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자료/컨퍼런스 정리
5장. 중보기도로 나아가는 길(18차 중보기도)
발의무리
2011. 2. 7. 09:43
5장. 중보기도로 나아가는 길
이 시간은 중보기도로 나아가는 길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가 두 파트입니다. 중보기도로 나아가는 길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중보기도로 나아가는 길에 이 부분이 포함되는데 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은 좀 더 집중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제가 이 부분을 먼저 살펴보고 그 다음에 어떻게 중보기도로 나아갈 것인지, 어떻게 다윗의 장막을 인도할 것이지, 어떻게 기도로 나아갈 것인지 하는 부분들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1.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
우리가 과거 여러 세미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과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대조하여 많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은 아무리 많이 기도하고 아무리 많이 금식하고 간절히 부르짖는다 할지라도 자기의 처지와 목적과 자기의 필요를 따라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과 능력만을 구하는 삶을 말합니다.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왔을 때 위기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을, 먹을 것이 없을 때 먹을 것을, 마실 것이 없을 때에 마실 것을 구한 것에서 그러한 삶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백만명이 절박하게 통성으로 합심하여 구했고 (그것이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이었는데) 그 결과 나름대로 그들의 기도는 그 때 그 때 응답되어져서 홍해도 갈라지는 그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고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만나를 경험하고 반석이 터져 이백만명이 먹게 되는 그 엄청난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전환하지 않자 그들의 영의 눈이 어두워져서 그들은 결국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절대 서지 못하고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서 제외되는 (그것을 히브리서 3장에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모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되 하나님 그분 자신을 구하는 자세로 나갔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고 천사를 앞서 보내어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하시겠다고 하시며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함께 하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혹은 하나님이 신임하지 않으시는 가운데 얻어지는 부나 명예나 사역의 성공이나 어떠한 것도 원치 않고 차라리 하나님께서 안 가시려거든 하나님과 함께 광야에 그대로 머무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그분 자신을 구하는 그러한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귀하게 쓰임받게 되고 또 믿음에 의한 삶도 가능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인데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중보기도만 하더라도, 다윗의 장막의 기도만 하더라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오전에 살펴본 것처럼 가장 핵심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것인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과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에 대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이제까지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했을지는 모르지만 자신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살았는지를 깨닫고 중심으로 통회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 원하는데 막상 기도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어떻게 기도하는 것인지 몰라서 어려움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세요.”하고 기도하면 “내가 여기있다.”하고 보여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다가 졸립기만 합니다. 옛날에는 하나님의 손을 구할 때는 그래도 무언가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하기라도 했는데 이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고 하니까 그 기도도 안 되고 해서 고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저는 크게 세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만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은 더 이상 예배드리지 않고, 기도생활하지 않고, 교회 나오지 않고, 더 이상 헌금도 하지 않는 그런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그런 삶도 하나님을 떠난 것이지만 아무리 예배를 많이 드리고, 헌금을 많이 하고, 아무리 봉사를 많이 하고,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아무리 기도와 금식을 많이 해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유일한 목적과 목표가 되는 것에서 떠나면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사역이 우리의 목표가 되고 또 사역의 확장이 우리의 목표가 되고 교회성장이 우리의 목표가 되고 이렇게 우리 마음이 나누어지면 실제로 교회성장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그분만이 우리의 목적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가 우리 마음에 가득하고 때로는 배신감이 가득하고 사람들에 대한 실망과 원망이 우리 마음속에 가득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 속에 있다는 그 자체가 의미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만이 유일한 목적된 삶에서 떠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그분만이 내 유일한 목적이 되면 상대방이 설령 나를 배신한다고 해도 내 마음속에 배신감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섬기는 것이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섬기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섬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대해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처를 받지 않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섬기되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원으로 이루실 것을 신뢰하기 때문에 배신감도 느끼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말씀드린 대로 마음속에 상처와 쓴 뿌리들이 있다는 자체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만이 우리 목적이 된 자리에서 떠나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서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 그분 자신만을 구해 나온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첫날도 말씀드렸는데 어떤 분이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선물했는데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겨보다가 외국 출장가는 길에 비행기에서 읽고 저에게 은혜받은 것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책의 저자는 어떤 일을 결정할 순간마다 늘 묻는 것이 “내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가?”라는 것을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확하게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나님만이 내 유일한 목표인가? 내가 하나님만으로 만족한가?” 내가 거기에서 떠났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온다는 말은 하나님 자신만을 구하여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이해는 하나님은 인격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체시라는 사실을 모를 분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제 이야기는 인격체이신 그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여 그 앞에 서는 것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찬양과 경배입니다. 찬양과 경배만 하더라도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새물결 선교회 초기에는 그것이 확연하게 드러났습니다. 그 당시에는 모이는 사람도 적었습니다. 그때 초기에 제가 한 6개월 동안 부지런히 가르쳤습니다. “우리 신앙은 하나님 그분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되는 삶이 우리 신앙입니다.”라고 가르치고 나눕니다. 그렇게 하고 따라가는데 한 육 개월쯤 있다가 외부강사를 초청했는데 그분이 와서 나누는 내용이 어느 집회에 가서 능력을 받고났더니 사역의 길이 열렸다. 여러분들 능력 받으라. 이렇게 한번 하고나면 육 개월 동안 부지런히 주님을 쫓아가자고 이야기했는데 그것이 일순간에 싹 무너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곧바로 능력으로 갑니다.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을 쉽게 떠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에 여기 대부분 계셨지요? 오늘 아침 찬양과 경배와 저녁 찬양과 경배를 똑같은 사람들이 인도했습니다. 똑같은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어느 시간에 하나님이 더 임재 하셨다고 생각합니까? 그 분위기나 찬양의 크기로 보면 저녁이 훨씬 나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어디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간단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그분 자신만을 구하여 나오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는 확연히 달라집니다. 그래서 모세의 기도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33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천사까지 앞서 보내어 그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가시지 않으시려거든 우리를 여기서 올려 보내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내가 너희와 함께 안가리라.”고 했고 나중에는 “내가 친히 가리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영어성경에 보면 “my presence will go with you. 내 임재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과 목표로서 하나님으로만 만족하고 하나님 그분만을 구하는 자세로 그분만을 추구할 때 주님이 거기에 함께 하십니다. 다윗의 장막이건 중보기도건 하나님 그분만을 구하여 나와야 합니다. 그분만을 구하여 나오되 여기에 필수적인 요소가 찬양과 경배입니다.
찬양과 경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그분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아름다운 일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행하심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너무나 놀랍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가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답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높입니다. 하나님께 찬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마음껏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일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요소가 직접화법의 찬양입니다. 하나님 그분께 직접적으로 우리 중심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그분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하여 기뻐하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심을 인하여 기뻐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기쁨의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 찬양합니다. 내 마음을 다해 주 찬양합니다. 주가 행하신 모든 일들을 세상에 모두 말하리이다. 주여 내가 주를 기뻐합니다.” 이 찬양은 우리나라에서 다른 분이 번역한 것을 제가 다시 번역한 것입니다. 그 앞부분은 번역이 잘되었는데 “주여 내가 주를 기뻐합니다.”라는 부분은 그렇게 번역이 안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독일어로 보면 정확하게 제가 번역한 대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그분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라고 고백해 보십시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기쁨의 요인이 되는 그 신앙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서울대에 수석으로 들어갔다면 너무나 기쁠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기쁨의 요인이 된 것처럼 하나님 그분 자신이 여러분의 기쁨의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 자신께 직접 고백하는 것이 그 찬양입니다. “내가 주를 기뻐합니다.” 여러분 중심에서부터 찬양의 가사에 여러분의 마음을 실어 또박또박 그분께 찬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싣는다는 말은 입으로 말하는 것을 마음에서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분께 감사를 드리고 찬사를 드리고 그분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제가 찬양과 경배에 대해 강의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포도나무 교회 개척할 때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에 초기에 일정기간동안 이백 명 이상이 방문했는데 (새로 입주한 단지 내 상가에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그중에 다섯 명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그분들 보기에 맞지 않은 것입니다. 저부터 눈을 감고 하나님께 찬양한다고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처음 교회를 사임하고 하나님께서 두 번째 교회를 다시 시작하라고 하셔서 준비하는 과정에서 주일날 낮에는 가정에서 두가정이 모였지만 저녁 시간에는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가까운 교회에 예배드리러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간 교회만 그랬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종치고 묵도로 시작하겠습니다.” 하고 그 다음에 찬송을 하나 부르는데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찬송입니다. 그런데 그 찬송을 부르되 그 찬송에 조금도 마음이 실려 있지 않았습니다. 익숙한 찬양을 부를 때 진짜 주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것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잘 아는 찬송가를 입으로 할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인사도 하고 방문하는 사람이 오면 여기 앉으라고 하기도 하고 사람에게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누가 제 앞에서 “목사님 좋아해요. 목사님 존경해요.” 하면서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면서 조금도 마음을 싣지 않고 습관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제가 그것을 듣고 기뻐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하면서 그렇게 합니다.
어디서 목사안수 받는다고 해서 갔더니 다 목사안수 받는다고 축하하러 왔고 얼굴보이고 선물주러 왔습니다. 앞에서 전도사가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찬양을 인도하는데 진짜 우리가 부름받아 나섰고 그러니까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가겠습니다.” 라는 차원에서 중심에서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아는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시작할지 사람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담임목사는 손님들을 띄우기에 바쁘고 온 손님들은 담임목사 띄우기에 바빴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하면서 하나님 외에는 다 있었습니다.
찬양과 경배만 하더라도 예배인데, 하늘나라에서는 찬양과 경배를 통해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스랍들이 눈이 많아 괴물같이 생겼는데 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있는 그대로 보니 그 중심에서 얼마나 하나님만 경배하고 사랑하고 높이고 증거하기를 원하겠습니까? 그렇게 직접화법의 찬양으로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인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하여 찬사를 드리고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존귀와 영광을 그분께 모든 것으로 돌리니 당연히 그들의 온 삶에 영적 분별력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고 찬양과 경배를 드릴 때 스랍들이 찬양 인도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경우에 찬양 인도자들이 인도만하지 자기는 찬양하지 않습니다. “자 춤추세요. 1절 하세요. 2절 하세요. 좀더 크게 하세요.” 자기는 지금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랍들은 그렇게 안했습니다. 스랍들이 “베드로 사도 춤추시고 다음에는 바울사도가 춤을 추시지요. 장로님들이 일어나셔야지 앉아 있으면 됩니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먼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바라보며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마음껏 높일 때 그때 24장로들도 천천만만의 천사들도 큰 물소리와 같은 한 목소리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께 찬사와 감사와 영광과 존귀를 돌립니다.
이렇게 하나님 그분만을 구하여 나아갈 때 아주 중요한 요소가 경배와 찬양으로 나가는 것이고 경배와 찬양으로 나아가되 직접화법의 찬양을 통해 온 마음을 다 실어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인하여 찬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하여 기뻐하며 하나님께 우리 중심에서부터 사랑을 고백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구하여 하나님께만 우리 마음을 집중하고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장막에서 핵심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구약의 다윗이 세운 장막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마음껏 그분께 찬사를 드리고 그분께 감사를 드리고 그분으로 기뻐하고 24시간 365일 찬양을 드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낮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심지어 중보기도로 나올 때에도 중보기도하러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오는 목적이 중보기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나오는 목적이 하나님 그분을 구하여 나와야 합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을 더욱더 알기를, 그분의 사랑을 알기를 구하여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회자부터 진짜 하나님 그분만을 구하여 나와 그분만을 추구하고 그분만을 높이고 그분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그분으로 인하여 감격하며 그분께 마음껏 찬사를 드려보십시오. 하나님의 임재가 진짜 함께 할 것입니다. 해보십시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적게 모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그렇게 주님을 구하여 오직 주님만을 구하여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까 다윗 보십시오. 한 가지 소원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곳에서 하나님 그분을 찾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한 가지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추구하여 나가고 성도들로 그렇게 주님만을 추구하도록 인도하고 그렇게 다윗의 장막을 통해 주님을 향하여 나아갈 때 거기에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사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입니다. 우리의 기교가 없어도 실력 있는 악기가 없어도 우리가 그렇게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이 거기 함께 하십니다.
2]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구하여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아까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떠난 것이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만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인, 하나님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인, 그분만으로 만족하는 그 삶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아무리 의식이 많아도 그렇다.”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 하나님의 목적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서 떠나면 하나님의 목적에서 떠나게 됩니다.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을 살펴볼 수 있도록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저희 같은 경우에 최근에 기도회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집중적으로 포도나무 교회 가운데 말씀하시며 우리들을 깨우치시고 책망하시고 돌이키도록 촉구하고 계십니다. 스가랴 1장 3절을 보십시오.
“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셨는데 돌아오라는 것은 그들이 지금 하나님을 떠나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떠나있으므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까? 학개서 1장 2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여러분, 학개와 스가랴는 똑같은 시대인 것을 아시지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두 번째 성전 짓는 일을 위하여 그 일이 중단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그 일을 촉구하신 선지자들입니다. 이 말은 이것을 가지고 성전건축할 때 헌금하지 않으면 하나님 떠나있는 것이라고 갖다 붙인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스가랴 1장에서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신 것은 지금 하나님을 떠나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두 번째 성전을 수축하는 하나님의 목적을 추구하기를 원하시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목적에 동참하기를 원하시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함이 없이 자기 일에 바쁜 것을 두고 하나님을 떠났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고 하나님의 목적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다면 당연히 온 삶으로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동참하게 되어 있습니다. 뗄래야 뗄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포도나무 교회만 하더라도 우리가 신앙의 본질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인생의 목표요 목적이라고 말하면서,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섬기는 자세가 너무 없는 우리들의 자세를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무슨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계신 곳에 같이 있을 텐데 하나님의 목적에서 천리만리 떠나 있으면서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서 떠나 있는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서 떠났다고 하니까 제가 교회 열심히 와서 봉사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목회자가 임의로 세워놓은 목표를 내세우고 나가면서 그것을 잘 따라야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지 그것을 안 따라오면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고 그렇게 갖다 붙이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으로 돌아오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의 소리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학개서 1장 1절에 보면 다리오 왕 2년 6월 1일에 하나님의 음성이 임했습니다. 그 날짜를 유념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학개를 통해 촉구하심으로 그 아래 보시면 저들이 마음을 돌이키고 회개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흥분시키심으로 그들이 나름대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기 시작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스가랴서 1:1절에 보면 “다리오 왕 2년 8월에”라고 나와 있습니다. 아까는 6월 1일이었는데 그 후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서 저들이 마음에서부터 돌이키고 나름대로 결단하고 하나님의 일을 행하도록 나름대로 일을 시작했는데 하나님께서 여전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떠나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회개했고, 결단했고, 나름대로 일을 시작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너희가 나를 떠나있다 내게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 다음에 학개서 2장 10절을 보면 “다리오왕 2년 9월 24일에” 말씀이 임했습니다. 이것은 스가랴서 그 다음입니다. 15절에 보면 “이제 청컨대 너희는 이제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위에 첩 놓이지 않았던 때를 추억하라 18절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9월 24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 라고 하시면서 이전에는 곡식을 심어도 남는 것이 없고 가져와봐야 하나님께서 불어버리셨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으리라고 하십니다. 언제부터? 기초가 놓인 날부터입니다. 이것을 보면 아주 중요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미 가슴을 치고 이미 회개하고 돌이키고 나름대로 결단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돌아왔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그들이 행동으로 실제로 그 일을 행할 때까지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여러 곳에 보시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리, 말의 소리를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행동의 소리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실은 오늘 설교할 때 이 부분 설교하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부분을 설교하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원래 원고에는 없었던 내용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에서 떠난 것도 없었던 내용이고, 돌아오는 것, 행동의 소리를 들으신다는 것도 없었던 내용입니다. 그런데 왜 하게 된 줄 아십니까? 아까 오후 집회를 마치고 어떤 분이 하나님께서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어떤 부분을 강하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아직도 근본적으로 내게 돌아온 자가 없다.”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들으면서 깨달은 것은 우리가 중보기도 와서, 또 하나님께서 이번 집회를 통해 이것저것 회개하게 하시고 때로는 회개하는 가운데 눈물을 쏟고 가슴을 치고 이렇게 결단하고 저렇게 결단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돌아온 것이라면 학개 시대에는 이미 학개서 1장에서 돌아왔었습니다. 그런데 스가랴서 1장은 그 후에 주어진 말씀인데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제 돌아가서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 자리로 또 하나님의 목적에 우리 삶을 드려 실제로 동참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그것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제가 추가해서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는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목적에서 떠난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가운데 있는지는 내가 지금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떨 때는 그것이 주관적이어서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자기가 하나님의 목적에 함께하고 있는가를 보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모세의 경우에도 잘 볼 수 있습니다. 아까 제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에서 말했던 출애굽기 33장 12절에 보면 모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12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 너를 알고 너는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여기서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라는 말은 주의 목적과 의중과 의도를 알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앙의 한 부분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는 주님이 추구하시는 일에 우리가 같이 있는 일을 포함합니다. 주의 목적에 우리 삶이 드려지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통하여 우리가 주님을 개인적으로 더 알게 됩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 저에게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알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목적을 알게 해주세요. 제가 거기에 주와 함께 있게 해주세요. 그러한 일을 통해 주님을 더 알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구하여 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구하여 서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구하여 서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하기 위하여? 주님계신 곳에 같이 있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서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하고 한두 마디 기도하고는 할 말이 없어 졸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구하여 나오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것을 가지고, 그것을 하나님께 아룀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부르짖어 나가는 것이 포함됩니다. 바로 여기에 중보기도의 자리가 있습니다.
제가 그동안 중보기도를 소홀히 했다가 하나님 앞에서 혼났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예외가 없는데 아무리 하나님의 일에 바빠서 그랬을지 몰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래전 이야기인데 하나님께서 그런 사건을 통해 그런 자세를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분당에 있었을 때 하루는 제가 예배당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는 중보기도를 24시간 하지 않고 하루에 두 차례씩 했습니다. 시간이 한 시간쯤 전에 앉아있는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말씀하시기를 “넌 내꺼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거기 앉아 있었을 때 저의 자세는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 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내가 이렇게 와서 능력받아 큰 사역자가 되기 위해 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렇게 중보기도 하다보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열리고 그러다 보면 능력도 부어져서 그때부터 부흥회 나갈 것을 원해서 나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다 하나님만을 목적 삼는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을 수단 삼는 자세입니다. 제가 그런 목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아뢰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그것으로 족하고 더 이상 아무것도 더 원하지 않는 자세로 나왔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구하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그분의 의중에 있는 것들을 주 앞에 구하기 위해 나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넌 내꺼야”라고 말씀하신 것은 내가 하는 그 무엇으로 인하여 나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가 하나님을 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 앞에 나와 있는 그 자체로 만족하시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으로 인하여 만족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목적을 구하는데 중보기도의 자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번 기도회만 해도 포도나무 교회가 이번 기도회를 통해서 경각심을 가지고 돌이키지 않았더라면 사역은 지금 세계적으로 뻗어가고 있지만 머지않아 에베소 교회처럼 하나님의 촛대가 거두어지는 상황이 닥쳤을 것 같습니다. 사실 에베소 교회는 포도나무 교회보다 훨씬 훌륭한 교회입니다. 그런 훌륭한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첫사랑을 버렸노라고,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노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같은 자들이 첫사랑을 떠난 것을 돌이키지 않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서도록 깨우치게 하신 것도 중보기도에 나갔더니 보여주셨습니다.
이번에 기도회를 하면서 앞에서 제가 찬양을 인도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154장 “이 나라 민족의 죄악과” 찬양을 드리는데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어지고 하나님께서 이 나라의 죄를 용서하시고 돌이키시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이 땅의 교회 가운데 세워주시도록 기도하라고 우리를 부르시고 그러한 유업을 우리에게 맡기셨는데 그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붙들고 서지 않은 제 모습을 보이시면서 제가 얼마나 하나님의 목적에서 떠나 있는지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구하여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처럼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알아서 그 가운데 온 삶으로 같이 있음으로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구하여 나갈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붙들고 그것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밤낮으로 부르짖는 그 자세로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것은 하나님의 길을 구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삶입니다. 이 부분은 제가 영적 분별력 책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기서 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떠나 자기 길, 세상의 길을 따르는 것이 타락의 삶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길을 구하여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번 기도회의 내용을 첫날 사역시간에도 나누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사역 시간에도 잠깐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구하여 나가는 것에 이러한 부분도 포함됩니다. 저희 같은 경우에 말씀드린 대로 주일날 저녁에 모였는데 찬양이 안 드려졌습니다. 우리 마음이 그만큼 분산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주일날 낮에 찬양 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찬양하는 것을 내려놓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월요일부터는 찬양이 좀 더 드려지면서 이런 부분, 저런 부분 비추시는데 목요일쯤 갔더니 우리의 섬김이 없는 자세,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함을 구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섬기는 자세가 없는 것을 적나라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무나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제가 끝나고 돌아가면서 내가 말을 잘못했나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은 전혀 아니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금요일 날은 마지막 날인데 찬양을 몇 곡 같이 드리면서 나가는데 하나님께서 찬양을 그만하기를 원하시고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들으라.”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찬양을 중단하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들으십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찾고 주님 앞에 기다리면서 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으면 작은 감동이라도 주저하지 말고 다 말씀하세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분 저분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데 우리의 껍데기를 다 벗기시는 것 같았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이 유일한 목적이라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전혀 서지 않는 우리의 모습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우리의 목표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섬기는 일에는 뒷짐 지고 서 있는 우리의 모습 등을 적나라하게 들춰 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비추어진 것은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에게 하신 말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 사데교회에 주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에베소 교회가 오늘날 한국에 있다면 어느 교회보다 칭찬받을 교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한 말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첫사랑에서 떠났으니 너희가 돌이키지 않으면 촛대를 옮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간다는 말은 이렇게 나와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한 부분만 해도 “하나님 얼굴을 보여주세요.” 하고 조는 정도가 전혀 아닌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무엘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우리의 삶에서 근본적으로 전환하여 돌이키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삶으로 우리의 삶이 돌이켜지므로 하나님과 함께 있고자 하는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하는 자세를 가지고 서되 개인과 교회가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고 돌이키기 위하여 그 앞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에 포함됩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 자신을 구하여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의 목적을 구하여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의 길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 자신을 구하고 하나님 목적을 구하고 하나님의 길을 구하되 바로 우리는 날마다 그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실제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렸던 부분도 그 부분입니다. 아직 돌이켜지지 않았다는 부분도 그 부분입니다. 이번에 하나님께서 강하게 책망하셨던 것 중 하나는 우리가 찬양 부를 때 “주님을 갈망해요. 주께 회복시켜 주세요.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 주님을 더 알기 원해요. 주님만 사랑해요.” 우리는 이렇게 찬양하고 고백하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원해왔는데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말씀하신 것은 그렇게 주님을 알기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주님을 알기위해 주님의 음성을 듣기위해 주 앞에 서지 않는 우리들의 외식된 모습을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말로는 주님을 원한다고 하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님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실제로 그 주님을 알기위해 그 앞에 서지 않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그러한 것들을 포함하고 우리가 바로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여 우리가 살펴본 그러한 내용들을 구하여 날마다 실제적으로 구별하여 서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입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하나님께서 비추셨던 부분은 하나님께서 적나라하게 우리들에게 그러한 부분들을 보이시면서 하나님의 길을 보여 가신 것입니다. 중보기도를 통해서 정확하게 성경적인 하나님의 길을 보이신 것입니다. 한 가지 부분은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릭 조이너 목사님 아시지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저는 그냥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말세지말에 일어날 일을 보이셔서 그것을 책으로 낸 것이 있는데 그 제목이 "final quest"입니다. 거기에 보면 참조할 만한 지혜가 많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세지말에 하나님과 동행하되 겸손의 옷을 입지 않으면 절대로 끝까지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함정들이 많이 있는데 겸손의 옷을 입어야 그 함정이 보여서 그 길을 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겸손의 옷을 입지 않으면 절대로 끝까지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번에 강력하게 말씀하셨던 것이 그렇게 실제적으로 날마다 주님을 구하여 서지 않으면 절대로 겸손의 옷을 입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찬양만 가지고 안 되고, 우리의 열망만 가지고 안 되고, 우리의 고백만 가지고 안 되고, 우리의 결단만 가지고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행함의 소리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그렇게 구하여 실제로 그 앞에 서지 못하면 우리 인간 중에 단 한사람도 진정한 겸손의 옷을 입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의 옷을 입지 못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마음이 높아지게 되어있고 그러면 영적인 함정이 절대로 보이지 않게 되기에 영적전쟁에서 절대로 끝까지 이길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 성경에 의하면 아주 중요한 문제가 질서의 문제입니다. 권위자에 대한 태도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자기의 생각으로 인하여, 자기 판단으로 인하여 권위자에 대하여 조그마한 흐트러진 마음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찬양팀들이 있는데 찬양팀에서 원하는 것을 내가 안해 주었다고 합시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안하는지 그 이유는 알지 못한 채 리더의 말을 듣고 “우리 목사님은 그런 것도 안해 주시는가?”라고 저에 대해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요소를 가졌다면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이 권위의 문제, 질서의 문제인데) 그런 것이 틈타면 영적으로 치명적인 것입니다.
최근에 한분이 저에게 울면서 전화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부분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너져 있던 것이 그렇게 큰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을 몰랐다고 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나누는가 하면 이런 부분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는 부분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영적으로 치명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주님을 구하여 서지 않으면 그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함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절대로 끝까지 겸손함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실수록 영적인 공격은 공격대로 더 심해지는데 거기서 절대로 끝까지 이길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우리 자원만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되 그렇게 하나님 그분 자신을 실제로 알고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구별하여 실제적으로 날마다 서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인데 그것을 제가 지금 말씀드렸습니다.
2. 중보기도로 나아가는 길
지금부터 두 번째 중보기도로 나아가는 길에 대해 또는 다윗의 장막을 인도하는 절차에 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생각나는 모든 마음의 죄들을 회개함으로 준비합니다.
리더는 준비하고 나와야 합니다. 예를 들면 담임목사가 주일날 예배드리러 나오며 준비도 없이 “가서 준비해야지”하고 나오지 않습니다. 다윗의 장막을 인도하러 나올 때도 먼저 준비하고 나와야 하는데 당연히 생각나는 모든 죄를 회개하고 나와야 합니다.
2] 자기 개인의 의제와 생각을 내려놓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올 때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자기 의제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러 나올 때에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못하는 이유는 그동안 우리나라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 목적을 가지고 줄기차게 부르짖음으로 그 목적을 하나님께 상기시켜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일을 이루어주도록 하는 이러한 이해의 기도에만 익숙해 있습니다. 너무나 자기중심적인 기도입니다. 사실 이것만 보아도 신앙이 타락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이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그런 분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나온다고 하면 별로 관심조차 없습니다. 내 문제와 관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인식이 있다 보니까 기도하러 나올 때에도 자기 목적과 자기 의제를 가지고 그것을 줄기차게 구하고자 하는 이러한 자세로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중요한 것이 자기 개인의 의제와 생각을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내 문제는 어떻게 합니까?”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의 쓸 것을 아신다고 하셨고 “너희 입을 것, 먹을 것을 아시니까 그것을 구하지 말라. 그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주권자, 통치자 하나님이시며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신 사랑의 아버지십니다. 당연히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랑과 능력의 아버지시라는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데 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자기 의제를 내려놓고 나와야 합니다.
이것은 약간 옆으로 나간 이야기인데 여러분이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자 한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자기 생각과 의제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려고 하면 내 생각과 내 의제가 내려져야 올바로 분별되어집니다. 이것이 안 내려지면 자기 생각의 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만 번 기도응답 받았다는 죠지뮬러도 그가 기도응답 받는데 있어서 자기 모든 생각과 의제를 철저히 내려놓는다고 하고 그것이 되면 90%는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올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기 개인의 생각과 의제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세로 나와야 합니다.
중보기도도 중보기도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오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 나와서 찬양과 경배로 오직 하나님을 구하는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리더들은 찬양과 경배를 기도하는 중에 미리 준비해오면 좋습니다. 물론 기도하며 준비하지만 그것을 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얼마든지 다른 부분을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준비하고 나오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이 찬양과 경배를 통해서 진실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아름다운 일들을 인하여 하나님 그분께 찬사를 드리고 하나님으로만 인하여 기뻐하고 그분을 추구하고 사모하고 열망하고 그분을 마음껏 높이고 그분만 기뻐하고 그런 자리에 먼저 가보십시오. 여러분이 먼저 그렇게 가면 당연히 참여한 자들이 그렇게 올 것입니다. 그런데 모른다면 가르쳐야 합니다. 찬양은 무엇이고 어떤 자세로 드리는 것인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 가운데 마음을 모아서 그렇게 주님께 경배함으로 나아가면 성령께서 반드시 운행하십니다. 저 개인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가장 많이 알려주시는 때가 찬양과 경배와 중보기도 시간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의도를 알려주시고 하나님의 목적을 알려주시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알려주시고 그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왜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알리시는지 아십니까? 그 두 시간 모두 철저하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시간입니다. 의제를 가지고 나와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포함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것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포함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온다면 잘못 온 것입니다. 초점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옆으로 가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 자신을 구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때에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기도 하시고 하나님의 성품을 비추어 주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에서 아는 것은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고 그 실제를 하나님의 성령으로 비추십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목적을 알리시고 하나님의 길을 보이시기도 합니다. 이렇게 중보기도로 나아갈 때, 경배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많은 경우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길과 목적을 알리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여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중보기도 나올 때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얻으려 나온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을 구하여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비슷한 것 같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분을 구하여 그분만으로 만족하며 그분과 함께 있기 원하여, 그분의 음성을 듣고 내 삶을 조정하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와야 합니다. 그것이 아까 말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하여 오면 중보기도이든 경배와 찬양이든 이렇게 주님 얼굴을 구하여 나오기 때문에 그 시간에 주님이 제일 많이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하나님이 가까이 오신다고 하셨는데 가까이 간다는 것이 바로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번째는 찬양과 경배로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야 합니다.
이때 만약 리더가 찬양을 잘 인도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러니까 박자나 음정을 맞추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이 경배를 못합니다. 그럴 경우에는 경배를 잘 인도할 수 있는 분이 같이하면 좋습니다. 그러나 같이할 경우에도 리더가 인도해야 합니다. 어떤 부분을 다시하기 원하는지 어떤 부분을 통해 주님을 어떻게 찾기 원하는지 리더가 해나가야 합니다.
5] 경배의 단계가 필수적입니다.
이렇게 찬양과 경배로 나아가되 아주 중요한 것이 경배의 단계입니다. 우리가 경배의 단계를 다섯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예배로의 부름’입니다.
이 부분은 “나아가자. 찬양하자. 하나님을 높이자. 하나님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오라 지금은 경배할 때이다. 오라 지금은 찬양드릴 때이다.”와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함께 경배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지금 사실 여기 올 때 리더는 준비하고 오지만 다른 사람들은 준비가 덜된 사람도 많습니다. 또 직장에서 바쁘게 왔습니다. 오다가 차가 막혀서 기다리느라 짜증이 많이 났습니다. 그런 사람이 참고 시험당하며 왔는데 앉자마자 “아버지 당신은 내 삶의 기업”하고 찬양하면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깊이 인식하고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예배로의 부름입니다. 이때는 박자가 빠르고 활력 있는 찬양을 많이 드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경배로 들어감’입니다.
이때는 본격적으로 그분을 경배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때는 직접화법의 찬양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예배로의 부름에는 간접화법으로 “--하세, 높이세”라고 해도 좋은데 여기서는 직접화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하여 아주 중요한 경배의 요소가 직접화법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다윗이 말했습니다. 여기서 “주”라는 말은 실제로 주라는 말이 아니고 “당신”이라고 2인칭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은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말하기가 그래서 주라고 번역했을 뿐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 그분을 바라보며 “하나님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직접적으로 고백합니다. 여러분이 찬양을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 나가 그냥 간증하듯이 “--하세, 높이세”라고 하는 것과 그분을 바라보며 중심에서부터 그분께 찬사를 드리고 사랑을 고백하고 그분을 기뻐하는 이 경배로 나가는 것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해보세요. 다릅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오! 주님, 내가 왔네 내가 기뻐하네” 이렇게 하십니까? 찬양은 곡조있는 기도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마음을 실어서 하나님께 찬양하는데 ‘경배로 들어감’부터는, 그때부터는 직접화법의 찬양이 중요합니다. 거기에 들어가서 이제 경배를 직접적으로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engagement라고 말합니다. 이제 경배로 본격적으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여태까지는 “경배를 하자, 예배를 드리자, 하나님께 나아가자” 라고 서로를 독려하고 기뻐하고 나누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경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경우 경배로 들어가다가 끝나버립니다. 우리끼리 즐겁게 놀다가 끝나버립니다. 경배로 들어감에서는 직접화법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 중심에서 그분께서 행하신 일들을 인하여 찬사를 드리고 그분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그분을 마음껏 높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하나님을 마음껏 높여 보십시오.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요. 기도회로 모여 예배로의 부름을 하고 경배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마음껏 높여보세요. 온 마음을 실어서 하나님 그분으로 인하여 마음껏 기뻐해보세요. 마음을 싣는다는 것은 여러분의 입으로 고백한 것을 중심에서부터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찬양의 가사를 보고 나는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마음속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은혜를 구하여 나가는 정직한 심령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는 ‘친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마음껏 높이고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나갈 때 우리 마음이 주님을 향하게 되고 이런 과정을 통하여 벌써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계획이 얼마나 큰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추시고 알리시고 보이시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벌써 우리 마음이 스폰지가 물에 잠기듯 주님의 은혜 가운데 잠겨지면서 세 번째 단계로 우리 깊은 곳에서부터 우리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친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만 주님만 사랑해요.” 이것이 진실로 여러분의 삶의 진정한 고백이라면 하나님께서 깊은 감동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돈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돈이 있어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가 그래도 잘 되어야 하나님께서 날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주님만 저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주님만 저는 사랑합니다.” 이렇게 여러분의 삶이 그러하며 여러분의 중심에서 그 고백을 하나님께 해보십시오. 하나님은 깊은 감동을 받으실 것입니다. 주님이 먼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이렇게 은밀한 사랑의 고백이 세 번째 단계이고 네 번째는 잠잠히 하나님 앞에 기다리는 것, 다섯 번째는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인데 다윗의 장막에서는 세 번째 단계까지만 가면 됩니다.
그런데 이 단계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제가 이 부분을 수없이 많이 강조하는데도 실제로 할 때는 너무나 많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 결과로 모이자마자 은밀한 사랑의 고백부터 하려고 합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보기 원합니다.” 여러분 이 말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이 한 부분만 해도 그것이 진정한 내 삶이라면 그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말한 대로 오다가 차가 막혀 빵빵거리고 성질이 나서 간신히 화를 죽이고 왔는데 앉자마자 그 찬양이 중심에서 됩니까? 입술로는 될지 모르지만 마음에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그 찬양을 하고나서 갑자기 “다와서 찬양해, 찬양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밀한 사랑의 고백을 하면서 간신히 집중했는데 이제는 또 “찬양해, 찬양해”합니다. 단계를 따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합니다. 관심이 하나님께 모아졌다 흩어졌다 모아졌다 흩어졌다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이 그렇게 합니다. 단계가 왜 중요한가 하면 그것을 통해 점점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찬양을 통해 주님을 추구하여 나가지 않고 입술로 찬양하니까 들어갔다 나갔다 하면서도 모르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배를 인도해 나갈 때 경배의 단계가 아주 중요합니다. 핵심입니다. 여러분, 여기 앞에서 인도하는 팀들을 보십시오. 반드시 그 단계를 따라서 나갑니다. 이것이 기본이고 정석입니다. 이런 정석 가운데서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습니다. 힐송 찬양을 보면 그들은 은밀한 사랑의 고백에 하나의 단계를 더 넣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그 친밀함에서 나온 찬사를 하나님께 돌립니다.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우리가 왜 이렇게 하는가 하면 하나님께 점점 더 친밀함으로 나가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다섯 번째는 경배의 단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둑에서도 정석을 외운 다음 잊어버리라고 한다고 합니다. 참 한 가지 잊어버렸는데 ‘경배로 들어감’에서 중보기도의 찬양들도 나올 수 있습니다.
6]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여 순종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아가되 핵심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여 순종하는 것입니다. 찬양을 인도해 갈 때도 그렇고 어떤 찬양을 드릴까하는 문제도 그렇고 모든 중보기도, 예배의 순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때는 이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찬양과 경배를 1단계부터 3단계까지 나아가서 친밀함 가운데 나아가게 하시고 그런 가운데 주님께서 하나하나 인도해 가면서 기도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도해가시되 그것하고 기도하고 같이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런데 제가 과거에 이렇게 하는 것을 좀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중보기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감동들을 나누는 시간이 있습니다. 아까 다윗의 장막과 예언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목적을 알리시기 위해 예언의 기름을 부으십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잘못하다가 보면 어떤 외부적인 모습을 보고 찬양 좀 하다가 감동을 주시면 나누고 찬양을 좀 하다가 감동을 주시면 나누고 기도하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의 초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성령께 민감한 것이 중요합니다.
7] 종종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들을 서로 나눕니다.
여기에 리더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너무 자주 하지 마십시오. 아까 초점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라고 했습니다. 앞서 나아가는 리더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온 분들도 그들이 하나님을 구하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이 먼저 그렇게 나가면 따라옵니다. 그런데 감동을 너무 자주 나누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을 찾는 시간을 방해하게 됩니다. 관심을 집중하여 주님 앞에 경배하며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가만히 묵상하면서 주님을 구하고 있는데 자꾸 주님을 보려고 하면 “무슨 감동이 없냐?”고 하고 주님을 보려고 하면 “무슨 감동이 없냐?”고 하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방해가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감동을 나누되 너무 자주해서는 안됩니다. 각자가 주님을 집중적으로 찾아나서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단순히 우리는 한 두 마디 감동받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또 찬양 하나하고 감동받고 기도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전체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야 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여기에서 감동을 나눌 때 두 가지가 중요한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는 이유가 하나님이 특별히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는 것을 기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때는 아프가니스탄을 위해 기도하게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어떤 나라를 지칭하며 기도하게 하시고 어떤 때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선교사님을 생각나게 하셔서 기도하게 하시고 어떤 때는 우리가 아는 어떤 환자를 위해 기도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을 나누는 것은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기도하게 하시는 부분을 기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때도 리더가 중요한 것이 사람들이 감동이라고 나누는 것을 다 해가지고는 수가 좀 많아지면 감동만 나누다 시간을 다 보내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리더가 분별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가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는데 감동을 나누는 것 중 중요한 것은 적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분별이 잘 안되면 웬만하면 다 적게 해도 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그 시간을 통하여 교회를 인도하여 가시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음성을 들으라고 하셨는데 다윗의 장막에서 주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갈 때 개인뿐 아니라 교회를 향하여 주시는 음성들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분별하기 위하여 적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적은 것이 담임목사에게까지 반드시 가야합니다. 담임목사가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한쪽으로 치우치기 쉽습니다. 다윗의 장막에서 주님을 찾는다고 하면서 감동을 주시면 다 기록합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이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기 쉽습니다. 한동안 찬양하다가 감동 주신 것을 적고 끝나면 또 모여서 찬양 한 두곡 한 후에 감동을 적고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려고 모인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맨 처음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집중적으로 그 시간을 통하여 절대로 초점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때로는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중에 말씀하신 것에서 중요한 것은 기도하고 나머지 부분들은 기록해서 분별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분별하되 담임목사님에게 보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회자의 역할이 중요한데 감동만 따져도 하루 밤에 기도하는 팀이 다섯 팀이라면 그 감동만 적어도 하루에도 엄청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그것을 보고 그대로 다해서는 아무것도 못할 것입니다. 분별해야 합니다. 무엇을 분별해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중요한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분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담임 목회자의 몫입니다. 제가 어제부터 마이크 비클 목사님 이야기를 몇 번 했습니다. 그분은 예언에 대한 책을 썼는데 본인은 예언의 은사가 없습니다. 영국의 “능력은사”책을 쓴 분이 캔자스 시티의 예언자들에 대한 책을 썼는데 “some said it thunder(누가 말하기를 천둥쳤다고 말했다).”라는 제목입니다. 그런데 한때 영국에서 이 책이 베스트셀러였습니다. 그 당시 그 교회에는 폴 케인, 밥 존스, 잔 폴 잭슨, 질 오스틴 등 지금 세계적으로 각자 사역하는 그 많은 분들이 한 교회에 다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나라 정치, 경제에 대하여 수시로 꿈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사람 수만 해도 몇 백 명 수준이었습니다. 삼천 명 되는 성도 중 이백 명, 삼백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담임목사인 마이크 비클 목사는 예언의 은사가 없습니다. 이분들이 얼마나 예언의 은사가 강한가 하면 대단합니다. 어떤 때는 어떤 천문학자들도 예측하지 못한 혜성이 오는 것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그것이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예언합니다. 한번은 마이크 비클 목사가 샤워하다 전화했는데, 예언 사역자가 지금 샤워하고 오른 쪽 머리가 어떻게 되어 있는 것까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다고 말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아람 왕이 자기 침실에서 한 이야기를 엘리사가 들었다고 했는데 거기에 버금가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때는 마이크 비클 목사가 생각할 때 자기가 그 많은 사람들 중 가장 영적으로 둔감한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 때는 예언자들이 하는 대로 교회를 맡겨놓았더니 교회가 엉망이 되었다고 합니다.
예언의 은사가 강하다고 절대로 목회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는 목회자에게 맡긴 것이지 예언자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목자에게, 감독에게, 교사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감동이 아무리 많아도 분별해야할 사람이 목사입니다. 물론 같이 분별하지만 가장 근본적으로 목사가 분별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예언 시간에 배우셨지만 절대로 예언을 따라서만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넘어지는 지름길입니다. 성경에는 모든 예언을 분별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예언의 은사가 강한 사람을 통해 주어진 예언이라도 반드시 분별해어 합니다. 절대로 예언만 따라서 행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감동이 주어졌다고 감동대로 행해서는 교회에 난리가 납니다. 그래서 하실 일이 목사님들이 분별하는 일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양 축을 잘 잡는 것입니다. 하나는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성경에 말씀하셨습니다. 멸시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모르고 자기 임의대로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모든 예언은 시험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개의 축 사이에서 중간으로 가셔야 합니다. 이것이 너무나 중요한 기준입니다. 목사님들이 하실 일이 분별함인데 분별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있어야 그것이 분별이 됩니다. 사실 그렇지 않으면 안보입니다.
두 번째는 많은 감동이 있더라도 솎아 내십시오. “하나님이 사랑한다고 하십니다.”같은 감동은 그래 우리를 사랑하시지 하고 그렇게 알고 그 다음에는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이렇게 합니다. 누가 저를 위해 기도해 주는데 이런 말도 하고 저런 말도 하고 많은 말을 합니다. 그런데 칭찬의 말을 많이 한다면 저는 그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칭찬의 말을 하신다는 것은 그 부분은 잘한다는 것이니까 제가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떤 부분에 제가 유념하는가 하면 저에게 약간 부정적일 뿐만 아니라 경고성 메시지 같은 것이 있으면 저는 그것을 유념합니다. 많은 감동 중에서 영양가 있는 것을 분별하셔야 합니다. 물론 모든 감동은 다 영양가 있습니다. 제 이야기는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을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것을 분별하시되 절대로 예언만을 따라서 행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선반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유념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따라가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그것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저희가 분당에 있을 때에 우성상가를 경매로 받았는데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그 당시에는 전혀 넓은 교회를 알아볼 상황이 아니었는데 하나님께서 거기서 다윗의 장막을 하기 원하셔서 넓은 장소를 알아보게 되고 그래서 거기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 있던 장소의 약 두 배가 되는 건물을 경매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들어가서 공사를 시작하는데 그 주민들이 못 들어오게 반대했습니다. 허가를 해주지 못하도록 시에 가서 책상을 엎어 버리기도 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도 도장을 받기 위해 우리가 이단이라고 모함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들은 대법원까지 가려고 변호사까지 선임해 놓았습니다. 행정소송을 하면 우리가 이길 테지만 그때까지 수년이 걸릴 텐데 거기에 그 힘을 소진할 수 없고, 그렇게 해서 이긴들 그 손해배상을 누구한테 받겠습니까? 거기에다가 우리가 안 들어가도 관리비만 한 달에 3백만 원 넘게 나가고 은행이자만 3백만 원이 나가니 두개를 합하면 7백만 원 가까이 돈이 쏟아져 들어가는데 쓰지는 못하고 완전히 꽉 막혀있는 것입니다. 언제 해결될지 모릅니다. 그때 7백만 원이면 교회 재정에서 쓰고 나머지 몽땅 집어넣어야 할 상황입니다. 앞이 안보였습니다. 하나님 인도를 따라왔는데 그렇게 되니까 성도들은 “하나님 인도를 따라왔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하는 생각에 마음이 많이 흔들렸습니다. 진짜 앞에 캄캄한 시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분들과 싸울 수도 없습니다. 싸운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앞이 안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아십니까? 한번은 제 아내가 하나님께서 "모여서 기도하라."고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장막에서 나온 감동을 읽는데 "모여서 기도하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한번만이 아니라 두 번인가 세 번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순간 클릭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주일날 저녁부터 특별 기도회로 5일 동안 모이기로 했습니다. 특별기도회라 해봐야 저녁만 모였고 또 그때 제가 목요일은 부산 집회 인도하러 다닐 때고 수요일은 어떤 교회에 이미 선약을 했었기 때문에 집회를 나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6일 동안 모이는 중 제가 주일, 월요일, 금요일 3일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일 때 우리는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제를 가지고 나가지 않습니다. "도와주세요. 원수가 무너지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오히려 집중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저들을 축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분도 못 품고 나쁜 생각도 못하고 "축복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어떻게 나아가는가 하면 주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갑니다. 그러면서 기도할 때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왔는데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도와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를 말씀하시며 우리의 높아진 자세와 태도를 말씀하시고, 사역이 확장되면서 우리가 안일해진 태도들, 또 교회가 성장하는 등 여러 가지 좋은 일들을 보면서 우리 마음이 높아진 것 등을 하나님께서 적나라하게 드러내셨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며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첫날인가 둘째 날에 그렇게 주님 앞에 모였는데 하나님께서 "이제는 거기에 안 들어가도 된다."고 하시고 "다음 단계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간에 바로 그 건물이 임대가 나갔습니다. 그래서 은행 이자, 관리비가 순식간에 다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단계로 가라고 해서 우리가 찾아서 이 부지를 구입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분당에 있으면서 그 당시 성도가 얼마 되지도 않는 상황에서 1500평 이상 되는 땅을 구입하여 50억 이상이 들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면 저 부터도 어떻게 따라가겠습니까? 아무도 못 따라가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과정을 통해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그 장소는 나중에 들어오기 전에 벌써 차고 넘쳐서 그 건물 일부를 다시 우리가 훈련원과 교육관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맞추어 가셨습니다. 순식간에 일을 해결해 가셨는데 그 첫 단추가 다웟의 장막에서 주신 감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음성을 분별한데 있었습니다. 우리를 돌이키게 하시고 바로 그 주간에 해결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나누되 주님을 찾는 것에 방해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년이나 작년에 오면서 바다의 풍부가 몰려오게 해달라고 여러 번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요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갈치, 조기, 홍어 등이 떼로 잡힌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시고 그대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도했기 때문에 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기도하게 하시고 그대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나지 않습니까?
8] 교회 전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해 가시는 일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제가 다윗의 장막을 보면서 이런 부분이 잘 안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평신도 컨퍼런스가 포도나무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도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가르칠 시간도 별로 없었는데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이 잘 안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모여서 주님 예배하고 하나님께서 감동주시면 서로 나누는 것은 잘 되는데 지금 이미 하나님께서 교회적으로 말씀하시고 운행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뜻이 분별되어졌고 또 때로는 제가 광고를 통하여 하나님의 행하심을 나누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포도나무 교회는 설교보다 광고를 잘 들으면 하나님의 행하심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행하심을 나누다보니까 우리는 광고가 설교 같고 설교가 광고 같고 심지어 어떤 때는 광고가 설교를 대신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나중에 들어보니까 광고를 너무 길게 하는 교회라고 안 왔다고 합니다.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나누다 보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행하심을 교회에서 같이 분별한 부분들, 나누는 부분들이 있는데 우리는 모여서 무슨 감동을 주시는가를 묻고 그것만 가지고 기도하려고 합니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추구하여 나갈 뿐 아니라 훨씬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이신 그것들을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추가로 하나님께서 그 때 그 때 보이신 부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미 교회 가운데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부분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때 그 때 감동만을 받아서 기도하려는 경향이 적지 않은데 이것은 한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께서 교회 전체적으로 인도해 가시는 일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보이신 부분들 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반드시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 담임 목회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여러 번 끝나기 전 10분간은 우리 부부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이야기 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다윗의 장막에서 저희 부부를 위해 기도한 팀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코팅해서 써 붙여놓으려고 합니다. 너무 너무 중요한 일인데 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덟 가지 기도제목입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혹시 나중에 테이프를 듣는 분들도 기도하시도록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첫째, 모세처럼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게 하소서.
우리가 사역이 아무것도 열리지 않고 꽉 막혀있을 때, 그때에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기 쉬운데 그래도 그때 하나님만을 목적삼고 주님을 구하는 것은 그나마 쉽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사역이 전 세계를 향하여 열려가는 그 상황에서도 주님만을 목적삼고 그분을 구한다는 것은 진짜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당시 자기가 섬기는 백성들이 이백만명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의 담임목사입니다. 사도 바울 같은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께서 사역을 열어 가실 그 때에도 한 가지 유일한 소망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구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처럼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게 하소서.
두 번째,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것처럼 지혜를 주소서.
제가 교회, 선교회, 훈련원 세 가지를 감당하려니까 쉽지 않습니다. 사실 하나만 감당해도 한 사람이 하기 쉽지 않은데 세 가지를 하려니까 셋 다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참 지혜가 많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 예수님에게처럼 칠중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소서.
말세지말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특별히 예언적인 백성들에게 칠중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네 번째, 일꾼을 분별할 수 있는 눈과 양육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리더들에게 있는 가장 중요한 책임 중 하나가 차세대를 세우는 것입니다. 일꾼을 세우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내년에 중국 스케줄까지 하면 훈련원 스케줄만 해도 일 년이 다 찹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도, 선교회적으로도 많은 일꾼들이 세워져야 합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리더의 표시는 누가 리더인지가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못한 리더인가 봅니다. 누가 리더가 아닌지는 보이는데 누가 리더인지는 잘 안보입니다. 제가 사실 속으로 고민되는 것이 리더는 리더가 보인다는데 저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더가 보이게 해주세요. 리더를 분별하게 해주세요. 그 리더를 양육할 지혜를 주세요."라는 기도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다섯 번째. 늘 신선한 기름부음을 부어주세요.
제가 읽는 것은 테이프 듣는 분들이 기도해 달라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여러분들에게도 이 기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지체들이 여러분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 같아서 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성령의 기름부음이 하십니다. 저나 이길수 목사님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놀랍게 함께 하십니다. 그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저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하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것을 보고 저에게 은혜 받았다고 하고 밥도 사주고 하는데 그것은 번지수 잘못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저와 함께 하신 기름부음이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거기서 취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취할 것이 있다면 얼마나 신실하게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섬겼는가에 따라 상급을 받을 텐데 제 자신을 보면 그 부분이 너무 부족하기에 취할 것이 많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를 많이 받았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이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기름부음에도 신선한 기름부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만약 기름부음이 기계와 같다면 기계가 돌아가서 일을 해야 하는데 여기에 윤활유를 쳐주어야 잘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나온 신선한 기름부음이 함께해야 이 기름부음이 더 활발할 뿐 아니라 더 증가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 후임으로 섬겼던 알 티 켄들 목사님이 30년 정도 섬기고 4,5년 전에 은퇴하셨는데 그분이 쓴 ‘'The anointing’(기름부음)이라는 책에 보면 그 부분을 정확하게 잘 말하고 있습니다. 기름부음에도 신선한 기름부음이 필요하다. 당연히 옳은 이야기입니다. 신선한 기름부음이 있어야 따끈한 찐빵처럼 아버지의 마음에서 나오는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늘 신선한 기름부음이 보충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보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섬기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우리 기도사역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신선한 기름부음이 필요합니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주님과의 신선한 관계에서 처음의 마음을 가지고 섬기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라나며, 하나님께서 주신 기름부음이 우리 가운데 더 활발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신선한 기름부음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늘 신선한 기름부음을 더 부어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여섯 번째, 하나님의 비전과 마음을 더 부어 주세요.
이것은 신선한 기름부음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한번은 설교 전에 이길수 목사님이 저를 위해 기도해주다가 이런 감동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그 말씀을 늘 유념해야 하는데 어떤 때는 그 말씀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이냐면 예를 들면 오늘 저녁에 제가 이 설교를 한다고 할 때 이 설교를 전하기 원하는 아버지의 마음, 그리고 오늘날 처해있는 교회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 여기에 오신 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 우리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아버지의 의도, 그리고 그것에 대해 아버지가 전하기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잃으면 우리는 껍데기만 남습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섬기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목회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올바른 진리를 올바르게 전해도 아버지의 마음이 없으면 덕이 세워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마음이란 것이 유하게 싸매주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서는 보면 서슬이 시퍼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예레미야 속에는 파란 피가 흐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서를 자세히 읽어보세요. 그가 그 시대를 위하여 얼마나 중심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그리고 그 시대를
이 시간은 중보기도로 나아가는 길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가 두 파트입니다. 중보기도로 나아가는 길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중보기도로 나아가는 길에 이 부분이 포함되는데 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은 좀 더 집중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제가 이 부분을 먼저 살펴보고 그 다음에 어떻게 중보기도로 나아갈 것인지, 어떻게 다윗의 장막을 인도할 것이지, 어떻게 기도로 나아갈 것인지 하는 부분들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1.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
우리가 과거 여러 세미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과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대조하여 많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은 아무리 많이 기도하고 아무리 많이 금식하고 간절히 부르짖는다 할지라도 자기의 처지와 목적과 자기의 필요를 따라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과 능력만을 구하는 삶을 말합니다.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왔을 때 위기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을, 먹을 것이 없을 때 먹을 것을, 마실 것이 없을 때에 마실 것을 구한 것에서 그러한 삶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백만명이 절박하게 통성으로 합심하여 구했고 (그것이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이었는데) 그 결과 나름대로 그들의 기도는 그 때 그 때 응답되어져서 홍해도 갈라지는 그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고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만나를 경험하고 반석이 터져 이백만명이 먹게 되는 그 엄청난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전환하지 않자 그들의 영의 눈이 어두워져서 그들은 결국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절대 서지 못하고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서 제외되는 (그것을 히브리서 3장에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모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되 하나님 그분 자신을 구하는 자세로 나갔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고 천사를 앞서 보내어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하시겠다고 하시며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함께 하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혹은 하나님이 신임하지 않으시는 가운데 얻어지는 부나 명예나 사역의 성공이나 어떠한 것도 원치 않고 차라리 하나님께서 안 가시려거든 하나님과 함께 광야에 그대로 머무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그분 자신을 구하는 그러한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귀하게 쓰임받게 되고 또 믿음에 의한 삶도 가능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인데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중보기도만 하더라도, 다윗의 장막의 기도만 하더라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오전에 살펴본 것처럼 가장 핵심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것인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과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에 대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이제까지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했을지는 모르지만 자신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살았는지를 깨닫고 중심으로 통회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 원하는데 막상 기도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어떻게 기도하는 것인지 몰라서 어려움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세요.”하고 기도하면 “내가 여기있다.”하고 보여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다가 졸립기만 합니다. 옛날에는 하나님의 손을 구할 때는 그래도 무언가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하기라도 했는데 이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고 하니까 그 기도도 안 되고 해서 고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저는 크게 세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만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은 더 이상 예배드리지 않고, 기도생활하지 않고, 교회 나오지 않고, 더 이상 헌금도 하지 않는 그런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그런 삶도 하나님을 떠난 것이지만 아무리 예배를 많이 드리고, 헌금을 많이 하고, 아무리 봉사를 많이 하고,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아무리 기도와 금식을 많이 해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유일한 목적과 목표가 되는 것에서 떠나면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사역이 우리의 목표가 되고 또 사역의 확장이 우리의 목표가 되고 교회성장이 우리의 목표가 되고 이렇게 우리 마음이 나누어지면 실제로 교회성장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그분만이 우리의 목적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가 우리 마음에 가득하고 때로는 배신감이 가득하고 사람들에 대한 실망과 원망이 우리 마음속에 가득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 속에 있다는 그 자체가 의미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만이 유일한 목적된 삶에서 떠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그분만이 내 유일한 목적이 되면 상대방이 설령 나를 배신한다고 해도 내 마음속에 배신감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섬기는 것이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섬기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섬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대해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처를 받지 않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섬기되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원으로 이루실 것을 신뢰하기 때문에 배신감도 느끼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말씀드린 대로 마음속에 상처와 쓴 뿌리들이 있다는 자체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만이 우리 목적이 된 자리에서 떠나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서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 그분 자신만을 구해 나온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첫날도 말씀드렸는데 어떤 분이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선물했는데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겨보다가 외국 출장가는 길에 비행기에서 읽고 저에게 은혜받은 것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책의 저자는 어떤 일을 결정할 순간마다 늘 묻는 것이 “내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가?”라는 것을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확하게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나님만이 내 유일한 목표인가? 내가 하나님만으로 만족한가?” 내가 거기에서 떠났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온다는 말은 하나님 자신만을 구하여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이해는 하나님은 인격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체시라는 사실을 모를 분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제 이야기는 인격체이신 그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여 그 앞에 서는 것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찬양과 경배입니다. 찬양과 경배만 하더라도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새물결 선교회 초기에는 그것이 확연하게 드러났습니다. 그 당시에는 모이는 사람도 적었습니다. 그때 초기에 제가 한 6개월 동안 부지런히 가르쳤습니다. “우리 신앙은 하나님 그분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되는 삶이 우리 신앙입니다.”라고 가르치고 나눕니다. 그렇게 하고 따라가는데 한 육 개월쯤 있다가 외부강사를 초청했는데 그분이 와서 나누는 내용이 어느 집회에 가서 능력을 받고났더니 사역의 길이 열렸다. 여러분들 능력 받으라. 이렇게 한번 하고나면 육 개월 동안 부지런히 주님을 쫓아가자고 이야기했는데 그것이 일순간에 싹 무너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곧바로 능력으로 갑니다.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을 쉽게 떠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에 여기 대부분 계셨지요? 오늘 아침 찬양과 경배와 저녁 찬양과 경배를 똑같은 사람들이 인도했습니다. 똑같은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어느 시간에 하나님이 더 임재 하셨다고 생각합니까? 그 분위기나 찬양의 크기로 보면 저녁이 훨씬 나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어디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간단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그분 자신만을 구하여 나오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는 확연히 달라집니다. 그래서 모세의 기도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33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천사까지 앞서 보내어 그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가시지 않으시려거든 우리를 여기서 올려 보내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내가 너희와 함께 안가리라.”고 했고 나중에는 “내가 친히 가리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영어성경에 보면 “my presence will go with you. 내 임재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과 목표로서 하나님으로만 만족하고 하나님 그분만을 구하는 자세로 그분만을 추구할 때 주님이 거기에 함께 하십니다. 다윗의 장막이건 중보기도건 하나님 그분만을 구하여 나와야 합니다. 그분만을 구하여 나오되 여기에 필수적인 요소가 찬양과 경배입니다.
찬양과 경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그분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아름다운 일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행하심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너무나 놀랍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가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답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높입니다. 하나님께 찬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마음껏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일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요소가 직접화법의 찬양입니다. 하나님 그분께 직접적으로 우리 중심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그분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하여 기뻐하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심을 인하여 기뻐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기쁨의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 찬양합니다. 내 마음을 다해 주 찬양합니다. 주가 행하신 모든 일들을 세상에 모두 말하리이다. 주여 내가 주를 기뻐합니다.” 이 찬양은 우리나라에서 다른 분이 번역한 것을 제가 다시 번역한 것입니다. 그 앞부분은 번역이 잘되었는데 “주여 내가 주를 기뻐합니다.”라는 부분은 그렇게 번역이 안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독일어로 보면 정확하게 제가 번역한 대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그분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라고 고백해 보십시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기쁨의 요인이 되는 그 신앙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서울대에 수석으로 들어갔다면 너무나 기쁠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기쁨의 요인이 된 것처럼 하나님 그분 자신이 여러분의 기쁨의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 자신께 직접 고백하는 것이 그 찬양입니다. “내가 주를 기뻐합니다.” 여러분 중심에서부터 찬양의 가사에 여러분의 마음을 실어 또박또박 그분께 찬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싣는다는 말은 입으로 말하는 것을 마음에서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분께 감사를 드리고 찬사를 드리고 그분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제가 찬양과 경배에 대해 강의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포도나무 교회 개척할 때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에 초기에 일정기간동안 이백 명 이상이 방문했는데 (새로 입주한 단지 내 상가에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그중에 다섯 명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그분들 보기에 맞지 않은 것입니다. 저부터 눈을 감고 하나님께 찬양한다고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처음 교회를 사임하고 하나님께서 두 번째 교회를 다시 시작하라고 하셔서 준비하는 과정에서 주일날 낮에는 가정에서 두가정이 모였지만 저녁 시간에는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가까운 교회에 예배드리러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간 교회만 그랬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종치고 묵도로 시작하겠습니다.” 하고 그 다음에 찬송을 하나 부르는데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찬송입니다. 그런데 그 찬송을 부르되 그 찬송에 조금도 마음이 실려 있지 않았습니다. 익숙한 찬양을 부를 때 진짜 주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것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잘 아는 찬송가를 입으로 할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인사도 하고 방문하는 사람이 오면 여기 앉으라고 하기도 하고 사람에게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누가 제 앞에서 “목사님 좋아해요. 목사님 존경해요.” 하면서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면서 조금도 마음을 싣지 않고 습관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제가 그것을 듣고 기뻐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하면서 그렇게 합니다.
어디서 목사안수 받는다고 해서 갔더니 다 목사안수 받는다고 축하하러 왔고 얼굴보이고 선물주러 왔습니다. 앞에서 전도사가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찬양을 인도하는데 진짜 우리가 부름받아 나섰고 그러니까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가겠습니다.” 라는 차원에서 중심에서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아는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시작할지 사람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담임목사는 손님들을 띄우기에 바쁘고 온 손님들은 담임목사 띄우기에 바빴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하면서 하나님 외에는 다 있었습니다.
찬양과 경배만 하더라도 예배인데, 하늘나라에서는 찬양과 경배를 통해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스랍들이 눈이 많아 괴물같이 생겼는데 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있는 그대로 보니 그 중심에서 얼마나 하나님만 경배하고 사랑하고 높이고 증거하기를 원하겠습니까? 그렇게 직접화법의 찬양으로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인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하여 찬사를 드리고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존귀와 영광을 그분께 모든 것으로 돌리니 당연히 그들의 온 삶에 영적 분별력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고 찬양과 경배를 드릴 때 스랍들이 찬양 인도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경우에 찬양 인도자들이 인도만하지 자기는 찬양하지 않습니다. “자 춤추세요. 1절 하세요. 2절 하세요. 좀더 크게 하세요.” 자기는 지금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랍들은 그렇게 안했습니다. 스랍들이 “베드로 사도 춤추시고 다음에는 바울사도가 춤을 추시지요. 장로님들이 일어나셔야지 앉아 있으면 됩니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먼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바라보며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마음껏 높일 때 그때 24장로들도 천천만만의 천사들도 큰 물소리와 같은 한 목소리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께 찬사와 감사와 영광과 존귀를 돌립니다.
이렇게 하나님 그분만을 구하여 나아갈 때 아주 중요한 요소가 경배와 찬양으로 나가는 것이고 경배와 찬양으로 나아가되 직접화법의 찬양을 통해 온 마음을 다 실어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인하여 찬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하여 기뻐하며 하나님께 우리 중심에서부터 사랑을 고백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구하여 하나님께만 우리 마음을 집중하고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장막에서 핵심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구약의 다윗이 세운 장막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마음껏 그분께 찬사를 드리고 그분께 감사를 드리고 그분으로 기뻐하고 24시간 365일 찬양을 드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낮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심지어 중보기도로 나올 때에도 중보기도하러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오는 목적이 중보기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나오는 목적이 하나님 그분을 구하여 나와야 합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을 더욱더 알기를, 그분의 사랑을 알기를 구하여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회자부터 진짜 하나님 그분만을 구하여 나와 그분만을 추구하고 그분만을 높이고 그분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그분으로 인하여 감격하며 그분께 마음껏 찬사를 드려보십시오. 하나님의 임재가 진짜 함께 할 것입니다. 해보십시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적게 모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그렇게 주님을 구하여 오직 주님만을 구하여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까 다윗 보십시오. 한 가지 소원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곳에서 하나님 그분을 찾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한 가지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추구하여 나가고 성도들로 그렇게 주님만을 추구하도록 인도하고 그렇게 다윗의 장막을 통해 주님을 향하여 나아갈 때 거기에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사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입니다. 우리의 기교가 없어도 실력 있는 악기가 없어도 우리가 그렇게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이 거기 함께 하십니다.
2]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구하여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아까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떠난 것이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만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인, 하나님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인, 그분만으로 만족하는 그 삶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아무리 의식이 많아도 그렇다.”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 하나님의 목적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서 떠나면 하나님의 목적에서 떠나게 됩니다.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을 살펴볼 수 있도록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저희 같은 경우에 최근에 기도회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집중적으로 포도나무 교회 가운데 말씀하시며 우리들을 깨우치시고 책망하시고 돌이키도록 촉구하고 계십니다. 스가랴 1장 3절을 보십시오.
“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셨는데 돌아오라는 것은 그들이 지금 하나님을 떠나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떠나있으므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까? 학개서 1장 2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여러분, 학개와 스가랴는 똑같은 시대인 것을 아시지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두 번째 성전 짓는 일을 위하여 그 일이 중단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그 일을 촉구하신 선지자들입니다. 이 말은 이것을 가지고 성전건축할 때 헌금하지 않으면 하나님 떠나있는 것이라고 갖다 붙인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스가랴 1장에서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신 것은 지금 하나님을 떠나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두 번째 성전을 수축하는 하나님의 목적을 추구하기를 원하시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목적에 동참하기를 원하시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함이 없이 자기 일에 바쁜 것을 두고 하나님을 떠났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고 하나님의 목적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다면 당연히 온 삶으로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동참하게 되어 있습니다. 뗄래야 뗄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포도나무 교회만 하더라도 우리가 신앙의 본질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인생의 목표요 목적이라고 말하면서,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섬기는 자세가 너무 없는 우리들의 자세를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무슨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계신 곳에 같이 있을 텐데 하나님의 목적에서 천리만리 떠나 있으면서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서 떠나 있는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서 떠났다고 하니까 제가 교회 열심히 와서 봉사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목회자가 임의로 세워놓은 목표를 내세우고 나가면서 그것을 잘 따라야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지 그것을 안 따라오면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고 그렇게 갖다 붙이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으로 돌아오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의 소리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학개서 1장 1절에 보면 다리오 왕 2년 6월 1일에 하나님의 음성이 임했습니다. 그 날짜를 유념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학개를 통해 촉구하심으로 그 아래 보시면 저들이 마음을 돌이키고 회개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흥분시키심으로 그들이 나름대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기 시작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스가랴서 1:1절에 보면 “다리오 왕 2년 8월에”라고 나와 있습니다. 아까는 6월 1일이었는데 그 후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서 저들이 마음에서부터 돌이키고 나름대로 결단하고 하나님의 일을 행하도록 나름대로 일을 시작했는데 하나님께서 여전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떠나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회개했고, 결단했고, 나름대로 일을 시작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너희가 나를 떠나있다 내게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 다음에 학개서 2장 10절을 보면 “다리오왕 2년 9월 24일에” 말씀이 임했습니다. 이것은 스가랴서 그 다음입니다. 15절에 보면 “이제 청컨대 너희는 이제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위에 첩 놓이지 않았던 때를 추억하라 18절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9월 24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 라고 하시면서 이전에는 곡식을 심어도 남는 것이 없고 가져와봐야 하나님께서 불어버리셨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으리라고 하십니다. 언제부터? 기초가 놓인 날부터입니다. 이것을 보면 아주 중요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미 가슴을 치고 이미 회개하고 돌이키고 나름대로 결단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돌아왔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그들이 행동으로 실제로 그 일을 행할 때까지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여러 곳에 보시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리, 말의 소리를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행동의 소리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실은 오늘 설교할 때 이 부분 설교하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부분을 설교하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원래 원고에는 없었던 내용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에서 떠난 것도 없었던 내용이고, 돌아오는 것, 행동의 소리를 들으신다는 것도 없었던 내용입니다. 그런데 왜 하게 된 줄 아십니까? 아까 오후 집회를 마치고 어떤 분이 하나님께서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어떤 부분을 강하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아직도 근본적으로 내게 돌아온 자가 없다.”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들으면서 깨달은 것은 우리가 중보기도 와서, 또 하나님께서 이번 집회를 통해 이것저것 회개하게 하시고 때로는 회개하는 가운데 눈물을 쏟고 가슴을 치고 이렇게 결단하고 저렇게 결단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돌아온 것이라면 학개 시대에는 이미 학개서 1장에서 돌아왔었습니다. 그런데 스가랴서 1장은 그 후에 주어진 말씀인데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제 돌아가서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 자리로 또 하나님의 목적에 우리 삶을 드려 실제로 동참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그것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제가 추가해서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는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목적에서 떠난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가운데 있는지는 내가 지금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떨 때는 그것이 주관적이어서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자기가 하나님의 목적에 함께하고 있는가를 보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모세의 경우에도 잘 볼 수 있습니다. 아까 제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에서 말했던 출애굽기 33장 12절에 보면 모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12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 너를 알고 너는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여기서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라는 말은 주의 목적과 의중과 의도를 알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앙의 한 부분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는 주님이 추구하시는 일에 우리가 같이 있는 일을 포함합니다. 주의 목적에 우리 삶이 드려지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통하여 우리가 주님을 개인적으로 더 알게 됩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 저에게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알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목적을 알게 해주세요. 제가 거기에 주와 함께 있게 해주세요. 그러한 일을 통해 주님을 더 알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구하여 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구하여 서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구하여 서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하기 위하여? 주님계신 곳에 같이 있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서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하고 한두 마디 기도하고는 할 말이 없어 졸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구하여 나오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것을 가지고, 그것을 하나님께 아룀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부르짖어 나가는 것이 포함됩니다. 바로 여기에 중보기도의 자리가 있습니다.
제가 그동안 중보기도를 소홀히 했다가 하나님 앞에서 혼났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예외가 없는데 아무리 하나님의 일에 바빠서 그랬을지 몰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래전 이야기인데 하나님께서 그런 사건을 통해 그런 자세를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분당에 있었을 때 하루는 제가 예배당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는 중보기도를 24시간 하지 않고 하루에 두 차례씩 했습니다. 시간이 한 시간쯤 전에 앉아있는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말씀하시기를 “넌 내꺼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거기 앉아 있었을 때 저의 자세는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 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내가 이렇게 와서 능력받아 큰 사역자가 되기 위해 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렇게 중보기도 하다보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열리고 그러다 보면 능력도 부어져서 그때부터 부흥회 나갈 것을 원해서 나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다 하나님만을 목적 삼는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을 수단 삼는 자세입니다. 제가 그런 목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아뢰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그것으로 족하고 더 이상 아무것도 더 원하지 않는 자세로 나왔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구하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그분의 의중에 있는 것들을 주 앞에 구하기 위해 나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넌 내꺼야”라고 말씀하신 것은 내가 하는 그 무엇으로 인하여 나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가 하나님을 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 앞에 나와 있는 그 자체로 만족하시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으로 인하여 만족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목적을 구하는데 중보기도의 자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번 기도회만 해도 포도나무 교회가 이번 기도회를 통해서 경각심을 가지고 돌이키지 않았더라면 사역은 지금 세계적으로 뻗어가고 있지만 머지않아 에베소 교회처럼 하나님의 촛대가 거두어지는 상황이 닥쳤을 것 같습니다. 사실 에베소 교회는 포도나무 교회보다 훨씬 훌륭한 교회입니다. 그런 훌륭한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첫사랑을 버렸노라고,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노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같은 자들이 첫사랑을 떠난 것을 돌이키지 않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서도록 깨우치게 하신 것도 중보기도에 나갔더니 보여주셨습니다.
이번에 기도회를 하면서 앞에서 제가 찬양을 인도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154장 “이 나라 민족의 죄악과” 찬양을 드리는데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어지고 하나님께서 이 나라의 죄를 용서하시고 돌이키시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이 땅의 교회 가운데 세워주시도록 기도하라고 우리를 부르시고 그러한 유업을 우리에게 맡기셨는데 그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붙들고 서지 않은 제 모습을 보이시면서 제가 얼마나 하나님의 목적에서 떠나 있는지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구하여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처럼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알아서 그 가운데 온 삶으로 같이 있음으로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구하여 나갈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붙들고 그것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밤낮으로 부르짖는 그 자세로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것은 하나님의 길을 구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삶입니다. 이 부분은 제가 영적 분별력 책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기서 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떠나 자기 길, 세상의 길을 따르는 것이 타락의 삶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길을 구하여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번 기도회의 내용을 첫날 사역시간에도 나누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사역 시간에도 잠깐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구하여 나가는 것에 이러한 부분도 포함됩니다. 저희 같은 경우에 말씀드린 대로 주일날 저녁에 모였는데 찬양이 안 드려졌습니다. 우리 마음이 그만큼 분산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주일날 낮에 찬양 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찬양하는 것을 내려놓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월요일부터는 찬양이 좀 더 드려지면서 이런 부분, 저런 부분 비추시는데 목요일쯤 갔더니 우리의 섬김이 없는 자세,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함을 구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섬기는 자세가 없는 것을 적나라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무나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제가 끝나고 돌아가면서 내가 말을 잘못했나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은 전혀 아니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금요일 날은 마지막 날인데 찬양을 몇 곡 같이 드리면서 나가는데 하나님께서 찬양을 그만하기를 원하시고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들으라.”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찬양을 중단하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들으십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찾고 주님 앞에 기다리면서 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으면 작은 감동이라도 주저하지 말고 다 말씀하세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분 저분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데 우리의 껍데기를 다 벗기시는 것 같았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이 유일한 목적이라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전혀 서지 않는 우리의 모습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우리의 목표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섬기는 일에는 뒷짐 지고 서 있는 우리의 모습 등을 적나라하게 들춰 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비추어진 것은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에게 하신 말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 사데교회에 주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에베소 교회가 오늘날 한국에 있다면 어느 교회보다 칭찬받을 교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한 말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첫사랑에서 떠났으니 너희가 돌이키지 않으면 촛대를 옮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간다는 말은 이렇게 나와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한 부분만 해도 “하나님 얼굴을 보여주세요.” 하고 조는 정도가 전혀 아닌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무엘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우리의 삶에서 근본적으로 전환하여 돌이키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삶으로 우리의 삶이 돌이켜지므로 하나님과 함께 있고자 하는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하는 자세를 가지고 서되 개인과 교회가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고 돌이키기 위하여 그 앞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에 포함됩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 자신을 구하여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의 목적을 구하여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의 길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 자신을 구하고 하나님 목적을 구하고 하나님의 길을 구하되 바로 우리는 날마다 그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실제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렸던 부분도 그 부분입니다. 아직 돌이켜지지 않았다는 부분도 그 부분입니다. 이번에 하나님께서 강하게 책망하셨던 것 중 하나는 우리가 찬양 부를 때 “주님을 갈망해요. 주께 회복시켜 주세요.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 주님을 더 알기 원해요. 주님만 사랑해요.” 우리는 이렇게 찬양하고 고백하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원해왔는데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말씀하신 것은 그렇게 주님을 알기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주님을 알기위해 주님의 음성을 듣기위해 주 앞에 서지 않는 우리들의 외식된 모습을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말로는 주님을 원한다고 하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님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실제로 그 주님을 알기위해 그 앞에 서지 않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그러한 것들을 포함하고 우리가 바로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여 우리가 살펴본 그러한 내용들을 구하여 날마다 실제적으로 구별하여 서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입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하나님께서 비추셨던 부분은 하나님께서 적나라하게 우리들에게 그러한 부분들을 보이시면서 하나님의 길을 보여 가신 것입니다. 중보기도를 통해서 정확하게 성경적인 하나님의 길을 보이신 것입니다. 한 가지 부분은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릭 조이너 목사님 아시지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저는 그냥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말세지말에 일어날 일을 보이셔서 그것을 책으로 낸 것이 있는데 그 제목이 "final quest"입니다. 거기에 보면 참조할 만한 지혜가 많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세지말에 하나님과 동행하되 겸손의 옷을 입지 않으면 절대로 끝까지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함정들이 많이 있는데 겸손의 옷을 입어야 그 함정이 보여서 그 길을 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겸손의 옷을 입지 않으면 절대로 끝까지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번에 강력하게 말씀하셨던 것이 그렇게 실제적으로 날마다 주님을 구하여 서지 않으면 절대로 겸손의 옷을 입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찬양만 가지고 안 되고, 우리의 열망만 가지고 안 되고, 우리의 고백만 가지고 안 되고, 우리의 결단만 가지고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행함의 소리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그렇게 구하여 실제로 그 앞에 서지 못하면 우리 인간 중에 단 한사람도 진정한 겸손의 옷을 입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의 옷을 입지 못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마음이 높아지게 되어있고 그러면 영적인 함정이 절대로 보이지 않게 되기에 영적전쟁에서 절대로 끝까지 이길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 성경에 의하면 아주 중요한 문제가 질서의 문제입니다. 권위자에 대한 태도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자기의 생각으로 인하여, 자기 판단으로 인하여 권위자에 대하여 조그마한 흐트러진 마음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찬양팀들이 있는데 찬양팀에서 원하는 것을 내가 안해 주었다고 합시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안하는지 그 이유는 알지 못한 채 리더의 말을 듣고 “우리 목사님은 그런 것도 안해 주시는가?”라고 저에 대해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요소를 가졌다면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이 권위의 문제, 질서의 문제인데) 그런 것이 틈타면 영적으로 치명적인 것입니다.
최근에 한분이 저에게 울면서 전화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부분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너져 있던 것이 그렇게 큰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을 몰랐다고 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나누는가 하면 이런 부분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는 부분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영적으로 치명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주님을 구하여 서지 않으면 그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함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절대로 끝까지 겸손함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실수록 영적인 공격은 공격대로 더 심해지는데 거기서 절대로 끝까지 이길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우리 자원만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되 그렇게 하나님 그분 자신을 실제로 알고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구별하여 실제적으로 날마다 서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인데 그것을 제가 지금 말씀드렸습니다.
2. 중보기도로 나아가는 길
지금부터 두 번째 중보기도로 나아가는 길에 대해 또는 다윗의 장막을 인도하는 절차에 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생각나는 모든 마음의 죄들을 회개함으로 준비합니다.
리더는 준비하고 나와야 합니다. 예를 들면 담임목사가 주일날 예배드리러 나오며 준비도 없이 “가서 준비해야지”하고 나오지 않습니다. 다윗의 장막을 인도하러 나올 때도 먼저 준비하고 나와야 하는데 당연히 생각나는 모든 죄를 회개하고 나와야 합니다.
2] 자기 개인의 의제와 생각을 내려놓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올 때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자기 의제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러 나올 때에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못하는 이유는 그동안 우리나라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 목적을 가지고 줄기차게 부르짖음으로 그 목적을 하나님께 상기시켜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일을 이루어주도록 하는 이러한 이해의 기도에만 익숙해 있습니다. 너무나 자기중심적인 기도입니다. 사실 이것만 보아도 신앙이 타락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이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그런 분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나온다고 하면 별로 관심조차 없습니다. 내 문제와 관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인식이 있다 보니까 기도하러 나올 때에도 자기 목적과 자기 의제를 가지고 그것을 줄기차게 구하고자 하는 이러한 자세로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중요한 것이 자기 개인의 의제와 생각을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내 문제는 어떻게 합니까?”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의 쓸 것을 아신다고 하셨고 “너희 입을 것, 먹을 것을 아시니까 그것을 구하지 말라. 그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주권자, 통치자 하나님이시며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신 사랑의 아버지십니다. 당연히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랑과 능력의 아버지시라는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데 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자기 의제를 내려놓고 나와야 합니다.
이것은 약간 옆으로 나간 이야기인데 여러분이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자 한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자기 생각과 의제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려고 하면 내 생각과 내 의제가 내려져야 올바로 분별되어집니다. 이것이 안 내려지면 자기 생각의 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만 번 기도응답 받았다는 죠지뮬러도 그가 기도응답 받는데 있어서 자기 모든 생각과 의제를 철저히 내려놓는다고 하고 그것이 되면 90%는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올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기 개인의 생각과 의제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세로 나와야 합니다.
중보기도도 중보기도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오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 나와서 찬양과 경배로 오직 하나님을 구하는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리더들은 찬양과 경배를 기도하는 중에 미리 준비해오면 좋습니다. 물론 기도하며 준비하지만 그것을 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얼마든지 다른 부분을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준비하고 나오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이 찬양과 경배를 통해서 진실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아름다운 일들을 인하여 하나님 그분께 찬사를 드리고 하나님으로만 인하여 기뻐하고 그분을 추구하고 사모하고 열망하고 그분을 마음껏 높이고 그분만 기뻐하고 그런 자리에 먼저 가보십시오. 여러분이 먼저 그렇게 가면 당연히 참여한 자들이 그렇게 올 것입니다. 그런데 모른다면 가르쳐야 합니다. 찬양은 무엇이고 어떤 자세로 드리는 것인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 가운데 마음을 모아서 그렇게 주님께 경배함으로 나아가면 성령께서 반드시 운행하십니다. 저 개인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가장 많이 알려주시는 때가 찬양과 경배와 중보기도 시간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의도를 알려주시고 하나님의 목적을 알려주시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알려주시고 그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왜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알리시는지 아십니까? 그 두 시간 모두 철저하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시간입니다. 의제를 가지고 나와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포함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것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포함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온다면 잘못 온 것입니다. 초점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옆으로 가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 자신을 구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때에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기도 하시고 하나님의 성품을 비추어 주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에서 아는 것은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고 그 실제를 하나님의 성령으로 비추십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목적을 알리시고 하나님의 길을 보이시기도 합니다. 이렇게 중보기도로 나아갈 때, 경배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많은 경우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길과 목적을 알리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여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중보기도 나올 때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얻으려 나온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을 구하여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비슷한 것 같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분을 구하여 그분만으로 만족하며 그분과 함께 있기 원하여, 그분의 음성을 듣고 내 삶을 조정하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와야 합니다. 그것이 아까 말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하여 오면 중보기도이든 경배와 찬양이든 이렇게 주님 얼굴을 구하여 나오기 때문에 그 시간에 주님이 제일 많이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하나님이 가까이 오신다고 하셨는데 가까이 간다는 것이 바로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번째는 찬양과 경배로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야 합니다.
이때 만약 리더가 찬양을 잘 인도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러니까 박자나 음정을 맞추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이 경배를 못합니다. 그럴 경우에는 경배를 잘 인도할 수 있는 분이 같이하면 좋습니다. 그러나 같이할 경우에도 리더가 인도해야 합니다. 어떤 부분을 다시하기 원하는지 어떤 부분을 통해 주님을 어떻게 찾기 원하는지 리더가 해나가야 합니다.
5] 경배의 단계가 필수적입니다.
이렇게 찬양과 경배로 나아가되 아주 중요한 것이 경배의 단계입니다. 우리가 경배의 단계를 다섯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예배로의 부름’입니다.
이 부분은 “나아가자. 찬양하자. 하나님을 높이자. 하나님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오라 지금은 경배할 때이다. 오라 지금은 찬양드릴 때이다.”와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함께 경배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지금 사실 여기 올 때 리더는 준비하고 오지만 다른 사람들은 준비가 덜된 사람도 많습니다. 또 직장에서 바쁘게 왔습니다. 오다가 차가 막혀서 기다리느라 짜증이 많이 났습니다. 그런 사람이 참고 시험당하며 왔는데 앉자마자 “아버지 당신은 내 삶의 기업”하고 찬양하면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깊이 인식하고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예배로의 부름입니다. 이때는 박자가 빠르고 활력 있는 찬양을 많이 드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경배로 들어감’입니다.
이때는 본격적으로 그분을 경배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때는 직접화법의 찬양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예배로의 부름에는 간접화법으로 “--하세, 높이세”라고 해도 좋은데 여기서는 직접화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하여 아주 중요한 경배의 요소가 직접화법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다윗이 말했습니다. 여기서 “주”라는 말은 실제로 주라는 말이 아니고 “당신”이라고 2인칭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은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말하기가 그래서 주라고 번역했을 뿐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 그분을 바라보며 “하나님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직접적으로 고백합니다. 여러분이 찬양을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 나가 그냥 간증하듯이 “--하세, 높이세”라고 하는 것과 그분을 바라보며 중심에서부터 그분께 찬사를 드리고 사랑을 고백하고 그분을 기뻐하는 이 경배로 나가는 것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해보세요. 다릅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오! 주님, 내가 왔네 내가 기뻐하네” 이렇게 하십니까? 찬양은 곡조있는 기도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마음을 실어서 하나님께 찬양하는데 ‘경배로 들어감’부터는, 그때부터는 직접화법의 찬양이 중요합니다. 거기에 들어가서 이제 경배를 직접적으로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engagement라고 말합니다. 이제 경배로 본격적으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여태까지는 “경배를 하자, 예배를 드리자, 하나님께 나아가자” 라고 서로를 독려하고 기뻐하고 나누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경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경우 경배로 들어가다가 끝나버립니다. 우리끼리 즐겁게 놀다가 끝나버립니다. 경배로 들어감에서는 직접화법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 중심에서 그분께서 행하신 일들을 인하여 찬사를 드리고 그분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그분을 마음껏 높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하나님을 마음껏 높여 보십시오.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요. 기도회로 모여 예배로의 부름을 하고 경배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마음껏 높여보세요. 온 마음을 실어서 하나님 그분으로 인하여 마음껏 기뻐해보세요. 마음을 싣는다는 것은 여러분의 입으로 고백한 것을 중심에서부터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찬양의 가사를 보고 나는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마음속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은혜를 구하여 나가는 정직한 심령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는 ‘친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마음껏 높이고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나갈 때 우리 마음이 주님을 향하게 되고 이런 과정을 통하여 벌써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계획이 얼마나 큰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추시고 알리시고 보이시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벌써 우리 마음이 스폰지가 물에 잠기듯 주님의 은혜 가운데 잠겨지면서 세 번째 단계로 우리 깊은 곳에서부터 우리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친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만 주님만 사랑해요.” 이것이 진실로 여러분의 삶의 진정한 고백이라면 하나님께서 깊은 감동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돈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돈이 있어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가 그래도 잘 되어야 하나님께서 날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주님만 저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주님만 저는 사랑합니다.” 이렇게 여러분의 삶이 그러하며 여러분의 중심에서 그 고백을 하나님께 해보십시오. 하나님은 깊은 감동을 받으실 것입니다. 주님이 먼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이렇게 은밀한 사랑의 고백이 세 번째 단계이고 네 번째는 잠잠히 하나님 앞에 기다리는 것, 다섯 번째는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인데 다윗의 장막에서는 세 번째 단계까지만 가면 됩니다.
그런데 이 단계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제가 이 부분을 수없이 많이 강조하는데도 실제로 할 때는 너무나 많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 결과로 모이자마자 은밀한 사랑의 고백부터 하려고 합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보기 원합니다.” 여러분 이 말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이 한 부분만 해도 그것이 진정한 내 삶이라면 그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말한 대로 오다가 차가 막혀 빵빵거리고 성질이 나서 간신히 화를 죽이고 왔는데 앉자마자 그 찬양이 중심에서 됩니까? 입술로는 될지 모르지만 마음에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그 찬양을 하고나서 갑자기 “다와서 찬양해, 찬양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밀한 사랑의 고백을 하면서 간신히 집중했는데 이제는 또 “찬양해, 찬양해”합니다. 단계를 따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합니다. 관심이 하나님께 모아졌다 흩어졌다 모아졌다 흩어졌다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이 그렇게 합니다. 단계가 왜 중요한가 하면 그것을 통해 점점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찬양을 통해 주님을 추구하여 나가지 않고 입술로 찬양하니까 들어갔다 나갔다 하면서도 모르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배를 인도해 나갈 때 경배의 단계가 아주 중요합니다. 핵심입니다. 여러분, 여기 앞에서 인도하는 팀들을 보십시오. 반드시 그 단계를 따라서 나갑니다. 이것이 기본이고 정석입니다. 이런 정석 가운데서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습니다. 힐송 찬양을 보면 그들은 은밀한 사랑의 고백에 하나의 단계를 더 넣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그 친밀함에서 나온 찬사를 하나님께 돌립니다.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우리가 왜 이렇게 하는가 하면 하나님께 점점 더 친밀함으로 나가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다섯 번째는 경배의 단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둑에서도 정석을 외운 다음 잊어버리라고 한다고 합니다. 참 한 가지 잊어버렸는데 ‘경배로 들어감’에서 중보기도의 찬양들도 나올 수 있습니다.
6]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여 순종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아가되 핵심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여 순종하는 것입니다. 찬양을 인도해 갈 때도 그렇고 어떤 찬양을 드릴까하는 문제도 그렇고 모든 중보기도, 예배의 순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때는 이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찬양과 경배를 1단계부터 3단계까지 나아가서 친밀함 가운데 나아가게 하시고 그런 가운데 주님께서 하나하나 인도해 가면서 기도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도해가시되 그것하고 기도하고 같이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런데 제가 과거에 이렇게 하는 것을 좀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중보기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감동들을 나누는 시간이 있습니다. 아까 다윗의 장막과 예언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목적을 알리시기 위해 예언의 기름을 부으십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잘못하다가 보면 어떤 외부적인 모습을 보고 찬양 좀 하다가 감동을 주시면 나누고 찬양을 좀 하다가 감동을 주시면 나누고 기도하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의 초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성령께 민감한 것이 중요합니다.
7] 종종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들을 서로 나눕니다.
여기에 리더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너무 자주 하지 마십시오. 아까 초점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라고 했습니다. 앞서 나아가는 리더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온 분들도 그들이 하나님을 구하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이 먼저 그렇게 나가면 따라옵니다. 그런데 감동을 너무 자주 나누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을 찾는 시간을 방해하게 됩니다. 관심을 집중하여 주님 앞에 경배하며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가만히 묵상하면서 주님을 구하고 있는데 자꾸 주님을 보려고 하면 “무슨 감동이 없냐?”고 하고 주님을 보려고 하면 “무슨 감동이 없냐?”고 하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방해가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감동을 나누되 너무 자주해서는 안됩니다. 각자가 주님을 집중적으로 찾아나서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단순히 우리는 한 두 마디 감동받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또 찬양 하나하고 감동받고 기도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전체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야 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여기에서 감동을 나눌 때 두 가지가 중요한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는 이유가 하나님이 특별히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는 것을 기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때는 아프가니스탄을 위해 기도하게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어떤 나라를 지칭하며 기도하게 하시고 어떤 때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선교사님을 생각나게 하셔서 기도하게 하시고 어떤 때는 우리가 아는 어떤 환자를 위해 기도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을 나누는 것은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기도하게 하시는 부분을 기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때도 리더가 중요한 것이 사람들이 감동이라고 나누는 것을 다 해가지고는 수가 좀 많아지면 감동만 나누다 시간을 다 보내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리더가 분별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가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는데 감동을 나누는 것 중 중요한 것은 적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분별이 잘 안되면 웬만하면 다 적게 해도 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그 시간을 통하여 교회를 인도하여 가시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음성을 들으라고 하셨는데 다윗의 장막에서 주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갈 때 개인뿐 아니라 교회를 향하여 주시는 음성들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분별하기 위하여 적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적은 것이 담임목사에게까지 반드시 가야합니다. 담임목사가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한쪽으로 치우치기 쉽습니다. 다윗의 장막에서 주님을 찾는다고 하면서 감동을 주시면 다 기록합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이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기 쉽습니다. 한동안 찬양하다가 감동 주신 것을 적고 끝나면 또 모여서 찬양 한 두곡 한 후에 감동을 적고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려고 모인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맨 처음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집중적으로 그 시간을 통하여 절대로 초점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때로는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중에 말씀하신 것에서 중요한 것은 기도하고 나머지 부분들은 기록해서 분별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분별하되 담임목사님에게 보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회자의 역할이 중요한데 감동만 따져도 하루 밤에 기도하는 팀이 다섯 팀이라면 그 감동만 적어도 하루에도 엄청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그것을 보고 그대로 다해서는 아무것도 못할 것입니다. 분별해야 합니다. 무엇을 분별해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중요한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분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담임 목회자의 몫입니다. 제가 어제부터 마이크 비클 목사님 이야기를 몇 번 했습니다. 그분은 예언에 대한 책을 썼는데 본인은 예언의 은사가 없습니다. 영국의 “능력은사”책을 쓴 분이 캔자스 시티의 예언자들에 대한 책을 썼는데 “some said it thunder(누가 말하기를 천둥쳤다고 말했다).”라는 제목입니다. 그런데 한때 영국에서 이 책이 베스트셀러였습니다. 그 당시 그 교회에는 폴 케인, 밥 존스, 잔 폴 잭슨, 질 오스틴 등 지금 세계적으로 각자 사역하는 그 많은 분들이 한 교회에 다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나라 정치, 경제에 대하여 수시로 꿈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사람 수만 해도 몇 백 명 수준이었습니다. 삼천 명 되는 성도 중 이백 명, 삼백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담임목사인 마이크 비클 목사는 예언의 은사가 없습니다. 이분들이 얼마나 예언의 은사가 강한가 하면 대단합니다. 어떤 때는 어떤 천문학자들도 예측하지 못한 혜성이 오는 것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그것이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예언합니다. 한번은 마이크 비클 목사가 샤워하다 전화했는데, 예언 사역자가 지금 샤워하고 오른 쪽 머리가 어떻게 되어 있는 것까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다고 말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아람 왕이 자기 침실에서 한 이야기를 엘리사가 들었다고 했는데 거기에 버금가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때는 마이크 비클 목사가 생각할 때 자기가 그 많은 사람들 중 가장 영적으로 둔감한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 때는 예언자들이 하는 대로 교회를 맡겨놓았더니 교회가 엉망이 되었다고 합니다.
예언의 은사가 강하다고 절대로 목회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는 목회자에게 맡긴 것이지 예언자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목자에게, 감독에게, 교사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감동이 아무리 많아도 분별해야할 사람이 목사입니다. 물론 같이 분별하지만 가장 근본적으로 목사가 분별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예언 시간에 배우셨지만 절대로 예언을 따라서만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넘어지는 지름길입니다. 성경에는 모든 예언을 분별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예언의 은사가 강한 사람을 통해 주어진 예언이라도 반드시 분별해어 합니다. 절대로 예언만 따라서 행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감동이 주어졌다고 감동대로 행해서는 교회에 난리가 납니다. 그래서 하실 일이 목사님들이 분별하는 일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양 축을 잘 잡는 것입니다. 하나는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성경에 말씀하셨습니다. 멸시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모르고 자기 임의대로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모든 예언은 시험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개의 축 사이에서 중간으로 가셔야 합니다. 이것이 너무나 중요한 기준입니다. 목사님들이 하실 일이 분별함인데 분별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있어야 그것이 분별이 됩니다. 사실 그렇지 않으면 안보입니다.
두 번째는 많은 감동이 있더라도 솎아 내십시오. “하나님이 사랑한다고 하십니다.”같은 감동은 그래 우리를 사랑하시지 하고 그렇게 알고 그 다음에는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이렇게 합니다. 누가 저를 위해 기도해 주는데 이런 말도 하고 저런 말도 하고 많은 말을 합니다. 그런데 칭찬의 말을 많이 한다면 저는 그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칭찬의 말을 하신다는 것은 그 부분은 잘한다는 것이니까 제가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떤 부분에 제가 유념하는가 하면 저에게 약간 부정적일 뿐만 아니라 경고성 메시지 같은 것이 있으면 저는 그것을 유념합니다. 많은 감동 중에서 영양가 있는 것을 분별하셔야 합니다. 물론 모든 감동은 다 영양가 있습니다. 제 이야기는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을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것을 분별하시되 절대로 예언만을 따라서 행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선반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유념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따라가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그것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저희가 분당에 있을 때에 우성상가를 경매로 받았는데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그 당시에는 전혀 넓은 교회를 알아볼 상황이 아니었는데 하나님께서 거기서 다윗의 장막을 하기 원하셔서 넓은 장소를 알아보게 되고 그래서 거기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 있던 장소의 약 두 배가 되는 건물을 경매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들어가서 공사를 시작하는데 그 주민들이 못 들어오게 반대했습니다. 허가를 해주지 못하도록 시에 가서 책상을 엎어 버리기도 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도 도장을 받기 위해 우리가 이단이라고 모함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들은 대법원까지 가려고 변호사까지 선임해 놓았습니다. 행정소송을 하면 우리가 이길 테지만 그때까지 수년이 걸릴 텐데 거기에 그 힘을 소진할 수 없고, 그렇게 해서 이긴들 그 손해배상을 누구한테 받겠습니까? 거기에다가 우리가 안 들어가도 관리비만 한 달에 3백만 원 넘게 나가고 은행이자만 3백만 원이 나가니 두개를 합하면 7백만 원 가까이 돈이 쏟아져 들어가는데 쓰지는 못하고 완전히 꽉 막혀있는 것입니다. 언제 해결될지 모릅니다. 그때 7백만 원이면 교회 재정에서 쓰고 나머지 몽땅 집어넣어야 할 상황입니다. 앞이 안보였습니다. 하나님 인도를 따라왔는데 그렇게 되니까 성도들은 “하나님 인도를 따라왔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하는 생각에 마음이 많이 흔들렸습니다. 진짜 앞에 캄캄한 시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분들과 싸울 수도 없습니다. 싸운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앞이 안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아십니까? 한번은 제 아내가 하나님께서 "모여서 기도하라."고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장막에서 나온 감동을 읽는데 "모여서 기도하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한번만이 아니라 두 번인가 세 번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순간 클릭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주일날 저녁부터 특별 기도회로 5일 동안 모이기로 했습니다. 특별기도회라 해봐야 저녁만 모였고 또 그때 제가 목요일은 부산 집회 인도하러 다닐 때고 수요일은 어떤 교회에 이미 선약을 했었기 때문에 집회를 나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6일 동안 모이는 중 제가 주일, 월요일, 금요일 3일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일 때 우리는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제를 가지고 나가지 않습니다. "도와주세요. 원수가 무너지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오히려 집중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저들을 축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분도 못 품고 나쁜 생각도 못하고 "축복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어떻게 나아가는가 하면 주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갑니다. 그러면서 기도할 때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왔는데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도와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를 말씀하시며 우리의 높아진 자세와 태도를 말씀하시고, 사역이 확장되면서 우리가 안일해진 태도들, 또 교회가 성장하는 등 여러 가지 좋은 일들을 보면서 우리 마음이 높아진 것 등을 하나님께서 적나라하게 드러내셨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며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첫날인가 둘째 날에 그렇게 주님 앞에 모였는데 하나님께서 "이제는 거기에 안 들어가도 된다."고 하시고 "다음 단계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간에 바로 그 건물이 임대가 나갔습니다. 그래서 은행 이자, 관리비가 순식간에 다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단계로 가라고 해서 우리가 찾아서 이 부지를 구입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분당에 있으면서 그 당시 성도가 얼마 되지도 않는 상황에서 1500평 이상 되는 땅을 구입하여 50억 이상이 들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면 저 부터도 어떻게 따라가겠습니까? 아무도 못 따라가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과정을 통해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그 장소는 나중에 들어오기 전에 벌써 차고 넘쳐서 그 건물 일부를 다시 우리가 훈련원과 교육관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맞추어 가셨습니다. 순식간에 일을 해결해 가셨는데 그 첫 단추가 다웟의 장막에서 주신 감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음성을 분별한데 있었습니다. 우리를 돌이키게 하시고 바로 그 주간에 해결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나누되 주님을 찾는 것에 방해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년이나 작년에 오면서 바다의 풍부가 몰려오게 해달라고 여러 번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요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갈치, 조기, 홍어 등이 떼로 잡힌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시고 그대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도했기 때문에 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기도하게 하시고 그대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나지 않습니까?
8] 교회 전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해 가시는 일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제가 다윗의 장막을 보면서 이런 부분이 잘 안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평신도 컨퍼런스가 포도나무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도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가르칠 시간도 별로 없었는데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이 잘 안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모여서 주님 예배하고 하나님께서 감동주시면 서로 나누는 것은 잘 되는데 지금 이미 하나님께서 교회적으로 말씀하시고 운행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뜻이 분별되어졌고 또 때로는 제가 광고를 통하여 하나님의 행하심을 나누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포도나무 교회는 설교보다 광고를 잘 들으면 하나님의 행하심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행하심을 나누다보니까 우리는 광고가 설교 같고 설교가 광고 같고 심지어 어떤 때는 광고가 설교를 대신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나중에 들어보니까 광고를 너무 길게 하는 교회라고 안 왔다고 합니다.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나누다 보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행하심을 교회에서 같이 분별한 부분들, 나누는 부분들이 있는데 우리는 모여서 무슨 감동을 주시는가를 묻고 그것만 가지고 기도하려고 합니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추구하여 나갈 뿐 아니라 훨씬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이신 그것들을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추가로 하나님께서 그 때 그 때 보이신 부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미 교회 가운데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부분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때 그 때 감동만을 받아서 기도하려는 경향이 적지 않은데 이것은 한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께서 교회 전체적으로 인도해 가시는 일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보이신 부분들 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반드시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 담임 목회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여러 번 끝나기 전 10분간은 우리 부부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이야기 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다윗의 장막에서 저희 부부를 위해 기도한 팀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코팅해서 써 붙여놓으려고 합니다. 너무 너무 중요한 일인데 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덟 가지 기도제목입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혹시 나중에 테이프를 듣는 분들도 기도하시도록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첫째, 모세처럼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게 하소서.
우리가 사역이 아무것도 열리지 않고 꽉 막혀있을 때, 그때에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기 쉬운데 그래도 그때 하나님만을 목적삼고 주님을 구하는 것은 그나마 쉽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사역이 전 세계를 향하여 열려가는 그 상황에서도 주님만을 목적삼고 그분을 구한다는 것은 진짜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당시 자기가 섬기는 백성들이 이백만명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의 담임목사입니다. 사도 바울 같은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께서 사역을 열어 가실 그 때에도 한 가지 유일한 소망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구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처럼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게 하소서.
두 번째,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것처럼 지혜를 주소서.
제가 교회, 선교회, 훈련원 세 가지를 감당하려니까 쉽지 않습니다. 사실 하나만 감당해도 한 사람이 하기 쉽지 않은데 세 가지를 하려니까 셋 다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참 지혜가 많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 예수님에게처럼 칠중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소서.
말세지말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특별히 예언적인 백성들에게 칠중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네 번째, 일꾼을 분별할 수 있는 눈과 양육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리더들에게 있는 가장 중요한 책임 중 하나가 차세대를 세우는 것입니다. 일꾼을 세우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내년에 중국 스케줄까지 하면 훈련원 스케줄만 해도 일 년이 다 찹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도, 선교회적으로도 많은 일꾼들이 세워져야 합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리더의 표시는 누가 리더인지가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못한 리더인가 봅니다. 누가 리더가 아닌지는 보이는데 누가 리더인지는 잘 안보입니다. 제가 사실 속으로 고민되는 것이 리더는 리더가 보인다는데 저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더가 보이게 해주세요. 리더를 분별하게 해주세요. 그 리더를 양육할 지혜를 주세요."라는 기도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다섯 번째. 늘 신선한 기름부음을 부어주세요.
제가 읽는 것은 테이프 듣는 분들이 기도해 달라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여러분들에게도 이 기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지체들이 여러분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 같아서 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성령의 기름부음이 하십니다. 저나 이길수 목사님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놀랍게 함께 하십니다. 그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저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하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것을 보고 저에게 은혜 받았다고 하고 밥도 사주고 하는데 그것은 번지수 잘못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저와 함께 하신 기름부음이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거기서 취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취할 것이 있다면 얼마나 신실하게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섬겼는가에 따라 상급을 받을 텐데 제 자신을 보면 그 부분이 너무 부족하기에 취할 것이 많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를 많이 받았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이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기름부음에도 신선한 기름부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만약 기름부음이 기계와 같다면 기계가 돌아가서 일을 해야 하는데 여기에 윤활유를 쳐주어야 잘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나온 신선한 기름부음이 함께해야 이 기름부음이 더 활발할 뿐 아니라 더 증가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 후임으로 섬겼던 알 티 켄들 목사님이 30년 정도 섬기고 4,5년 전에 은퇴하셨는데 그분이 쓴 ‘'The anointing’(기름부음)이라는 책에 보면 그 부분을 정확하게 잘 말하고 있습니다. 기름부음에도 신선한 기름부음이 필요하다. 당연히 옳은 이야기입니다. 신선한 기름부음이 있어야 따끈한 찐빵처럼 아버지의 마음에서 나오는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늘 신선한 기름부음이 보충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보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섬기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우리 기도사역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신선한 기름부음이 필요합니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주님과의 신선한 관계에서 처음의 마음을 가지고 섬기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라나며, 하나님께서 주신 기름부음이 우리 가운데 더 활발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신선한 기름부음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늘 신선한 기름부음을 더 부어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여섯 번째, 하나님의 비전과 마음을 더 부어 주세요.
이것은 신선한 기름부음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한번은 설교 전에 이길수 목사님이 저를 위해 기도해주다가 이런 감동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그 말씀을 늘 유념해야 하는데 어떤 때는 그 말씀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이냐면 예를 들면 오늘 저녁에 제가 이 설교를 한다고 할 때 이 설교를 전하기 원하는 아버지의 마음, 그리고 오늘날 처해있는 교회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 여기에 오신 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 우리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아버지의 의도, 그리고 그것에 대해 아버지가 전하기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잃으면 우리는 껍데기만 남습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섬기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목회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올바른 진리를 올바르게 전해도 아버지의 마음이 없으면 덕이 세워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마음이란 것이 유하게 싸매주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서는 보면 서슬이 시퍼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예레미야 속에는 파란 피가 흐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서를 자세히 읽어보세요. 그가 그 시대를 위하여 얼마나 중심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그리고 그 시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