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 옷을 지으입히시니라(창3:21)
가죽 옷을 지으입히시니라(창3:21)
지난 시간: 죄의 본질에 대해 살펴 보았음 -> 죄의 본질 -> 자기가 자기에게 하나님 되는 것
결과 -> 죄인이 되었고 -> 죄의 삯은 사망 -> 하나님과 관계 끊어짐, 육신의 사망, 영원한 사람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져버림 -> 결과 찾아 온 것
하나님
다른 사람
자연
자기 자신과의 부끄러움을 갖게 되었음.
그래서 숨은 것
그때부터 인간은 스스로 힘으로 그 부끄러움을 가리는 작업에 착수함
제일 먼저 한 것 ->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기의 치부를 가리움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3: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여기 무화가 나뭇잎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공허를 메우고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과학 문명, 철학, 종교, 학문, 교육..등등 인간쪽에서의 행위를 총칭하는 단어임
그러나 무화과나무 잎의 특징은 잠시 잠간후면 말라버린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공허를 메우고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만든 것들은 한시적으로 만족감과 안전감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인간의 공허함을 온전히 메워주거나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줄 수 는 없는 겁니다.
돈 명예, 철학, 종교, 학문, 교육 이런 것들이 우리들의 목마름을 완전히 해갈 할 수 없고 우리들의 부끄러움을 온전히 가려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이렇게 고단한 것입니다.
그런것으로 될 줄 알고 가려봤더니 아니야,
돈으로 가려 봤더니 아니야 여전히 목말라요
여전히 부끄러워요
명예를 얻어서 가려봤더니 여전히 부끄러워요
우리의 그 어떤 것으로도 가릴 수가 없음
그 공허함과 부끄러움은 십자가 앞에서만 메워지고 가려질 수 있음
보세요,
엄마가 빠져나간 자리는 그 어떤 것으로 가려도 가려지지 않고 그 어떤 것으로도 메워지지 않음
마찬 가지로 하나님이 빠져나간 자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메워지거나 채워지지 않음
오직
2. 부끄러움을 가리는 방법으로 자기 이외의 다른 존재들을 공격한다는 겁니다.
하나님도 공격함 ->
창3: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3: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3: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다른 사람 여자를 공격함
-> 당신 탓이요 -> 타락한 존재의 속성임( 차운전 뒤에서 박음 -> 급정거, 반대, 안전거리 미확보) 비판, 판단, 후욕....
이 모든 것들이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그러니까 걸핏하면 남을 욕하고, 비난하고, 판단하고, 시기하는 사람은 아직도 자기 스스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주 저급하고 불상한 사람인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셉시오.
인간의 공허함과 부끄러움은 스스로의 노력이나 힘으로 채워지거나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채워지고 가려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시는 겁니다.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과 스스로 만든 무화가 입으로 만든 옷을 거둬버리시고, 치워버리시고
하나님이 손수 지으신 가족 옷을 입히심으로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리셨어요.
인간들의 노력 열심 모두 거둬버리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은혜의 옷으로 갈이 입히신 거예요.
이것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의 그 어떤 행위로도 그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얶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의 옷을 지어서 입히신 것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가?
무죄한 짐승의 재물이 대신 죽고 그 재물의 공로로 옷을 입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힌트하고 있음
창3;21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기서 자기의 백성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남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벌겨 벗겨 죽으신 것은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대신 안고 죽으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제는 가죽옷 정도가 아닌 의의 힌 옷이 입혀진 겁니다.
가죽옷을 지어입힘을 받은 자의 삶
행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 하는 삶 -> 이것이 성숙
주인이 시킨 일이 뭐냐?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냐?
눅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10: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1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 때 나오는 것이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됨
그때 그곳을 이스라엘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레위인과 제사장이 지나감
그런데 그냥 지나감
그런데 그 자리에 이스라엘이 원수로 개취급도 안하는 사마리아인이 등장함
그런데 그 사마리아인은 그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치료를 정성껏 해주고 자기 돈을 털어 여관주인에게 맡김
그러면서 주인이 묻죠, 누가 선한 이웃인가? 당연히 사마리아 인이죠
그런 가서 그와 같이 하라‘ 무슨 말입니까?
율법사는 누가 내 이웃입니까? 물음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니가 선한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심
우리는 누구를 선택해서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한 이웃이 되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자라 되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마라아인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원수가 등장하는 겁니다.
너희들이 원수로 생각하는 사마리아인이 한 일을 생각해 봐라 그게 바로 가죽옷을 입은 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가요? 원수까지 포함한 모든 이들임
이 삶은 선악과를 따먹은 자들은 절대 이 삶을 살 수 없음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신 것입니다.
죽으심을 우리의 옛사람을 죽여 버리고 새사람으로 탄생시켜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제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삶이 요구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을 해도되고 안해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사랑을 하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안되는 것을 억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을 그 삶으로 끌로 갈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가입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하라는 것잉 아니라
하나님이 분명히 여러분들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사건과 상황들을 허락하셔서 끌로 가실건데 우리가 거기에 올바르게 반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었다라는 그 증거를 이 땅에서 무엇으로 보일 수 있습니까?
열심히 종교 행의하는 것
헌금 많이 하는 것
그런 것으로는 증거가 안되요
우리가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었다라는 유일한 증거는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 가 아닌가 인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이웃 사랑이 나오지 않음
하나님 사랑에서 이웃 사랑이 나옴
그런데 이런분들 게시죠
아무리 사랑 하려고 하는데 사랑이 안 나오는데 어떻게 사랑을 해요
아무리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해도 사랑이 안 나와요, 내 감정이 따라 주지를 않아요
내 감정이 내 의지를 안 따라줘요
그래서 이 감정이 따라 올 때 까지 내가 사랑하기를 유보하는 자기 있습니다.
아예 포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나는 안돼 나는 절 때 사랑할 수 없는 존재와 이렇게 포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감정이전에 의지이며 선택인 것입니다.
감정에 의해서 나오는 것은 라이크 좋아함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름니다.
물론 사랑의 한 요소로 감정이 들어가 있죠
그러나 사랑 안에는 감정과 함께 의지와 선택이라는 요소도 들어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세요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심
죄인들을 미워하심
우리 모두는 죄인 ->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미워하셔야 해요
그런데 그 미움이라는 감정을 타고 넘어 사랑이라는 의지가 발동이 된 것입니다.
그걸 십자가라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개를 좋아함 -> 그런데 개 밥을 잘 안줌, 목욕도 잘 안시켜줌, 병원에도 잘 안데려감, 귀찮으니까
개를 좋아하지만 개를 시중드는 것이 싫어서 개에게 내가 해야 할 바를 하지 않는 것
이것은 졸하는 하지만 사랑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수의사 -> 개를 좋아하지 않음
그러나 개를 정성스럽게 돌봄 – 이것이 자신의 의무이며 책임이기에 의지를 발동하여 선택을 하는 겁니다.
어찌보면 수의 사의 행위는 위선이며 의무이며 책임인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이것도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또 한사람‘ 개를 좋아함, 뿐 만 아니라 개를 너무 사랑함
감정과 의지가 다 들어가 있음
이것도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하고 우리 안에서 나와야 할 사랑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타락한 우리에게 1차적으로 요구한 사랑은 감정까지 포함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까지 포함은 사랑으로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 안됨‘
그래서 성경이 요구한 1차적 사랑은 선택적이며 의지적 부분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 하지 않고 원수를 좋아해라 그러면 큰 일남 – 안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니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음
지금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이 안 올라온다 할지라도 너희는 그를 사랑하기로 선택하라는 겁니다.
선택적 사랑을 하라
그러니 안 된다고 팽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선택하고 의지를 발동하여 사랑을 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정까지도 동원된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로 만 들어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원수를 갖다 들이되시는 겁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이 감정이 좋아질 때 까지 사랑하지 않을 거야 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이고 그래도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명령 했으니까 의지적으로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우리는
이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라고 말씀해 주셨음
그런데 왜 안 되는지..기도하고 몸부림치고.. 선택하면 살아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