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독수리처럼 솟구쳐라
1984년 올림픽 게임은 현대 역사상 가장 기억할만한 장관중의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뛰어난 공식행사들은 순수한 지원역할을 했습니다. 로스엔젤레스에서 있었던 그 사건을 표현한 것은 세계 쇼의 수도라고 하는 할리우드의 명백한 영향이었습니다 ! 개회식과 폐회식 행사들은 수천개 가운데 각각 한 가지 배역을 가진 기상천외할 작품으로 정상에 올랐습니다. 조직위원회는 전 세계 수 십억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 위해 어떠한 대가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나는 동말레이지아의 사라왁(Sarawak) 선교 여행 중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시간을 더 연장해서 기도가운데 주님과 만난 후, 타임지(1984. 8월6일자)에서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개막식 행사에 대한 기사를 읽고 있었습니다. 은밀히 묘사한 어떤 도전적인 기사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그 쇼를 집중하게끔 했습니다.
개막식 행사 계획은 훈련된 한 마리의 대머리 독수리를 포함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미국의 상징인 그 독수리로 하여금 공연의 한 부문을 담당하게 할 목적이었습니다. 그 독수리는 주경기장 서쪽 언저리로부터 솟구쳐서, 국가(國歌)가 연주될 때 경기장 필드로 급강하하여, 올림픽의 상징인 5개의 원 고리 모양의 연동장치로 만들어진 횃대-새가 앉을 자리-에 안착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생각입니까! 얼마나 훌륭한 경험입니까 ! 전 세계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사람들과 그리고 메인 스타디움 안에 있는 수백만의 눈들이 보는 앞에서 펼쳐지는 그 공연의 특권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 마리의 미국대머리 독수리를 사로잡는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매릴랜드州 로렐시에 소재한 The Patuxent Wildlife Reaserch Cener로부터 가져온 ‘폭격기(Bomer')라는 이름이 붙여진 쓸만한 그 새는 거의 22년 동안 날아보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스티브 하디라는 전문적인 새 조련사가 그 일을 위해 뽑혔는데 그에 따르면, “폭격기)는 작고 뚱뚱한 한 마리의 칠면조같이 보였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디는 폭격기의 몸집을 다이어트 시켰습니다. 또한 그는 독수리의 호의를 얻기 위해 밤낮으로 폭격기와 함께 지냈으며 심지어 안락의자에 앉아 팔에 새를 안고 졸면서까지 정성을 쏟았습니다. 정성스런 인내심과 유인을 위한 보상으로 고기를 주면서까지, 조련사 하디는 폭격기가 날수 있도록 가르쳤습니다.
독수리 ‘폭격기’가 예행연습을 위해 주 경기장으로 올 시간이 되었습니다. 독수리는 정해진 일과에 따라 실습했습니다. 두 번의 불시착을 일으켰지만 경기를 수행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폭격기는 스트레스로 인하여 죽어버렸습니다. 타임지는 이렇게 해설했습니다. “그 새는 뚱뚱했고 수년동안 나약할 정도로 귀하게 자라왔다. 그리고 독수리와 같이 행동해야 할 부름을 받았을 때 그만 실족해 버렸다.”
이것은 그 독수리의 인생에 대한 얼마나 슬픈 주석입니까 ! 예식행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하는 인생의 기회가 여기 있습니다. 독수리는 자신이 만들어진 것이 단지 날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독수리는 자신의 숭고한 목적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 기사들을 읽으면서, 성령의 확신이 나에게 강력하게 임재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눈을 열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이 사건과 똑같이 슬픈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자신의 인생과 사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높이 솟구쳐 오르는 영적 독수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폭격기’와 같이 수십 년간 나약하고 뚱뚱하게 자랐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믿는 자들이 영적 독수리와 같이 날도록 부름 받을 그 날이 오고 있다. 그날에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떨어질 것이다!”
나는 호텔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고 주님께 울부짖었습니다. “주님, 저를 당신을 위하여 날 수 있는 영적 독수리로 만들어 주십시오. 제발 우리 교회를 당신의 영광을 위해 높이 솟구쳐 오르는 영적 독수리의 공동체로 빚어 주십시오. 그래서 주님 나라의 사역에서 가장 높은 목적을 이루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날도록 부르심을 받을 때 우리로 하여금 결코 실족하지 않게 해 주옵소서!”
사도적 공동체의 형성
이년 후, 1986년 8월17일, 나는 우리가 임대한 싱가폴의 큰 강당 연단에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새로 개척된 교회의 첫 번째 예배 설교를 위해서였습니다. 설교강단으로 다가서고 있을 때, 성령께서는 내 마음에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오늘 새로운 아기가 태어나느니라!” 그 순간 내 마음속에 “이 전(殿)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학개 2장9절의 말씀이 홍수처럼 덮었습니다.
나는 “더 위대한 영광”이라는 말씀에 흥분되어 마치 사멸될 것 같은 깊은 감동에 빠졌습니다. 나는 단지 이 새 교회 안에 평강이 있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찾았습니다. 그때 나는 전임 교회에서 리더쉽의 몸부림으로부터 탈출한지 막 1년이 좀 더 되었습니다. 나는 그 교회에서 자라났습니다. 그 교회는 시종일관 견실히 성장해오고 있는 성경을 믿는 교회이며, 그곳은 나의 십대시절 내내 영적 고향이었습니다. 교회의 지도력은 사역으로 부르시는 나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을 명확하고도 애정 어린 눈으로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미국에 있는 신학교에서 훈련받도록 보내주었습니다. 나는 유학을 마치고 모교회의 목사로 돌아왔습니다. 5년만에 교회는 나의 리더쉽 아래 300명에서 1,600명으로 성장했습니다.
목회직 5년째 되는 해, 나는 기대하지 못했던 성령님과의 만남(encounter)을 경험했습니다. 성령께서는 내 마음을 하나님의 능력의 실재로서 열어주셨습니다. 그 만남에서, 나는 새언어(방언)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방언은 우리 시대와 날에 결코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일어나서는 안될 것이라고 나의 회중들에게 말했던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이 특별한 방언의 은사가 성령의 다른 능력의 은사들과 함께 이미 사도시대에 끝났다고 분명하게 가르쳤었습니다. 사실, 나는 교인들을 그렇게 가르쳤는데, 교회의 리더쉽은 내 체험의 유효성과 신학적 관련성을 즉각적으로 거부했습니다. 내가 만약 그들의 신발을 신고 있었다면 내가 했었을 바로 그것을 그들이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혼동되었습니다. 나의 체험은 나의 깔끔하고 산뜻한 신학을 완전히 압도했습니다. 나는 그 점에서 사람들에게 나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이해를 줄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나는 내 마음 안에 있는 성령의 증거를 타협할 수 없는 그 경험의 실제를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나의 사역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래지 않아 교회 리더쉽안의 신학적 차이점들은 나의 개인적 성실성을 공격하도록 변질시켰습니다. 여러 달간의 고통스런 몸부림 후에, 마침내 나는 교회의 담임목사직을 사임하도록 요청 받았습니다.
이 괴로운 과정의 한복판에서, 주님은 나에게 성경으로부터 분명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요16:21). 주님께서는 새로운 사역으로 나를 일으키기 위하여 친히 그가 내 인생 안에 “새 아기”를 낳고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통과하고 있던 그 고통스런 갈등들은 그 아기를 넘겨주기 위해 수고의 고통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새 아기의 탄생
1986년 8월 17일 주님께서 “아들아, 오늘 새 아기가 태어나느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Faith Community Baptist Church(FCBC)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내 영에게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하나님의 약속은 사실로 증명되었습니다. 이 사역의 영광은 나의 생각이나 의문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날 이후 우리 교회는 평강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쓰고 있을 때, 아기는 상당히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간 예배 참예자는 10,000명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과거 지난 10년간, 우리는 6,400명의 새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같은 기간에 약 17,000명의 사람들이 처음으로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대부분의 의미는 우리와 함께 경배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또한 그 주간 동안에 셀 그룹 사역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들 작은 그룹들에서, 우리는 모든 신자가 복음의 사역자로서 평균적 헌신의 수준보다 더 높은 부르심 앞으로 훈련됩니다.
우리 교회의 청지기직에 대한 최근 설문 조사는 구제금의 평균이 모든 우리 교인의 종합 수입의 25%이상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의 정기예산(1,200만 US달러)을 설명해 주는데, 예산의 20%는 세계선교비로, 10%는 공동체 예배비로 쓰입니다. 게다가 교회는 19,00만US달러의 값을 지닌 두 개의 오디토리움(큰 강당시설)을 소유하고 있는데 그 대금은 완전히 지불되었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를 사도적 공동체로 빚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복음화에 헌신한 셀처치로서 세계적인 영향과 충격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수아 5장으로부터의 교훈들
FCBC는 교회분열의 고통스런 경험에서 벗어났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 가운데 가장 어려운 시간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사도적 공동체는 교회 리더의 내적 생활과 함께 시작됩니다. 주님 앞에서 나의 깊은 깨어짐 가운데 그분은 내 안에 매우 중요한 영적 교훈들을 심어 놓았습니다. 갈등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 5장의 말씀을 가지고 나의 삶속에서 강력하게 사용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진리는 그 이후로 내 삶과 사역을 붙들었으며, 교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 5장은 놀라운 말씀의 장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을 보면서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흐르는 물은 멈추었고, 그래서 그들은 마른 땅 위로 건널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5장1절은 그 땅의 왕들이 이스라엘 족속을 직면할 용기를 완전히 잃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그러나 유대 민족은 지금 자신들이 공격받기 쉬운 위치에 놓여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요단 평지 위에 섰고, 다시 흐르는 요단 강과 그 땅에서 가장 견고한 여리고 성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워져 있었습니다.
만약 내가 여호수아였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할지 정확히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체할 시간이 더 이상 없다. 평지는 적으로부터 방어할 구덩이를 팔 여지가 없다. 사람들을 재편성하자. 우리는 여인들과 아이들을 보호할 얼마의 군대를 배치할 것이고, 그리고 나머지 젊은 사람들은 여리고를 공격하도록 이동시킬 것이다. 결국, 이 땅의 왕들은 두려워한다. 그들의 두려움을 이용하자. 지금이 적을 칠 가장 좋은 시간이다. 돌격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른 생각을 가지셨습니다. 2절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내가 여호수아였다면, 나는 하나님과 이렇게 논쟁을 벌였을 것입니다 : “주님, 이것은 지금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당신은 아시지 않습니까? 할례는 우리 남자들을 거의 일주일 동안 꼼짝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할례 사건은 세겜족속들이 야곱의 아들들에 의해 얼마나 정확히 섬멸된 그것입니다.”(창세기 34장을 보라).
할례는 놀랄만한 하나님의 유일한 지시가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 5장 후반에,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민족들로 하여금 유월절을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다소 시기상조처럼 나에게 일격을 가했습니다. 유월절 축제는 해방의 축제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이치적으로 따졌을 것입니다. “주님, 지금 유월절 축제를 행하는 것은 약간 주제 넘는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전쟁전의 승리
내 사역의 궁지 가운데서 이 말씀들을 묵상했을 때, 주님께서는 여호수아 5장의 중요성을 가지고 나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주님은 여호수아 5장이 여호수아 전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장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문맥은 “전쟁전의 승리”라는 적절한 제목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 정복의 남은 부분의 진정한 승리를 움켜쥐고 있는 것입니다. 남은 책의 군사적 위업들은 여호수아 5장에서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 받은 승리의 결과인 것입니다 ! 이 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난 싸움에 승리한 것입니다. 나머지 승리는 단지 그 승리의 전리품들을 모아 놓은 것을 다시 세는 것일 뿐입니다.
여호수아 5장에서, 주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을 상속받는 세대가 되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세 가지 중요한 진리들 가르쳤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주님은 내 인생에 이들 세 가지 교훈들을 심어 주셨는데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깨닫는 가운데 여호수아 세대와 같이 일어날 사도적 공동체를 세우도록 사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들 세 가지 교훈들은 세 가지 질문의 형태를 취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그 질문들에 답한다면, 우리는 인생의 삶과 사역에서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할 것입니다.
나는 누가 아닌가? 네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
첫 번째 질문은 “나는 누가 아닌가?(Who Am I Not?)"입니다. 승리를 위한 첫 단계는 고통스러운 마음의 할례를 요구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냉엄하고 혹독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에서 고통스러운 일을 통해 새 일을 낳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속의 영적교만과 이기적인 야망을 자르셨습니다. 나는 남침례교목사로서 싱가폴의 가장 성공적인 사역을 하고 있는 교단에 속해 있었습니다.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학교를 졸업할 때, 나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는 이미 끝났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방언을 하게 되는 성령체험으로 인해 나의 깔끔한 신학은 완전히 수술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영적 세계관을 재 정돈시키고 있었으며, 동시에 나의 교만을 뒤흔들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내 체험에 대해 신학적 입장으로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나의 파손된 신학을 성령 위에 재건축할 수 없었습니다. 은사주의자라는 공격은 나로 하여금 그들과의 사이를 벌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돌아갈 어떤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해할 수 없을 만큼 자신감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한 나의 체험은 결코 부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 교회 지도자들의 공격을 침묵시킬 만큼 충분히 그리고 빨리 나의 신학적 이해를 재구성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전에 나에게 큰 호의를 가지고 도왔던 지도자들은 도리어 나를 공격했습니다. 나는 어두운 동굴에 갇힌 것 같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교회에서 함께 성장했던 바로 그들이 나를 해고했습니다. 참으로 암담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모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나의 정열적인 사역은 이전 5년보다 500%이상 성장하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나는 성공을 추구하는 사역의 허무함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성공위주의 사역은 모두 무가치한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큰 교회로 성장하고자 애쓰는 나의 이기적인 야망의 잡초를 제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은 나에게 그분의 얼굴을 구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고 내 사역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그분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배웠습니다.
주님은 또한 내 속에 있는 분노와 쓴 뿌리라고 하는 영역에서 주요한 할례를 행하셨습니다. 2년 동안 나는 매순간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겪었는데, 그것은 내가 해고당했다는 마음의 상처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 고통은 정말로 심각한 것이었는데 나는 마음의 문제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잠재된 내 마음의 쓴 뿌리는 나를 공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988년 1월, 주님께서는 이전교회에 찾아가 그들에게 용서를 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히 그 말씀을 순종했을 때, 주님은 나를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셨습니다. 그 일 후에, 우리 FCBC는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할례를 받았을 때, 그들은 승리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여호수아 5장9절에서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같은 면에서, 내가 마음의 할례를 하게끔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FCBC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 교훈은 그때 이후로 수년동안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다스려왔는가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회개는 항상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능력을 뿜어내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 그의 승리를 축하하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 5장으로부터 내 마음을 불러일으킨 두 번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Who Am I ?)”입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의 할례뿐만 아니라 주안에서 우리의 승리를 축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분이 얻으신 승리 말입니다 !
이것은 유월절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유월절은 유대 백성들에게 그들이 구원받은 백성임을 분명히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첫 전투를 착수하기 전에 주님의 승리를 축하해야 했습니다. 얼마나 그들이 특별했는가를 알면서 승리의 위치로부터 이동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역시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께 특별한 존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승리를 확신할 때, 우리는 그분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사역의 외적인 결과들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영적 신분의 내적인 안정성 가운데 자신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야만이 우리는 사역의 성취라고 하는 올가미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너무나 자주 우리는 성공의 기초 위에서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의 결과로서, 우리는 육신의 일로 사역을 감행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하려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노력에는 축복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만으로 인해 소멸시키거나, 책임감의 무게를 가지고 밀어 쑤셔 넣는 것으로 자신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사역 안에 있는 충돌의 열기에서, 주님은 그분 안에 있는 나의 의미를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이 중요성은 나에 대한 그분의 위대하신 사랑 안에서 찾아집니다. 어느날 저녁, 나는 딸 아이들에게 성경을 읽어 주고 있었습니다. 프리실라는 6살이고 미첼은 5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세례 받는 장면과 관련된 마가복음 1장을 읽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비둘기형상으로 예수님의 머리 위로 내려 앉았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마41:11).
수년동안 나는 이 하늘의 선포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나에게 신성한 기도서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이 문장은 나와 나의 딸들에게 살아 있는 말씀으로 찾아 왔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던 NIV어린이성경은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너는 나의 아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내가 너를 기뻐하는구나.”
이 단어들의 단순성은 우리에게 살아 있는 문장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갑자기 하나님 사랑의 임재가 방안 가득히 채웠습니다. 나는 딸들을 바라보았고, 그리고 아이들의 볼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세례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 그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의 발코니에서 구부려 그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신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날 저녁 내 딸의 침대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구부려 우리의 귀에 속삭이셨습니다. “너는 내 아들, 내 딸이야.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내가 나를 기뻐하는구나.”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결코 이 같은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시아문화는 아이들이 머리를 의기양양하게 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러한 긍정의 말에 대해서 난색을 표합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우리가 잘못되었다는 것과 결코 옳은 일은 잘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성장합니다. 모든 것이 내 인생에서 산산조각 났을 때, 주님은 그분의 사랑으로 나를 껴안으셨습니다. 주님은 따뜻한 사랑으로 얼마나 나를 기뻐하시는가를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안에서 발견되는 존엄성
나는 나의 진정한 가치가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에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호의에 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예수께서-인간의 수준에서- 그의 세례 이후에 따르는 40일간의 유혹에서 결코 아버지를 저버리지 않았던 것인가를 이해했습니다. 그의 가장 어려운 고통의 순간에, 예수님은 결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예수께서 승리를 얻으신 것은 그분이 아버지의 이 말씀,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를 항상 기억했기 때문임을 믿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타이틀은 “목사”나 “박사”가 아닙니다. 가장 위대한 타이틀은 단순히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6)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가를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사역에서 우리 자신을 증명하려는 몸부림을 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때 우리의 손에 사역을 축복하는 자유를 가지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8:19에서 말한 이유입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서 주님의 승리를 축하할 때, 우리는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때 우리가 위대한 품위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며, 우리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도적 공동체는 모든 사람이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에서 오는 존엄성과 가치를 가지고 섬기기 위해 움직이는 것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이 유월절 축제를 할 때,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으로 기억했을 때, 승리는 보장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늘로부터 오는 만나가 축제 다음날 멈춰진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의 생산물을 먹어야 했습니다. 승리는 첫 전투에 앞서서 그들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역에서의 투쟁과 경쟁에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서의 인정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 안에서 나의 의미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를 섬기는가? - 당신의 선장의 명령에 따르라
내가 누가 아닌가를 알고,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될 때, 여호수아 5장에 있는 “나는 누구를 섬길 것인가?”라는 세 번째 물음에 답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할례와 유월절 축제를 마쳤을 때, 여호수아는 여리고 가까이에서 주님의 군대장관을 만났습니다. 여호수아는 그에게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수5:13). 거기에 대한 대답은 “둘 다 아니라!”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의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그 질문은 바뀌어야 했습니다. 즉 ‘우리가 주를 위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주를 위하지 아니하는가?“로 말입니다. 주인 되신 선장이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수5:15)라고 말했을 때, 여호수아는 그분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자라났던 애굽에서는 단지 일부 사람들만이 신을 신지 않았습니다. 신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녔던 사람들은 바로 노예들이었습니다. 주님 앞에 맨발로 서는 것은 그분의 종이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의 종일 따름입니다. 선장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마음을 할례를 행하고, 그분의 승리를 찬양하기 전까지, 우리는 진정으로 자신의 삶과 사역의 선장으로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서 인정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자주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삽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야심, 교만, 그리고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만큼 우리의 사역은 자만과 자기중심적인 것을 드러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머리가 되지 않는 사역에서 온전히 일을 할 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담당하시도록 우리가 따를 때, 그분의 축복이 강력히 살아 있는 물처럼 쏟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FCBC에서 경험한 것들이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에 FCBC안에서의 주님이 베푸신 은혜를 반추해 볼 때, 우리 교회의 놀랄만한 성장의 비결은 주님이 부어주신 다음의 네 가지 요소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1) 성장을 위한 분명한 비전과 전략, (2) 이적과 기사 가운데 강력한 성령의 임재, (3) 강력하고 기름부음 받은 지도자, (4) 새 부대로서 셀처치 구조 등입니다. 본서의 나머지 부분은 이들 요소들을 상세히 논의할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간단히 진술한 내용만 실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누가 아니며, 우리는 누구이고 그리고 우리는 누구를 섬길 것인가를 아는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우리 교회가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솟구치는 것을 배웠다는 사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