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복
제1장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복
에베소서 1장 3절부터 6절 말씀입니다.
③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는 바울이 로마 옥중에 있을 때에 썼던 서신입니다. 여러 교회가 돌려 읽다가 아마도 맨 마지막으로 에베소에 당도했던 것같습니다. 그리고 훗 날 에베소서로 명명되어져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서신입니다. 바울은 본서신을 쓸 때 당시에 유행하던 서신양식을 따라 썼습니다. 먼저 편지를 쓰고 있는 사람과 수신처를 밝히고 인사말을 쓰고 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1절과 2절입니다.
①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②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짤막하게 에베소 교회의 안부를 물으며 인사를 가름한 다음, 성도들이 받게되는 영적인 축복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3절에서 하나님을 만복의 근원으로 소개한 다음, 우리 성도들이 누리는 복들에 대해 4절부터 하나하나씩 나열해 갑니다. 이제부터 바울이 언급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신령한 복들에 대하여 하나씩 하나씩 살펴나가 보겠습니다.
3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실로 만복의 근원이십니다. 찬송가「만복의 근원 하나님」에도 나와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의 근원이 되시길 기뻐하십니다.
오늘날 복에 관한 선입견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복에 관한 선입견이 있습니다. 복이라고 하면 물질적인 축복을 맨먼저 떠올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랫동안 교회 내에서 「복」은 의례히 물질적인 축복과 연관되어 사용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내 신앙은 기복적으로 흘렀으며, 급기야 신앙이 타락하는 일이 벌어졌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이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와서는 ‘예수믿으면 복받는다’가 기독교의 기치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복은 물질적인 축복을 가리킵니다. 네, 물론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복을 물질적인 축복의 관점에서 이해해 버리면 하나님의 생명은 고갈되어지고, 신앙은 타락하게 되어있습니다. 아마, 오늘날 우리나라의 신앙이 이토록 뒤틀리게 된 이유가 60년대와 70년대에 일반화되었던 복의 개념 때문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지금 중국에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처소교회들마다 사람들로 채워지고 수많은 기적과 표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금방금방 교회들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회들이 조선족들을 위해 교회당을 지어주고 선교한다고 하면서 그들에게 심어주고 있는 복음은 우리나라의 60년대와 70년대 유행했던 ‘예수믿으면 축복받는다’ 式의 복음입니다. 요즈음 그 잘못된 복음의 부작용들을 현지에서 사역하고 있는 분들을 통해 심심찮게 듣고 있습니다. 사실 심각한 일입니다. 어떤 선교사님은 말하기를 “곧 머지않아 조선족교회들이 타락할 것입니다. 아니 이미 타락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믿으면 복받는다’ 라는 글귀는 너무나 좋은 글귀입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네, 예수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복을 세상에서 잘되는 복, 즉 물질적으로 부유해지는 복으로 이해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복은 분명 기복신앙에서 말하는 복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더 많이 누리는 복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신령한 복 곧 영적인 복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복에 대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진실로 복의 근원이십니다. 그러나 3절의 “복”은 세상에서 잘되고 물질적으로 부유해지는 “복” 이전에 “신령한 복”을 말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언급하는 복은 세상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복보다 훨씬 더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복입니다. 3절을 영어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Praise be to the God and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who has blessed us in the heavenly realms with every spiritual blessing in Christ.
우리말 성경에는 “… 복 주시되” 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성경 NIV에는 완료형 동사인 “has blessed”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 라는 의미입니다.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서 주신 복이 지금도 우리에게 누려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4절부터 그 복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3절로 돌아갑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셨는데 어디에서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네, ‘그리스도 안에서’ 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즉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이미 주셨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주셨다’ 라는 말이 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과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한 마디로 줄인다면 여러 말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깁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 신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를 소유하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 이하의 표현에서 우리는 이 점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
탈무드에 이런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 한 아버지가 죽기 전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노예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이제 한 가지만 선택할 수 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구하라.” 여러분, 그 아들이 무엇을 선택했을 것 같습니까? 네, 물론이죠. 아버지의 재산을 다 가진 노예를 선택했습니다. 노예를 가지면 아버지의 모든 것을 다 가지게되니까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소유하면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격이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영원한 목적은 예수님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모든 것으로 예수님을 소유해야만 예수님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값어치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부터 46절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여기 두 개의 비유에서 비유되고 있는 대상은 ‘천국’입니다. 그런데 천국 즉 하나님 나라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전도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주체인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보화”는 하나님 나라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이기도 합니다. 네, 예수님이 보화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으로만 예수님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소유하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것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팔아 예수님을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모든 것을 팔아 사라고 하니까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러면 우리의 재산을 다 팔아 그 돈으로 예수님을 산다는 말이냐? 아니, 예수님을 어떻게 돈을 주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성경에는 구원을 돈으로 살 수 없다고 분명히 못박고 있습니다. 어린이 복음찬송에도 있습니다.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재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지식으로 못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그렇다면, 예수님을 우리의 모든 것을 다 팔아 사야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물론 이 말은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헌금해야만 예수님을 소유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믿음의 성격차원에서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정확한 성경적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먼저, 믿음이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으로 발견한 하나님. 개인적이고, 실제적으로, 성령의 인도 속에 만난 하나님. 경험되어진 하나님. 즉 산 지식을 말합니다. 곧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만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게되면 그분의 명령 앞에 완전히 순복할 수 있게되며, 그분만을 온전히 의지하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성격입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 예수님을 사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권자가 되시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다 팔아 예수님을 사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주권자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완전한 순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온전히 믿을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아까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네, 하나님은 모든 복의 진정한 근원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의 근원’을 이해함에 있어서 세상의 돈, 명예, 자식의 성공 등과 ‘복의 근원‘ 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큰 문제입니다. ’복의 근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관점을 다르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기복신앙은 다른 말로 일반적인 복의 관점 즉 세상적인 관점에서 복의 근원을 이해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신앙관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세상에서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의 수단으로 전락시켰다는 점입니다. 열심히 헌금하고, 열심히 예배하는 이유가 모두, 세상에서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신앙이 기복신앙입니다. 열심히 기도하지만 이 기도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얻고자 하는 바를 얻어내는 데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기도는 그저 수단일뿐입니다.
하나님을 수단삼는 신앙이 기복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수단삼는 신앙이 기복신앙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신앙이며, 하나님을 떠난 신앙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기복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세상사랑입니다. 이 기복신앙의 가장 큰 해악은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복신앙이 추구하는 바, 세상사랑은 하나님이 증오하시는 영적 간음이며,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합시다. 모든 하나님의 신령한 복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 예수님을 얻는 길은 우리의 모든 것으로 예수님을 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즉, 예수님만이 우리의 목적과 목표가 되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렇게해서 예수님을 소유하면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복을 소유하게 됩니다. 마태복음의 비유를 다시 읽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주님을 좇아가려면 반드시 대가가 지불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천국을 사는 길 즉 예수님을 사는 길은 내 모든 것으로 그 분을 찾고 구하는 길밖에 없는데, 그 때 우리가 치루어야 할 대가가 부담스러운 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주님을 좇아가면서 대가만 치루지 않는다면 신앙생활하기가 매우 쉬워질텐데, 지불해야할 대가때문에 고민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많은 목회자들이 부담스러운 성경구절들은 그냥 지나친 채,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구절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우리들이 지불해야할 대가가 아니라, 예수님의 값어치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야말로 이 세상 어느 것보다 가장 값지고 소중한 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진주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가장 값비싼 분이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다이아몬드가 있다고 합시다. 웬만한 부호가 전재산을 털어도 살 수 없는 너무나도 값비싼 다이아몬드라고 합시다. 그런데 어느날 다이아몬드 주인이 여러분에게 다가와 당신이 가진 재산만 다 내어놓으면 그 다이아몬드를 주겠노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곧바로 전재산을 다 팔아서 다이아몬드를 살 것입니다. 아마, 집이 하루라도 빨리 팔리리기를 바래서 복덕방을 하루에도 열두번 더 왔다갔다하며 안달이 날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비유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부호도 살 수 없는 고귀한 진주입니다. 너무나 비싼 분이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모든 것이면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셔들일 수 있다고 하십니다. 아니, 어느 바보가 사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빌 헤이몬스 목사님의 일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여러차례 왔던 빌 헤이몬스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빌 헤이몬스 목사님의 아버지는 자가용 비행기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호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사업후계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수업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대학에 다닐 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학교에 입학합니다. 신학교에 가기 위해 그는 아버지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목회자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처음에 그의 아버지는 농담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보장된 미래를 버리니까 말입니다. “그래, 가. 그러나 네 갈 길 가려면 신용카드와 아버지가 준 것 모두 내어놓고 가.”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면 아들이 돌아올 줄 알고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빌 헤이몬스는 아버지에게 시간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당연히 아들이 용서를 빌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빌 헤이몬스는 며칠 후 아버지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가지고 와 돌려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품을 떠났습니다. 시카고로 간 그는 날품살이를 시작하며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그가 재벌의 아들이었음에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가장 값진 보화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의 모든 것으로 주님을 샀습니다. 물론 그는 지금 시카고에서 가장 큰 교회의 목회자이지만 처음에 주님께서 그에게 성공을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약속도 없었지만 주님은 자기의 모든 것으로 주님을 산 그에게 주님 자신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빌 헤이몬스 목사님이 재벌의 후계자로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은 것보다 지금의 그가 얼마나 더 자랑스러운지요.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우리 삶에서 주님이 차지하는 가치는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를 믿게되면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다 신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가치에 대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 예수를 믿어가는 과정을 말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말의 고백에 있지 않습니다. 기도의 내용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주님의 가치는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에 있습니다.
주님을 좇아갑니다. 그런데 계속 가자니 주님의 길이 환경과 맞지를 않습니다. 계속 가면 환경 속에서 많은 어려움이 예상이 됩니다. 이럴 때 주님이 과연 개인에게 값진 보화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가장 값진 보화인 사람은 환경 속에서 설령 손해가 날지라도 주님의 길을 붙잡습니다. 겪고 있는 어려움과 예상되는 어려움을 주님께 의탁하면서 말입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장 값진 보화가 아닌 경우에는, 환경과 주님의 행하심이 서로 상충되고 반대가 되면 주님의 길을 환경에 맞도록 조정합니다. 대부분 여기에서 넘어집니다. 이렇게 갈등의 순간 앞에서 내리는 결정을 보며, 주님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서 소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빌 헤이몬스의 경우는 재벌의 후계자와 주님의 길이 부딪친 경우입니다. 그는 주님의 길을 좇아가기 위해서 재벌의 후계자가 되는 길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경에다 주님을 좇는 길을 맞춥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복의 근원이십니다. 돈이나 명예로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모든 하나님의 복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사면 모든 것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 하나님의 채워주심, 삶에서의 진정한 기쁨, 진정한 만족, 하나님이 예비하신 동행하시는 삶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소유하면 하나님의 모든 복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는 길을 한 가지뿐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으로 사야만 합니다.
성경은 구세주와 주(主)를 나누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말할 때, 곧 우리의 믿음이 성경적인 믿음이라면, 이 말 속에는 ‘내 모든 것으로 예수님을 삽니다’ 라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성경은 ‘구원자’와 ‘주인’이 나뉘어있지 않습니다. 흔히들 생각하는대로, 주님을 구원자로 영접한 다음, 성장해 가면서, 주님이 주인되어가시는 삶이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고백 즉 주님을 믿는다는 고백이 올바른 고백이라면 주님은 나의 구원자일뿐만 아니라 나의 주인이 되시는 내용이 반드시 포함됩니다. 이게 바른 믿음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복을 주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으로 예수님을 사는 삶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과 환경이 엇갈릴 때 주님의 길을 따라가면서, 그 외의 것은 주님께 의탁하는 삶이 전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을 소유하는 믿음 가운데 서 있지 않으면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주신 모든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 복 중 어느 것도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보호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든지, 그것이 하늘의 기쁨이든지, 그것이 하늘의 능력이든지, 그것이 무엇이든지, 예수님을 우리의 모든 것으로 사는 삶가운데 서지 않으면 절대로 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구약이건, 신약이건, 인류 역사상, 예수님을 자기의 모든 것으로 산 후, 후회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자기의 모든 것으로 사지 않은 사람들은 후회하였을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모세는 주님을 사기 위해 한나라를 버렸습니다
모세는 주님을 사기 위해 한 나라를 버렸습니다. 모세가 한 나라를 버린 뒤에 후회했나요? 아니지요. 세상 사람들 눈에 보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에서 고생하는 것이 애굽의 호화로운 삶에 비하면 초라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애굽의 영화와 호화스러운 삶 등은 비교도 안될만큼 그는 주님 안에서 보람있고 알찬, 생명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후회는 커녕 참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빌립보서 3장 7절부터 14절입니다.
⑦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⑧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⑨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⑩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⑪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⑫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⑬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⑭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훗날 가게될 하늘나라는 상상할 수 없을만큼 행복한 나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예수님을 얻는 것은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소중한 것입니다. 정말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모든 것으로 예수님을 샀고, 예수님을 얻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예수님을 얻기 위해 모든 것으로 주님을 사는 자세로 지속적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존 윔버 목사님은 한 때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던 밴드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그는 가정불화와 생의 갈등으로 고단해 있었습니다. 고단한 나날을 보내던 중, 뜨는 해를 바라보며 소원을 빈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몰랐다고 합니다. 그 후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다시 가정이 회복되고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얼마있지 않아 하나님께서는 마태복음 13장의 말씀을 존 윔버에게 계속 상기시켜 주셨다고 합니다. 그는 주님의 길을 따라가기 위해서 인기있던 가수의 길을 버렸으며, 생명같은 악기들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기름통을 닦는 일부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한 에이전트에서 제의차 존 윔버를 찾아 왔다가 그냥 돌아가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라갔더니 전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하나님의 일군이 되리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들로부터 시작된 찬양이 전세계에 지금 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주님은 한 가지 약속만 주셨다고 합니다. “네가 너의 모든 것으로 나를 사면 나의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노라.”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이 방법을 통해 이 땅에서 일하십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의 복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법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것으로 주님을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