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설교/예배회복(1)
제28강 하나님을 경배할 때 일어나는 일(여주봉목사)
발의무리
2011. 2. 7. 08:41
제28강 하나님을 경배할 때 일어나는 일
여주봉목사
약4:8절입니다.
“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하나님이 우리 예배 가운데서 행하시는 일들을 살펴봅니다.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그분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약4장 8절에서 가까이하실 것을 말합니다.
렘29:13절입니다.
“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야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야 주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임재로 함께하십니다. 그분이 오리 가운데 오시면 그분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우리 가운데서 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습니다. 예배는 결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예배를 받기에 홀로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에 예배하는 것 자체가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배할 때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운행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운행하실 때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기를 환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오셔서 운행하실 때 일어나는 일들 몇 가지를 살펴봅니다.
1.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앞에서 구약에 성전을 통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구약의 성전은 오늘날 우리 교회를 향한 그림자이고 예배를 향한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을 보면 개개인의 성도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이고 구약의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었기 때문에 우리 예배를 위한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면 성전을 향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는 그곳에서 예배가 드려질 때 그곳에 영광으로 임하셔서 거하시며 그들의 길을 지도하시고 앞서가시며 하나님의 뜻을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출29:42절입니다
“42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출40:34절 이하입니다.
“34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하나님이 영광으로 그들에게 임하실 뿐아니라 앞서 가시며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예배 가운데 항상 이런 일이 있기를 원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로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엎드릴 수밖에 없는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신1:3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3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
포도나무 교회만 해도 지금까지 오도록 제가 목회자로서 제 목회적인 비전이라든가 목회적인 목회관에서 의해서 교회를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한 부분 한 부분에서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지시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의중과 길을 보이신 주된 통로가 예배였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눈을 감고 허공에다 찬양을 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그분께 집중하고 그분께 예배합니다. 그분이 인식되지 않으면 제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러면 저는 집중적으로 주님을 찾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알리시고 해결하면 다시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됩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는지 여부를 테스트해볼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에배를 드릴 때 그분이 선명하게 인식되는가입니다. 여러분이 올바른 관계 가운데 있다면 그분이 선명하게 인식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길을 지도하십니다. 제가 예배를 준비하면서 하나님이 우리 포도나무교회를 인도하셨는데 구체적인 예가 무엇인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으로 예배당을 짓고 이사 온 일이었습니다. 분당에서 예배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24시간 다윗의 장막에서 하나님을 찾는 장소를 찾으라는 뜻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우성상가를 구입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갔습니다. 그런데 민원에 막혔습니다. 단지 내 상가 주민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법적으로는 우리가 이깁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 하나님 따라가는 것으로 바쁜데 언제 그것 싸우느라 있겠어요. 분명히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왔는데. 다윗의 장막의 노트를 보았는데 모여서 기도하라는 감동을 보았어요. 주일부터 모여서 기도하자고 했어요. 주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루에 두 시간씩.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모여도 도와주세요 하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든 예배건 하나님 그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중을 구하여 나갔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면서 구하면서 나왔는데 높아진 생각 그릇된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조정했습니다. 사흘째 되는날 하나님이 예배 시간에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됐다 다음 단계로 가라고 하셨어요. 다음 단계는 교회가 땅을 사서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간에 곧바로 임대로 나갔고 관리비 등 모든 것이 순식간에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계시가 되어서 찾는 가운데 여기 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2.가장 흔히 일어나는 일중에 하나가 회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성령이 임재하십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 중에 하나가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16:7-8절입니다.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이처럼 성령께서 하시는 일중 하나가 우리 죄를 책망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예배가 회복될 때 하나님이 우리 죄를 보게 하시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그래서 회개가 일어납니다.
이사야의 예배를 보십시오. 사6장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하늘문에 열리고 하늘보좌가 보입니다. 그때 이사야가 곧 바로 한 일이 회개였습니다.
사6:1-7절입니다.
“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하나님이 예배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였는데 곧 바로 나타난 것이 회개였습니다. 이사야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앞에 섰는데 보이는 죄가 입술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아름다움은 말로다’라는 찬양을 드리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는 가사가 꿈틀대는 것입니다. 아름다우심이 인식되며 그 앞에 내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는 새포 하나 하나에까지 부정한 생각이 가득했어요. 그래서 곧바로 제가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하는 찬양을 드렸습니다. 이 찬양이 절박하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도 입술의 죄악 뿐이었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는데, 친밀함과 회개의 관계입니다.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지 여부를 어떻게 아느냐? 하나는 예배로 나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 회개하고 돌이켰는데 이런 회개가 언제 일어났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을수록 여러분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서신서를 보면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그의 죄가 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서신서중 마지막에 쓰여진 것을 보면 죄인중에 괴수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바울은 그의 인생에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주님 앞에 더 가까이 갔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을수록 자기의 죄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보세요.
사무엘을 통해서 기름부음을 받을 후부터 성령이 강력하게 임했습니다. 사울의 시기 때문에 도망다녔습니다. 사울을 굴 속에서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죽일 수 있는데 안죽이고 옷자락을 조금 잘랐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자르자 마자 그 앞에 회개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다윗이 한 것보다 더 죄를 안지었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까?
바리새인들을 보세요.
그들은 예수님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의 소욕을 이루려하나니라고 할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마24장을 보면 화로다라는 말이 일곱 번 나옵니다. 그만큼 그들이 영적으로 타락한 상태 어두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합니다.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엘리 시대를 보세요. 예레미야 시대를 보세요. 하나님의 심판이 코 앞에 나가왔는데도 자신들의 죄를 보지 못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친밀한 가운데 있을수록 자신의 죄가 보입니다. 친밀함에서 떠날수록 자신의 죄는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죄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올바른 관계에 있는지를 볼 수 있는 싸인은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보고 회개했던 때가 언제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하나님의 기준을 보이고 그 앞에 우리의 모습이 보일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와 회개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의중을 구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에배할 때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빛을 비추심으로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돌이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할 때 회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경우 회개만 일어났던 것이 아닙니다. 애통함 가운데 있을 대 스랍들이 숯을 가져다가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서 정결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비추십니다. 하나님과 바알을 양다리 걸치고 섬기고 있는 세대 그러나 그들을 사랑해서 그들이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 그들을 향해 갈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갈급함을 보이십니다. 이사야는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의중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삶을 드립니다. 주여 제가 여기 있는데 저를 보내소서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나중에 벌거벗고 다닙니다. 상징적인 행위로 이스라엘이 이런 포로의 신세가 될 것을 경고하며 회개하라는 사역이지요. 그뿐아니라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는 톱으로 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이렇게 하나님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초기에 독일에서 유학을 했던 전도사님이 친구를 통해서 교회게 가끔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잘 안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왜 안오느냐고 친구에서 물었더니 그 교회만 가면 자꾸 죄가 생각나서 부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에 죄가 드러나고 회개가 일어납니다. 회개는 축복입니다.
3. 우리가 예배할 때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확증될 수 있습니다.
시25:14절입니다.
“14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친밀함이 주어지고 하나님과 친밀한 자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우리 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야 나가는 자에게 하나님을 경외함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을 보이시고 확증하십니다.
민25장에 보면, 비느하스가 타락한 예배행위를 용납하지 않고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막습니다. 그때 비느하스에게 하나님이 언약을 주십니다.
10-13절입니다.
“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1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12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13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여기보면 영원한 평화의 언약을 주실 것이라 하면서 그 후손이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는 하나님께 가장 귀하게 쓰임받었던 제사장 반역이 비느하스 반열이었습니다. 엘리는 비느하스 반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질투함으로 예배하고 섬기는 비느하스에게 하나님이 평강의 언약을 주셨는데 그 언약이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경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주십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포도나무 교회에 주신 언약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어요. 단순히 이론 전달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떠오르는 하나가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유업의 약속이었습니다. 이 일의 제일 처음은 제가 처음 교회를 개척할 때 주셨습니다. 두 번째 개척했을 대 더 많은 것들을 새롭게 말씀하시며 그 유업을 포도나무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처음 개척할 때 어려워서 장기간 금식기도를 하러 갔습니다. 20일을 작정하고 갔는데 10일했습니다. 그런데 주일날 거기에 있다 보니까 기도원에 속한 교회의 주일낮예배를 방송으로 중계했습니다. 그때가 선교주일이었는지 선교사들이 세계 국기를 들고 입장하고 그런 모습을 보였어요. 그러면 그것을 기뻐해야 하는데 제 자신과 비교되니까 기쁘기 보다도 마음이 가라앉아요. 그래서 예배가 끝나고 기도굴에 가서 앉았어요. 기쁜 마음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태도 때문에 가라앉은 마음으로 앉아있는데 갑자기 하나님이 세계선교를 저에게 맡겼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증표로 제가 섬기는 교회가 만명이 될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 출3장을 보면 모세에게 오셔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주실 것이라고 하면서 그 증표로 나와서 나중에 여기서 함께 예배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 생각났어요. 당시에 지하에서 개척교회를 하면서 성도가 채 20명이 안되던 시대라 목회가 어렵다보니 정신이 이상해져서 희한한 음성을 듣는 것처럼 들릴 이야기밖에 안되었습니다. 그 뒤로 포도나무 교회를 하나님이 세우게 하셨고 반복해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열방으로 부르셨는데 하나님만 따라가면 하나님이 그 약속을 이루시겠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포도나무 교회가 세워진 후에 이와 비슷한 말씀이 몇 차례 더 있었습니다. 제가 찬양을 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비추는 것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칭찬도 하고 은혜받았다고 하고 옷도 사주고 하는데,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저와 함께하신 기름부음이 하신 것입니다. 제가 취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하셨는데 칭찬은 제가 받고 보상을 제가 받으니 상급은 하나도 없을 것 같아요. 찬양을 하는데 앞이 캄캄해요. 그래서 절박하게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하며 주님을 바라보는데 하나님이 제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식시켜 주세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 아들아 열방을 구하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줄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곧바로 구하라 모든 열방들을 유업으로 네게 주리라는 찬양을 했습니다. 한 30분 이상을 했는데 그 가운데 있는 모든 분들이 얼마나 하나님이 그 가운데 임재하시고 운행하셨는지를 피부로 인식할 수 있을 정도였어요.
이런 약속들은 보증이 아니라 초청입니다.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서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ㅂ의 행하심 의도를 발견하고 우리 온 삶으로 동참하게 될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포도나무 교회는 나라의 모든 교회와 열방의 모든 교회와 목회자들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만 잘되고 성장해서 좋은 교회가 될지 몰라도 이 나라 모든 교회 목회자 열방의 모든 교회를 여러분의 마음으로 품지 않으면 우리는 존재의 가치를 잃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되어야 합니다. 출32장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하시고자 할 때 모세가 중보기도합니다. 저희를 돌이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이 나라의 모든 목회자와 교회를 품어야 합니다.
어제 스탭회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지난 화요모임에서 어떤 분이 기도받으면서 기도사역자에게 기도를 받으면서 교회를 옮기려 하고자 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하나님의 뜻을 물었데요. 그래서 기도사역자가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우리에게 조치원처소가 곧 생기니까 조금 기다리면 어떻겠느냐고 했답니다. 이 이야기가 대전의 어떤 목사님에게 전해졌고 그 목사님이 우리 스탭에게 교회가 그렇게 하면 되겠느냐고 말했대요. 그래서 스텝회의에서 그렇게 기도해준 분이 누구인지 알아보라고 했어요. 말이 와전될 수 있으니까. 그려면서 동시에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러분 조치원에 지역처소가 생기는 것은 포도나무교회만 잘먹고 잘살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이 나라의 모든 교회 목회자들에게 생수의 강이 흐르도록 기도하고 애통해하는 마음을 잃으면 그 순간부터 존재가치를 잃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교회에서 목회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백두에서 한라까지 찬양을 드리면서 2절에서 ‘이 땅에 주님의 교회 위에 하늘의 생기 부어주소서’ 이런 찬양을 드릴 때 어떤 자세로 드립니까? 저는 그 찬양을 드릴 때 이 땅의 모든 교회 위에 그렇게 임하기를 절박한 마음으로 드렸어요.
하나님은 우리 예배 가운데서 약속을 주시고 확인시켜 주십니다.
4.거듭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요15:26절입니다.
“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분입니다.
요6:44절입니다.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이처럼 성령님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가운데 오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택하심을 따라 잃은 영혼을 구원하십니다. 그들에 피조물임을 보시고 죄인인 것을 보이시고 구원이 절박하게 필요함을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이것이 예배를 통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5.치유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임하시고 거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면 그분만이 하시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나타나는 일중 하나가 치유입니다. 임재가 곧 능력입니다.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치유를 소개하기 위해 세계적으로 쓰임받은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그랬어요. 하나님께서 오셔서 치유해주시기를 구하는데 능력이 임해야 하는데 어떻게 임하는지 잘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발견한 것이 하나님의 임재가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능력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는 것이 임재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치유의 분위기를 중요시합니다. 치유의 분위기란 하나님의 임재와 우리의 믿음이 합해질 때 치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로 함께하시고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할 때 하나님의 때에 치유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원해도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면 안되고 아무리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도 우리가 환영하지 않으면 쏟아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와 믿음이 합해질 때 치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경배할 때 우리 가운데 치유가 자유롭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사역할 때도 무조건 하지 말고 먼저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하라고 합니다. 물론 예배가 치유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문제는 예배할 때 하나님과 친밀함이 열리고 임재가 넘치고 예민해서 하나님을 잘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6.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 평강 희락 위로 등을 부어주실 수 있습니다.
롬14:17절입니다.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운행하시며 통치하십니다. 즉 하나님나라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안에서 우리에게 소망을 위로를 기쁨을 부어주시기도 합니다.
롬5:5절입니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나라를 주시기를 원하신다고 말합니다.
눅12:32절입니다.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문맥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왕된 삶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왕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 때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를 통치하시고 다스리기를 원하십니다.
7.성령의 능력과 은사가 임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제일 쉬운 것이 은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사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은사는 하나님이 성령이 임재하시는 곳에 주어집니다. 특히 예배로 모일 때 그렇습니다. 고전 12-14장은 은사장인데 문맥을 보면 모일 때 즉 예배할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은사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사실 은사가 주어지는 것은 쉽습니다. 어려운 것은 우리의 성품이 빚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은사 곱하기 성품은 열매다. 그런데 성품은 마이너스도 있다. 무슨 말입니까? 은사는 강력하게 임했는데 성품이 빚어지지 않고 가치관이 안되고 관계가 빚어지지 않으면 손해를 끼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품이 빚어지고 관계가 세워지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엄 쿡 목사는 어떤 사람에게 은사가 강력하게 임해도 하나님 앞에 쓰이려면 25년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성품이 빚어지고 관계가 세워지고 가치관이 정립되는데. 그만큼 빚어져야하고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사만 임하면 그 다음부터 멍석을 펴지요.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예배 가운데 회복되어지고 오늘 살펴본 일들이 우리 가운데서 자유롭게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오케스트라 있지요. 오케스트라의 질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실력을 합해놓은 것 이상이 되지 않습니다. 각자의 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이 얼마나 실력이 잇는지 그 실력을 합해놓은 것보다 더 좋은 실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휘가 오더라도. 포도나무 교회의 예배의 수준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예배수준을 초월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찬양팀이 서도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 지도자가 서도. 그래서 포도나무 교회의 예배가 회복되려면 여러분의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예배회복 없이 공동체의 예배회복은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예배가 회복되기를 열망하며 애통해하지 않으면서 오늘 왜 예배가 이래 하면서 판단하지 않으셨습니까? 회개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부으셔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예배가 우리가 배운대로 회복되어지고 전체 교회의 예배가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여주봉목사
약4:8절입니다.
“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하나님이 우리 예배 가운데서 행하시는 일들을 살펴봅니다.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그분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약4장 8절에서 가까이하실 것을 말합니다.
렘29:13절입니다.
“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야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야 주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임재로 함께하십니다. 그분이 오리 가운데 오시면 그분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우리 가운데서 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습니다. 예배는 결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예배를 받기에 홀로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에 예배하는 것 자체가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배할 때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운행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운행하실 때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기를 환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오셔서 운행하실 때 일어나는 일들 몇 가지를 살펴봅니다.
1.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앞에서 구약에 성전을 통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구약의 성전은 오늘날 우리 교회를 향한 그림자이고 예배를 향한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을 보면 개개인의 성도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이고 구약의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었기 때문에 우리 예배를 위한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면 성전을 향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는 그곳에서 예배가 드려질 때 그곳에 영광으로 임하셔서 거하시며 그들의 길을 지도하시고 앞서가시며 하나님의 뜻을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출29:42절입니다
“42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출40:34절 이하입니다.
“34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하나님이 영광으로 그들에게 임하실 뿐아니라 앞서 가시며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예배 가운데 항상 이런 일이 있기를 원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로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엎드릴 수밖에 없는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신1:3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3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
포도나무 교회만 해도 지금까지 오도록 제가 목회자로서 제 목회적인 비전이라든가 목회적인 목회관에서 의해서 교회를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한 부분 한 부분에서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지시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의중과 길을 보이신 주된 통로가 예배였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눈을 감고 허공에다 찬양을 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그분께 집중하고 그분께 예배합니다. 그분이 인식되지 않으면 제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러면 저는 집중적으로 주님을 찾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알리시고 해결하면 다시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됩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는지 여부를 테스트해볼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에배를 드릴 때 그분이 선명하게 인식되는가입니다. 여러분이 올바른 관계 가운데 있다면 그분이 선명하게 인식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길을 지도하십니다. 제가 예배를 준비하면서 하나님이 우리 포도나무교회를 인도하셨는데 구체적인 예가 무엇인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으로 예배당을 짓고 이사 온 일이었습니다. 분당에서 예배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24시간 다윗의 장막에서 하나님을 찾는 장소를 찾으라는 뜻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우성상가를 구입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갔습니다. 그런데 민원에 막혔습니다. 단지 내 상가 주민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법적으로는 우리가 이깁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 하나님 따라가는 것으로 바쁜데 언제 그것 싸우느라 있겠어요. 분명히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왔는데. 다윗의 장막의 노트를 보았는데 모여서 기도하라는 감동을 보았어요. 주일부터 모여서 기도하자고 했어요. 주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루에 두 시간씩.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모여도 도와주세요 하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든 예배건 하나님 그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중을 구하여 나갔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면서 구하면서 나왔는데 높아진 생각 그릇된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조정했습니다. 사흘째 되는날 하나님이 예배 시간에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됐다 다음 단계로 가라고 하셨어요. 다음 단계는 교회가 땅을 사서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간에 곧바로 임대로 나갔고 관리비 등 모든 것이 순식간에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계시가 되어서 찾는 가운데 여기 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2.가장 흔히 일어나는 일중에 하나가 회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성령이 임재하십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 중에 하나가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16:7-8절입니다.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이처럼 성령께서 하시는 일중 하나가 우리 죄를 책망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예배가 회복될 때 하나님이 우리 죄를 보게 하시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그래서 회개가 일어납니다.
이사야의 예배를 보십시오. 사6장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하늘문에 열리고 하늘보좌가 보입니다. 그때 이사야가 곧 바로 한 일이 회개였습니다.
사6:1-7절입니다.
“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하나님이 예배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였는데 곧 바로 나타난 것이 회개였습니다. 이사야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앞에 섰는데 보이는 죄가 입술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아름다움은 말로다’라는 찬양을 드리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는 가사가 꿈틀대는 것입니다. 아름다우심이 인식되며 그 앞에 내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는 새포 하나 하나에까지 부정한 생각이 가득했어요. 그래서 곧바로 제가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하는 찬양을 드렸습니다. 이 찬양이 절박하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도 입술의 죄악 뿐이었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는데, 친밀함과 회개의 관계입니다.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지 여부를 어떻게 아느냐? 하나는 예배로 나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 회개하고 돌이켰는데 이런 회개가 언제 일어났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을수록 여러분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서신서를 보면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그의 죄가 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서신서중 마지막에 쓰여진 것을 보면 죄인중에 괴수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바울은 그의 인생에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주님 앞에 더 가까이 갔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을수록 자기의 죄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보세요.
사무엘을 통해서 기름부음을 받을 후부터 성령이 강력하게 임했습니다. 사울의 시기 때문에 도망다녔습니다. 사울을 굴 속에서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죽일 수 있는데 안죽이고 옷자락을 조금 잘랐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자르자 마자 그 앞에 회개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다윗이 한 것보다 더 죄를 안지었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까?
바리새인들을 보세요.
그들은 예수님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의 소욕을 이루려하나니라고 할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마24장을 보면 화로다라는 말이 일곱 번 나옵니다. 그만큼 그들이 영적으로 타락한 상태 어두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합니다.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엘리 시대를 보세요. 예레미야 시대를 보세요. 하나님의 심판이 코 앞에 나가왔는데도 자신들의 죄를 보지 못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친밀한 가운데 있을수록 자신의 죄가 보입니다. 친밀함에서 떠날수록 자신의 죄는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죄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올바른 관계에 있는지를 볼 수 있는 싸인은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보고 회개했던 때가 언제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하나님의 기준을 보이고 그 앞에 우리의 모습이 보일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와 회개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의중을 구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에배할 때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빛을 비추심으로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돌이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할 때 회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경우 회개만 일어났던 것이 아닙니다. 애통함 가운데 있을 대 스랍들이 숯을 가져다가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서 정결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비추십니다. 하나님과 바알을 양다리 걸치고 섬기고 있는 세대 그러나 그들을 사랑해서 그들이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 그들을 향해 갈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갈급함을 보이십니다. 이사야는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의중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삶을 드립니다. 주여 제가 여기 있는데 저를 보내소서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나중에 벌거벗고 다닙니다. 상징적인 행위로 이스라엘이 이런 포로의 신세가 될 것을 경고하며 회개하라는 사역이지요. 그뿐아니라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는 톱으로 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이렇게 하나님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초기에 독일에서 유학을 했던 전도사님이 친구를 통해서 교회게 가끔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잘 안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왜 안오느냐고 친구에서 물었더니 그 교회만 가면 자꾸 죄가 생각나서 부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에 죄가 드러나고 회개가 일어납니다. 회개는 축복입니다.
3. 우리가 예배할 때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확증될 수 있습니다.
시25:14절입니다.
“14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친밀함이 주어지고 하나님과 친밀한 자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우리 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야 나가는 자에게 하나님을 경외함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을 보이시고 확증하십니다.
민25장에 보면, 비느하스가 타락한 예배행위를 용납하지 않고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막습니다. 그때 비느하스에게 하나님이 언약을 주십니다.
10-13절입니다.
“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1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12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13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여기보면 영원한 평화의 언약을 주실 것이라 하면서 그 후손이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는 하나님께 가장 귀하게 쓰임받었던 제사장 반역이 비느하스 반열이었습니다. 엘리는 비느하스 반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질투함으로 예배하고 섬기는 비느하스에게 하나님이 평강의 언약을 주셨는데 그 언약이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경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주십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포도나무 교회에 주신 언약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어요. 단순히 이론 전달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떠오르는 하나가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유업의 약속이었습니다. 이 일의 제일 처음은 제가 처음 교회를 개척할 때 주셨습니다. 두 번째 개척했을 대 더 많은 것들을 새롭게 말씀하시며 그 유업을 포도나무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처음 개척할 때 어려워서 장기간 금식기도를 하러 갔습니다. 20일을 작정하고 갔는데 10일했습니다. 그런데 주일날 거기에 있다 보니까 기도원에 속한 교회의 주일낮예배를 방송으로 중계했습니다. 그때가 선교주일이었는지 선교사들이 세계 국기를 들고 입장하고 그런 모습을 보였어요. 그러면 그것을 기뻐해야 하는데 제 자신과 비교되니까 기쁘기 보다도 마음이 가라앉아요. 그래서 예배가 끝나고 기도굴에 가서 앉았어요. 기쁜 마음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태도 때문에 가라앉은 마음으로 앉아있는데 갑자기 하나님이 세계선교를 저에게 맡겼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증표로 제가 섬기는 교회가 만명이 될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 출3장을 보면 모세에게 오셔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주실 것이라고 하면서 그 증표로 나와서 나중에 여기서 함께 예배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 생각났어요. 당시에 지하에서 개척교회를 하면서 성도가 채 20명이 안되던 시대라 목회가 어렵다보니 정신이 이상해져서 희한한 음성을 듣는 것처럼 들릴 이야기밖에 안되었습니다. 그 뒤로 포도나무 교회를 하나님이 세우게 하셨고 반복해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열방으로 부르셨는데 하나님만 따라가면 하나님이 그 약속을 이루시겠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포도나무 교회가 세워진 후에 이와 비슷한 말씀이 몇 차례 더 있었습니다. 제가 찬양을 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비추는 것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칭찬도 하고 은혜받았다고 하고 옷도 사주고 하는데,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저와 함께하신 기름부음이 하신 것입니다. 제가 취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하셨는데 칭찬은 제가 받고 보상을 제가 받으니 상급은 하나도 없을 것 같아요. 찬양을 하는데 앞이 캄캄해요. 그래서 절박하게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하며 주님을 바라보는데 하나님이 제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식시켜 주세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 아들아 열방을 구하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줄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곧바로 구하라 모든 열방들을 유업으로 네게 주리라는 찬양을 했습니다. 한 30분 이상을 했는데 그 가운데 있는 모든 분들이 얼마나 하나님이 그 가운데 임재하시고 운행하셨는지를 피부로 인식할 수 있을 정도였어요.
이런 약속들은 보증이 아니라 초청입니다.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서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ㅂ의 행하심 의도를 발견하고 우리 온 삶으로 동참하게 될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포도나무 교회는 나라의 모든 교회와 열방의 모든 교회와 목회자들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만 잘되고 성장해서 좋은 교회가 될지 몰라도 이 나라 모든 교회 목회자 열방의 모든 교회를 여러분의 마음으로 품지 않으면 우리는 존재의 가치를 잃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되어야 합니다. 출32장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하시고자 할 때 모세가 중보기도합니다. 저희를 돌이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이 나라의 모든 목회자와 교회를 품어야 합니다.
어제 스탭회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지난 화요모임에서 어떤 분이 기도받으면서 기도사역자에게 기도를 받으면서 교회를 옮기려 하고자 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하나님의 뜻을 물었데요. 그래서 기도사역자가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우리에게 조치원처소가 곧 생기니까 조금 기다리면 어떻겠느냐고 했답니다. 이 이야기가 대전의 어떤 목사님에게 전해졌고 그 목사님이 우리 스탭에게 교회가 그렇게 하면 되겠느냐고 말했대요. 그래서 스텝회의에서 그렇게 기도해준 분이 누구인지 알아보라고 했어요. 말이 와전될 수 있으니까. 그려면서 동시에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러분 조치원에 지역처소가 생기는 것은 포도나무교회만 잘먹고 잘살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이 나라의 모든 교회 목회자들에게 생수의 강이 흐르도록 기도하고 애통해하는 마음을 잃으면 그 순간부터 존재가치를 잃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교회에서 목회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백두에서 한라까지 찬양을 드리면서 2절에서 ‘이 땅에 주님의 교회 위에 하늘의 생기 부어주소서’ 이런 찬양을 드릴 때 어떤 자세로 드립니까? 저는 그 찬양을 드릴 때 이 땅의 모든 교회 위에 그렇게 임하기를 절박한 마음으로 드렸어요.
하나님은 우리 예배 가운데서 약속을 주시고 확인시켜 주십니다.
4.거듭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요15:26절입니다.
“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분입니다.
요6:44절입니다.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이처럼 성령님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가운데 오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택하심을 따라 잃은 영혼을 구원하십니다. 그들에 피조물임을 보시고 죄인인 것을 보이시고 구원이 절박하게 필요함을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이것이 예배를 통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5.치유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임하시고 거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면 그분만이 하시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나타나는 일중 하나가 치유입니다. 임재가 곧 능력입니다.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치유를 소개하기 위해 세계적으로 쓰임받은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그랬어요. 하나님께서 오셔서 치유해주시기를 구하는데 능력이 임해야 하는데 어떻게 임하는지 잘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발견한 것이 하나님의 임재가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능력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는 것이 임재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치유의 분위기를 중요시합니다. 치유의 분위기란 하나님의 임재와 우리의 믿음이 합해질 때 치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로 함께하시고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할 때 하나님의 때에 치유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원해도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면 안되고 아무리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도 우리가 환영하지 않으면 쏟아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와 믿음이 합해질 때 치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경배할 때 우리 가운데 치유가 자유롭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사역할 때도 무조건 하지 말고 먼저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하라고 합니다. 물론 예배가 치유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문제는 예배할 때 하나님과 친밀함이 열리고 임재가 넘치고 예민해서 하나님을 잘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6.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 평강 희락 위로 등을 부어주실 수 있습니다.
롬14:17절입니다.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운행하시며 통치하십니다. 즉 하나님나라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안에서 우리에게 소망을 위로를 기쁨을 부어주시기도 합니다.
롬5:5절입니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나라를 주시기를 원하신다고 말합니다.
눅12:32절입니다.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문맥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왕된 삶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왕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 때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를 통치하시고 다스리기를 원하십니다.
7.성령의 능력과 은사가 임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제일 쉬운 것이 은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사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은사는 하나님이 성령이 임재하시는 곳에 주어집니다. 특히 예배로 모일 때 그렇습니다. 고전 12-14장은 은사장인데 문맥을 보면 모일 때 즉 예배할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은사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사실 은사가 주어지는 것은 쉽습니다. 어려운 것은 우리의 성품이 빚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은사 곱하기 성품은 열매다. 그런데 성품은 마이너스도 있다. 무슨 말입니까? 은사는 강력하게 임했는데 성품이 빚어지지 않고 가치관이 안되고 관계가 빚어지지 않으면 손해를 끼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품이 빚어지고 관계가 세워지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엄 쿡 목사는 어떤 사람에게 은사가 강력하게 임해도 하나님 앞에 쓰이려면 25년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성품이 빚어지고 관계가 세워지고 가치관이 정립되는데. 그만큼 빚어져야하고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사만 임하면 그 다음부터 멍석을 펴지요.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예배 가운데 회복되어지고 오늘 살펴본 일들이 우리 가운데서 자유롭게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오케스트라 있지요. 오케스트라의 질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실력을 합해놓은 것 이상이 되지 않습니다. 각자의 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이 얼마나 실력이 잇는지 그 실력을 합해놓은 것보다 더 좋은 실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휘가 오더라도. 포도나무 교회의 예배의 수준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예배수준을 초월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찬양팀이 서도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 지도자가 서도. 그래서 포도나무 교회의 예배가 회복되려면 여러분의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예배회복 없이 공동체의 예배회복은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예배가 회복되기를 열망하며 애통해하지 않으면서 오늘 왜 예배가 이래 하면서 판단하지 않으셨습니까? 회개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부으셔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예배가 우리가 배운대로 회복되어지고 전체 교회의 예배가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