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성령의 은사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7)
우리는 앞장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에 의한 삶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즉 성령께 민감하여 순종하는 삶이고,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삶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대로, 예수님께서 먼저 그러한 삶을 사셨고,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그러한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또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그러한 삶을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그러한 삶을 살기 원하며, 그러기 위해 성령의 능력을 힙입기 원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능력을 힙입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한 가지 부분이 바로 성령의 은사에 대한 부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하나님의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이 땅에 나타내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올바로 깨닫고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옷 입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되 하나님의 길에 행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신다 할지라도 우리는 미혹되어 그릇된 길로 빠지게 되고 말 것이며, 성령의 술도 쏟아져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번 기회를 통해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잘 말해주고 있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을 중심으로 몇 가지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성령의 은사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들을 살펴보고자 하는데, 아무튼 이번 기회를 통해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올바로 깨달아 하나님의 놀라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주님의 놀라운 사역을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되 끝까지 하나님의 길에 행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놀라운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은사란 무엇인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살펴봄에 있어 우선 성령의 은사가 무엇인가부터 살펴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말해주는 구절이 고린도전서 12:7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성령의 나타남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나타남입니다. 좀 더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령의 나타남을 NIV 영어성경은 the manifestation of Spirit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영어 manifestation이란 단어는 ‘춤추는 손’이라는 뜻을 가진 두 개의 라틴어 단어가 합해져서 생긴 단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는 마치 성령의 춤추는 손과 같습니다. 성령께서 여러 모양으로 여러 사람을 통해 나타나시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은사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래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 볼 것입니다.
은사가 주어지는 목적은 무엇인가?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는 목적은 한 마디로 말해서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 14:4).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 14:26). 그런데 여기에서 덕을 세운다는 말은 영어로 build up이라는 단어로서 마치 건물을 세우듯이 우리를 주안에서 세워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는 우리를 주안에서 세워주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덕을 세우되 방언의 은사를 제외하고는 상대방의, 혹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위에 나오는 고린도전서 14:4이 말하듯이 방언의 은사만 독특하게 자기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예, 우리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사도 바울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방언의 은사를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고전 14:5,39 참조). 사도 바울은 심지어 자기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방언을 더 많이 함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고전 4:18). 위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은사는 온전하고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매우 귀한 것입니다. 참고로 방언의 은사는 우리에게 영적인 안테나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령께 더욱 민감하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즉, 우리의 덕을 세워줍니다. 저 개인의 경우를 보더라도 만약 저에게 방언의 은사가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제가 한 많은 일들은 저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환경적으로 불가능한 가운데서도 제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개인적인 통역을 통해서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알 수 있었고 그래서 제가 그 일들을 추진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은사는 근본적으로 교회의,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덕을 세우는 방언도 좋지만 교회의 덕을 세우는 예언을 더욱 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14:1-5). 그리고 고린도전서 14:12에서는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성령의 은사)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NIV 성경은 위에 나오는 고린도전서 12:7에서 은사가 주어지는 목적을 공동의 유익(for the common good)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상대방을 만져주시기 위해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시는 것을 말합니다. 한두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여기 환자가 한 사람 있는데 성령께서 나를 통해서 나타나셔서 그 사람을 고치셨다면, 바로 병 고치는 은사가 그 순간 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또 여기 하나님의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길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성령께서 나를 통해 나타나셔서 혹은 역사하셔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경우 지혜의 말씀의 은사가 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성령의 은사들로 인해서 많은 문제들이 야기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자기의 부를 축적하는데 사용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들을 가지고 교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데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들을 가지고 파벌을 조성하고 성도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로 인하여 교회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여 분열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들이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는 목적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이 한 가지 사실만이라도 분명히 깨닫고 기억한다면, 우리는 성령의 은사로 인한 많은 부작용들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그것을 통해서 자기의 부를 축적하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서 다른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만져주시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은사를 주실 것인가는 누가 결정하는가?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에게 무슨 은사를 주실 것인가는 성령님(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고전 12:11, 그 외에도 고전 12:7, 엡 4:11 참조). 그리고 이 사실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우리에게 주신 은사의 종류를 결정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라면,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은사들을 서로 대조하여 시기하거나 반대로 교만해서는 절대로 안될 것입니다. 사실 초대교회 시대나 오늘날이나 자기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들을 서로 대조하며 시기하고 질투하거나 반대로 교만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태까지 성령의 은사가 강하게 역사하는 많은 교회에서 공동적으로 나타나는 한 가지 특징은 성령의 은사들로 인하여 교회가 서로 나누어지고 분열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일부 교회와 교단에서는 성령의 은사들을 아예 무시해 버리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진 성령의 은사들이 교회의 분열시키는데 사용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사실입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2:12-26에서 몸의 비유를 들어 우리에게 이 점을 매우 강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펴고 이 구절을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어떠한 은사가 더 귀하고 또 어떠한 은사가 덜 귀한가에 대한 우리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는 매우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모든 은사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모두 다 요긴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여러 가지 은사들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가 주어지느냐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을 어떻게 감사하며 신실하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에게 무슨 은사를 주실 것인가를 결정하시는 분은 성령님이라는 사실이 내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것은 우리가 받은 은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맺는 열매에 의해서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결정하시는 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저에게 세 아들이 있는데, 마치 성탄절을 맞이해서 내가 나의 세 아이에게 각각 내 마음에 정한대로 선물을 사주는 것과 같습니다. 선물을 받는 사람이 그 선물을 받을 만한 일을 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선물이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은사도 우리들이 그 은사를 받을 만한 일을 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는 문자 그대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어떠한 은사를 받았는가 혹은 어떠한 은사를 받지 않았는가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아까 저에게 세 아이가 있다고 했는데 예를 들어, 내가 이번 성탄절에 큰 아이는 중학생이라 만년필을 사주고, 둘째는 초등학교 4학년이라 새 책가방을 사주고, 막내는 초등학교 3학년이라 레고를 사주었다고 가정해 보십니다. 그런데 내가 둘째 아이에게 “너는 왜 만년필이 없어?”라고 그를 책망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일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를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활용하는가를 포함해서 우리가 맺는 열매를 가지고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고로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열매입니다. 우리가 이점에 대해서 더 살펴보기에 앞서, 이점과 관련해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사는 주어지는 것이고 열매는 길러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Gifts are given; fruits are grown). 즉, 성령의 은사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고, 반면에 열매는 우리에게 선물로 어느 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와 동행하시는 성령께 민감하여 순종할 때 맺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 사이의 조화와 균형이 매우 중요합니다. 한편으로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들이 매우 필요합니다. 우리가 보다 효과적이고 능력 있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사들이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지난번에도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자신이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반면에 또 한편으로 우리는 성령의 열매가 하나님 앞에서 성령의 은사 못지않게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둘 다 필요하며, 동시에 그 둘 사이의 조화와 균형이 우리에게 필수입니다. 오늘날 일부에서는 성령의 은사를 앞세운 나머지 여러 가지 은사들로 인하여 벙벙 뛰는 반면, 성령의 열매는 거의 없어 불신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반면에 또 다른 일부에서는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며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반면, 성령의 은사를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약 오늘날에도 그러한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난다면 우리에게 먼저 나타나야지....우리가 그들보다 훨씬 더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저들이 하는 모양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저들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들은 참된 은사들이 아니다.’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주님의 사역에 있어서 매우 무기력하고 무능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도 잘못된 다른 극단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둘 다 필요합니다. 그리고 둘 사이의 조화와 균형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이러한 조화와 균형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삶에는 어느 누구의 삶보다 성령의 열매가 넘쳤던 반면, 동시에 그분의 삶에는 모든 성령의 은사들이 어느 누구의 삶보다 더욱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우리들은 정확하게 이러한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은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들은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우리가 위에서도 잠시 살펴본 것처럼 은사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은 교회에서 많은 문제들을 야기 시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오늘날 교회 안에 그러한 잘못된 견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은사들을 가지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사용할 수 있기 위해, 저는 여기에서 은사에 대한 잘못된 견해 중 대표적인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 잘못된 행실들이 은사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위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약간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과 중복되는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여기에서 이 부분을 더욱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을 활용함에 있어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오히려 성령의 은사들로 인하여 타락하여 미혹되고 말 것이며,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진 은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남겨줄 것입니다.
첫째, 은사를 신앙 성숙도의 척도로 이해하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는 각 은사에 일정한 수준의 신앙의 깊이를 임의로 부과하는 견해를 말합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방언의 은사는 가장 기본적인 은사이므로 방언을 하는 사람은 그래도 기본적인 신앙은 갖춘 사람이다. 거기다가 덧붙여서 통역을 하는 사람은 그보다 신앙이 더 좋은 사람이고, 예언을 하는 사람은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은 참으로 신앙이 좋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반영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은사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견해가 팽배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날 때, 그들을 ‘추앙’하고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은사들이 나타나는 장본인들은 내심 ‘그래도 내가 이 정도의 신앙은 되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은사를 주셨지’라고 생각하며 교만해집니다. 그리고 그러한 은사들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을 업신여기기도 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필연적으로 교회 안에서 시기와 질투를 야기 시켜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사는 우리 신앙의 성숙도와는 별개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말 그대로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이 우리 가운데 나타날 때, 은혜의 선물인 은사 자체나 통로에 불과한 그 은사가 나타나는 사람들을 볼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러한 은사를 주셔서 우리들을 만져주시는 하나님을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가운데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반면에 교만하거나 자랑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렇게 귀한 은사들을 우리 가운데 나타내셔서 우리들을 만져주시는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은사를 통해 관심을 받고 찬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은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은사를 훈장이나 메달로 생각하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는 은사들을 자기들이 노력한 대가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하는 견해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내가 3일 금식기도 했더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셨다’ 혹은 ‘내가 40일을 작정하고 철야기도 했더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병 고치는 은사를 주셨다’라고 간증합니다. 이 말 속에는 당연히 ‘내가 이렇게 열심히 노력했더니 하나님께서 그 대가로 나에게 이런 은사들을 주셨다’라는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물론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이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모하는 자들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신령한 은사들을 간절히 사모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 상).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하려고 하라”(고전 14:1).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은사들은 우리의 노력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더 이상 은혜의 선물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은사들을 우리의 노력의 대가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보상이라고 생각할 때, 이러한 견해는 필연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내세우는 교만에 빠지게 만들 것입니다.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은사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자기들의 헌신과 노력을 자랑하고 내세웁니다.
셋째, 은사의 나타남을 자신의 신학과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신임으로 이해하는 견해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매우 미묘하고 민감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고로 주의 깊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들을 하나님께서 자기들이 내세우는 신학적인 주장과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를 신임하시는 증거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교리와 우리가 하고 있는 행위를 신임하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러한 은사들이 우리 가운데 나타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입니다. 그리고 반면에 또 어떤 사람들은 어떠한 모임에서 성령의 강한 은사들이 나타날 때, 그 은사들을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임으로 생각하여, 그들의 열매나 그들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한 것인지를 살펴보지도 않은체 그들을 맹목적으로 따릅니다. 그래서 그 결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고, 또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혼란과 혼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두 가지 면에서 이러한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심지어 거역하는 자에게도 은사를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에베소서 4:7-10과 거기에서 인용하고 있는 시편 68:18을 대조하여 보면 이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십니다. 그분은 심지어 악인에게도 비와 햇빛을 내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심지어 거역하는 자에게도 그가 간절히 사모할 때 성령의 은사들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은사는 후회함이 없습니다. 성경 로마서 11:29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는데, 그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잘못 사용한다고 해서 하나님은 그 은사를 즉각 다시 취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사탄을 보십시오. 그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우리는 그의 모든 능력이 고유적으로 그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그가 타락하기 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능력들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거역하여 타락하고 난 후,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가지고 지금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사는 후회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도 모르고 성령의 은사들을 가지고 온갖 자기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 사용하며 미혹의 길을 가면서도, 성령의 은사들이 여전히 자기에게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속적으로 신임하고 계신 증거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래 전에 그들에게서 떠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사실도 깨닫지 못한체 계속적으로 멸망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는 이런 일이 가능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예언하며)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우선적으로 구해야 할 것이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 가운데서 성령의 은사들을 잘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소유냐 기름부음(나타나심)이냐?
우리는 위에서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나타나심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한층 더 넓히기 위해 여기에서 이점을 좀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성령의 은사를 소유의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즉, 성령의 은사를 우리가 소유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개념에 의하면, 예를 들어 만약 내가 예언의 은사를 받았으면 나는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고, 반면에 다른 은사들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는 나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한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은사들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나에게 없는 새로운 은사들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나에게 주어진 은사들을 발견하여 개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유의 개념으로서의 은사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사관은 오늘날 매우 널리 퍼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문제가 많습니다. 우선 은사가 우리의 소유로 주어진 것이라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자기의 덕을 세우는 은사인 방언의 은사를 제외하고는 그 무엇하나 우리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은사가 없습니다. 그것이 예언의 은사이건 혹은 병 고침의 은사이건 우리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사람을 위해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은사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 다음, 만약에 이러한 은사관이 맞다면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 사이에 나오는 많은 성경 구절들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2:29-31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본문에 내포된 이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아니다’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곧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리고 고린도전서 14:1에서도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라고 말합니다(고전 14:14). 보십시오. 방금 ‘다 예언하겠느냐? 아니다’라고 말하고 나서 곧 바로 이어서 예언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은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소유의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이 구절들은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필요에 직면하게 됩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기름부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때그때 성령께서 택하신 사람을 통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소유의 개념으로 성령의 은사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은사는 가지고 있는 반면 그 나머지 은사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기름부음의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령께서 그분이 택하시는 대로 각 성도를 통해서 각종 다양한 은사들을 그때그때 나타내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의 두 구절도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심이라”(고전 12:7).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고전 12:11).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 속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고 계신다는 말은 우리를 통해서 모든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는 그분의 나타나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따라서 우리는 순간 순간 성령께서 택하시는대로 우리를 통해 다양한 은사들을 나타내시기를 사모하고 기도하고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관점에서 성령의 은사를 새롭게 인식할 때, 우리는 특히 교회가 모일 때, 성령의 지휘 아래 다양한 은사들이 각자를 통해 나타남으로써 주님의 몸이 세워지기를 사모하고 기도하고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26이 이점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초대교회의 예배가 어떠했었는가를 우리에게 매우 잘 보여 주는 구절로써,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우선 여기에서 너희가 모일 때는 교회가 모일 때를 말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로 모일 때를 말하죠. 그런데 초대교회 시대에는 교회가 모일 때에 성령께서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이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심으로서 그 예배를 지휘하고 인도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 계시를 주시기도 하고, 저 사람에게 방언을 주시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통역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찬양도 그리고 가르치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통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와 같이 교회가 모일 때 성령께서 여러 사람들을 통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우리들을 구원해 주시고, 치유해 주시고, 세워주시고, 주님의 길로 인도해 주시도록 사모하고 기도하고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예배는 절차와 순서가 성령의 자리를 차지해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예배 가운데는 살아 계신 성령의 생명력이 고갈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성령의 은사의 4가지 단계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이렇게 기름부음의 차원에서 새롭게 이해하게 될 때, 성령의 은사에는 4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이 4가지 단계는 지금 세계적으로 하나님께 놀랍고 귀하게 쓰임 받고있는 빈야드 운동의 지도자인 죤 윔버 목사가 정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지극히 성서적일 뿐 아니라, 또한 성령의 은사에 대한 다른 어떠한 설명보다도 고린도전서를 포함한 성경의 가르침에 가장 잘 부합한다고 믿습니다.
역할(role)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주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주님의 명령을 따라 전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도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가르치고, 치유를 위해 기도하고, 위로하고, 권면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런고로 이 단계는 합리적인 사고의 차원에 속합니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실함입니다. 사실 성도로써 우리들이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자질 중의 하나는 바로 신실함입니다(히 3:1-6 참조). 우리가 예수를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아도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전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결과가 어떻든 상관없이 신실하게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치유를 위해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낫지 않는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어차피 고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치유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주님의 명령을 따라 치유를 위해 신실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했으면, 그 사람이 낫건 낫지 않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똑같은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가르치는 것이나 위로하는 것 등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나타나심(manifestation)
두 번째 단계는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해 나감에 있어 성령께서 택하시는대로 나타나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께서 나에게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문제를 알려 주십니다. 그전에 내가 전혀 알지 못하던 사실을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그 정보에 기초해서 그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그 사람이 놀라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깨닫고 내가 전한 복음에 대해 매우 많은 관심을 보이더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만약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면, 그 순간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단계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가르치는 은사가 자주 나타나는 것을 느낍니다. 상담을 하면서 자주 경험하는 일입니다만, 저는 자주 난관에 봉착하곤 합니다. 도무지 내 지혜로는 무엇이라고 권면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을 자주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저는 겉으로는 계속 상담을 하면서, 속으로는 “성령님, 도와주세요. 성령님,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면 저는 자주 성령께서 대화를 인도해 가시면서 감히 제가 생각지도 못했던 말로 그 사람의 당면한 문제와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정확하게 제시해 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런 경우 지혜의 말씀의 은사가 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두 번째 단계는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해 나감에 있어 성령께서 택하시는대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혹은 우리를 통해 나타나시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의 차원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면서 성령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고 구하고 기대해야 합니다. 속으로라도 “성령님, 도와주세요.”라는 기도를 자주 드리면서 그분의 인도와 역사를 기다리고 기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가끔 하나님이 택하시는 대로 우리에게 혹은 우리를 통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우리들을 만져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렇게 성령의 나타나심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가 이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순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만, 전에도 여러 차례 이 사실을 강조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이상 강조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저는 여기서 이러한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 항상 쉬운 것만은 아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로는 ‘나는 주님을 위한 바보가 되었다’라는 자세를 가지고 사람들로부터 창피와 모욕을 당할 각오를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한 번은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제가 기억하기로는 수요일 저녁예배 시간이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성령께서 임하셔서 우리들을 만져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는데, 성령께서 저에게 그 자매에게 본 교회에 등록하라고 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요즈음 우리 나라에서 전반적으로 그리고 특히 신도시에서는 더욱이 한 성도라도 자기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인데, 만약 내가 그렇게 말했다가는 이제는 성령까지 빙자해서 교인을 끌어들이려 한다고 오해를 받을 것이 너무나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다른 말씀을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침묵하셨습니다. 그러자 저는 참다못해서 다급한 나머지 “여기 교회를 찾고 계신 분이 계신데, 그분은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라고 돌려서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성령께서 이제 다시 감동을 주시면서 몇 가지를 더 지적해 주셨고, 저는 그 문제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예배를 마치려고 기도하는데 성령께서 예배를 마치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성령께서 저에게 아까 그 자매에게 주셨던 말씀을 제가 온전히 전달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치는 기도를 하다가 중단하고, “여러분 제가 아까 한 말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역시 우회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다시 기도를 중단시키셨고, 역시 같은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래도 저는 도저히 정면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없어 여러 가지 말을 사용했으나 역시 간접적으로 그러한 내용의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무려 네 차례나 했습니다. 그러니 그날 예배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매우 어색하고 이상했습니다. 특히 성도들은 그리고 그 중에서도 방문한 사람은 더욱 더 그 모든 내막을 몰랐을 텐데, 그들은 그 모든 것을 어떻게 느꼈겠습니까? 급기야 저는 “성령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고 나서야 마치는 기도를 끝까지 드릴 수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그 자매는 곧 바로 나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그 자매가 그날 밤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어 왔고, 그 이후 그 자매는 본 교회에 등록했으며, 지금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놀라웁게 그 자매를 만지시고 빚으시고 다듬으시고 세우시고 계십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왜 그날 그렇게 하셨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나타나심에 순종하는 것은 항상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사역(ministry)
세 번째 단계는 사역입니다. 이 단계는 이렇습니다. 방금 살펴본 것처럼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나아갈 때 때로는 성령께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특정한 은사가 자주 나타날 뿐 아니라, 또한 그 차원이 매우 높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 그 사람에게는 이러한 사역이 성령님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에게는 다른 은사보다도 특히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가르치는 은사가 자주 그리고 때로는 매우 강하게 나타납니다. 저에게 맡겨주신 사역과 관련이 있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은사에 대해서 말하는 사역이 바로 이 부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직분(offices)
마지막 단계는 직분입니다. 이 단계는 교회가 각 성도에게 나타나는 사역을 발견하고 그를 공식적으로 그 직분에 임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4:28은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은사가 바로 직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사용된 단어의 시재가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2:10-11절에 나오는 단어들의 시재와는 달리 단순 과거형인 것을 보더라도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말하는 은사는 앞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그때그때 나타내주시는 은사와는 달리 임명해 주신 은사를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도 일군들이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세워져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야 일군들이 하나님이 세우시는 일군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보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사역에 대한 어떠한 검증과정도 전혀 거치지 않습니다. 재직들의 경우 우리는 단지 교회에 대한 충성도나 교회에 등록한 연도들을 감안하여 임명합니다. 그리고 전도사나 목사의 경우 우리는 목회 경력이나 학력을 보고 임명합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교회가 하나님께서 움직이는 교회가 되지 못하는 가장 주된 원인 중의 하나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평신도 지도자들을 포함해서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성령께 민감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또한 이것이 바로 교회의 직분이 타락하게 된 가장 주된 원인 중의 하나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시면서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희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5-12절)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들은 직분을 마치 신분처럼 여기며, 그것을 통해서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기려고 하는 것보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목소리를 내세우고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기’위해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하나님의 일꾼을 세운 좋은 예가 하나 있습니다. 1978년 어느 날 위에서 언급한 죤 윔버 목사에게 타드 헌터(Todd Hunter)와 그의 아내 데비(Debbie)가 찾아와서 자기들을 교회 개척자로 웨스트버지니아주로 파송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죤 윔버 목사는 그들의 그 뜨거운 열정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즉시 보내지 않았습니다. 대신 윔버 목사는 그들에게 병원에 가서 환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부터 시작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 말에 순종하여 병원에 가서 환자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간호사들의 많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 당시 타드의 나이는 겨우 만 22살이었습니다. 그러나 머지 않아서 병원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일부는 고침을 받기도 헸습니다. 이것을 본 죤 윔버 목사는 이제 그들에게 구역을 개척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이번에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매우 활동적이고 살아 성장하는 한 구역이 탄생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사역을 통해 구원받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모든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드디어 성령께서 죤 윔버 목사에게 그들을 보낼 때가 되었다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죤 윔버 목사는 그들을 웨스트 버지니아주로 보냈습니다. 그 당시 타드의 나이는 23살에 불과 했습니다. 그로부터 7년 후 그가 개척한 교회는 성도들이 500명이나 되는 교회로 성장하였으며, 그는 그 외에도 그 지역에서 40개의 다른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습니다. 오늘날 그는 매우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에 있는 모든 빈야드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을 지켜보고 교회가 그를 일군으로 세우는 것이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 회복되어져야 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일군을 이렇게 세우고 임명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성령의 은사의 길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려서부터 누가 ‘성경에서 사랑 장이 어디입니까?’라고 물으면 ‘고린도전서 13장이요’라고 대답할 수 있을 만큼 고린도전서 13장을 잘 알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많은 성도들의 가정에 가면 액자 속에 고린도전서 13장이 걸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많은 성도들이 소위 사랑 장이 왜 하필이면 고린도전서 13장에 기록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까지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중간에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은 단순한 기독교적인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길로써의 사랑의 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문맥을 보아도 이러한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마지막절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매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가장 좋은 은사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 뒤를 따라 바로 나오는 구절이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고린도전서 13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4:1을 보십시오. 거기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자세히 보면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이 곧 바로 연결되고 13장은 마치 괄호와도 같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13장은 무엇에 대해 말하는 구절입니까? 바로 고린도전서 12장 마지막 절에서 말하는 “제일 좋은 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3장에 곧 바로 이어서 나오는 14장 1절도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린도전서 13장은 가장 좋은 은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구절이 아니라, 모든 성령의 은사를 활용함에 있어 뒷받침되어야 할 사랑의 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활용함에 있어 반드시 따라야 할 매우 중요한 점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아무리 놀라운 성령의 은사들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랑의 길을 따라 행해지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아무 유익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12:1-3이 이것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장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를 보십시요. 이 구절은 지금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중에서 방언, 예언, 믿음, 구제와 같은 몇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히 그 은사들이 매우 강하게 나타나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방언의 경우 심지어 천사의 말을 하는 경우를, 성령의 은사로써의 믿음은 기적을 낳는 믿음을 말하는데 우리 앞에 있는 산을 옮길 만큼 믿음의 은사를, 그리고 예언의 은사 중에서도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만큼 강한 예언의 은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렇게 성령의 은사가 우리에게 아무리 강하게 나타난다 할지라도 우리가 이것을 사랑의 길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아무 유익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들이 상대방에게는 큰 유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그들은 병고침을 받는다거나,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다거나, 도움의 손길을 받게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런 유익도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가 우리를 통해 아무리 강하게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길을 따라 성령의 은사들을 행해야 하며, 그 때에야 비로서 우리는 성령께서 주신 은사들을 잘 활용한 것에 대한 유익과 상급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은사의 길로써의 사랑의 길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3:4-7에 잘 나와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우리는 여태까지 이 구절을 일반적인 사랑으로만 이해해 왔습니다. 물론 그렇게 이해한다고 해서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살펴본대로 이 구절은 근본적으로 성령의 은사의 길로써의 사랑의 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 하나를 성령의 은사를 활용하는 길에 적용시켜 살펴보기 바랍니다. 그럼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오래 참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성급해서는 안됩니다. 인내를 가지고 행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온유함으로 행해야 합니다. 겸손함과 친절함으로 행해야 합니다. 오늘날 조금만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도 매우 거칠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는 투기함으로 행해서는 안됩니다. 시기하거나 질투함으로 행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반면에 성령의 은사를 자랑하거나 그로 인하여 교만해서도 안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저 작은 은사를 가지고도 자기가 제일인 것처럼 교만하고 자랑을 일삼으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무례함으로 행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은사가 조금 나타난다고 때로는 욕설을 하고, 나이가 많은 분들에게도 반말을 함부로 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를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 행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의 은사는 그것을 통해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은사를 활용하는 사랑의 길을 하나 하나 더욱 상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심지어 이것을 외워서 머리 속에 기록해 놓으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태까지 저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은 말세에는 어느 때보다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조짐들이 이미 세계 여러 곳에서 시작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올바른 자세를 확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위에 살펴본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들을 잘 깨닫고, 또한 그대로 활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동시에 성령께서 여러분을 통해 강하게 나타나실 때, 과거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미혹되지 아니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길에 행하므로 하나님께로부터 큰 상급을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