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설교/성령이역사하는교회

제6장 성령에 의한 삶

발의무리 2018. 2. 6. 17:19

6 성령에 의한 삶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일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5:19-20)

 

우리가 잘 아는 빌리 그래함 목사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셨다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성령님이 떠나신다 할지라도, 교회는 90% 이상의 일들을 전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대로 진행할 것이다.” 이 얼마나 통찰력 있는 말이요. 또한 가슴 아픔 말입니까? 저는 이 말이 정확하게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도 적응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이 일은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반드시 그분이 계셔야하고, 또 만약 그분이 떠나신다면 우리는 그 일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두렵건데 거의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들이 하는 일 중에서 전적으로 성령님의 인도와 능력으로 하고 있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성도의 개인 생활에서나 교회의 생활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성령님이 떠나신다고 할지라도 교회가 하는 일 중에서 중단될 일은 거의 없습니다. 설교, 기도, 찬송, 전도, 헌금, 교육, 교제 등 그 무엇 하나 중단될 일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사실입니까? 우리는 이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우리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인본주의적이고 세속화되어 있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삶이나 초대교회의 삶에서 성령님께서 떠나셨다면, 그분들의 삶은 곧 바로 개점휴업 상태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의 삶은 철저하게 성령님에 의한 삶이었고, 성령님의 인도와 능력에 의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가 살아야 할 성령에 의한 삶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성령에 의한 삶

우리의 신앙생활은 전적으로 성령에 의한 삶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삶이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말씀을 잘 연구하고 해석해서 우리의 삶에 잘 적용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잘 적용하여 실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우리의 신앙과 삶을 위한 근본적으로서 어떠한 역사가 성령의 역사인지 혹은 다른 역사인지도 우리는 성경에 비추어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렇지 못합니다. 마치 육법전서를 잘 지키듯이 성경에 나오는 내용들을 우리의 힘으로 잘 지키는 그러한 책에 의한 생활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에 의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것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6은 새 언약은 문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것이라고 명백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또한 예수님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사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까지를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 밤 12제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마지막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당부하신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가르침들은 예수님의 유언과도 같은 가르침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가르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령님에 관한 가르침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이제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이 떠난 그 자리를 예수님께서 가셔서 보내실 성령님께서 채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14:16).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16:6-7).

 

우선 여기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성령님을 또 다른 보혜사라 칭하고 계십니다. 그럼 왜 성령님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셨을까요? ‘또 다른 보혜사라는 말은 원래 보혜사가 계시고, 그분 말고 또 다른 보혜사라는 말인데, 그럼 원래의 보혜사는 또 누구를 말할까요? 우리는 다른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를 보면 이에 대한 해답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헬라어에는 다른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두 가지 있습니다. ‘알로스라는 단어와 헤테로스라는 단어가 그것들인데, 그 차이는 이렇습니다. ‘알로스는 마치 같은 종류의 사과 중에서 이 사과 말고 다른 사과라고 말할 때 쓰는 것처럼 같은 종류의 다른 것을 의미하고, ‘헤테로스는 배와 사과가 다르고 남자와 여자가 다른 것처럼 다른 종류의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보혜사에서 쓰인 단어는 바로 알로스라는 단어입니다. 그럼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말은 예수님이 우리의 보혜사이고, 성령님은 예수님과 똑같은 다른 보혜사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삼위일체의 교리를 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과 똑같은 보혜사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신과 똑같은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소개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저 책 한 권을 남겨두고 떠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기에 나의 모든 뜻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 책을 잘 연구하여 이 책에 나오는 나의 뜻을 너희들의 최선을 다해 실천해라고 말씀하시면서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행했던 것처럼 예수님과 똑같은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과 교제하며 그분의 인도를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예수님은 더욱더 나아가 자신이 가시고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 자신이 그냥 제자들 곁에 계속 남아 있는 것보다 제자들에게 있어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당시 제자들에게 있어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그들 곁에 남아 게시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시고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오시는 것이 그들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님이 오셨기에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가깝게 즉, 우리 속에 계시고, 또한 모든 성도들 속에 동시에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본보기

우리의 신앙생활이 성령에 의한 삶이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삶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삶과 신앙과 사역을 위한 온전한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중의 하나가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의 온전한 삶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예수님과 똑같이 되는 것이며(8:29 참조),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우리를 예수님의 형상으로 빚어가고 계십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하나님은 토기장이로써 오늘날 진흙과 같은 우리를 가지고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가고 계신데, 하나님 곁에 세워진 모델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델인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를 그 형상대로 빚어가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어가시는 그 최종적인 결과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위한 온전한 모델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보면 어떠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확하게 성령에 의한 삶을 사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정확하게 성령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사실을 명백하게 볼 수 있는데, 특별히 누가복음은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선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에 앞서 요한에게서 침례(세례)를 받으셨는데,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님 위에 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3:22).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바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는데, 누가복음은 그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4:11).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광야에서 돌아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사건을 기록하면서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4:14)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누가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분의 사역을 감당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에 대한 누가복음의 강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416절 이하에서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첫 번째 사건을 보아도 누가복음이 얼마나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가를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사건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가장 첫 번째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누가복음에도 명백하게 나와 있습니다(4:15 참조). 그러나 누가복음은 이 사건을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기록의 맨 처음에 기록함으로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복음은 이 구절을 앞으로 나올 예수님의 사역을 비추어볼 수 있는 하나의 패러다임(paradigm)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야말로 앞으로 나올 예수님의 공생애를 요약해 놓은 것과 같으며,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여기에 제시된 패러다임 혹은 모델을 통해서 앞으로 나올 예수님의 공생애를 이해하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그 구절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4:16-20).

그럼 성경은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해 놓은 것과 같은 이곳에서, 그리고 앞으로 행해질 예수님의 사역을 비추어 볼 수 있는 패러다임과 같은 이 구절에서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여기에서 두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예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사역의 성격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역을 한 마디로 줄이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그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어떠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전인적인 치유사역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사역도 바로 이러한 성격인 사역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이 강조하고 있는 다른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누가복음을 쓴 저자가 기록한 사도행전도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038절은 예수님의 사역을 한마디로 요약하면서 역시 이 두 가지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라.”

 

오늘날 어떤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그 모든 능력의 일들을 행하신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창조의 하나님의 본체시요, 삼위일체 하나님의 2위인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 예수님께서 창조의 하나님의 본체이신 것은 틀림없습니다(1:3, 1:15-17 참조). 저는 누구 못지 않게 그 사실을 확실하게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동안에는 하나님으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사역을 감당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우선 성경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자기를 비우고 오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2:6).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하나님의 속성 중 어떠한 것들을 비우고 오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추측하는 것은 부질없는 신학적 논쟁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성경을 살펴볼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동안에는 최소한 하나님의 속성 중 몇 가지는 행사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속성 중에 하나는 무소부재인데,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이 온 우주에 동시에 존재하시는 분이신데,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동안에는 무소부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갈릴리 바다에 계실 동안에는 갈릴리 바다에만 계셨지, 동시에 예루살렘이나 로마에는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한 결과라고 볼 수 있겠죠, 예수님은 또한 이 세상에 계실 동안에는 전지하지도 않으셨던 것처럼 보입니다. 최소한 예수님의 말씀과 성경에 의하면 그렇게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그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24: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나 상황을 아신 것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서 그저 자동적으로 아신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예를 들어, 예수님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시면서 그를 데리고 온 그의 아버지에게 그 아이가 언제부터 그랬느냐고 물으셨습니다(9:21). 그리고 또 전능하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동안에는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인 전능을 최소한 자신의 마음대로 활용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래서 살펴보겠지만, 예수님은 여러 차례 반복해서 자기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거나, 혹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동안에는 하나님이기를 중단하셨다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이 땅에 계실 동안에도, 그리고 부활하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는 오늘날에도 온전한 하나님이십니다. 특히 이 땅에 계실 동안에는 그분은 온전한 하나님이자 온전한 인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동안에는 하나님으로써의 자신의 고유의 능력을 가지고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신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그것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사실 요한복음 14:12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모든 능력의 일들을 포함한 하나님 나라 사역의 전반적인 일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바로 앞에 나오는 구절을 보아도 이러한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10-11).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수를 믿는 자들은 누구든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행하시되, 성자 하나님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능력을 가지고 행하셨다면, 이 말은 맞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는 예수님과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인 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아도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시되, 하나님으로써의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감당하신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수를 믿는 자들도 자신이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를 말씀하시면서, 그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보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셨고, 따라서 우리도 성령의 능력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요한복음 167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대조해 보면 이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이와 같이 예수님은 온전한 하나님이시오, 창조의 하나님의 본체시로되 이 땅에 계실 동안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분의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이러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한 놀랍고도 새로운 이해의 눈을 우리에게 뜨게 해줍니다. 우리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에 다양한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서 행하셨던 그 놀라운 일들이 더 이상 단순히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역사적인 일들인 아니라, 같은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도 행할 수 있는 일들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들을 볼 때, 이제 그것들이 더 이상 성경책에나 나오는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날 바로 내가 행할 수 있는 신나고 생동감 넘치는 일들로 내 마음에 와 닿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에도 이제 더 이상 그것들이 교회사에 대한 교과서와 같이 지루하고 딱딱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나에게 놀라운 사역들을 하나씩 가르쳐주는 신나는 교본이 됩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입니까?

 

그럼 예수님의 사역 속에 나타난 몇 가지 성령의 은사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이 신나는 사실을 같이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사역에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상황에 대하여 그 사람이 전에 알지 못하던 사실들을 계시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지역으로 가시며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수가성 우물가에서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제자들을 음식을 사러 동네로 들어가고 없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남편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가서 남편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셨고, 그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4:17-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참으로 놀랍고도 충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식의 말씀의 은사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말씀을 듣고 난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태도를 전혀 새롭게하여 그 자신이 복음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보라며 예수님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그 동네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까! 그런데 만약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 여인의 삶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인 그 여인의 남편에 관한 사실을 당연히 아실 수 있었고, 그래서 그분이 그 여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이 구절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이 사실을 아셨고,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통해서 그 여인에게 이 말씀을 하셨다면, 이 구절은 우리에게 전혀 새롭게 와 닿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이 놀라운 일은 더 이상 단순히 예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역사적인 사실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날 우리들도 성령의 능력으로 행할 수 있는 놀랍고도 신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오늘날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와 같이 놀라운 일들을 행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상황에 대해 하나님의 지혜와 안목을 계시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의 경우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끌고 옵니다. 그러면서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여인은 돌로 쳐죽이게 되어 있는데 이 여인을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이미 돌이 하나씩 다 들려져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그 여인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만약 그들이 진정한 예수님의 의견을 원했다면, 간음은 혼자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남자도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됐든지 예수님은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졌습니다. 모세의 율법대로 그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자니 그것은 그 외식하는 군중들에게 한 귀중한 생명을 내어주는 것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다른 말을 하자니 그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당신은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자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예수님께 달려들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그 여인을 예수님께 끌고 온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러한 상황에서 조용히 몸을 굽혀 땅에다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셨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 때 땅에다 무엇이라고 쓰셨을까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예수님은 조용히 하나님의 도움과 지혜를 구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우리가 잘 아는 명언인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8: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을 끌고 왔던 사람들은 들었던 돌을 힘없이 내려놓고 하나 둘씩 떠나가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의 말씀의 은사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는 영분별의 은사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너에게 이것을 알게 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이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는 자신을 붙잡는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16:23)고 꾸짖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순간적으로 한 사람의 입을 통해 전적으로 다른 영의 감동으로 인한 말이 나오는 것을 분별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오늘날 참으로 필요한 것도 이러한 영분별의 은사입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의 사역에는 예언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믿음의 은사, 기적을 행하는 은사 등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셨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은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셨으며, 특히 요한복음은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데, 그 삶을 한마디로 줄이면 아무 것도 임의로 행하지 않고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여 그것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앞장에서 자세하게 살펴보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단지 이 점을 잘 보여주는 몇 개의 성경구절만을 나열하고자 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구절이 요한복음 5:19-20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일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예수님은 비슷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 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 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5:30).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 인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8:26,28). “만일 내가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않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10:37-38).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못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14:10-11). 이처럼 예수님은 철저하게 성령에 의한 삶을 사셨습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본보기

예수님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신이 전적으로 성령에 의한 삶을 사셨을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그들도 철저하게 성령에 의한 삶을 살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의 사역을 감당했고, 또한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았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성령에 의한 삶을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24:45-48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이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이 명령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앞으로 어떻게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과 또 이를 위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증인이 될 것인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 위로부터 능력을 받는 것이 핵심이므로 그렇게 할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에 나오는 제자들은 이미 3년 반 동안 예수님께로부터 훈령을 받은 제자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신앙훈련을 받는다 할지라도 감히 그들 근처에도 가지 못할 만큼 훌륭한 신앙훈련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훌륭한 스승 밑에서 그들은 배웠습니다. 그저 일주일에 한 두 시간씩 배운 것이 아니라, 3년 반 동안을 하루에 24시간씩 같이 살며 배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훈련은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오늘날 우리들 대부분의 신앙훈련과 같이 단순한 이론적인 훈련이 아니라, 그 놀라운 예수님의 사역을 직접 보며 배우고, 배운 것들을 자신들도 직접 실천해보는 체험적인 훈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러한 그들에게 그 3년 반 동안의 훈련으로는 결단코 부족하니 위로부터 능력이 입히울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무게를 가진 명령입니까? 그리고 이처럼 예수님께서 그러한 그들에게 이러한 명령을 내리셨다면, 우리는 과연 얼마나 더 위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에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고, 성령의 강림과 아울러 그들은 놀라운 능력을 받고, 그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들의 사역을 감당하고 그들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여기에서 오순절 사건에 대해 그것이 일회적인 구속사적 사건인지 혹은 반복되는 은사적 사건인지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제가 여기에서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가 오순절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든지 상관없이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우리가 주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요, 이것은 또한 주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그렇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철저하게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똑같은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과 똑같은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이에 대한 예를 저는 여기에서 들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전체가 바로 이에 대한 예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 당시 사도들 뿐 아니라, 스데반이나 빌립과 같은 집사들도, 그리고 아나니아와 같은 무명의 성도도 다 똑같이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의 사역을 감당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임의로 행하지 아니하시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순종하셨듯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특히 그들은 각 개개인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집합적으로 교회도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여 순종하였습니다.

 

우리는 먼저 각 개개인의 성도들이 성령님께 민감하여 이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사실을 사도행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셨던 것처럼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임한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건은 그 당시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 전체를 위해서, 그리고 그 이후 교회의 선교 방향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건을 통해서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성령에 충만하여졌을 뿐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서 비로써 교회가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따라서 그 사건을 통해서 비로써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될 기초가 마련되었고, 그 결과 오늘날 우리에게까지도 복음이 전파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베드로가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의 집에 절대로 들어가지 않았고, 그들과는 식사도 같이 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사실은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는데, 어떻게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베드로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환상을 보여주셨고, 그가 그 환상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에게 방금 그 집의 문 앞에 도착한 고넬료의 사람들과 함께 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했거나 혹은 그 음성을 들었다 할지라도 그 당시의 관습 때문에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중요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빌립이 그 당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건은 그 내시의 지위와 큰 권세로 볼 때 에디오피아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음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사를 보아도 우리는 복음이 에디오피아에 매우 일찍부터 들어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그 당시 빌립은 사마리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서 광야로 내려가라고 말했고, 빌립은 그 천사의 말에 순종하여 그 바쁜 중에도 사람이 전혀 없는 광야로 내려갔습니다. 그랬더니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 사막을 지나고 있었고, 빌립이 그들을 보는 순간 성령께서 그에게 그들에게 접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빌립이 이에 순종하여 그 마차로 접근하게 되면서 이 일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빌립이 천사의 말을 듣지 못했거나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했더라면, 그리고 들었더라도 그에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중요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구원받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사도 중의 사도요, 신약성경의 반 정도를 기록한 바울이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그 당시 다메섹에 살던 무명의 성도인 아나니아가 기도하는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에 순종하여 바울에게 나아가 그를 위해 기도해 줌으로서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 사건을 통해 구원받고 치유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아나니아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거나 혹은 들었더라도 위험성을 이유로 이에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최소한 그 시점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들이 사도이건 집사이건 그리고 소위 평신도이건 다 하나님의 성령께 민감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았고, 그 결과 주님께 귀하게 쓰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은 각 개개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령께 민감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집합적으로 교회도 역시 그러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교회는 당연히 이렇게 하나님의 성령께 민감하여야 하며, 또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특히 오늘날 우리가 말세에 있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기를 원할진데, 교회 안에 무엇보다도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체계가 회복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렇게 교회가 집합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에 민감하여 순종한 것에 대한 두 가지 좋은 예가 나옵니다. 그 중 첫 번째 예는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안디옥 교회입니다. 거기에 보면 그 당시 세계복음화를 위한 놀라운 출발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안디옥 교회는 그 당시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고 각처에 교회를 세우는 일을 위해 매우 귀하게 쓰임 받게 되었고,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실현되어 세계 각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고, 교회가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까? 성경에 보면 그 교회의 지도자들이 금식을 하며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을 드리고 있었는데, 성령께서 그들에게 성령이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셨고 이게 교회가 순종함으로서 이루러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선 성경에는 성령께서 그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 말씀하셨는지는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곳에 그 교회의 교사들과 선지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성령께서 그곳에 모여 있던 선지자 중 한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통로를 통해서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든지 상관없이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거기에 모여 있던 그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이 그것이 성령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도자들뿐 아니라, 그 교회 전체가 이것을 확인하고 이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 안에 있어야할 하나님의 명령체계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 체계가 확립될 때에야 비로서 그 교회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행하는 교회가 되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체계가 철저하게 무너져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말로는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요, 성령님이 교회를 인도하고 계신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사람들이 교회의 머리요, 교회를 운영해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온갖 인본주의적이고 인위적이고 상업주의적인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말세지말을 당한 이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역사를 위해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오늘날 무엇보다도 교회 가운데서 하나님의 명령체계의 회복을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집합적으로의 교회가 하나님의 성령께 민감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두 번째 예는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는 소위 예루살렘 회의의 모습이 나오는데, 이 사건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회의는 그 당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에 있어 그들에게 할례 등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르도록 할 것인지를 놓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회의로서, 이 회의의 결과는 복음의 성격 등 앞으로 교회 전체에 미칠 영향이 매우 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중요한 문제를 놓고 그 당시 지도자들은 철저하게 성령께 민감하였습니다. , 물론 거기에는 격렬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토론은 오늘날 우리들의 많은 토론과 같이 자기들의 생각과 고집을 내세운 토론이 아니었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같이 나누며, 이것을 말씀에 비추어보는 토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토론 결과 어떠한 경로로건 성령의 뜻을 확인하고 이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결과를 이방인의 교회에 편지로 모내면서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15:2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들도 그리고 초대교회도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집합적으로 철저하게 성령에 의한 삶을 살았습니다. 즉 성령의 능력으로 자기들의 사역을 감당했을 뿐 아니라, 철저하게 성령님께 민감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령에 의한 삶을 살기 위한 몇 가지 제안

이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은 전적으로 성령에 의한 삶입니다. 그럼 우리가 성령에 의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령에 의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들이 할 수 있는 몇 가지를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성령님은 주권적인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은 강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임의대로 동원할 수 있는 강한 어떤 힘이 아닙니다. 오늘날 어떤 성도들은 성령님을 그렇게 생각함으로서 교회 안에서 많은 물의를 일으킬 뿐 아니라, 미혹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분의 임의대로 주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그분을 움직일 수 있는 몇 가지 제안들이 아닙니다. 아무도 그분을 임의대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부리시며, 우리는 그분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와 있는 제안들은 무엇입니까? 그것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마음껏 역사하실 수 있는 비옥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제안들입니다.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음의 제안들을 따라 그분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제한 받지 않고 마음껏 역사하실 수 있도록 그분께 협조할 때, 그분은 우리 가운데서 더욱 자유롭게 그리고 더욱 강하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해야 합니다.

모든 죄는 성령님을 근심케 만듭니다. 에베소서 4:30-31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죄를 버림으로서 우리의 삶을 깨끗케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죄를 회개함으로서 할 수 있습니다. 요한11:9은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성령님의 임재를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11-13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대신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와 계신데, 무슨 성령을 또 구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없는 곳이 없이 동시에 다 계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종종 어느 한 곳에 임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 거기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참고로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은혜요 특권입니다(33:16 참조). 그런데 오늘날 안타까운 사실은 많은 성도들이 그러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우리가 성령님을 구한다는 말은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이므로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구할 수 있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15:14).

 

그럼 우리가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어떻게 구합니까? 우리가 그저 많이 부르짖어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간단하게 그러나 믿음으로 성령님, 오셔서 우리를 채워 주소서라고 기도함으로서 그분의 임재하심을 구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향하여 항상 갈급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7:37-39은 말합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하나님은 갈급한 자를 채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큰 성령의 능력과 더 큰 성령의 사랑과 성령께서 우리를 더욱 주님으로 채워 주시도록 지속적으로 갈급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갑급해야 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갈급함을 채워 주시기를 또한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무디의 삶에서 이에 대한 좋은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무디는 시카고 지역에서 꽤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디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더 큰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습니다. 얼마나 사모했는지 나중에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만큼 사모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뉴욕에서 감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사건을 감히 말로 담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무디는 세계적인 부흥사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성령님과 함께 걸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25은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이 말은 만약 성령님이 우리 삶의 근원이시라면, 우리는 우리 인생의 여정을 그분과 함께 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우리 삶의 방향과 여정을 인도하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우리들을 지시하는 하나님의 세심하고도 조용한 음성에 대해 민감하기를 개발해야 합니다(5장 참조).

 

성령님의 말씀에 복종함으로서 그분께 우리 자신을 기꺼이 드려야 합니다.

오늘날 능력치유라는 책을 통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죤 윔버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있으라는 곳에 있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을 하고 있을 때, 보통 성령께서 임하신다. 환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나는 처음에는 거의 어떠한 성령의 기름부음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기도하는 과정에서 나는 자주 성령께서 내게 오셔서, 내 기도에 능력을 주시고 환자들을 치유하시는 것을 느낀다. 나는 예수님께서 완전한 결과를 약속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나에게 병든 자들을 치유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기도하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8:18-20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분부한 것을 가르칠 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우리와 항상 동행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에 의한 삶입니다. 그런데 성령에 의한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로 할 수 없는 은혜요 특권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성령에 의한 삶을 살 때, 우리 속에 하나님의 평강과 기쁨이 넘치고(14:17), 우리 삶에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과 열매가 가득하게 됩니다(15:5).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태까지 그렇게 하지 못하셨다면, 지금부터라도 성령에 의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에 주님의 기쁨과 평강이 가득하며, 주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도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