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성경에서 말하는 복
제16장 성경에서 말하는 복
제가 기복신앙이 거짓 신앙체계라고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그래서 이 장에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복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살펴보고 나면, 우리는 기복신앙이 왜 거짓 신앙체계인가를 더욱 선명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이십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는,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한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명기 30장 19-20절입니다. “19)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과 복 그리고 사망과 저주를 그 앞에 두었으니, 살기 위해 생명을 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명과 복은 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하나님 그분 자신입니다.
황금률
이 부분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리고 전반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하나의 황금률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구약 전체에 걸쳐 나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우리를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이 황금률은 역대하 15장 2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그러나 이 황금률은 여기에만 나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여러 곳에 나와 있습니다. 표현은 다양하게 되어 있지만, 내용은 정확하게 같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말 3:7).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 2:30).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 4:8).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1:3).
위의 구절들을 정리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면,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하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가까이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돌아오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존중하신다.
이 모든 표현들은 다양하지만, 모두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우리를 버리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멸시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멸시하신다.
이 표현들 또한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황금률의 의미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면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우리를 버리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며, 하나님을 버린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관점이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우리 생각과 관점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실제로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떠나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했던 바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을 뿐 아니라, 월삭과 모든 절기와 모든 대회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올 때, 빈손으로 오지 아니하고, 많은 살진 짐승들을 희생으로 드렸습니다. 그들은 많이 기도하고 많이 금식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하나님을 존중하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했겠습니까?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니 우리가 하나님을 멸시하면 이렇게 하겠습니까?” 라고 반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고 멸시하고 멀리 물러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4). 이처럼 그들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엘리 제사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자기 아들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악을 행했을 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타일렀습니다(삼상 2:22-25). 물론 그는 그들의 악행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는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했을 때, 자기의 두 아들이 한꺼번에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더 큰 충격을 받고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엘리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 자입니까, 아니면 멸시한 자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 자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은 전혀 달랐습니다. 위에 살펴본 사무엘상 2장 30절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을 멸시한 자의 편에 두고 계십니다.
그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고, 하나님을 버린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전존재로 사랑하는 삶 가운데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성경에서 하나님을 버렸다는 말이나 하나님을 멸시한다는 말은 모두 신앙의 본질에서 떠난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여러 번 살펴보았듯이, 이사야 시대에는 수많은 의식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알고, 전존재로 사랑하는 삶에서 떠나 있었습니다(호 4:1, 6 참조).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고, 하나님을 멸시하여 멀리 떠나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우리는 호세아 4장 6절에서 다시 한번 신앙의 본질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하나님의 법칙은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우리를 버리시는 것인데, 이 구절은 하나님을 버린 것 대신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 것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시대에도 많은 의식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었습니다(렘 7:21-27 참조).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렘 2:13).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일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십일조를 철저하게 드리고, 심지어 새벽기도도 한 번도 안 빠지고, 또 교회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봉사한다 할지라도,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요, 하나님을 버린 것이요, 하나님을 멸시한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 하나님을 찾는 것,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모두 다 같은 의미인데, 그것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전존재로 사랑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관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치 이사야나 예레미야 시대처럼 그릇되게 이해합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멀리 떠나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업이 어려울 때는 주일날 예배도 빼먹지 않고, 십일조도 철저히 드리고, 금요기도회까지 잘 나오더니, 바빠지니까 예배도 빠지고 기도회도 빠지기 시작했다고 하십시다. 십일조도 액수가 커지면서 잘 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업이 어려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럼 그들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권면합니다. 그 의미인즉 다시 예전처럼 예배를 더 잘 드리고, 기도회에도 잘 나오고, 헌금도 잘 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만약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었으면, 이사야나 호세아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올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러한 의식이 그들 가운데 차고 넘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 시대만 하더라도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수없이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신앙의 본질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호세아서 6장 1절과 3절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6장 1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호소하셨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러면서 3절에서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보십시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1절과 3절의 내용은 정확하게 같은 것을 말함을 우리는 문맥에서 의심할 나위 없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면, 황금률의 내용처럼 반드시 그들에게 돌아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말을 아침이 되면 해가 뜨듯이 반드시 그들에게 임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을 우리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그렇게 기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찾는 것은 전혀 그러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그분 자신을 간절히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위에 나오는 역대하 15:2에서 하나님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과 하나님을 찾는 것을 나란히 같은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시편 24편 6절도 이 점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히브리 문학에는 평행법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의미를 보다 풍요롭게 표현하기 위해 정확하게 같은 의미의 말을 두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 자신을 구하는 의미임을 명백히 볼 수 있습니다.
복과 신앙의 본질
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이 복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할 때,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전존재로 사랑하는 삶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그분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이 우리에게 넘칩니다. 하나님의 평화(샬롬)이든지, 하나님의 도우심이든지, 하나님의 인도이든지, 기도 응답이든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든지, 세상과 죄를 이기는 능력이든지 모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넘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복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을 버릴 때, 하나님도 우리를 버리십니다. 즉,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면 하나님의 모든 생명이 우리에게서 고갈됩니다. 하나님의 실제적인 도움이든지, 하나님의 은혜이든지, 하나님의 안식이든지, 세상과 죄를 이기는 능력이든지 모든 생명이 걷힙니다. 하나님 그분이 생명이시니까요.
신명기 30장에서 하나님은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 앞에 복과 저주, 생명과 사망을 놓았으니, 우리와 우리 자손들을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 두 가지 중 복과 생명보다 사망과 저주를 택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또 알건 모르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것은 정확하게 우리들이 사망과 저주를 택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정확하게 예레미야 시대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실재가 거의 없습니다.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소멸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태는 철저하게 닫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안식이나 샬롬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제 그 이유가 선명히 보이십니까?
그런데 저는 여기서 한 가지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보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그리고 모든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전존재로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 가운데 거할 때, 우리에게 성취됩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약속을 주셨을지라도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 약속은 우리에게서 거두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 또한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에 대한 두 가지 좋은 예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엘리 제사장의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엘리 제사장 가문이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섬기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제 그 약속을 거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 2:30).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말을 바꾸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닙니다. 그분에게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 이 말씀은 엘리 제사장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났으므로 그의 가문을 향한 약속이 거두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예는 호세아 4장 6절에 나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호 4:6). 이 구절을 출애굽기 19장과 대조해서 보면, 그 의미를 선명히 볼 수 있습니다. “4)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 19:4-6).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의 본질 가운데 거할 때,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자, 하나님은 그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모든 약속도 하나님의 생명으로서, 우리가 신앙의 본질 가운데 거할 때에만 이루어집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생명(복)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 29:11).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생명이요 샬롬입니다. 재앙과 저주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명기 30장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 앞에 복과 저주 그리고 생명과 사망을 두었다고 하시면서,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위해 생명을 택하라고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을 보아도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얼마나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삶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이 평안이요 소망이라고 하신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서에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이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의 평안(샬롬)과 생명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그렇게 되기 위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부르짖고 계셨습니다. “12)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13)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14)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렘 29:12-14).
그들의 문제는 그들이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 알고 사랑하는 삶에서 떠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버린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살기 위하여,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의도인 생명과 평강과 소망이 그들의 삶에 넘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치고 계셨습니다. 즉,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 위해 하나님 자신을 구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라고 외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찾는 방법은 항상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29장 13절에서 하나님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호세아서 6장 3절에서도 하나님 알기를 구하되 힘써 하나님 알기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역대하 15장은 아사왕 시절에 이스라엘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자 하나님께서 만나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2)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15)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 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대하 15:12, 15절).”
저는 예레미야 29장의 이 말씀이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짖음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생명이요 샬롬입니다. 저주와 사망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살기 위하여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 알고 사랑하는 삶으로 오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의도인 생명과 샬롬이 우리 삶 속에 넘치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을 간절히 찾아 하나님께로 나오라고 외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