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설교/성령이역사하는교회

제4장 경배와 찬양

발의무리 2018. 2. 6. 17:16

4 경배와 찬양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것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을 듣기를 원하노라”(95:1-7)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찬양을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준비 찬송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찬양을 예배를 위해, 혹은 설교를 위해 성도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한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고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리고 소위 주일 대예배 시간이나 혹은 이와 같이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들을 다루면서 찬양에 대해서 살펴보면 많은 성도들이 이를 의아하게 생각하거나 시시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에 찬양은 우리의 신앙에서 그렇게 고귀한 시간에 살펴볼 수 있는 핵심적이고 중요한 부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찬양과 경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형태의 예배입니다.

찬양과 경배는 설교 말씀을 위해 성도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며, 예배 순서가 매끄럽게 진행되도록 중간 중간에 집어넣는 깍두기도 아닙니다. 찬양과 경배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며,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 중에서 가장 중심적이고도 핵심적인 예배입니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찬양과 경배를 예배라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인 worship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앞에서 복음의 모조품인 율법주의 신앙과 참다운 신앙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만, 사실 찬양과 경배에 대한 왜곡된 이해는 우리의 신앙 전반에 대한 왜곡된 이해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신앙의 본질을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로 올바로 이해한다면, 우리 신앙에 있어서 찬양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올바로 드리는 찬양과 경배는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위해 필수적인 요소이며,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더욱 알수록 주님을 더욱 깊이 찬양할 수밖에 없고, 또한 우리가 주님을 더욱 찬양할수록 주님을 더욱 깊이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찬양과 경배가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얼마나 중요하고 핵심적인 요소인가 하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어떠한 예배인가를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오늘날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그 곳에서 드릴 예배는 어떠한 형태의 예배입니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것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찬양과 경배입니다. 그렇습니다. 찬양과 경배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 그 자체요,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예배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배의 한 모습을 요한계시록 5:11-14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그리고 요한계시록 19:5-8도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이 얼마나 장엄하고 놀라운 예배의 모습입니까! 그 많은 천사들과 장로들, 그리고 그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보좌 앞에 엎드릴 뿐만 아니라, 그 목소리를 높여 큰 물소리나 뇌성과 같이 노래하되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한 목소리로 노래하니, 이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 예배의 모습입니까!

 

찬양과 경배는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주요한 제자도중 하나입니다.

찬양과 경배는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최고의 형태의 예배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어떠한 특정한 종류의 찬양을 가장 우선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앞으로도 살펴보겠지만 우리는 늘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래서 늘 새로운 찬양들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에서 찬양과 경배가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배워야 할 제자도라고 한 말은 그러한 뜻이 아닙니다. 그 말은 우리가 찬양의 의미와 찬양을 드리는 자세를 가장 우선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닿는 진정한 찬양과 경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시면서 그 성막과 또 그 안에서 드려질 여러 가지 종류의 제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매우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구체적인 지시대로 모든 것을 마쳤을 때, 하나님은 그곳에 영광으로 임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되, 하나님께서 정하신대로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찬양의 진정한 의미와 찬양을 드리는 자세를 모르기 때문에 입으로는 찬양을 드리나 마음으로는 온갖 다른 생각으로 가득차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에 닿는 찬양을 드리려고 노력하기보다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려고 노력하고 있고,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것을 그저 구경하고 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찬양과 경배는 예배의 중요한 한 형태로서, 우리는 무엇보다 신령과 진정으로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요한복음 4;23-24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리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우리는 이 짧은 구절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 말씀은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반드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예배할지니라”(24)라는 단어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단어로써, 영어성경에는 이 구절을 “must"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매우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참된 예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니 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귀한 예배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그리고 찬양을 드릴 때, 반드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읽을 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하면 주일날 좋은 옷을 깨끗하게 다려 입고 나와,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드리는 그러한 예배를 연상합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께 나올 때, 단정한 모습으로 나오는 것은 중요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근본적으로 그러한 것을 말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잠시 후에 그 내용을 살펴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겠지만,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나와서 아무리 큰 정성을 쏟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전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신령과 진정에 대한 이러한 왜곡된 이해가 오히려 참다운 의미에서의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럼 무엇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까? 여기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라고 번역된 말은 영과 진리로(in spirit and in truth)'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참다운 예배는 우리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우리가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에 기초해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배에서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진리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기 위해서는 성경의 진리에 기초한 참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한 매우 낮은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견해는 우리가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방해합니다. 무슨 말인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그저 자기 할아버지보다 조금 더 나은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상관없이 그분을 찾아뵈면, 그저 좋아하시며 그래 왔느냐하고 엉덩이를 토닥토닥 해주시는 할아버지, 그 앞에서 수염을 잡아당기며 응석을 부리면, 쌈지돈도 사탕도 호주머니에서 꺼내주시는 할아버지, 그러한 할아버지와 같은 분으로, 혹은 그보다 조금 나은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닙니다. ,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은 그러한 하나님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4장을 보면 하나님의 보좌가 나오는데,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모습을 부분적으로나마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에 의해 요한이 보니, 하늘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었습니다. 그 보좌 주위에는 무지개가 둘렸는데, 그 색깔은 마치 녹보석 같았습니다. 또 보좌 주위에는 24보좌들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금 면류관을 쓴 24장로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서는 번개와 큰 음성이 나오고 있었고, 그 앞에서는 수정과 같이 맑은 바다가 흐르고 있었는데 다니엘서 7장에 의하면 그 강은 불로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온 몸이 눈으로 덮힌, 날개가 여섯 개 달린 생물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네 생물이 찬양할 때, 24장로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자기들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또한 그 주위에는 셀 수 없는 수 억, 수십 억의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7:10, 5:11).

 

이 얼마나 놀라운 모습입니까! 우리가 드리는 찬양과 예배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인데, 우리가 이 하나님 앞에 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관연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그 앞에 서겠습니까? 어떤 성도들은 여기에 나와 있는 네 생물들이 왜 눈으로 온 몸을 가득할까에 대해 의아해 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여기에 나와 있는 언어들은 상징적인 언어들입니다. 그래서 이 네 생물들은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영광을 지키며, 그 영광을 찬양하는 스랍들인데(6장 참조). 이 말은 그 스랍들이 괴물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그들이 얼마만큼 영적인 분별력으로 가득한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토록 가까이에서 뵈니 얼마만큼 영적인 눈이 그들의 삶에 가득하겠습니까! 또 어떤 성도들은 그 스랍들은 어떻게 쉬지 않고 밤낮으로 그것도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행동이 그 성도들에게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을 찬양하도록 만든 로버트가 하는 행동처럼 비춰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데서 나오는 사고입니다. 하나님을 그토록 가까이서 뵈는 자는 누구든지, 그가 천사든지 혹은 사람이든지, 실로 그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기 원할 것이며, 영원히 하나님만을 더욱 찬양하기를 진심으로 원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토록 놀라운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펴보았습니다만, 하나님의 그 놀라운 모습을 부분적으로라도 본 모세는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했습니까? 그는 땅 바닥에 납작 엎드러져 하나님을 진실로 경배하며, 그분 곁에 있기를 간절히 열망했습니다. 이사야 6장에 나오는 이사야를 보십시오. 영광의 하나님의 부분적으로 보았을 때,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도 역시 하나님을 실로 경배하며, 그 앞에서 가슴을 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오는 사도 요한도 보십시오. 그가 그 얼굴의 영광의 광채가 정오의 햇빛보다 더욱 강한 예수님을 뵈었을 때,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성경에 보면, 그는 즉시 땅 바닥에 쓰러져 죽은 자처럼 되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이야말로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 중에서 예수님을 가장 잘 알았던 제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이야말로 요한복음이 말하는 주께서 사랑하시는제자요. 예수님의 가슴에 그 얼굴을 대고 예수님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던 제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요한이 영광의 주님을 뵈었을 때, 그처럼 엎드려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예배는 진리에 기초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에 기초하여 진정한 하나님을 깨닫고, 그분께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예배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드려지는 예배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참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우리가 드려야할 참된 예배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위에 크신 왕이시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것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을 듣기를 원하노라”(시편 95:1-7)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또한 영으로 드리는 예배라야 합니다.

우선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구약시대에 짐승을 잡아 바친 예배와는 대조적으로 우리의 영으로 드리는 영적인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양과 같은 짐승을 잡아 그것을 하나님께 제사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그러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드려진 그 모든 희생 제물들은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제물로 돌아가신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자였으며, 구약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 자신의 몸을 드려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이미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은 우리의 예배가 성령에 의한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 바로 성령의 조명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조명이 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로 올바로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참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에 따른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에 있어서도 성령의 인도를 따라 구할 때 그것이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령을 좇아 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6:18). 이것은 우리가 드리는 찬양이나 우리의 모든 예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께서 주신 찬양을 가지고 다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3:3도 참다운 성도들은 성령으로 예배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영으로 드리는 예배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한 가지는 우리의 예배에서 율법주의적인 자세가 버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참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과 역사가 필수적인데, 율법주의적인 자세는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마치 세상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과 같은 관점에서 생각하는 성도들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 나라에는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그분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있어서 정성을 매우 소중하게 여깁니다. 옷도 깨끗하게 빨아서 다려입고, 또 헌금도 새 돈으로 바꾸어서 드립니다. 물론 이러한 자세는 매우 아름다운 자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자세가 위에서 살펴본것과 같은 참된 예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동반하지 않을 때, 그것은 율법주의적인 자세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예배에서 정성과 절차와 격식이 예배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대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기를 힘쓰기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성령님의 인도와 역사를 환영하고 사모하기보다, 적절한 절차와 방법에 따라 예배 드리기를 힘쓰게 됩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우리 가운데 이러한 예배가 가득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예배의 본질보다 그 절차와 격식과 순서를 중요시합니까! 그래서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심지어 예배의 순서가 자신들이 그 동안 가지고 있던 것과 조금만 달라도, 그리고 그 예배에서 자기들이 기대하는 한 가지 순서만 빠져도 그것을 배척하고 정죄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방문한 성도들이 우리가 예배 중에 찬송가를 안 부르고 경배와 찬양을 부른다고 해서(성경에는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예배 형식이 자기들이 아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해서(그 순서 하나하나가 주님을 더욱 알고 그분을 더욱 찾기 위한 목적으로 구체적으로 의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배 도중에 나가버리거나 인상을 붉히는 성도들을 보면서, 이러한 율법주의적인 자세가 오늘날 우리 가운데 얼마나 팽배해 있는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율법주의적인 예배는 하나님의 뜰만 밟고 지나가는 것과 같은 형식적인 예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배는 아무리 그것이 외부적으로는 화려하고 장엄한 예배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예배요, 생명이 없는 죽은 예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참된 예배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러한 율법주의적인 자세를 하루 빨리 버려야 합니다. 그 율법주의의 헌옷을 벗어던지고,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과 진리에 기초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드리는 자유로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만이 성령님께서 마음껏 역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스펄전 목사님은 늘 하나님, 우리의 예배 가운데 거룩한 무질서를 이루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나라에서 예배의 회복이 매우 시급한 과제중의 하나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우리 가운데서 율법주의적인 자세를 버리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찬양과 경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과 경배에서 또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은 찬양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만한 분을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물론 성도 치고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우리들의 이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거나 혹은 그렇게 실천하지 않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저는 이 말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우리의 찬양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 찬양은 근본적으로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들이 찬양을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쁘게 받으시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와 임재로 채워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소위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찬양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 성도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찬양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려고 힘쓰기보다 그것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찬양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찬양을 통해서 성도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더욱 힘을 쏟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를 위해 때로는 교회에서 돈을 들여가며까지 전문 쏠리스트를 고용하고 전문 지휘자를 고용하여 사람들이 듣기에 아름다운 성가를 연출하려고 힘을 씁니다. 만약 우리들이 찬양을 통해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것보다 찬양하는 우리의 마음을 살필 것이며, 우리의 온 힘을 다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힘쓸 것입니다. 그리고 소위 찬양 사역자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 온 삶을 다해 찬양을 드리려고 힘쓰는 것보다,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해서 더욱 힘을 쏟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포도나무교회에서는 성가대를 따로 세우지 않습니다. 일부가 아름다운 화음에 맞추어 찬양을 드리면, 나머지 성도들은 그것을 기쁘게 듣고 평가하는 식의 사람 중심적인 찬양을 드리기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찬양과 경배를 인도하는 사역자들에게도 성도들이 찬양을 잘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하는데 힘을 쏟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들 자신들은 전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자신들이 먼저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해 예배를 드리는 일에 모든 힘을 쏟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자연히 그들을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찬양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므로 찬양에서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요소는 그것은 하나님께로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직접 화법(direct address)으로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면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문자그대로는 당신을) 사랑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있는 24장로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면류관을 던지며 이렇게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당신)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당신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11). 이처럼 성경에서는 찬양이 직접 화법으로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며 하나님과 대화하듯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마치 우리 조상들이 제사를 지내듯 그저 정성스럽게 아름다운 화음에 맞춘 노래를 그분 앞으로 올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인격체되신 하나님께 찬사를 보내고,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사모하는 식으로 드려졌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에게는 찬송가이건 경배와 찬양이건 이렇게 직접 화법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매우 적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찬송가와 찬양집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들이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와 경배와 찬양이 대부분 영어에서 번역된 것인데, 원래 영어 찬양에서는 하나님께 직접 화법으로 드려진 많은 찬양들도 번역되는 과정에서 찬양에 대한 이러한 이해의 부족으로 인하여 다르게 번역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양 가운데 호산나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높은 곳에서(2X), 주의 이름 높여 다 찬양하라, 귀하신 주 나의 하나님, 호산나 높이 외치세.” 그러나 그 찬양의 원래 영어 가사는 이렇습니다. “Hosanna, Hosanna, Hosanna in the highest!(2X) Lord, we left up your name with hearts full of praise; be exalted, O lord, my god! Hosanna in the highest!(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높은 곳에서(2X), 주님, 우리가 당신의 이름을 높입니다. 찬양 가득한 마음 가지고, 높임을 받으소서, 오 주 나의 하나님! 호산나 높은 곳에서). 물론 찬양을 번역함에 있어 영어나 다른 외국어에 담긴 모든 뜻을 우리말로 번역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 찬양에 있어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향해 직접 화법으로 그분을 높이고 그분을 찬양하는 찬양이 사람 앞에서의 신앙 고백이나 간증으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어지면 찬양을 드리는 우리의 자세도 달라질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하여 찬양 가운데 임하시는 성령의 기름부음도 전혀 달라집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주위에 있는 대부분의 찬양들은 다 이런 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잘못된 자세와 이해를 가지고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증식의 찬양도 필요한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 직접 화법으로 드리는 찬양이 우리 가운데 결여되어 있음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찬양가운데 찬양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잠깐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위해 찬양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는데, 우리가 다윗의 삶에서 매우 잘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점에 있어서도 직접 화법으로 드리는 찬양이 필수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 시대와 때에 맞추어, 하나님께서 주시는대로, 찬양의 의미를 더욱 잘 살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찬양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한 가지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소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찬송가에 대한 집착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찬송가가 마치 성경과 같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어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리고 따라서 소위 주일 대예배 시간에는 반드시 찬송가만 불러야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리고 만약 그 시간에 다른 찬양을 불렀다가는 매우 잘못된 것처럼 정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고 이해할 수 없는 태도입니다. 물론 많은 찬송가들이 하나님이 주신 영감 가운데서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소위 경배와 찬양이라고 부르는 찬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과 같은 의미로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지어진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때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따라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찬양들이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찬송가에 나와 있는 찬송들을 보면 대부분 그러한 부흥의 때에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찬송들은 매우 오래된, 이미 지나간 것들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찬송가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건너 온 것들인데, 미국에서는 더 이상 불려지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좋은 찬양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찬송가들이 위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하나님을 충분히 찬양하기에 매우 부족하고, 또 어떤 찬송들은 우리가 그 한마디 한마디에 우리의 온 마음을 실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기에 전혀 적합하지도 않으며, 또 하나님께서 지금 온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따라 참으로 귀하고 좋은 찬양들을 주시고 계시고, 성경은 구체적으로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찬송가만을 고집하거나 어떤 예배시간에는 찬송가만을 드려야 된다고 고집하는 것은 어떠한 성경적인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태도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관습과 전통에 얽매인 율법주의적인 신앙에서 나온 태도라고 밖에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모든 예배 시간과 개인의 삶에서 그것이 찬송가에 있건 경배와 찬양에 있건 상관없이, 성경에서 말하는 의미에서의 신령과 진정으로하나님을 가장 잘 높이고 찬양할 수 있는 찬양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늘 새로운 노래들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찬양은 어떠한 것입니까?

그럼 찬양에는 어떠한 요소들이 포함됩니까? 찬양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사람에 따라서 이것을 다르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서 중요한 찬양의 두 가지 요소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찬양은 한 마디로 말해서 찬사와 기뻐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인하여 그분께 찬사를 보내는 것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하여 그분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찬 사

찬양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놀라운 일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사를 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너무 놀랍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다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104:1-6을 보십시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창조주 되신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옷으로 덮음같이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 여기서도 보십시오. 이 시편 기자는 직접 화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그 마음을 다해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창조주가 되신다는 사실만 올바로 깨닫는다고 해도,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 이렇게 하나님께 찬사와 찬미를 한없이 보낼 것입니다.

 

또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있는 네 생물들과 24장로들과 그들을 둘러 선 수 천만의 천사들이 구원자 되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예수님을 찬양하고, 그러자 하늘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위에와 또 그 가운데 있는 모든 만물이 이에 화답하여 예수님을 찬양하는 너무나 아름다운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그 모두가 구원자 되신 예수님 앞에 엎드려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께 찬사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5:12-13). 이처럼 찬양은 창조주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 그리고 우리를 날마다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행사를 깨닫고 감격하며 그 보좌에 않으신 하나님(예수님)을 향하여 주님, 당신의 사랑은 너무나 놀랍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당신의 역사는 너무나 귀합니다.” 라고 진정으로 찬사를 보내는 것이며, 이러한 예배를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십니다.

 

기뻐하는 것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인하여 그분께 찬사를 보내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그분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세 아들이 있는데, 하루는 둘째가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빠가 좋아.” “?” “아빠가 우리에게 옷도 사주시고, 먹을 것도 사주시고, 공부할 수 있도록 돈도 대주시잖아.” 그 때 그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쯤 되었는데, 학교에서 선생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저의 마음이 어떠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아마 모든 부모들이 저와 같이 느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둘째의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녀석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단순히 내가 그에게 좋은 일을 해주었기 때문이라면, 그것은 저에게 조금도 기쁨이 되지 못했습니다. 내가 그 녀석의 아버지이니까, 무엇보다 그 자체로 나를 좋아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약간 씁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 아이는 선생님의 지도를 잘 따르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에 있어서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서도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인하여 그분께 찬사를 보낼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인하여 그분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사무엘하 6:12-23에 보면, 다윗이 그러한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 시점에야말로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절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때입니다. 그의 시편들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다윗의 삶은 실로 찬양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찬양하는 삶이 그 절정에 달한 것입니다. 이 날 다윗은 그토록 그리던 하나님의 언약괘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해 옵니다. 그 언약괘는 단순한 하나의 상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기쁜 날,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거하시기 위해 자기의 고을로 들어오시는 그 날, 그 좋으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던져 하나님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며, 그분을 기뻐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버린 것입니다. 왕으로써의 자신의 체면, 심지어 계집종들 앞에서 자신의 바지가 벗겨지는 창피함도 다 던져 버린체 온 힘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드리는 찬양의 한 요소입니다.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고, 온 힘과 마음을 다해 전적으로 자신을 던져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 말입니다. 우리들이 드리는 찬양 중에 이러한 찬양이 있습니다. “손을 들고, 소리 높여 주님 당신께 내 마음 드려요, 난 기뻐요, 주를 찬양(사랑)하는 이유 많고 많지만, 그 중의 제일은, 오 예수님, 주를 찬양(사랑)하는 이유 중의 제일은 주가 주되심.”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던져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자동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생활이 그렇듯이, 찬양생활도 지속적인 찬양의 삶을 통해 하나씩 자라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음으로 기도를 배울 때, 입을 열자마자 기도가 유창하게 나오면서 30분씩 기도할 수 있던가요? 그렇지 않죠, 처음에는 생각할 수 있는 말을 다하고, 그것도 두 번씩 하고 눈을 떳는데도 이제 겨우 3분 지나곤 했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속적인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통해서 여러분의 기도가 더욱 길어지고, 더욱 깊이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찬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을 깊이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실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들이 그의 시편을 보면, 그의 이러한 삶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수년간에 걸친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 구하는 삶,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통해 그는 오늘 이 정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처음부터 여기에서 살펴보고 있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깊이 찬양할 수 없다고 해서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빨리 그렇게 안 된다고 해서 포기하지도 마십시오. 여러분이 기도를 배울 때에도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필수이기에 지속적으로 기도했더니, 기도를 잘 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찬양도 우리들이 드려야할 필수적인 예배요, 우리의 특권이기에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힘쓰면, 궁극적으로 다윗과 같이 찬양을 드릴 수 있는 날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찬양은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여러분의 의지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찬양할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의 감동이 임하여 찬양할 마음이 생길 때만을 기다린다면, 여러분은 평생에 찬양 한 번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찬양하는 자세

 

마음을 다해

찬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곡조도, 화음도, 음정도 아닙니다. 또한 어떠한 종류의 찬양을 드리며, 무슨 악기에 맞추어서 찬양을 드리는가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다 중요하겠지만,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경배자의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들이 사람을 위해 노래할 때에도 마음을 실지 않고 노래하면, 그것은 기분 나쁜 일입니다. 여러분이 연애하던 시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애인이 와서 사랑을 고백하는데, 정신은 지금 전혀 엉뚱한 곳에 가 있고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면서 말로만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면, 그 사람과 결혼했겠습니까? 하물며 우리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고 하면서, 머리 속으로는 온갖 세상 생각을 하, 여기 저기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며, 그저 익숙한 곡조를 따라 습관적으로 생각 없이 드린다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이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매우 아름다운 곡조와 화음에 맞추어 찬양을 드리나, 우리가 앞장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전혀 없이, 그저 성도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부르는 찬양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이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번제가 아니요, 상한 심령 즉 통회하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림에 있어 중요한 한 가지는 우리가 말하는 가사 하나 하나에 우리의 온 마음을 다 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I really mean it"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한 그대로라는 말입니다. 어느 한 분이 저녁 늦게 햄버거 집에 들어갔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어린아이의 생일 파티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 가게의 직원들이 생일 당한 어린이를 둘러싸고 생일 축하 노래를 해줍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루 종일 똑같은 일을 수 없이 한 후였기 때문인지 몸은 매우 지쳐있었고, 오직 집에 빨리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 밖에 없는 듯한 자세와 목소리로 그 노래를 해줍니다. 거기에는 그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고자 하는 어떠한 진실한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분이 이것을 보는 순간 그분에게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이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어떠합니까?

 

회개하는 마음으로

시편 24:1-6은 이렇게 말합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찬양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그 거룩한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자기의 선한 행실로 인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자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양을 드릴 때,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교만한 자세로 말고, 세리와 같이 통회하는 심령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4:14-16).

 

삶이 예배로 드려져야

찬양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기 위해서 분리될 수 없는 중요한 것이 바로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우리가 일주일 내내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정욕과 육신에 속한 삶을 살다가 주일날 교회 와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려고 하는데,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께 쉽게 집중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너무나 당연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각이 금방 하나님께 집중된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로 하나님께 나와 앉아있는데, 우리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예배로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찬양을 주일날 예배 시간에만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찬양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은 실로 하나님께 찬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그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루아침에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드리기를 열망하고, 주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러한 삶이 우리에게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떠한 표현으로 찬양해야 합니까?

 

엎드려 절하며

시편 138:1-2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음이.” 여기 2절에서 경배하며라는 뜻은 엎드려 절하며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알면 알수록 진실로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감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장에서 살펴본 대로 모세는 하나님의 놀라운 모습을 보았을 때, 즉시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그 전에도 모세는 하나님의 참으로 놀라운 면들을 경험했지만, 이 경우는 또 다른 차원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크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조금 안다고 혹은 조금 경험했다고 해서 그것에 만족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는 하나님께 대한 어떠한 예배도 찬양도 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또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매우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찬양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보아도 하나님 보좌 주위에 있는 24보좌 위에 앉아있던 24장로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머리에서 면류관을 벗고 하나님 앞에 던지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 여러분, 장로들의 이러한 행위가 하나의 요식 행위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그들의 행위가 내로 황제 앞에서 아부하던 대신들이 하던 행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 어느 피조물도 하나님의 영광을 그렇게 가까이서 대하며, 하나님 앞에 그렇게 엎드려 경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진실로 찬양하기 원합니다. 그들은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바로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서 날고 있는 스랍들도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는 것입니다.

 

손을 들고

디모데전서 2:8은 거룩한 손을 하나님께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예레미야 애가 3:41은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나님께 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회개하는 자세로, 하나님을 높이는 자세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세로 하나님께 손을 들고 찬양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행동도 따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더욱 따라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춤을 추며

출애굽기 15:19-21에 보면,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사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애굽 백성을 멸하신 후 미리암과 몇몇 여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함께 바다에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바닷물로 그들 위에 돌이켜 흐르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육지로 행한지라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15:19-21)

 

손뼉을 치며

시편 47:1-2은 말합니다.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금이 되심이로다”. 여기에는 기쁨의 요소가 가장 강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며 손뼉을 치며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립니다.

 

시편 47:1절은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해 주실 때, 우리는 그 앞에서 진실로 기뻐 외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다양한 표현으로 우리의 마음을 나타내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몇 가지를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표현들이 강요되거나 혹은 조작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부흥회 같은데 가면, 반강제적으로 박수를 치게 합니다. 그것도 세게 치게 합니다. 흥이 돋구워지면서 찬송을 점점 빨리 부릅니다. 나중에는 잘 따서 할 수 없을 만큼 빨라집니다. 물론 이렇게 해서 사람들의 흥이 돋아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훈훈해 질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사람들이 뿌듯한 마음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에게는 신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자세와 마음가짐을 가지고는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면서, 하나님만 빼놓고 우리끼리만 잔치하는 격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찬양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유행가나 가곡을 이런 식으로 불러도 우리의 마음이 기쁘기도, 슬프기도, 뿌듯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오히려 하나님께 온전한 찬양을 드리려면, 우리들은 우리의 마음을 흥분시킬 것이 아니라, 반대로 차분하게 가라앉혀야 합니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편안한 자세로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께 집중하고, 한마디 한마디 또박 또박 우리의 마음을 실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기쁨과 감격이 우리 속에 넘치기 시작할 것이요, 그러면 우리들은 전심으로 손뼉도 치고, 손을 들기도 하며, 여러 가지 표현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이러한 표현들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간혹 성도들 가운데는 어려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로 인하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고 나타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동기에서 이런 일을 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되, 특히 다른 사람들에게 눈에 띠게 혹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거스리게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자기에게로 분산시킴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찬양하는 것을 방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 사람에게 교회 뒤쪽으로 가서 아무도 보지 않는데서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권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찬양의 표현이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에서 나온 참된 경우에는, 그 사람은 사람들이 보건 말건 상관없이 뒤쪽으로 가서 참 기쁨으로 하나님께 그렇게 찬양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동기가 사람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는 뒤로 가기를 거부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우에는, 교회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러한 자세를 중단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구태여 이러한 표현으로 찬양을 드릴 필요가 있는가? 그냥 마음으로 하면 되지.”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마음을 다할 때, 그것은 우리의 몸으로 표현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이러한 표현들이 몸으로 되어질 때, 우리의 마음은 더욱 그렇게 하나님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러한 표현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들도 그저 하루아침에 자발적으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계속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표현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윗과 같이 말입니다.

 

찬양을 드릴 때 일어나는 일들

우리들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때, 하나님은 그 찬양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임하실 것입니다. 야고보서 4:8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저가 너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양을 통해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에게 가까이 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임하실 때,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사랑과 지식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양을 드릴 때, 거기에 회개의 역사가 나타나기도 하고,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기도 하며,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기도 하며, 감격의 눈물이 넘치기도 하고, 하나님의 치유가 일어나기도 하며,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 마음속에 들리기도 하고, 하나님의 예언을 우리에게 주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는대로 우리 가운데서 그분이 원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이 어떠한 형태로 역사하시건, 이것을 환영하고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행하심에 민감하여, 그분의 행하심에 협조할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찬양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렇게 찬양을 드릴 때 기뻐하시며, 이렇게 찬양을 드리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이렇게 찬양을 드릴 때,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저와 우리들이 이렇게 찬양을 드림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과의 더 깊은 교제 가운데로 인도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