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과 사울의 통치(사무엘상)
1. 사무엘의 탄생 사무엘의 탄생이야기는 사사 삼손의 탄생이야기와 유사하다. 한나의 기도로 탄생한 사무엘은 하나님께 바쳐지고 성전에서 일하게 된다(삼상 1:1-2:21).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식이 없을 때 하나님께 서원하는 경우가 많다. 아들을 주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것이다. 딸을 주면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 경우를 보면 딸은 별로 선망의 대상이 아니었나 보다. 그러나 어디 여자 없이 역사가 존재할 수 있을까? 남성위주의 사회가 낳은 기형적인 모습이라 하겠다. 성서에서의 탄생설화는 그 인물이 장차 큰 일을 하게 될 때 소개된다. 모세가 그랬고 삼손을 비롯해서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이야기가 그렇다. 종종 탄생이야기는 그 인물의 비범함을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며 대개 후대의 사가(史家)들에 의해 미화된다.
[그림: 엘리가 사무엘을 가르치고 있다. 게리트 도우 작(Gerrit Dou, 1613-1675).] 2. 엘리의 몰락
이스라엘은 사사시대의 후반기에 들어가면서 제사장의 권한이 강대해지고 제사장은 사사의 역할을 겸한 것 같다. 사무엘은 성전의 제사장으로서, 때로는 예언자로서, 때로는 전쟁 영웅으로 활약하는 복합적인 인물이었다. 마치 모세가 다양한 모습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중재하는 예언자로 활약했듯이 사무엘 역시 그 모습이다. 예언자사상을 강조하는 신명기사가(DH)의 정신이 역사서에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역시 신명기 정신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야훼주의자들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웅은 당연히 예언자의 모습으로 비추어 진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에게 '선지자'(나비)로서의 명성을 얻고 하나님의 종으로 추앙받는다(삼상 3:19-21). 사무엘의 탄생설화가 엘리가문의 몰락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등장한 것을 볼 때 엘리와 사무엘 사이에 정치적 알력이 있었던 것 같다. 엘리의 자식들이 저지른 죄는 블레셋 족속의 침략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환난을 겪게 된다.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의 법궤가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은 전쟁터에서 죽게 된다. 제사장이자 사사였던 엘리 역시 의자에서 넘어져 죽는다(4:1-22).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빼앗긴 것이나 다름 없었다. 고대의 전쟁은 사람들 간의 전쟁보다는 자기들이 믿는 수호신(守護神)간의 싸움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벌인 전쟁은 모두 성전(holy war)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법궤를 빼앗긴 것이다.
블레셋은 법궤를 빼앗아 자기들의 신(神) 다곤의 곁에 두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법궤를 빼앗은 사건은 고대 근동에서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다. 승리자들은 적으로부터 노획한 신(들)을 전승기념물로 간주하고 자기들의 신전에 진열하기도 했다. 그것은 자기네의 힘을 과시하면서 패전국의 무기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때로는 노획한 신을 적에게 돌려주기도 했지만 그것은 패전자들에게 굴욕감을 더해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야훼의 법궤를 빼앗긴 것은 수치중의 수치였다. 그래서 역사가는 법궤에 얽힌 이야기를 다시 해야 한다. 야훼의 법궤 옆에 있던 다곤 신상이 무너져 내려 박살이 났으며, 블레셋 사람들은 피부병으로 고초를 겪는다. 자기들에게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하고 야훼의 법궤를 가져온 블레셋 사람들은 그 법궤를 다시 이스라엘에게 돌려주기로 의견을 모은다(삼상 5장). 노획한 신을 되돌려보내는 것도 함부로 할 수 없었나 보다. 그들의 제사장과 복술가들이 모여 야훼께 속건제(贖愆祭)를 드리고, 금으로 만든 다섯개의 종기모양과 쥐형상을 수레에 실어 법궤와 함께 이스라엘로 보내기로 한다. 이들의 말대로 야훼의 궤는 벧세메스라는 지역에 옮겨졌는데 그 지방사람 역시 야훼의 궤를 보았기 때문에 오 만명 이상이 죽게 된다(삼상 6장). 법궤설화는 이스라엘의 체면을 살려주고 있다. 법궤를 잃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엘리가문의 죄악이요, 그로 인한 블레셋 족속의 침략은 일시적인 재난에 불과하다. 블레셋의 다곤 신도 야훼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며 야훼의 법궤를 잘못 취급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나 보다. 엘리의 아들들이 타락한 덕택에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사무엘도 나이가 들자 똑같은 경험을 하게된다. 사사들이 된 사무엘의 아들들이 뇌물을 받고 재판하는 등 백성의 원성을 사게 된다(삼상 8:1-3). 이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와서 왕을 세워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른다. 왕을 세워달라는 요구에 사무엘이 순순히 응할 리가 없다. "지상의 왕을 요구하는 것은 야훼를 거역하는 것"이라는 사무엘의 말에도 백성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왕을 요구한다. 사무엘은 왕제도의 폐단을 들어 백성들을 설득한다. 왕을 세우면 그 왕은 백성들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군인을 만들고 왕궁을 위해 노역하게 하며, 딸들은 시녀로 전락하게 될 것이란다. 백성들과 사무엘 사이의 실랑이는 결국 사무엘의 양보로 결말지어 지고,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선택하기에 이른다(삼상 8:4-22). 4. 이스라엘의 왕권 형성
이와 비슷한 경우가 우리 역사에서도 발견된다. 옛날 진한 땅에 여섯개의 촌락이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 6부의 조상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되어 있다. 6부의 조상들이 각각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 언덕에 모여 의논한다. "우리들이 위로 임금이 없어서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제멋대로 하고 있으니,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을 삼아서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삼한시대를 거쳐 왕조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내부적인 혼란을 극복하고 대외적으로 방어태세를 굳건히 하기 위해 여러 부족이 연합하여 왕권을 확립한 것으로 여겨진다. 진한의 부족을 병합하여 신라의 초대왕이 된 이가 바로 박혁거세로 알려지고 있다. 5. 왕이 된 사울
하지만 사울이 왕이 된 사실을 백성은 아직 모르고 있다. 이 일은 사무엘과 사울 사이에 은밀하게 이루어진 것이다(10:1). 사무엘의 지시로 암나귀를 찾은 사울은 예언자의 무리들이 있는 산에 이른다. 이 때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임하자 그는 예언자처럼 예언을 하는 체험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울도 선지자 가운데 하나더냐"라는 속담을 만들어 내게 된다(10:2-13). 이 말은 "미운 오리새끼 처럼 환영을 받지 못했던 사울이 예언자일 수 있느냐"라는 빈정대는 말로 종종 인용된다. 이것은 사울을 부정적으로 보는 신명기사가의 편견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이미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은 이제 백성들 앞에서 정식으로 왕이 되는 의식(ritual)을 거친다. 사무엘은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으고 온 지파 가운데서 사울을 선택한다. 제비를 뽑아 왕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 뽑혀 명실공히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다(10:17-24).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기서 사울과 사무엘은 이전에 서로 만난 사실이 없는 것 처럼 행동하고 있으며 소년이었던 사울은 이제 어느덧 장성한 청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사울이 비밀리에 왕이 된 사건과 공개적으로 왕이 된 사건을 별개로 취급한다. 두 이야기는 각각 후대에 전해지다가 성서기자에 의해 연속된 이야기로 소개된 것이리라. 암몬 사람들이 길르앗 야베스를 침략하자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이 사는 기브아에 구원을 요청한다(삼상 11:1-4). 사울은 마침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이 소식을 전해 듣는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내리고 암몬족은 사울에게 크게 패한다(11:5-11). 이미 왕으로 세워진 사울은 밭에서 소를 몰고 있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영을 받아 전쟁영웅이 되어 적을 물리친다는 이야기는 사울이 아직 사사의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자 벡성들은 사무엘에게 "누가 사울을 왕으로 세울 것을 반대하느냐"고 항의하면서 길갈로 가서 사울을 다시 왕으로 세운다(11:12-15). 우리는 사울에 얽힌 이야기가 교묘하게 뒤섞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사울은 사무엘에 의해 비밀리에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는가 하면(삼상 10:1), 미스바에서 공개적으로 뽑혀서 왕이 되는가 싶더니(10:24), 이제는 암몬사람을 물리친 것을 보고 길갈에서 다시 왕으로 추대된다. 아마 사울이 왕이 된 이야기가 다양하게 전승된 모양이다. 성서기자가 사울의 이야기를 전하는 과정에서 여러 이야기를 줄거리에 맞게 배열한 것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볼 때 서로 일치하지 않은 면이 발견되며 그 원인이 사무엘과 사울 사이의 갈등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왕을 세우는데 주저했던 사무엘측과 새롭게 부상하는 사울측의 대립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을 변호하는 연설을 한다(삼상 12장). "내가 사사로 있는 동안 백성들에게 나귀나 소를 취했으며 누구를 속인적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백성들은 자기들을 속인적이 결코 없었다고 응수한다. 이에 사무엘은 야훼가 왕되심을 다시 한번 천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이 왕을 요구하자 '야훼께서 지상의 왕을 허락하신 것'이라는 요지의 설교를 한다(12:12-13). 왕을 세웠으니 이스라엘이 야훼를 좇으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고 악을 행하면 왕과 함께 다같이 멸망할 것이라고 말한다(12:14-25). 사무엘이 백성앞에서 자신의 통치권을 새로 임명된 왕에게 위임하는 모습이며, 다른 한편으로 아직도 자신의 위치가 확고하다는 것을 과시한다. 하나님께 범죄한다면 왕과 함께 백성을 멸할 것이라는 사무엘의 말은 사울의 행위를 지켜보겠다는 으름장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대리하는 제사장으로서의 사무엘은 당시만 해도 왕을 세우고 페위하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도: 사울왕국의 경계: 주전 1025-1006] 사무엘은 화가 나서 길갈에서 떠나가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 만이 백성들과 함께 블레셋의 공격에 대비한다(13:15-23). 설상가상으로 사울은 아들 요나단과의 갈등까지 겪게 된다. 요나단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울에게 알리지도 않고 병기든 소년과 단 둘이서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가 그들을 무찌른 쾌거를 이룬다. 나중에 사울이 알고 블레셋 진영으로 가보니 블레셋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도망간다(14:1-23). 7. 사울과 요나단의 갈등
요나단의 범죄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울은 제사장에게 이끌려 하나님께 신탁을 구한다: "내가 블레셋 사람을 쫓아 내려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겠나이까?"(14:37). 하지만 가부(可否) 간의 결정이 나오리라고 생각한 사울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은 그날 대답하지 않았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제사장의 신점을 통해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은 것이다. 신탁을 얻지 못한 사울은 사울은 누군가가 죄를 지었다고 단정하고, 죄인을 가려내기 위해 온 백성을 소환한다. 사울은 백성들을 한 편에 세우고, 자신은 요나단과 함께 다른 한 편에 선다(40절). 제비뽑는 방식으로 둘 가운데 한 쪽을 택한다. 그 결과 사울과 요나단이 있는 쪽이 먼저 뽑히고(41절), 그 다음으로 사울과 요나단 중에서 요나단이 범인으로 지목된다(42절). 이제 요나단은 사울의 말대로 죽어야 한다. 이 때 백성들이 요나단의 생명을 구한다. 비록 요나단의 범법행위가 백성에게 불쾌감을 주고 공평하지 못한 감정을 심어주었지만 블레셋의 위협에 직면해 있는 그들로서는 요나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울의 금식령과 요나단이 금령을 어긴 사건은 사울의 운명을 예시해준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버림받고, 이제는 아들 요나단까지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로 등장한 것이다. 게다가 다윗의 등장은 사울을 사면초가에 밀어넣었으며 그 결과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8. 제사보다 나은 순종?
여기서 발생한 유행어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흔히 듣는 이 구절은 그동안 제사장의 임무를 수행하는 목회자의 권위를 옹호하는데 좋은 방편이 되어왔다. 목회자는 사무엘을 대신한 것이요, 그에게 대적하는 사람은 사울을 대변한다. 한번 생각해 보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해진 사무엘의 명령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우리가 여호수아 1-12장에서 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에 의해 가나안 사람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전멸한 것일까? 하나님은 과연 그렇게도 인정이 없으신 분인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의 승리를 지나치게 강조하기 위한 고대인의 글쓰기 습성때문일 것이다. 여기서만 해도 그렇다. 아말렉을 무찌를 때 남녀노소를 비롯하여 어린 아이까지 진멸하라고 명하는 사무엘의 주장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인류 역사상 그렇게 잔인한 전쟁은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울이 가나안 사람들을 생각해서 전리품을 남긴 것은 아니다. 왕만 사로잡고 백성들은 진멸하였으며 전리품 일부를 남긴 것이다. 사울은 지금까지 한번도 사무엘에게 대항한 적이 없다. 그는 늘 사무엘에게 순종했으며 잘못을 지적받을 때 사죄하곤 했다(15:24-25). 이점에서 볼 때 사울은 자기가 챙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리품을 남겨둔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야훼의 명령을 어긴 사울은 죄인이 되고 그의 왕권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인은 사무엘의 무조건적인 권위에 복종할 수는 없다. 이스라엘의 상황과 오늘의 상황이 다를 뿐더러 제사장의 권위는 그 인품과 하는 일의 정당성에서 나오는 것이지 제사장이라는 사실 하나 만으로 주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수 많은 목회자들은 제사장의 직임을 남용하고 있지 않은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무조건적인 강요는 교인을 우매화시키고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합리적이고 바른 인격안에서 제사장은 자기의 소임을 다해야지 종교적인 특권으로 다른 사람을 억압해서는 안될 것이다. 9. 왕이 된 다윗
10. 사울과 다윗의 갈등
사울은 계속해서 다윗을 죽이려 하고 요나단은 사울을 설득하여 다윗을 살리려 한다(19:1-7). 아내 미갈 역시 다윗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다윗은 결국 사울을 피해 사무엘에게로 피신한다(19:18-18). 다윗이 라마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사울이 라마의 나욧으로 향하는 도중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예언을 한다. 종일 벌거벗은 몸으로 누워 예언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사울도 예언자 중의 하나이냐"라고 했단다(19:19-24). 여기서 우리는 예언현상을 살펴볼 수 있다. 사무엘은 라마에서 예언자가 되고자 하는 생도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들이 무리를 지어 예언하면서 생활을 유지하고 있을 때 그 근처에 가는 사람들 역시 예언의 영을 받은 것이다. 예언의 영이 임하면 황홀경에 도취하면서 무아지경에 이른다. 그래서 자신이 벌거벗은지도 모르고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중얼거린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예언한다(나비)'라고 한다. 사울은 예언자의 일을 수행하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아지경에 빠지면서 예언을 한 것을 볼 때 보통사람도 가끔 겪는 현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아무데서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의 무리들이 거하는 산당이나 성전에서 종종 일어난다. 현대인도 가끔 예언하는 은사를 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예언의 능력을 받았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사울의 경우를 보라! 다윗을 죽이러가기 위해 쫓아가다가 예언의 영을 받지 않았는가? 이 때의 영은 아마도 악령이었을 것이다. 살기가 등등한 사울에게 선한 영이 임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특별한 종교현상을 동반하는 예언은 우리의 무전통(巫傳統)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성령의 은사를 가시적인 체험으로 이해하는 일부 교인들은 예언이나 방언의 은사를 사모할 수도 있지만 바울사도가 말한대로 사랑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전 13:1-3). 다윗이 라마에서 나와 요나단에게 가서 사울이 왜 자기를 죽이려는가를 알고자 한다(삼상 20장). 요나단에 의해 확인된 사울의 계속적인 살해의도는 다윗으로 하여금 또다시 도망하게 만든다. 다윗은 요나단과 결별하고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피신한다. 아히멜렉에게 야훼께 바치는 거룩한 떡(진설병)을 얻어 먹고, 골리앗에게서 뺏은 칼을 얻어 도망간 곳이 블레셋 영역의 가드였다. 그곳에서 다윗은 실성한 사람처럼 행동하다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또 다시 아둘람에 있는 굴속으로 피신한다(삼상 21:1-22:2). 형제들과 함께 모압 땅 미스베로 간 다윗은 모압 왕의 도움으로 피신생활을 하다가 유다 숲속으로 들어간다(22:3-5). 이에 뒤질세라 사울은 다윗을 붸아갔지만 이미 떠난 뒤엿다. 놉에 있던 제사장들이 다윗을 피신시켰다는 이유로 처형당하고 그 중 한 사람인 아비아달이 살아서 다윗에게 이 사실을 고한다(22:6-23). 사울에게 추격을 당하고 있는 다윗에게 구원의 요청이 왔다. 블레셋이 그일라 지방을 탈취하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것이다. 진퇴양난의 기로에서 다윗은 야훼 하나님께 신점(divination)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 다윗시대까지 제사장들은 우림과 둠밈을 이용하여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곤 했다. 전쟁을 하거나 왕을 세울 때, 혹은 도읍을 정할 때 가부간의 결정을 하고자 신점을 구한것이 통례였다. 다윗 옆에 제사장 아비아달이 있었던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 신점은 제사장에 의해 수행되었을 것이다(참조. 삼상 23:6). 비록 여기서 우림과 둠밈이 사용된 흔적은 없지만 '야훼께 여쭙다'(샤알)라는 히브리어 동사가 신점행위를 드러낸다.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 백성을 구하라는 결과를 얻자 부하들이 다윗을 가로막는다(23:22). 사울에게 쫓기고 있는 상황에서 블레셋과 전투를 벌일 수 없다는 것이다. 다윗은 재차 신점을 구한다. 결과는 마찬가지로 블레셋과 싸우라는 것이다. 주저하던 다윗의 부하들은 이제 힘을 얻고 블레셋과 싸워 승리를 거둔다(23:4-5).
[그림: 이집트의 포로가 된 블레셋 전사-람세스 3세가 안치된 메디넷 하부 신전의 벽에 새겨짐- 주전 1175년] 그일라를 구해주었건만 사울이 쫓아오고 있기 때문에 그 지방사람을 신뢰할 수 없어 다윗과 그의 부하들 약 육백명은 다시 황무지로 피해간다(삼상 23:13-14). 다윗을 좆아 사울은 십이라는 지방에 이르렀으나 블레셋이 자기 영토에 침입했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되돌아간다(23:15-29). 이로써 사울의 추적이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 블레셋을 따르던 사울은 다시 다윗을 추격한다. 정말 끈질긴 추격이요 생명을 건 싸움이다. 무엇이 그토록 사울과 다윗을 �고 �기게 했는가? 왕으로서 차분히 머물면서 정사를 돌볼 겨를이 없었던 사울은 블레셋과 싸우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 반면에 그 아들 요나단은 다윗과 계속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다(23:15-18). 요나단은 사울의 몰락과 다윗의 부상은 이스라엘에게 숙명적인 것이라고 미리 짐작이라도 한 것 같다. 다윗을 추격하던 사울이 굴속에 들어가 용변을 보는 사이에 다윗은 따라 들어가 사울의 옷자락만 베고 나온다(24:1-7). 다윗이 사울을 해칠 의도가 없어 옷자락만 베었다는 사실을 사울에게 알리자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한다(24:8-15). 사울은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예견하고 자기 집안을 지켜줄 것을 간청한다(24:16-22). 그 사이 사무엘은 죽고(25:1), 다윗과 아비가일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삼상 25:2-44). 수 천마리의 양떼를 거느린 나발에게 다윗이 부하들을 보내 먹을 것을 청하자 구두쇠 나발은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이것을 보고 있던 그의 아내 아비가일이 급히 떡과 포도주를 챙겨 나발모르게 다윗에게 보낸다. 아내의 지혜스러운 행동으로 다윗군대의 공격을 피한 나발은 위기를 모면했으나 곧 죽고 만다. 다윗은 나발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아비가일을 아내로 삼는다(25:39-42). 그 사이 사울의 딸 미갈은 다윗이 없는 사이 다른 사람에게 넘겨졌고 다윗은 또 다른 여자 아히노암을 아내로 맞이한다(25:43-44). 사울과 다윗의 아슬아슬한 숨바꼭질 과정에서 일어났던 여러가지 일이 사이 사이 소개되고 있다. 다윗이 하길라에 숨어 있다는 말을 듣고 사울은 급히 추격한다. 삼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다윗을 추격한 사울은 광야앞에서 진을 치고 일전을 치룰 준비를 한다. 이것은 마치 전쟁과 같다. 무슨 철천지 원수진 일이 있다고 이다지도 집요하게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가? 사울이 진중에서 자고 있는 동안 다윗은 몇몇 부하들과 함께 사울이 자는 곳을 덮친다. 옆에 있던 아비새가 사울을 죽이라고 재촉했지만 다윗은 사울 옆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옴으로써 다시 한번 사울의 목숨을 살려준다. 야훼께서 기름부어 세운 왕을 죽이게 되면 결국 자신도 전쟁터에서 죽게 된다는 것이다(26:1-16). 잠이 깬 사울은 다윗이 자기 목숨을 살려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 한번 회개함으로써 다윗에게 참패를 시인한다(26:17-25). 11. 블레셋 편이 된 다윗
[그림: 블레셋족의 채색도기-주전 12-11세기-미케네 영향작품] 12. 사울의 최후
[그림: 엔돌의 무녀(초혼자)와 사울-사무엘의 영] 사무엘의 영을 불러내라는 요구에 그가 곧 사울 왕인 것을 알아채고 그 무당은 벌벌 떤다. 사울은 그녀를 안심시키고 사무엘이 하는 말을 듣는다. 땅에서 올라온 사무엘의 혼은 사울을 돕기는 커녕 그의 죽음을 예고하는 말만하고 사라진다(28:12-19). 사울은 심히 두려워서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괴로워하자, 그 무당은 사울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사울이 기력을 되찾도록 돕는다(28:20-25). 여기서 엔돌의 무당은 엄밀하게 말한다면 '무당'보다는 '초혼자'(招魂者)이다. 죽은자의 혼을 불러들이는 것은 아무 무당이나 하는 것은 아니다. 초혼점(necromancy)을 행하는 것은 고대로부터 매우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함부로 행해지지 않았으며 대개는 금기로 여겨졌다. 특별한 상황에서만 행해지는 초혼점을 사울은 요구한 것이다. 자기의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사울을 도운 그 초혼자에게서 '돌봄의 사역'을 엿볼 수 있다. 원래 무당은 자기에게 오는 손님을 가리지 않는다. 지위가 높든 낮든, 그 상황이 자기에게 유리하든 안하든 상관하지 않고 오는 손님을 박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경숙 교수는 엔돌의 초혼자를 '포용적 종교가'로 간주하기도 한다. 13. 블레셋을 떠난 다윗
[그림: 전형적인 바다족속의 배모양-주전 13세기] 맺음말
(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