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설교/교회회복다섯기둥
4. 세 번째 기둥 성령의 사역
발의무리
2018. 2. 6. 10:13
세 번째 기둥 성령의 사역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성령의 능력만 받으면, 교회는 저절로 세워지고 성장할 줄로 생각합니다. 또한 성도들은 성령의 능력만 받으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고, 자기는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의 능력만 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특히 다가오는 부흥을 담을 수 있는 ‘새 부대의 교회’는 절대로 세워질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은 균형잡힌 성령의 사역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몇가지 요소들이 필요합니다.
먼저, 십자가 복음과의 조화가 필수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성령의 능력으로 인하여 교회가 분열되고 나누어질 수 있고, 개인은 타락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에스겔 37장의 예언이 성취될 것을 말했는데, 저는 이 두 가지의 조화를 통해서 그러한 일이 나리라고 믿습니다. 에스겔 37장을 보아도 그 마른 뼈들을 살리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대언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저는 십자가의 말씀이요, 균형 잡힌 성령의 사역이 바로 거기에 나오는 생기의 역사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저는 실제로 저의 그러한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일어나고 있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은사와 열매의 조화가 매우 중요합니다. 은사는 성령께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때로는 매우 강력하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은사는 절대로 그 자체가 그 사람의 신앙이 성숙한 증거도 아니고, 또 사람을 성숙케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은사와 조화가 필수적인 것입니다. 은사는 주어지는 것입니다. 특히 사모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예배당에 들어올 때 나타나지 않던 은사가 돌아갈 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는 그렇지 않습니다. 열매는 길러지는 것입니다. 열매는 지속적인 성령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그분의 인도를 깨닫고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싦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 길러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은사를 가지고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가지고 심판을 받습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인 이해와 실천 또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령의 은사로 인하여 많은 혼란을 겪고 있던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 사이에서 이 점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우리들이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역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오늘날 교회 안에 세워져야 할 균형잡힌 성령의 사역이 어떠한 것인가를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역이 오늘날 교회 안에 정착되어야 할 성령의 사역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과 사역의 본보기요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4 복음서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오묘함이라고나 할까요? 복음서마다 예수님의 사역의 특정한 면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네 복음서가 강조하고 있는 면을 모두 합하면,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예수님의 사역이 전반적으로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이 권세가 뒤받침 되는 말씀의 사역, 즉 선포(proclamation)와 능력행함(demonstration)의 사역이었던 것과 그것으로 인하여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무리들이 따랐던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첫 번째 사건부터 강조되어 있습니다. "(21)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사람에게서 나오라 !'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 [막1:21-28]
예수님의 사역이 권세있는 말씀의 사역, 즉 말씀의 선포와 능력행함의 사역이었다는 강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시고 또 보내신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 [막3:13-15] "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 [막6:7-12]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모든 제자들에게 내리신 명령과 제자들이 나가서 그 명령대로 순종한 내용에도 나와 있습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 [막16:15-20]
마태복음도 마가복음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사역이 말씀의 선포와 능력 행함의 사역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그 사역이 하나님 나라 사역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신 왕이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는 어느 복음서보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이 많습니다(13장, 16장, 20장 참조).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을 공생애에 대한 요약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거기에 보면 이 점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 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마4:23-25).
그런데 마태복음의 구조를 보면, 우리는 이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요약으로 시작한 마태복음은 다음의 다섯 장에 예수님 사역의 두 부분을 대표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5장에서 7장 사이에 나오는 소위 산상수훈은 단순한 가르침의 집합이 아니요, 하나님 나라의 삶에 대한 대표적인 가르침이요, 그 다음 두 장에 나오는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 중 대표적인 것을 골라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장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요약으로 그 부분을 종결하고, 10장에 제자들을 보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똑같은 사역을 위해서 보내집니다.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10:1,7-8].
이러한 문맥을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삶에 대한 중요한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촉구하고 계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얼마나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것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가치관과 삶의 방법을 가진 삶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대표적인 구절이라고 부르는 구절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우리가 이렇게 하면 이러한 복을 받는다는 식의 ‘볼걸 복’ 구절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삶을 나열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우리들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삶의 자세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럼, 그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어떠한 것입니까? 이 구절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 백성은 심령이 가난한 자요, 애통하는 자요, 온유한 자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요, 긍휼이 여기는 자요, 마음이 청결한 자요, 화평케 하는 자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를, 위로를,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을, 채움 받을 것을,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을, 하나님을 볼 것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을,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큰 상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 행함에 대해서도 중요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과 9장은 하나님 나라의 능력 사역을 열거하되, 각 분야별로 가장 극적인 사건들을 본보기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감당하신 그리고 아울러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능력 사역의 영역은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죄의 용서,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가난과 억압적인 사회구조로부터의 자유, 마귀 세력의 억압과 지배로부터의 치유,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입니다. 물론 그 중에서도 죄의 용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에 기초하여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가지고 죄 용서를 선포함으로서 그 사람의 영을 치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역시 예수님의 사역이 말씀 선포와 능력 행함의 사역이었던 것과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었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그것에 덧붙여서 그 예수님의 사역이 성령의 능력에 의한 사역이었던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선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에 앞서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으셨는데,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님 위에 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3:22). 물론 이점은 디른 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곧 바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는데 그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눅4:1]
또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광야에서 돌아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사건을 기록하면서 "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눅4:14]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셨다는 사실에 누가복음의 강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이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 사역의 첫 번째 사건에도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눅4:16-21] 이 구절은 또한 예수님 사역의 성격과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역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점은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신 사건과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내용중에도 매우 명백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신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제자들이 나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눅9:1-2,6]. 그리고 예수님의 대위임령에 대해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눅24:47-49]. 우리는 특히 예수님께서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기다리라는 이 명령을 다른 사람들도 아닌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분으로부터 모든 훈련을 다 받은 제자들에게 하셨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 제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부터 배웠습니다. 그것도 오늘날의 제자훈련처럼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한두 시간 훈련받은 것이 아니라, 3년 동안 날마다 하루에 24시간을 그분과 살며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직접 지켜보고, 또 예수님의 보내심을 따라 실습도 해가며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먼저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명령은 누가복음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 1장으로 이어져서, 거기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4,8]. 그리고 그것은 사도행전 2장으로 이어져, 거기에서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의 능력을 받고, 나가서 예수님이 감당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합니다. 이처럼 누가는 예수님께서 감당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그리고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성령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여기까지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면이 부족합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역까지 합해져야 예수님의 사역을 전반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특히 예수님께서 사역을 감당하신 방법에 대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절은 5:19-20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예수님은 아무 것도 임의로 행치 않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고, 그것만을 행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순간순간 하나님께 민감하여, 그분이 말씀하신 것만 행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사 하나님의 행하시는 모든 일을 예수님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순간순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철저하게 하나님께 혹은 하나님의 성령께 민감하여 그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의 문맥을 살펴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사역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좀더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베다스다 연못가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날 그곳을 지나가시다가, 그곳에 모여있던 사람들 중에서 38년 동안 병상에 누워있던 한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고 해서 예수님을 핍박하고 대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고치시면서 일어나 누워있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안식일을 범한 처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이 방금 하신 행동을 설명하시면서 위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기에서 우리는 38년 된 그 병자를 고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역을 종합해 볼 때, 예수님은 그 때 그 병자에게 일어나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말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던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이 그렇게 하면 그 주위에 있는 많은 바리세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대적하고 나설 것을 분명히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에 있어 그러한 것들이 결단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순종하시는 것이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관한 그 당시 종교적인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만을 어길 따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단호한 의지는 바로 앞에 나오는 예수님의 답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요5:17].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날 그 많은 환자들 중에서 딱 한 사람만을 고치신 이유도 예수님의 사역이 이처럼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 가운대서 나온 것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예수님의 사역이야말로 오늘날 교회 안에 정착되어야 할 성령의 사역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 속에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역의 성격, 그것을 감당하기 위한 필요한 요소들, 감당할 수 있는 방법, 성령님과의 교제와 능력의 조화 등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