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자기영광을 구하는 삶
제4장 자기영광을 구하는 삶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이 될 때 순식간에 사역은 ‘자기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며, 마침내 자기영광을 구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과 상관 없는 자기사역이 됩니다.
자기 중심적일 때 신앙 : 하나님 중심적일 때 신앙
자기 중심적 신앙 | 하나님 중심적 신앙 | ||
자기 목적 | 기복신앙 자기영광 | 하나님의 영광 | 하나님과 친밀함 하나님의 나라 |
자기 자원 | 율법주의 자기자원의 사역 | 하나님의 자원 | 은혜에 의한 삶 믿음에 의한 삶 |
자기 관점 | 영적소경 편 견 | 하나님의 관점 | 배우려는 자세 하나님의 다림줄 |
자기 방법 | 인본주의 | 하나님의 지혜 | 성령에 의한 삶 |
1. 사역과 자기 영광
우리가 자기중심적 일 때 사역도 자기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역을 가지고 자기 영광을 얻으려 합니다. 자기중심적일 때 결국은 자기 영광을 구하게 됩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사역은 우리의 최종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한 사역을 감당하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일이 자신의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소원이 자신의 소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기꺼이 그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헌신하게 됩니다. 그때 사역을 통해서 주님의 열매가 나타나고 주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지며, 주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면 사역을 수단으로 하여 자기영광을 구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목적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만, 어떤 순간 자기중심적이 되면 자기 유익을 구하게 됩니다. 야망이 살아납니다. 그래서 자기영광을 구하는 자리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구호는 외치지만 그 중심에 자신이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종들은 많지 않습니다. 바울은 오직 디모데 외에 믿을 만한 종들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1)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빌립보서 2장 20-21절)
사도 바울이 믿을만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놀랄만한 일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관심과 이익만을 돌보았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절대로 살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들이 있습니다.
자기중심(자기영광)일 때 | 하나님 중심(하나님영광)일 때 |
· 사람들이 자신을 위한 수단이 됨 · 자기 유익에 따라 선별적 순종 · 열매를 보며 자기 의를 붙잡음 · 사역의 현장에서 환경에 따라 반응 · 자기 영광을 위해 능력을 구함 | ·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섬김 · 하나님의 뜻에 전적인 순종 · 열매를 볼 때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 · 사역의 현장에서 주님께 믿음으로 반응 · 주의 영광을 위해 성령의 능력을 구함 |
우리가 하나님 중심에 있는지 자기중심에 있는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 하나님 중심적인 자리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순간, 순식간에 자기중심의 자리에 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미묘한지 모릅니다. 우리의 죄된 본성이 기회만 있으면 자기중심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성향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잘 살펴보지 않으면 좀처럼 알 수 없습니다.
섬기는 종입니까? 사람들을 수단으로 야망을 이루기 위한 사역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는 종으로 부르십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일 때 사람들을 섬기는 종이기보다는 사람들에게 군림하려는 자세를 갖게 됩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야망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때 섬길 대상이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 수단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사역에 유익이 있고 도움이 될만하면 더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열정을 갖고 섬기려 합니다. 그러나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진정한 섬김의 마음이 없습니다.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없습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아버지 마음’이 없습니다. 종으로서 주인의 마음을 모르는 종이 됩니다.
진정한 순종도 없습니다. 선별적 순종, 곧 불순종뿐입니다.
자기중심성에는 전적인 순종이 안 됩니다. 부분적으로 순종합니다. 선별적인 순종일 뿐입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있을 때 기꺼이 순종하지만 별로 유익이 없을 때 슬그머니 불순종합니다. 하나님 중심에서만 전적인 순종이 가능합니다. 그분의 뜻만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마음에서만 전적 순종이 가능합니다. 자기가 손해를 볼지라도, 자기가 사람들에게 전혀 드러나지 않아도 오직 주님 뜻대로만 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아도 오직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할 때 전적인 순종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일 때 보는 바가 많습니다. 사람들의 평가를 봅니다.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 있는가도 봅니다. 댓가와 보상을 저울질 합니다. 그래서 전적순종이 불가능합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제가 대전에 다니면서 ‘정기집회’를 섬길 때의 일이었습니다.
매우 분주하게 시간을 보내던 때였습니다. 단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을 만큼 바쁘게 다녔습니다. 예향교회를 섬기는 일, 새물결 훈련원 강의, 호남지역 화요정기집회..
대전의 목요집회를 섬기는 사역은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순간부터 대전에 가는 것이 힘들어졌습니다. 다른 모든 모임은 그냥 섬기고 있었지만 목요일 대전 모임이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목요일 아침마다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목요일 아침, 하나님께서 제 중심을 드러내셨고, 저는 그 앞에서 눈물로 회개하였습니다. 그날 아침 하나님께서 비추신 제 중심은 이러했습니다.
제가 대전에 가는데 부담을 느끼는 이유는 ‘저에게 별로 유익이 없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사역에 힘들긴 해도 그냥 섬길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저의 사역이나 교회에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고, 대전은 별로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기 전까지 전혀 생각해 본적도 없었던 문제입니다. 입술로는 당연히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의 뜻대로만! 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어떤 순간 자기중심적으로 돌아와 있었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생각으로, 행동으로 구체화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서 떠난 것입니다.
자신의 사역과 구하는 것의 동기를 살펴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사역의 동기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역과 관련되어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모든 것의 동기를 살펴야 합니다. 그 동기가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자기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물론 주님이 비추시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십시오. 자신은 전혀 그 자리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실재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바라십니까? 그 동기를 살펴보십시오. 자신입니까? 하나님입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기 원하십니까? 깊은 내면의 동기를 살펴보십시오.
은사받기를 원하십니까? 그 동기를 살피십시오. 만약 그 동기가 ‘자기 자신’이라면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며 하나님을 떠나게 할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능력을 구하러 다닙니다. 은사를 받기 원합니다. 은사는 매우 귀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사역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기를 살펴야 합니다.
사도행전 8장에 능력받기 원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술사 시몬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였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였고, 그의 말을 청종하였습니다. 그때 빌립이 그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 마술사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빌립을 따라다니며 빌립에게서 나타난 큰 표적과 능력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 있던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사도행전 8:14-21을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16)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17)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18)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 지어다 21)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성령님의 임재를 본 시몬의 태도를 보십시오. 그는 능력에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능력이 사람들에게 어떤 반응을 드러내는지 이미 그것을 맛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제 그 능력을 구하게 됩니다. 마침내 그는 돈으로 그 능력을 사려고 하다가 엄청난 책망을 받게 됩니다.
그의 관심은 능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책망하실까요? 그 중심을 보신 것입니다. 그 능력을 구하는 이유를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각양 좋은 은사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야고보서 1:17입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은사를 주시기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은사를 가지고 사역하기 원하십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동기입니다. 어떤 이들은 은사 받아서 교회를 성장시키겠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교회성장을 왜 하려고 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자기중심을 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자기중심일 때 그 모든 것이 매우 귀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가 되고 영적우월의식으로 빠지게 됩니다. 자기 자랑이 됩니다. 결국은 자기의 명예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영광입니다. 우리는 모든 열심과 사역에 있어서 중심의 동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자리에서는 사역도 자기를 위한 수단이 됩니다.
2.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그 백성을 위해”, “주님의 목적”으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그 종들을 부르실 때 두 가지를 보이십니다.
첫째, 언제나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그 종을 부르십니다. 종을 위해 부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부르심입니다.
둘째, 그 부르심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종의 비전입니다.
바울의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18)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사도행전 26장 16-18절)
예수님은 바울을 구원하여 종 삶는 구체적인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예수님의 목적은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일”입니다. 당신의 백성의 눈을 뜨게 하여 놀라운 생명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바울을 종으로 부르십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힘썼던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모든 고난을 받았고, 수치를 견디며, 수고를 다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부르심을 받은 종들 가운데 그 두 가지를 놓치게 될 때, 하나님의 종들이 타락하게 됩니다. 성경에 나타난 역사가 그것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울의 예를 보겠습니다.
사울을 부르실 때 주님은 “내 백성을 블레셋에서 구원하기 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나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아보았노라 하시더니 17)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통활하리라 하시니라” (사무엘상 9장 16-17절)
사울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사역자(종)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훗날 이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가 자기중심적이 될 때 ‘자신을 위하여’ 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전쟁을 이기게 되었지만 그것을 잊어버립니다.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세우게 됩니다. 자기를 위해 선별적인 순종, 즉 불순종하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 버림받게 됩니다.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혹이 사무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돌이켜 행하여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사무엘상 15장 11-12절)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면 결국 자기 영광을 구하게 되고, 그때 ‘종의 사역’은 끝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종으로서 기능을 상실케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매순간마다 점검해야 합니다. 자신의 동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기중심 일 때 모든 부분에서 타락의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그뿐 아니라 심판이 있습니다.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10)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11)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12)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이사야 56장 9-12절)
이사야 56장은 놀라운 회복을 약속합니다. 약속이 없던 이방인도 하나님을 경외하면 회복하게 될 것이고,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 갈 수 없었던 고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놀라운 회복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그런 회복의 시기에도 심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파수꾼은 선지자를 가르칩니다. 파수꾼이 할 일은 시대를 분별하고 시대를 향하여 하나님의 기준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벙어리요. 소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보는 눈도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도 선포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경이고, 벙어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탐욕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디 있든지 자기 이익만 도모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물론 입술로는 그렇게 말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소개합니다. 그들은 이미 주님의 종이 아닙니다. 모양은 종입니다. 사람들에게도 파숫꾼이라고 불리웁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사역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사역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중심적인 자리에 있습니다. 사람들을 이용해서 자기 욕망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경임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부를 때 파수꾼이라고 불렀습니다. 자기들도 스스로 파수꾼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대를 분별하는 안목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소경이요. 벙어리 개”라고 평가합니다. 얼마나 심각합니까?
3.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 원하십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1장 5-6절)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 1장 13-14절)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를 택하심과 구속하심도, 성령으로 인치심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케 하려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장 31절)
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요한복음 12장 27-28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하실 때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인격체 되신 주님 자신을 가르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영광스럽게 하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낮고 천한 자로 오셨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육신을 입고 사신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말씀은 십자가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사셨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6장 38-3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4장 34절)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자신의 양식으로 여길 만큼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다윗의 삶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사도행전 13장 36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수 있습니다.
5.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사야 50장 4절)
위 구절은 곤핍한 시대에 곤핍한 자들을 도와줄 종들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를 보십시오. 그들은 범죄 했고, 하나님의 임재가 끊어졌으며, 온갖 억압이 가득합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도울 종들을 하나님은 세우십니다. 그 종들의 특징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 종에게 학자의 혀를 주셨습니다. 여기서 ‘학자’로 나오는 단어는 ‘림무드(lim-mood')’라는 히브리어로서 ‘가르침을 받은’, 또는 ‘제자’라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제자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더 옳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종은 “독자적으로 깨우친 지식을 가진 학자가 아니라 가르침을 받은 자, 즉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종들에게 ‘제자의 혀’를 주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보면서 ‘제자의 혀’를 사모합니다. 그런데 그 ‘제자의 혀’는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그 종은 주님께서 ‘아침마다’(He wakens me morning by morning) 친밀한 교제 가운데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목적을 알아서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하나님의 기준가운데로 인도하는 말씀을 전합니다. 이러한 종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만 반응하여 순종함으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담대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7)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 (이사야 50장 5-7절)
종은 거역지도 뒤로 물러가지도 않는다고 선포합니다. 어떤 핍박이 올지라도 담대하게 주님을 신뢰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기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의 확신은 친밀한 교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때 그 종들은 담대함을 갖습니다.
우리도 바로 이런 종들이 되기를 구해야 합니다. 제자의 혀를 갖기 원하십니까? 제자의 귀를 갖어야 합니다. 아침마다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가운데서 주님의 깨우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 비결입니다.
6.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은 자기의 뜻이 내려져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은 자기 뜻이 내려져야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장 21절)
주님을 부르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부른다고 다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이들은 주님을 열심히 부르지만 자기 뜻을 위해 주님을 찾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들의 문제해결을 위해, 축복을 위해, 여러 가지 이유들을 가지고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 자신의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말합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얼마나 심각한 말씀입니까? 우리의 뜻이 내려질 때 주님의 뜻에 순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요한복음 12장 27절)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복하려할 때 갈등이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대는 댓가가 요구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곧이어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복하고 자신이 따라야 할 주님의 뜻만 이루어지기를 구하십니다. 자신의 뜻이 내려지지 않으면 절대로 주님께 영광돌리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에스겔시대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를 의논하며 각각 그 형제로 더 31)백성이 모이는 것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에스겔 33장 30-31절)
그들은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따라 살기를 원했습니다. 대단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뜻을 알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의 뜻이 선포될 때 그 뜻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의 마음에 욕심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자기 뜻이 내려지지 않으면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없습니다. 자기 욕심을 가지고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리새인들도 자기 욕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영광을 구한 결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게 됩니다.
요한복음 5:44입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바리새인들은 서로 영광을 구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어떤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도 자기 영광을 구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중심에서는 ‘자기영광’을 구하게 됩니다. 사실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자기영광’을 위해 사역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처럼 자기중심에 있으면 입술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할지 몰라도 사실은 자기영광을 구하게 됩니다.
7.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나누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동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정말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나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8장 11절)
헤롯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은 고로 죽은 사람입니다.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나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 고로 일심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21)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22)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23)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사도행전 12장 20-23절)
헤롯이 왜 죽었습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은 영광스러우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 지어다” (역대상 16장 29절)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헤롯에게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헤롯이 왕복을 입고 백성들에게 연설하였습니다. 그때 그들이 아첨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다!”
헤롯이 그 영광을 잠잠히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충이 먹어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은 나누지 않으십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하십니다. 그럼에도 교만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 합니다.
옛사람의 영향력은 하나님 없는 삶을 꿈꿉니다. 그래서 자기중심적인 자리에 갑니다. 즉 교만의 자리에 섭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겸손한 종으로 서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일 때 슬그머니 높아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 하게 됩니다.
몇 년 전 대전에서 집회를 마치고 돌아온 뒤 금요 철야 기도회 때였습니다.
전체 기도회를 마치고 개인기도 시간에 대전집회 중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비추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셨던 집회였습니다. 그 집회를 통해 여러 가지 일들을 나타내셨습니다.
순식간에 제가 의식하기도 전에 제 안에서 이렇게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 이거 누가 한거예요!”
저는 그 다음 순간 “네가 했다. 수고했다!”라고 말씀하실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다른 감동이 왔습니다.
“내가 했다! 너는 무익한 종이라 할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해!”
순간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한순간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했습니다. 교만한 제 마음을 용서해 달라고 회개했습니다. 오직 주님만 영광 받아야 할 자리에 제가 서있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주님의 뜻만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그리고 오직 주님만 영광 받으시기를 간절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그 종과 나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닫는 순간 회개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자기중심성은 하나님 없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교만합니다. 그것이 순간순간 우리 마음 중심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다면 우리는 즉시, 깨닫는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히스기야를 보십시오. 그는 놀라운 치유를 경험케 됩니다.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 받습니다. 그러나 치유 받은 이후 그는 교만해 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깨닫고 회개합니다. 돌이키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심판을 유보하십니다. 겸손함과 정직함에 서야 합니다.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된 고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또 이적으로 보이셨으나 25)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 26)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삼렘 거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저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니라” (역대하 32장 24-26절)
하나님은 우리의 목적이며, 이유입니다. 우리는 그분 자신을 구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 자신을 구하며,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기를 원하며, 오직 주님의 뜻만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런 거짓된 신앙에 익숙하게 빠질까요?
그것이 바로 우리 옛사람의 본성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복적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가 걷히면 순식간에 자기중심적인 자리에 자기 목적의 자리로 돌아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 이니라” (마태복음 16장 24절)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려면 자기희생이 따릅니다. 그래서 사명을 ‘자기 십자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에 서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사명을 감당 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이 두 가지가 함께 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