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 가장 중요한 단어
제1강 가장 중요한 단어
마5:23-24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오스카 탐슨 목사님은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 다닐 때 전도학 교수님이셨습니다.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참으로 아까운 분이십니다. 책에 서문에 로이드 피시라는 교수님이 쓰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참 소중한 책입니다. 반드시 전도 뿐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가는 삶을 위해서 아주 소중한 책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이 책의 가치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절판되었어요. 마스터를 떠서 사무실에 보관하고 있으니 구입하실 분은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새롭게 우리가 번역하려고 의뢰해 놓은 상태입니다. 이 책을 통해서 이번 시리즈를 통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배움대로 실천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회복의 역사 뿐아니라 전도를 향한 우리 문을 열어 가까운 가족이나 관계에서부터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가장 중요한 단어라는 제목으로 관계중심 전도의 개괄적인 면을 살펴보겠습니다.
1.가장 중요한 단어는 관계이다.
영어에 있어서 고유명사를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단어는 관계입니다. 어떤 분은 사랑이 가장 중요한 단어가 아니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런데 관계가 없이는 사랑이 전달될 수 없습니다. 관계가 있어야만 사랑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관계는 선로에 비유될 수 있고 사랑은 기차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관계라는 선로를 통해서 전달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인생의 위기의 순간 아픔의 순간들이 어떠한 순간들이었는지를 생각해보세요. 그것은 다 관계가 무너진 순간들이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분리되었다거나 또는 부모에게 화를 내었던 경험이나 십대로서 당신의 친구와 헤어져야만 했던 일, 친구지간에 오해와 분노, 부모 혹은 배우자의 죽음 또 그로 말미암아 오는 공허감과 비통함, 가정에서의 다툼 심지어는 이혼에까지 이르는 파경, 고용인과 고용주 사이의 갈등, 가족간의 분규와 불화, 사업과 교회에서의 고민 등등 다 깨어진 관계로 말미암아 오는 것들입니다.
반면에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들 가장 즐거웠던 순간들은 언제였습니까? 좋은 관계에서 오는 유익이었을 것입니다. 포근한 부모의 품에 안겼을 때, 따뜻한 봄날 친구들과 부모들과 언니들과 장난치며 놓았던 일들, 사랑하는 아내를 처음 만났던 그 순간, 사랑하는 친구들과 밤을 새며 이야기했던 순간들, 다 좋은 관계에서 오는 것들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증명해주듯이 분열과 가정 사업의 실패, 교회의 분이 무기력한 정치 혼란한 국가는 깨어진 관계의 결실이요 반대로 견고한 가정생활 안정된 가정 성공적인 사업 섬기는 교회 훌륭한 정부 강력한 국가 등은 다 좋은 관계의 결실입니다.
그래서 탐슨 목사는 심지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회가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을 중단할 때 그 사회는 퇴폐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태도는 거칠고 천박스럽게 됩니다. 평범한 예의범절도 곧 망각해 버립니다. 마음은 냉랭하게 되어 감사하는 표현마저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를 보면서 관계가 심각하게 무너져 있는 것을 봅니다. 어떤 외국기자가 한국에 대해서 한 마디로 표현하기를 영어로 패슬이라고 했어요. 이 말은 조급함도 있고 서두름도 있고 예의범절의 부족도 있지만 거기에 활력과 활기가 있는 이런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나라가 그럽니다.
제가 비행기 연결이 잘 안되어서 일본에서 이틀을 지냈는데 두 차례, 짧은 기간이었는데 질서가 있고 모든 것이 잘 갖추어져 있었어요. 그런데 한국에 오니까 그것은 부족할지 몰라도 활력이 있어요. 그래서 짧은 기간내에 성공을 거두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다보니까 관계가 심각하게 무너져 있습니다.
사실 제가 80년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상처 부모에게 받은 상처 가정에서의 상처를 다룰 때 저는 그것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우리들이 가정에서 자라며 부모에게 맞기도 하고 형제들에게 얻어터지기도 하고 물론 저는 장남이어서 저를 때리는 형들이 없었습니다만. ㅋㅋㅋ 다 이렇게 자랐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삶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고 상처라고 생각지 않고 자랐는데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후에 우리나라에 급속도로 그런 것들이 나타났지요. 이처럼 우리나라는 관계를 소홀이 여겼습니다. 관계가 심각하게 깨어져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예외가 없을 정도로 관계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관계를 회복하기를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한번 깨어지면 교회를 떠나려고 결심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혼률만 하더라도 우리나라가 세계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이만큼 철저하게 관계가 무너져 있습니다.
2.인간의 두 가지 기본적인 관계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수직적인 관계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둘째는 수평적인 관계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수직적인 관계가 우선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올바로 되어야 다른 사람과의 수평적인 관계도 올바로 될 수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올바로 되어야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문제에 있어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수직적인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방법과 조건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우리의 주 되신 삶입니다. 그래서 골2:6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우리의 주되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주되신 삶 가운데 거하라는 말입니다. 뿐만아니라 우리가 잘 아는 아모스 3장 3절에서는 두 사람이 의합하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그랬는데 의합한다는 말은 상대방과 완전히 동의하며 같은 조건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면 하나님께 완전히 동의하여 하나님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를 위해서도 하나님의 방법과 조건 위에 반드시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입니다.
사실 지난 훈련원 시간에도 그 부분을 나누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신앙이 많이 왜곡되었는데 가장 기본적인 복음에 있어서도 왜곡되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은 처음 예수믿을 때부터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 뿐아니라 우리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고후 4장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처음 전하는 것을 말하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에게 주로 전한다고 말하고 있고 골2장에서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교리적으로는 안그럴지 몰라도 실제적으로는 예수님을 우리의 삶 속에 구세주로 모신 것과 주인으로 모신 것을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구원받을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니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으세요. 그러나 예수님의 그들의 삶 속에서 모든 영역에서 주인된 삶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올바르게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뿐아니라 주인으로 처음부터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진정으로 올바르게 되려면 하나님의 방법과 조건으로 하나님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이 하나님의 방법과 조건하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관계에서 뿐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수평적인 관계에서도 하나님의 조건과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 개인의 조건과 개인의 방법으로는 절대로 올바른 관계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방법만이 올바른 관계를 가져옵니다.
중요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우리가 이 시리즈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오스카 탐슨 목사님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게 하면서 행하신 귀한 예들이 책에 나와 있습니다. 그 부분들을 살펴볼 것입니다.
한번은 오스카 탐슨 목사님이 샌프란시스코에서 텍사스지역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12월이었습니다. 왼쪽 자리에는 텍사스 대학교 교수이며 오스틴의 한 교회의 집사직을 맡은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쁨에 넘친 모습으로 나와 함께 대화를 했습니다. 오른편에는 글을 쓰느라 한창 바쁜듯이 보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자였습니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세 시간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 그가 팬을 놓자 우리는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무엇하는 사람이요?”하고 그가 물었습니다.
나는 오래 전서부터 사람들에게 내가 침례교회의 설교자란 사실을 대뜸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음을 알았습니다. 특히 세 시간 동안의 비행기 여행 시에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그들은 아마 그 소리를 들으면 공포에 질려서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지도 모릅니다. 그 대신에 나는 “네, 교사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기다렸습니다. “무엇을 가르치나요?” 그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내가 신학교에서 전도학을 강의한다고 말하기를 원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은 흥미로운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영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어인 관계(Relationship)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이 세상에서 관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가정과 이웃의 문제 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와 국제간의 문제들도 해소될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면서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맞습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나는 타임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것이 당신이 말하려고 하는 것 전부입니까?” 그래서 나는 다시 말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이 책에서 당신에게 설명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말했었습니다. 나는 두 가지 유형의 관계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과의 수평적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관계들에 기초를 마련하신 우주의 창조주와의 수직적인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계획에 의하여 창조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계획을 따른다면, 일은 잘 될 것입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순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계들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나님은 그 관계들을 재수립할 수 있는 계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가장 잘 나타납니다”라고 나는 비행기에서 그 사람에게 언급했습니다.
“아! 나도 성경은 읽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 많은 것에 동의합니다만 모든 말씀은 믿지 못하겠어요. 그러나...”
“네 그것이 바로 내가 가르치는 바입니다.”
내가 단 45분 만에 휴스턴에 가는 사람이었더라면, 나는 그렇게 태평스럽게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 시간 걸리니까, 또 나는 타임지를 들었습니다. 그는 거기에 그대로 있었고 나는 타임지를 읽어내려갔습니다.
“좀 더 말씀하십시오.”라고 그는 나를 응시하였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 나는 참 기쁩니다.”라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대화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성경에 대한 많은 문제들을 제기했습니다. 당신과 내가 아는 바대로 세상에는 성경말씀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풍자한 글만을 읽었기 때문에 성경을 배척한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그에 대한 풍자한 글만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를 숭배하는 신앙”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한번도 참된 말씀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그들이 근본적으로 그를 배척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극입니다. 영화 제작자와 나는 그 점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화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당신은 그가 누구이며 그리고 그는 어떠한 분이심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라고 그는 물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은 그가 말씀하신 대로였든가 아니면 그는 정신병자 또는 대 사기꾼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딕, 당신은 증거에 근거하여, 궁극적으로 그가 누구인가를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사로 결론지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이 위대한 선생이,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선언하지 않았습니까? 위대한 교사치고 거짓말쟁이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말씀에 의거해서 영접하시든지 혹은 그를 거절하시든가 둘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내가 설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또 타임지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옆 자리의 집사 친구가 나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우리가 탄 비행기가 엘가피탄 위를 날았을 때 “요세미티 입니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 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이 사람에게 확신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그의 가족 뿐 아니라 동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온갖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가족을 다시 함께 모으려고 애쓰는 중이었으며 따라서 그의 정신 상태는 심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만 지역을 돌기 전 산맥을 지나갔을 때 나는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에게로 향하여 “오스카 박사님 오늘 아침 나는 달라스의 어느 모텔 방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정말 하나님이 계신다면 나는 꼭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제발 누군가를 보내주십시오’ 하고 말입니다.” 그는 나의 팔꿈치를 잡고서, “하나님이 당신을 보내셨군요.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먼저 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권위에 복종하며, 그를 당신의 인생에 주님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나아오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조건들을 수락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것으로는 하나님께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딕 당신이 역사상 모든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전기를 읽는다면, 매우 흥미롭고 공통된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죠지 휘트필드, 죤 웨슬레, 마틴 루터. 그리고 역사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으로 일컫는 많은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찾았을 때 하나님과 심한 투쟁을 하였습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였으나 그들은 그들의 방법대로 그를 찾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감에 있어서 그들의 조건들을 포기했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은 그들을 영접하셨습니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드디어 자신의 것을 버리고 ‘이제 저는 당신의 조건들-그것들이 어떠하든지 그리고 어떠한 대가를 제가 치러야 하든지 간에-을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고백한 순간에 즉각적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셨던 것이었습니다.” 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조건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어떤 대가가 요구되는지간에요.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주님으로 뿐아니라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된 줄 알겠지요. 그가 비행기에서 내려더니 오스카 탐슨 박사님 감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에게 평생토록 가장 필요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날 그 사람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3.관계중심적인 전도
성경에 나오는 복음전파를 보면 이처럼 관계의 철로를 따라서 외부로 나갑니다. 마치 동심원처럼 자기 자신의 중심에서부터 관계중심의 동심원을 따라 점점 전파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사도행전 20:20절에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전도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오늘날 축호전도가 아니라 관계를 따라서 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저 사람에게 저 사람이 또 저 사람에게. 안드레는 베드로에게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수가성 물가의 여인은 자기가 살던 마을의 사람들에게, 고넬료는 그의 온 가족을, 빌립보감옥의 간수는 그 집안 온 식구들에게, 거라사의 귀신들은 자는 깨끗이 치유되었을 때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지만 예수님은 그의 친속들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게에게 행한 일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관계를 통해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관계의 동심원을 따라 멀리 전파되는 것이 성경에 나오는 복음전파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탐슨 박사는 관계의 동심원 사랑의 동심원을 일곱 가지로 그립니다. 중심에는 내가 있습니다. 2단계는 가족 - 3단계는 친척 - 4단계는 친한 친구들 - 5단계는 이웃, 사업동료 - 6단계는 아는 사람들 - 7단계는 사람X 즉 전혀 모르는 사람들.
이러면서 여기보면 중요한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1-6까지 관계의 영향력 아래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책임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예루살렘에서 유다와 사마리아지요. 두 번째는 2-6까지 우리 관계안에 있는 사람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지 않고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위선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또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한번은 그분이 캠프에 우리나라로 말하면 연합수련회에 전도에 대해서 강의해달라고 초청을 받았습니다. 거기에서 이 일곱 개의 원을 그려놓고 성경에서 복음은 중심에서부터 관계를 통해서 점점 밖으로 전파되었다. 그러면서 각 단계 안에 들어있는 관계들을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복음은 인접한 관계의 노선을 따라 움직여 갑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이 당신의 영향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당신에게 책임을 담당시킨다고 믿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원 2에서 원 6까지에 파손된 관계들이 있기 때문에 양심상 그것들은 뛰어넘어서 곧장 원 7로 직행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수평적으로 깨뜨려진 관계를 가질 때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로 파열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우리의 모든 것의 주인되시도록 하지 않으면 그분의 방법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 X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우리 생활양식이 반드시 일관성이 없더라도 괜찮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말하고 그 다음에는 우리의 방법대로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X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잘못은 없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우리의 생활영역으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원2에서부터 원6까지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할 수가 없다면, 우리는 위선적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연극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비현실적 사람들이 됩니다. 우리가 정말 진실하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렇게 나누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벽에 거미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있기도 하고 그런데도 듣는 것 같더래요. 어떤 사람들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고 앞에 있던 한 여자분이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하더래요. 분명히 상처를 받은 것 같더래요. 쓸개를 씹었거나 상처를 받았거나 그런데 후자같더래요. 나가버리더래요. 다시 볼 것 같지 않더래요. 그 다음주에 또 초청을 받아서 갔는데 그 여자분이 오셨더래요. “오늘도 당신이 오셨군요.” 그러더래요. 그러면서 강의 끝나고 제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러더라고요. 그리고 강의가 끝나고 그 여인이 왔습니다. “지난 주에 목사님이 제 마음을 굉장히 상하게 하셨습니다.”
“무슨 일이신데요?”
“목사님은 제가 사람X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여기에 왔다고 했잖아요?” 그러더래요. 사실 사람들은 자기 생각대로 많은 경우에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그 여인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나는 내 남편과 두 아들과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잘못이었습니다. 나는 양심의 위안을 얻기 위하여 이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에 강의를 들은 이후, 성령께서 나를 장악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집으로 돌아가야 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흐느껴 울면서 그녀는 “화목하기 위해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을 받아들였음을 당신은 아시겠지요. 나의 방법은 결코 우리를 화목케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화해자이십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우리들이 우리들의 방법으로 조건으로 관계를 하려고 하기 때문에 관계들이 깨뜨려집니다. 하나님이 방법과 조건으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관계로 회복되지 않을 뿐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절대로 회복되지 않습니다. 그 여자는 그날 집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방법과 조건을 가족들과 회복된 것입니다.
그 여자는 울면서 말을 계속했어요. “나는 집으로 곧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아십니까? 사람X를 향해서 가졌던 소심한 마음이 사라졌어요. 예수께서 나의 관계들의 주님이 되셨을 때, 그는 나의 소심증을 제거하셨습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한 가지 더 예가 있습니다. 그분이 신학교에서 가르치는데 강의 시간에 이 부분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짐이라고 하는 학생이 일어서면서 “교수님, 저는 문제가 많습니다. 목사님이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자라나셨으니까요. 저의 경우는 저의 아버지가 저를 26년 반전에 저를 버렸습니다. 제 나이가 지금 스물일곱입니다. 나는 아버지를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그를 만나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속으로 “아” “하나님 저를 통해서 짐에게 사랑을 나타내 주세요. 그의 필요를 채워주세요”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칠판을 향해서 갑니다.
마태복음 6장 14-15절이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설명했습니다.
“나의 인생에 대한 예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 때문에, 나는 내가 용서받아야만 할 경우, 남을 기꺼이 용서할 준비를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당신은 사람들이 마땅히 받아야할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필요한 것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돌아섰더니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분위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짐, 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 반에 들어왔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시며 당신과 이 반의 학생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시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의 바탕 위에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시는데 큰 어려움을 당할 것입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면 당신과 나도 역시 용서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랬더니 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성령께서 그 반 전체를 만지셨습니다. 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아버지가 계신 곳도 알지 못합니다. 그분의 생사조차도 알 길이 없는데요.”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당신의 태도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로 가지고 가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하라고 하시는 것을 들으십시오.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와서, 아버지를 찾을 수가 있다면 당신이 행할 바를 알게 될 것입니다.”
짐은 “예 알겠습니다.”
수업을 중단하고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몇 주가 지났습니다. 짐이 벨 헬리콥터 직원처럼 쏜살같이 달려들어 왔습니다.
“탐슨 박사님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참을 수가 없어요. 어제 밤에 전화 두 통을 받았습니다. 한 통은 어머니의 것으로부터 온 것이었는데, 신앙심이 두터우신 나의 아주머니께서 하나님나라로 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모인줄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까 고모였습니다. 또 한통의 전화가 와서 받았는데 걸려온 전화의 목소리는 이랬습니다. “짐? 아들? 사실 내겐 너를 아들이라고 부를 권리도 없지만 나는 네가 사우스웨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사역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 최근에 나도 예수 그리스도께 나의 삶을 드렸다면, 너도 매우 기뻐하겠지. 너는 나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할 수가 있겠니?”라고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말합니다. “제가 흐느껴 울기를 그쳤을 때 우리는 이야기할 수가 있었지요. 한 시간 동안에 대고 좋은 교제를 하였답니다. 아버지는 ‘아들아 네 졸업식에 내가 가도 좋으냐?’고 물으셨습니다.”
그해 5월 졸업식에 짐이 와서 어떤 분을 소개해주었는데 그분이 바로 짐의 아버지였습니다.
셋은 끌어안았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십자가의 능력이고 복음전파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동심원안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파열된 관계가 있다면 여러분을 통해서 성령님이 자유롭게 역사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23-24절에서 이렇게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번 시리즈를 통해서 여러분이 하나님과 관계가 온전히 회복될 뿐아니라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과 관계가 회복되고 더 나아가서 그 회복된 관계를 통해서 주님의 복음이 사랑이 증거됨으로 수많은 열매들을 맺게 되는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의 패턴이 되어지는 축복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