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인본주의
제19장 인본주의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길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필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신 30:15-16).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신 8:6; 시 128:1). 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의 길로 행해야 합니다(출 33:1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길로 행해야 합니다(출 33:13).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40년 동안 하나님을 분노케 했습니다(히 3:10). 하나님의 길로 행할 때에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집니다(신 28:9).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신 30:16).
그래서 성경은 반복해서 하나님의 길로 행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 30:16). “22)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23)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렘 7:22-23). “크게 삼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수 22:5).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이 우리에게 최선입니다. 하나님의 길은 의롭습니다(시 145:17). 하나님의 길은 옳습니다(신 32:4). 하나님의 길은 거룩합니다(시 77:13). 하나님의 길은 사랑스럽고 신실합니다(시 25:8-10). 하나님의 길은 영원합니다(합 3:6). 반면에 인간이 타락하면 하나님의 길에 대해서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길에 대해서 반박합니다(겔 18:25, 29; 33:20).
그런데 거짓 신앙체계인 인본주의는 하나님의 길 혹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대신 자기 방법대로 사는 삶입니다. 자기 방법과 세상의 방법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본주의 가운데 있으면, 아직 신앙의 본질 위에 서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거짓 신앙체계를 보다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 그 특징들을 하나하나 따로 따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 기복 신앙, 인본주의는 각기 다른 세 개의 거짓 신앙이 아니라, 한 거짓 신앙체계의 다른 특징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 특징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도록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 속에 세 가지 특징 중 한 가지만이라도 나타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거짓 신앙체계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율법주의와 기복 신앙의 병폐를 심각하게 인식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돌이키려고 노력합니다. 목회자들 중에는 그것들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교회에서 집중적으로 그 병폐들에 대해서 설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삶이나 사회생활 혹은 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데 있어서는 기존에 사용하던 인본적인 방법들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이럴 경우, 그 사람은 자신은 아무리 율법주의나 기복 신앙을 버렸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여전히 거짓 신앙체계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만이 목적된 삶 가운데 아직 전혀 서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삶 가운데 서려면, 반드시 믿음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간적인 수단이나 방법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믿음에 의한 삶을 사는 것이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서 있는가 혹은 그렇지 못한가에 대한 리트마스 시험지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이 책을 완성하자마자 『믿음에 의한 삶』을 집필하고자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본주의는 절대로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인본주의는 거짓 신앙체계의 특징으로서, 절대로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이사야 54장과 갈라디아서 4장을 대조해 보면서, “이삭”과 “이스마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이삭”은 십자가의 복음을 그리고 “이스마엘”은 율법주의를 대변합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인본주의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이스마엘”과 하갈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하갈과 동침함으로써 낳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4장은 “하갈”과 “이스마엘”이 어떠한 하나님의 유업도 받지 못할 것이니, 그것들을 교회로부터 철저하게 쫓아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갈 4:30). 이처럼 인본주의는 하나님의 유업을 절대로 받지 못합니다.
인본주의가 잠시 득세할 수 있습니다.
하갈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본주의가 잠시 득세할 수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자원과 능력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아들이 아니라,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에 의해서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육체를 따라 난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갈 4:23, 29). 이렇게 이스마엘이 인본주의의 결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태어났을 때 하갈과 이스마엘은 15년 동안 득세했습니다.
오늘날 심지어 많은 목회자들까지도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임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도록 하나님을 구하고 기다리기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철저하게 하나님의 길에 서기를 추구하기보다,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통해 자신들이 세워놓은 소정의 목표를 이루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은 것처럼 그들이 인간적인 열매라도 얻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가지고 득세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자에게는 수치의 기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본주의가 하갈처럼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득세하는 반면,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은 사라처럼 수치의 기간을 거칠 수 있습니다. 이사야 54장에서 우리는 이 부분을 잘 볼 수 있습니다. “1)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4)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사 54:1, 4).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유업이 주어질 자를 잉태치 못한 자, 구로치 못한 자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과거에 수치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잉태치 못한 자, 구로치 못한 자가 바로 갈라디아서 4장에 의하면 “이삭”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서는 자들, 십자가의 복음 가운데 서는 자들, 하나님 중심적인 삶 가운데 서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수치의 기간이 있습니다.
그럼 왜 그것이 수치의 기간입니까? 사라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열매가 없기 때문에 수치의 기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은 자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여러 해가 지나도록 자녀를 낳지 못했습니다. 아니 나중에는 자녀를 생산할 수 있는 생리적인 능력을 잃었습니다. 반면에 하갈은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통해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아 사라를 멸시하고 무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이 기간을 거쳤습니다. 다윗의 경우에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미 버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위에 앉아 수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은 받았으나 왕의 보좌나 권력이 없이 오히려 그 수십 년 동안 사울에게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기간이 다윗에게는 수치의 기간이었습니다. 그 외 모세도, 요셉도, 바울도 다 이 기간을 거쳤습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이 수치의 기간이 존재합니까? 그 기간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시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수치의 기간은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초대 왕 사울은 이 수치의 기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쉽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랜 기간의 수치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도 나중에 죄를 지었지만,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수치의 기간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기간입니다. 시간만 지난다고 수치의 기간이 지나가지 않습니다. 그 기간에 무엇보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55장에서 성경은 하나님을 간절히 구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또한 수치의 기간은 자기 중심적인 삶의 자세를 버리는 기간입니다. 이사야 54장에 나오는 구로치 못한 자들, 잉태치 못한 자들은 사라처럼 인간적인 방법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수치를 당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방법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곧바로 임하셔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수치의 기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데, 하나님은 아직 오시지 않고 그 대신 우리들을 다루시기 때문에 수치의 기간이 있습니다.
이 수치의 기간을 통해서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사라의 경우처럼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세우고자 하는 자신의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55장도 하나님을 구하되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의지하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6)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8)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6-9).
그리고 이 기간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서는 기간입니다. 이 수치의 기간을 통해서 우리는 빚어지고 준비되어집니다. 순종하는 것도 배우고, 기다리는 것도 배우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배우고, 신실하게 섬기는 것도 배우고, 세상과 사탄을 이기는 것도 배웁니다.
인본주의에 유업이 주어진 적은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한 번도 없습니다.
주님을 구하는 자들에게 수치의 기간은 때로 생각보다 길 수도 있습니다. 모세, 다윗, 요셉, 바울 모두 긴 수치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알 티 캔달 목사는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구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데도 특별한 이유 없이 수치의 기간이 길 경우, 거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몰라도,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구하며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반드시 임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유업은 반드시 주어집니다. 그것이 이사야 54장이 말하는 바입니다. “1)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3)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사 54:1-3).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사 54:5). 5절의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임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유업이 인본주의에게는, 즉 “이스마엘”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천 년 기독교 역사 동안 하나님의 유업, 그중에서도 회복과 부흥에 대한 하나님의 유업이 “이스마엘”에게 주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유업은 반드시 “이삭”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임하시면 사라에게 이삭이 태어났을 때처럼 인본주의의 득세는 무너질 것입니다. 인본주의가 잠시 득세할지 몰라도 그것은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임하실 때, “이스마엘”의 득세는 반드시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4장도 하나님께서 남편 되실 것이기 때문에(하나님께서 임하실 것이기 때문에), 잉태치 못한 자(“이삭”)가 남편 있는 자(“이스마엘”)보다 더 많은 자식이 있게 될 것이며,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의 자식들이 열방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하갈이 너무 가득합니다. 목회자들과 일반 성도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인간적인 그리고 세상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자기들이 세워놓은 목표와 목적을 달성하기에 바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 이루면 성공한 사람이라고 혹은 성공한 목회자라고 칭찬을 받습니다. 반면에 주님을 간절히 구하며, 주님만을 의지하며, 주의 길만을 전하고 그 길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은 사역적인 면에서 별로 보잘 것 없을 수 있습니다. 그들을 알아주는 사람들도 별로 없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신문에 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교회는 매우 작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임하시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인본주의의 득세는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모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내려놓고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서십시오. 하나님의 길만 전하고, 그 길에만 서십시오. 철저하게 “이삭”이 되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임하실 것입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포도나무교회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함께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부분에서 그랬지만, 그 중 하나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의 길로만 서도록 인도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개척 초기에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매월 월세만 하더라도 2백5십만 원씩 나갔습니다. 일반 재정은 매월 약 3백5십만 원 정도 부족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위의 일부 성도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쉽게 교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그래서 교회가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도록 저에게 예배나 메시지 등에 있어서 철저한 하나님의 기준보다는 좀더 유연한 자세를 가질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제가 그렇게 해서 교회를 빨리 성장시키도록 했을 것 같으면, 포도나무교회가 존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에 교회 수가 부족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교회를 개척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교회들은 그 교회들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중요했듯이, 포도나무교회는 포도나무교회대로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방문했으나 강한 메시지나 오직 주님만을 구하는 예배 등 여러 가지로 인하여 교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갈 때 우리는 마음속으로 그들을 축복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반적인 교회를 원하시면 다른 교회로 가십시오. 우리 주위에도 수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과거 다른 교회에서 하던 방법들을 내세우면서 나에게 그렇게 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러한 방법들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방법들이 아닌, 인본주의적인 방법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제 마음은 결코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과연 교회가 세워질 수 있을지 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 마음속에 되뇌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래, 하나님만 오시면 되.” 물론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임하실지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하시는 길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한 길이었다는 사실과 저와 제 아내의 삶을 다 드려도 조금도 부족함 없을 만큼 소중한 길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인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앞서가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수많은 아름다운 일들을 행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사역의 열매도 국내외로 퍼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행하고 계신 하나님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마디로 이사야 54장의 일들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저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만 지속적으로 구하며, 그분께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일에 우리의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은 모든 일들은 그분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저에게도 과거에 수치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앙의 본질을 계시하시며 인도하고 계실 때, 저의 삶 속에는 참 귀한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길들을 보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역적인 면에서는 최소한 외부적으로 별다른 변화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그 당시 이웃 교회에 있던 어떤 목회자가 저에게 “유학 갔다 왔는데 무슨 도움이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매우 모욕적인 말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러한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나름대로 여러 가지를 해 보았지만, 사역적인 면에서 어떤 근본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제 머리속에는 “사역이 어렵다”라는 것이 아예 각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움직이시기 시작하자 지금 사역이 매우 쉬운 것을 발견합니다. 사실, 가장 쉬운 것이 사역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지금은 그 수치가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54장에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습니다.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사 54:4).
인본주의의 다양한 형태
인본주의는 참으로 다양한 형태를 띨 수 있습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는 그의 책 『하나님과의 신선한 만남』에서 그 몇 가지 예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산다.
하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자기와 자기의 입지를 먼저 챙긴다.
하나님은 자기를 낮추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스스로를 높인다.
하나님은 자기 목숨을 잃으라고(하나님 나라를 위해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라) 하시는데,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구원코자(우리가 가진 것을 움켜쥐려고) 애쓴다.
하나님은 주님께서 일꾼을 보내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교묘히 조종하여 봉사하게 만든다.
어떤 때는 목회자들이 교회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기보다 성도들로 하여금 헌금하도록 여러 성경구절들과 강사들을 통해 그들을 회유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고민하며 하나님의 길로 조정하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기다리기보다, 그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잘 해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주님 안에서 자라는 길을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포함해서 오늘날 우리 가운데 팽배한 인본주의적인 방법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길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길을 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길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81편은 말합니다. “10)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11)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12)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의 강퍅한 대로 버려 두어 그 임의대로 행케 하였도다 13)내 백성이 나를 청종하며 이스라엘이 내 도 행하기를 원하노라”(시 81:10-13).
먼저 이 구절은 하나님을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우리가 목표를 크게 가지고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채워주시리라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전혀 그러한 구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구절에서 입을 크게 열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 다음 절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을 구하여 입을 크게 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채우시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구하지 않자, 그들은 인본주의로 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입을 넓게 열어 하나님을 구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저들이 거절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그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도록 내어버려두셨습니다. 즉, 그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계시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방법대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청종하며 하나님의 길에 행하기를 원하셨지만, 그들은 임의대로, 즉 인본주의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하나님의 길로 행하려면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길을 구했습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출 33:13). 다윗도 그랬습니다. “1)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4)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5)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시 25:1, 4-5). 그 외 하나님과 동행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이 나라 가운데서 속히 모든 거짓 신앙체계가 파괴되고, 하나님의 모든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과 신앙의 본질 위에 세워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또한 그 결과 하나님의 부흥이 이 땅에 속히 임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