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유업과 본질(2)
하나님의 유업과 본질(2)
본문말씀 : 로마서 8:14~17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 하나님의 유업은 우리 신앙의 본질 가운데 거할 때에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2.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하나님의 유업이 거두워집니다.
3. 우리가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면 하나님의 유업이 우리에게 회복됩니다.
1) 성경은 여러곳에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아오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 말3: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 스가랴 1:3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렇게 하라고 하면서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말이 반복된 것은 그만큼 강조한 겁니다. 우리가 하는 말의 신빙성은 그 사람의 인격만큼 믿을만합니다. 어떤 사람이 말했느냐에 따라서 그사람의 신빙성이 달려 있습니다. 지금 주님이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야 너희가 내게로 돌아와야돼!” 그만큼 강조하고 있고요.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면 나는 반듯이 네게로 돌아갈거야” 이것을 그만큼 강조하는 말입니다.
2)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중의 하나가 영적인 분별력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눈을 밝히셔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버린 상태에 있으면서도 전혀 모릅니다. 대표적인게 이사야 시대입니다. 이사야 1장에 안식인 월삭, 모든 대회와 절기를 정말 잘 드렸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규정한 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1장 4절에 너희가 나를 버렸다 나를 멸시하고 멀리하고 물러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해가 안됐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이 가려지니까 그런겁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새벽기도 한번도 안빠지고 주일날 하루종일 봉사하고 십일조는 기본이고 수많은 헌금을 드리고 금식을 밥먹듯이 하는 성도에게 당신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말하면 이해되겠느냐는 말입니다. 못알아 듣는겁니다. 그걸두고 성경은 이사야 6장에 너희가 보기는 보아도 보지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버렸다는 말의 의미가 뭔지를 모르니까 하나님을 버린줄을 모르는 겁니다.
의식이 중요하지만 의식은 본질을 담는 수단이기 때문에 의식이 아무리 많아도 그 삶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서 떠나 있으면 이 모든 의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겁니다.
집에서 마23장을 읽어보세요.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책망하는 장입니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하면서 화로다 했는데, 화로다는 말은 ‘Woe to you’, 화가 있을지라, 어떻게 보면 저주하는 것같아요. 예수님은 아무도 저주하지 않으세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지러 오셨습니다. 이 말은 그만큼 강력하게 돌아오라고 저들을 꾸짖는 겁니다. 일곱 번씩이나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의식은 정말 뛰어났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떠나니까 삶은 하나님의 법을 버린 것을 볼수 있습니다.
거기 나와있는 잔치의 상석에 앉기를 원하고, 랍비라 칭함을 받기 원하는 내용은 오늘날은 문제도 안되는 것들입니다. 이 얘기는 오늘날 저들보다 훨씬더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니까요! 분별력이 가려져 있는 겁니다.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하나님이 반복적으로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러면 주님께서 돌아오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말을 다른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러면서 이렇게 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임하시니 아침에 해가뜨는 것처럼 그만큼 확실하게 오실거라는 말입니다. 이 두 구절을 보면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다른뜻이 아니고 하나님을 아는 자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도 문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구절을 누구보다도 잘알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랬을 겁니다. 이렇게 분명하게 써있었거든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니까, 자기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안다고 자부했습니다.
롬2:15이하부터 보면 로마서를 쓰여질 당시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볼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예수님시대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어떻게 생각했을가를 약간 짐작해 볼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아래 진리와 지식의 모본이 들어있고, 그 율법으로 교훈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잘알고 누구보다 하나님을 자랑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야 말로, 어둠가운데 있는 자들의 빛이요, 영적으로 소경된 자들을 위한 인도자요, 영적으로 어리석고 어린아이를 위한, 오늘날로 말하면 교수라고 자부했습니다. 이들인데 이 구절을 읽을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전혀 생각안했습니다.
*호세아4: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라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이런구절있을 때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했을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로 돌아가자, 그 시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고, 율법을 잊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왔다”. 너무나 당연히 생각을 했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써 있을 때 바리새인들은 이 구절을 너무너무 잘 알았을 텐데, 이 구절을 읽을 때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호세아시대의 자기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사야가 너희에 대하여 잘 말하였도다, 이사야가 너희에 대하여 잘 말하였도다”, 이것만 보아도, 이사야 시대 너희 조상이나, 너희나 정확하게 영적으로 같은 상태입니다.
성경전체에 보시면 그들에게 다가오는 심판을 말씀하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서기70년에 예루살렘 전체가 멸망합니다. 똑같은 상황입니다.
성경을 알면서도 왜 모르냐면,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지니까 하나님의 관점이 가려진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 하더라도 그들은 성경적인 지식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율법적인 지식, 이 지식이 없어서 조상들이 망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율법적인 지식은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수단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성경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말하는 겁니다. 성경 여러곳에 나옵니다.
*요한일서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여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우리의 신앙을 단 한마디로 사귐이라고 표현합니다. 가장 먼저는 하나님과의 사귐, 교제입니다.
요한일서는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를 믿으면 우리 삶속에 반듯이 나타나야할 신앙의 열매 세가지를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세가지가 거룩한 삶, 순종하는 삶, 사랑하는 삶입니다.
이말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한두번 죄를 지었다고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요한일서에도 너희가 죄 없다하면 거짓말하는 자라고 이렇게 써있습니다. 이말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안믿는 사람처럼 패턴이 세상의 죄와 정욕을 따라 사는 삶이면, 그 사람은 예수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를 믿어 거듭난 사람이면 우리속에 하나님의 영, 성령이 와 계시게 되어있는데, 성령이 오셔서 거하시면 죄를 짓는 것이 삶의 패턴인,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중하나 열매를 말하면서 ‘우리가 만일 사귐이 있다하고’, 다른말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다른말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고, 신앙이 있다고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려니와’
또한 열매에 대하여 말하면서 *요한일서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절에 그를 아노라 하고, 이말을 1장 6절처럼 번역하면, 똑같은 형태입니다. 우리나라 번역이 이렇게 되어있는 겁니다. 4. 만일 우리가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두 개를 보시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런 열매들이 안나타나면 진정한 의미의 구원받는게 아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첫 번째는 예수를 믿는다는 말대신에 “우리가 사귐이 있다 하고”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똑같은 말을 2장에서는 ‘우리가 주님을 안다고 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이렇게 말함으로써 사귐을 다른말로 표현하면 주님을 안다는 겁니다.
성경전체로 볼 때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하나님에 관해서 성경적으로 교리적으로 안다는게 아니라, 그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올바른 지식이 없으면 신비주의에 빠집니다.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개인적인 교제를 말합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그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을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존재를 다해 사랑하는 삶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그렇게 거하면 하나님의 목적과 의중을 알아 거기에 삶을 드리게 되어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의식을 하면서도 자기 목적을 위해 살며, 하나님은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서, 자기 원하는 것 해달라고 많은 종교적인 의식할수 있습니다. 이거는 철저하게 타락한 기복신앙입니다.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린겁니다.
포도나무 교회 지체들은 이런설교를 많이 들으니까 거기에서 많이 벗어나려고 해요. 그러면서도 어떻게 생각하느냐, 심지어 사역만 하더라도 우리 사역을 하면서 우리 목적을 추구하면서 이 일이 잘되도록 하나님의 길을 구할려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 중심적인 삶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만군의 여호와가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그 큰 사랑을 알게되면, 그분을 존재를 다해 사랑하기를 원하게 되고요. 그 중에 같이가는게,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원하고 거기에 삶을 드리는 겁니다.
기도만하더라도 성경에 나오는 진정한 기도는 모세건, 다윗이건, 다니엘이건, 예수님이건, 구약이건, 신약이건 하나님의 사람들의 기도는 주님을 사랑하면서 주님의 의중에 있는 그것을 알고 그 뜻이 이루어 지도록 구하는 거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그 시대를 향한 엘리야의 기도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목적에 그들은 드린자였습니다. 엘리야 속에 하나님의 질투가 있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일들을 위해 그가 드려진 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그걸붙들고 기도한 자들입니다. 이게 기도입니다.
그리고 돌아가야 생명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제일 잘 아십니다. 제 자신보다 더 잘아시는 분이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최선이 뭔지를 압니다. 그분은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실만큼 여러분을 위해 내어주실만큼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최선입니다. 여러분이 그 자리로 돌아가야 그분의 최선의 삶이 여러분의 삶속에 이뤄집니다. 그게 여러분에게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이웃초청잔치에 심리학이나 상담전공하는 분들이 와서 강의 할때마다 선명히 보여지는게, 그분들은 세상적인 상담적인 가치관에서 하는 겁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큰 목표는 행복이랍니다.
그런데 보여지는게, 여러분이 여러분의 행복을 추구해서는 절대로 행복할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존재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추구하고, 주님의 목적에 삶을 드려서, 그렇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신앙의 본질이라 표현하는 주님의 친밀한 교제가운데 거하면 그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행복은 부수적인 산물로 주어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말씀이 “마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3)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돌아오십니다.
그분이 돌아오시면 그분이 생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유업이 넘치게 됩니다.
삼상 7장의 미스바 성회, 영적으로 타락했다가 하나님께로 돌이키니까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에게 회복됩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로 돌이킨 사건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오늘날 잘못 이해해서 미스바 성회란 이름으로 모여서 통성으로 기도하고, 나라의 죄와 우리의 죄를 회개하면 회복될줄압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떠나 있으면서 하나님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에 있으면서 삶은 하나님의 법을 버린채 있으면서 그런 자리에 모여서 기도하고 금식하고 몇가지 생각나는 죄를 회개한다고 해서 회복되느냐? 절대로 그렇게 안됩니다. 그게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스바 성회의 핵심은 그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 삼상 7:1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 영어 NIV성경에는 mourned and sought after the LORD, 그들이 탄식하고 하나님을 찾았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찾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말입니다.
엘리시대에 언약궤 가져오면 이길 줄 알았지만. 그들은 그렇게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언약궤 가져오면 이길줄 안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그들의 삶속에 걷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그들의 길을 지도하시며 인도하시는게 그들의 삶속에 걷힌지가 20년이 지났어요. 그들은 그것이 인식되어지면서 하나님앞에 절박하게 주님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속에 영광의 임재로 함께하시며 여러분의 삶을 지도하고 인도하고 계십니까?
문제는 그렇지 않는데도 여러분이 그 사실도 깨닫지 못한다면 더 나가서 그렇게 하고 계시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그 절박함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가 여러분의 삶속에 회복되어서 그분이 여러분의 삶을 실질적으로 지도하시고 인도하시는 그 삶이 되지않으면 안되기에, 그것 때문에 절박함마져 없다면, 여러분은 이 시대보다 훨씬 못합니다.
이 시대는 블레셋의 나라에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상처만 가득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의 삶속에 걷혀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그 필요성을 절박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탄식하는 가운데 주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출발점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핵심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거기에 정직하게 동의하는 겁니다. 이게 스스로 겸비함입니다. 머리로 아는게 아니라 깨닫는 겁니다. 마음의 성령의 조명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떠나 있으며,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 있는가를 깨닫는 겁니다. 이들은 깨달았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만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돌이킬려면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리로, 하나님만 섬기는 자리로 가야합니다. 하나님과 동시에 섬기는 것이 우상입니다.
*삼상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바리새인들이 이 구절을 읽었을때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을겁니다. 그들이 우상을 버리는게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자기들도 이들처럼 우상이 가득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상상할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짐승을 쫒아내시고 동전바꾸는 테이블을 엎어버리신걸 보면 그들은 하나님께 동전을 드릴 때 형상이 없는 동전을 드렸던 것을 볼수 있습니다. 시저의 형상이 있는 동전에 절하는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형상을 없애기 위해서 동전까지 바꿔서 드렸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속에 우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보세요.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눈이 가려지면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지, 무슨 말인지를 못알아 듣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자기 자신, 자기 명예, 자기 돈, 자기 목표, 잔치의 상석에 앉기를 원하고 랍비라 칭함을 받기를 원하고, 돈을 사랑하고, 똑같이 우상이 있었습니다. 형태만 다른 겁니다.
*에스겔 14:3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신앙가운데 있으면,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주의 목적에 우리 삶이 들여지고, 그분만 의지해 섭니다. 여기서 떠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말로는 하나님 의지한다고 하지만 다른 것을 의지하고, 돈을 의지하고, 다른 것을 추구하고, 다른것 때문에 자부심이 생기고, 다른것 때문에 힘이 솟습니다. 하나하나가 철저하게 타락한 우상입니다. 이 우상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오늘날 성도들 삶속에 우상이 너무너무 가득합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바리새인들을 그렇게 많이 책망하신 내용을 보면, 어떤 것은 목회자나 성도들에게는 문제거리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처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눈이 가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돌아가니까 주님의 생명이 그들에게 회복됐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들의 예배를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신앙과 삶과 예배는 절대 안나눠집니다.
이사야시대의 화려한 예배를 하나님이 증오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때에는 송아지 한 마리 잡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기뻐 받으셨습니다. 수가 많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게 아니고요. 돈 많은 사람이 있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게 아니고요. 여기에 세상적으로 지휘가 높은 사람이 온다고 기뻐하시는게 아닙니다. 그것도 다 귀할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떤예배를 기뻐하시냐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그렇게 주의 목적에 삶이 드려지고, 주님의 길을 따라 행할 때 그 예배는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거예요.
이렇게 신앙의 본질로 돌이키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예배를 받으시고요. 원수를 물리치십니다. 억압과 압제에서 자유케 하십니다. 엘리시대는 이들을 완전히 박살났는데, 또 쳐들어 왔습니다. 이때는 하나님이 돌아와 계시니까 하나님께서 천둥과 번개를 쳐서 다 멸하셨습니다. 평강이 있었고요. 이들을 보호하셨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이 블레셋에 빼앗겼던 성읍중에 단 하나를 빼놓지 않고 모두다 회복되게 하셨습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유업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이 시대에는 이게 필요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여러분을 부르고 저를 부르신겁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하나님께서 돌아오시기 때문에 그분이 생명이라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유업이 회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