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설교/예배회복(1)
제24강 찬양과 경배의 의미(여주봉목사)
발의무리
2011. 2. 7. 08:39
제24강 찬양과 경배의 의미
여주봉목사
시104:1-5절입니다.
“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2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3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4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5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예배회복을 살펴보는 중에 지난 주부터 찬양과 경배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찬양과 경배가 곧 예배고 최상의 형태의 예배임을 보았습니다. 신약시대의 예배의 모델은 하늘나라의 예배이고 어떻게 하늘나라의 예배에서 찬양이 드려지고 있는가를 보았습니다.
오늘은 찬양과 경배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 예배의 모델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우리가 배워야할 가장 중요한 제자도중에 하나가 예배임을 보았습니다. 이 말은 찬양과 경배의 가사와 곡조를 배워야 한다는 말보다는 예배가 무엇이고 찬양이 무엇이고 어떤 이해와 가치로 자세로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할지를 배워야한다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예배라는 단어가 두 개입니다.
하나는 프로스쿠네오라는 단어인데 60번 나옵니다. 뜻은 찬사를 드리다는 의미입니다. 존경하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하나는 라트르온테스라는 말로 동사나 명사의 형태로 26번 나옵니다. 섬김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인데 우리말성경은 여러 차례 섬김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공적인 예배를 말할 때 쓰여졌습니다.
그런데 찬양과 경배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작기 다르게 이해합니다. 다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의미로 보아야합니다. 찬양과 경배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 그분 자신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과 경배 혹은 예배의 한 중요한 부분은 찬사입니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당연히 삼위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예배 중심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예배라는 단어중 하나가 찬사하다는 의미가 있는 프로스크네오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사를 드려야할 이유가 수없이 많은데 하나님께 찬사를 드려야할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창조를 인하여,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을 인하여, 하나는 우리와 날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그런 이유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찬사를 다리는 경우가 가득합니다.
1.창조의 하나님께 드리는 찬사
오늘본문을 보세요. 이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창조로 인하여 찬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도 읽었는데 계4장 9-11절을 보면 하늘나라의 예배가 나오는데 거기에 나오는 스랍들과 24장로들도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는데 창조의 하나님께 창조의 은혜를 인하여 찬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계4:9-11절입니다.
“9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이처럼 창조의 하나님께 창조의 은혜를 인하여 찬사를 드립니다. 시104편도 계4장도 그렇고 모두다 창조의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되 직접화법을 통해서 드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그분께 찬사를 직접화법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한 가지를 더 살펴봅시다. 시편기자가 창조의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는데 그러기 전에 한 문장이 나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입니다. 왜 이 말을 합니까? 지금 자기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이 말이 내포하는 중요성은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찬사가 우리의 적극적인 선택에서 나온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찬사가 적극적인 우리의 의미의 표현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반위시가 좋고 내 마음에 와 닿으면 내 마음이 열려서 하나님께 예배가 드려지게 될 줄로 생각합니다. 아니요 예배는 그렇게 드려지지 않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적극적인 선택에 의해서 드려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적극적으로 예배하기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라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적극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의 형편 처지 상태 감정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기로 적극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예배함으로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주일날 교회에 나올 때 많은 사람들이 왜 하나님께 예배를 못드리는 줄 아십니까? 예배를 수동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분위기에 맞추어지면 기분이 맞으면 이처럼 예배를 수동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수동적으로 감정에 따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예배하고 찬사하기를 적극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또한 어떤 상황속에서도 적극적으로 예배하기를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주된 이유중 하나는 성도들이 그들이 처한 환경에 의존하여 드리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잘되면 할렐루야 하며 예배드리지만 역경 가운데 있으면 낙심하며 어떤 때는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낙심해 있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그런 자세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마땅히 돌아가야할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를 적극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시42편1-11절에서 잘 말해줍니다.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3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10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이 시편 기자가 처한 삶이 어떠합니까? 밤낮으로 그의 눈물이 음식이 된 상황입니다. 원수들이 비방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있느냐고 칼 같이 뼈를 찌르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낙심할 수밖에 없는 불안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네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가 너는 너의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이것이 예배입니다. 그의 상황에 좋아서가 아니라 이렇게 환경적으로 절박한 상황에서도 자기가 자기 영혼에게 어찌하여 낙심하는고 어찌하여 불안해하는가 하나님을 바라라고 추스르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사를 드리기로 선택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모든 환경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로 선택하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올 때 이런 자세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가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기로 결단하고 선택하고 하나니의 얼굴을 구하고 갈망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로 섰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예배는 한 부분이 찬사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인하여 찬사를 드립니다.
둘째는 구원하신 하나님을 인하여 찬사를 드립니다.
계5장에 보면 하늘의 예배가 나옵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찬사하는 내용입니다.
11-14절입니다.
“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셋째 날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찬사를 드립니다.
시편을 포함해서 성경전체에서 이런 내용이 가득합니다. 우리를 인도하심, 보호하심 지도하심 도우심 응답하심 필요를 채우심 선한 길로 인도하심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심 등등의 하나 하나의 은혜를 인해서 하나님께 찬사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조를 인하건 구원을 인하건 우리와 함께하시는 은혜를 인하여 찬사를 드리건 핵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편 104편을 보았습니다. 기자는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과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구절을 읽을 때 감격이 없지요. 핵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주시며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한 가지 사실만 깨달아도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 납작엎드려 그분께 합당한 예배를 진정으로 드리기를 열망하게 될 것이고 우리 삶으로 그분이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이 생길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도 마찬가지이고 날마다 함께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알 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 하나님을 올바로 찬사할 수 있습니다.
2.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 자신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토저는 그의 책 예배냐 쑈냐라는 책에서 죠지 왓슨 박사의 말을 인용합니다. 왓슨 박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때에는 두 가지 레벨에 있다고 말합니다. 감사, 탁월함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사의 수준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인하여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 수준을 넘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오늘날은 그 수준까지도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우리가 거짓신앙체계를 살펴보았는데 거짓신앙체계의 한 축이 기복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수단된 삶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자기 목표가 있고 자기 목표 자기 목적을 이루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이고 하나님은 그저 자기 목표를 이루어주는 수단일 뿐입니다. 이때에도 종교적인 헌신이 많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를 보면 오늘날의 인도에까지 가서 향품을 사서 예배드릴 정도였습니다. 당시 인도까지 가려면 비행기도 차도 없는 시대인데 그 멀리까지 가서 사다가 드렸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였느냐면 자기 복받기 위해서 자기 사업 잘되기 위해서 자기 자녀 잘디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예배를 안받으셨어요. 이처럼 거짓신앙체계에 빠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드린 헌신도 조건이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질 때 우리 아이를 위해서 새벽기도를 안빠지고 드렸는데 수능대박이 나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면 감사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은혜베푸심을 인하여 진정으로 감사하는 자리까지도 못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 하나님은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인 삶, 이런 손을 구하는 삶을 래래 크랩 박사는 자기중심적인 기도라고 말합니다. 자기중심적인 기도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말하면서 관계중심적인 기도로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분이 쓴 책이 파파기도라는 책입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자기중심적인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기도는 주시옵소서라는 말로부터 시작한다고 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도 있지만 결국은 자기를 위해서합니다. 남편이 속을 썩여서 도무지 못살겠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남편에게 은혜를 주셔서 바꾸어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 사람이 바뀌어냐 내가 행복할 것이니까.’
상대방을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것에는 개념조차 없어요.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 목사님이 설교가 엉망이어서 은혜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발 목사님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설교좀 잘하게 해 주세요. 왜? 그래야 내가 교회온 기분이 좀 날 것이 나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기도합니다.
물론 여기에 감사도 있습니다. 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셨으니까. 그런데 이런 감사는 다 조건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가 안됩니다. 그래서 왓슨 박사가 말하기를 감사의 수준을 넘어가지 못한다고 하는데 오늘날은 감사의 수준에도 못미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처럼 우리예배가 타락해 있습니다.
다시 왓슨박사의 말로 돌아갑니다.
그분은 그러면서 어디로 나가야 하느냐? 하나님의 탁월함으로 나가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하나님되심을 인하여 하나님의 초월적이고 내재적인 영광으로 나가야 합니다. 초월하실 뿐아니라 함께하시는 하나님께로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떤 부분에 해당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하여 기뻐하는 예배를 말합니다.
우리 둘째가 초등학교 2학년일 때 하루는 학교에서 오더니 이렇게 말해요. 나는 아빠가 좋아 내가 공부하고 먹을 수 있게 해주고 돈도 주잖아 그래요. 선생님이 그렇게 하라고 한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말을 들을 때 제가 한편으로 기쁘고 한편으로는 씁쓸해요. 그러면서 어떤 생각이 드냐면 내가 제 아빠니까 좋아해야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우리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로 인하여 찬사를 드리지만 우리의 예배가 거기에만 머문다면 우리의 예배는 한참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더 나가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하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삼하6장 14-16절입니다. 20-22절입니다. 이 구절은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들이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4-16절입니다.
“14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20-22절입니다.
“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다윗이 베 에봇을 입고 있습니다. 지금 왕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대상15장에도 보면 알 수 있는데 언약궤를 매는 모든 사람에게도 베에봇을 입게 했습니다. 다윗도 똑같이 베에옷을 입었어요. 대상 15장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세마포 겉옷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세마포 겉옷도 입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여호와 앞이라고 표현하는데 언약궤 앞에서 춤을 추면서 기뻐했습니다. 다윗의 그런 행동은 그의 처 미갈의 눈에 보기에는 마치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 몸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경멸스런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다윗왕이 왔을 때 비꼽니다. 그러면서 왕이 그의 신복의 계집종 앞에서 계집종이라는 말은 지극히 천한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극힌 천한 자들 앞에서 왕이 미친 사람처럼 춤을 추며 기뻐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다윗이 말합니다. 내가 더 낮아져서 더 천하게 보일지라도 나는 하나님 앞에서 기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다윗이 그렇게 기뻐했겠어요. 언약궤 입혀진 금이 탐이 나서요. 다윗의 창고에는 금이 쌓여있었습니다. 나중에 솔로몬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설계도까지 주면서 모든 필요한 금을 다윗왕이 내어주었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져다 주신 성공 때문에 기뻐서요? 아닙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집에 자기 성에 하나님의 임재로 자기 왕국에 찾아오시는 것으로 인하여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이 찬양입니다.
그래서 플핏주석시리즈에서 삼하6장 15절을 주석하면서 랑게라는 사람은 다윗의 행동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윗의 종교적인 열정과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감격적인 기쁨을 잘 드러내주는 행동이다. 즉 그는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모시게 된 대 대하여 감격하며 온 몸과 마음으로 이를 기뻐한 것이다.’
우리 찬양중에 ‘주 찬양합니다 내 마음을 다해 주 찬양합니다. 내 마음을 다해 주가 하신 놀라운 일들을 세상에 모두 말하리라 주 찬양합니다 주여 내가 주를 기뻐합니다 할렐루야 내가 주를 기뻐합니다 할렐루야’ 하는 찬양이 있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주님을 기뻐하고 찬양했던 것 같아요.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실로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다윗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예배는 생물입니다. 자라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합니다.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그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며 춤을 출 수 있었던 것은 하루 아침에 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저에게 그래요. 목사님은 예배에 몰입이 되는데 자기는 잘 안된다고 해요. 여러분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던 것은 더 비천하게 되어 더 조롱받는 자리에 갈지라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동안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며 예배하며 얼굴을 구하는 삶읅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까지 온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안에서 우리가 자랄 때 우리의 예배도 하나님 앞에서 자랄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꾸어가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퇴보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예배가 일년 전 이년 전 삼년 전과 비교해서 여러분의 예배는 깊어지고 있습니까? 정체되어 있습니까? 퇴보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예배가 더 깊어지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의 신앙은 병들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배는 이처럼 살아있는 생물입니다.
한 가지 더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예배인데,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믿음이 동반되어야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예를 볼까요. 자시는 아시아지역으로 복음을 전하려 가려고 햇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이 막았어요. 하루는 환상 가운데 마게도냐 지역 사람이 와서 도우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마게도냐 지역으로 갑니다. 그런데 사역은 열리지 않고 채찍뿐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귀신들인 여자가 괴롭혀서 귀신을 쫓아내지요. 그래서 계집종의 주인들이 돈을 벌었는데 소망이 사라지자 바울을 고소해서 채찍에 맞고 옥에 갇힙니다. 당시 채찍은 끝에 갈고리가 달려있어서 맞으면 설점이 떨어져 나갔어요. 바울은 다른 데로 가겠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고 하나님을 따라 왔는데 사역은 열리지 않고 오히려 고난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어요. 그런 상황속에서도 바울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했어요.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을 경배하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을 신뢰했어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환경이 그의 눈에는 이해가 되지 않고 되어지는 일들이 이해가 안되었지만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예배인데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도 바울처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같이 가야 합니다. 아까도 잠깐 나왔습니다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드리지 못하는 주된 이유가 환경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된 예배는 어떤 환경에 처해지든지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뿐아니라 어떤 환경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하심과 사랑하심과 전능하심과 은혜를 인하여 그분을 신뢰함으로 그분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여러분 하박국 3장을 보면 비록 무화가 나무가 무성치 못하고....라고 고백합니다.
17-19절입니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리나라에는 거짓신앙체계가 너무나 팽배합니다.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는 기복신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이 가득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구절을 읽을 때 말로는 아멘할지 몰라도 우리 삶에서 이런 예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금년에 작년보다 무화과 소출이 두배가 되면 아멘 할렐루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가능합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것이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19절입니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주 여호와가 나의 신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반석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인해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참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같이 가야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다시말하면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기뻐하여 믿음으로 주님을 신ㄹ회하여 그분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기로 서면 여러분의 마음에 새로운 열망이 불붙기 시작하고 소망이 샘솟기 시작합니다. 무기력증 낙심 우울증은 떠나갈 것입니다.
느8장 10절입니다.
“10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11절입니다.
“11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케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종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매”
느헤미야는 어떤 시대입니까?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때 술맡은 관원장으로 출세한 사람입니다.\그 당시 이스라엘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온지 한참 후였습니다.
이미 성전은 지어졌습니다. 처음 솔로몬 성전에 비하여 작은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불탄채로 무너진 채로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성문이 불타있었고 이 소식을 느헤미야가 들었습니다. 아닥사스다왕의 은혜를 힘입어 성벽을 중건하는 일을 맡습니다. 그래서 와서 성벽을 중건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주변 사마리아사람들의 반발을 삽니다. 방해에 부딛힙니다. 그래서 이들이 반쪽으로 나누어서 한쪽은 번을 서고 다른 쪽은 일하고 그럽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농사까지 흉년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렇게 했으면 농사라도 풍년들어야지. 이런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중건하는 일 하다가 농사에 소홀하니까 농사가 잘못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일은 성일이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이다. 단 것을 먹어라. 힘을 내라 나누어 먹으로 그러면서 여호와를 기뻐하가고 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뻐하면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을 향한 새로운 열정이 샘솟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환경 때문에 낙심한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 신앙이 침체되어 있습니까? 여러분 마음이 가라앉아 있습니까? 여러분이 착찹합니까? 우울증이 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예배를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의 말처럼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있든지 내 영혼아 어찌하여 불안하여 하냐 낙심하냐 여호와를 바라보라 이렇게 찬양하기를 선택하고 그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예배를 드린다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 기쁨이 삶의 의욕이 봉사의 마음이 생길 것인데. 그런데도 쳐져 있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러고 있어요. 이런 자세는 안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겠어요. 예배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인데 믿음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시28:1-2입니다.
“1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2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7-8절이니다.
“7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8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그 기름 부음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
자기가 지금 무덤에 내려가는 자같이 느껴지는 상황입니다. 이대로 있으면 무덤에 버려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지 모르지만 다윗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만을 방패요 힘으로 믿고 신ㄹ회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저는 찬양과 경배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또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살펴볼 때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조건적이고 소극적으로 타락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참된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의 삶에 소망이 없고 신앙은 머릿속에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와 관련한 우리의 처지를 비추어주셔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리로 회복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여주봉목사
시104:1-5절입니다.
“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2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3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4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5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예배회복을 살펴보는 중에 지난 주부터 찬양과 경배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찬양과 경배가 곧 예배고 최상의 형태의 예배임을 보았습니다. 신약시대의 예배의 모델은 하늘나라의 예배이고 어떻게 하늘나라의 예배에서 찬양이 드려지고 있는가를 보았습니다.
오늘은 찬양과 경배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 예배의 모델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우리가 배워야할 가장 중요한 제자도중에 하나가 예배임을 보았습니다. 이 말은 찬양과 경배의 가사와 곡조를 배워야 한다는 말보다는 예배가 무엇이고 찬양이 무엇이고 어떤 이해와 가치로 자세로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할지를 배워야한다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예배라는 단어가 두 개입니다.
하나는 프로스쿠네오라는 단어인데 60번 나옵니다. 뜻은 찬사를 드리다는 의미입니다. 존경하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하나는 라트르온테스라는 말로 동사나 명사의 형태로 26번 나옵니다. 섬김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인데 우리말성경은 여러 차례 섬김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공적인 예배를 말할 때 쓰여졌습니다.
그런데 찬양과 경배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작기 다르게 이해합니다. 다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의미로 보아야합니다. 찬양과 경배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 그분 자신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과 경배 혹은 예배의 한 중요한 부분은 찬사입니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당연히 삼위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예배 중심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예배라는 단어중 하나가 찬사하다는 의미가 있는 프로스크네오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사를 드려야할 이유가 수없이 많은데 하나님께 찬사를 드려야할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창조를 인하여,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을 인하여, 하나는 우리와 날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그런 이유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찬사를 다리는 경우가 가득합니다.
1.창조의 하나님께 드리는 찬사
오늘본문을 보세요. 이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창조로 인하여 찬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도 읽었는데 계4장 9-11절을 보면 하늘나라의 예배가 나오는데 거기에 나오는 스랍들과 24장로들도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는데 창조의 하나님께 창조의 은혜를 인하여 찬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계4:9-11절입니다.
“9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이처럼 창조의 하나님께 창조의 은혜를 인하여 찬사를 드립니다. 시104편도 계4장도 그렇고 모두다 창조의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되 직접화법을 통해서 드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그분께 찬사를 직접화법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한 가지를 더 살펴봅시다. 시편기자가 창조의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는데 그러기 전에 한 문장이 나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입니다. 왜 이 말을 합니까? 지금 자기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이 말이 내포하는 중요성은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찬사가 우리의 적극적인 선택에서 나온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찬사가 적극적인 우리의 의미의 표현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반위시가 좋고 내 마음에 와 닿으면 내 마음이 열려서 하나님께 예배가 드려지게 될 줄로 생각합니다. 아니요 예배는 그렇게 드려지지 않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적극적인 선택에 의해서 드려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적극적으로 예배하기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라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적극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의 형편 처지 상태 감정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기로 적극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예배함으로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주일날 교회에 나올 때 많은 사람들이 왜 하나님께 예배를 못드리는 줄 아십니까? 예배를 수동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분위기에 맞추어지면 기분이 맞으면 이처럼 예배를 수동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수동적으로 감정에 따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예배하고 찬사하기를 적극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또한 어떤 상황속에서도 적극적으로 예배하기를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주된 이유중 하나는 성도들이 그들이 처한 환경에 의존하여 드리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잘되면 할렐루야 하며 예배드리지만 역경 가운데 있으면 낙심하며 어떤 때는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낙심해 있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그런 자세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마땅히 돌아가야할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를 적극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시42편1-11절에서 잘 말해줍니다.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3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10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이 시편 기자가 처한 삶이 어떠합니까? 밤낮으로 그의 눈물이 음식이 된 상황입니다. 원수들이 비방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있느냐고 칼 같이 뼈를 찌르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낙심할 수밖에 없는 불안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네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가 너는 너의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이것이 예배입니다. 그의 상황에 좋아서가 아니라 이렇게 환경적으로 절박한 상황에서도 자기가 자기 영혼에게 어찌하여 낙심하는고 어찌하여 불안해하는가 하나님을 바라라고 추스르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사를 드리기로 선택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모든 환경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로 선택하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올 때 이런 자세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가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기로 결단하고 선택하고 하나니의 얼굴을 구하고 갈망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로 섰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예배는 한 부분이 찬사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인하여 찬사를 드립니다.
둘째는 구원하신 하나님을 인하여 찬사를 드립니다.
계5장에 보면 하늘의 예배가 나옵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찬사하는 내용입니다.
11-14절입니다.
“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셋째 날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찬사를 드립니다.
시편을 포함해서 성경전체에서 이런 내용이 가득합니다. 우리를 인도하심, 보호하심 지도하심 도우심 응답하심 필요를 채우심 선한 길로 인도하심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심 등등의 하나 하나의 은혜를 인해서 하나님께 찬사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조를 인하건 구원을 인하건 우리와 함께하시는 은혜를 인하여 찬사를 드리건 핵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편 104편을 보았습니다. 기자는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과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구절을 읽을 때 감격이 없지요. 핵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주시며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한 가지 사실만 깨달아도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 납작엎드려 그분께 합당한 예배를 진정으로 드리기를 열망하게 될 것이고 우리 삶으로 그분이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이 생길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도 마찬가지이고 날마다 함께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알 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 하나님을 올바로 찬사할 수 있습니다.
2.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 자신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토저는 그의 책 예배냐 쑈냐라는 책에서 죠지 왓슨 박사의 말을 인용합니다. 왓슨 박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때에는 두 가지 레벨에 있다고 말합니다. 감사, 탁월함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사의 수준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인하여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 수준을 넘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오늘날은 그 수준까지도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우리가 거짓신앙체계를 살펴보았는데 거짓신앙체계의 한 축이 기복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수단된 삶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자기 목표가 있고 자기 목표 자기 목적을 이루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이고 하나님은 그저 자기 목표를 이루어주는 수단일 뿐입니다. 이때에도 종교적인 헌신이 많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를 보면 오늘날의 인도에까지 가서 향품을 사서 예배드릴 정도였습니다. 당시 인도까지 가려면 비행기도 차도 없는 시대인데 그 멀리까지 가서 사다가 드렸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였느냐면 자기 복받기 위해서 자기 사업 잘되기 위해서 자기 자녀 잘디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예배를 안받으셨어요. 이처럼 거짓신앙체계에 빠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드린 헌신도 조건이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질 때 우리 아이를 위해서 새벽기도를 안빠지고 드렸는데 수능대박이 나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면 감사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은혜베푸심을 인하여 진정으로 감사하는 자리까지도 못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 하나님은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인 삶, 이런 손을 구하는 삶을 래래 크랩 박사는 자기중심적인 기도라고 말합니다. 자기중심적인 기도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말하면서 관계중심적인 기도로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분이 쓴 책이 파파기도라는 책입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자기중심적인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기도는 주시옵소서라는 말로부터 시작한다고 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도 있지만 결국은 자기를 위해서합니다. 남편이 속을 썩여서 도무지 못살겠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남편에게 은혜를 주셔서 바꾸어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 사람이 바뀌어냐 내가 행복할 것이니까.’
상대방을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것에는 개념조차 없어요.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 목사님이 설교가 엉망이어서 은혜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발 목사님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설교좀 잘하게 해 주세요. 왜? 그래야 내가 교회온 기분이 좀 날 것이 나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기도합니다.
물론 여기에 감사도 있습니다. 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셨으니까. 그런데 이런 감사는 다 조건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가 안됩니다. 그래서 왓슨 박사가 말하기를 감사의 수준을 넘어가지 못한다고 하는데 오늘날은 감사의 수준에도 못미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처럼 우리예배가 타락해 있습니다.
다시 왓슨박사의 말로 돌아갑니다.
그분은 그러면서 어디로 나가야 하느냐? 하나님의 탁월함으로 나가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하나님되심을 인하여 하나님의 초월적이고 내재적인 영광으로 나가야 합니다. 초월하실 뿐아니라 함께하시는 하나님께로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떤 부분에 해당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하여 기뻐하는 예배를 말합니다.
우리 둘째가 초등학교 2학년일 때 하루는 학교에서 오더니 이렇게 말해요. 나는 아빠가 좋아 내가 공부하고 먹을 수 있게 해주고 돈도 주잖아 그래요. 선생님이 그렇게 하라고 한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말을 들을 때 제가 한편으로 기쁘고 한편으로는 씁쓸해요. 그러면서 어떤 생각이 드냐면 내가 제 아빠니까 좋아해야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우리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로 인하여 찬사를 드리지만 우리의 예배가 거기에만 머문다면 우리의 예배는 한참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더 나가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하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삼하6장 14-16절입니다. 20-22절입니다. 이 구절은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들이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4-16절입니다.
“14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20-22절입니다.
“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다윗이 베 에봇을 입고 있습니다. 지금 왕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대상15장에도 보면 알 수 있는데 언약궤를 매는 모든 사람에게도 베에봇을 입게 했습니다. 다윗도 똑같이 베에옷을 입었어요. 대상 15장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세마포 겉옷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세마포 겉옷도 입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여호와 앞이라고 표현하는데 언약궤 앞에서 춤을 추면서 기뻐했습니다. 다윗의 그런 행동은 그의 처 미갈의 눈에 보기에는 마치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 몸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경멸스런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다윗왕이 왔을 때 비꼽니다. 그러면서 왕이 그의 신복의 계집종 앞에서 계집종이라는 말은 지극히 천한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극힌 천한 자들 앞에서 왕이 미친 사람처럼 춤을 추며 기뻐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다윗이 말합니다. 내가 더 낮아져서 더 천하게 보일지라도 나는 하나님 앞에서 기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다윗이 그렇게 기뻐했겠어요. 언약궤 입혀진 금이 탐이 나서요. 다윗의 창고에는 금이 쌓여있었습니다. 나중에 솔로몬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설계도까지 주면서 모든 필요한 금을 다윗왕이 내어주었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져다 주신 성공 때문에 기뻐서요? 아닙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집에 자기 성에 하나님의 임재로 자기 왕국에 찾아오시는 것으로 인하여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이 찬양입니다.
그래서 플핏주석시리즈에서 삼하6장 15절을 주석하면서 랑게라는 사람은 다윗의 행동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윗의 종교적인 열정과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감격적인 기쁨을 잘 드러내주는 행동이다. 즉 그는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모시게 된 대 대하여 감격하며 온 몸과 마음으로 이를 기뻐한 것이다.’
우리 찬양중에 ‘주 찬양합니다 내 마음을 다해 주 찬양합니다. 내 마음을 다해 주가 하신 놀라운 일들을 세상에 모두 말하리라 주 찬양합니다 주여 내가 주를 기뻐합니다 할렐루야 내가 주를 기뻐합니다 할렐루야’ 하는 찬양이 있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주님을 기뻐하고 찬양했던 것 같아요.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실로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다윗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예배는 생물입니다. 자라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합니다.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그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며 춤을 출 수 있었던 것은 하루 아침에 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저에게 그래요. 목사님은 예배에 몰입이 되는데 자기는 잘 안된다고 해요. 여러분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던 것은 더 비천하게 되어 더 조롱받는 자리에 갈지라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동안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며 예배하며 얼굴을 구하는 삶읅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까지 온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안에서 우리가 자랄 때 우리의 예배도 하나님 앞에서 자랄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꾸어가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퇴보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예배가 일년 전 이년 전 삼년 전과 비교해서 여러분의 예배는 깊어지고 있습니까? 정체되어 있습니까? 퇴보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예배가 더 깊어지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의 신앙은 병들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배는 이처럼 살아있는 생물입니다.
한 가지 더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예배인데,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믿음이 동반되어야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예를 볼까요. 자시는 아시아지역으로 복음을 전하려 가려고 햇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이 막았어요. 하루는 환상 가운데 마게도냐 지역 사람이 와서 도우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마게도냐 지역으로 갑니다. 그런데 사역은 열리지 않고 채찍뿐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귀신들인 여자가 괴롭혀서 귀신을 쫓아내지요. 그래서 계집종의 주인들이 돈을 벌었는데 소망이 사라지자 바울을 고소해서 채찍에 맞고 옥에 갇힙니다. 당시 채찍은 끝에 갈고리가 달려있어서 맞으면 설점이 떨어져 나갔어요. 바울은 다른 데로 가겠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고 하나님을 따라 왔는데 사역은 열리지 않고 오히려 고난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어요. 그런 상황속에서도 바울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했어요.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을 경배하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을 신뢰했어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환경이 그의 눈에는 이해가 되지 않고 되어지는 일들이 이해가 안되었지만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예배인데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도 바울처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같이 가야 합니다. 아까도 잠깐 나왔습니다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드리지 못하는 주된 이유가 환경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된 예배는 어떤 환경에 처해지든지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뿐아니라 어떤 환경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하심과 사랑하심과 전능하심과 은혜를 인하여 그분을 신뢰함으로 그분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여러분 하박국 3장을 보면 비록 무화가 나무가 무성치 못하고....라고 고백합니다.
17-19절입니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리나라에는 거짓신앙체계가 너무나 팽배합니다.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는 기복신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이 가득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구절을 읽을 때 말로는 아멘할지 몰라도 우리 삶에서 이런 예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금년에 작년보다 무화과 소출이 두배가 되면 아멘 할렐루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가능합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것이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19절입니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주 여호와가 나의 신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반석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인해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참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같이 가야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다시말하면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기뻐하여 믿음으로 주님을 신ㄹ회하여 그분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기로 서면 여러분의 마음에 새로운 열망이 불붙기 시작하고 소망이 샘솟기 시작합니다. 무기력증 낙심 우울증은 떠나갈 것입니다.
느8장 10절입니다.
“10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11절입니다.
“11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케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종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매”
느헤미야는 어떤 시대입니까?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때 술맡은 관원장으로 출세한 사람입니다.\그 당시 이스라엘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온지 한참 후였습니다.
이미 성전은 지어졌습니다. 처음 솔로몬 성전에 비하여 작은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불탄채로 무너진 채로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성문이 불타있었고 이 소식을 느헤미야가 들었습니다. 아닥사스다왕의 은혜를 힘입어 성벽을 중건하는 일을 맡습니다. 그래서 와서 성벽을 중건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주변 사마리아사람들의 반발을 삽니다. 방해에 부딛힙니다. 그래서 이들이 반쪽으로 나누어서 한쪽은 번을 서고 다른 쪽은 일하고 그럽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농사까지 흉년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렇게 했으면 농사라도 풍년들어야지. 이런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중건하는 일 하다가 농사에 소홀하니까 농사가 잘못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일은 성일이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이다. 단 것을 먹어라. 힘을 내라 나누어 먹으로 그러면서 여호와를 기뻐하가고 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뻐하면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을 향한 새로운 열정이 샘솟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환경 때문에 낙심한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 신앙이 침체되어 있습니까? 여러분 마음이 가라앉아 있습니까? 여러분이 착찹합니까? 우울증이 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예배를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의 말처럼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있든지 내 영혼아 어찌하여 불안하여 하냐 낙심하냐 여호와를 바라보라 이렇게 찬양하기를 선택하고 그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예배를 드린다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 기쁨이 삶의 의욕이 봉사의 마음이 생길 것인데. 그런데도 쳐져 있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러고 있어요. 이런 자세는 안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겠어요. 예배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인데 믿음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시28:1-2입니다.
“1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2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7-8절이니다.
“7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8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그 기름 부음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
자기가 지금 무덤에 내려가는 자같이 느껴지는 상황입니다. 이대로 있으면 무덤에 버려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지 모르지만 다윗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만을 방패요 힘으로 믿고 신ㄹ회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저는 찬양과 경배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또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살펴볼 때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조건적이고 소극적으로 타락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참된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의 삶에 소망이 없고 신앙은 머릿속에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와 관련한 우리의 처지를 비추어주셔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리로 회복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