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복음의 길
2.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복음의 길
우리의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에 의한 삶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중심으로 한 참 신앙 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참 신앙 위에 서야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고, 성령님의 조명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고, 또 믿음의 길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거짓 신앙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이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6). 이 말은 우리의 신앙에 다른 복음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에는 다른 복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다른 복음’은 복음의 모조품으로서 거짓 복음을 말합니다. 이 거짓 신앙은 참다운 신앙과 매우 비슷한 모양을 가지고 있어서 성도들이 속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로써, 거기에는 어떠한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나 성령의 진정한 역사가 없습니다. 반대로 그것은 오히려 성도들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게 만들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만들어, 멸망으로 치닫게 만듭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탄이 교회를 넘어뜨리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큰 전략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거짓 신앙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초대교회의 거의 모든 교회들이 이 사탄의 전략에 넘어갔던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거의 모든 서신서에서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갈라디아서를 토대로 거기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중심으로 한, 참 신앙과 율법주의 거짓 신앙의 특징들을 대조해 보면서, 우리들이 참다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설 수 있는 방법을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상세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 나라에 이 거짓 신앙의 특징들이 가득한 시점에서, 이 장은 우리들에게 참다운 신앙의 길에 서기 위한 매우 중요한 안목을 제공해 줄 것입니다.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근원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은 근원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선 참 신앙은 당연히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바울은 이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
반면에 거짓 신앙은 사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말씀 드린 것처럼,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소위 다른 복음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갈 1:6). 그러나 실재로 다른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을 빙자한 거짓 복음에 불과합니다. 바울은 바로 그 다음 절에서 이점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갈 1:7).
그리고 그 거짓 복음의 뒤에는 사탄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1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여기를 보아도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여기에서 ‘꾀다’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 거짓 복음이 이브를 꾀던 것과 같은 사탄의 역사인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창 3:13 참조).
그런데 이 점은 고리도후서에 보면 더욱 명백합니다. 그 당시 고린도교회도 갈라디아교회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이 거짓 신앙의 영향력이 큽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4). 그리고 나서 바울은 그것이 사탄의 역사였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15). 그러니까 이 말은 그 거짓 사도들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과 전혀 다른 예수를 전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다 ‘다른’이라는 헬라어 단어를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헬라어에는 ‘다른’이라는 단어가 둘 있습니다. 같은 종류의 다른 것을 말하는 ‘알로스’와 전혀 다른 종류의 다른 것을 말하는 ‘헤테로스’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른 예수’의 다른은 ‘알로스’이고,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의 다른은 ‘헤테로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나사렛 예수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들은 오직 믿음에 의한 복음을 교묘하게 율법주의 신앙으로 바꿔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것은 전혀 다른 복음이 된 것이고, 결국 그것은 전혀 다른 영인 사탄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았든지 혹은 몰랐든지 말입니다.
추가적으로, 이 거짓 신앙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 1:8-9).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갈 5:10). 이 얼마나 심각하고도 무서운 말씀입니까! 바울이 사람들에게 저주를 명한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두 차례에 걸쳐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명하고 있습니다. 이 거짓 복음은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끌고 가는 사탄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전쟁
이 거짓 신앙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것이 참다운 복음을 극렬하게 대적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영적으로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 거짓 신앙은 사탄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이 거짓 신앙과 참 신앙 사이에 벌어지는 치열한 전쟁을 이삭과 이스마엘의 예를 들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 바울은 이삭을 참다운 복음에 그리고 이스마엘을 ‘다른 복음’ 곧 율법주의 신앙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하나님의 역사로 태어났을 뿐 아니라, 참다운 후사요 아들이었듯이, 참다운 복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것이고, 성령에 의한 것일 뿐 아니라, 참다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자유케 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이스마엘은 인간의 방법으로 종에게서 태어난 자였듯이, 거짓 복음은 육신적인 것이요 사람을 종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갈라디아서는 이 거짓 복음이 참다운 복음을 어떻게 대적하고 핍박하는 가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 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2-23), 28-29). 그리고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자신에 대한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의 핍박에 대해서도 이얼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며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갈 5:11). 이러한 대적과 핍박은 또한 예레미야나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삶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었던 반면, 그분들의 삶과 사역을 가장 핍박하고 대적한 자들은 바로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었고, 그 신앙 체계의 배후에는 결국 사탄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복음의 역사를 대적하는 사탄의 가장 큰 공격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율법주의 신앙을 통해서입니다. 교회가 율법주의 신앙에 빠지게 되면, 복음의 능력이 무력화되고,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와 능력은 그곳에서 끊깁니다. 그리고 율법주의 신앙은 참다운 복음과 매우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성도들은 율법주의 신앙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러한 사실을 모를 뿐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히려 자신들은 세상에서 가장 신앙생활 잘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매우 심각하고도 안타까운 사실은 바로 이 거짓 신앙체계가 오늘날 우리 가운데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들이 그 내용을 정확하게 살펴보지 않는다 할지라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다운 복음에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있는데, 오늘날 성도들의 삶에는 참다운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의 역사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거짓 신앙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것이 매우 빨리 오염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누룩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 5:7-9). 이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거짓 신앙을 바리새인의 누룩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리새인의 누룩은 마태복음에 의하면 바리새인의 교훈이었습니다.(마 16:6-12). 그러나 누가복음은 다시 이것을 외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눅 12:1). 이렇게 볼 때, 이것은 단순히 바리새인들이 가르친 가르침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르침의 자세 혹은 신앙 체계 곧 율법주의 신앙을 말하는 것임을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여러 차례에 걸쳐 경고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거짓 신앙은 순식간에 전체를 오염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의 모든 초대 교회들이 그렇게 쉽게 오염되는 것을 보아도 이 거짓 신앙 체계가 얼마나 빨리 성도들을 오염시키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이 거짓 신앙의 중신에는 인본주의적인 사고가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똑같은 사고를 가진 사람들에게 순식간에 퍼집니다. 이것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두명 중 여호수와 갈렙을 제외한 열명에 정탕꾼의 인본주의적이고 부정적인 신앙이 어떻게 순식간에, 그야말로 순식간에 육십만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오염시켰나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이 거짓 신앙을 철저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도 이 점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게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갈 4:30-31).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들이 갖는 유업안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와 성령의 놀라운 역사 그리고 주님 안에서 참다운 자유 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이 율법주의 신앙이 철저하게 제거되어야, 그 교회는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가 넘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특징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두 가지 종류의 신앙 체계가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도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참 신앙
| 거짓 신앙
|
십자가의 복음 | 율법주의 신앙 |
오직 믿음 | 자기 의 |
하나님의 은혜 | 인간의 노력 |
성령님 | 육신 |
자유함 | 노예됨 |
약속 | 율법을 지킴 |
두 신앙체계 사이에 존재하는 갭
두 신앙 체계 사이에 그어 놓은 경계선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먼저 이 둘 사이에는 절대로 화합할 수 없는 갭이 있습니다. 이 둘은 근본적으로 다른 신앙 체계입니다. 우리들이 위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 사이에는 어떠한 특징도 공유될 수 없으며, 동시에 그 중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즉, 한 사람이 양쪽에 다 속해 있을 수 없으며, 그 중간에 속해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는 반드시 둘 중의 하나에만 속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점이 바로 우리 신앙에 있어서 심각한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부분적으로라도 거짓 신앙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완전히 참다운 신앙에서 끊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참 신앙의 모든 특징들은 우리에게서 걷히게 되고, 동시에 거짓 신앙의 모든 특징들이 우리에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율법주의 신앙은 우리의 삶에서 참다운 복음을 헛되게 만듭니다. 이점이 바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그토록 심각하고 그리고 강하게 갈라디아 교인들을 경고하고 또한 권면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갈 3:3-4).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노라”(갈 4:11).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3).
반면에 같은 란의 특징들은 같은 신앙체계의 특징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특징들 사이에는 서로 매우 밀접하고도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습니다. 한 구절을 대표로 들면 이 점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만일 그 유럽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갈 3:14, 16-18).
두 신앙 체계의 특징들이 의미하는 바
두 신앙 체계 사이에 존재하는 갭을 이해할 때,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두 신앙 체계의 특징들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중요하고 또한 많습니다. 특히 오늘날 교회 안에 율법주의 신앙의 특징들이 가득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와 성령의 역사가 교회 안에 회복되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많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율법주의 신앙에는 어떠한 진정한 성령의 역사도 없습니다.
먼저 무엇보다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 위에 믿음으로 굳게 서지 않으면, 거기에는 어떠한 진정한 성령의 역사도 있을 수 없습니다.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어떠한 진정한 성령의 역사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와 율법주의 신앙은 서로 다른 신앙체계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이 바로 오늘날 한국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참다운 성령의 역사가 거의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그 단어조차 찾아보기 힘든 상태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우리에게서 걷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들은 성령의 진정한 역사가 교회에 회복되기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작정기도를 해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금식을 해보기도 합니다. 목회자들은 여기저기 많은 세미나에 좇아다녀 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상태는 크게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가운데 율법주의 신앙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 신앙 아래에서는 우리들이 아무리 많은 종교적인 헌신과 노력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와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삶만 보아도 이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철저하게 십일조 했습니까? 얼마나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켰습니까? 안식일을 물건을 사는 것은 그들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그들은 얼마나 철저하게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였습니까? 얼마나 철저하게 기도 시간을 지켜 기도했습니까? 얼마나 철저하게 구제했습니까? 얼마나 철저하게 성경을 연구하였습니까? 그들은 누구보다 종교적으로 헌신된 자들이었습니다. 누구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성령의 역사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성령의 역사를 대적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요 5:37-38).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성령의 참다운 역사가 회복되기를 원할진데,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 가운데서 율법주의 신앙을 철저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그것을 제거하지 않고는 어떠한 헌신과 노력을 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다 허사입니다.
반면에 십자가의 복음 위에 믿음으로 기초하게 될 때, 거기에는 진정한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 둘은 같은 신앙 체계에 속한 특징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시급한 것은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 위에 믿음으로 굳게 서는 것입니다. 앞장에서도 살펴보았습니다만,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들이 구원받을 때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뿐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의 날마다의 삶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입니다. 성화를 위해서도 필수적이고, 육신과 세상을 이기는 삶을 위해서도 필수적이고, 사탄의 공격을 대적하는데 있어서도 필수적이고, 열매맺는 삶을 위해서도 필수적입니다.
율법주의 신앙에는 진정한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 살펴본대로, 우리의 신앙은 모든 면에서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구원을 얻는 것도, 열매를 맺는 것도,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도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치유를 받는 것도, 기도 응답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을 얻는 것도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어떠한 진정한 믿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과 율법주의 신앙은 다른 신앙 체계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참다운 복음의 특징 중 어느 하나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에 의한 삶을 살려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에만 서야 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려면 반드시 믿음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니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요 5:45-47). 바리새인들은 날 때부터 모세의 가르침을 배우며 산 사람들입니다. 그야말로 그들은 모세의 글 모든 내용을 믿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삶을 모세의 글에 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내용대로 실천하려고 애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모세야말로 그들에게는 소망의 반석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에게 모세를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다니요. 이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아마 예수님을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책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그들은 실제로 모세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동방박사들의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예루살렘에 찾아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특히 헤롯이 가장 당황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나셨다는 말은 메시야가 태어나셨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그 당시의 이해로 볼 때, 헤롯의 자리는 위협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롯은 서기관들을 불러 메시야가 어디에 태어나게 되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을 받는 서기관들은 미가의 예언을 줄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기초하였습니다. 오늘날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사랑 장이 어디냐고 물으면 “저요, 저요, 고린도전서 13장이요”라고 대답하듯이,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찾아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베들레헴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고 가슴 아픈 사실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줄줄 성경구절을 외워대며, 그 모든 내용을 다 믿는다고 주장하던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베들레헴을 향해 떠날 때, 그들과 함께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메시야를 기다린다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 모세의 모든 글들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실로 그 말씀들을 믿었더라면, 진실로 그토록 메시야를 기다렸다면, 그들은 동방박사들 보다 앞장서서 베들레헴으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설령 동방박사들의 말이 틀릴지 모른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박사들에게 자초지종을 자세하게 물었을 것이요, 또한 가서 확인해 보았을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셨다는 데요,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찾아왔다는 데요, 그런데 그들은 진정한 관심도 또한 그에 대한 반응도 없었습니다. 실제로는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자세는 사복음서 전체에 걸쳐 나타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관한 사실들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말씀을 이론적으로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조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성령의 조명이 없기 때문에 어떠한 참다운 믿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예, 형식과 모양은 가득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나름대로의 헌신도 가득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삶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종교적인 모양과 나름대로의 헌신이 가득했습니까? 그러나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절대로 진정한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오늘날 성도들은 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거기에서 우리의 모든 삶을 계산 받을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진실로 그 사실들을 믿는다면, 오늘날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현재 살고 있는 것처럼 살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목회하는 것처럼 목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믿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진실로 믿는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삶 속에 나타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실로 믿음이 부재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가운데 널리 퍼져 있는 이 율법주의 신앙 때문입니다.
율법주의 신앙으로는 육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아무리 종교적인 헌신이나 형식이 가득할지라도 절대로 육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신앙체계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도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여러 차례 말씀드린 대로, 그들은 신앙적으로 매우 헌신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매우 큰 열심과 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오늘날 십일조를 하되, 다른 사람에게 받은 선물까지 값으로 환산하여 십일조하고, 주일이면,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무것도 사지 않고, 헌금은 토요일에 은행에 가서 새 돈으로 바꿔 미리 준비해 놓고, 주일이면 옷을 반드시 깨끗하게 다려서 입고 교회에 가는 열심과 헌신도 그들의 헌신에 비하면 초보에 불과할 만큼 그들은 나름대로 큰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는 온갖 죄악이 가득했습니다. 그들 속에는 온갖 탐심과 세상을 사랑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여러 차례에 걸쳐 회칠한 무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인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과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3-28). 이처럼 율법주의 신앙으로는 아무리 많은 헌신과 정성을 가지고도 육신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는, 교회 안에는 성도가 많으나 세상에는 성도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루는 제가 중보기도 하는데, 하나님께서 오늘날 교회 안에 금송아지 우상이 가득한 것에 대해서 회개케 하셨습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성경은 누구에게 복종하든지 그것의 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의 종이요, 죄에게 순종하면 죄의 종이라는 말입니다(롬 6:16). 그런데 우리는 돈을 버는 일과 관련해서는 교회 안에서 직분이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대부분 세상의 방법을 따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간곳이 없습니다. 돈의 법칙에 순종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말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돈을 우리의 신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행동입니다. 아론의 금송아지 보다 더 심한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참으로 성도들 속에 탐심이 가득합니다. 세상 사랑함이 가득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율법주의 신앙의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기도가 부족합니까? 우리 가운데 헌신이 부족합니까? 오늘날은 그나마도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만, 우리 나라 교회에는 어느 나라보다 더 많은 기도와 헌금이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만큼 많은 종류의 기도와 많은 종류의 헌금이 있는 나라도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종류의 기도와 헌금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율법주의 신앙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그 신앙 체계에서는 어떠한 종교적인 헌신과 노력으로도 우리의 육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기 위해서는 자기 의를 의지하는 것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앞장에서 이 점을 상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율법주의 신앙 혹은 자기-의(self-righteousness)는 전혀 다른 신앙체계에 속한 특징입니다. 그 둘 사이에는 공감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서기 위해서는 율법주의 신앙과 자기-의(self- righteousness)를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라도 자기-의(self-righteousness)를 의지하여 서면, 우리는 참다운 신앙의 모든 특징들과는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는 상관이 없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게 되고, 믿음에 의한 삶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리고 반대로 같은 거짓 신앙체계의 특징만이 남게 됩니다. 다시 율법을 지키되, 우리의 노력으로 모든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영혼이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그만큼 율법주의 신앙과 자기-의(self-righteousness)가 무서운 것입니다.
자기-의(self-righteousness)는 매우 미묘한 것으로써,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앞장에서 우리는 할례의 경우를 살펴보았습니다만, 여기에서는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또 하나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날을 지키는 경우입니다. 갈라디아서 4:10-11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노라.”
초대교회는 처음에는 날마다 모였습니다(행 2:46). 그러다가 나중에 교회가 예루살렘을 떠나 여러 도시로 퍼쳐 나가면서 성도들은 안식 후 첫 날인 주일날 모이기 시작했습니다(행 20:7). 그리고 가장 나중에 쓰여진 신약성경인 요한계시록에 보면, 주일날을 공식적으로 ‘주의 날’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계 1:10).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한 날을 다른 날보다 귀하게 여기건 혹은 그렇지 않건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혹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롬 14:5-6). 물론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한 날은 안식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안식일이건 혹은 주일이건 그 의미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오늘날 우리들이 주일을 소중하게 지키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까? 또한 위에 나오는 갈라디아서 4:10-11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는 이점도 할례의 경우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오늘날 우리들이 주일날 교회에 모여서 서로 교제를 나누고, 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일 예배 뿐 아니라, 모든 성도의 교제와 또한 모든 예배가 다 중요합니다. 특히 모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예배의 본질이요, 예배의 형식은 그 본질을 위한 외형이요 수단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들의 주일 예배가 ‘주일을 지키는’ 개념으로 바뀌어 버리고, 그 ‘주일을 지키는’ 것이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조건으로 되어 버린다면,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기는 다른 사람보다 더 ‘주일을 잘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더 의로운 자요 또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자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신앙적인 의무로서 ‘주일을 지키지’ 위해 주일날 교회에 나온다면, 이것은 심각한 율법주의요, 그 결과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엄청납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배는 참다운 예배가 아니라, 뜰만 밟고 지나가는 예배에 불과합니다. 또 이러한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어떠한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도 그리고 역사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예배 뿐 아니라, 이러한 신앙적인 자세를 가진 사람에게는 어떠한 하나님의 은혜도, 어떠한 십자가의 능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사실 아무리 종교적인 모양과 헌신이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결국 자기의 의를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예배에 나올 때에도 오직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이 흘려주신 보혈의 공로만을 의지하여 겸손한 마음으로 그러나 한편으로 담대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히 4:14-16).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와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 인하여 감격하며,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다운 예배입니다.
우리들이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십자가의 공로뿐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모든 면에서 우리 자신의 의를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율법주의 신앙에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율법주의 신앙에는 억압이 있습니다. 율법주의 신앙은 노예로서의 삶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율법주의 신앙을 종의 종교로 비유하고 잇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 종인 하갈의 몸에서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없이 육신을 따라 태어난 것 같이, 율법주의 신앙은 사람을 종으로 만드는 종교입니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갈 4:22-24).
우리들은 이 전에 우상에게 노예된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예수 밖에 있는 자들은 되와 사탄에게 노예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아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1:1-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그런데 오늘날 안 믿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면, 자기들은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를 구속받기 싫으니까 안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믿는 사람들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야 되니까 할 수 없이 참고 견디지, 예수를 믿는 신앙생활이 너무나 많은 면에서 구속받고 제약받는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말이 맞습니까? 성경의 말씀이 맞습니까?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말이 맞습니까? 물론 당연히 정답은 성경의 말씀이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느껴지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연속극에 중독되어 있을 때에는, 그 중독의 심각성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연속극을 안 보다가, 그래서 그런 것에 억매이지 않는 자유함을 맛보다가, 어떤 연속극을 세 차례만 연속해서 봐 보십시오. 그럼 여러분은 벌써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연속극이 생각나고, 또 그 시간이 기다려질 것입니다. 심지어 기도할 때에도 그 연속극 생각이 왔다갔다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어떤 연속극을 약 두달 쯤 보다가. 그것이 기도 생활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끊으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매우 하찮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죄와 정욕과 세상 풍습과 그리고 결국 그 배후에 있는 사탄에게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자유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탄의 속임수에 속아서 결국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그들을 진정으로 자유케 해주실 수 있는 예수님을 오히려 속박하시는 분으로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은 다음에도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면, 대상만 바뀔 뿐 다시 노예된 삶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위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갈 4:8-11).
내가 아는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에 이점에 대해서 매우 좋은 예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중 한 분은 내 친구 목사님이 종교순례자라고 자칭하는 분입니다. 그분은 정기적으로 교회로, 절로, 무당에게로, 순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복을 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교회에 나올 때는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습니다. 이 사람에게 하나님은 소위 많은 신들 중에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신 앞에 가서 하듯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공을 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신앙이 압니다.
다른 한 분은 무당을 하다가 극적인 하나님의 역사로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 집에 가서 모든 부적과 차려 놓은 것들을 다 태우고, 그 다음 날부터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분도 교회 나오는 첫 날부터 새벽기도에 한 번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것도 제일 먼저 나옵니다. 어제까지 상을 차려놓고 귀신에게 빌었는데, 바로 오늘부터 똑같은 시간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합니다. 물론 그분이 날마다 주님 앞에 믿음으로 나와 주님과의 교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그분처럼 하나님 앞에 공을 쌓습니다. 대상이 달라졌을 뿐, 그 앞에서 공을 쌓는 개념은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모든 종교는 공 사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것과 정반대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참 신앙은 십자가의 공로에 기초하여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복음도 타락하면 바로 다른 종교와 같이 되어 버리며, 그것이 곧 율법주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끝없이 더 충분한 공을 쌓으려는 노예된 삶이 있을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 100일 작정 새벽기도하고, 아무런 응답이 없자 다시 100일을 추가해 200일 작정기도 하고 난 다음에, 그래도 응답이 없자 하나님은 자기가 한 두 번 빼먹었다고 응답하시지 않는 너무하신 분이라고 말하는 분과 같이 말입니다. 설령 그 사람이 200일을 한 번도 빠짐없이 꼬박 채우고, 또 어떠한 경로로건 그 기고하는 바가 이루어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경우 그러한 사람에게는 반대로 자기 의와 교만만 남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의요, 예수님의 저주하신 의입니다.
또한 이러한 율법주의에 빠진 사람은 자기가 어떠한 종교적인 행위를 한 번이라도 안 하거나 한 번이라도 빠지면, 하나님의 형벌이 곧 자기에게 내릴 것 같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실 것 같은 두려움 속에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항상 사랑하시는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무서운 주인으로 느껴집니다. 이것이 노예된 삶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 안에서의 삶은 자녀로서의 삶입니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6-7).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사셨듯이,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 속에 사는 삶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바’라는 말은 아람어로서 우리말로 하면 아버지라는 공식적인 말보다는 아빠라는 가족적인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가 되시는 삶입니다. 이 삶에는 아버지의 유업이 넘칩니다. 우리들이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유업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에 살면서도 아버지의 유업인 아버지의 임재, 아버지의 보호, 아버지와의 교제,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인도, 아버지의 도움, 아버지의 능력 등이 우리에게 넘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인 것일 뿐 아니라, 현재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삶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모든 율법의 멍에로부터의 자유함이 있습니다. 죄책감과 사탄의 정죄로부터의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멸하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하여 서게될 때, 그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무력하게 되어 버리고 맙니다. 자기의 욕심과 탐심으로 인한 집착과 억압으로부터의 자유함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에만 의지하여 서게될 때, 우리의 예 사람도 그 정과 욕심과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못박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이 조상의 저주로 인한 것이건, 과거의 상처로 인한 것이건, 잘못된 사고로 인한 것이건, 혹은 귀신들림으로 인한 것이건, 모든 종류의 사탄의 억압과 압박으로부터의 자유함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하셨고, 또 성경은 말하기를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고 하셨는데,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에는 성령의 계시와 능력과 주님과의 교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자유함은 죄를 마음대로 지을 수 있는 자유함이 아닙니다. 이 자유함은 자기가 주님 안에서 자유케 되어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람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갈 5:13).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약속이요 믿음에 의한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과 관련해서 강청하는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친구에게 떡 세 덩이를 빌리러 간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구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선 그 구절은 문맥적으로 볼 때 성령과 관련한 기도에 대한 구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구절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성령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들이 가지는 고유의 권한이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어떤 사람이 한 집에 방문하면, 그 방문한 사람을 잘 대접하는 것은 그 집주인의 의무였을 뿐 아니라, 온 마을의 의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나오는 손님을 맞은 사람이 그 친구에게 가서 손님을 위한 떡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성령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성령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우리들 중에 친구가 밤중에 찾아와서 떡 세 덩이를 빌리려 하는데 아이들과 잠자리에 들었으니까 안 된다고 거절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특히 그 당시 상황에서 떡을 주어야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의무이기도 했는데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마 세상에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비유의 촛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세상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사람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고 요청하면, 그는 친구로서는 내어주진 않는다 할지라도, 귀찮아서라도 그 요청을 들어줄 것이다. 이렇게 세상에 보기드문 악한 친구라도 간청하는 요청을 들어주거든 하물여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간청하는 자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이처럼, 성령의 역사와 관련해서 간청하는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간절히 사모하고 갈급해 하는 자세를 말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7장에서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7-38). 사도행전 1장에서 사도들은 성령을 기다리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제자들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 1:14).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역사는 우리의 어떠한 노력의 댓가로 벌어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우리의 ‘기도가 차야’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인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9).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5). 그리고 오순절날 베드로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 37-38). 이것은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4).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것을 위해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은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다리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다리면서 기도했습니다. 당연한 자세이겠지요. 그리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셨고, 또 하나님의 계획하신 때(오순절)에 오셨으며, 하나님의 계획하신 장소(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이점을 매우 강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나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갈 3:1-5). 우선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만을 전한 것과 그 십자가의 복음이 성령의 역사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두가지 종류의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2절에 나오는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의 “받은”이라는 단어는 과거형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성도들이 과거의 한 시점에서 성령을 받은 사건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5절의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의 ‘주시고’와 ‘행하시는’이라는 단어는 현재형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성도들 가운데 성령을 주시고, 그 가운데서 여러 가지 역사를 행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의 성령의 역사 모두 오직 믿음으로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두 번씩이나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라는 질문의 답은 당연히 ‘듣고 믿음에서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우리들이 성령의 역사를 이처럼 십자가의 복음 위에 기초하여 오직 믿음으로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우리의 어떠한 종교적인 행위나 노력의 대가와 연관시킬 때, 우리의 신앙은 육체로 마치게 된다고 강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나는 최근에 인천에서 목회하는 사모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몇년 전에 어느 한 집회에 참석해서 기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기도 받다가 쓰러진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답니다. 그 이후로 목사님도 그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기도를 받다가 갑자기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제발 그만 달라고 기도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이후로 그분들이 섬기는 교회와 부흥회 나가는 곳에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더욱 선명하게 들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순종하면, 사람들이 치유 받고, 귀신들이 쫓겨가는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에게 안수하면, 사람들이나가 떨어져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문제들이 눈에 보이며, 그것을 따라 상담하고 기도하면, 사람들 속에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모님은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우리들이 특별히 기도한 것도 아니고, 소위 나무 뿌리를 몇 개 뽑은 것도 아니고, 또 금식기도를 여러 날 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면 갈수록 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정확하게 그렇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8장과 19장에서도 사도들이 그냥 안수할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들은 위의 특징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인데, 자기의 모든 의를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서게 될 때, 주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점. 반면에 율법주의에 빠지면, 기도하러 올라간 세리와 바리새인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은혜가 걷힌다는 점.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 위에 믿음으로 굳게 서서, 성령을 따라 살게 될 때, 진정한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점 등등. 그러나 이제 그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위에 나오는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특징들을 하나하나 대조하거나 연관시키면서 살펴볼 수 있는 점들은 우리들이 위에서 살펴본 것 오에도 매우 많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연구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더욱 넘치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이 장을 통해서 복음과 율법주의 신앙의 관계를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무쪼록 복음 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와 성령의 역사 가운데 거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고, 성령께서 마음껏 역사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속히 회복되고, 또 하나님의 교회 안에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그리스도의 계시가 속히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