점점 하나님께서 이 분을 위해 기도하도록 초청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어떤 선교사님이 떠오릅니다. 아! 이 선교사님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나님께서 초청하시는구나!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번은 선교사님을 위해 몇 가지 감동을 주시며 기도하라고 하셔서 절박하게 기도하는데 전화해보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화했더니 정확하게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상황, 몇 가지 주신 감동을 나누었더니 그분이 그렇게 서심으로 그 문제가 딱 해결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분이 어떻게 알고 전화했느냐고 몇 번이나 물었습니다. 저는 원래 그분을 위해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일을 잘 못합니다.
그런 분들이 떠오를 때 마다 그때그때 기도하면서 반복되니까 점점 알게 되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기도를 통해 일하시는구나, 중보기도하게 하시는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어떤 때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의중과 임재 가운데 있게 될 때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위해 기도할까요? 하나님 어디서 일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오늘 제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제가 과거에는 시골교회 있을 때는 시간이 참 많았고 기도할 시간이 참 많이 있어서 아침마다 일어나서 기도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저의 집이 과수원이었거든요. 그런데 과수원에 일하는 분이 계셨어요. 그런데 그분이 아침마다 저의 아버지에게 식사하면서 “오늘 어떻게 하기를 원하세요? 무슨 일 하기를 원하세요?” 하고 물어봅니다. 제가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 종은 아버지에게 물어야 돼. 그래서 아버지에게 자꾸 물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어떤 일을 하기 원하십니까?” 이렇게 물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비추어 주시고 알게 하시고 그래서 제가 전도도 하고 그랬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어디 가서 전도하도록 말씀하시면 순종하고 나아갈 때, 전도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일을 경험했습니다. 이렇게 감동을 따라 점점 성령님께서 기도를 압도하고 인도해 나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중보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의제를 가지고 나가지 않아도 성령님께서 그때그때 마다 말하게 하시고 나누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셔서 그 일들을 이루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일들을 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더치 쉬츠의 책에 보면 나온 이야기인데 과테말라에서 선교지로 가다가 금요일 날 도착해서 과테말라를 거처 토요일 날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테말라에서 비행기가 정시에 안 뜨는 겁니다. 그래서 왜 안 뜨냐고 하니까, 오늘 조종사가 없어서 못 떠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할까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빨리 떠나야 한다는 부담감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들은 체도 안합니다. 세 시간동안 따지며 이야기 했더니 그 중 한 사람이 성질을 내며 “갑시다. 빨리 타요.”하고 출발했습니다. 세 시간동안 논쟁하고 출발했는데 그날 저녁에 34초 동안 지진이 일어나 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못 떠났더라면 묵었을 호텔은 완전히 폭삭 무너졌습니다. 돌아와서 미국의 오하이오 주에 있는 린나라는 자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자매가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마음에 기도의 부담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세 시간 기도했는데, 그분들이 논쟁을 끝낼 때까지 세 시간동안 기도했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신나지 않으세요. 기대되지 않습니까?
어느 날 부흥교회 송희자 사모님이 제게 아침에 전화를 하셔서 “어제 밤 제가 두시에 일어나 기도했는데 별일 없었습니까?”라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날 엄청 몸이 아팠고 영적으로 힘이 빠져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침에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괜찮고 마음도 편안해 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모님 전화를 받았더니 그 전날 사모님을 새벽 두시에 깨우셔서 저를 위해 기도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중보기도자를 통해 그런 일들을 이루게 하십니다. 너무나 신나는 일입니다.
제가 구로 봉덕교회 집회를 갔었는데 그때 리더들이 부흥집회에 반대해서 중직들이 집회에 많이 안 참석했습니다. 그래서 절반밖에 안와서 분위기가 썰렁하고 엄청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화요일 저녁부터 집회했었는데 첫날에는 목사님들도 와서 같이 집회했는데 수요일 날에는 목사님들도 더구나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수요일 저녁에는 혼자하려면 진짜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에게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그 꿈은 자기가 학생으로서 누군가를 전도해서 데려갔는데 학교의 리더가 학교 나와야 한다고 해서 그 아이를 전도하려고 그렇게 기도하다가 깨었답니다. 깨어서 무슨 꿈인가 생각하다 보니까 그 교회에 대한 꿈같았답니다. 정확하게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아내가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교회적으로도 기도하게 했답니다. 그런데 너무나 놀라운 사실은 수요일 날 하나님께서 정말 함께 하시고 압도해 가셨습니다. 그러더니 수요일 밤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말을 듣고 목요일 날에는 사람들이 다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보기도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도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이러한 일들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많이 놓칩니다. 제가 실패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러 번이 있는데 그 중 한번은 저희 교회건축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땅을 찾으라고 하셔서 부지런히 다녔는데 못 찾았습니다. 그런데 강요한 목사님이 전화해서 하나님께서 토지공사 같은 곳을 살펴보라고 하시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토지공사 같은 곳에는 없을 텐데”라고 생각하여 조금 살펴보고는 주의 깊게 안 들었고 놓쳤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저희가 산 땅이 토지공사 땅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샀느냐 하면 종교부지가 나왔는데 다른 교회가 이것을 받아가지고 감당을 못하니까 내놓게 되어 저희가 받았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금 지내놓고 보니까 그 땅이 원래 우리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서울 예능교회에 DTS 인도하러 가게 되었는데 비행기에서 내리니까 문자 메시지가 들어왔습니다. “좋은 땅 있음 444평 종교부지임” 그래서 제가 전화했더니 좋은 것 같아서 저희 교회 분을 가보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집사님이 가보고 “목사님, 제가 그것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좋은 땅을 가까이 두셨는지 몰랐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토요일 날 내려가서 보았더니 정말 좋았습니다. 6차선 도로 옆에 공원을 끼고 있는 아주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너무나 신났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분이 여러 분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답니다. 그런데 문자 메시지 받고 전화한 사람이 저밖에 없었답니다. 그래서 다른 데 물어보았더니 전혀 받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게만 문자 메시지가 온 것입니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때 목사님을 통해 주신 감동 시기에 그분들이 땅을 받았습니다. 그분들은 그대로 저희에게 넘겼는데 그 사이에 세금이 붙었습니다. 그때 제가 주의하지 못함으로 그 세금을 더 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 개인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절박하게 회개하고 감동을 소홀히 한 것을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중보자들을 통해 주시는 감동을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많이 놓칠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을 우리가 예민함을 가지고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3] 때로는 예언적인 행동으로 나가기도 합니다.
이것이 예언적인 행동으로까지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예언적인 기름 부으심이 예언적인 행동으로까지 나가기도 합니다. 이것이 어떤 때는 이해하기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에게 예언적인 행동을 하게 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내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적인 행동입니다. 또 여리고 성을 돌게 하신 것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에 대한 믿음의 행동입니다. 예언적인 행동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기도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고 그 감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미리 우리에게 행동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중요한 말은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나님의 목적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행동하실 일에 있어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행동하고 움직일 때 하나님께서 당신 사이즈의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모세가 르비딤에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한 것도 예언적인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고,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모세가 손을 든 것도 예언적인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쟁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길까요? 2002년 월드컵 때 어떤 분들은 손을 들고 끝날 때까지 기도한 분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영적전쟁만 해도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법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영적전쟁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리고성을 돈 것처럼 어떤 성을 돌면 능력이 나타나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하신 방법 중에 성을 돌도록 하신 것은 여리고 한번입니다. 그 다음에 아이성은 아이성대로 지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영적전쟁에서 핵심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방법에 있지도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서 승패를 경험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기초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방법을 배우려고, 기술을 배우려고 합니다. 사실 기술이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능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길을 따라갈 때, 그렇게 나갈 때 하나님께서 주신 처방이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마라의 쓴 물 앞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 쓴 물을 처리하기 위하여 나무 하나를 꺾어서 던지라고 하십니다. 그 나무를 던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그런 부분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인간의 방법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께 그 처방이 있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해결책이고 해답인 이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중보기도 하다보면 그러한 감동을 주시고 그렇게 나갈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가정(Every Home for Christ)’라는 단체의 총재였던 딕 이스트만은 하나님께서 그를 어느 날 베를린으로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강한 감동을 주시기를 “나는 네가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 장벽으로 날아가기 원한다. 그리고 그 위에 손을 얹고 이 다섯 마디의 말을 외치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무너져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분은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가서 다섯 마디를 외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그분이 기도했다고 장벽이 무너졌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감동을 따라 그분은 순종했고 그러한 일들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마른 뼈를 향해 외치라고 말했고 외치는 순간 그러한 일들이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또 제가 한 예를 소개하겠습니다. 신디 제이콥스의 예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성횃불회의 한 팀이 중보 할 목적을 가지고 러시아로 갔고 그때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예언적인 행동을 수행하라는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여기저기 버스를 타고 역사적인 현장으로 인도하는 가운데 공산주의적 가르침의 요새였던 모스크바 국립대학에 머무르게 되고 학교 건물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을 때 친구의 꿈이 생각났답니다. 그는 사영리 책을 가지고 여기가 친구인 베스가 꿈꾼 것을 행할 장소라는 것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뛰어가서 안내인이 보지 못하게 하고 그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언적인 행동을 실행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은폐시켜줄 나무를 찾기 위해서 둘러보았다. 우리는 그날 붉은 광장에서 KGB요원임이 분명한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너무 빨리 감옥 사역을 하고 싶지 않았던 우리들은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은폐된 장소를 발견하고는 거기다 사영리를 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학을 가리키며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이 소책자로부터 돋아나온 씨앗이 복음전도학교로 자랄 것이며 이곳에서 신학이 가르쳐질지어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빌리 그래햄 목사님이 그곳에 복음전도학교를 세우고 나중에 그곳에 신학교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예언적인 행동들을 통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 행동들은 중보적인 성격을 가진다. 실제적으로 그것들은 중보의 행위라고 불릴 수도 있다. 어떤 일들은 그것이 왜 일어났는지 분명한 이유를 찾기 힘든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예언적 행동을 실행한 순종과 복음전도학교가 세워진 것 사이에 상호관계를 입증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중보적인 예언적인 행동을 실행하라고 말씀하시고 그 결과로 그분이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성경 안에서 거듭 거듭 보게 된다.” 예언적인 중보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일을 이루실 수 있음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무수히 보게 되고 그러한 일들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 있던 죽청교회에서 교회 바로 밑에 한 집이 무당이었습니다. 위에 있는 초가집에서 하다가 손님이 많이 오니까 밑에다 200평 큰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굿을 계속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자존심이 너무 상했습니다. 위에는 교회, 밑에는 점쟁이. 너무 너무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대부분의 기도하는 분에게 중보해달라고 기도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한편으로는 “내가 왜 이 마을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쨌든 집중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저희 교회에 감나무가 있는데 그 감나무에 걸터앉으면 그 집 마당이 보입니다. 거기 앉아서 손을 들고 기도하기도 하고 집중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데 그 집 담벼락에 손을 얹고 기도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새벽기도 시간에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올라오는 모든 분들에게 새벽기도에 올라오면서 담벼락에 손을 대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저도 내려갈 때마다 담벼락에 손을 대고 “주님, 안되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 권사님 한분은 어디서 들었는지 기름을 바르면서 기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집에서 새벽기도 나올 때 식용유를 찍어서 그 집 대문에 십자가를 그리며 “안 되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나중에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현재 그 교회 집사입니다. 그 집 대문이 하얀 철 대문인데 나중에 먼지가 끼니까 그 대문에 무수히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분이 돌아오는 과정 중에 진짜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분이 결정적으로 돌아온 날 자기가 공을 드려야할 4시에 못 일어나고 깜박 잠이 들었는데 몸이 너무 너무 아픈데 북쪽하늘에서 누가 내려와서 자기 엉덩이에 주사를 놔주며 자기를 치료해 주더랍니다. 그런데 그날 누가 가서 전도해서 교회에 올라왔습니다. 그분이 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 놀라시냐고 했더니 북쪽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 저였답니다. 그분이 “아! 하나님이 날 부르셨구나”하고 그날 즉각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것을 다 치웠습니다.
그 마을 입구에 정자나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정자나무는 좀 용한가 봐요. 왜냐하면 점쟁이 되려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얼마나 굿을 하는지요. 그래서 어떤 때는 산에 닭이 돌아다니거든요. 저는 모르고 “왠 닭이 길을 잃었나?”했더니 사람들이 굿하고 산에다 닭을 놓아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희 아들 녀석은 어느 날 나갔다 오더니 옛날 둥글둥글한 사탕을 잔뜩 주워왔어요. 그래서 어디서 주워왔냐고 했더니 그 정자나무 밑에서 주워 왔대요. 그런데 어쨌든 제가 참 많이 기도했습니다. 이 마을에서 저것을 꺾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지나가면서, 차타고 가면서, 걸어가면서 “예수 이름으로 넘어져라, 무너져라.”라고 엄청나게 많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안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나온 지 일 년쯤 뒤에 태풍이 불어 그 정자나무가 무너졌습니다. 사실 오래된 정자나무가 넘어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는 점쟁이들이 안 온답니다. “별 능력이 없구나.” 하고 생각해서 안 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그러한 선포를 통하여 일하시고 또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4. 예언적 중보기도를 위한 두 가지 자세
제가 이 부분과 관련하여 두 가지 자세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친밀함입니다. 이것은 어제 강조했고 계속 우리에게 핵심이기 때문에 제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시편91편 1절에 보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거한다’는 말은 ‘야솨브’로 지속적으로 거한다는 뜻입니다. 잠깐 있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존자와의 친밀한 교제 안에 있는 자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늘아래 거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뒤에 나오는 거한다는 말은 밤을 지새운다는 말입니다.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는 자를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그 안에서 밤새 평안함을 경험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알기 원하고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열망과 그분의 목적과 길을 따르기를 결단하는 자세로 우리가 설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하지 말고, 사역하지 말고, 아들로 주님 앞에 서는 것이, 내 모습 그대로 서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실 제가 어제 기도하면서 느낀 것은 많은 우리 목사님들이 사역이 잘 안 열리는 것 때문에 힘든 분들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본인 스스로 자격지심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자녀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 때문에 햇빛이 차단된 것처럼 하나님의 마음이 차단된 상태에 있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해 드리는 가운데 “내가 너를 아들로 사랑하는 자리에 너를 초청한다. 내가 너와 그렇게 있기를 원한다.”라는 감동을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오늘 찬양 중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자리로 초청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하나님 앞에 일꾼으로 섰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꾼으로 서니까 이건 피말리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전에 섬겼던 교회에서 목사님이 “우리는 하늘나라 공무원인데 지각하면 되겠는가?, 오늘 무슨 일을 했는가?”하고 물으면 참 힘들었습니다. 제가 ‘하늘나라 공무원’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시골에 가니 할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제 아내가 가끔 밥상가지고 오면서 오늘 밥값 했냐고 합니다. 그러면 탁 걸립니다. 왜냐하면 할 일이 없으니까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낙입니다. 그런데 ‘밥값 했느냐?’고 한마디 던지면 그것이 제게는 비수로 와서 꽂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한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이론으로는 다 압니다. “하나님, 저를 사랑하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중심에서는 탁 막혀 있습니다. 일꾼이 되어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너무 너무 힘들고 낙심됩니다. 진짜 주님 앞에 가지고 갈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때는 마음속에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생각도 나는 것 같습니다. 지내놓고 보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랑받을 짓을 했어야지요. 머리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내가 일꾼으로서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의식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못나가는 것입니다. 친밀함이 안 됩니다. 감히 죄송해서 못 들어갑니다. 내 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그런 자리에 있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에 돌아오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을 한 구절 찾아볼까요. 신명기 7장 6절입니다. 저는 여기를 보면 참 신납니다. 제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부분이 이 구절입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세 가지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첫 번째는 6절에 보배로운 소유물로 택하셨습니다.
여기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다는 말은 NIV 성경이나 원어에 보면 보배로운 소유물로 택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 것이나 주워서 종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배로운 소유물로 택하셔서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종 이전에 우리를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보배롭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배를 무심하게 버려두지 않습니다. 그 결과가 성민입니다. 거룩한 백성. 우리가 거룩해서가 아니라 의로우신,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셔서 우리가 거룩해집니다.
두 번째는 열렬히 사랑하십니다.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여기서 너희를 기뻐하셨다는 말은 ‘하솨크’라는 히브리말로 영어로 보면 ‘affection’ ‘열렬히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감정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열렬히 사랑해, 넌 내 아들이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 원해.”
제가 릭 조이너가 쓴 어떤 책을 다 읽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분이 책을 소개해서 책을 사놓고는 한 부분만 딱 보는데 들어오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어떤 자매가 커 가는데 열등의식, 거절감이 많습니다. 사실 열등의식은 거절감에서 옵니다. 그래서 그런 열등의식이 있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했습니다. 자기도 남자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하지만 언감생심 감히 기대를 못했습니다. “자기 같은 사람을 누가 좋아해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식사하는 날 그 남자가 자기를 뚫어지게 쳐다봅니다. 그래서 쳐다보았더니 그 남자가 깜짝 놀라면서 눈을 내리면서 “미안해요. 자매. 내가 자매를 보면 내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라고 말합니다. 그 자매가 좋기는 하지만 자기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려고 하는데 그 속에서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얘야. 지금 이 형제가 내가 너를 매일 보는 것처럼 보고 있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십니까? 심장이 터질 것같이 열렬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열렬히 사랑하십니다.
제가 어떤 때 기도하다보면 어떤 사람은 별로 하나님이 기뻐할 삶을 못산 것 같은데 이런 찬양이 자꾸 나옵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제가 볼 때는 하나도 안 기뻐할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를 보배로운 소유물로 열렬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보니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외모로 택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외모를 보고, 우리의 행위를 보고, 우리의 모습을 보고 사랑한 것이 아니고 그냥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일꾼으로 부르기 전에 아들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들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교제 가운데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면, 내가 하나님께 내놓을 것이 별로 없는 것처럼 느낀다면, 내가 하나님 앞에 항상 거절감의 의식을 가지고 섰었다면 그 사랑의 품에 보배로운 소유물로 택하신 사랑하는 아버지의 품에 안기시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이것이 사역자들에게 참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을 놓치게 됩니다. 오래전에 컨퍼런스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 부분을 감동하셨는데 잊어버렸다가 오늘 찬양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다시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사랑은 행동하는 사랑,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8절 “그런즉 너는 알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하나님은 행동하셨습니다. 속량하시고 구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행동하셨다면 오늘날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행동하십니다. 무슨 행동을 하십니까? 십자가에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놓았습니다. 우리를 보배로운 소유물로 택하시고 열렬히 사랑하시고 그냥두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무엇이 나옵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질투가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기 바라시고, 자기백성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키기 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께 눈 맞추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하나님만 유일한 목적이고 열망이기 원하시고, 우리가 우리 어깨에서 사역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종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아들로 어린아이처럼 사랑의 자리로 오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행위를 보고 결론을 내신다면 우리 가운데 살아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실을 보기 이전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족으로 부르셨고 당신의 의중과 의도를 보이십니다. 모든 우리의 약함을 깨뜨리시고 아버지의 친밀한 사랑 안에서 열렬히 사랑하신 사랑으로 우리를 안으시기를 원하십니다.
2] 순종이 열쇠입니다.
예언이 말로만 마친다면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감동대로 순종함이 필요합니다. 예레미야 27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8 만일 그들이 선지자이고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에게 있을 진대 그들이 여호와의 집에와 유다왕의 집에와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기구가 바벨론으로 옮겨가지 않도록 만군의 여호와께 구하여야 할 것이니라.”
그들이 선지자라면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다면 그들은 그 말씀이 응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감동대로 순종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심각한 문제는 말로 끝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 음성 듣는 자세를 가장 잘 가르친 사람이 엘리 제사장입니다. 사무엘상3장 10절에 보면 “종이 듣겠나이다. 말씀하옵소서.”라고 엘리 제사장이 사무엘에게 가르칩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가장 중요한 자세가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이 말씀할 때 종이 대청마루에 서서 “말씀만 하십시오. 금방 하겠습니다.” 이런 자세로 서는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런 자세로 듣도록 가르칩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 자신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못 듣습니다. 사무엘상 2장 30절에 보면 “나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멸시하는 자를 경멸히 여기리라.”라고 하십니다. 사무엘상 전체가 이 구절에 걸립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겼던 두 사람과 멸시했던 두 사람. 하나님을 멸시했던 두 사람은 엘리와 사울입니다. 이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두 사람을 세웁니다. 엘리를 대신해서 사무엘을 세우고 사울을 대신해서 다윗을 세웁니다. 원래는 이들에게 주셨던 약속이 존중히 여겼던 자들에게 넘어갑니다. 이들이 멸시했다는 말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반응하지 않는 것을 멸시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명의 선지자를 통해 엘리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무명의 선지자의 말을 듣고 당대 최고 영적 지도자였던 엘리가 돌이키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엘리는 그 말을 듣고 반응하지 않습니다. 2장 마지막까지도 무명의 선지자가 말하는 것으로 계속되고 3장 1절에 보면 엘리의 반응이 안 나옵니다. 엘리는 한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하나님께 놀랍게 쓰임 받았던 사사입니다. 최고의 영적인 리더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정작 무명의 선지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듣습니다. 그래서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눈이 가려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귀를 여십니다. 세 번 부르니까 사무엘이 엘리에게 갑니다. 그러자 엘리가 “너를 부른 분이 하나님이시다. 종이 듣겠사오니 말씀하옵소서.” 하고 말씀드리라고 가르칩니다. 그 자세를 알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러한 자세를 이해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아침에 엘리가 사무엘에게 사실대로 말해달라고 하고 그래서 사무엘이 사실대로 이야기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엘리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여호와는 선하시니 뜻한 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승으로서 제자에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멘트에 불과합니다. 정답을 말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진짜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옷을 찢고 재를 쓰고 뒤집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못 듣습니다.
너무 너무 중요한 것이 예언적인 기름부음이 우리 가운데 부어지고 그것이 자라기 위해서는 우리가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기 위해서는 친밀함이 필수입니다. 친밀함이 있어야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인식할 때 순종할 수 있습니다. 순종하면 더 깊이 알게 됩니다. 이것이 선순환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더 깊이 기름 부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기꺼이 순종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말씀대로 순종해보아야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또한 우리가 알게 됩니다. 물론 여기에 분별이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그런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이 시대에 그런 예언적인 기름부음을 통해 여러분과 제가 중보기도자로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아마 제 설교를 듣는 중에 여러분 중 많은 분은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 말할 분이 상당히 많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 사이즈의 일을 하나님의 때에 정확하게 놀라운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을 믿습니다.
1.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일하십니다.
이 부분은 앞에서 많이 살펴보았습니다. 우선 우리가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은 인간을 통하여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일하실까?”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전에 감리교 목사로서 단독목회를 해야 안수를 받기 때문에 아주 시골교회에 간적이 있었습니다. 처음 제가 7년 동안 섬겼는데 거기는 자자유촌한 마을이고 전도가 그렇게 안 됩니다. 교인이 별로 없는데 제가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서 인사하면 “너 누구냐?”라고 합니다. 새로 온 전도사라고 하면 “수고 많네”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제 또래의 사람들에게 가서 인사하면 인사도 안 받습니다. 얼마나 거절감과 상처가 심한지요. 동네 사람들과 접촉점을 가져 보려고 아이스크림도 사가지고 가면 이상하게 교회에서 사온 아이스크림은 뭐가 묻었는지 사람들이 논 가운데서 일하면서 가까이 다가가면 한번 쳐다보고는 귀찮다는 듯이 더 이상 안 쳐다봅니다. 또 접촉점을 마련하려고 초상집에 가면 부조 가지고 가니까 받아 주기는 하지만 음식을 차려 줄때 딱 혼자만 독상을 주고 아무도 제 옆에 안 옵니다. 그나마 마을에 교인이라도 많으면 좋을 텐데 교인도 별로 많지 않은 상황에서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 내려갔습니다. 그러다가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많이 굿도 하고 점도하고 나가면 곳곳에 멥밥이 있습니다. 이 동네를 어떻게 전도를 해야 하겠는데 제가 전도에 강한 열정과 열망이 있으면 핍박을 받더라도 들어가서 그렇게 하겠는데 거절감이 전도의 열정을 완전히 꺾어버려 못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게 기가 막힌 생각이 났습니다. 그것은 18만 5천의 산헤립 군사도 천사 한명으로 쓸어버리신 하나님께서 천사를 부리는 종으로 우리를 수종들게 하신다고 하셨는데 천사 한명만 보내주십시오. 제가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윗마을부터 아랫마을까지 106가구였으니까 하루에 다섯 가정씩만 가정방문 하면서 밤에 목을 팍팍 밟으면서 “믿을래? 안 믿을래?” 하면 믿는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육일쯤 방문하면 주일날은 틀림없이 나올 것입니다. 질겨도 한 달이면 다 손들고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천사 한명만 보내주시면 어떨까요?” 이런 기도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성경을 보다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라는 구절을 보고 그만두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참 얼마나 좋을까?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추수를 원하시는 주님께서 “추수할 일꾼이 적으니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소서 하라.”라고 구하라고 말하고 있거든요. 왜 구하라고 하실까? 추수의 주인이 되시는 그분이 우리보다 더 추수하기를 원하실 텐데 왜 구하라고 하실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시지요. 그의 나라와 의를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더 원하실 텐데 왜 구하라고 하실까?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중보기도]는 더치 쉬츠라는 분이 쓴 책인데요. 이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 땅에서 인간과 독립적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을 통해서 일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분은 인간과 하나가 되는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그렇게 하셨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 책에서 잘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미 앞부분에서 많이 다루어졌기 때문에 제가 그 부분은 다루지 않겠습니다.
[예수와 하나님 나라]라는 책을 쓴 풀러 신학교의 교수님이었던 죠지 엘든 래드는 그분이 쓴 책에 보니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을 통하여 일하시는가에 대하여 논쟁하려면 그것이 너무나 큰 문제이기에 그것을 알려고 하지 말고 단순히 그것을 받아들이라”라고 권면합니다.
출애굽기 3장 7절 이하를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백성의 고통을 보고 그들의 우고를 알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내가 내려왔다.” 하나님께서 내려오셨다는 것이지요. 보고 듣고 알고 내려오셨다. 그러면서 모세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내려오신 이유는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아름답고 광대한 땅, 가나안 일곱 족속이 거하는 그 땅에 데리고 가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려오셨으면 하나님이 가시지 왜 모세를 보내시려 하십니까? 성경에서 제가 볼 때 하나님께서 참 많이 인내하시는 장면이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처음에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의중을 보이시고 모세가 못 간다고 하니까 구체적으로 손을 넣어보아라, 빼보아라, 지팡이를 던져봐라, 손을 내밀어 잡아봐라, 많이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못 간다고 하니까 “내가 네 형 아론을 대변인으로 붙이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동역자를 통하여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떤 글에서 보니까 어떤 신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쓰시지 않으시고는 일하신 적이 없다.” 또 열왕기상 18장 1절에도 보면 “내가 지면에 비를 내리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면에 비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하시면 당신의 뜻대로 일하시면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하시려고 하시는 모양이구나. 그분은 전능하고 능하시니까 우리는 그분이 행하시도록 ‘열중 쉬어’ 하고 뒤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18장 뒷부분에 가면 엘리야는 무릎사이에 머리를 집어넣고 기도를 했습니다. 사실 얼마나 절박하게 기도했을까요.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일곱 번 기도했습니다. 그 모습은 그 당시 해산하는 여인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절박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5장 17-18절에 보니까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비가오지 아니하고 저가 기도한즉 비가 내렸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여기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성경에 보면 엘리야의 기도가 비를 내리게 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 가운데 매우 중요한 부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기로 작정하셨다. 우리는 이 부분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2]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하여 그 백성들에게 계시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역자로 부르실 때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자신의 목적과 길을 계시하십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이 쓴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에 보면 그분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하실 때 세 가지를 계시하신다.”
①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심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다.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신뢰하여 서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론적인 사실에 능력이 있지 않습니다. 오늘 제가 찬양하는 가운데 있다가 끝날 때 그 부분을 나누도록 하나님이 초청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에 친밀한 교제로 우리를 초청하신다는 감동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단어만 해도 추상적입니다.
사실 제가 고아원에 가서 사역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집회를 인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참 함께하셨습니다. 그 고아원 보모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비추어지니까 막 의자에게 굴러 떨어지며 울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눈만 껌벅껌벅하며 가만히 있었습니다. 여자아이들만 있는 고아원이었거든요. 고등학생까지 있었고 고등학교 졸업한 아이들도 몇 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전혀 비추어짐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너무 고민스러워 가서 기도하면서 “하나님, 뭐가 문제입니까? 왜 저들이 모릅니까?”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사랑에 대한 이해의 개념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런 것 같았습니다. 어렸을 때 보모들 같은 사람들이 와서 “사랑해. 사랑해.”하며 마음을 빼앗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 가야돼”하고 떠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옵니다. 그리고 똑같은 경험을 합니다. 그 아이들의 생각에 “아 사랑은 어느 날 떠나는 것이구나. 떠나면 무척 아픈 것이구나.” 그러면서 사랑한다고 말해도 올인하지 않습니다. 한쪽 발만 주었다가 빠져 나가면 다시 걷어 들이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개념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잘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가 된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 하나님을 친밀한 교제 안에 온전히 신뢰하며 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② 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하심
두 번째 하나님의 목적을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나님의 목적에 초청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의중을 보이셔서 그 의도 가운데 서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목적에 우리를 헌신하도록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내가 또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 내가 가로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내가 또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 말씀을 하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너 이일을 좀 하면 어떻겠니?” 하는 초청이 아닙니까?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가 그 초청을 받을 때 “예, 쟤가 저기 있나이다. 쟤를 보내소서.” 이렇게 말하기가 쉽습니다. 아까 모세에게 보이신 것처럼 그 목적을 보이셔서 그 일에 우리를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길을 계시하심
그 다음에 하나님 자신의 길을 계시하십니다. 그 목적을 쫓아갈 때 우리의 방법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특별히 아모스 3장 7절을 찾아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그 일을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과 의중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신약성경에도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5절을 찾아보십시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에게 또는 자녀들에게 자신의 의중을 알리십니다. 주님의 백성인 우리를 친구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버지께로 들은 것은 다 너희에게 알린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알린다는 말은 ‘그노리조’라는 헬라어 동사인데 ‘사람들에게 널리 선포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중을 알리셔서 그 종들에게 선포하게 하시고 또 사역을 감당하게 하시고 또 에베소서 3장 10절 같은 곳에 보면 정사와 권세들에게 이러한 비밀을 선포하게 하심으로 영적전쟁을 하게 하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목적과 의중과 길을 따라서 나아가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가 개인적으로 아는 이 모든 것이 우리 가운데 있을 때 우리 삶에 놀라운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우리 삶에 필수라고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2. 예언과 중보기도
1] 예언과 중보기도와 관련해서 중보기도가 바로 예언을, 하나님이 주신 감동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중과 의도를 계시하실 때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중보 기도하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보기도 할 때 그것을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기도는 일한다, 특별히 중보기도는 일한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어떤 책에 보면 중보기도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물질도 없고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도 없어. 내가 할 일은 중보기도밖에 없어. 중보기도라도 해야지.”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하여 그 분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소총도 없어. 수류탄도 없어. 나는 대포도 없어. 나는 대륙 간 탄도 미사일만 가지고 있을 뿐이야.”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쏘아대는 이것이 중보기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미리주신 것들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중보기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중보기도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예언과 중보기도에 있어서 첫 번째로 우리는 이미 약속으로 주어진 성경에 기초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그 약속에 기초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예언과 중보기도라고 하면 성경은 뒤에 두고 하나님이 주신 감동만 따라 기도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우리가 제일 먼저 기본적으로 성경을 붙들고 그 말씀에 기초해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가 나누는 방향의 중보기도로 나가게 하신 시작점으로 어느 날 성경을 볼 때 마태복음 16장의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말씀이 들어오면서 특별히 오늘날 교회의 현실과 제가 섬기는 교회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초대교회의 모습과 너무나 멀어져 있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민하는 가운데 마태복음 16장의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님의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는데 오늘날 율법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 신앙이 팽배한 이러한 상태는 무엇인가? 죄를 이길 능력이 없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사들이 교회 가운데 거의 나타나지 않는 이러한 상태는 무엇인가? 초대교회의 능하신 역사가 어디 있는가? 그런 갈증 속에서 사실 이 구절들을 붙잡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위한 하나님의 소원과 열정을 제 마음에 많이 부어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다니엘은 B.C. 666년에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오랜 시간을 지낸 후 다니엘서 9장에 보면 성경을 읽다가 70년 만에 돌아오게 되리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보고 그는 그 약속을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때가되면 이루시겠지.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까 이루시겠지.”라는 생각으로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가 기도했기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의 기도는 매우 중요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약속을 보면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기들의 처지를 인식하고 중보기도를 합니다. 금식하며 21일 동안, 하나님의 응답이 오기까지 집중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보기도와 예언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은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약속된 말씀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죠지 뮬러는 그의 기도의 삶에서 항상 성경책을 펴놓고 기도했다고 하고, 설교의 왕 챨스 스펄젼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께 간구했고, 이 엠 바운즈는 그 말씀으로 인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기도를 강조하고 앤드류 머레이는 매일 말씀을 많이 읽으며 기도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에 기초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면 기록된 말씀에 근거하여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친밀함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친밀함에 기초하지 않으면, 시대를 분별하는 안목이 잘 안 주어집니다. 약속을 붙잡아도 그 약속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비추어지고 하나님이 선명하게 인식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그 약속을 붙들고 친밀함 가운데 중보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 같이 안정적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어떻게 그 약속을 붙잡고 그 약속을 따라 갑자기 획기적으로 삶을 전환하고 금식하며 기도의 자리로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가 아무 생각 없이 관직에 있다가 “이 나라가 빨리 회복되어야 될 텐데.”하고 생각하는 과정 가운데 있다가 이런 약속을 붙잡았으면 어쩌면 상당히 기쁨을 가지고 “주님이 이 일을 이루시겠구나. 주님이 빨리 이루셔야 될 텐데."라고 하며 끝났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그는 네 번의 큰 위기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는 위기 때마다 항상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리를 선택하는 사람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곧 생명임을 인식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약속하신 그대로의 하나님,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임을 알았기에 그 약속에 근거하여 그 삶을 조정하고 전환하는 자리에 섰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약속을 보지만,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에 따라 자신의 삶이 행동으로까지 옮겨지지 않으면 그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다면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삶을 조정하는 자리에까지 안 가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심각한 문제는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내가 기도했더니 이런 약속을 주셨다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따라 자기는 삶을 조정하지 않습니다. 왜?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곧 생명인 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곧 능력인 것을 알지 못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의 하나님이심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다면 삶을 전환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입술을 보지 않고 행동을 보십니다. 사실 우리는 믿는 바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믿는 바대로 살고 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때 그 약속을 붙잡으면 그리고 그것이 내게 주신, 오늘날 이 시대를 위한, 교회를 위한,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선명하게 보인다면 우리는 그것을 따라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입술로만 이야기하고 실제로는 그 자리에 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이 주셨다고 다만 말할 뿐입니다. 여기 아주 중요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중요합니다. 매순간 마다 하나님을 인식하고 매일 아침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의 보좌 앞에서 우리의 초점이 주님을 주시하여 보고 그분께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교회에서 설교하실 때도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성에 기초하지 못했는데 죄를 짓는 것에서 돌이키지 않는다고 책망하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나가든지 아니면 마음속으로 타협해 버리든지. 잘 안변합니다. 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잘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조정은 목사님의 설교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인데 그 하나님이 인식되지 않는데 어떻게 바뀔 수 있습니까?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이 개인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신앙의 본질에 서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서도록 이끌어 주고 그러는 가운데 스스로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돌이키도록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거기에 기초되지 않고 예를 들어 강력한 메시지만 선포하고 한 번 때리고 두 번 때리고 세 번 때리면 ”여기만 교회인가?“하고 나갑니다. 그러기 쉽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도록, 각자 개인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서도록, 하나님의 주권 앞에 서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가운데 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고 일해가십니다.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고 우리가 의도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그 일들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가 중보 할 때 예언의 기름부음을 주시고 예언을 따라 기도하게 하십니다.
① 성령님은 중보기도를 도우시고 친히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리라.”라고 하셨는데 그 보혜사가 우리 안에 계십니다. 로마서 8장 26-2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여기에 보면 우리에게 중보기도의 동기를 일으키시는 분, 우리에게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신 것을 말합니다. 여기 보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 연약합니까? 여기 문맥을 보면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연약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고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기력하고 연약합니다. 그 때 성령님께서 함께 붙들어 주심으로 인도해주시고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보이십니다. 이때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삶을 조정하게 하시고 때로는 깨닫게 하시고 때로는 삶을 전환하게 하시고 때로는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하게 하시고 그 일을 위해 함께 기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 1-3절을 보십시오.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2절에 보니까 주를 섬겨 금식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섬겼다는 말은 예배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예배는 다윗의 장막과 같은 예배입니다. 그들이 경배 찬양을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목적이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원하고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되 금식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예언의 기름부음이 누군가에게 부어져서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 당시 안디옥 교회의 담임목사는 바나바였고 수석 부목사는 바울이었습니다. 그런데 따로 세워서 선교사로 파송하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성령님께서 압도하여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담임목사, 수석 부목사가 선교사로 가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언의 기름부음을 통해 말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 보면 “함께 금식하며 기도했다.”라고 말씀합니다. 금식하며 기도하며 먼저 분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두 사람을 안수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교회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교회가 이렇게 함께 연합하여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당신의 의도와 의중을 보이시고 그 뜻을 알게 하실 때 그 뜻을 따라 교회가 기꺼이 그 삶을 조정하여 순복하고 모든 지체들이 함께 분별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영분별이 중요한데 영분별의 은사를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 중에 예언과 방언의 은사 사이에 두셨습니다. 원래 분별의 은사로는 지식의 은사, 지혜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앞부분에서 세 가지 은사 중 두 가지 은사만을 말하고 뒤에 가서 영분별의 은사가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와 방언의 은사 사이에 두셨습니다. 이것은 제가 볼 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 있는 방언은 일반적인 방언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방언도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는데 ‘예언으로서의 방언’과 ‘개인적인 기도로서의 방언’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향하는 예언적인 방언에는 반드시 분별이 필요하고 예언에도 반드시 분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고전14:29)”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모여서 그들이 함께 분변하는 일들을 하게 되었고 분변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선명히 깨닫게 해주시고 비추어 가시는 가운데 그 일들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이 어제도 보셨지만 다윗의 장막에는 신령한 노래로 화답했다고 했습니다. 즉 예언적인 기름부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다윗의 장막과 같은 기도가 중요한 것이 그러한 때에 예언적인 기름부음이 가장 풍부합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는가 하면 구약의 시편이 다윗의 시대에 가장 많이 써졌습니다. 다윗과 그의 찬양인도자, 예배 인도자였던 아삽, 헤만 같은 사람들을 통해 쓰인 시편이 시편전체의 절반 이상입니다. 많은 예언적인 기름부음이 함께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중보기도 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해 가시는 것을 경험해갈 수 있습니다.
② 중보기도 할 때 하나님께서 예언의 기름부음을 부어주십니다.
신디 제이콥스는 그의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중보는 정기적으로 예언할 자들을 하나님께서 훈련시키는 훈련장이다.” 그러니까 예언 사역자로 세우시기 위해 중보기도로 훈련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도실은 예언자가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을 배우는 곳이다. 모든 중보자가 예언자는 아니지만 그러나 모든 예언자는 중보기도자이다.” 중보기도로부터 예언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중보 기도자가 예언자는 아니지만 자라가는 중에 중보 기도자가 예언자로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보기도는 단순한 중보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이번에 배운 것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리고, 자신의 의제를 내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되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내려지고 다만 하나님 한분으로만 만족하는 하나님의 뜻 앞에 기꺼이 순복하기 원하는 그런 자세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가운데 나아가는 중보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언의 기름부음을 부으십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이 거기에서 자라게 됩니다. 모든 중보 기도자가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에 보면 “너희가 예언을 하려고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 모두가 예언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많은 선지자들이 중보자였던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다니엘, 에스겔, 예레미야 이런 분들이 다 가슴을 찢으며 애통하며 중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와 심지어 아브라함도 소돔과 고모라 성을 위해 중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안나와 시므온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입니다.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우선 그에게 예언적인 기름부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기도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거룩한 소원이 그 속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는 바로 메시야가 오는 것입니다. 그는 예언적인 기름부음으로 그 위로를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가 그런 소원을 가지고 기도했고 기도하는 가운데 그 약속을 받았고 그리고 그 약속이 오기까지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그러면서 34절 중반 이하에 보면,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의 마음을 들추어내십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죄가 드러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의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 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고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의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 말씀을 듣고 굉장히 화가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생각을 들추어내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는 의롭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 앞에서 그들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적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칼로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그는 예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보기도자는 하나님께서 예언의 기름부음을 부으십니다. 그 뒤에 나오는 안나를 보십시오.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그런데 이 안나를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예언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성전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중보기도자였습니다. 아주 가난하고 능력이 없는 그러나 평생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중보기도 할 때 그에게 예언의 기름부음이 임하였고 그의 삶에 놀라운 능력이 있는 역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중보기도 할 때 우리 가운데 예언의 기름부음을 부으셔서 방향을 전환하게도 하시고, 깨닫게도 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는 매우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저희가 몇 주 전에 교회 부지를 구입하고 교회 건축도 생각하고 그 전보다는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저는 여기 저기 계속 집회를 다니느라 새벽예배를 잘 못하고 저희 부목사님이 많이 하시는 편입니다. 한번은 추석 지난 바로 다음 주인데 새벽기도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새벽기도가 참 좋은 점은 하나님과 개인적인 친밀한 교제를 갖는 아주 좋은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담을 가지고 새벽기도를 하다가 추석 주간 한 3일 동안 가족들과 만나며 새벽기도를 못했더니 그 다음날 일어나기가 아주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못 일어나고 금요일 새벽이었습니다. 자는데 시계가 막 울어서 시계를 누르고 또 잤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게 또렷하게 “내가 깨어 기도하라고 하는데 왜 기도하지 않느냐, 나를 찾는 자가 별로 없다.” 제가 그 소리에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제 아내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그대로 옷을 주워 입고 머리빗을 생각도 않고 예배당으로 뛰어 갔습니다. 딱 들어갔더니 5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말씀을 나누고 엎드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날 그 시간을 기점으로 보여주신 것이 제가 섬기는 교회에 주신 비전, 또는 그 방향성에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을 선명하게 보이셨습니다.
그때 저희가 창세기를 읽었는데 33-34장을 읽었습니다. 기도하는데 야곱의 일생을 갑자기 필름처럼 보이십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자기 아버지 집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갈 때 하나님께서 “네가 이 땅에 반드시 돌아오리라. 돌아올 때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가지고 야곱이 외삼촌 집에서 20년 동안 지내며 그 약속을 잊어버립니다. 그가 부자가 되고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돌아오다가 생각하니까 형님과의 큰 갈등의 문제가 생각납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400명의 군사를 끌고 다가오는 형님의 문제를 어떻게 피해보려고 얍복강에서 씨름합니다. 그것을 통해 그는 두 가지 경험을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경험을 하고 또 하나는 형님과의 원한을 해결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어떻게 됩니까? 놀라운 축복을 경험한 후 세겜 족속에게 땅을 사고 집을 마련합니다. 에서가 같이 가자고 할 때 따라가겠다고 하고는 거기에 머물게 됩니다. 그가 가야할 곳은 벧엘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이 있는 곳, 그가 거기서 서원한 곳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은혜받은 후에 길을 잃어버리기 쉬운 것 같습니다. 저희가 딱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 하시니까 딱 길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로 안 가고 눌러 앉았습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가지 않습니다. 그의 인생의 문제가 이제 해결되었기에 처음으로 자기 가족끼리 편안하게 아무 문제없이 그 땅에서 땅을 사가지고 잘 살아볼 생각으로 야곱이 거기에 땅을 사고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해 우리를 만듭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디나가 세겜에서 강간을 당하고 수치를 경험합니다. 엄청나게 어려움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창세기 28장에서 “네가 이 땅에 돌아올 때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하나님이 함께 안 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건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거기서 길을 잃어버리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분별력을 완전히 상실합니다. 그러니까 아들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할례라는 의식을 빙자해서 그 사람들에게 큰 범죄를 저지릅니다. 그 결과로 야곱은 더 심각한 지경에 몰립니다. “이제 우리는 다 죽게 되었다. 이 사람들에게 우리가 냄새를 풍겼도다.” 이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한 마디를 주십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이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야곱은 분주해 집니다. 자기가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다 압니다. 그의 삶이 획기적으로 전환됩니다. 그리고 그가 벧엘에 올라갑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야곱의 일생은 창세기 28장부터 35장으로 끝납니다. 성경에서 더 이상 그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의 일생의 비전,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그 목적지로 이끄는데 그 목적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때 저희 교회는 주신 비전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길을 잃어버리고 땅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저희 교회 가운데 여러 가지 문제들이 일어나면서 그 문제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보게 하시고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수치를 당하는가?”하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제가 이 부분은 안 나누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같아서 나누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듣고 깨달을 분이 있으신가 싶어서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최종 목적까지 우리는 머무를 수 없다. 주저앉아서는 안된다. 줄기차게 가야한다. 길을 잃으면 하나님을 잃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같이 하나님의 목적을 잃으면 하나님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문제가 없으면 잘 되어가는 것 같지만 문제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일어나 벧엘로 가라.”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우상을 제하고 벧엘로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자에게 중보기도의 사명을 주시고 중보자들에게 예언의 기름부음을 부으십니다. 당신의 의중을 알려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고 그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일만 마디 말하는 것보다 주님이 주신 한마디 기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3. 예언적 중보기도
아까는 예언과 중보기도라면 이번에는 예언적인 중보기도라고 말을 붙였습니다. 제가 단계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예언적인 중보기도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예언을 따라 기도하면 처음에 성령님이 말씀을 비추어 주심을 따라 어떻게 가야할지 하는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다보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감동을 곧잘 받게 되고 그 감동을 따라 기도하게 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렇게 점점 기도하는 가운데 더 민감하게 될 때 성령님께서 우리가 기도하는 시간 외에도 우리에게 부담을 주고 성령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훨씬 넓은 사역을 감당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평상시에도 우리가 성령님께서 지금 어떤 일을 하기 원하시는지 그러한 예언적인 기름부음을 통해서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게 됩니다. 세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예언적인 중보기도의 정의
예언적인 중보기도란 무엇인가? 예언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페테이아’라는 말인데 하나님의 마음과 의중을 미리 말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중보기도는 헬라어로 ‘엔톡시스’라는 말로 “대화하기 위해 만나다. 중재하기 위해 말하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예언적인 중보기도의 뜻은 이와 같습니다. 영적 대화를 위해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고 그리고 중보기도의 의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구하고 만나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의중과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 대화를 위해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이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중보기도의 의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을 구하고 만나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다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자연상태에서는 사전지식이 없는, 알지 못하는 어떤 상태나 환경을 성령님께서 기도하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셔서 기도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일들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것을 기도합니다.
2] 예언적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언적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때와 함께 갑니다. “때”라는 단어는 헬라어에 보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두 가지가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규칙적인 시간을 의미한다면 카이로스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을 말합니다. 농부는 때에 따라 일합니다. 예언적인 기도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려는,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행하시는 카이로스의 시간에 맞추어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감동을 따라 기도하는 것이 예언적인 중보기도입니다. 적기에 중보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바른 때에, 바른 시간에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카이로스의 시간에, 적기에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런 경험을 많이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해 기도한 것이 언제입니까? 사단의 시험이 올 때였습니다. 이것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베드로를 공격하려고 할 때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그의 믿음은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경험을 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제일 먼저 중보기도를 하게 되는 과정이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서 ‘소원 없는 기도’를 한다는 표현을 합니다. 내 소원, 내 의제가 없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서기를 원하고, 기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되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을 내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고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내가 순복하기를 원하고,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찾는 기도입니다. 어떤 때는 가만히 앉아있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찬양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통 제가 시간을 많이 갖습니다. 하루에 제가 세 번을 기도할 수 있다면 첫 번째 시간에 그렇게 기도합니다. 두 번째 시간에는 보통 다른 중보기도를 하게 되고 세 번째 시간에는 교회를 위한 기도를 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제가 기도할 시간이 하루에 한번밖에 없다고 하면 이 부분을 주로 기도했습니다. 지금도 제가 많은 경우에 초점은 거기에 둡니다. 그런데 이것이 중보기도로 발전합니다. 소원이 없는 기도, 하나님 자신이 목적인 기도,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알기 원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다 보니까 어떤 순간에는 어떤 사람의 얼굴이 확 떠오르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어떤 교회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어떤 얼굴이 떠오를 때 처음에는 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훼방하는 것은 떠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왔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겠습니까? 그것은 중보기도 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부분을 잘 몰랐습니다. “왜 오늘은 이렇게 혼돈이 오지? 오늘은 기도가 잘 안되네, 이것은 나중에 기도해야지.” 하고 몰아내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점점 하나님께서 이 분을 위해 기도하도록 초청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어떤 선교사님이 떠오릅니다. 아! 이 선교사님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나님께서 초청하시는구나!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번은 선교사님을 위해 몇 가지 감동을 주시며 기도하라고 하셔서 절박하게 기도하는데 전화해보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화했더니 정확하게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상황, 몇 가지 주신 감동을 나누었더니 그분이 그렇게 서심으로 그 문제가 딱 해결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분이 어떻게 알고 전화했느냐고 몇 번이나 물었습니다. 저는 원래 그분을 위해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일을 잘 못합니다.
그런 분들이 떠오를 때 마다 그때그때 기도하면서 반복되니까 점점 알게 되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기도를 통해 일하시는구나, 중보기도하게 하시는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어떤 때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의중과 임재 가운데 있게 될 때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위해 기도할까요? 하나님 어디서 일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오늘 제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제가 과거에는 시골교회 있을 때는 시간이 참 많았고 기도할 시간이 참 많이 있어서 아침마다 일어나서 기도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저의 집이 과수원이었거든요. 그런데 과수원에 일하는 분이 계셨어요. 그런데 그분이 아침마다 저의 아버지에게 식사하면서 “오늘 어떻게 하기를 원하세요? 무슨 일 하기를 원하세요?” 하고 물어봅니다. 제가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 종은 아버지에게 물어야 돼. 그래서 아버지에게 자꾸 물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어떤 일을 하기 원하십니까?” 이렇게 물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비추어 주시고 알게 하시고 그래서 제가 전도도 하고 그랬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어디 가서 전도하도록 말씀하시면 순종하고 나아갈 때, 전도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일을 경험했습니다. 이렇게 감동을 따라 점점 성령님께서 기도를 압도하고 인도해 나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중보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의제를 가지고 나가지 않아도 성령님께서 그때그때 마다 말하게 하시고 나누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셔서 그 일들을 이루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일들을 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더치 쉬츠의 책에 보면 나온 이야기인데 과테말라에서 선교지로 가다가 금요일 날 도착해서 과테말라를 거처 토요일 날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테말라에서 비행기가 정시에 안 뜨는 겁니다. 그래서 왜 안 뜨냐고 하니까, 오늘 조종사가 없어서 못 떠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할까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빨리 떠나야 한다는 부담감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들은 체도 안합니다. 세 시간동안 따지며 이야기 했더니 그 중 한 사람이 성질을 내며 “갑시다. 빨리 타요.”하고 출발했습니다. 세 시간동안 논쟁하고 출발했는데 그날 저녁에 34초 동안 지진이 일어나 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못 떠났더라면 묵었을 호텔은 완전히 폭삭 무너졌습니다. 돌아와서 미국의 오하이오 주에 있는 린나라는 자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자매가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마음에 기도의 부담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세 시간 기도했는데, 그분들이 논쟁을 끝낼 때까지 세 시간동안 기도했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신나지 않으세요. 기대되지 않습니까?
어느 날 부흥교회 송희자 사모님이 제게 아침에 전화를 하셔서 “어제 밤 제가 두시에 일어나 기도했는데 별일 없었습니까?”라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날 엄청 몸이 아팠고 영적으로 힘이 빠져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침에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괜찮고 마음도 편안해 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모님 전화를 받았더니 그 전날 사모님을 새벽 두시에 깨우셔서 저를 위해 기도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중보기도자를 통해 그런 일들을 이루게 하십니다. 너무나 신나는 일입니다.
제가 구로 봉덕교회 집회를 갔었는데 그때 리더들이 부흥집회에 반대해서 중직들이 집회에 많이 안 참석했습니다. 그래서 절반밖에 안와서 분위기가 썰렁하고 엄청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화요일 저녁부터 집회했었는데 첫날에는 목사님들도 와서 같이 집회했는데 수요일 날에는 목사님들도 더구나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수요일 저녁에는 혼자하려면 진짜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에게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그 꿈은 자기가 학생으로서 누군가를 전도해서 데려갔는데 학교의 리더가 학교 나와야 한다고 해서 그 아이를 전도하려고 그렇게 기도하다가 깨었답니다. 깨어서 무슨 꿈인가 생각하다 보니까 그 교회에 대한 꿈같았답니다. 정확하게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아내가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교회적으로도 기도하게 했답니다. 그런데 너무나 놀라운 사실은 수요일 날 하나님께서 정말 함께 하시고 압도해 가셨습니다. 그러더니 수요일 밤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말을 듣고 목요일 날에는 사람들이 다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보기도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도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이러한 일들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많이 놓칩니다. 제가 실패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러 번이 있는데 그 중 한번은 저희 교회건축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땅을 찾으라고 하셔서 부지런히 다녔는데 못 찾았습니다. 그런데 강요한 목사님이 전화해서 하나님께서 토지공사 같은 곳을 살펴보라고 하시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토지공사 같은 곳에는 없을 텐데”라고 생각하여 조금 살펴보고는 주의 깊게 안 들었고 놓쳤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저희가 산 땅이 토지공사 땅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샀느냐 하면 종교부지가 나왔는데 다른 교회가 이것을 받아가지고 감당을 못하니까 내놓게 되어 저희가 받았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금 지내놓고 보니까 그 땅이 원래 우리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서울 예능교회에 DTS 인도하러 가게 되었는데 비행기에서 내리니까 문자 메시지가 들어왔습니다. “좋은 땅 있음 444평 종교부지임” 그래서 제가 전화했더니 좋은 것 같아서 저희 교회 분을 가보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집사님이 가보고 “목사님, 제가 그것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좋은 땅을 가까이 두셨는지 몰랐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토요일 날 내려가서 보았더니 정말 좋았습니다. 6차선 도로 옆에 공원을 끼고 있는 아주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너무나 신났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분이 여러 분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답니다. 그런데 문자 메시지 받고 전화한 사람이 저밖에 없었답니다. 그래서 다른 데 물어보았더니 전혀 받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게만 문자 메시지가 온 것입니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때 목사님을 통해 주신 감동 시기에 그분들이 땅을 받았습니다. 그분들은 그대로 저희에게 넘겼는데 그 사이에 세금이 붙었습니다. 그때 제가 주의하지 못함으로 그 세금을 더 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 개인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절박하게 회개하고 감동을 소홀히 한 것을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중보자들을 통해 주시는 감동을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많이 놓칠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을 우리가 예민함을 가지고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3] 때로는 예언적인 행동으로 나가기도 합니다.
이것이 예언적인 행동으로까지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예언적인 기름 부으심이 예언적인 행동으로까지 나가기도 합니다. 이것이 어떤 때는 이해하기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에게 예언적인 행동을 하게 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내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적인 행동입니다. 또 여리고 성을 돌게 하신 것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에 대한 믿음의 행동입니다. 예언적인 행동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기도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고 그 감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미리 우리에게 행동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중요한 말은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나님의 목적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행동하실 일에 있어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행동하고 움직일 때 하나님께서 당신 사이즈의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모세가 르비딤에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한 것도 예언적인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고,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모세가 손을 든 것도 예언적인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쟁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길까요? 2002년 월드컵 때 어떤 분들은 손을 들고 끝날 때까지 기도한 분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영적전쟁만 해도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법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영적전쟁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리고성을 돈 것처럼 어떤 성을 돌면 능력이 나타나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하신 방법 중에 성을 돌도록 하신 것은 여리고 한번입니다. 그 다음에 아이성은 아이성대로 지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영적전쟁에서 핵심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방법에 있지도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서 승패를 경험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기초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방법을 배우려고, 기술을 배우려고 합니다. 사실 기술이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능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길을 따라갈 때, 그렇게 나갈 때 하나님께서 주신 처방이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마라의 쓴 물 앞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 쓴 물을 처리하기 위하여 나무 하나를 꺾어서 던지라고 하십니다. 그 나무를 던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그런 부분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인간의 방법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께 그 처방이 있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해결책이고 해답인 이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중보기도 하다보면 그러한 감동을 주시고 그렇게 나갈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가정(Every Home for Christ)’라는 단체의 총재였던 딕 이스트만은 하나님께서 그를 어느 날 베를린으로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강한 감동을 주시기를 “나는 네가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 장벽으로 날아가기 원한다. 그리고 그 위에 손을 얹고 이 다섯 마디의 말을 외치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무너져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분은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가서 다섯 마디를 외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그분이 기도했다고 장벽이 무너졌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감동을 따라 그분은 순종했고 그러한 일들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마른 뼈를 향해 외치라고 말했고 외치는 순간 그러한 일들이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또 제가 한 예를 소개하겠습니다. 신디 제이콥스의 예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성횃불회의 한 팀이 중보 할 목적을 가지고 러시아로 갔고 그때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예언적인 행동을 수행하라는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여기저기 버스를 타고 역사적인 현장으로 인도하는 가운데 공산주의적 가르침의 요새였던 모스크바 국립대학에 머무르게 되고 학교 건물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을 때 친구의 꿈이 생각났답니다. 그는 사영리 책을 가지고 여기가 친구인 베스가 꿈꾼 것을 행할 장소라는 것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뛰어가서 안내인이 보지 못하게 하고 그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언적인 행동을 실행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은폐시켜줄 나무를 찾기 위해서 둘러보았다. 우리는 그날 붉은 광장에서 KGB요원임이 분명한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너무 빨리 감옥 사역을 하고 싶지 않았던 우리들은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은폐된 장소를 발견하고는 거기다 사영리를 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학을 가리키며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이 소책자로부터 돋아나온 씨앗이 복음전도학교로 자랄 것이며 이곳에서 신학이 가르쳐질지어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빌리 그래햄 목사님이 그곳에 복음전도학교를 세우고 나중에 그곳에 신학교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예언적인 행동들을 통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 행동들은 중보적인 성격을 가진다. 실제적으로 그것들은 중보의 행위라고 불릴 수도 있다. 어떤 일들은 그것이 왜 일어났는지 분명한 이유를 찾기 힘든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예언적 행동을 실행한 순종과 복음전도학교가 세워진 것 사이에 상호관계를 입증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중보적인 예언적인 행동을 실행하라고 말씀하시고 그 결과로 그분이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성경 안에서 거듭 거듭 보게 된다.” 예언적인 중보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일을 이루실 수 있음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무수히 보게 되고 그러한 일들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 있던 죽청교회에서 교회 바로 밑에 한 집이 무당이었습니다. 위에 있는 초가집에서 하다가 손님이 많이 오니까 밑에다 200평 큰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굿을 계속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자존심이 너무 상했습니다. 위에는 교회, 밑에는 점쟁이. 너무 너무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대부분의 기도하는 분에게 중보해달라고 기도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한편으로는 “내가 왜 이 마을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쨌든 집중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저희 교회에 감나무가 있는데 그 감나무에 걸터앉으면 그 집 마당이 보입니다. 거기 앉아서 손을 들고 기도하기도 하고 집중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데 그 집 담벼락에 손을 얹고 기도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새벽기도 시간에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올라오는 모든 분들에게 새벽기도에 올라오면서 담벼락에 손을 대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저도 내려갈 때마다 담벼락에 손을 대고 “주님, 안되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 권사님 한분은 어디서 들었는지 기름을 바르면서 기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집에서 새벽기도 나올 때 식용유를 찍어서 그 집 대문에 십자가를 그리며 “안 되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나중에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현재 그 교회 집사입니다. 그 집 대문이 하얀 철 대문인데 나중에 먼지가 끼니까 그 대문에 무수히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분이 돌아오는 과정 중에 진짜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분이 결정적으로 돌아온 날 자기가 공을 드려야할 4시에 못 일어나고 깜박 잠이 들었는데 몸이 너무 너무 아픈데 북쪽하늘에서 누가 내려와서 자기 엉덩이에 주사를 놔주며 자기를 치료해 주더랍니다. 그런데 그날 누가 가서 전도해서 교회에 올라왔습니다. 그분이 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 놀라시냐고 했더니 북쪽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 저였답니다. 그분이 “아! 하나님이 날 부르셨구나”하고 그날 즉각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것을 다 치웠습니다.
그 마을 입구에 정자나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정자나무는 좀 용한가 봐요. 왜냐하면 점쟁이 되려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얼마나 굿을 하는지요. 그래서 어떤 때는 산에 닭이 돌아다니거든요. 저는 모르고 “왠 닭이 길을 잃었나?”했더니 사람들이 굿하고 산에다 닭을 놓아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희 아들 녀석은 어느 날 나갔다 오더니 옛날 둥글둥글한 사탕을 잔뜩 주워왔어요. 그래서 어디서 주워왔냐고 했더니 그 정자나무 밑에서 주워 왔대요. 그런데 어쨌든 제가 참 많이 기도했습니다. 이 마을에서 저것을 꺾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지나가면서, 차타고 가면서, 걸어가면서 “예수 이름으로 넘어져라, 무너져라.”라고 엄청나게 많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안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나온 지 일 년쯤 뒤에 태풍이 불어 그 정자나무가 무너졌습니다. 사실 오래된 정자나무가 넘어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는 점쟁이들이 안 온답니다. “별 능력이 없구나.” 하고 생각해서 안 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그러한 선포를 통하여 일하시고 또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4. 예언적 중보기도를 위한 두 가지 자세
제가 이 부분과 관련하여 두 가지 자세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친밀함입니다. 이것은 어제 강조했고 계속 우리에게 핵심이기 때문에 제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시편91편 1절에 보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거한다’는 말은 ‘야솨브’로 지속적으로 거한다는 뜻입니다. 잠깐 있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존자와의 친밀한 교제 안에 있는 자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늘아래 거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뒤에 나오는 거한다는 말은 밤을 지새운다는 말입니다.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는 자를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그 안에서 밤새 평안함을 경험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알기 원하고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열망과 그분의 목적과 길을 따르기를 결단하는 자세로 우리가 설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하지 말고, 사역하지 말고, 아들로 주님 앞에 서는 것이, 내 모습 그대로 서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실 제가 어제 기도하면서 느낀 것은 많은 우리 목사님들이 사역이 잘 안 열리는 것 때문에 힘든 분들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본인 스스로 자격지심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자녀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 때문에 햇빛이 차단된 것처럼 하나님의 마음이 차단된 상태에 있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해 드리는 가운데 “내가 너를 아들로 사랑하는 자리에 너를 초청한다. 내가 너와 그렇게 있기를 원한다.”라는 감동을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오늘 찬양 중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자리로 초청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하나님 앞에 일꾼으로 섰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꾼으로 서니까 이건 피말리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전에 섬겼던 교회에서 목사님이 “우리는 하늘나라 공무원인데 지각하면 되겠는가?, 오늘 무슨 일을 했는가?”하고 물으면 참 힘들었습니다. 제가 ‘하늘나라 공무원’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시골에 가니 할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제 아내가 가끔 밥상가지고 오면서 오늘 밥값 했냐고 합니다. 그러면 탁 걸립니다. 왜냐하면 할 일이 없으니까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낙입니다. 그런데 ‘밥값 했느냐?’고 한마디 던지면 그것이 제게는 비수로 와서 꽂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한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이론으로는 다 압니다. “하나님, 저를 사랑하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중심에서는 탁 막혀 있습니다. 일꾼이 되어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너무 너무 힘들고 낙심됩니다. 진짜 주님 앞에 가지고 갈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때는 마음속에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생각도 나는 것 같습니다. 지내놓고 보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랑받을 짓을 했어야지요. 머리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내가 일꾼으로서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의식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못나가는 것입니다. 친밀함이 안 됩니다. 감히 죄송해서 못 들어갑니다. 내 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그런 자리에 있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에 돌아오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을 한 구절 찾아볼까요. 신명기 7장 6절입니다. 저는 여기를 보면 참 신납니다. 제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부분이 이 구절입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세 가지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첫 번째는 6절에 보배로운 소유물로 택하셨습니다.
여기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다는 말은 NIV 성경이나 원어에 보면 보배로운 소유물로 택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 것이나 주워서 종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배로운 소유물로 택하셔서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종 이전에 우리를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보배롭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배를 무심하게 버려두지 않습니다. 그 결과가 성민입니다. 거룩한 백성. 우리가 거룩해서가 아니라 의로우신,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셔서 우리가 거룩해집니다.
두 번째는 열렬히 사랑하십니다.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여기서 너희를 기뻐하셨다는 말은 ‘하솨크’라는 히브리말로 영어로 보면 ‘affection’ ‘열렬히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감정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열렬히 사랑해, 넌 내 아들이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 원해.”
제가 릭 조이너가 쓴 어떤 책을 다 읽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분이 책을 소개해서 책을 사놓고는 한 부분만 딱 보는데 들어오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어떤 자매가 커 가는데 열등의식, 거절감이 많습니다. 사실 열등의식은 거절감에서 옵니다. 그래서 그런 열등의식이 있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했습니다. 자기도 남자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하지만 언감생심 감히 기대를 못했습니다. “자기 같은 사람을 누가 좋아해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식사하는 날 그 남자가 자기를 뚫어지게 쳐다봅니다. 그래서 쳐다보았더니 그 남자가 깜짝 놀라면서 눈을 내리면서 “미안해요. 자매. 내가 자매를 보면 내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라고 말합니다. 그 자매가 좋기는 하지만 자기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려고 하는데 그 속에서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얘야. 지금 이 형제가 내가 너를 매일 보는 것처럼 보고 있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십니까? 심장이 터질 것같이 열렬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열렬히 사랑하십니다.
제가 어떤 때 기도하다보면 어떤 사람은 별로 하나님이 기뻐할 삶을 못산 것 같은데 이런 찬양이 자꾸 나옵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제가 볼 때는 하나도 안 기뻐할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를 보배로운 소유물로 열렬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보니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외모로 택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외모를 보고, 우리의 행위를 보고, 우리의 모습을 보고 사랑한 것이 아니고 그냥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일꾼으로 부르기 전에 아들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들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교제 가운데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면, 내가 하나님께 내놓을 것이 별로 없는 것처럼 느낀다면, 내가 하나님 앞에 항상 거절감의 의식을 가지고 섰었다면 그 사랑의 품에 보배로운 소유물로 택하신 사랑하는 아버지의 품에 안기시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이것이 사역자들에게 참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을 놓치게 됩니다. 오래전에 컨퍼런스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 부분을 감동하셨는데 잊어버렸다가 오늘 찬양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다시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사랑은 행동하는 사랑,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8절 “그런즉 너는 알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하나님은 행동하셨습니다. 속량하시고 구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행동하셨다면 오늘날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행동하십니다. 무슨 행동을 하십니까? 십자가에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놓았습니다. 우리를 보배로운 소유물로 택하시고 열렬히 사랑하시고 그냥두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무엇이 나옵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질투가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기 바라시고, 자기백성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키기 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께 눈 맞추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하나님만 유일한 목적이고 열망이기 원하시고, 우리가 우리 어깨에서 사역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종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아들로 어린아이처럼 사랑의 자리로 오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행위를 보고 결론을 내신다면 우리 가운데 살아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실을 보기 이전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족으로 부르셨고 당신의 의중과 의도를 보이십니다. 모든 우리의 약함을 깨뜨리시고 아버지의 친밀한 사랑 안에서 열렬히 사랑하신 사랑으로 우리를 안으시기를 원하십니다.
2] 순종이 열쇠입니다.
예언이 말로만 마친다면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감동대로 순종함이 필요합니다. 예레미야 27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8 만일 그들이 선지자이고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에게 있을 진대 그들이 여호와의 집에와 유다왕의 집에와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기구가 바벨론으로 옮겨가지 않도록 만군의 여호와께 구하여야 할 것이니라.”
그들이 선지자라면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다면 그들은 그 말씀이 응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감동대로 순종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심각한 문제는 말로 끝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 음성 듣는 자세를 가장 잘 가르친 사람이 엘리 제사장입니다. 사무엘상3장 10절에 보면 “종이 듣겠나이다. 말씀하옵소서.”라고 엘리 제사장이 사무엘에게 가르칩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가장 중요한 자세가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이 말씀할 때 종이 대청마루에 서서 “말씀만 하십시오. 금방 하겠습니다.” 이런 자세로 서는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런 자세로 듣도록 가르칩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 자신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못 듣습니다. 사무엘상 2장 30절에 보면 “나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멸시하는 자를 경멸히 여기리라.”라고 하십니다. 사무엘상 전체가 이 구절에 걸립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겼던 두 사람과 멸시했던 두 사람. 하나님을 멸시했던 두 사람은 엘리와 사울입니다. 이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두 사람을 세웁니다. 엘리를 대신해서 사무엘을 세우고 사울을 대신해서 다윗을 세웁니다. 원래는 이들에게 주셨던 약속이 존중히 여겼던 자들에게 넘어갑니다. 이들이 멸시했다는 말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반응하지 않는 것을 멸시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명의 선지자를 통해 엘리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무명의 선지자의 말을 듣고 당대 최고 영적 지도자였던 엘리가 돌이키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엘리는 그 말을 듣고 반응하지 않습니다. 2장 마지막까지도 무명의 선지자가 말하는 것으로 계속되고 3장 1절에 보면 엘리의 반응이 안 나옵니다. 엘리는 한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하나님께 놀랍게 쓰임 받았던 사사입니다. 최고의 영적인 리더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정작 무명의 선지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듣습니다. 그래서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눈이 가려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귀를 여십니다. 세 번 부르니까 사무엘이 엘리에게 갑니다. 그러자 엘리가 “너를 부른 분이 하나님이시다. 종이 듣겠사오니 말씀하옵소서.” 하고 말씀드리라고 가르칩니다. 그 자세를 알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러한 자세를 이해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아침에 엘리가 사무엘에게 사실대로 말해달라고 하고 그래서 사무엘이 사실대로 이야기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엘리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여호와는 선하시니 뜻한 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승으로서 제자에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멘트에 불과합니다. 정답을 말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진짜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옷을 찢고 재를 쓰고 뒤집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못 듣습니다.
너무 너무 중요한 것이 예언적인 기름부음이 우리 가운데 부어지고 그것이 자라기 위해서는 우리가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기 위해서는 친밀함이 필수입니다. 친밀함이 있어야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인식할 때 순종할 수 있습니다. 순종하면 더 깊이 알게 됩니다. 이것이 선순환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더 깊이 기름 부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기꺼이 순종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말씀대로 순종해보아야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또한 우리가 알게 됩니다. 물론 여기에 분별이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그런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이 시대에 그런 예언적인 기름부음을 통해 여러분과 제가 중보기도자로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아마 제 설교를 듣는 중에 여러분 중 많은 분은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 말할 분이 상당히 많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 사이즈의 일을 하나님의 때에 정확하게 놀라운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