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우리를 택하신 복
제2장 우리를 택하신 복
우리를 택하신 복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3절부터 6절 말씀입니다.
③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미 살펴본대로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십니다. 3절은 이미 복을 주신 분으로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복이 우리가 원하는 사업성공이나 자식성공, 대학교 합격 등과 같은 복이 아니라, 신령한 복이라는 점입니다. 진정한 복은 에수님을 소유하는 복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소유하면 모든 걸 소유하게 되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모든 신령한 복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길은 우리의 모든 것으로 그 분을 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4절이하에는 신령한 복의 내용들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하나 복의 내용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전제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당연히 자녀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이 이 땅에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바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 복이라고 하니까, 마치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필요를 채워주지도 않는 분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하늘의 신령한 복은 세상에서 얻는 부귀영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복이 있습니다
4절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 구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이미 우리를 택하셨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셨다는 이 말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기 전, 창세전부터 세워놓으신 분명한 목적과 목표를 갖고 우리 세대에 계획대로 태어났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개개인은 계획된 사람들입니다. 사실 이것 하나만 하더라도 세상의 명예와는 바꿀 수 없는 참된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사야서 49장 1절입니다.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 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머니의 배에 있을 때부터 부르셨고 우리의 이름을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미의 태 중에서부터 아셨을뿐만 아니라, 창세전부터 우리에게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을 막 살면 안됩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막 살면 창세전부터 세워놓은 하나님의 계획이 무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계획된 사람들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계획된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니까 여러분들을 통해 성취하실 선한 일을 하나님께서는 창세전부터 계획하고 계셨던 겁니다. 그 선한 일들은 여러분들이 예수님 안에 있으면 발견되어집니다. 모든 보화는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으로 예수님을 얻는 것이 아니면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아무리 종교적인 모양을 그럴듯하게 갖추고 있더라도 그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얻는 것이 결국은 모든 것을 얻는 길이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모든 것으로 얻는 신앙이 아니면 그것은 우상숭배일뿐입니다. 세상사랑일뿐입니다.
세상에서 자기의 목적, 자기가 원하는 바, 자기가 계획하고 기대하는 바를 얻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미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가운데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을 사랑하면서, 우상을 숭배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들어갈 수 있다고 믿으시나요? 어리석은 짓입니다.
예수님을 소유하려면 우리의 모든 것으로 그 분을 사야만 합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모든 헌금으로 예수님을 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마음자세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지는 자세와 삶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내 모든 것으로 얻으며 그 안에 거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만세전부터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 분께서 친히 이루실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물론 때로는 기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예수님 안에만 있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정확한 일정에 따라 하나님께서 운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틀림없습니다. 그러기에 절대 서두르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주님 안에만 있다면 참으로 주님 안에서 안식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만 있다면 평안할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과 계획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왜? 모든 보화가 예수님 안에 있으니까요. 그러나 예수님 밖에 있을 때에는 문제가 다릅니다.
우리를 택하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신부의 단장입니다
4절을 다시 봅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우리들을 택하시되,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하기 위해 택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기를 원하시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또한 흠이 없기를 원하시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신구약을 막론하고 우리가 하나님처럼 거룩하기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목적 중 하나가 우리가 하나님처럼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자칫 이 말은 우리에게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거룩함의 문제에 대해 부담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첫째로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을 받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부터 27절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6절의 “이는 ”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 것은’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26절은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까닭은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되 점이 없고 흠이 없는 영광스럽고 거룩한 교회로 세우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3절과 14절입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힘쓰라” 는 영어성경에 “Make every effort" 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점도 없고 흠도 없기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거룩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라.“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7,8절과 히브리서 12장 14절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요한계시록 19장은 어린 양의 재림에 대해 언급하는 가운데 신부가 준비될 것을 말하고 있는 성경입니다. 즉 신부가 준비되었을 때 주님께서 오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거룩하지 않고는 주님을 맞이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거룩함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점도 없이 흠도 없이 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서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는 말입니다.
거룩함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빌립보서 3장 7절부터 9절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여기 구절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다시 봅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렇게 했던 이유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하기위함이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님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주님 안에서 발견될 수 있을까요?
우선,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목적은 교회가 점도, 흠도 없이, 거룩하게 서게하기 위함이었음을 다시 분명히 합시다. 그리고 이 목적에 비추어 본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언급해 봅시다.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은 사실 이 목적과는 정반대의 모습은 아닌지요. 세상의 죄악들이 그대로 교회 내에 들어와 있습니다. 교회 안에 없는 죄가 없습니다. 드러내어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린 양의 신부가 준비되어야 신랑이 오신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는데, 그리고 그 준비되는 과정 중 하나가 점도없이 흠도 없이 거룩해지는 것인데, 어떻게 주님 앞에 바르게 설 수 있을까요?
영적 성숙은 주님의 일입니다
한 편으로는 간단한 문제입니다. 우리를 주님 앞에 세우는 일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주님 안에서 점도 없이 흠도 없이 준비시켜주실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영적 성숙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입니다. 주님이 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그 일을 이룩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저절로 그 날이 올 것인가? 하는 문제가 다시 생겨납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즉 모든 노력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한 편으로는 간단하지만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주님이 행해가실 때 우리가 주님의 인도하심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합니다. 어떻게 보면 후자도 간단한 문제입니다. 전자가 주님의 일이기에 간단하다면, 후자는 주님의 행하심을 보고 협력하면 되기 때문에 간단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행하심에 협력하기 위해서 명심할 두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요약하여 말씀드리면, 첫째는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서야만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모든 것으로 주님을 사는 일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삶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사실 이 본질에 서지 않으면 어떠한 거룩함도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질 위에 서 있지 않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떠나있음을 반증하기에 그렇습니다. 본질 위에 서 있지 않은 것 자체가 우상숭배 가운데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본질 위에 서 있지 않음은 세상사랑함이 그 속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본질 위에 세워져야만 영적 성숙과 거룩함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물론 본질 위에 서 있지 않아도 거룩한 모습을 띨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인 거룩함이요, 바리새인적 거룩함입니다. 외양만 거룩한 모습일뿐입니다. 내부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삶에서 추구하는 바, 삶에서 귀하다고 여기는 것, 귀한 것을 얻는 방법, 세상에서 바라는 목표 등이 불신자들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삶의 목표, 살아가는 자세, 추구하는 바는 기대하는 태도 등이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게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거룩함입니다. 외부적으로는 거룩할지 모르지만 내부적으로는 아니올시다. 절대로 이 자세를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발견되려고 하면, 신앙의 본질 위에 서는 일이 우선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서부터 모든 신앙생활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신앙의 본질 위에 서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거룩해지는 일이 주님의 일이라고 했는데 신앙의 본질 위에 서면 이 일이 가능해집니다.
이렇게 신앙의 본질 위에 서면 성령께서 빛을 비추시기 시작하십니다.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말씀하시면서 우리 속에 있는 합당치 못한 부분들을 다루시기 시작합니다. 거룩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이 일들은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 서면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빚어가시고, 다듬으시고, 다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인도하십니다. 자,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렇게 인도해 가실 때, 우리는 주님께서 다루시는 만큼, 비춰주시는 만큼, 그 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주님을 따르면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행하심에 협력하는 두 번째 의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의 행하심에 협력하기 위해서 명심할 두 번째 사항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거룩함을 위해서는 ① 신앙의 본질 위에 서야합니다 ② 비추시는만큼 순종해야 합니다 |
신앙생활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간단합니다. 물론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조정할 때에는 대가가 지불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 간단합니다. 주님이 누구신 줄 알고 그분을 사랑하면 대가를 지불하는 일이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자세로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면 되기 때문에 간단합니다.
가끔 간증을 듣다보면 자신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성령께서 비춰주시는데 자신이 얼마나 부분적으로만 주님을 사랑했었던지 깨닫게 되고 회개할 수 밖에 없었노라고 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간증입니다. 성령께서 바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 그분 자신을 아는 일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과 목표가 되어지고,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는 삶을 살면 때로는 우리의 삶과 동기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합당치 않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다루어 가십니다. 한꺼번에 다루시지 않지만 반드시 다루십니다. 한꺼번에 다루시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하면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없기 때문이요, 반드시 다루시되 하나님의 때에 다루십니다. 그분이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으려면 반드시 올바른 신앙의 길에 서 있어야만 합니다. 즉 신앙의 본질에 머물러만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우리의 협력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춰주시면 우리는 조정하고 순종하면 됩니다. 회개가 필요할 때에는 돌이키면 됩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삶을 바꾸어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어느덧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가 바뀌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 2장 20절의 고백은 이렇게 살아간 사람이 어느날 이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보고 고백하는 구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우리는 오늘날 거룩함을 강조하는 설교를 듣기 매우 어렵습니다. 반면 축복이나 윤리적인 설교를 많이 듣습니다. 목회자들도 거룩함을 설교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성도들이 듣고 부담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축복’이나 ‘가정의 행복’,‘성공의 비결’ 같은 설교는 전혀 부담이 없고 부드럽지만 ‘거룩함’은 아무래도 마음에 부담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진정으로 거룩하기를 열망하는 마음을 붓고 계십니다. 우리교회 가운데에도 그렇게 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세전에 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서게하기 위함입니다. 점도 없이 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이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택하심과 부르심은 우리가 예수님을 살 때 가능합니다.
에베소서 1장 5절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기 “예정하셨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정과 관련하여 하나 전제할 것은 ‘예지 예정’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예지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택하신 것을 뜻합니다. 로마서 8장 29절과 30절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 말씀을 보면 우리를 택하시되 “미리 아시고 택하셨다” 라고 기록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선택이 함께 있음을 봅니다. 예정과 선택은 같이 갑니다. 즉 인간의 선택이 배제된 하나님의 예정은 없습니다. “미리 아시고 택하신” 것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신 목적 중 하나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즉 거룩함을 위한 목적입니다. 바로 앞절인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실제로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의미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주님의 형상을 더욱 변화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500원을 잃게되어도 1,000원이 생길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거룩한 주님의 모습으로 변화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신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하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택하셨으며 예정하셨습니다. 이 택하심과 예정은 목적이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실 때에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출애굽기 19장 3,4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여기 보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부르신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부르신 것은 19장 4절처럼 “내게로” 즉 하나님께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이 말씀은 적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은 특정한 위치로의 부르심과 택하심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은 어느 특정한 위치나 지위에로의 부르심이나 택하심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의 택하심과 부르심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의 부르심 가운데 우리의 위치가 있는 것이지, 위치가 있은 다음 하나님께로가 아닙니다. 우리가 위치에 집착하면 우리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실패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부르셨습니다. 다음 절인 19장 5절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로 부르셨고 하나님께로 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셨기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당신의 전존재로 사랑하신 것처럼 자기 백성들도 당신을 전존재로 사랑하도록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가운데 거하도록 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가운데 열국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예정하신 목적입니다.
이스라엘은 위치에 집착한 결과 선민의식으로 우월감에 젖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누릴 위치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기들은 특별한 존재라고 여겼습니다. 특별한 은혜를 받고 특별한 나라가 되었기에 우월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것은 특별한 위치에로의 부르심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이런 오해가 결국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버림받도록 원인을 제공하였습니다. 신명기 7장 6절에서 10절입니다.
⑥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⑦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⑧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⑨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⑩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여기 본문에도 잘 나와 있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이유는 사랑때문이었습니다. 7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택하심이 이스라엘의 뛰어남에 있지 않다고 분명히 못을 박습니다. 그들이 강한 나라여서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열국 중에 연약한 나라였고 힘이 없던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이유는 사랑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택하심은 하나님에게로의 택하심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구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세계를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도 정확하게 같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⑩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아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칭하던 단어들이 여기서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지칭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부터 29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구절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심은 우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이 구절들을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심은 우리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를 택하신 걸까요? 그것은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로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하여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를 특정한 위치로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특정한 위치는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때에만 주어집니다. 하나님께 속해있을 때에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로 택해진 존재들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전존재로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 전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즉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전존재로 사랑하는 사랑 가운데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의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통해 세상을 만지십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택함의 의미를 알게되면 진정한 감사가 있게됩니다. 선민의식의 자리는 없게됩니다. 선민의식은 자리잡지 못합니다. 선민의식이 자리잡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은 삶의 반증일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이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로마서 8장 14절부터 17절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⑮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⑯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⑰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못난 자들을 사랑 때문에 택하시고, 당신에게로 택하신 다음,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들은 세상의 어떤 억만금보다도 귀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감사할 뿐입니다. 만약 어느 누가 “세상의 가장 귀한 것을 너에게 줄테니 네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포기하라”고 하면 포기하시겠습니까? 수천억을 준다고 하면 어떻하시겠습니까?
행복은 많이 가지거나, 높이 올라간 데에 있지 않습니다. 15평 아파트에 살다가 80평 아파트 마련하여 이사를 갔어도 며칠만 지나면 만족이 없는 법입니다. 좀 더 넓은 집에서 살고 싶어지는 게 인생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돈을 가졌어도 하루 세 끼만 먹어야 되는 게 인생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잠시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줘도 주님의 자녀가 된 것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이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무한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이 가지거나 높이 올라간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주님의 자녀가 된 것은 그냥 되는 것이니까, 그것은 내버려두고, 추가로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직 주님의 자녀된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문제점은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나 당연히 여기는 데에 있습니다. 그 은혜의 크기와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의 전반부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
‘후사’라는 말은 ‘상속자’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유업으로 받을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유업으로 받는다” 라는 말은 죽었을 때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유업이란 하늘나라에 가면 받게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땅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보호하심, 하나님의 지키심, 하나님의 인도,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함, 하나님을 아는 것 등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감격과 감동, 기쁨과 의와 평강,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유업들입니다. 여기에 언급한 한 가지 한 가지만 하더라도 세상의 그 어떤 돈이나 명예, 성공과는 비교도 안되는 소중한 것들입니다.
바울의 제자 중에서도 얼마동안은 전도여행에 동참했지만 결국 세상으로 간 사람도 있습니다 |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세상적인 축복들을 원하는걸까요?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아름다운 신령한 복이 있음에도 말입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것을 모르는걸까요? 삶의 가치관 때문입니다. 비록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세속적인 신앙관으로 무장되어 있기에, 온갖 구하는 것들이 세속적인 것들 뿐입니다. 생각들이 온통 세상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속한 것들을 맛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하니까 그렇습니다. 자연히 보다 많은 돈과 보다 많은 성공, 보다 많은 것들을 더 원하게 마련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지만 불신자들의 가치관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의미를 깨닫고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면 세상의 것들을 구하지 않게 됩니다. 바울의 제자들 중에도 얼마동안은 전도 여행에 따라 다니다가 세상이 좋아 세상으로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는 이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물질이나 안락, 사람들의 평가, 인기 등과 같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일을 포기 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하늘의 신령한 복들을 말할 때,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들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사면 다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진짜로 사기만 하면 횡재를 만난다는 겁니다. 바울은 자기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님을 사려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을 아는 것이 가장 고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예가 있습니다.「차 안의 파리의 예」입니다. 파리가 한 마리 찬 안에 들어 왔습니다. 대전에서 들어 왔는데 서울까지 공짜로 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안에 있으면 차 안의 파리처럼 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복과 능력들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