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설교/십자가능력으로사는삶

제6장 하나님 자원으로 섬기는 사역 

발의무리 2018. 2. 8. 10:01

6 하나님 자원으로 섬기는 사역

 

자기 자원에서는 불신과 불순종의 자리에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자원의 역사가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여 순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자기자원으로 사역함으로 하나님의 크기의 역사를 경험치도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치도 드러내지도 못합니다.

그림

 

 

 

1. 우리 사역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의 사역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고린도교회에 분쟁이 있었습니다. 어떤이는 바울에게, 어떤이는 아볼로에게, 어떤이는 게바에게, 어떤이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심각한 분쟁입니까? 바울은 그들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 들이니라 6)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8)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고린도전서 35-9)

 

동역자의 삶은 곧 하나님께서 친밀함 가운데 그 종들에게 당신의 목적을 보이시고, 그 목적에 순종함으로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쓰임 받은 종들의 사역이었습니다. 모세는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도우려고 했던 때가 있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 그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하는 과정에 하나님의 동역자로 쓰임받게 됩니다.

 

2. 동역자의 원리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자기 사역의 주도권이 주님께 있음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역자는 주님의 종들일 뿐이라고 가르칩니다. 사역자는 각각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할 뿐입니다. 그러면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셔야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동역자의 삶입니다. 주님과의 친밀함 가운데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뒤의 결과도 주님께 맡기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자라게 하십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역에서 언제나 주도권을 잡으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목적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고, 그 종들을 초청하십니다. 또한 그 목적은 그분의 방법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사역을 우리가 계획세우고, 주님을 위해 열심히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앞서가지 않으면 아무런 사역도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의 모델이십니다.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 가운데 아버지의 일을 자신의 일로 여겼으며, 아버지의 행하심을 따라 순종하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요한복음 519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께 의존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운데 그분의 의중과 목적을 따라 순종하셨고, 그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크기의 열매들을 맺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요한복음 14:10-12절입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12)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이 구절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친밀한 교제 가운데 계셨다.

둘째,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일하신 것이다.

셋째, 그 사역은 예수님이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은 분임을 증거한다.

넷째,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 같은, 그보다 더 큰 사역을 감당할수 있다.

 

예수님의 사역은 친밀한 교제가운데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하나님 크기의 일을 이루심으로 영광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사역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동역자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삶으로 우리를 초청합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의 삶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목적을 알았습니다. 세상을 심판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알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방주를 만들었고, 그 뒤의 모든 과정에서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습니다.

모세는 불붙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그가 한 일은 한가지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를 통해 그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여호수아, 기드온, 바울, 베드로... 모든 믿음의 종들은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일을 자신의 일로 여기는 삶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일로 여기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것을 자신의 양식으로 여기셨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요한복음 517)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432-34)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 자신의 양식으로 여길 만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곧 내 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가 자기중심적일 때 우리 사역을 주님의 일로 생각지 않습니다. 사역을 통해 자기 야망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사역에 집착하게 됩니다. 어떤 성도들은 우리 목사님 사역을 내가 돕는다고 말하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목회자를 위하는 일인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목회자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일입니다. 목회자는 다만 사역자일 뿐입니다. 그분의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헌신해야 합니다.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것이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나의 사역이 주님의 일임을 안다면 그것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아무리 소망이 없어보여도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실 것을 신뢰하고, 다만 그분의 말씀 앞에 겸손하게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동역자의 삶은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일로 여기게 됩니다.

 

이렇게 동역자의 삶을 산 사람들은 철저히 주님이 하셨다고 말합니다.

 

신약에서 바울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놀랍게 쓰임 받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는데 모든 삶을 다한 사람입니다. 그는 주를 위해 무수한 고난과 위험과 댓가를 지불했습니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받은 고난과 수고는 너무나 큰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바울의 사역을 볼 때 그가 얼마나 놀라운 사람인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다만 동역자일 뿐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의 고백은 분명하고 단호합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주의 은혜로다” (고린도전서 1510)

그의 모든 열매뿐 아니라 그 모든 수고와 헌신도 주님이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은혜였고, 주님이 하신 것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수아를 보겠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을 점령해간 지도자입니다. 그는 백성들을 이끌고 많은 수고를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설교를 보십시오. 그의 설교에서 나타난 고백은 아주 단순합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4)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으며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소유로 주었으나 야곱과 그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5)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또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곧 내가 그 가운데 행한 것과 같고 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었노라... 14)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 242-15)

 

여호수아는 마지막 설교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인용하여 2-13절까지 설교합니다. 거기서 자주 나오는 단어로 내가”, “나는이라는 단어가 14번이나 나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하셨다!”는 선포입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 두절에서 하나님을 섬기기를 택하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의 수고를 생각하면 한 번쯤 자신을 언급할 법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이 하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겸손한 자의 고백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본질을 놓칠수 있습니다. 동역자의 삶을 살아온 믿음의 사람은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자원으로 할수 있는 사역이 아니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자원으로만 가능했음을 압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러한 사역으로 초청하십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역이 바로 이러한 동역자의 삶입니다. 그때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자원으로 하나님 크기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원으로 사는 삶과 사역입니다.

 

 

3. 동역자의 사역에서 믿음과 순종의 삶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동역자의 삶을 사는데 있어서 믿음과 순종은 매우 중요합니다.

 

1) 믿음의 5가지 원리

 

첫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합니다.

믿음은 막연한 확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만 뒷받침 하십니다.

이때 하나님말씀은 우리 크기가 아닙니다. 하나님 크기입니다.

둘째, 믿음은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 이상입니다.

인격체이신 주님을 알고 말씀하신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셋째, 믿음은 이미 응답을 가진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구체적입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히브리서 11:1)

넷째, 믿음은 행함으로 구체화 됩니다.

믿음은 말로가 아니라 행함으로 구체화됩니다.

믿는 바대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합니다.

다섯째, 믿음은 지속적으로 주를 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2).

믿음에는 기다림이 요구됩니다. 그 약속이 성취되기 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을 기다렸습니다. 이때 지속적으로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환경을 보면 낙심케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보면 소망이 있습니다. 확신이 있습니다. 믿음은 주님을 주시함으로 주님께만 반응하는 것입니다.

 

여기 믿음의 원리를 보십시오.

자기중심적일 때는 절대로 믿음에 의한 삶을 살수 없습니다. 특히 믿음에 의한 삶은 참된 신앙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이론으로는 절대로 믿음에 의한 삶을 살수 없습니다. 순종하는 삶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크기의 일을 감당 할 수 있을까요?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그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으로 가능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반드시 이루실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결코 우리 수준에서 이룰 수 있는 크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 이루실 수 있는 크기를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자원을 보면서 하나님만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을 통해 주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불신의 사람들

 

그런데 자기중심적 일 때 하나님 크기의 일을 감당치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을 때 위험부담이 따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인 자리에서는 믿음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자원을 보기 때문입니다. 자기자원에서는 계산해 보아서 답이 나와야 움직입니다. 이것이 자기 자원으로 사는 삶의 방식입니다. 자기가 할 만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계산이 나오지 않으면 좌절해 버립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 앞에서 12명 정탐군중 10명의 정탐꾼과 그들의 부정적인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가 바로 이런 태도입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땀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수기 13:32-33)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민수기 14:2-3)

 

그들은 환경적으로 그 말씀하신 바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으면 하나님을 감사하며, 기뻐하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환경적으로 불가능해 보일 때 즉각 낙심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크기의 일로 초청하시면 자신을 살핍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할 수 없으면 주님도 할 수 없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말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답을 잘 압니다. 그러나 실재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오직 하나님은 하실수 있다고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분은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신다!!

 

· 믿음의 사람들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환경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자원을 본 자들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민수기 14:9)

 

그들이 상황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형편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분의 인도하심과 그분의 능력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합니다.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2) 이것이 하나님 자원으로 사는 사람의 반응입니다.

 

두 사람의 예를 들겠습니다. 바울과 기드온입니다.

바울은 철저히 하나님 자원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비결을 소개합니다. 빌립보서 4:13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암송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또 많은 왜곡이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에 초점을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부분에 둡니다. 많은 사람이 이 뒷부분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앞부분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바울은 대단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입니다. 그는 감옥에 갖혀 있는 상태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현재 환경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능력 주실 때 모든 것이 가능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환경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을 봅니다. 그분의 무한한 능력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하나님의 사람 기드온의 능력이었습니다.

사사기 611-16절 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12)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13)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14)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15)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16)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사사기시대는 영적으로 혼탁한 시대였습니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기드온시대에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은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그 결과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입니다.

기드온이 포도주 틀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향해 큰 용사!’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아이러니입니까! 하나님의 큰 용사가 숨어서 타작하고 있다니!

그 말을 들은 기드온은 깜짝 놀라며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애굽에서 나오게 한 모든 이적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 아닙니까?”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가 이해 할 수 없는 말을 합니다.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본문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의 힘이 아니라 기드온의 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무슨 힘이 있다고 기드온의 힘을 의지하라는 말씀입니까?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 아주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자원으로 사는 삶의 능력을 말합니다. 기드온의 힘이란,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능력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우리는 달라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바울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나, 숨어서 타작하고 있던 기드온이나 비슷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자원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기드온이 말합니다. “나는 작은 자 입니다. 내 힘은 미약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즉각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네가 미디안 사람을 한 사람 치듯 하리라!”

그 후 하나님은 그에게 함께 하실 것과 함께 하심을 여러 번 확인 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로 대군을 물리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들을 경험하게 되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온 땅에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자원은 하나님만 신뢰합니다. 하나님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환경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안식이 있습니다. 그 주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원은 불신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자신을 보게 되고, 환경을 보게 됨으로 조급해 집니다. 그때 원망과 불평하게 됩니다. 그리고 낙심합니다. 절망합니다. 이때 마음속에 자기연민에 빠지게 됩니다.

 

 

3) 하나님은 믿음의 종들을 세우시기 원하신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8장에서 믿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간구를 하나님은 속히 응답하실 것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8절 하반절에서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자기중심적인 자리에서는 절대로 참 믿음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자기자원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참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십니다.

부자 청년이 영생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행위를 구원얻을 자가 없습니다. 부자 청년에게 재물을 다 팔아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청년이 할수 없는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자기 자원으로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겠습니까?

그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그때 주님은 그를 향해 부자의 구원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시자, 제자가 그러면 우리 중에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사람의 할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 자원을 보는 사람은 이런 믿음을 갖습니다. 사람이 할수 없는 그것을 바로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십니다. 자기가 할 수 없을 지라도 주님이 하시는 일을 봄으로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진리이며, 신실하심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만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자원을 보는 사람이 갖는 참 믿음입니다. 그 좋은 예가 1853절 이하에 나오는 소경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소경은 오랫동안 눈을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는 구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그에게 묻고, 그가 대답합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보기를 원하나이다!”

여러분이 이 소경이라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는 소경인 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히 눈을 뜨게 해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돈을 많이 주십시오!”라고 대답하는 것이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자기도 할수 없고, 다른 사람도 할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실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보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자기자원의 한계를 절감하고 고민하다 체념하거나 열등의식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원의 한계를 깨닫고는 그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극히 적은 것 같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보며 주님을 찾는 사람도 극히 적은 것 같습니다. 그것 때문에 주님께 간구하며 은혜를 구하는 사람은 극히 적은 것 같습니다. 왜 안 찾을까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대감이 없습니다. 주님은 하실 수 있음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연약하기에 주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약하기에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약할 그때에 주님을 더욱 의존합니다.

 

사실 저도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저 자신을 볼 때 논리적이지도 못하고 리더쉽도 없었습니다. 조직적인 사고도 부족했습니다. 내 놓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순간 주님의 은혜로 나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주님이 나를 부르셨으니 감당할 능력을 주시리라!”

그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주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역사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케 됩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에 대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할수 없는 그것을 주님은 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하여 자신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에 대해 절망하지 않습니다. 환경에 대해 절망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반응에는 절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후에 세상에서 믿음의 세대로 세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종들을 세우기 원하십니다. 믿음으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종들을 세우기 원하십니다. 그 종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 받으십니다. 그런 종들을 통해서 주의 백성들이 세움을 받게 됩니다. 세상은 이런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종들을 원합니다. 그런 종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이사야 421-4절입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2)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3)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4)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여기에 나온 종은 예수님을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델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종이 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종의 특징을 보십시오.

 

첫째,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역하는 종입니다. (1)

둘째, 겸손한 종입니다. (2)

셋째,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종입니다. (3)

넷째, 믿음의 종입니다. (4)

그런데 3-4절에서 그 특징을 좀더 살펴보면, 하나님의 기준을 전파하되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전합니다. 상한 갈대 같은 자들, 꺼져가는 심지 같은 자들을 기다려 줍니다. 또한 그들을 기다리되 하나님의 기준이 세워지기까지 쇠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으며 믿음으로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이런 종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신다!!”

세상에 소망이 없어 보일 때마다 더 크게 외칩니다.

그래도 주님은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