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아담적 본성
7장 아담적 본성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설 때 성도들은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 십자가의 복음으로만 성도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복음이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란 우리가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설 때 열립니다. 즉 하나님을 알기 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 되는 삶을 살 때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신앙의 본질이 소홀히 되어버린, 성령의 은사만을 구하거나 성령의 기름부음만을 추구하는 삶,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 등에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열리지 않습니다. 특히 거짓신앙체계 즉 율법주의, 기복신앙, 인본주의는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혼동 가운데 빠트리며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어지게 만듭니다. 거짓신앙은 십자가의 복음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가치관 내지는 생활양식으로서 신앙이 아니라 ‘신앙체계’입니다. 사고방식입니다.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기 위해서는 자신과 공동체 내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거짓신앙체계를 뽑아내고 참 신앙으로 무장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담적 본성이란
죄로 인해 타락한 본성을 말합니다
우리 신앙은 부정적인 몇 가지를 삶 속에서 제거했다고 해서 긍정적인 신앙의 모습을 전환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사람들 속에 있는 아담적 본성 속에는 자신의 올바르지 않은 태도나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 자신의 실패한 모습을 제거하는 일에 온통 초점을 맞추는 속성이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자신의 삶 가운데 있는 어둠을 쫓아내고 어둠을 몰아내는 일에 자신의 모든 역량이 총동원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삶 속에서 거짓신앙을 파괴하는 일이 몇 가지 행동을 단순히 고치는데 있지 않고 근본적인 중심의 변화와 가치관의 변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 거짓신앙체계인 율법주의와 기복신앙, 인본주의는 생각보다 사람들 속에 깊게 뿌리내려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율법주의나 기복신앙에 대해서 설교를 듣다보면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래, 내 삶에서 율법주의를 파괴해야돼, 내게서 기복신앙을 버려야돼.” 이렇게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떻게 율법주의를 끊을 수 있을까? 어떻게 기복신앙을 버릴 수 있을까?’하는 일에 온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일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부분이 다루어지지 않으면 거짓신앙은 또다시 고개를 들고 삶을 파괴할 것입니다. 거짓신앙은 뿌리가 깊은 나무와 같아서 몇 가지 행동을 고치는 일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거짓신앙의 뿌리에 있는 근본적인 부분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되어야만 온전히 거짓신앙을 끊어질 것입니다.
거짓신앙은 사람들의 안목을 흐려 놓았습니다.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서 거짓신앙을 발견하는 일도 어렵지만 그것을 끊어내는 일 역시 어렵습니다. 또 끊어내는 과정에서도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거짓신앙의 뿌리는 관점의 문제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는 것’ 곧 영적 분별력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거짓신앙을 뿌리 채 뽑아내는 일은 그만큼 쉽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은 ‘아는 대로’ 행하지 않고 ‘보는 대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보는 대로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갑자기 어떤 일을 만났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알고 있는 성경의 내용대로 반응을 하지 않고 평소에 그가 가지고 있었던 관점 즉 영적 분별력이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반응을 한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믿음의 관점으로 보아 반응한다면 참으로 아름답지만 믿음의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으로 보아 반응을 한다면 이는 더욱 더 하나님의 기준을 가리게 됩니다. 그런 연고로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신선한 느낌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접하다가 그냥 돌아서서 옛날로 가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을 봅니다.
아담적 본성은 자아를 형성합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본성을 아담적 본성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담적 본성에서 자아가 형성됩니다. 거짓신앙의 뿌리에는 아담적 본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아까 아담적 본성은 자기 속의 부정적 요소들을 제거하면 참 신앙 위에 설 줄 알고 자기 속의 부정적 요소들을 제거하는 일에 온 초점을 맞추게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둠이란 쫓아낸다고 쫓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빛이 비치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어둠입니다. 어둠을 사라지게 하고 싶으면 빛을 비추면 됩니다. 아주 간단한 원리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어둠의 실체를 드러내는 일을 아담적 본성이 합니다. 아담적 본성이란 타락한 본성입니다. 이 타락한 본성이 율법주의나 인본주의적 초점을 갖게 합니다. 관점의 문제를 양산해 냅니다. 아담적 본성은 관점을 뒤틀리게 만들었고 그 결과 거짓신앙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자기 관점으로 보는 대로 행하는 삶의 양식’이 거짓신앙입니다. 이 관점은 하나님의 길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바꿔 말하면, 하나님의 길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아담적 본성이 다루어지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거짓신앙은 아담적 본성이 십자가의 복음으로 다루어질 때 파괴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이 주는 평안과 자유, 승리를 누릴 때 거짓신앙은 더 이상 우리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아담적 본성은
십자가의 복음으로 다루어질 때 파괴됩니다
이 장에서는 거짓신앙의 뿌리에 있는 아담적 본성에 대해서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부분과 중복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3장 1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선악과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증표이자 하나님의 주권의 상징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미 살펴본 그대로입니다. 모든 실과를 모두 다 먹을 수 있지만 선악과만은 먹지 못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있기를 하나님은 소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인간들이 놀라운 하나님의 풍요함을 누리기 원하셨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을 때 진정한 승리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사단이 타락했던 이유처럼 말입니다. 인간이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순종치 않았고 마침내 에덴동산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에덴동산 밖에서의 생활은 인간들에게 많은 고초를 겪게 만들었습니다. 고생을 하며 농사를 지어야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후회를 했을까요. 선악과만 따먹지 않았더라면 그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텐데 말입니다. 풍요로움을 누리고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 한 마디의 유혹에 그들은 무참하게 무너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은 다른 말로 인간이 자기 인생을 자기 스스로 보장해 보려는 사고를 심었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인간에게 ‘강요된 의지’ 대신 ‘선택할 수 있는 의지’ 즉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 의지를 가지고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살면서 모든 풍요로움을 만끽하게 하셨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결과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 스스로 책임져 보려고 할 때 인간은 타락한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을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마음, 이것이 아담적 본성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인생의 가치관 배후에는 바로 이 아담적 본성이 있습니다. 이사야 14장은 아담적 본성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사 14:12-15)
위 구절은 흔히 사단의 타락 배경을 설명하는 구절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계명성”은 사단인 루시퍼를 일컫는다고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14절의 “지극히 높은 자”는 하나님을 일컫습니다. “비기기라”는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사단의 의지입니다. 사단의 반역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사단인 루시퍼는 원래 천사장이었습니다. 에스겔 28장 1절부터 19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 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어늘 ◇ 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와서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하고 ◇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 네 큰 지혜와 장사함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인하여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 하였으니 ◇ 그런즉 내가 외인 곧 열국의 강포한 자를 거느리고 와서 너를 치리니 그들이 칼을 빼어 네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치며 네 영화를 더럽히며 ◇ 또 너를 구덩이에 빠뜨려서 너로 바다 가운데서 살륙을 당한 자의 죽음 같이 바다 중심에서 죽게 할지라 ◇ 너를 살륙하는 자 앞에서 네가 그래도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이라 하겠느냐 너를 치는 자의 수중에서 사람뿐이요 신이 아니라 ◇ 네가 외인의 손에서 죽기를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죽음 같이 하리니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열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 네가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므로 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네 가운데서 불을 내어 너를 사르게 하고 너를 목도하는 모든 자 앞에서 너로 땅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 ◇ 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인하여 다 놀랄 것임이여 네가 경계거리가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로다 하셨다 하라
위 구절을 보면 루시퍼는 처음에 완전한 천사장이었음을 봅니다. “두로 왕”은 사단을 가리키는 예언적 단어라고 신학자들은 입을 모읍니다. 그렇다면 사단은 처음에 천사장으로서 사명을 잘 완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신처럼 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갈망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얼마있지 않아 불의는 드러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흔히 ‘하나님처럼 되고 깊은 야망’을 가리켜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교만이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개인적인 야망입니다. 하나님의 대적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것이 교만입니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교만은 아담적 본성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죄악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지 않게 하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머물려고 하지 않는 죄악의 특성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자원이 아닌 자기의 자원으로 살려고 하는 시도를 계속 하도록 만듭니다. 위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무능한 존재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게 마련입니다. 자기가 똑똑하다고 여기는 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안다고 여기는 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다 못해 자신의 주먹이라도 믿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만큼 무언가를 의지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담적 본성이 하나님을 찾게 하기보다는 하나님 외의 것을 찾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대체하는 것들에 눈길을 두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아담적 본성은 ‘하나님의 대체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로 우리의 초점을 돌려놓습니다. 분별력이 흐려져 있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점은 자신의 무능함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자기의 본 모습을 보는 것이 관건입니다. 창세기 4장 26절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인간들이 하나님을 찾은 배경에는 자신들의 참 모습이 어떠한지 본 것이 있습니다. 자기들의 무능함을 본 것입니다. 그러자 인간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찾습니다. 가인의 살인 이후, 많은 실패를 경험한 후에야 인간들은 자기들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들처럼 말입니다.
자기의 무능함을 본 자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스라엘이 가장 영적으로 어두웠던 시기는 사사기 시대라고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사사기 시대는 어떤 패턴이 있음을 봅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이 패턴을 5단계로 말하고 있습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의 사사기 시대의 영적 순환 패턴입니다.
< 사사기 시대의 영적 패턴>
1. 백성이 주님을 섬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
2. 백성이 주님을 버린다.
백성들이 주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긴다.
3. 하나님이 대적들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패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대적들에게 패하여 괴로움 당하는 것을 허락하심으로써 심판을 내리신다.
4. 백성이 부르짖으며 도움을 청한다.
백성이 주님께 부르짖으며 도움을 요청한다.
5.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해 주신다.
하나님이 구원자를 일으키셔서 자기 백성을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켜 주신다.
사사기 시대의 영적 패턴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영적 패턴입니다. 그런데 왜 사사기 시대에는 그렇게 영적인 어둠이 짙었을까요? 사사기 17장 6절과 21장 25절입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여기서 우리는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사기 시대의 사람들은 자기들 관점대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자기들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이 아닌 자기의 자원으로 사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보다 실제적으로는 더 큰 죄를 지었던 사람입니다. 살인교사죄를 비롯하여 간통죄 등등 사울 왕에게서 볼 수 없었던 죄악들이 그에게서 발견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추억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에 합한 자라
다윗은 그렇게도 죄를 많이 지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다윗보다 죄도 덜 지은 사울 왕을 버리신 하나님이시지만 다윗을 끝까지 지켜주십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다윗을 자기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신 걸까요? 해답은 이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자원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기 위해 항상 하나님께 물었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머물기를 좋아했습니다. 이런 점들이 그의 결정적인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원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지 않는 것은 죄악입니다. 교만입니다. 자기의 관점으로 살아가는 시도 자체가 죄악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사건부터가 사람들의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였던 배경에는 예수님의 탄생이나 자람, 예수님의 삶과 사역이 자기들의 관점과 너무나도 맞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메시야가 마구간에서 태어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메시야가 나사렛에서 사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메시야가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실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배격하는 일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이런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생활적인 면에서 깨끗하고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배운 바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지 않은 이유로 하나님은 그 사람을 쓰지 않습니다. 반면에 다른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주 넘어지는 사람입니다. 결코 리더가 되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직면하는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경우가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다윗과 사울의 차이입니다.
다윗이 문제가 많았던 반면, 사울은 인간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 아래 들어가는 일에 있어서 다윗은 적극적이었던 반면 사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아니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들어가는 일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입니다. 대부분 하나님의 주권 아래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인생을 자기 스스로 책임져 보려는 자세 때문입니다. 즉 아담적 본성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들어가는 일을 막았던 것입니다.
거짓신앙의 뿌리인 아담적 본성은 구약의 전 시대에 나타나는 거짓신앙의 근원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을 읽어 가는 가운데, 전 시대에 걸쳐 거짓신앙이 등장하고 있음을 봅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거짓신앙을 보노라면 혀를 차게 됩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도 질긴가?” 생각하면서 치를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절대 아닙니다. 아니, 오늘날은 더 할 수도 있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광명의 천사로 자신을 가장하여 성도들을 미혹하려고 덤벼들기 때문입니다.
앞장에서 살펴본 대로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를 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즉, 자기들 나름대로 삶의 방편을 찾았던 인간들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순복하는 삶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을 버리는 일은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일과 함께 있게 됩니다. 즉 자기 자원으로 살게 마련입니다.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일 뿐입니다.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렘 2:13)
거짓신앙은 인간 스스로 살아가라고 인간들을 부채질을 합니다. 인간들은 미혹에 넘어가 나름대로 살아보려고 애를 쓰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온갖 억압이 가득할 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도리어 엄청난 고통 속에 살았듯이 스스로 자기 자원을 이용하여 살려고 애쓴 사람들은 엄청난 억압 속에서 신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관계에서의 어려움, 자연 재해, 전쟁 등등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까닭입니다.
야곱 집과 이스라엘 집 모든 가족아 나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열조가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관대 나를 멀리하고 허탄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통과케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기름진 땅에 들여 그 과실과 그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가증히 만들었으며 ◇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지 아니하며 법 잡은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를 항거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을 좇았느니라 ◇ 그러므로 내가 여전히 너희와 다투고 너희 후손과도 다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2:4-9)
인간의 본성 즉 아담적 본성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아담적 본성은 하나님의 길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해결책을 찾으려 하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혼동 가운데 빠집니다. “나는 기도도 많이 하고, 성경도 많이 보고, 하나님의 도움을 많이 구하니까 나에게는 아담적 본성이 죽었는가봐.”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이유, 봉사하는 이유, 성경 읽는 이유 등등 하나님을 위해서 행하였던 행위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혹 자기 자원을 많이 만들기 위한 목적은 아닌지요. 가슴 뿌듯함을 위해 그렇게 하진 않았는지요. 보상심리를 위해 그렇게 종교적 행위를 다 한 것은 아닌지요.
아담적 본성은 하나님의 관점보다는 자기의 관점을 더 신뢰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잘 드리고 하나님을 향해 제사를 드리지만 그들의 헌신은 하나님의 길을 따라 드려지지 않았고 자신들의 관점을 드렸기에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었습니다. 아담적 본성이 갖는 심각성은 참으로 큽니다. 많은 헌신과 제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담적 본성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더니 ◇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 이 내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 15:11-32)
작은 아들이 자기 집에 그냥 살았더라면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독립해 보고자 하는 노력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스스로 인생을 책임져 보려고 한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 자원으로 자기 인생을 살아보려고 한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스스로 계발해 보려고 작은 아들이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비유를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도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안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게 자신들을 과신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자세히 말씀드리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던 바리새인들을 위해 말씀하신 비유로서, 하나님은 죄인들 즉 자기 자원으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오면 풍성한 삶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소개하신 것입니다.
작은 아들의 경우에서 우리는 자신의 자원으로 사는 곳에는 태가 막힌다는 사실을 봅니다. 안됩니다. 막힙니다. 다 소비합니다. 나중엔 먹을 것도 없어집니다. 완전히 코너에 몰립니다. 가뭄까지 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기 자원으로 사는 삶의 결말입니다. 하나님은 징계하시는 분입니다.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태가 막힌 것입니다.
아담적인 본성은 계속해서 자기 자원으로 살아보라고 사람들을 부추깁니다. 아담적인 본성은 하나님의 기준 앞에 서는 일을 방해합니다. 아담적인 본성은 하나님의 주권 앞에 복종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가는 삶을 아담적인 본성이 가로막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갖지 못 하도록 유도합니다. 결과 율법주의, 기복신앙, 인본주의가 팽배해 집니다. 거짓신앙체계가 팽배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그 뿌리에는 아담적 본성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아담적인 본성의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대면하여 서지 목하도록 아담적 본성은 혼동을 일으킵니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만듭니다. 자기-의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만듭니다.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만듭니다. 물론 실패하지만 말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해 보려고 하는 행위인데 실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 모두가 아담적 본성이 야기하는 문제들입니다.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으면서 아담적 본성은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결심합니다. “그래, 지금부터 하나님 말씀을 잘 지켜야지, 순종해야지, 남편이 성질을 내어도 참아야지, 잘 견뎌야지.” 이렇게 결심한 사람은 약 열 번 정도는 잘 이겨냅니다. 견디고 참고 순종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힘에 버겁습니다. 열 한 번째 될 즈음에 그동안 참았던 것을 다 폭발시킵니다. 그동안의 수고가 다 허사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아담적 본성이 하는 일입니다.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는 일을 철저하게 가로막습니다.
성경에서 “육체”란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은 삶의 영역입니다.
아담적인 본성은 자신의 도덕적인 선함이나 선한 동기를 의지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보려고 노력하게 만듭니다. 성경에서 “육체”란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은 삶의 영역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영(靈)의 반대말로서의 육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적인 본성은 ‘자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아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신앙체계에 빠지게 하는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자아가 십자가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한,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아는 믿음에 의한 삶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설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이 부분을 다루십니다. 십자가를 조명하시면서 이 문제를 우선 다루십니다. 실재(reality)가 되도록 다루십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아’를 떠올릴 때 “그래, 자아를 죽여야 해, 난 내 자아가 죽지 않아서 문제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아는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죽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의지할 때 자아는 십자가에서 죽어줍니다. 로마서 6장 11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라”는 말은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 2장 20절 전반부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나니 …
보십시오. 이미 자아가 죽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 라는 분은 자아의 작용에 대해서 몇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아는 자기를 기쁘게 합니다
첫째, 자아는 자기를 기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자아는 자기 스스로를 기쁘게 하려는 일을 합니다. 사람들은 본인도 모르게 “나를 기쁘게 하고 싶다”라는 욕망이 있습니다. 자아는 이 일을 위해 자기 속에 변호사를 둡니다.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면 속의 변호사가 변호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자꾸만 변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셨지 자신을 변호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변호하는 배경에는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과 타협하고 융화하려고 하는 배경에는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피는 배경에는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자세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이유에도 자기를 기쁘게 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자아의 하는 일입니다.
자아는 하나님의 평가만을 소중히 여기게 하기보다는 사람들의 평가에 매달리게 만듭니다. 자아의 일이기 때문이죠. 이것이 다루어지지 않으면 영적 분별력을 위한 자세가 확립되지 못합니다. 또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선한 일을 해도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합니다.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본능입니다. 자아가 하는 일은 이렇게 열정을 갖더라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면서 동시에 자신도 기쁘게 하려는 의도가 있도록 만듭니다. 여러분, 여러 명의 친구들이 여러분에게 “야, 정말 너 잘 생겼다”라고 칭찬해 주면 집에 가서 당장 거울을 들여다 볼 것입니다. 그래, 난 잘 생겼어, 알아주니 고맙네“하면서 스스로 기뻐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전 어렸을 적부터 ”야, 이길수 너 정말 케네디 닮았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전 그 말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얼마나 듣기 좋은 말입니까. 잊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듣기 좋은 말을 붙잡고 살게 마련입니다. 자아의 하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종은 되지 못합니다. 사람의 종이 되어버리니까요. 또 이렇게 되면 어떨 때에는 기분이 좋다가도 어떨 때에는 기분이 엉망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기분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칭찬해 주면 기분이 좋다가도 조금만 비판해도 금새 어깨가 처집니다. 너무나 많은 경우 인간들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삽니다.
어디나 “열심파”들은 있습니다. 그런데 열심파들의 공통점은 자기 힘으로 무언가 열심히 해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자기 힘으로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두 손을 다 듭니다. “아이고 내 힘으로는 안 되는 구만” 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그런데 열심파들은 자기보다 더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견디기 어려운 시기와 질투에 빠지기 쉽습니다. 열심 그 배후에는 대부분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이것이 아담적인 본성이 있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자아의 활동은 기복신앙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자기 만족은 자기 소유의 기쁨입니다. 자기 소유에 대한 만족이 자기 만족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어디에 처하든지 자족할 줄 아는 자세와는 전혀 다릅니다. 자기 소유의 만족에서 오는 자족감은 기복신앙입니다.
자아는 자기를 과신하게 만듭니다
둘째, 자아는 자기를 과신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자기과신이란 자기를 지나치게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신뢰하고 자기를 의존케 하는 것이 자아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선하게 만들고 열심을 내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렇게 선하려고 하고 열심을 내려는 배후에는 ‘자기 성취감’이 있습니다. 자기 성취감이란 자기를 신뢰한 결과에 대한 보상입니다. 자아의 본성입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식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렇게 주님을 부인하게된 데에는 자기신뢰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언젠가 주님에게 “주여, 전 주님과 함께 죽는 자리도 가겠나이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자기를 신뢰하는 소리입니까.
많은 성도들이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노력과 자기 힘으로 지켜보려고 안간힘을 다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자기 노력으로 지키려고 하는 배경에는 자기 만족을 위한 도사림이 있게 마련입니다. “너무한 말이 아니냐?”라며 반문하실 분도 있겠지만 사실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사실은 매우 귀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힘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아담적 본성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기 힘으로 자기 인생을 개척해 나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성도들은 반복적으로 넘어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거짓신앙은 인격체와의 만남보다 신을 향한 행위를 강조합니다. 행위가 본질보다 강조되다보니 성도들은 행위를 잘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 줄로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원수의 계략이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다루심이 있습니다. 그래야만 회복과 부흥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쓰실만한 그릇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들을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의 훈련은 사람들을 빚으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기를 빚으시는 손길 아래서 불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다루심 안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이유는 자아의 자기 신뢰 때문입니다. 자아는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켰던 때를 기억합니다. 그리곤 이렇게 생각합니다. “역시, 나였어.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잘 지켰잖아.” 자기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지 않고 자기 자원으로 산 결과입니다.
성도들은 십자가를 통해 은혜로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은혜로만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하나님을 신뢰하게 마련입니다. 반면 자기 자원으로 살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은 불가능해집니다. 기도사역 시에 가끔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라는 기도를 받아보셨을 줄 압니다. 대개 이 때엔 “그래 내가 할 수 없어. 주님만 할 수 있어, 주님만 바라보아야지, 주님의 은혜로만 가능하지, 그래, 다 내려놓아야지“하면서 마음에 굳은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기도 사역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신이 하려고 또 다시 덤벼듭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자아가 그렇게 조종한 것입니다. 자기를 신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 맡긴다“의 의미조차 뒤틀려 있는 실정입니다. 이 진정한 의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담적 본성이 그렇게 조종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열심으로, 여러분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해보려고 몸부림친다면 틀림없이 실패합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신앙생활 자체가 불가능한 법입니다.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기 위해서는 은혜에 의한 삶과 믿음에 의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데, 이 때 필요한 부분이 자기 노력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하는 일입니다. 자아를 포기하는 일입니다. 자아는 성도들로 하여금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게는 하지만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지는 않게 합니다.
자아는 자만심에 빠지게 만듭니다
셋째, 자아는 자만심에 빠지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즉 자기 교만에 빠지게 만듭니다.
자기교만은 자기 관점과 연관이 있습니다. 자기교만 즉 자만심은 자기 관점을 만들어 냅니다. 자기 확신이 굳어진 상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관점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저기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라는데 심각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면 자기 관점은 편견이 되어 버립니다. 편견이란 교만이 굳어져 만들어진 자기 관점의 결정체입니다. 편견이 만들어지면 자기의 기준대로 모든 매사를 평가하며 판단해 버립니다.
자아의 역할이 증대되면 될수록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바리새인화’ 되어 버립니다. 종교적인 교만함이 꽃을 피웁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교만에 빠져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교만은 하나님의 길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결국엔 거짓신앙으로 살게 만듭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대적하는 자리에 서도록 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자기교만은 배우려는 자세를 갖지 않습니다. 겸손한 삶이란 자아가 내려진 상태에서 가능한 삶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교만의 문제는 다른 것과 쉽게 섞이고 교묘하게 변장하기 때문에 찾아내기가 가장 어렵다.
어떤 이는 이렇게 교만에 대해 말했습니다. “자기 속에 교만이 많을수록 다른 사람이 교만한 것을 싫어한다.” 여러분 다른 사람이 교만한 것이 자꾸만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교만한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이 없으면 안 된다”는 이해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살 수 없음을 아는데 겸손이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어도 살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자들입니다. 교만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입니다. 자아 즉 아담적 본성은 자기교만을 만듭니다. 자아의 하는 일 중 하나입니다. 아담적 본성이 처리되지 않으면 자기교만에 빠집니다.
고린도후서 3장 16절부터 21절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 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여기서 “성전”은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성전을 더립히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이야말로 성전을 더럽히는 행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교만은 그리스도인의 ‘성전된 삶’을 파괴하는 일과도 같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잘 지적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교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기준대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일을 서슴치 않습니다. 남을 고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도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뽑아 내려고 덤벼듭니다. 이것이 자기교만입니다. 자아가 하는 일입니다. 교만함은 자기를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성령의 비췸을 거부합니다.
자기교만은 대개 두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자기우월의식’과 ‘자기-의’가 그것입니다. 율법주의의 대표적인 특징들입니다. 아담적 본성은 사람을 철저하게 거짓신앙관 속에 빠트립니다.
잠언 1장 29절부터 33절입니다.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라 ◇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
위 구절은 자기교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 구절은 자기교만에 빠지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태도가 자기교만에 빠지는 원인이라고 지적합니다. 경외함이 없는 태도는 하나님의 교훈을 받지 않게 만듭니다. 배우려하지 않는 자세를 갖게 합니다.
열왕기하 5장 9절부터 14절입니다.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상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침받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너무나 잘 아는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나아만 장군이 선지자의 말을 들은 후 취한 태도를 보며 자기교만의 문제를 보기 원합니다.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상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을 듣고 나서 분이 나 자기 나라로 돌아갑니다.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디 두고 보자”하는 심정으로 발길을 돌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고자 하는 바는 나아만의 처지입니다. 알다시피 나아만 장군은 문둥병자입니다. 절대절명의 사람입니다. 해결 대안을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오죽 했으면 남의 나라에까지 왔겠습니까. 그런데도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 한 마디에 분노합니다. 그리고 곧 바로 돌아섭니다. 나아만이 이렇게 분을 낸 배경에는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나아만은 자기가 장군으로서 특별 예우를 받아야만 마땅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한 예우를 받지 못하자 분노한 것입니다.
자기교만으로서의 자존심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자존심은 하나님이 행하심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게 만듭니다. 자존심은 이만큼 악한 것입니다.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것, 자기교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는 마땅히 특별 예우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이유를 여기서 엿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신앙생활 했던 경력, 열심 때문에 특별 예우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그동안 성경공부를 많이 한 것이나 많이 배웠던 일들, 이것들을 생각하면 자신은 마땅히 특별 예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이제 가르치는 입장에 서야만 한다고 스스로를 여깁니다. 이것이 자기를 붙잡는 행위입니다. 자기-의와 연관이 있습니다.
자기우월 의식은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심입니다
‘자기우월’은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며 자기 자신을 과신하는 가운데 자신이 지금까지 해 온 봉사, 헌신, 경력 등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입니다. 내세우고 싶어하며 드러내고 싶어하는 욕망입니다. ‘자기우월’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도 ‘자기우월’을 붙잡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복음 앞에 가야만 산산이 부숴집니다.
‘자기우월’을 붙잡고 있는 이유는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풍요로움을 경험하지 못한 연고입니다. 우리는 나아만 장군에게서 자기우월 의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기우월 의식을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길을 모르게 됩니다.
자기교만은 편견을 만들어냅니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에서 받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교훈은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자기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아만 장군 역시 그랬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아마 이스라엘 땅에 오는 도중 별의별 생각을 다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영접할까? 선지자가 나와서 깍듯이 인사를 해 올까? 어떻게 나를 고칠지 궁금하군. 아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를 고칠 꺼야.” 그러나 자기 기대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나아만 장군은 화를 내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이것은 편견에서 나온 자기 생각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다릅니다. 아담적 본성은 자기 생각을 합리화시킵니다. 정당하다고 믿게 만듭니다. 이것이 편견입니다.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편견을 인정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나아만 장군의 스토리는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다행히도 나아만 장군은 지혜로운 종들의 애원으로 병 고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담적 본성은 자신의 방법을 신뢰하게 만들고 자신의 길을 모색하고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법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믿음은 하나님만 의지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자아는 자기를 의지하게 만들기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