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의무리 2018. 2. 8. 08:23

8장 하나님의 다루심

 

 

지난 장에서는 아담적 본성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 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적 본성을 다루시는 방법을 살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적 본성을 어떻게 다루시는가?

 

우리의 눈이 자신에게 매여 하나님께서 이 시대 가운데에서 행하시는 바를 보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물과 피를 쏟으신 주님이십니다. 이 일은 우리의 일을 이루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안목이 하나님의 일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관점이 우리에게 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관점이 우리 자신에게 매이면 우리교회, 나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기름부음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관점을 가져야겠습니다. 보는 것에 관하여 변화가 있어야겠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함께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 즉 십자가에 달라신 인격체이신 주님을 개인적이고 사실적으로 알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더욱 알게되면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더욱 더 한층 열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하시며 그들을 영광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며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던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특징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기자원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열심이나 자신들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의지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자원을 공급받을 수 있는 길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이론이 아닌 실제를 알았던 자들입니다.

 

많은 성도들의 문제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일인데도 자기자원으로 성취해 보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그렇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신앙으로서 자기자원으로 살아가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전반적인 성도들의 흐름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거짓신앙체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리고 거짓신앙체계의 뿌리에는 아담적 본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담적 본성은 거짓된 신앙의 형태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아담적 본성은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설 때에만 다루어지며 아담적 본성으로 생겨난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아담적 본성은 관점을 형성합니다

 

거짓신앙은 어느 한 가지 모습을 바꾼다거나 끊어버린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자신에게서 율법주의의 한 가지 특징이 나타났을 때 그 한 가지를 끊어버린다고 해서 율법주의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뿌리에 아담저기 본성이 있는 한 계속해서 율법주의의 또 다른 특징들이 나타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아담적 본성은 관점을 형성합니다. 즉 안목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관점에서 율법주의, 인본주의, 기복신앙 같은 거짓신앙체계가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아담적 본성은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에 의한 삶, 은혜에 의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성도들이 믿음에 의한 삶을 살아보려고 노력하지만 어떤 문제 앞에서 반복적으로 넘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아담적 본성은 신앙을 이론화시키고 실제적인 능력을 경험하면서 살지 못하게 만듭니다.

 

인간관계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올바른 신앙 위에 서 있으면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가 관계가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를 잘해 보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한다거나 부정적인 부분을 절제해 보지만 한계가 있음을 여러분들은 많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잘 안됩니다.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마음먹은 것처럼 관계의 문제가 잘 풀리지 않습니다. 사실 관계의 문제를 자기자원으로 풀려고 하면 잘 안 풀립니다. 오히려 더 꼬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왜 더 꼬이는가?’가 궁금합니다. 노력했는데도 잘 안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자원으로 해결해 보려고 했기 때문에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원으로만 해야 하나님의 뒷받침하시는 열매가 나타나는 법입니다.

 

아담적이란 말은 아담이 타락한 이유를 뜻하는 말입니다. 아담적 본성은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에게 전해져 오고 있는 본성입니다. 자아를 가리킵니다. 오늘은 성경에서 아담적 본성을 어떻게 다루시는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아담적 본성은 이미 십자가에서 처리되었습니다

 

첫째, 우리의 아담적 본성은 이미 십자가에서 처리되었습니다.

 

로마서 63절부터 보겠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4절에 의하면 우리 자아는 이미 죽었다라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지은 후 죽었다라는 말은 하나님을 향하여 죽었다라는 의미입니다. 반면 아담은 죄에 대하여는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담은 하나님께 대하여는 죽고 죄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된 것입니다.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가 되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되었습니다. 위 구절이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219절과 20절 역시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모든 구절들이 우리가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흔히 자아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성경적이지를 못합니다. 성경은 분명 우리가 죽었다고 말씀하니까요. 우리들의 자아는 죽여 가는 것도 아니고 죽어봐야 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죽은 것입니다. , 아담적 본성은 죽어봐야 되는 게 아니라 이미 죽었습니다. 로마서 611절의 여겨라믿으라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입술로는 성경대로 죽었습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여전히 내 속에는 아담적 본성이 살아 나 아직 살았어라며 소리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요? 성경이 틀리든지 아니면 내가 틀리든지 할텐데 대부분의 성도들은 혼돈에 빠집니다. 자아 즉 아담적 본성은 여전히 살아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힘으로, 자기자원으로 살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힘으로 지켜보려고 안간힘을 다 쓰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일을 자기자원으로 이루기 위해 몸부림을 치게 만듭니다. 자기 힘이나 자기자원으로 살다보면 사람들은 금방 지치게 마련입니다.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성도들은 성경의 말씀을 의지하기보다는 자기 경험을 믿게 됩니다.

 

진리는 실제를 아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진리 하나를 만납니다. 그것은 진리의 실제 즉 실재(reality)를 알지 못하면 전혀 알지 못한다는 진리입니다. 즉 자신이 실제로 죽은 자임을 이론이 아닌 성령의 조명으로 알지 못하면 실제의 삶에서 아담적 본성이 죽어있는 경험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론으로만 아는 것과 성령의 조명으로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기독교 교리를 마음에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것이 실재(reality)가 되지는 못합니다.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입니다. 아무리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외운다고 해도 실제적으로 자신이 죽은 자임을 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담적 본성이 순복하는 삶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 실제적인 지식이 능력이 있습니다. 이론이 아닌 실제에서 자아는 죽습니다. 이론으로 아는 말씀과 실제로 아는 말씀은 천지 차이입니다.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아가 죽었음을

생활 속에서 들춰내는 일을 하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아가 죽었음을 들춰내는 일을 하십니다.

이 말은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아담적 본성을 들춰내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다루심입니다.

 

로마서 612절부터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하나님께서 죽은 아담적 본성을 들춰내시는 이유는 우리가 자아를 따라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살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속에서 아담적 본성이 나타날 때마다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으로 초대하시고 계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맞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원이 아닌 자기자원으로 사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은 우리 속에 어떤 선한 것도 없음을 드러내심으로 믿음에 의한 삶은혜에 의한 삶으로 초청하십니다. 물론 우리 속에 어떤 선한 것도 없음이 드러날 때마다 우리들은 괴로울 수 있겠습니다.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서 죽어 있는 아담적 본성을 들춰내시는 일은 분명 우리들에게는 복입니다.

 

많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일단 믿고 나면 성화의 길에 접어든 줄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성화를 위한 가능성이 열려있긴 하지만 성화의 단계로 접어든 것은 절대 아닙니다. 사실, 예수를 믿는 사람치고 어느 한 사람도 자신이 은혜로 살지 않는다고 말하는 성도는 없을 것입니다. 다 들 말은 이렇게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은혜가 아니면 못살죠.” 그렇지만 반복적으로 넘어지는 실패와 범죄 앞에서 실망한 나머지 자아가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의를 행하려고 애를 쓰기 시작합니다. 설교를 통해 관계에 관한 말씀을 들을 때에는 그래, 하나님께 내 모든 관계를 맡겨야지하면서도 정작 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맡겨놓았던 관계의 문제를 다시 슬그머니 집어 들고 가곤 합니다. 이것이 아담적 본성입니다. 자아가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아를 다루십니다.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룩하신 일들을 성령의 조명으로 깨닫는 일이 없는 한, 아담적 본성은 절대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론이 아닌 실제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조명이 필수입니다.

 

갈라디아 516절부터 24절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구약의 삶이 있고 신약의 삶이 있습니다. 구약의 삶은 흔히 문자에 의한 삶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최선을 다 해 지키는 것을 신앙생활로 여기는 삶입니다. 이 삶은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그럴 듯 하지만 실패하는 삶입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도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정말 큰 일입니다. 자기자원으로 사는 삶입니다. 반면, 신약의 신앙생활은 성령에 의한 삶입니다. 예레미야 31장과 요엘서 2장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31:31-34)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2:28-29)

 

보십시오. 구약의 삶은 실패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언약을 하나님의 백성들과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새 언약은 성령을 우리들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의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약의 삶, 신약의 신앙생활은 성령에 의한 삶입니다. 그래서 아담적 본성을 다루실 때 성령에 의한 삶은 필수 중의 필수입니다. “성령으로가 아니면 자아의 문제는 절대로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자아에 관한 책을 수도 없이 읽는다고 해도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담적 본성이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성령의 조명으로 깨달을 때에만 능력이요 힘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실제적인 지식 즉 성령의 조명으로 아는 지식만이 실재(reality)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떨 때 아담적 본성을 다루시지 않으십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죄에 대해 강력한 설교를 해도 어떤 분들은 그냥 편안하게 듣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속으로 타협하게 되면 그렇습니다. 들을 말씀은 듣고, 버릴 말씀은 버리는 타협이 강력한 설교 앞에서도 태연하게 말씀을 듣게 만듭니다. 듣기 좋고, 들어서 편안한 말씀에 대해서는 아멘하지만 듣기 싫고 들어서 불편한 말씀 앞에서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아담적 본성이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을 좇아 살아가다 보면 성령님께 더욱 민감해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더욱 더 알기를 원하게 되며, 하나님의 뜻을 더 이루기 원하게 마련입니다.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 있기를 열망하게 됩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하나님의 관심은 더욱 지대해 집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영과에 대한 열망을 더욱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본성을 다루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아를 다루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기 위함입니다. 신약의 삶의 성취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루신다는 의미는

자아가 죽었음을 보게 하신다의 뜻입니다

 

다루신다는 말의 의미는 우리의 자아가 죽었다는 것을 보게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속에 어떤 선함이 없음을 알게 하시고 우리 속에 어떠한 능력도 없음을 보게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다루심입니다. 성도들이 성령에 의한 삶을 살기 원할 때 아담적 본성이 자꾸만 발목을 잡으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다루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루심을 받으면 당시에는 무척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기분이 나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원망스헙기도 합니다. 불평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신명기 8장에서 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8:2-3)

 

위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를 걷게 하신 이유가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인간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기적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재앙들을 통해 바로 왕에게서 이스라엘을 자유케 하셨던 일, 홍해를 가르신 일, 애굽의 군사들을 수장시키셨던 일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기적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라운 기적들을 본 후 이런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 이제부터 불행은 끝나고 영원한 행복만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을 꺼야.” 그러나 이 생각은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광야로 인도되었고 당장 마실 물이 떨어지는 경험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광야로 들어가서 처음 만난 것은 마라의 쓴 물이었습니다. 먹지 못하는 우물로 인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대목을 읽다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니, 하나님은 이상하기도 하셔라. 물을 미리 달게 만드셨으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마르기 전에 물을 주시면 될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가 먹고싶어 달라고 하기 전에 미리 아시고 다 주셨으면 될 것을.”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한 광야로 그들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증표라는 사실을 다 압니다.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도 다 압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한다고 고백합니다.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만한 일들에 충성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좋은데 다음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하고 나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무언가를 하셔야 한다고 믿습니다.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입니까? 광야로 인도됩니다.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는 기적을 본 다음, 마라의 쓴 물 앞에 인도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오직 믿음에 의한 삶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환경이 좋으면 믿음이 굳이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게 잘 풀릴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좋은 환경 가운데에서는 믿음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의지해야할 광야에서는 믿음이 돋보입니다.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흔히 환경이 나빠지기 시작하면 아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데 환경이 왜 이리 나빠지는 거지?”하면서 의아해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반드시 훈련시키십니다. 자아를 다루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만 의지하여 사는 법을 터득하게 만드십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런 부분에 대해 고심하였을 때 이런 부분에 대해 선명하게 말해주는 책이 없어 무척 혼동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신명기 814절부터 16절입니다.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셨는지, 왜 다루셨는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그냥 그대로 세우시지 않는 분입니다. 개인적으로 혼돈이 올 때 기독교 고전을 읽곤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하는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시는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고전을 읽은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어떤 길을 걸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전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한 사실은 예외없이 하나님이 사랑하셨던 사람들,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다 광야를 거쳤습니다.

 

누가복음 41절부터 13절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리라

 

알다시피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함을 취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 삶과 사역의 모델이 되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초월한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와 똑같이 모든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위 구절 역시 예수님을 이러한 관점에서 잘 보여줍니다. 1절은 우리들을 매우 흥미롭게 만듭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이 성령으로 충만하셨노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령이 충만하면 곧바로 사역하러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역하시러 가시지 않고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습니다. 매우 흥미롭지 않나요? ‘성령이 충만한 다음에 오는 시험!’ 우리의 선입견을 깨트리는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광야로 가셨습니다. 성령 충만한 결과치고는 정말 의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성령 충만케 하신 다음 다루시곤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쓰시고 싶은 사람을 이런 방법으로 다루십니다. 어떨 때에는 다루신 다음, 성령 충만케 하시기도 합니다. 성령 충만케 하신 다음 다루시든지, 아니면 먼저 다루신 다음 성령 충만케 하시든지 하나님은 반드시 사역을 위해 다루시는 일을 하십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주신 다음 다루셨던 것 같습니다. 아마 성령의 기름부음이 먼저 없었더라면 도망갔을지도 모릅니다. 다루심이 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경우는 다르지만 하나님의 다루심은 반드시 있습니다.

 

바울 역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 1차 선교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는 적어도 10년에서 13년 동안의 간격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 기간동안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의 기름부음과 다루심을 경험했습니다. 특별히 아라비아 광야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이고 실제적으로 더욱 알아가는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을 이해하고 나면 여러분 자신이 잘못된 것이 아닌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에 대해서 잘 모를 때에는 점점 더 일이 꼬이고, 광야가 자꾸 나타나고, 속이 더 들춰지면 , 내가 뭐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다루심을 알기에 염려하거나 혼동스러워 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부분이 들춰지더라도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자신을 부인하는 삶으로 데려가시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다루시는 방법을 이해하십시오

 

셋째, 하나님의 다루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환경을 통해 다루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환경을 통해 다루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루실 때 광야같은 환경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광야는 분명 파라다이스가 아닙니다. 낙원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광야에서는 살기에 힘들어합니다. 성령 충만한 다음 갑자기 환경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놀라운 체험을 한 다음 갑자기 일이 꼬일 수 있습니다. 광야로 인도된 것입니다. 광야란 확실히 편안한 곳이 아닙니다. 온갖 어려움들이 다 있는 곳입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5:7-9)

 

위 구절은 예수님 역시 하나님의 다루심 아래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도 받으신 고난이 있었습니다. 원죄는 없으셨지만 예수님 역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통해 다루실 때 사람들은 자신을 변화시켜보려고 노력합니다. 자신의 자아를 좀 더 선한 존재로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자신을 믿음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칭찬받을만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일에 전념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실패합니다. 이렇게 노력하는 일로 인해 자아가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담적 본성이 숨어버립니다. 그리고 자기의 정체를 감춥니다. 이런 경우가 되면 잘 발견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자기변호자기합리화가 나옵니다. 이렇게 가려진 자아를 들춰내는 데에는 환경을 통한 방법이 적격인 것 같습니다.

 

앞 부분에서 제 아내 얘기를 썼습니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남들이 건드리지만 않으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란 구정물과 같은 것이라 가만 두면 더러운 것들은 다 밑으로 가라앉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맑아 보입니다. 그러나 한 번 휘저으면 별 더러운 오물들이 다 올라와 금방 구정물임을 알게 됩니다. 본성이 이와 같습니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다 좋습니다. 그러나 건드리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광야같은 환경 가운데에 집어넣으심으로 우리들 속에 무엇이 있는지 보게 만드십니다. 우리 속에 구정물만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들은 구정물을 보면 너무너무 속상해 합니다. “, 내 속에 이런 것들만 가득했구나생각하면서 괴로워합니다. 자기 모습 때문에, 그리고 자신이 넘어진 것 때문에 너무너무 속상해 합니다. 특히 남들이 건드렸을 때 그렇게 밖에 반응할 수 없었던 자신을 보면 더 속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 괴롭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자꾸만 보게 만드십니다. 문제는 자기의 본 모습을 자꾸 외면하게 되면 나중에는 은혜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게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들춰내시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가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사람들은 속의 것들이 들춰지면 타협하던지 아니면 항상 죄책감에 빠집니다. 타협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상대적인 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보다 더 나은 인간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하는 식으로 상대적인 의에 빠집니다. 자기가 그래도 제일 나은 것처럼 여깁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죄인이었음에도 상대적인 의로움에 빠져 자기들이 그래도 남들보다 낫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들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한 가지, 죄책감에 빠진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저는 안 되는 가봐요. 아무리 해도 안되네요.” 이러면서 항상 죄책감에 빠져 삽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두 가지 모두 잘못입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은 다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환경 외에 성령을 통해 어둠을 들춰내십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가 있겠습니다. 환경을 통해 보아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지 않으면 진짜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어떨 경우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 인간도 사랑해 보라하는 식으로 가시같은 인간을 곁에 두시기도 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을 통해 우리를 찌르십니다. 그럴 때에라도 우리들의 자아는 그런 사람이라도 사랑해보려고 무진장 애를 씁니다. 그러나 실패합니다. 이런 실패를 여러 번 반복하다가 보면 하나님 앞에 두 손 두 발을 다 듭니다.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여기다가 성령님께서는 빛을 비추시면서 너의 의로는 안 돼!”하시면서 말씀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들이 정말 못된 인간임을 보여주십니다. 마음이 편안하지 않습니다. 엄청나게 고통스럽습니다.

 

말씀을 통해 다루십니다

 

환경, 성령에 이어 말씀을 통해 다루십니다. 바울 역시 이런 심경을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7-24)

 

바울 역시 자신을 선한 존재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루심이 있고 성령께서 비추시기 시작하자 그는 너무나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대면하여 서기 시작하자 자신 속에 어떤 선한 것도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훗날 그는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은 목적이 있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다루심은 두 가지 열매를 목적합니다.

 

 

1.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진리를 깨닫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말합니다.

 

부흥의 때가 되면 반드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가 재발견되어진다

 

그의 부흥이란 책에 보면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팠던 성경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진리가 재발견되기 위해서는 우물을 덮고 있던 쓰레기들을 치워야 한다는 말을 그가 합니다. 쓰레기란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들이 잘못된 신학과 잘못된 전통, 선입견, 편견이 그것입니다. 교회란 원래 생명수가 흘러야 하는 곳인데 쓰레기들로 인해 생명수가 흐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말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다시 교회 내에 생명수가 흐를 때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진리가 재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오늘날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진리를 모르시는 분이 없습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재발견된다고 합니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이론적으로 알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잘 모른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실제가 아니면 이론은 능력이 아닙니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재발견하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어떠한 선한 것도 없음을 깨닫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진리가 비쳐옵니다. 자신에게 선한 것이 없음으로 믿음으로만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진리가 발견되면 오직 주님만이 능력인 것을 알게 됩니다. 거짓신앙체계가 설자리를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론적으로 알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이 실제로는 모릅니다.

 

이론과 실제에 대해 잘 설명해주는 예가 있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경우가 그것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영국의 명문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한 후 동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당시에 대단한 인재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요한 웨슬리는 메소디스트라고 불리울 만큼 철저하게 절제하며 규칙적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홀리 클럽을 조직하여 규칙적인 생활뿐만 아니라 구제나 사회 활동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요한 웨슬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알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몰랐을까요? 분명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명문 대학에서 강의를 할 정도였으니까요. 세월이 지난 후 요한 웨슬리는 선교사 신분으로 사역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미국에서의 선교 활동은 완전히 실패였습니다. 영국으로 다시 쓸쓸히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께서는 요한 웨슬리에게 믿음 없는 자신의 모습을 비쳐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같은 환경 가운데 몰아 넣으시고 자꾸만 요한 웨슬리의 속을 들춰내셨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자꾸만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과 좌절을 반복적으로 느껴야 했습니다. 굉장한 열심이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열심이었지 하나님을 향한 열망에서 나온 열심이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비쳐주시니까 마침내 요한 웨슬리는 나는 구원받지 못했다. 나는 지금 미치지 않았다라고 일기에다 썼습니다. 그는 어느 날 모라비안 교도들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회심하는 체험을 합니다. 그는 그 날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를 본 것입니다. 그 후, 그의 삶과 사역은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환경과 여러 요건 때문에 갈등 속에 빠지게 되는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갈등 속에 우리들을 몰아넣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아무런 선함도 없음을 들춰내십니다. 어떨 때, 우리 속에 아무런 선함도 없음을 발견하는 일을 생이빨을 뽑아내는 고통만큼 아플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어려운 길로 가지 않고 쉬운 길을 택합니다. 즉 자기를 합리화시키고 타협하는 신앙의 길을 택합니다. 그리곤 이런 말을 합니다. “아니, 꼭 예수를 믿더라도 그렇게 믿어야 하는 것이냐? 좀 쉽게 믿을 수도 있지 않느냐?” 기억하십시오. ‘자기합리화는 하나님의 원치 않는 바입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은 본인에게는 정말 힘든 일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을 삶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아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면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으로 자기 모습이 비쳐오는 일로 인해 더욱 힘들 수 있습니다. 더욱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설려고 하는 사람들마다 이런 고통을 호소합니다.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기는커녕 더 괴롭다고들 말들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들의 모습이 보여야 주님이 보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보여 옵니다. 자신을 꽤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는 한 주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의 비추심을 통해 우리 속에 선하심이 없음을 보게 하실 때 비로소 주님의 모습이 보여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이유는 다루심을 통해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비록 당시에는 죽을 지경이지만 하나님은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계속 우리를 다루십니다.

 

하나님이 다루실 때에는

칭찬하는 일도 멈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루실 때에는 칭찬하는 일도 멈추어야 합니다. 다루심 가운데 있을 때 누군가에게 칭찬을 들으면 그 사람만 좋아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알아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누군가를 다루시는 것이 보이면 그 사람에게 칭찬하는 일도 삼가야 합니다. 칭찬해준 일로 인해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이 보이면 하나님 앞에 그 사람이 정직하게 대면하여 설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게 다루심을 빨리 벗어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루심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의중과 하나님의 의도를 빨리 깨달아야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대면하여 서야만 그것이 해결됩니다.

 

베드로는 자기확신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훗날 예수님을 배반하고 부인했을 때 성경은 베드로의 눈과 예수님의 눈이 마주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엄청난 고통 가운데로 빠졌을 것입니다. 닭이 울자 베드로는 견딜 수 없는 아픔 때문에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자기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속에 어떤 선한 것도 없음을 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와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셨을 때 베드로는 주님만이 아십니다라고 답변하였습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은

하나님의 목적이 다 성취된 다음 끝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에 들춰내시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벗어나야 되지, 인간적인 방법을 통해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다 성취된 다음 끝이 납니다. 그래서 하루 속히 하나님의 뜻 앞에 정직하게 서야 합니다. 그래야 다루심의 끝이 보이는 법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열망이 될 때 다루심은 끝이 보입니다. 주님이 길에 서야만 광야는 끝이 보입니다. 사람들에게 위로 받으려고 해서는 끝이 나지 않습니다. 뭔가 방법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정직하게 대면하여 서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루신 목적을 빨리 보아야 합니다. 왜 다루셨는지 빨리 알아야 합니다.

 

제 아내의 경우를 들어 설명 드리겠습니다. 제 아내는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어릴 적부터 착실하게 해 왔던 사람입니다. 꽤 이름난 목사님의 지도 아래서 성경공부를 꾸준히 해 왔었습니다. 그런데다 성격적으로도 차분한 편이라 남들에게 미움살만한 일은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방콕형이라 방안에 들어앉아 있기 좋아하는 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께서는 제 아내를 다루신 것입니다. 아내는 힘이 들어 괴로워했습니다. 어느 날 저를 보고 날 건드리지만 않으면 난 괜찮은 사람인데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구원의 확신까지 상실하였습니다.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몇 날 며칠을 예배당에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성경 구절 하나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제 아내가 제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가 무슨 말인지 알게 되었어요.” 예수님만이 구원이라는 진리를 본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본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능력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무슨 문제가 닥쳐도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니까 문제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아담적 본성을 합리화시키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안목으로 세상을 살면 놀라운 자유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을 통해 자신에게 어떤 선함도 없음을 통감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된다는 진리를 선명하게 보면 자유가 있습니다. 매 순간 이 진리를 붙잡고 살면 굉장한 능력이 있습니다.

 

아담적 본성을 합리화시키지 마십시오. 막다른 골목까지 내버려두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막다른 골목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절망해 보아야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음을 보아야 십자가의 복음을 붙잡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만이 우리들을 온전케 합니다

 

자기 속에 선함이 없는 것을 본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능력이심을 실제로 아는 자리에 오게 됩니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본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능력이심을 발견하는 자리로 갑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다루심 속에서 자랐습니다.

 

다섯째, 다루심의 결과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4장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4:1-4)

 

위 구절에서 예수님이 사단의 시험 앞에서 답변하셨던 말씀은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았던 사람이 고백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우리들에게도 시험과 공격 앞에서 답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다루심을 받은 사람들이 보일 수 있는 반응입니다.

 

말씀이 곧 생명입니다

 

첫 시험에서 마귀는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마귀의 공격을 무력화 시키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능력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곧 생명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82절과 3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는 곤고한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광야에서 길이십니다. 광야는 모든 것이 부족한 곳이긴 하지만 하나님이 최소한의 필요를 채우시는 곳입니다. 한 달 먹을 양식을 주시지는 않지만 오늘 먹을 양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곳이 광야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야망과 관련하여 광야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광야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물질로 다루십니다. 어떤 분은 건강으로 다루십니다. 사람마다 광야가 다릅니다. 개인적으로는 야망이었습니다. 저 역시 개인적으로 목회하고 싶은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하나님은 절 다루셨습니다. 그런데도 신기한 일은 먹을 것, 입을 것은 하나님이 다 챙겨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놀랍게 채워주셨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만이 하나님의 길임을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이란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는 말씀,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있는 말씀입니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쓰여진 성경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가고 싶은 길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러주시는 길로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참 생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론이 아닌 실제적인 삶인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론에서 실제적인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론에서 실제적인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인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12:50)

 

예수님은 잡히시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열망하셨습니다.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26:51-54)

 

보이십니까? 말씀을 이루려고 하시는 예수님의 열망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광야를 거치신 분입니다. 그분은 광야를 지내시면서 말씀만이 생명임을 아셨고 우리들에게 모본이 되어주십니다.

 

다윗과 사울의 차이는 광야의 차이였습니다. 사울은 키가 컸고 매우 뛰어났던 인물입니다. 많은 승리를 쟁취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광야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 얼마 있지 않아 바로 왕이 되어 다루심을 별로 받지 않았습니다. 반면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대면했던 사람이었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광야를 통과했습니다. 다윗은 다루심을 많이 받았던 사람입니다. 사울 왕에게 쫓겨다니면서 그는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어떨 때에는 미친 척하면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웠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다윗은 하나님만이 생명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광야가 보이십니까?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보이시나요?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4:5-8)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만이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가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능력임을 깨달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떠올릴 때마다 감격과 눈물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아는 자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은 자들이 드릴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능력임을 알기에 예배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경배는 다루심 가운데서 나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능력이기에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광주 화요모임을 시작하면서 이런 기도를 드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 마음껏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도록 해 주옵소서.” 이런 열망이 있었습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고 싶었습니다.

 

다루심을 받은 자들은 바른 자세로 예배합니다

 

예배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은 자들은 바른 자세로 예배합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예배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예배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여호와로 인하여만 기뻐합니다. 비록 외양간에 소가 없고, 밭에 소출이 없다고 해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예배합니다. 하나님도 영광 받고 나도 영광 받는 기복신앙을 극복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삶이 이렇게 예배 자체가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면 다른 사람의 평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설교를 사람들이 듣기 싫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듣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용이 어려울 수도 있지만 듣기 거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설교를 듣고는 아니, 그렇게 설교해서 언제 교회가 부흥되겠습니까?”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자랍니다. 그것을 믿습니다. 인간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자원으로 자랄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면

다른 사람의 평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지면 사람들은 금방 일이나 사역, 자기 자신에게로 눈길을 줍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준을 놓치는 순간 자기 야망에게로 집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고 나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게 됩니다. 주님으로만 기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이 사람을 바꿔놓은 결과입니다. 다루심을 받으면 자기가 아닌 하나님께로 초점을 맞춥니다. 개인의 유익이 아닌 하나님이 목적이 됩니다. 다루심은 우리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누가복음 49절부터 13절입니다.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리라

 

여기서 마귀는 다섯글자를 빼먹고 인용합니다. “네 모든 길에서를 빼고 인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께서 인생 길에 함께 하실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놓고 말았습니다. 높은 것에서 뛰어내리면 하나님이 받아주실 것이라는 말로 바꿔놓고 말았습니다.

 

다루심은 우리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의 마귀를 향한 답변에서 두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알고 있었다는 점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중과 하나님의 의도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요셉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요셉이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몰랐다면 그리고 하나님만을 신뢰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자기를 누명씌웠던 보디발 장군의 아내에게 복수하였을 것입니다. 나중에는 형들에게 달려갔을 것입니다. 복수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러질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중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힘들게 하신 분들이 있습니까? 자꾸만 아프게 만듭니까? 제 개인적으로는 지나고 나니까 그들은 조교였습니다. 나를 훈련시키는 조교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나를 서게 만드는 조교들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광야같은 환경 가운데 집어넣으신 하나님은 그 속에서 조교를 통해 절 다루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난 사실은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이었습니다. 나를 다루시려고, 나를 온전하게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붙이신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시같은 사람들, 문제투성이에다가 날 집어넣으신 이유가 분명하게 보여왔습니다. 광야같은 환경 가운데 나를 몰아넣으신 이유는 나를 못살게 굴기 위함이 아니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에 서게 하실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봅니다. 내 본성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서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법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다루심 가운데 들어가면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다가 배를 띄운 것과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가만있으면 폭포 아래로 떨어지고 살기 위해서는 노를 끊임없이 저어야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따르면 하나님의 다루심을 견딜 수 있습니다. 광야를 잘 지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면 하나님의 뜻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근거가 하나님이 아니면 죄가 됩니다. 죄란 생각에서 시작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혼돈이 있을 때 하나님의 생각을 붙잡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을 경험하면 믿음의 뿌리가 분명합니다. 그 뿌리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만이 구원과 의로움과 행함의 근원임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되면 혼돈은 끊어집니다.

 

광야를 통과하면서 사람들은 자기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한 자기 모습을 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봅니다. 이 때 십자가는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알면 믿음을 가집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놀라운 능력을 경험합니다. 주님의 주권 아래서 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을 지난 사람들이 얻는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다루실 때에는 두 가지를 금해야 합니다. 하나는 불평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위로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책임전가하지 마십시오. 또 하나는 감사할 일입니다. 알지 못하지만,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기에 내가 다 볼 수 없지만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을 환영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