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의무리 2011. 4. 16. 06:32

 

3단원 율법주의

 

10장 율법주의: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 버린 것

 

우리는 앞 단원에서 자기 중심적인 삶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거짓 신앙체계가 자기 중심적인 삶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아래와 같이 도표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원 율법주의

 

자기 중심 = 거짓 신앙체계

자기 목적 자기 방법 기복신앙 인본주의

 

자기 자원으로 사는 삶 = 율법주의

자기 목적을 위해 사는 삶 = 기복신앙

자기 방법대로 사는 삶 = 인본주의

 

거짓 신앙체계는 율법주의, 기복신앙, 인본주의의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중심적인 삶의 세 가지 특징이 마치 삼위일체처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듯이, 거짓 신앙체계의 세 가지 특징 또한 서로 밀접하게 엉켜 있습니다. 율법주의가 거짓 신앙체계의 이론을 제공한다면, 기복신앙은 그 배후에 있는 탐심을 말하고, 인본주의는 그러한 사람의 삶의 방식을 나타냅니다.

 

가장 먼저 이 단원에서는 율법주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율법주의는 거짓 신앙체계의 대표적인 한 축입니다. 율법주의를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이 장에서는 신앙의 본질과 의식의 관계를 통해 율법주의를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율법주의는 한 마디로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 버린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 혹은 율법주의를 잘 이해하려면, 우리 신앙에 있어서 본질과 의식의 관계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이 거짓 신앙체계인 율법주의에 빠져 있으면서 그 사실도 모를 수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과 의식과의 관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이 사실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가장 큰 계명이 우리의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12:29-30). 뿐만 아니라, 영생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보이셨습니다. “21)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22)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23)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24)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와 강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을 향치 아니하였으며 25)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26)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열조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7:21-26).

 

예레미야 시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실제로 닥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문제는 의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에 많은 의식들이 있었습니다. 21절을 보아도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영어 NIV 성경은 21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This is what the LORD Almighty, the God of Israel, says: Go ahead, add your burnt offerings to your other sacrifices and eat the meat yourselves!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래 계속해라. 너희의 다른 희생들에다 번제도 더해라. 그리고 그 고기는 너희나 실컷 먹어라’)” 예레미야 6장에 보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바(오늘날의 에티오피아나 남예멘)와 원방(오늘날의 인도)에까지 가서 특별한 향료를 사다가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제사들을 전혀 받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대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 많은 희생들을 드렸을 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문제는 신앙의 본질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22절과 23절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 22절에서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번제나 희생에 대해서 전혀 말씀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레위기와 민수기에서 이 부분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부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명령하신 주된 핵심이 번제나 희생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 번제나 희생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원하신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주된 핵심은, 다시 말해서 신앙의 본질은 그들이 하나님의 목소리에 청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모든 길로 행하는 것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번제나 희생은 많이 드렸을지 모르지만, 본질적인 요소인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한 이유였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 어디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그 부분을 살펴보면,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한 구절은 출애굽기 19장입니다. “3)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4)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19:3-6). 여기에 보면, 우선 하나님은 번제나 희생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다음, 하나님은 무엇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에게로 인도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 인도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신앙의 본질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거하는 것,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것.

 

또 다른 한 구절은 신명기 30장입니다. 신명기서는 두 번째 율법입니다. 첫 번째 율법을 다시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3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19장에서 말씀하신 의미를 보다 상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 신명기 30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5)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19)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30:15-16, 19-20). 여기에서도 우선 하나님은 번제나 희생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하나님은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둘째 하나님의 모든 길로 행하는 것. 셋째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삶에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며, 하나님께 꼭 붙어 있는 것이 포함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20절의 그 말씀에 순종하며라는 말은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며라는 뜻이고, “그에게 부종하며라는 말은 그분께 붙어 있으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서도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이셨습니다. “1)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4)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6)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1-6).

 

호세아 시대에도 의식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본질이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 당시에도 많은 의식들이 있었습니다. 호세아와 이사야는 같은 시대 사람인데, 이사야 1장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은 말할 것도 없고, 월삭과 모든 절기와 대회를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또 많은 살진 짐승들을 무수히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많이 기도하고 많이 금식했습니다(1:11-15 참조). 실로 그들에게는 의식이 넘쳐났습니다. 물론 호세아는 북방 이스라엘을 위해 주로 사역했고, 이사야는 남방 유다를 위해 사역했습니다만, 저는 둘 다 상황이 비슷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6절에 나옵니다. ,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원하시는 본질은 번제나 제사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각주1)1.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호세아 시대의 문제 역시 번제나 희생의 부족이 아니라, 바로 그 본질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1)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6)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4:1, 6). 그래서 하나님은 호세아 6장에서 그들에게 그 본질로 돌아오라고 촉구하고 계십니다(6:1-3 참조).

 

이렇게 볼 때, 저는 우리 신앙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본질.

 

1.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1) 하나님을 아는 것.

2)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

2.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전존재로 동참하는 것.

1) 전적인 순종.

2) 온전한 신뢰.

PLO의 삶.

 

그럼,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전 책에서는 우리 신앙의 본질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뿐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하는가?” 그러나 어떻게 말하든지 그것은 결국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그리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전존재로 동참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 둘은 항상 같이 갑니다. 그래서 그 중 하나만 언급해도 다른 하나는 자동적으로 따라올 뿐 아니라, 그 중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둘째, 의식들도 하나님께서 명하신 중요한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시고(7:22), 호세아를 통해서 번제나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시니까, 그 당시 번제와 제사와 같은 의식들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의식들 모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들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제가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말하니까, 어떤 성도들은 의식들이 중요하지 않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의식들 모두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들이며, 우리 신앙에서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오늘날의 의식들 중 대표적인 것들은 성수주일, 십일조와 헌금, 기도와 금식, 성경공부와 묵상, 봉사와 섬김, 침례(세례)와 성찬 등이 있습니다.

 

저는 의식들의 중요성을 이렇게 배워갑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십일조를 점검하라고 감동하실 때가 몇 차례 있었습니다. 저는 자세히 점검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작은 부분의 십일조를 잊고 있었던 것을 발견하고, 그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어떤 때는 제가 깜박 잊고 드리지 않은 십일조의 몇 십 배에 해당하는 금액의 구제헌금을 드렸을 때도 있었습니다. 제가 하지 않아도 되는 구제헌금을 몇 십 배나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십일조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제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기 원치 않으신 것입니다. 저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의식의 중요성을 개인적으로 더욱 배워가고 있습니다.

 

셋째, 의식들은 본질을 위한 수단이요 그릇입니다.

 

의식들 모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들이며, 우리 신앙의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들은 우리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의식들은 본질을 위한 수단이자 동시에 본질을 담는 그릇입니다.

 

먼저 의식들은 본질을 위한 수단입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그런데 본질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 성경공부와 묵상 그리고 기도와 금식과 같은 의식들이 필수적입니다. 그러한 의식들이 없이 본질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반면에 성경공부와 묵상을 많이 하고, 기도와 금식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더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본질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의식들은 본질을 담는 그릇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식들을 통해 본질이 표현됩니다. 예를 들어, 여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성도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그 성도는 하나님께 십일조도 드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금을 드리지 않습니다. 그저 명목적인 헌금을 조금 드릴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성도는 전혀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가 아닙니다. 아무리 자신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한다고 말할지 몰라도 그 말은 그저 입술의 고백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시고(6:6), 다른 한편으로는 병들고 쓸모없는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을 멸시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6)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8)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1:6-8). 왜냐하면 말라기 시대의 그러한 제사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자세와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의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이지,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이사야 시대에는 그 많은 살진 짐승들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넷째, 본질이 없는 의식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의식들 모두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들은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을 위한 수단이며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 의식이 아무리 가득하다 할지라도, 그들이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서 있지 않으면, 그 모든 의식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이나 호세아를 통해서 번제나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신 것 모두 이것을 의미합니다. 그 두 당시 모두 의식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신앙의 본질에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것이 의식이 아니라, 그들과의 친밀한 교제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의 본질이 없는 의식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로 살펴보십시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그 당시에는 수많은 의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월삭과 모든 절기와 대회를 지켰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많은 희생을 드렸습니다. 수송아지, 수염소, 어린양 등 살진 짐승을 무수히 드렸습니다. 그 당시 희생은 오늘날로 치면 예배일 뿐 아니라, 헌금도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많이 기도하고 많이 금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호세아 4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호세아와 이사야는 같은 시대의 선지자들입니다. 물론 이사야는 남방 유다를 중심으로, 호세아는 북방 이스라엘을 상대로 섬겼지만 피차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 4장에서 우리는 그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에서 떠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4:1).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었기 때문에, 그 많은 의식들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의식들을 전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많은 희생들이 하나님 앞에 무거운 짐이 될 뿐이라고 하셨고, 심지어 그것들을 혐오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1장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1:11-15).

 

결혼반지의 예를 들면 이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신랑이 신부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결혼선물로 주었다고 가정합시다. 신부는 그것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소중하게 아꼈습니다. 친구들 앞에서도 그 반지가 늘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신랑이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반지가 신부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반지는 결혼의식에서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혼의 본질은 아닙니다. 결혼의 본질은 신랑이 신부에 대한 그리고 신부가 신랑에 대한 사랑과 정절과 약속입니다. 그래서 수단인 결혼반지는 그 속에 본질이 담겨져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 속에 본질이 없을 때는 아무리 좋은 반지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정확하게 이와 똑같습니다.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 버린 것이 거짓 신앙체계인 율법주의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의식들은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며, 본질을 위한 수단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의식이 가득하다 할지라도 본질이 없으면, 그 모든 의식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타락하면 이러한 하나님의 관점이 가리어집니다. 그래서 신앙에 대한 이해가 왜곡되고 변질됩니다. 그 결과, 의식을 잘 하는 그 자체가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 신앙체계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인 율법주의입니다.

 

다시 한번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로 돌아가 보십시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그들은 철저하게 모든 예배와 절기를 지키고, 하나님께 많은 희생을 드렸으며, 많이 기도하고 금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보다 신앙생활을 더 잘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그들에게 아무리 외쳐도 그것을 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들과 같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그리고 헌신적으로 잘 하는 사람들에게 소돔의 백성이요 고모라의 백성이라니요. 비교할 사람들이 없어서 자기들을 소돔이나 고모라의 백성에 비교합니까?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니요. 하나님을 멸시하고 멀리 물러갔다니요(1:4 참조). 하나님을 더 이상 섬기지 않고, 바알에게로 가버린 그러한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면 모르겠지만, 그 모든 절기와 예배를 지키고, 그렇게 하나님께 헌신하고 기도하는 자기들에게 그렇게 말하다니요. 그들은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이사야가 거짓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사야를 톱으로 켜서 죽였습니다. 물론 이 사실이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전승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그들의 문제였습니까? 그들의 영적 분별력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6:9).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올바른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 그들은 많은 의식을 하나님께 잘 드리는 그 자체를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로는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멀리 물러간 상태에 있으면서도,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도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정확하게 똑같은 신앙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 그들도 의식을 잘 하는 그 자체를 신앙의 본질로 이해하는 율법주의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보다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고, 누구보다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리고, 누구보다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고, 누구보다 철저하게 성경을 연구하고, 누구보다 철저하게 기도하고 금식하고 구제하였기 때문에, 누구보다 신앙이 좋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도 이사야 시대의 자기 조상들처럼 똑같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멀리 떠나 있었든지, 예수님은 심지어 마귀가 그들의 아비이며, 그들은 그들 아비의 소욕을 이루려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그들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여러 차례 경고하셨습니다(19:44 참조).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 상태에 있습니까? 많은 경우,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신앙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 거짓 신앙체계인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짜를 진짜라고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소위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성수주일, 십일조, 기도와 금식, 성경공부와 묵상, 섬김과 봉사 등 의식을 잘하는 사람들을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일꾼을 뽑을 때, 어떤 사람들을 뽑습니까? 바로 그러한 의식들을 잘 하는 사람들을 뽑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이해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이 의식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도, 그리고 그 의식들을 잘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 의식들을 잘 하는 그 자체가 그 사람의 신앙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 의식들을 누구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헌신적으로 잘하면서도,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을 천리만리 떠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누가 진실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지, 누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는지, 무엇이 신앙의 본질이며, 그 본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등을 분별하는 눈을 잃었습니다. 정확하게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의 일꾼들 중에 진실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아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심지어 교회의 중직들 가운데서도 그 마음속에 세상 사랑과 탐심이 내려져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교회가 타락한 신앙의 이해 가운데 있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더 이상 의식 잘하는 사람들을 일꾼으로 뽑지 않습니다. 세상의 지위와 돈이 많은 사람을 대신 일꾼으로 뽑습니다. 그리고 장로가 되기 위해 선거운동을 하고, 선거운동을 하면서 온갖 세상적인 방법을 다 동원하기도 합니다. 편 가르기를 하고, 상대방을 비방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신앙생활의 당연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스스로 세우고자 하는 자는 절대로 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개인적인 야망이 전혀 내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진정으로 하나님의 목적만을 위해 신실하게 섬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일꾼을 뽑는 이 한 가지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들이 그렇게 안 좋게 생각하는 바리새인들보다 우리가 훨씬 못하지 않습니까?

 

더욱이 오늘날 우리는 구약성경뿐 아니라 신약성경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뿐 아니라,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까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확하게 그들과 똑같은 상태와 이해 가운데 있으면서도, 아니 그보다 더 심한 상태 가운데 있으면서도 성경을 통해 목이 터져라 외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혀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들의 모습을 전혀 보지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통해서 이사야 시대의 자기 조상들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영적인 분별력이 없어서 자기들은 전혀 보지 못했던 것과 정확하게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을 전혀 보지 못한 채, “그들은 구약시대의 사람들이었고, 우리는 예수를 믿는 신약시대의 사람들이 아닌가.” 라는 식으로 그냥 넘어가 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주일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까지 다니고, 십일조와 여러 헌금들을 드리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지나쳐 버립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입니다!

 

 

 

 

각주 1

여기서 말하는 인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여기의 인애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보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 아니라도 상관없다.

5절과 연관.

바리새인들에 대해 인용하신 구절.

공동 새 번역

브라운 드라이버

 

 

그래서 공동 새 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는 히브리어 사전 중 하나인 브라운, 드라이버, 브릭스가 공저한 히브리어 사전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문맥도 설명. 바리새인들의 경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