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교재/하나님음성듣는것

2단원/제2과 하나님의 음성을 가로막는 편견들

발의무리 2010. 4. 23. 07:53

제2과 하나님의 음성을 가로막는 편견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과 동행했던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까? 그 가장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여러 가지 편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가로막는 주된 편견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탄의 견고한 진

고린도후서 10장 4절과 5절을 읽고, 다음의 물음에 답하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사탄의 견고한 진은 무엇을 말합니까?

................................................................................................................................................

그 견고한 진은 어떠한 역할을 합니까?

................................................................................................................................................

여기서 말하는 사탄의 견고한 진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릇된 이론 내지는 사고를 말합니다. 그 견고한 진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고,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고, 우리의 생각이 그리스도께 복종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가치관과 사고 속에서 견고한 진으로 작용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편견들은 그 종류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과에서는 그 편견들이 우리에게 오는 주된 통로들을 살펴봄으로써 편견의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이 편견들을 이기는 길은 우리가 철저하게 말씀에 의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한 삶

하나님의 음성을 가로막는 그리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가로막는 다양한 편견을 깨뜨리기 위해서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동의하고 서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가치관과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바를 취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말씀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말씀에 의한 삶입니다.1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의 신학과 삶과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고 동의하고 서기 위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삶을 살기 위해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우리가 신학을 위한 네 가지 출처의 올바른 우선순위 위에 서는 것입니다. 신학 즉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위해 네 가지 근원이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 올바른 순서 위에 서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 올바른 순서 위에 서지 않으면, 아무리 말씀을 많이 강조한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말씀에 의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중요한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성경.

2. 전통.

3. 이성.

4. 체험.

하나님의 음성을 가로막는 편견들

1. 잘못된 가르침.

편견들이 오는 가장 주된 통로 중 하나는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특히 존경하는 스승으로부터 오는 가르침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성경에 기초하여 확신을 갖기보다 존경하는 스승으로부터 배운 성경적인 진리를 그대로 답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젊었을 때 성경만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의 위험성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 교회에서 자란 결과, 나중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세대주의적인 이해.

잘못된 가르침을 통해서 들어오는 편견의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세대주의적인 이해입니다. 세대주의적인 이해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과 같은 표적과 이사들은 초대교회로 끝났다고 믿는 신학적인 이해입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기적들이 세 시대--모세와 여호수아 시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 예수님과 사도들 시대--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 목적은 그 당시 새로 주어지는 계시를 뒷받침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즉 성경에 나오는 기적들은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에 주어진 율법을,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주어진 선지자 직분을, 그리고 예수님과 사도들 시대에 주어진 신약을 뒷받침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되자 그러한 기적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기적들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최소한 세 가지 면에서 중대한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들은 위에 언급한 세 시대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세 시대에 보다 많은 하나님의 기적들이 일어났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기적들은 모든 시대에 일어났습니다. 둘째,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기적들은 행하신 이유가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단순히 하나님의 계시를 확증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많은 목적들을 위해서도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셋째, 무엇보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나 음성이 초대교회로 끝났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신 목적들

1)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도록 하기 위해. 행 14:3, 왕상 18:36.

2)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행 3:12-13, 히 2:4.

3) 구원하시기 원하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살전 1:4-5.

4)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리기 위해. 수 4:23-24. 출 7:14-16.

5) 성도들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수 4:23-24, 마 9:6-8.

6) 하나님 나라가 임한 증거로서. 마 12:28.

7)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행하고 계신 일에 대한 육적인 표적으로서. 요 2:11, 6:26.

8)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마 14:14, 15:32, 20:34, 눅 7:13-14.

그러므로 하나님의 놀라운 표적과 기사들이 초대교회로 끝났다거나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은 더 이상 하나님의 기적들이나 음성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틀립니다. 오히려 위에 열거된 이유들로 인하여 오늘날 하나님의 표적과 기적들이 더욱 필요한 상황입니다.

2. 그릇된 세계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도록, 보다 광범위하게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들을 경험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또 하나의 가장 주된 편견 중 하나는 우리의 세계관입니다. 그리고 편견이 오는 가장 주된 통로 중 하나도 우리의 세계관입니다. 찰스 크라프트 박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도를 적게 해서가 아니고, 금식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세계관 때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2

세계관은 세계를 보는 관점입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세계관을 습득합니다. 세계관은 우리 삶의 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우리들은 우리가 그러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모릅니다. 세계관은 우리 눈에 씌워진 안경과 같습니다. 마치 파란색 안경을 끼고 보면 온갖 세상이 다 파랗게 보이고, 빨간색 안경을 끼고 보면 온갖 세상이 다 빨갛게 보이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세계관을 통해서 세상을 봅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주위 환경과 일어나는 사건들을 인식합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호주를 여행하다가 호주가 맨 중앙에 있는 세계지도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 지도의 신기한 점은 남반부가 위로 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지도가 너무 신기해서 그 지도를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지도가 신기하게 보인 것은 우리의 세계관 때문이었습니다. 지구는 둥급니다. 남쪽을 지도의 아래쪽에 표시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세계관입니다.

또 어떤 책에 보면 TV도 없던 오랜 전 시대의 한 아프리카 국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국왕은 본국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해주는 한 유럽 대사의 이야기를 즐겨 듣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대사가 자기 나라에서는 겨울이 되면 물이 굳어져서 그 위로 코끼리도 다닐 수 있다고 이야기 했을 때 그 국왕은 그 말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세계관으로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포함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과 관련하여 세계관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정령숭배적인 세계관, 서구적인 계몽주의 세계관, 그리고 성경적 세계관입니다. 당연히 성경적 세계관이 가장 옳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경적 세계관을 회복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편견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도록, 더 나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정령숭배적 세계관은 모든 만물과 사건 뒤에 영이 있다고 믿는 세계관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 세계관은 돌에도 영이 있고,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돌에 걸려 넘어지면 그것은 그 돌에 있는 영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받아들입니다.

계몽주의 세계관은 모든 만물과 사건을 물질주의적이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에 기초하여 이해하는 서구적 세계관입니다. 그 세계관에서는 물질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로 검증될 수 있는 것들만 현실(reality)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그 외의 것들은 비현실적이고 신화의 영역에 속한 무지하고 저급한 것들로 이해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정령숭배적 세계관에서 서구적인 계몽주의 세계관으로 급속도로 이동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든 사람들일수록 정령숭배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반면, 계몽주의 세계관에 기초한 신세대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일수록 서구적 계몽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적인 이신론.

계몽주의 세계관이 팽배한 세계 속에서 태어나서 자란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 세계관의 영향으로 인하여 실제적인 이신론(Deism)을 신봉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신론은 이단적인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지만, 창조하신 후에 자연법칙을 만들어 그것에 의해 천지가 움직여지도록 하셨다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인류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개입을 원천적으로 배제합니다.

실제적인 이신론이란 이론적으로는 이신론을 배척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하나님의 기적들과 주권적인 역사들을 다 믿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천국이 있는 것도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의 삶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개입을 거의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합리적인 사고에 기초한 과학적인 법칙만을 믿고, 받아들이고, 따를 따름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다 믿고 받아들이는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신화나 어떤 저속한 것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말한다고 하면, 그것을 기도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말하면, 그들은 비웃습니다. 심지어 우리를 정신병자처럼 취급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합리적인 사고에 기초하여 성경을 지식적으로 잘 이해하고, 그것을 자연법칙에 의거하여 잘 지키는 것을 가장 고상한 신앙생활 내지 가장 건전한 신앙생활로 이해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성령의 존재를 믿을지 모르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들의 삶과 사역에서 성령을 철저하게 배제합니다.

성경적인 세계관으로의 회복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우리 삶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사들을 경험하려면 성경적인 세계관으로의 회복이 필수적입니다.

사도행전 10장 1절에서 20절을 읽고 다음의 물음에 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누구를 보내셨습니까? (3절) ....................................................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5-6절)

..........................................................................................................................................

반면에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어떤 방법을 통해 말씀하셨습니까? (10-11, 13, 19절)

............................................................................................................................................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냈습니다. 그 천사는 고넬료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천사는 베드로의 이름, 그가 머물고 있는 집의 위치와 주인 이름 등을 알려주며, 그를 데려다가 말씀을 들으라고 말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환상, 육성,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과 함께 가도록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3장 1절에서 8절에 의하면,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

이 사건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12절)

.................................................................................................................................................

베드로와 요한이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40세쯤 된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 사람은 즉시 일어나 걸으면서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놀라 자신들에게로 달려오는 군중들을 향해 베드로는 “왜 이 일을 기이히 여기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일이 베드로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로 인식되었습니다.

성경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우리가 소위 초자연적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역사들이 하나님 백성들의 삶 속에서 자연적인 삶의 한 부분입니다. 사실, 초자연적이라는 말 자체가 계몽주의적인 가치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모든 영광과 권능과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임재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운행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그 모든 소위 초자연적인 역사들은 우리 삶에서 자연적인 삶의 한 부분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우리는 이러한 성경적인 진리를 이론적으로 알 뿐 아니라, 그것들을 인식하고, 그 진리 위에 행동함으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우리의 삶의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3. 전통.

전통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전통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가로막는 편견이 오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전통은 매우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항상 성경 아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전통 위에 있어야 한다는 말은 성경을 가지고 전통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전통이 성경 위로 가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요한복음 5장을 읽고 다음의 물음에 답하십시오.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어떻게 고치셨습니까? (요 5:8)

.................................................................................................................................................

그 날이 무슨 날이었습니까? (요 5:9) ..................................................................................

그것을 본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했습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요 5:16, 10)

.................................................................................................................................................

만약 예수님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에게 무슨 성경적인 근거로 그렇게 하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요?

................................................................................................................................................

예수님은 누구의 인도를 따라 그 병자를 그렇게 고치셨습니까? (요 5:19-20)

.................................................................................................................................................

당신은 그들의 문제가 무엇이었다고 생각합니까?

.................................................................................................................................................

예수님은 안식일에 베데스다 연못가를 지나시면서, 그곳에 있던 38년 된 병자를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하심으로써 고쳐주셨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했다고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자리를 들고 옮기는 행위가 안식일을 범하는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그들의 주장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근거로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는 그 수많은 성경구절들을 제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성경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관한 그들의 전통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전통을 가지고 성경을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자세는 여러 곳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항상 성령의 인도를 따라 행하셨습니다. 그 38년 된 환자를 고치신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19-20절). 그러나 유대인들은 전통에 집착한 나머지 성령을 대적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그러한 자세에 대해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행 7:51)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문장들을 읽고, 옳은 답에 ○표 하십시오.

□ 교단법을 성경으로 비추어 보아야 한다.

□ 교단법이 성경 보다 우선이다.

□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방식대로 신앙생활을 한다.

□ 신앙생활의 모든 방식을 성경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예배 형식과 모양을 고집한다.

□ 예배의 모든 형식도 성경에 비추어 본다.

4. 당시의 팽배한 신앙관.

우리의 영적인 눈을 가리는 주된 요인 중 하나는 당시의 팽배한 신앙관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 눈이 어두워지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해서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레미야 시대와 예수님 시대 등 성경의 여러 세대에서 이 점을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 시대에는 온 세계가 면죄부를 삼으로써 죄를 용서 받고,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그 당시의 팽배한 신앙관들이 그 세대를 눈멀게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나 루터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제시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대적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셔서 말씀하셨을 때에도 그들은 똑같이 했습니다.

나는 동일한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발견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오늘날 많은 성도들의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목회자들로부터 들은 설교 내용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이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의 신앙은 그동안 자기들이 신앙생활 해오면서 여러 목회자들에게 들은 설교, 그 중에서도 특히 “자기 마음에 와 닿는 것” 위주로 들은 설교에 의해 형성된 가치관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서로 반대되는 입장의 견해들이 그들의 가치관 속에서 선별적으로 서로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해와 다른 내용을 가르치면 그들은 곧 바로 “○○○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던데요.” 라고 말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큰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일수록 그 목회자의 말에 더 큰 신빙성을 두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신앙은 기준과 공통분모는 성경인데, 그들이 성경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과 접촉점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도들은 당연히 모든 목회자의 설교를 받아들이되, 성경에 기초해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목회자가 말하는 내용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과 합한 것인가? 그 목회자가 무슨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그렇게 주장하는가 그리고 그 성경적인 근거는 타당한 것인가? 아니면 그 목회자가 자기 입장을 주장하기 위해 성경을 억지로 가져다 붙이는가? 이러한 점 등을 살펴서 성경적으로 합당한 내용은 받아들이되, 성경에 기초해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버려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베뢰아 성도들처럼 말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베뢰아 지역의 성도들은 사도 바울과 같은 훌륭한 사도가 가르쳤을 때에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한 것인가를 살펴보기 위해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5. 개인의 경험.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교제이기 때문에 개인의 경험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경험 또한 편견이 들어오는 주요한 통로입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 놓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모든 경험을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이 철저하게 우리의 경험이 아닌 성경에 기초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성도들은 자기가 하나님의 음성에 관해서 부정적인 경험을 했거나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남용하는 것을 본 부정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전체에 대해 아예 마음을 닫아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자세입니다.

오래 전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내가 성령의 은사에 대해 유보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 것을 내게 비쳐주셨습니다. 그 당시 나는 성령의 은사를 부인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주변에서 보았던 은사를 남용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그 사람들에 대해서 뿐 아니라,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까지 유보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에게 은사를 남용한 그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지, 은사는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 온전한 것임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약 1:17). 나는 곧 바로 하나님께 나의 잘못된 태도를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날부터 내 삶 속에 어떤 특정한 은사가 나타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1이 부분에 대해서 보다 자세한 설명을 원하시면, 나의 책 『십자가의 복음』 제9단원 말씀에 의한 삶을 참조하십시오.

2세계관의 문제를 잘 다룬 책 중 하나는 찰스 크라프트 박사의 『능력 그리스도교』(나단출판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