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설교/하나님다림줄

하나님의 다림줄과 태의 열림

발의무리 2018. 2. 6. 11:41

하나님의 다림줄과 태의 열림

 

하나님께서는 최근들어 각교회들의 태가 열리도록 축복하라는 말씀들을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교회의 태가 열리도록 축복하는 부분들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이 부분들을 나누기 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들을 나누다보면, 하나님께서 각교회들을 인도해가시는 면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앞으로 각교회를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가 하는 부분도 보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있어야만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인지를 보게 될 것이며, 앞으로 어떠한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도 함께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세 가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다림줄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다림줄에 비추어 본 신앙체계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셋째는 참다운 신앙과 영적 열매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1. 다림줄은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다림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다림줄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아모스 7:7-8입니다.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이 말씀은 말세에 하나님께서 회복된 교회를 세우실 때, 다림줄에 맞도록 세우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줍니다. 다림줄이란 집을 지을 때 담이나 기둥을 똑바로 세우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만약 이 다림줄을 드리우지 않고 담이나 기둥을 세워가면 빨리 세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똑바르게 세우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가지 않아 집 전체가 무너질 겁니다.

 

아모스서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림줄을 잡고 계신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 본문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우실 때 다림줄에 의해, 즉 똑바르게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세워가실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하나님의 다림줄에 의해 똑바로 세워져야 신앙이 똑바르게 세워질 수 있으며, 교회도 똑바르게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게 세워집니다. 만약 하나님의 다림줄에 의해 세워지지 않으면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림줄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하나님의 기준만이 통합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이 중요하다면 분명 하나님의 다림줄은 우리 모두가 사모해야 할 신앙의 기준입니다. 아모스서에서도 말씀하고 있지만 다림줄에 의해 세워지지 않은 신앙은 그 모양이 어떠하든 하나님 앞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같으면 정때문에라도 봐주고, 노력했으니까 그 성의라도 보아서 넘어갈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다림줄에 합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다림줄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기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하나님의 다림줄입니다. 이 말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자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통치자이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주권자가 되십니다. 주권자로서의 주권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중의 하나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는 하나님의 조건에 따라서만 나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조건이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다림줄이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가령 한 불신자가 구원을 사모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얼마나 구원받기를 사모하던지, 날이면 날마다 교회에 와서 밤을 지새며 기도를 합니다. 물론 기도 요지는 자신을 구원해 달라는 내용 일색입니다. 기도 중에 생각나는 죄는 낱낱이 회개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올 때마다 거액의 헌금을 드립니다. , 이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이 불신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받을 수 없을까요? , 못받습니다. 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가하면 구원받는 유일한 길 즉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기준을 그가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구원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헌신을 포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그가 날마다 철야기도를 하고, 많은 헌금을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가 했던 봉사와 헌신과 충성, 그가 가졌던 그 뜨거운 열정과 사모함이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어떤 정성과 노력도 의미가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하나님의 다림줄만 통합니다. 이 기준에 맞아야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그 어떤 정성과 노력이 깃든 헌신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게 하나님의 다림줄입니다.

 

종교개혁가였던 마틴 루터에게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공부를 하고 집에 돌아가다가 바로 앞에 벼락이 떨어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루터는 두려워서 얼떨결에 성자에게 기도하였습니다. 당시만해도 교회가 타락하여 각 지역별로 기도를 들어주는 성자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믿기를, 기도를 들은 성자는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하고,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말하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말씀드린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믿었던 이유는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라 함부로 그 앞에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종교개혁이 절실하게 필요했었던 시기였습니다. 벼락이 떨어지는 모습을 본 루터는 두려운 나머지 기도하기를 성 앤이여, 나를 살려주옵소서. 나를 살려주시면 제가 성직자가 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루터는 그 때 했던 약속대로 사제가 되었습니다. 사제가 된 이후 루터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참으로 많은 기도를 하였습니다. 심지어 새벽 4시경부터 일어나 하루종일 생각나는 자신의 모든 죄들을 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또 회개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 날이면 도무지 마음의 평안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이 평안하지 못한 이유는 하나라도 죄를 놓쳐서 회개하지 못하면 지옥가게 될까봐 두려워서 였습니다. 날마다 새벽부터 회개해 보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평화가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로마에 있는 성베드로 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며 계속 입을 맞추어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죄가 더 사해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마음에 평안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훗 날 루터는 성경에서 구원은 그렇게 받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루터의 경우에서처럼 많은 기도를 한다고 해서, 많은 헌신을 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기준에 합해야만 받을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문제는 이 하나님의 기준, 즉 하나님의 다림줄은 구원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 해당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의 사역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위해 노력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역이 아닙니다. 그 사역이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됩니다.

 

노아의 경우에서도 우리는 같은 부분을 발견합니다. 알다시피 노아가 살았던 시대는 참으로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코 앞에 닥친 시대였습니다. 만약에 노아가 타락한 세태를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시다. “, 이 시대가 타락했고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왔으니 나와 아내, 아들들과 며느리들을 다 동원하여 새벽부터 하루종일 집집마다 전도해야겠구나”. 노아가 이렇게 생각한대로 행동에 옮겼더라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을까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전도를 많이 하고, 아무리 헌신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노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명령을 따라 방주를 짓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준은 우리의 구원에서부터 우리 신앙의 모든 면, 즉 예배, 헌신, 기도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적용됩니다. 정성이 아무리 들어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다림줄이 가리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다림줄이 가리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다림줄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대개 보면 이단들이 다림줄이란 표현을 즐겨 사용하곤 합니다. 이단들은 흔히 내가 꿈에 계시를 받았는데 그것이 곧 다림줄이었다라고 말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다림줄은 그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다림줄은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조금 전에, 하나님의 다림줄이 가리워지는 것이 문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다림줄은 하나님의 기준이자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한다면 이렇게 질문하는 분이 혹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성경이 우리들 손에 있는데 하나님의 다림줄인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워지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라고 말입니다. 혹은 아니, 우리의 눈이 멀어져서 성경에 쓰인 글씨가 안보이게 되는거냐?”라고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어떻게 하나님의 다림줄인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워질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마태복음 127절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바리새인들에게 하셨습니다.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셨는지가 중요합니다. 에수님은 제자들이 안식일날 밀밭 사이에서 이삭을 잘라 먹은 일로 바리새인들과 대화를 하시는 가운데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알다시피 이 말씀은 호세아서 6:6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다림줄이 가리워진 모습을 발견합니다. 다림줄이 가리워진 모습은 어떻게 보면 참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이 바로 그 시대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아주 심각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에게도 다림줄이 가리워질 수 있기에 무섭다는 말입니다.

 

아까 설교를 시작하면서 구원의 예를 들은 이유도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그렇게 애쓰고, 노력하고, 기도하고, 헌신했지만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 생각에는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이 그 정도로 노력했으면 그 노력을 가상히 여겨서라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면 좋을 것같은데 그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서만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헌신하고, 봉사하고, 아무리 최선을 다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기준에 합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심각한 겁니다. 더 나아가 구원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적용되니까 심각한 겁니다.

 

다림줄이 가리워지면

영적 분별력이 없어져 보이지가 않습니다

 

문제는 다림줄이 가리워지면 안보인다는 것입니다. 즉 다림줄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올바로 하고 있는지, 틀리게 하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집짓는 공사 현장을 지켜보노라면 20년 이상 벽돌 쌓은 경력을 가진 기술자도 다림줄을 띄우고 나서야 담을 쌓아갑니다. 아무리 경력자라 하더라도 다림줄이 없으면 똑바로 쌓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줄이 없으니까, 기준이 없으니까 어디다가 선을 맞추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쌓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림줄이 가리워지면 기준이 안보이기 때문에 어디에다가 기준을 맞추어야할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자신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모르게됩니다. 이러다 보면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기에 심각합니다.

 

, 다시 마태복음의 말씀으로 돌아갑시다. 에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으로서 호세아서 6:6의 구절을 인용하신 겁니다. 알다시피 호세아 6:6의 말씀은 신앙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앙의 의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과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어떤 의도에서 말씀하신 걸까요? 그 구절이 호세아서 6:6에 나와있는지를 바리새인들이 모르기 때문에 하신 말씀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 박사들이고, 그 구절은 아주 기초적인 구절이기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나 번제를 원치 않는다고 하는 그 구절의 내용을 몰랐다는 말일까요? 그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무엇을 몰랐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그 구절의 뜻을 몰랐다는 의미입니다. 그 구절의 의미를 몰랐다는 말입니다. 그 구절이 호세아서에 나와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호세아서에 그 구절이 나와 있음을 당연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구절은 바리새인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라는 점을 유념하십시오. 이 말씀을 그냥 평민들에게 하셨다면 이해가 되지만 성경에 대해서는 박사라고 자타가 공인하던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이 구절을 잘 알고 있었고 이 구절을 가지고 신앙의 본질 운운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쳤던 자들입니다.

 

다림줄이 가리워지면

하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게 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그 뜻을 바리새인들이 몰랐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라는 내용은 잘 알았을지 모르지만 그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그 말씀의 의미를 몰랐다는 겁니다. 이것이 다림줄이 가리워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가지고 수도 없이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 즉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말씀의 의미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그 기본적인 면에서 부터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게 다림줄이 가리워졌다는 말씀입니다.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사랑하라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그 말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어릴 적부터 배웠고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머리와 손목 등에 이 말씀을 적은 양피나 종이를 묶고 다녔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집마다 문설주에다가 말씀을 적은 양피나 종이를 걸어 두었습니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키파라고 하는 빵모자 속에다가 이 구절을 적은 종이를 넣고 다닙니다. 그러니 얼마나 이 구절을 잘 알았을까요.

 

다림줄이 가리워진다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릴 적부터 알았습니다. 그들이 몰랐다는 것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가 가리워졌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즉 성경을 많이 안다고해서 다림줄이 밝히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배웠고, 가르쳤고, 누구보다도 성경을 외우는 자들이었는데 주님의 표현에 의하면 그들은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조차도 모르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만큼 다림줄이 가리워지는 것은 심각한 것입니다.

 

2. 다림줄이 가리워지면 잘못된 신앙체계에 빠집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다림줄이 가리워질 때, 파생되는 잘못된 신앙체계들을 하나님의 기준에서 비추어 살펴보겠습니다. 예레미야 612절부터 2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숫군을 세웠으니 나팔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그러므로 너희 열방아 들으라, 회중아 그들의 당할 일을 알라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뇨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본문에서 그 땅은 유대 땅을 말합니다. “전지는 논과 밭을 가리킵니다. 12절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 되리라는 다른 나라가 쳐들어와서 남편을 죽이고 아내와 자식들을 집과 논과 같이 다 빼았아 간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판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레미야 당시에 북쪽 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하였고, 남쪽 유다 마저 바벨론의 위협아래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기 눈으로 자기 민족이 멸망하는 모습을 지켜 보았던 선지자입니다. 바로 그 무렵 이 예언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기적으로나 시대적으로 볼 때 당시의 유다는 영적으로 아주 타락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조금 잘못한 것을 가지고 심판을 명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수도 없이 경고하고, 경고를 했음에도 그들이 돌아오지 않으니까 이런 심판을 내리신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그 당시는 종말의 말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20절을 다시 보십시오.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뇨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유다 백성들은 심판이 바로 눈 앞에 온 시점에서도 시바라고 불리우는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에 까지 가서 유향을 사오고, 원방 즉 먼 나라에가지 가서 예배에 쓸 향품을 수입해 왔습니다. 그런 귀중한 유향과 향품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에 쓰였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되 보통 섬긴 정도가 아니라 먼 나라에 까지 가서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을만한 물건들을 사와서 제사 때 드렸다는 점입니다. 이 점을 보면 그들이 참 헌신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할 때 집에 있는 어떤 물건을 가져와서 드린 정도가 아니라 먼 나라에까지 가서 귀한 물건을 사와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건물을 새로 지어놓고 본당의 천장에 매어달 샹들리에를 프랑스 파리까지 가서 사온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마 값으로치면 몇 억이 들었을지 모릅니다. 아니 그 이상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디오피아라는 나라는 아프리카 중부에 있는 나라로서 당시의 교통수단으로 볼 때, 나귀나 말을 타고 가서 사왔을텐데 그것은 정말 보통 정성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화려한 예배를

하나님은 받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정성껏 예배를 드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그런 제사 받지 않겠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번제를 달갑지 않다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심판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면 이런 하나님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 얼마나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렸는데 반갑지 않다고 하시니 이게 말이나 되는 겁니까? 먼 나라에까지 가서 최선을 다해 향품을 사서 예배를 드렸는데도 안받으시겠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얘기입니까? 아니 오히려 심판을 내리시겠다니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6절과 1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숫군을 세웠으니 나팔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더러 나의 길을 찾으라고 했지만 너희는 단도직입적으로 거절하였노라. 또 성벽에 올라 망을 보던 파수군들이 나팔을 불 듯 선지자들이 너희들에게 심판이 다가온다고 외치게 했지만 너희들은 안듣겠노라고 하였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했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20절의 구절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 나라에까지 가서 향품을 사다가 예배를 드린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길을 보여주셨는데 그들이 거절하였노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아니, 우리처럼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자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길을 보여주셨으면 우리가 불순종할 리가 없지.” 자신들의 사생활보다 성전일이 우선이라 생각되어 먼나라에 까지 가서 예물을 사와 하나님께 드렸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그들이 거절하였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도, 하나님께서 이것이 나의 길이다라고 하시면 그들이 어찌 듣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이 부분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이렇게 항변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 언제 우리에게 파수군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길을 보여주신 적이 있으신가요? 너무 억지를 쓰시는 게 아닌가요? 아닌 밤중에 홍두께입니다. 하나님! 언제 말씀을 하셨다고 우리에게 심판을 내리시는 건가요?”

 

다림줄이 가리워지면

신앙의 이해가 잘못되어집니다

 

그들은 들은 적도 없었다고 하는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거절하였기에 그들에게 징계를 붇는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 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 문제가 무엇이었길래 이런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그 당시도 바리새인들의 경우에서처럼 하나님의 다림줄이 가리워져 있었던 겁니다. 그들은 신앙의 본질을 언급하고 있는 호세아서 66절의 기본적인 의미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의 경우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되 사랑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던 겁니다. 그들은 신앙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의식을 잘 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인 줄로 알았던 겁니다. 먼 나라에까지 가서 예물을 사서 드리면 그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줄로 알았던 겁니다. 헌금을 잘하면 그것이 신앙이 좋은 줄로 알았던 겁니다.

 

원래 하나님의 길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의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이며, 본질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인데, 이 때 의식은 본질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한데, 그들은 생각하기를 의식을 잘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겁니다. 신앙을 잘 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여길 수 있었습니다. “아니, 먼 나라에 까지 가서 향품을 드릴 정도로 헌금을 잘 하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다니 이건 말도 안돼.” 그렇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여기기를 헌금을 잘하는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난 예물과 희생이 하나님께 드려지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향품과 예물, 이 희생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아무런 의미가 없도다라고 하신 겁니다. 내가 너희에게 내 길을 보여주었는데도 내 길을 거절하였구나. 너희를 위해 심판을 베풀리라하셨습니다. 다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이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면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시겠어요? 그토록 많은 희생과 헌금을 드렸는데도 말입니다. 축복의 말이라면 몰라도 심판이라니 기가 막혔을 겁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다리줄이 가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 신앙관이 가리워져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100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의 전부가 되는 사랑을 할 때 그 사랑이 진실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일 한 남편이 자기 아내와 다른 여자를 동시에 사랑한다면 그 남편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게 아닌 것과 같습니다. 사랑은 배타적입니다. 아내만 사랑해야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체이십니다. 그 분이 인격체이시기에 그 분만이 우리의 목적과 목표가 되어야 사랑이 형성되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예레미야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기본적인 의미에서조차도 다림줄이 가리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라는 말을 들으면 즉각 생각하기를 주일을 잘 지키는 것”,“헌금을 빼먹지 않고 잘 내는 것”,“열심히 봉사하는 것”,“기도 잘 하는 것”,“성경 열심히 읽고 전도 잘 하는 것을 떠 올립니다. 그 때와 똑같습니다. 성경은 이 모든 것들이 소중한 것임에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본질을 표현하는 의식이라고 말하는 데도 말입니다. 본질을 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데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이 가리워지니까 신앙의 이해가 가리워졌던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요한복음 5장에서 너희는 하나님을 알지도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는다라고 하신 겁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라고 할 때, 그 의미는 단순히 이론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게 아니라 인격체되신 그 분을 친밀함 속에서 아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 이 똑같은 구절을 가지고 설교를 합니다. 이 구절을 아는 사람이면 사람마다 이 구절을 가지고 설교를 합니다. 문제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서로 달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의미가 무엇인지 가리워져 있으면서도 설교를 잘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심각한 겁니다. 그 의미를 몰랐다고 할지라도 책임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에 맞아야만 그 희생과 예물을 받으십니다. 그 기준이 가리워졌다고해서 용납되는 상황이 아닙니다.

 

탐심이 다림줄을 가리우게 합니다

 

예레미야 당신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또 한가지 문제점을 13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이 가리워질 수 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 속에 탐심 곧 세상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지도자 곧 제사장, 선지자들조차도 목적은 세상에서 잘되는 성공이었습니다. 그들이 평화를 외쳐되는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풍전등화와 같은 현실이라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 암울한 상황 앞에서도 탐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시대말적인 상황, 말기 암환자같은 상황인데도 여전히 평화를 외쳤습니다. 왜 그런 설교를 했을까요? 그래야 사람들이 모이고 자기들도 상공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그 평화의 소리를 듣기 원했을까요? 역시 탐심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목적이나 목표가 아니고, 하나님은 자기들이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있어서 자식들이 잘되기 위한, 사업이 성공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재벌의 딸이 있다고 합시다. 그 딸을 어떤 남자가 사랑한다고 합시다. 그 남자는 그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여자의 기호나 취미를 샅샅이 알아냅니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혀가 녹을 정도의 감언이설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순간순간 여자가 원하는 것을 순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구해와서 그녀 앞에 대령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남자의 목적은 그녀가 아니라 재벌의 딸과 결혼한 후에 얻어질 부와 명예가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그 남자는 그녀를 사랑하는 걸까요? 대답들 해보십시오. 이것이 사랑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목적이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나라에까지 가서 향품이나 예물을 구해와서 예배를 드렸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잘되는 것 곧 성공이 목적이었습니다. 자식들이 성공하고 사업이 번창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 목적을 위해 그들은 많은 헌금을 드리고 열심히 예배했습니다. 이건 전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수단이 되어진 삶에는 아무리 많은 헌신과 봉사가 있어도 그것은 전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아닐 뿐만 아니라 사랑이 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만 사랑이 아닐뿐만 아니라 아까 살펴본대로 사람에게도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재벌의 딸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그 사람 자체로 좋아서 사랑하는 게 진짜 사랑입니다. 사랑의 대상에게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고 해도 그 사람 자신만으로도 좋아서 사랑하는 게 사랑입니다. 사실 웃기는 것은 상대방에게서 무언가를 얻어낼 목적으로 사랑하면 사랑의 표현을 더 아름답게 할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빚을 내어서라도 상대방의 마음에 드려고 기를 쓸 것입니다. 얻어낼 것이 너무 화려하니까.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되어지는 삶. 그 삶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수단이 되어진 삶. 그 삶에는 얻어낼려는 수많은 헌신과 노력이 드려진다고 해도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주시지 않습니다.

 

신앙의 잘못된 이해가 많은 오해를 가져왔습니다

 

신앙의 잘못된 이해가 참으로 많은 오해를 가져왔습니다.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 버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조차 혼동되어 버렸습니다. 가리워졌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다림줄이 가리워진다는 말입니다. 성경 구절도 알고, 그 내용도 알지만 문제는 그 구절이 의미하는 바를 못깨닫는 점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깨닫는데 그것이 가리워진 것입니다. 또한 탐심 곧 기복신앙이 다림줄을 가리웁니다.

 

, 그러면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사실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당시의 이스라에 백성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 “아니,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지자를 보내시고 파수군을 삼으셔서 말씀하셨다는 말인가?” , 그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는 선지자들은 소위 평화만을 외쳐대던 선지자들인 줄 알았으니까요.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파수군을 세우셨습니다. 파수군이란 선지자를 뜻합니다. 그들에게는 예레미야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유도 모른채 멸망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파순군인 예레미야를 그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심판이 갑자기 임하지 않도록 파수군을 세워 나팔을 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외치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듣지 않았던 것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듣지 않았던 걸까요? 그것은 그들의 신앙관에 비추어 볼 때 예레미야는 참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가리워져 있으니까 참이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자기들 생각에 비추어보아 아니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는 하나님의 기준만 통하는데 하나님의 기준이 가리워지니까 자기들의 기준만이 남아서 자기들의 기준대로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겁니다. 자기들 생각에 외국산 향품이면 하나님이 좋아하실 줄 알아 외국까지 가서 향품을 사와 예배 때 드린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들 관점에서 보니까 예레미야는 참선지자가 아니었던 겁니다. 이런 이유로 예레미야가 외칠 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영적분별력이 가리워지면

자기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입장이 맞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파수군으로 하여금 쉬지않고 나팔을 불게 하셨습니다. 물론 그들은 듣지 않았지만.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가 거절했었노라고 하시는 겁니다. 가리워져 있으니까 모르는 겁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가 듣지 않으리가 없지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로 하여서는 벌거벗고 다니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말로 하니 듣지 않으니까 그리하셨던 겁니다. 그런대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도직입적으로 거절했습니다. 문제는 다림줄이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믿었지만 다림줄이 가리워지니까 본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축복 대신 심판을 언급하신 겁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다림줄이 가리워진 심각성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걸 유념하셔야 합니다. 다림줄이 가리워졌으니까 나에게는 책임이 없지 않느냐? 반문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절대로 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서 심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아모스 7:7-8입니다.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여기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다림줄을 세워 그것을 기준하여 심판하신다고 하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심판들은 이 다림줄에 의해 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도 예레미야 시대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사려됩니다. 신앙에 대한 이해 즉 본질과 의식을 혼동하는 점, 또 하나님이 수단이 되어지는 기복신앙이 그것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지만, 헌금도 많이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어내려고 하는 종교적 노력이 기복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의 이해가 있는 한, 아무리 그럴 듯한 모양으로 하나님을 섬겨도 그것은 자기의 탐심에 기초하여 하나님이 수단이 되어버린 삶이기에 신앙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수단이 되어버린 삶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율법주의와 기복신앙이 어우러진 모습이 에레미야 시대 때나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얼마나 비슷한지요.

 

하나님이 수단이 되어버린 삶에는

율법주의, 인본주의, 기복신앙이 독버섯처럼 자랍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인본주의가 있습니다. 잘못된 신앙체계는 세 가지의 특징을 가집니다. 율법주의, 기복신앙, 인본주의가 그것입니다. 웃지못할 현실은 이 잘못된 신앙체계에 빠진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헌금 잘하지요. 기도 열심히 하지요. 그러니까 잘 믿는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도 그 의미를 모릅니다. 그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겁니다. 이 잘못된 신앙체계에서 살다보면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됩니다. 심판이 오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기준만이 통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보여야 합니다.

 

율법주의와 기복신앙, 인본주의는 삼위일체와도 같이 움직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교회에서 율법주의와 기복신앙에 대해서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도 많이 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 우리는 이제 율법주의와 기복신앙에서 많이 자유로워졌다라고 생각하 수 있으나, 내면 속에 아직 인본주의적인 사고가 남아 있으면, 즉 사역할 때 인본적으로 한다거나 인간관계를 통해서나 사람을 의지하는 면이 있다면 하나도 안변한 겁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자기 생각이 가는대로 일을 이루려고 한다거나 사업을 할 때, 인본주의적인 방법이 남아있으면 그것은 아직도 참다운 신앙에 서있지 못한 것을 나타내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본주의는 율법주의와 기복신앙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기복신앙에 찌들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 기복신앙이 팽배해 있습니다. 침 심각한 수준에 있습니다. 성도들의 가정이 깨어지는 일이 부쩍 늘었으며 죄의 억압과 사슬이 성도들의 삶 속에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거짓 신앙체계에 빠져 있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물론 말들은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밖에 계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예배를 보십시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고 말들은 하지만 다림줄이 가리워져 있으니까 잘못된 신앙체계에 있으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신령과 진정이라는 단어를 똑같이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신령과 진정이라는 말의 의미가 가리워져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울법주의, 기복신앙, 인본주의의 입장에서 신령과 진정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결과 예배를 즉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외부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고 말았습니다. 예를 들면, “아니, 저런 신발을 신고 교회에 오면 어떻게 해”,“아니, 어떻게 예배 시간에 방정맞게 춤을 찬다는 말인가”,“조용히 그리고 엄숙히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지하면서 말입니다. 잘못된 신앙체계 하에 있으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마치 정성을 다해 드리는 것처럼 오해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똑같은 말을 사용하지만 그 의미가 달라져 있습니다. 잘못된 신앙체계 하에서는 모든 면에서 가리워집니다. 그러다 보니 예배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다 인본주의적인 예배가 됩니다. 유학갔다가 온 사람들을 고용해서 독창하게 하고, 오르간을 연주하게 합니다. 독창이나 연주가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되어 온 사람의 신앙이 어떤지 알 필요도 없이 그들의 재능을 사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예배는 상한 심령인데 이것은 무시되고 있는 현실이 오늘날입니다. 사람을 고용하는 이유는 그들의 연주를 통해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의도가 있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것은 우리들의 상한 심령입니다

 

오늘날 애통하는 마음이 없이 드리는 예배.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하나님을 사모하며,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원하는 예배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 예배는 신앙의 본질을 담는 의식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질 터인데 그런 예배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림줄이 가리워지니까 실제로 자신들이 하는 행동들이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인지도 모른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실은 이렇게 하나님의 기준이 가리워진 자들은 모든 시대에 걸쳐 참된 신앙에 서서 하나님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을 비난하고 욕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까지 이단의 괴수라는 말을 들으셨으며, 사도 바울도 죽을 때까지 온천하를 꾀는 자라는 욕을 먹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가리워지면 자신들의 관점에 따라 사람들을 평가해 버립니다. 요즈음 이단시비가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이단시비를 가리는 일이야 옳은 일이지만, 자신의 관점에서 볼 때 맞지 않으면 무조건 이단으로 일단 몰아놓고 보는 자세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가라리워져 자신의 눈만 어두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앞장 설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어떤 사회학자는 말하기를, “기독교의 부흥의 역사는 이단에서 시작했다가 제도화된 종교에서 끝난다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단은 제도권 밖을 의미합니다. 순수한 동기와 주님을 사랑하는 자세에서 시작된 부흥이라 할지라도 규모가 커지고, 제도화되어, 법이 다스리면 성령님은 떠나신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당시 하나님의 기준을 보지 못하는 자들에 의해서 이단이라고 낙인 찍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바울을 이단으로 모는 이유는 단순히 자신들의 관점과 이해에 맞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과 바울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과 동행했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3. 참다운 신앙에서 맺히는 아름다운 열매

 

, 이제 참다운 신앙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참다운 신앙은 율법주의 대신에 십자가의 복음, 기복신앙 대신에 신앙의 본질, 인본주의 대신에 하나님 중심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복음과 신앙의 본질, 하나님 중심의 삶이 어우러진 신앙이 참된 신앙입니다. 이게 다림줄이 회복되는 겁니다. 지금 교회세우기 집회가 계속 열리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교회세우기 집회를 하게하셨는지 보이시나요? 하나님의 잣대, 하나님의 기준이 가리워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교회를 세우시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시고 계시는 겁니다.

 

참다운 신앙에 서면 태가 열립니다

 

참다운 신앙에 서면 태가 열립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인 태가 열리는 부분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잘못된 신앙체계에 빠져 있으면 마지막에 나타나는 특징이 태가 막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 가운데 태가 막혔습니다. 꽉 막혔습니다. 불신자들이 교회로 돌아오는 일이 참으로 흔하지 않은 현실이 되어있습니다. 성경에 이른 바와 같이 바리새인들이 제자 하나를 얻기 위해 산과 바다를 건너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보면 예수님 당시에도 태가 막혀있는 것을 봅니다. 그렇다면 태는 언제 열리는가? 태는 참다운 신앙으로 돌아가면 열립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사야 54:1-5 입니다.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니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이 구절은 제가 지난 1999년도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말씀입니다. 지금 돌이켜 보니까 이 말씀은 신앙의 본질과 하나님 중심의 삶,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이킨 교회들과 개인들에게 주시는 유업의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갈라디아 4:27에서 인용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4:27입니다.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여기서 구로치 못한다는 말은 아기를 낳을 때 고통하는 일을 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미 지난 1월호에서 이 부분을 자세히 살폈기 때문에 본 설교와 관련된 부분만 살피겠습니다(20021월호 새물결소식지에 태의 열림이라는 제목으로 이 부분이 자세히 나와 있니 필요한 분들은 참조 바랍니다). 갈라디아 4:27의 말씀은 이미 지난 호에서 살펴본대로 참다운 신앙에서 있게되는 약속입니다. 즉 참다운 신앙관을 가진 교회들과 개인들에게 나타나는 유업인 것입니다.

 

수치의 기간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열어주셔야 열린다는 뜻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잉태치 못한 자, 즉 구로치 못해 본 자, 남편없는 과거 수치를 당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본문이 왜 참다운 신앙에 서있는 자는 남편없는 자에 비유하고, 왜 거짓신앙체계에 빠져 있는 자들은 남편있는 자에 비유하고 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거짓신앙체계는 갈라디아서에서 하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아이를 계속해서 낳지 못하자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사용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던 일을 나타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의 방법으로 아이를 얻은 것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니까 아이를 낳는 것이 쉬웠습니다. 그러나, 사라로 대변되는 참다운 신앙은 남편이 없는 여인에 비유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셔야만, 하나님이 열어주셔야만 아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여인이니까요. 그래서 수치를 당하는 겁니다.

 

그러나, 남편없는 여인의 자녀가 아이를 더 많이 가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남편이 되어주실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얻어내는 열매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는 결과보다 비교가 안될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즈음 교회성장이라는 미명하에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방법만을 고집하면 사람들이 잘 모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잘 모이지 않는다고해서 다시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을 끌어모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인간적인 방법 즉 인본주의적이기에 그렇습니다. 인본주의는 율법주의, 기복신앙과 더불어 거짓 신앙체계에 속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저를 아끼던 어떤 분은 이런 말을 제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니, 큰교회는 저렇게 하니까 잘되던데 왜 꼭 고집을 부려야하느냐?”고 말입니다. 제가 그런 방법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에 안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셔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역사하셔야 하는데 그 분이 언제 역사하시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시면 길이 없습니다. 이게 남편없는 자입니다. 교회의 태를 막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여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는 언제 태를 여시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 생각에는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길에 서면 내일쯤 바로 역사하시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수치의 기간이 있게 됩니다(이 부분도 지난 1월호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필요하신 분은 참조바랍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사라의 태가 다 죽은 줄 알고 끝난 줄 알았던 그 때, 하나님은 역사하셔서 태를 여시고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요즈음 새물결선교회에 참여하는 교회의 태를 열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태를 열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단순히 개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들을 위해 태를 열어달라고 기도한다는 의미는 엘리야의 기도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과 우리가 하나님의 종된 것과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 일을 행하고 있음을 보게해달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이렇게 기도했을 때 하늘에서 불로 응답하신 것처럼 이렇게 기도함으로 엘리야 시대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듯이 우리 시대도 그렇게 되기를 갈망함으로 기도하는 겁니다.

 

태가 열리기 전까지 인내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에수님을 믿던 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교회의 중직자들의 자녀들마저도 교회를 등지는 이 세태 가운데 하나님이 태를 여셔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인내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교회가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에 하지 않고 태를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열으셔야 하기에 인내하며 기다리면 비록 과부의 수치 같은 기간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태를 여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태의 열림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는 것보다 더 자녀들의 수가 많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해 주실 것이니까.

 

소망을 갖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위해 인본주의 적인 방법과 수단을 내려놓고 하나님,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은 자녀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낳게되는 자녀가 훨씬 많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해주세요하며 하나님, 이렇게 역사하셔야 하나님의 명예가 회복되며 이 나라의 백성들이 주께로 돌아오며, 이렇게 되어야 인본주의적인 가치관 아래 있던 자들도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돌이킬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 열어주옵소서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사야서 54장의 약속은 우리에게 주신 유업이기에 마땅히 구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선 교회들과 개인들에게 주시는 유업입니다.

 

새물결에 나오는 목사님들의 교회를 생각해보면 동일한 과정이 있는 것같습니다. 일 찍 그 과정을 거치면 일찍 교회가 세워지고, 그 과정을 늦추면 그만큼 교회는 더디 세워지는 것을 봅니다. 시간만 보낸다고해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내하는 동안, 수치의 기간동안 줄기차게 신앙의 본질을 구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가르치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좇아가야 합니다. 그 과정이 두려워서 우회하려고 하면 할수록 교회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즉 거짓신앙체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참다운 신앙으로 빨리 전환할수록 빨리 교회는 세워지는 것같습니다.

 

태가 열리기 전

내부적인 변화가 교회에 나타납니다

 

대개 보면 열매가 나타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교회 내에서 내부적인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성도들이 신앙의 본질을 보게하시고, 성도들을 더 거룩하게 하시고, 교회 전체의 죄를 다루게 하시고, 치유가 일어나고,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는 일을 먼저 하십니다. 다음으로 자녀가 태어나고, 교회를 성장케 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같습니다. 여러분들이 해야할 일은 줄기차게 십자가의 복음,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며 그 신앙 위에 서기를 구해야 합니다. 전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교회에서 역사하시도록, 하나님이 역사안하시면 안되는 자세를 가지고 서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교회의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