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설교/관계중심전도

제3강 진정한 당신을 발견하는 기쁨2

발의무리 2011. 2. 7. 09:00

                                      제3강 진정한 당신을 발견하는 기쁨2


창5:1-3
“1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관계중심전도에 대해서 시리즈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통로가 되어서 우리의 관계 동심원안에 하나님이 보내신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먼 사람까지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가 그들에게 임할 수 있도록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뿐아니라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삶에 있어서 관계중심전도에 다루고 있는 가치관이 우리 신앙의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도 지금 살펴보고 있는 이 가치관위에 반드시 세워져야 그것이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이루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초기부터 이번 시리즈를 통해서 살펴보는 가치관을 교회중심적인 가치관 중에 하나로 소중히 여기고 있는 부분들입니다.
그 부분을 쭉 살펴가기 원합니다.

그러면서 관계중심전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나 자신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랑의 동심원을 보듯이 중심에 나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관계가 되어야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갈 수 있기 때문에 내가 가장 중요합니다.


오늘은 이 나에 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기 원합니다.


1.우리는 아담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아까 읽은 창세기 5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타락한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훼손되었지요. 어떤 사람은 안 믿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소중한 부분이 그 안에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훼손되었으나 여전히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본문에서 보았듯이 아담이 자녀를 낳되 자기의 형상 자기의 모양대로 자녀를 낳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볼 수 있듯이 타락한 이후로 우리 인간 속에는 타락한 아담의 본성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본성의 가장 핵심은 무엇인가?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그래서 관계중심적인 전도의 저자인 탐슨 박사도 그 부분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들 모두는 첫 아담의 성질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충성을 바쳐야할 세 단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ME, MY, MINE입니다. 나에게, 나의, 나의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업을 하면서도 이 성품을 그대로 묘사합니다.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을 취하라. 그리고 그것을 다른 어떤 사람과도 나누지 말라. 그것은 다만 ‘나에게’ ‘나의’ ‘나의 것’이니까. 이것은 곧 옛 아담의 성품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세 가지입니다. 자기 목적을 위해서 사는 것이고 자기 자원으로 자기 방법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면서 탐슨 박사도 이러한 면에서 우리 타락한 인간의 이해를 다음과 같은 도표로 설명합니다. 세 가지 도표가 나옵니다. 첫째 그리스도 중심의 균형잡힌 삶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권적인 통치아래 있을 때 다시말해서 주님이 우리의 삶에 중심이고 우리의 삶을 온전히 다스리실 때만 우리가 진정한 균형을 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이처럼 균형을 잡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생명이 우리 삶 속에 흐르고 넘칠 수 있고 우리를 통해서 우리의 관계의 동심원안에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흘러넘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그 자체로 균형 잡히지 못합니다. 삶이 억압되어집니다. 환경 때문에 혹은 우리 삶의 어떤 압박들 때문에 우리가 받는 상처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우리 삶이 압박을 당합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 열등감입니다. 탐슨 박사가 암에 대해서 연구하고 상담하는 재단법인의 목회자로 섬겼습니다. 그 분 자신이 오랫동안 암으로 투병하면서 극복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를 나누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 돕는 일을 했습니다. 담당목사로 섬기면서 의사들의 모임에서 강의하면서 스트레스가 우리에게 주는 영향들, 그러면서 어떻게 우리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어서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어지고 나 자신 뿐만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섬길 수 있다는 것을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나누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답니다. 산업심리학자에 의하면 6세 이하의 90%이상의 아이들에게 열등의식이 있답니다고 말했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한 분이 중단시키며 말하기를, 아닙니다. 100%입니다.고 말하더랍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압박을 받고 억압을 받습니다.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열등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균형이 잡혀야 우리안에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이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면 이제는 그릇된 방법으로 그 균형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생깁니다. 옛 성품이 발동됩니다. 그릇된 방법이란? 자기중심적으로 그것을 균형잡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타락한 아담의 본성 중에 하나가 핵심이 자기중심적인 삶인데 그중 하나가 자기 방법대로 자기 자원으로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균형을 잡으려 할 때도 자기 방법으로 자기 자원으로 균형을 잡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나를 비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런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합니까? 저 사람이 여러분을 비판하면 여러분도 그 사람을 비판하지요. 뭐 그사람이 그랬어. 그러면서 그 사람이 한 대를 치면 두 대를 칩니다. 이것이 뭐냐? 우리 방법으로 우리 옛 사람의 자원을 의지해서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입니다.

자 그러면서 탐슨 박사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만으로 우리는 열등감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갖는 열등감 갖는 요인 중 하나는 죄책감입니다. 죄책감 중에서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 오는 죄책감은 올바른 죄책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깨닫는 죄의식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회개하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제가 죄를 범했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세요 하고 고백할 때 용서하시고 우리가 그 용서를 받아들임으로 치유됩니다. 그런데 죄책감 중에서 자기가 자기에게 가하는 죄책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갖는 주된 열등의식의 요인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진정한 죄의식은 용서받고 치유될 수 있으나 자기가 자기에게 가한 죄책감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무리 용서해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용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 앞에 사려고 하는 자기 의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자기 노력으로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노력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주 겸손한 것 같지만 매우 틀린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요인으로 우리가 눌리게 될 때 우리 방법으로 우리 자원으로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데 그 방법 중 몇 가지를 언급합니다. 하나는 주도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건 교회에서건 사회에서건. 자기가 다른 사람을 주도하고 지배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런 사람은 누구보다 적극적일 수 있습니다. 활동적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기 스스로 높여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자기 노력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시골 작은 교회를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자리야 말로 자기가 어떤 부분을 주도해서 갈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되는. 이것은 시골 작은 교회만이 아닙니다. 심지어 교회내에서도 큰 도시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노력할지 모르지만 그 동기가 자기의 열등감에서 나온 주도하고자 하는 것일 때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또 하나 자기가 스스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방편은 성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다르시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이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대로 우리가 우리 최선을 다하는 것은 소중합니다. 성경은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고 했습니다.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최선을 다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힘을 다해 열정적으로 주를 위해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버지의 일이 곧 내 일이기에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그 삶에 드리는 것을 예수님은 양식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그릇된 동기에서의 성취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이루어야 무언가를 많이 얻어야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인정해주고 자기의 말을 들어주고 그래야 자기를 받아들여주고 그래야 자기가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나설 수 있다고 생각해서 무언가를 이루려고 열심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열등감에서 나온 자기중심적인 것에서 나온 노력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열심을 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한 것입니다. 열심히 했는데 자기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오히려 실망합니다. 원망합니다. 상대방에게 불평합니다. 손가락질합니다. 책임을 전가합니다. 욕을 합니다. 결국 자기의 명예를 위해서 자기 이름을 위해서 자기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일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데 있어서도 이처럼 동기가 중요합니다.

오스카 탐슨 목사님이 신학교에서 강의하면서 젊은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자주 권면하곤 했답니다. 여러분이 이제 교제권 안으로 들어갑니다. 사람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여러분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더 많은 돈을 모으며 더 많은 건물들을 짓는 것 등등의 일을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원래 큰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일들을 해냅니다. 여러분은 자부심을 갖습니다. 여러분은 훌륭한 일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것을 잘못된 동기로 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설 때 불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 아니라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가 섬길 때에도 그리스도가 우리 삶 속에 진정한 주인되신 가운데 균형잡힌 내 자신이 되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섬길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자신의 노력으로 균형잡으려고 하는 것 중 하나가 자포자기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능력이 있어서 많은 것을 성취하려고 하는 자들은 성취자 반열에 서지만 능력도 없고 내놓을 것이 없는 자들은 자포자기합니다. 이렇게 성취하지만 그것이 결코 우리에게 진정한 균형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진정한 생명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은혜를 생명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우리의 자원으로 하는 것은요. 여러분 세계적으로 볼 때 국가적으로 볼 때도 개인 사업적으로 볼 때도 가장 자살률이 많은 나라가 제일 많이 성취한 곳이며 가장 자포자기한 곳입니다. 안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그러한 좋은 조건들이 자기에게 없기 때문에 자포자기해서 삶을 포기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자기 자원을 의지하여 세우려 할 때 자원이 없는 사람들 중에 자포자기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안에서도. 하나님이 자기를 버린 것처럼. 자기는 하나님 앞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처럼, 돈도 많이 벌고 기획력이 뛰어나고 언변도 뛰어나고 많이 배운 사람들은 쓰임받을지 모르나 내 자신은 하나님 나라에서 아무 곳에서도 쓸모 없는 것처럼.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무엇인가 우리에게 있어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처럼 그것이 없기 때문에 자신은 하나님의 관심에서 벗어난 것처럼 그래서 예수를 믿을지 모르지만 자포자기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을뿐더러 자신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어떤 생명도 승리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왜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세우려하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을 때 자포자기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자기 스스로 세우려 하는 노력 중 하나가 조작적인 세계에 빠지는 것입니다. 현실도피입니다. 우리에게 꿈도 필요하고 이상도 필요하고 이상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도 중요한데 문제는 그 속에 들어가 사는 것입니다. 현실과 격리된 세계속에서 머물러 거기서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작적인 세계에 도피하는 수단 중에 하나가 술이고 어떤 사람들은 마약이고 또 다른 것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완전히 현실에서 격리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예배한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어떤 모양으로도 쓰임받을 수 없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옛 사람 아담의 본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2.자기 중심적인 삶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우선 먼저 보십시오. 자기중심적인 삶의 핵심중의 하나는 자기 목적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탐슨 박사는 세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나에게’ ‘나의’ ‘나의 것’ 모든 것을 모아서 내 것만 삼고 그것만 안고 있으면서 자기만을 위해 사용합니다. 다른 세상의 모든 환경과 사람들은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모든 것들이 자기 목적을 성취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진 이렇게 되어지면 자기 속에 생명이 넘칠 것 같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창조시부터 하나님중심적으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자기만을 위해서 끌어모으는 삶으로는 절대로 거기에 생명이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왕 중에서 가장 큰 영화를 누린 왕입니다. 부하면 진짜 부했던 왕입니다. 지식도, 심지어 식물이나 이런 분야에까지 뛰어났습니다. 철학 문학 하나님이 그에게 지혜를 주시되 엄청난 지혜를 주어서 시바여왕이 보물을 가지고 와서 지혜를 들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얻는 솔로몬이 고백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2:1-10절입니다.
“1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2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3 내 마음이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4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5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6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7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8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9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10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이 솔로몬의 문제는 나였습니다. 그는 만사를 자기 마음대로 했습니다. 그에게는 무제한의 권한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위대한 것들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바로 다음 절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그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헤밍웨이 아시지요. 노인과 바다를 썼습니다. 여러번 결혼한 사람입니다. 노벨상을 탄 사람이지요. 그가 죽기전 10년 전에 어떤 작가가 그에 대해서 쓰기를 여기에 모든 법을 깨뜨렸으며 죄가 값을 치르지 않는다는 것을 입중해보여주는 사람이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가 행복했을까요? 그가 세상을 떠나기 3년전에 그의 지력의 4분의 3을 잃었고 급기야 자기 머리에 총으로 쏘아 자살을 한 사람입니다.

‘나의 것’ ‘나의’ ‘나에게’ 이처럼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것에는 절대로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진정한 성취는 거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진정한 성취는 하나님중심적인 삶에만 있습니다.

이 오스카 탐슨 박사가 참 중요하게 표현한 말이 있습니다.
33쪽에 있습니다. “우리는 왕이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마치 새가 창공을 위하여, 물고기가 바다를 위하여 창조되었듯이, 인간도 하나님과 교제를 위해서 창조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며 또한 하나님의 조건으로 다른 사람들과 친교를 가지기 전에는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적인 필요를 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하나님중심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살아계신 천지를 창조하신 인격자되신 하나님과 살아있는 교제와 하나님의 조건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아래서 그분의 조건을 따라 다른 사람과의 친밀한 교제를 가지기 전에는 세상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적인 필요를 채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안에 먼저 생명이 있어야 생명을 나누어줄 수 있지요. 우리 속에도 없는 생명을 어떻게 나눌 수 있겠어요. 우리 속에도 생명이 없는데 나누려고 하니까 너무나 지치고 피곤하고 고갈되고 그런 것입니다. 정신적인 압박과 스트레스만 쌓입니다. 내 안에 생명이 없으면서 봉사하고 섬긴다고 하니까 넘어지고 지치고 상처받고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내 속에 먼저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살아야 합니다.

또한 내 속에 생명이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있을 뿐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생명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중심적이 되어야 합니다.


3.그리스도안에서 진정한 균형이 가능합니다.

아까 처음 보여드렸던 그림을 다시 한번 보여주세요. 이처럼 우리안에 생명이 넘치고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전달되는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삶이 균형이 잡혀야 되는데 우리 삶에 진정한 균형은 그리스도가 우리 삶을 온전히 통치하시는 주님 중심적인 삶에서만 가능합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자 그러면 주님중심적인 삶으로 우리가 주님안에서 진정한 균형을 이루는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합니까? 탐슨 박사는 몇 가지를 권고합니다.
첫째, 우리가 진정으로 균형잡힌 삶을 살려면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중심적인 삶에서만 가능한데 그러려면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로 나가야 합니다. 한 예를 드십시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비방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뒤에서 여러분을 모함합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차원으로 균형을 맞추려면 우리도 모함하고 욕하고 다른 사람 앞에서 깎아내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래서 복수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해보아야 우리가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방법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균형잡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십자가로 나가야 합니다. 십자가로 나가면 십자가 위에 나타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나를 진실로 사랑하시니 정말 감사합니다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 나갈 때 상대방이 비판한 것이 옳은 것이면 당연히 그분에게 가서 맞습니다. 내가 그렇게 잘못했습니다. 그런 사람입니다. 나를 용서해주세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고 돌이키게 될 때 십자가의 능력으로 씻김을 받고 회복되며 균형잡히게 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게 됩니다.
뿐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파열되지 않고 원만한 관계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참고로 사람들이 뭐라고 하면 이길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어요. 받아들이세요.

제 아내가 개척하면서 성도들이 아내 앞에 와서 목사님이 이런 것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변명하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 있는데 그렇게 말하면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냉정한 사람이어요.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가 필요한 사람입니다고 말했대요. 그러자 비판하던 사람들이 입을 다 다물어버리더래요. 변명하려고 하면 많이 부딪혔는데 받아들이니까 싹 사라지더라고요. 누가 여러분에게 뭐라고 말하면 인정해버리세요. 그래서 내게 십자가가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하다고. 비결을 가르쳐드렸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계속해서 나를 비판하는데 내가 옳은데도 불구하고 계속 비판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때도 비결은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나가면 거기에 나타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랑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그들을 용서하고 축복하고 그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그들을 만져주시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여러분 원수갚은 것도 예수님은 자기의 머리를 드는 것도 자기 스스로의 자원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체면이나 인정받는 것이나 우리의 어떤 정당함이 드러나는 것을 위해서도 우리 자원을 의지하면 안됩니다. 우리 자원을 의지하면 절대로 성공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인정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축복하며 하나님께 맡기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위해 하나님만 의지할 때 하나님이 여러분의 머리를 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머리를 들 때 그때에 진정한 여러분의 머리가 들려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중심적으로 균형잡힌 삶을 살려면 이 세상에서 그 많은 압박과 상처속에서도 균형잡힌 삶을 살려면 우리는 매 순간 십자가에 앞에 나가야 합니다.

둘째, 주님안에서 자신의 소중함을 발견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여러분 한 사람만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을 위해서도 예수님을 보내주십니다. 그만큼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온 우주와도 여러분을 바꾸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여러분 자신을 향한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그 사랑안에서 여러분은 안식하실 수 있고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진정한 자존감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비교하지 마십시오. 세상에 그렇게 눈이 많이 오지만 눈송이 중 똑같은 것이 하나가 없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많아도 지문이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여러분을 독특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큰 사랑에 기초한 나의 진정한 소중함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균형잡힌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이 눌러와도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욕해도 환경이 억압이 있어도 여러분은 균형잡힌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교회에서 섬길 때도 그렇습니다.
심지어 목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제가 초기에 개척하면서 외국에 세미나를 가끔 참석하고 했는데 하나님이 하나님의 길을 보이시면서 따라가는 상황이었는데 집회 참석하면 어떤 사람들은 기도해주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그중에 한 가지 말은 네 주위에 있는 영적인 거인들을 신경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나라 대도시마다 그렇듯이 제가 서울에서도 분당에서 개척할 때도 주변에 큰 교회들도 그분의 이름을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목회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신경쓰지 말고 너는 네 일을 하라고 하셨어요.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이 그분을 부르신 것에 부르심이 있는 것이고 저에게는 저에게 부르심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그분과 비교하여 열등의식을 느끼면서 저의 스스로 높여보려고 노력하면 이제는 빨리 성도를 끌어모으기 위해서 온갖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것이고 성도들을 압박을 가하게 될 것이고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기보다 교회성장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사람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필요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숫자적인 목표만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전적으로 타락한 하나님의 생명은 전혀 없는 그렇게 해서 성취는 이루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자기 자원으로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떤 생명도 없을 것이고 모든 것은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각자의 부르심이 다르듯이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다르듯이 각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다르듯이 그 교회를 향한 목회자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다릅니다. 우리 각자는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해서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에 순종하게 될 때 그때 우리가 균형잡힌 삶을 살 수 있지요.

끝으로 성취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오래전 일인데 제가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왔더니 다른 교회에 다니는 집사님이 찾아왔어요. 그러면서 말하기를 목사님 제가 목사님의 성경공부만 참석하고 나면 낙심이 된다고 그래요. 실망이 됩니다. 왜 그러세요? 그랬더니 “왜 저는 목사님처럼 안보이지요. 왜 저는 목사님같이 못 가르치지요” 그러더라고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기름부음이 다르고 저에게 주신 기름부음이 다른데 어떻게 그분이 저와 똑같이 되겠습니까? 그러면 그분은 그분이 아니라 제가 되어야지요.

우리가 포도나무의 삶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우리는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사는 친밀한 교제 안에 살면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우리 온 삶으로 동참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앞서 가시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도와 의중을 보이시고 우리가 그 행하심에 믿음으로 동참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포도나무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각자가 모두 포도나무의 삶을 산다고 여러분 모두가 다 5천명 일만명 십만명이 모인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는 사람들은 안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지 못한다고 여러분은 쓸모없는 것인가? 아닙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각자가 포도나무의 삶을 살 때 그 겉모양은 다르지만 여러분 각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모아져야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코를 통해서 하시는 일이 다르고 입을 통해서 하시는 일이 다르고 손을 통해서 하시는 일이 다르듯이 종류와 규모에 있어서 다를지 모르지만 각자가 포도나무의 삶을 살 때 각자가 하나님 앞에 행하는 모든 것이 다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려면 내 속에 먼저 하나님의 생명이 넘쳐야 합니다. 내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기 위해서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님이 내 관계의  동심원안에 보내신 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버리는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을 나를 위해 사는 나의 목적을 위해 사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버릴 뿐아니라 자기 방법과 자기 자원으로 자기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만 의지하고 나와 자기자신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음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우리의 삶을 헌신할 뿐아니라 늘 십자가만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서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대로 헌신하여 살며 우리 삶을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의 자원으로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될 때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와 확장과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진정한 행복과 기쁨이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