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설교/십자가능력으로사는삶

제11장 회복의 과정Ⅱ 십자가에 의한 삶

발의무리 2018. 2. 8. 11:18

11장 회복의 과정십자가에 의한 삶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것과 함께 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로 사는 삶입니다. 우리의 아담적 본성하나님 없는 삶을 살라는 사단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타락했습니다. 아담적 본성에서 나오는 가장 중심적인 특징인 자기중심성의 영향력 아래 있을 때 스스로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를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겸손은 하나님 없이는 살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성은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려는 가치관입니다. 아담적 본성에서 나오는 자기중심성의 다른 표현은 교만입니다. 그래서 자기중심적 일 때 절대로 주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망도 없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구하라는 설교를 들으면 주님을 찾아야 할 것을 깨닫게 되어 주님을 찾지만 얼마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중심적인 자리에서는 스스로 주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자신을 아는 자입니다.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수 없음을 아는 자입니다. 그래서 겸손함의 자리에 있을 때 주님을 찾습니다. 누군가의 권유에 따라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 없이는 안 됨을 알기에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중심적인 삶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자리에서 어떻게 그 자리에 갈수 있습니까?

 

 

1. 우리는 매순간 십자가를 의지하여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한복음 653-56)

예수님은 십자가의 공로를 매순간 믿음으로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는 십자가를 가르칩니다. 최후의 만 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나누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요, 많은 사람을 죄사함을 얻게 하기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복음 2626-28). 이것은 곧이어 짊어지실 십자가를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 “먹고 마신다는 말은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51)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47-48,51).

47-48절에서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믿는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표현하고 있고, 51절에서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신 산 떡이시고,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두 구절을 보면, ‘먹는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 우리가 십자가를 의지해야 할 두 시점()

 

첫째,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함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53절에서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지하는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한 순간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위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를 일회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는 그 이상입니다. 결코 처음 예수를 믿게 될 때만이 아닙니다.

 

둘째, 우리는 매일, 순간마다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56절에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우리는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매일, 매순간마다 십자가를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살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2) 왜 우리가 매순간마다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해야 할까요 ?

 

우리가 매일 십자가를 의지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주님과 함께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믿음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옛사람이 함께 못 박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산자’(6:10-11)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요한복음 1930)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지만 우리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자리에 익숙합니까? 자기목적을 위해, 자기자원으로, 자기관점에서 자기지혜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로 순식간에 가있음을 보았습니다. 자기 행위로 십자가의 공로를 대체함으로 죄책감과 자기 의에 빠져 하나님과 친밀함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일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많은 사람이 혼동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천년 전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가져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통치를 회복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셔서 우리의 모든 저주를 담당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이때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를 구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6:10,33). 왜냐하면 하나님나라의 완성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24:3참조).

이미이루셨지만, ‘아직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두세대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대에 삽니다. 그러나 오는 세대의 능력을 맛보았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섬기는 종으로 오셔서 구속을 이루셨고, 하나님과 친밀함의 길을 여시고 아버지께 담대하게 나아가게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구속을 기다리는 몸 안에 있습니다. 그 몸의 구속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 즉 오는 세대에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나라를 경험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매순간 붙들어야 할 이유가 이것입니다.

우리는 오는 세대에 속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3:20). 그러나 여전히 이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대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여전히 구속을 기다리는 우리 몸에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말씀 가운데 이미 이루신 진리를 깨닫고 겸손히 엎드리지만, 다음 순간 자신에게 집중합니다. 세상사랑에 빠집니다. 옛사람에서 나오는 욕심과 감정의 소리를 듣고 반응하게 됩니다.

우리의 아담적 옛 본성은 계속해서 네가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목적을 위해 살라, ‘자기 자원으로 살라, ‘자기 지혜로 살라, ‘네가 보는 것이 옳다고 우리에게 소리칩니다. 자신을 과신하고, 자기가 하는 일들을 보면서 자부심을 갖도록 속삭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선함이 없다는 말에 지적인 동의를 하게하고 실재로는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함으로무력화시켜 버립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열심히 기도하게 합니다. 성경공부 하는 자리로 이끕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보면서 자부심을 갖도록 합니다. 우월의식을 갖게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매번 서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대 가운데 사는 동안 매번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16:14)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가 선포하는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3) 십자가 앞에 나아가 십자가가 선포하는 메시지를 들으십시오.

 

우리는 매순간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진리를 선포합니다.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해 죽은 자임을 선포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자원으로 살수 없음을 선포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겸손케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십자가가 선포하는 메시지를 듣겠습니다.

 

첫째, 과거의 나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서 21-3)

 

우리가 교만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속에 선함이 없음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다음순간 자기중심적이 되어지면, 교만해져 버립니다. 우리 말 속담에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생각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 교만하게 군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과거의 정체성으로 인도하여 겸손케 합니다.

십자가는 모든 인류를 고발합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야만 했습니까?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소망이 없었던 자들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였으며, 자기 욕심대로 세상 풍속을 쫓아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바대로 살았고, 그 뒤에는 공중권세 잡은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여있었던 아무 소망도 없었던 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과거의 정체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내리신 유일한 처방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가 선포하는 메시지를 들을 때 우리는 겸손케 됩니다.

 

둘째,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 자원으로 살아야 하는 자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10)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8-10).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듣는 두 번째 메시지는 현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의 은혜였고, 주님의 자원으로 살아야 할 것을 선포합니다. 위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러한 분명한 몇 가지 사실들을 가르쳐 줍니다.

 

(1) 우리의 구원은 은혜로, 믿음으로였고(8),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원으로 구원받은 자입니다. 자기 지혜나 자기 자원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믿음으로 반응하여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18).

우리 중에 자기 지혜로 구원받을 자가 없습니다. 자기 지혜로 구원에 이를 자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원과 하나님의 지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 것입니다.

 

(2) 이렇게 구원하신 이유는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입니다(9).

나의 구원이 오직 주님의 은혜임을 분명히 알게 되면, 우리는 자신에 대해 자랑할 것이 없음을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랑할 것이 없음을 알기 원하십니다. 십자가가 그것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았던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나니”(6:14)라고 고백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자랑할 것이 없음을 분명히 알게 될 때 우리의 모든 자부심은 내려지게 됩니다. 행위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오는 영적인 우월의식도 내려지게 됩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육체의 자랑을 배설물로 여기게 됩니다(3:8). 우리의 자기중심적인 모든 초점이 내려집니다. 자기 자랑이 내려지듯이 동시에, 자기의 실패를 봄으로 오는 죄책도 내려지게 됩니다. 다만 십자가의 그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더욱 그 은혜를 사모하게 됩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아야 합니다(10).

우리가 아무런 소망이 없을 때 우리는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주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되, 믿는 성도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19). 그 능력은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셨던 능력입니다. 예수님을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보좌 우편에 앉히시고,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게 하신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에베소서 1:20-21)

 

그 능력이 하나님의 크신 긍휼에 기초하여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것은 풍성하신 주님의 은혜였습니다(2:1-9).

그리고 이제 그 능력이 우리를 하나님의 작품으로 만드셨고, 또한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10)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6)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40)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예레미야 3239-40)

 

우리를 구원하심이 주님의 능력이라면 우리는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신뢰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지만 스스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작품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를 거룩케 하심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를 승리케 하심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로 하나님을 경외케 하는 것도, 나누어지지 않는 한마음을 갖는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것도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미 시작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원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과 지혜로 우리를 작품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성품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죄인 된 우리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접촉점이 십자가에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사랑, 공의, 전지전능하심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로마서 58)

 

십자가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바로 나를 위한, 나를 사랑하심으로 인한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

어느 사모님의 체험입니다.

환경적인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를 원하며 간절히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께서 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위에서 바라 본 십자가의 모습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아래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를 위에서는 누가 보았겠습니까? 십자가에 아들을 내어 놓으신 하나님께서 보신 것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원하는 당신의 자녀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십자가를 보이시면서 위에서 보신 모습을 비추셨습니다. 그것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엄청난 수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실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시는 성자 예수님의 음성에 아마도 성부 하나님은 그 얼굴을 돌리고 귀를 막으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여러분의 자녀가 몸이 아파서 신음하는 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마음이 어떠하셨습니까?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에는 나를 향한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십자가를 볼 때마다 거기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합니다. 환경이 어려울 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낀 적이 있습니다. 제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선명히 알게 되었을 때, 그러한 혼돈은 완전히 끊어 졌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혼돈 속에서도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이 비춰집니다. 주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신뢰하며 보이는 모든 환경에 반응하지 않고, 신실하신 주님의 사랑에 반응하게 됩니다. 그 사랑이 저를 강권합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을 신뢰하게 합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합니다.

(2) 하나님의 공의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하나님의 공의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사랑뿐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선명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몹시 싫어하실 뿐 아니라 죄와 정반대편에 계십니다. 죄와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모든 저주를 그 아들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 (로마서 832)

하나님의 사랑은 죄의 저주 아래 있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형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13)

 

몇 개월 전 예수전도단 DTS에서 십자가를 강의하는 중에 한 자매가 아주 혼돈스러워 하면서 이렇게 질문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했다는 것이 너무나 혼돈스럽습니다.”

저는 그 질문에 답을 하면서, 갈보리 언덕에 높이 들린 십자가의 참혹함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갈보리 언덕에 있었다면, 그리고 그 비참함을 목격했다면, 어떤 사람은 그날 밥을 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너무나 참혹한 모습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피범벅이 된 모습과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온몸을 진저리 쳤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날,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모든 저주를 그 아들에게 다 쏟아 부으셨습니다. 모든 진노를 쏟으셨고, 그 아들은 저주가운데서 하나님께 버림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며 용납하실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는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공의를 제대로 안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가를 알고 감격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죄가 얼마나 심각하게 하나님을 근심케 하는 것인지를 알게 되어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울 것입니다. 십자가에 하나님의 공의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더 알게 하소서!

(3) 하나님의 전지하심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로마서58절 상)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고, 하나님의 진노아래서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가 알기도 전에 우리를 위해 놀라운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자신의 진정한 필요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셨습니다. 그 필요 가운데 가장 큰 필요가 바로 구원입니다. 그 구원을 위해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준비하셨고, 그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필요 중에 가장 큰 필요가 구원입니다. 구원의 필요를 우리가 알기도 전에 주님은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요, 소망이 됩니다.

오래 전 제 아들이 치토스라는 스낵과자를 먹고 싶어 했습니다. 마을에 작은 가게가 하나 있었지만 그 과자가 없었습니다. 그날이 주일이었고, 다음날 사다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어떤 분에게 전화가 왔고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슈퍼를 운영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분과 대화한 후 집에 돌아오려고 차를 타서 출발하려고 하는데 그분이 뛰어 나와서 차를 멈추어 세웠습니다. 그러더니 이거 아이들 갖다 주세요라고 말하며 과자를 한 상자 넣어 주셨습니다. 아들에게 약속한 그 치토스였습니다. 그제야 아들과 약속했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돌아오는 동안 내내 하나님의 사랑과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십자가는 그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4)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로마서 116)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과거의 신분을 보십시오. 이미 살펴본 것처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마귀의 권세를 멸하셨습니다. 우리는 일평생 마귀의 종노릇 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마귀를 이 세상 신(고후4:4)’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세상임금이 쫓겨났습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32)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 이러라”(요한복음 1231-33).

이 구절에서 세상에 심판이 임하고 세상임금(사단)이 쫓겨날 것을 말씀합니다. 이러한 일을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사단은 죄 없으신 예수님을 못박아 죽임으로 끝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한 대속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사망에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사단의 심판이 이르게 된 것입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히브리서 214-15)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 능력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저는 이렇게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마다 놀라운 승리를 경험케 됩니다.

 

어떤 일이 뜻대로 되어지지 않을 때에 낙심하는 마음이 들 때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십자가의 메시지를 묵상합니다. 그리고 거기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전지, 전능하심을 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성품을 보면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또한 인도하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동의합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저를 다루실 때 모든 환경이 제 뜻대로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보면서 신실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주, 나의 주 하나님은 신실하신 주라는 어떤 찬양의 후렴부분을 한 시간도 넘게 찬양했습니다. 실재로는 하나도 신실하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동의했습니다. 내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다름을 동의하고 주님의 생각이 완전함을 동의 했습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어떤 순간 제 마음에 놀라운 감격과 기쁨이 있었고, 진정으로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저에 대해 평가하는 소리를 들을 때 기분이 들뜨거나 낙심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때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정체성을 봅니다. 과거에 죽었던 나를 건지신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신분을 봅니다. 자녀로 부르신 주님의 평가에만 귀를 기울이기로 결단하게 됩니다. 주님으로만 위로받고 만족하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의 평가에 대해 더 이상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외에도 매순간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게 될 때, 영적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온전한 예배자로 서게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사역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역하게 합니다. 십자가에는 놀라운 승리와 자유함과 기쁨이 있습니다. 뒤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2. 십자가로 사는 삶의 과정

 

 

이렇게 십자가를 매순간 의지하는 삶은 놀라운 승리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로 사는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이론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재적인 체험을 필요로 합니다. 성령님의 선명한 비추심이 필요합니다. 그 비추심은 두 가지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동의하는 과정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유일한 처방임을 발견하여 그 공로를 붙잡는 과정입니다.

 

1) 자신의 선함 없음에 동의하고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는 과정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도 잘 알지 못하고 자신도 잘 알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이론으로는 알지만 실재가 아닙니다. 특히 자신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을 올바로 알지 못하면 여전히 자기에 대해 소망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자기 자원을 붙들고, 자기 목적을 위해

살며, 자기관점으로 보면서 자기 방법을 따르게 됩니다.

이미 1장에서 자기를 보는 것의 중요성을 살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신학적인 의미를 이론적으로 잘 압니다. 그럼에도 능력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자신을 올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을 살폈습니다. 이것이 실재가 되어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선함 없음을 보는 과정을 통해서 주님과 연합된 죽음의 의미를 성령의 조명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선함이 없는 자임을 선명히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선함이 없음을 발견한 그때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재적인 사건이 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유일한 처방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제시펜 루이스는 그의 저서 십자가의 도에서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체험을 이렇게 강조합니다.

십자가의 내적인 진리는 결코 인간의 지식이나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너무나 위대하고 두려울 정도로 실제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그 죽음의 실재에 동참한 자만이 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십자가의 도는 단순히 어떤 신학적인 교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진리를 우리 안에 계시하실 때 단순한 지식적인 이해를 초월하여 우리의 삶 속에 전개되는 실재적인 경험을 통해서 나타내신다

 

십자가의 못 박힘이 실재입니까?

제가 약 8년 전에 사순절 고난주간을 맞아 갈라디아서 220절을 본문으로 설교하려고 준비했습니다. 그 구절을 묵상하던 중에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는 말씀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내가 과연 못 박혔는가? 이 질문에 머리로는 동의할 수 있었지만 가슴에서는 실재가 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금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이후로 하나님은 제 삶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깨닫게 하시며 십자가만이 유일한 처방임을 비추시고, 십자가의 능력을 더욱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습니까? 머리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대답할 수 있으십니까? 그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자신을 보되 율법의 관점으로 보는 것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것은 다릅니다. 율법은 행위의 결과를 드러내지만 인격체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까지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기 위해서는 먼저 패러다임의 전환이 중요합니다.

 

앞장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중요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신앙은 행위(doing)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입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행위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가치관에서는 항상 초점이 자기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를 의식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했느냐에 관심이 있고, 그것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잘하면 자기의에 기초하여 우월의식에 빠지고, 못하면 죄책감에 빠져버립니다. 그것이 바리새인들이었고,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기준은 율법이었습니다. 그들의 초점은 율법을 준수하는 자신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적인 가치체계에서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율법의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친밀함을 알게 될 때 우리의 초점은 더 이상 율법도, 율법을 잘 지키는 자신도 아닙니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초점은 하나님입니다.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추구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살피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발견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정결하게 되기를 원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24)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13923-24)

하나님을 구하는 시편기자의 고백을 보십시오. 그는 오직 하나님께 발견되기를 원합니다. 그의 관심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보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보면서 죄인 됨에 동의하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보게 될 때 반드시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의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 스스로 할 수 없음을 철저히 인식하게 됩니다. 주님을 보면 볼수록 무력함을 느끼게 됩니다. 거기서 가난한 심령이 됩니다. 마음의 가난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의식입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한 심령입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가 무능하다는 것을 느끼는 철저한 자기 인식에서 옵니다.

이렇게 심령의 가난을 느꼈던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을 보십시오. 이사야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자신을 보면서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이적 앞에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내가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갈보리언덕의 한편의 강도는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기에 합당한 자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 앞에 설 때, 우리의 심령은 애통함에 이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속에 선함이 없음을 안다고 말하지만 애통함은 없습니다. 애통함이 없는 것은 자기를 바로 인식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속에 선함이 없음을 안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자신을 올바로 인식했다면 그것 때문에 애통하게 됩니다. 여기서 애통은 단순한 슬픔이 아닙니다. 좀더 구체적인 슬픔으로서 마음 아파 우는 것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만한 것이 없음을 볼 뿐 아니라,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을 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의 절망을 발견합니다. 그때 자신의 죄로 인해 애통해 합니다. 자신의 불신앙을 보면서, 자신의 탐욕과 시기, 질투, 경쟁심 등, 악한 감정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미워하며 슬퍼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현실을 보면서도 애통해 합니다.

이러한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은 부흥을 가져오게 합니다. 부흥은 언제나 처지를 인식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개인이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해 할 때 주님의 위로를 경험케 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그를 성령으로 충만해 지게 합니다. 교회들의 처지를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해하며 회개할 때 하나님은 부흥을 보내십니다.

 

셋째, 십자가를 체험적으로 경험하며 하나님 중심적으로 나아갑니다.

애통함은 결국 회개에 이르게 합니다. 자신에 대해 절망하게 될 때, 자신의 실상을 정확하게 인식하게 될 때 십자가를 붙잡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스스로 죄인됨을 발견한 이후에 십자가의 구원의 감격을 발견케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때, 한편의 강도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합당한 보응임을 고백한 후 예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고, 놀라운 약속을 받게 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23:4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

이것은 특별한 기독교인들만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팔복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체험적으로 나타나는 가장 기본적인 특징들이어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3-4)

심령의 가난함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심령의 가난함에서 우리는 주님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애통함으로 대면할 때 십자가의 위로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복입니다.

 

마틴로이드 존스는 그의 산상수훈 설교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애통의 의미를 먼저 알기 전에 주님을 그의 구세주로, 구속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성과 절망을 보고서 그리스도를 발견케 됩니다. 성령께서 그의 완전한 만족의 대상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그에게 계시할 때는 사람이 이 철저한 절망 속에 있는 자기를 볼 때인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렇게 애통하는 사람이 성령의 조명으로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죽으셨으며,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자기를 위해 변호인으로 서 계심을 봅니다. 주님의 놀라운 계획을 봅니다. 주님의 완전한 사랑을 봅니다. 거기서 놀라운 위로와 안식을 경험케 됩니다.

 

제 아내의 예

 

제가 첫 목회하던 곳에서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저희에게 광야를 경험케 하셨습니다. 제 아내는 목회자의 아내로서 가지는 부담감과 여러 가지 환경적인 어려움에 대해 불신으로 반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매우 고통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거의 듣지 않았던 제 아내는 하나님의 다루심 가운데 비추어진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들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건을 통해 자신의 모습이 더욱 드러나자 나는 지금 죽으면 천국에도 갈수 없을 것 같아요! 나는 지금 완전히 암흑 이예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이틀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예배당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제가 왜 그러느냐고 묻고는,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현재 자신에게는 이론일 뿐이라고 말하며 애통해 했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찬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찬송가 197장을 영어로 불렀습니다. 그 중 3절의 내용을 해석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나에게 선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당신의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갈보리 어린양의 보혈이 나의 옷을 깨끗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대속하셨습니다. 나는 그분의 은혜 아래 있습니다.

죄는 붉은 얼룩을 남겼지만, 주님이 눈과 같이 깨끗하게 씻으셨습니다.

 

그러더니 계속해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를 불렀습니다.

그 뒤 제 아내에게 물어보았더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보면서 완전한 절망이었다고 합니다. 기도도 찬송도 할 수 없어서 절망 가운데 엎드려 있을 때 갑자기 어둠의 터널에서 빛이 비춰오듯이 그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구나!”라는 깨달아 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십자가가 필요 하구나이것을 깨닫게 되었고, 전에 보았던 찬송가197장이 생각이 나서 부르며 놀라운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 아내는 그 날 십자가의 죽음과 십자가의 살리심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의 체험은 십자가에 의한 삶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못 박힘을 경험한 사람은 거기서 자신을 부인하게 됩니다. 거기서 자기중심성이 내려집니다. 오직 하나님이 목적되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길을 찾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이때 믿음으로 사는 삶이 가능합니다. 성령에 의한 삶도 여기서 가능합니다.

 

넷째, 베드로와 바울의 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의 예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누가복음 2231-33)

 

베드로는 대단히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진리라고 생각하면 기꺼이 삶을 조정하려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캄캄한 밤중에 배에서 물로 뛰어내린 사람입니다(14:29). 그런 열정을 가진 베드로에게 주님은 사단의 시험이 있을 것과 깨어 기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즉각 자신의 열정으로 옥에도 죽는 데도 주와 함께 가기를 준비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자신을 과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원이 아니라 자신의 자원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부인합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부인해 버립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누가복음 2260-62)

마침 세 번 부인한 후에 닭이 울었고, 그가 예수님을 쳐다보았을 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때에야 주님의 예언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밖에 나와서 통곡합니다. 이때 그는 왜 울었을까요? 주님을 부인한 미안함과 죄책감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도 더 큰 이유는 주님을 부인한 자신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장담했지만 막상 닥치는 상황에서 주님을 부인해 버린 자신을 보면서 얼마나 실망스러웠겠습니까? 그것이 애통함입니다.

이 사건은 베드로의 일생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그는 더 이상 자신을 과신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무능함을 알았습니다. 스스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베드로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세 번 주님을 부인했던 그 과거를 치유해 주십니다(요한복음 2115-17).

세 번이나 물으신 이후에 주님은 그를 향해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8)

그의 남은 생애가 어떨지를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삶의 주권이 더 이상 자신에게 있지 않을 것을 말씀합니다. 그때 이후로 그는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께 주도권을 드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바울의 예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대단한 열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철저히 자신을 발견하면서 결국 십자가가 왜 그렇게 능력인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선, 바울은 율법의 의로 흠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빌립보서 36).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중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는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 일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법과 몸의 지체의 법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두 마음으로 인하여 애통해 합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2-24)

자신의 선함이 없음을 본 애통함은 그를 죄인중의 괴수로 고백하게 합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1:15)

 

그렇게 애통함으로 절규하던 바울은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힌 자신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사 죽으심으로 구원하셨고, 이제 자기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의 삶을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바울은 말씀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한 때 자신을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3:6)’라는 생각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외적 행위뿐 아니라 그의 마음속 동기까지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절망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십자가를 발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께서 이루신 일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승리의 길이 무엇인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영을 좇아 행하게 됨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 자신의 자원을 붙들지 않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삶은 믿음에 의한 삶으로 연결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바울의 믿음이 여기서 나왔습니다(4:13). 또한, 성령에 의한 삶도 가능합니다. 오직 성령님께 주도권을 드리는 것도 여기서 가능합니다. 이러한 체험을 경험하면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신을 보게 될 때 우리가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압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잘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정말로 형편없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어찌 다른 사람을 평가하겠습니까?

 

 

2) 오늘날 사람들이 십자가를 체험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

 

첫째, 율법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잘 지켜서 구원에 이르도록 주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스스로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로마서 83-4)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목적으로 율법을 주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

의 옛 본성에서 나오는 자기중심성은 자기자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그 율법에 도전했습니다. 그리고는 주요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잘 되어가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 기자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2:10)라고 말함으로 1%만 불완전해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둘째, 율법의 목적 - 그리스도께 인도함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려고 주셨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입을 막습니다. 율법 앞에서 우리의 모든 이론이 내려지게 됩니다. 행위로 의롭다하심을 받을 육체가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알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율법은 범죄를 더 하게 하려고 왔습니다(5:20). 율법은 작은 죄에 대해서도 정죄하고, 죄의 감추어진 부분을 들춰내어서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드러냅니다. 율법 앞에서 사람은 자신의 실상을 봅니다. 얼마나 어리석고, 자기중심적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시기와 질투로 가득한 자신을 보게 합니다. 욕심으로 가득한 마음을 보게 합니다.

결국 율법은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을 뿐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침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324)

어떤 육체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율법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자신의 입을 막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구원을 위한 유일한 처방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갑니다. 그 아들을 내어주신 주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자기를 보던 초점이 하나님을 의식하며 긍휼과 자비를 구하게 됩니다.

 

셋째, 말씀에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는 이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 가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 앞에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기의 무능함선함 없음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말씀은 우리 자신을 비추되 선함이 없음을 보게 합니다. ‘무능함을 깨닫게 하십니다. 말씀 앞에 설수록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선함 없음을 보는 일은 우리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래서 타협해 버립니다. 말씀에 도전하다가 실패함을 보면서 타협의 자리에 갑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고는 상대적 의인의식에 빠져서 삽니다. 스스로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자의식을 가지고 삽니다. 그런 자의식에서 나오는 성취감은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리고 뿌듯함을 느끼며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 어떤 사람은 교회를 떠나거나, 설교가 부담되면 듣지 않고 들을 말만 듣습니다. 이미 타협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기준이 강하게 제시되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자기 안에서 말씀 앞에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을 그쳤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살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미 타협안을 갖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을 의식하고 말씀에 대면하지만 어떤 순간 타협의 자리에 가버립니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에 익숙해져 버립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성에서 온 자기변호의 본성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성은 자기변호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 앞에 정직한 직면을 피하게 합니다. 타협하게 하면서 다른 대책을 내놓습니다. 인본주의적인 방법으로 이끌어갑니다. 어찌하든지 말씀 앞에 직면하는 것을 방해하여 십자가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이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이해와 다른 이해를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인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그래도 낫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죄를 짓지만 십자가에 못 박힐 만큼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자신을 변호해 버리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죄인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인 의인의식에 빠져 있거나,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여전히 자기 자원을 의지합니다. 십자가는 구원을 위한 일회용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능력도 감격도 잘 모르며, 지금 은혜의 십자가를 붙들고, 그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는 삶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순간 자기의 선함 없음을 보고 애통하며 겸손함의 자리에 있다가도 그 다음순간 다시 자기를 변호하는 자리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자신의 자원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 앞에 정직하게 직면할 때마다 우리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과거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왜 필요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됨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구합니다.

 

 

넷째, 말씀 앞에 정직함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말씀 앞에 정직하게 직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타협하지 않고 정직하게 직면하게 될 때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실상을 봅니다. 실패하는 자신을 봅니다. 불성실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을 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자신을 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는 자신을 봅니다. 결국 우리 자원으로 말씀을 지킬 능력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무능을 철저히 발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점수가 0점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이미 살펴 본대로 심령이 가난하며 애통하게 됩니다.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절박하게 깨닫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찾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으면 소망이 없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정직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정직을 기뻐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그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불릴 수 있는 강점 중의 하나가 바로 정직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pleased with integrity) 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즐거이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역대상 2917)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integrity of heart)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열왕기상 94-5)

 

하나님은 다윗의 정직을 기뻐하셨습니다. 다윗은 바로 그것을 알고 하나님을 기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솔로몬에게도 다윗과 같은 정직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투명함입니다. 그 투명함이 친밀함에 있어서도 필수입니다. 우리에게 정직이 중요합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정직한 자세는 우리가 가져야 할 최선의 자세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빚어가실 것입니다. 그 말씀앞에서 우리 자신을 드러내시고 비추심으로 우리가 얼마나 교만한가를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왜 십자가가 필요한지, 십자가를 의지하는 삶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3) 하나님의 다루심을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 다루심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8:2).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로 이끄시고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택하시고 애굽에서 불러내셨지만 그들은 믿음의 세대로 세워져야 했습니다.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재로 가나안은 믿음의 세대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종들은 광야를 거쳐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40년간 미디안 광야에서 연단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후 골리앗을 물리쳤고, 그가 수금을 탈 때 사울에게 붙었던 악신이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임금에 의해 도망다니며 광야에서 하나님의 다루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아나니아에 의해 치유 받고 성령 충만케 된 이후에 다메섹에 복음을 전했지만, 그 후 10년 이상의 세월을 광야에서 보내게 됩니다. 요셉은 어린시절에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제들에 의해 애굽에 보디발 장군의 집에 팔려가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는 다루심을 경험함으로 훗날 하나님께 놀랍게 쓰임 받고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과 사역의 모델이십니다. 예수님은 광야가 필요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델로서 광야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브리서 58-9)

 

누가복음에 보면 성령으로 충만하셨지만 성령님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로 가셨고, 거기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누가복음 41-2)

믿음의 선진들이 광야가 필요했다면 우리에게도 광야가 필요할 것입니다. 광야가 왜 필요하고 광야를 통해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무엇일까요? 자기중심성이 문제입니다. 광야에서 자기중심성이 깨뜨려 집니다. 그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옮기게 됩니다.

 

둘째, 다루심의 방법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8:3 )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 사람을 통해 다루십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 일하십니다. 어려운 환경을 만나게 하십니다. 사람을 통해 자신을 보게 합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연단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같이 하셨으며 11)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두셨으며 12)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행하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6610-1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도 하시며 무거운 짐을 허리에 두시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억울한 경험을 하시도록 허락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머리위에 타고 가게 하셨다면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억울함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 우리 자신의 실체를 보게 하십니다. 감춰진 옛 본성을 드러내십니다.

 

환경을 통해 다루시는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여러분 주변에 가시 같은 이웃이 생겼다면 이는 하나님의 다루심이 틀림없습니다. 그 이웃을 통해 하나님이 빚으시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미운 이웃을 사랑하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았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계속 상처를 받기만 했던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가시에 찔려 아파했습니다. 아무리 마음속으로 무장을 하고 품어도 찔리기만 했습니다. 이것이 다루심입니다. 이 다루심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보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을 봅니다. 미움이 가득한 자신을 봅니다. 이렇게 절망 중에 있을 때 성령께서는 여기다가 숨은 마음의 동기까지 비추십니다. 가시 같은 이웃을 품으려고 했던 마음 속 동기를 비추십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얼마나 더러운 것이 가득한지를 계속 비추시며 말씀하십니다. 보통 이쯤 되면 죽을 맛입니다.

 

언젠가 상담을 요청해 오신 어떤 사모님은 문제의 원인을 자꾸 외부에서 찾으셨습니다. 자기는 괜찮은데 외부적 요인들이 자신을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함께 기도할 때 문제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음을 보셨습니다. 그 후 사모님은 변화되어 가셨습니다. 자기의 모습이 얼마나 추한지를 보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참 모습을 보고 사모님은 고통스러우셔서 매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모님의 경우에는 치유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신 것입니다. 자기 속에 어떤 선한 것도 없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다루심의 목적

다루심은 두 가지를 깨닫게 합니다. 하나는, 시험(TEST)으로서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명기 82)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어려운 환경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나님만 신뢰하고 반응하는지 알려 함이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알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치 않으셔도 아십니다. 다만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알되, ‘선함이 없음’, ‘무능함’, ‘무지함편견이 있음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선명히 알 때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되며 자기중심적인 자리에 있는 것도 보게 됩니다.

 

또 다른 하나의 목적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명기 83)

하나님은 그들을 주린 환경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의 출애굽을 주도하셨고, 어려운 환경으로 인도하시되, 때로는 주리게도 하시고, 때로는 목마르게도 하시며, 때로는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하여 홍해를 가르기는 기적을 나타내시기도 하십니다.

 

위의 구절은 말씀을 묵상해서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으로만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출애굽 할 때의 상황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했습니다. 만나를 주시면서 하루 한 호멜씩 만 모으라고 하셨다면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욕심을 부려서 더 모은 사람은 그 이튿날 아꼈던 만나가 썩어 버린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배운 것은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의 하나님이심을 배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탐욕에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11:5-6). 그들이 불평하며 원망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한달 동안 고기를 먹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그대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추라기를 보자 욕심을 내었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심을,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그들은 알았던 것입니다.

넷째, 다루심의 결과

다루심의 결과 자기중심성에서 하나님중심으로 변하게 됩니다. 다루심은 자신의 선함 없음무능함, 결국 자신을 보게 하며 동시에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사랑, 신실하심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다루심을 경험케 될 때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 거듭난 이후에도 여전히 옛사람의 영향력이 우리 몸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자기 중심적인 자리에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루심을 통해 자신의 실상을 보게 하심으로 하나님중심적인 자리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능력임을 철저히 깨닫게 됩니다. 결코 자신의 자원이 아님을 발견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다루심을 알지 못할 때 환경과 상황에 대해 불평과 원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루심을 이해하게 될 때 그러한 상황에서 주님의 뜻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다루심은 우리를 겸손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의 근본은 매우 교만합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래도 조금은 의롭다고 여기는 관점에서 신앙생활을 접근합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는 더 이상 우리가 자신을 붙잡을 근거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의는 더 이상 의미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어떤 선함도 없음을 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 진리를 다루심이라는 과정을 통해 비추십니다. 출 애굽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과 양식이 없는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 중 하나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의 모습을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찬양하던 백성들을 마라의 쓴 물로 인도하신 이유는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속에 어떤 능력이나 선함도 없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통해 다루시면서 십자가에서의 죽음의 실재적 의미에 대해 보게 하십니다.

 

성도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 진리가 이론에만 그친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입술로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라는 진리에 동의하지만 실제적 삶에서는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이론이 아니라 실재임을 아는 일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합니다. 죽은 자에게 부활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처럼 그리스도와 연합한 죽음이 실재일 때, 부활의 감격이 있습니다. 이때 그리스도가 내속에 사시는 삶도 가능합니다. 이것이 실재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여전히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자신을 보는 자라야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왜 십자가에서 죽은 자 인지를 아는 자만이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원래 십자가는 죄인이 달려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고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되어 못 박혔음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 구절에서 바울은 자신도 역시 주님과 함께 못 박혀야 할 존재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루심 속에서 성령의 조명으로 자신의 추함을 보지 못하면 십자가의 설교를 들어도 자신이 못 박혀야할 형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흔히 말하는 대로 우리의 죄를 위한 십자가라고 말할 뿐입니다. ‘십자가를 운운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다루심 속에서 자기 속에 어떤 선한 것도 없음을 안 사람은 애통해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보며,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감격합니다. 눈물을 글썽거립니다. 그러나 자기 속에 선한 것이 없음을 모르는 자는 주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일반적인 구원의 상징 외에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감격이 없습니다. 애통해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자기 의를 의지하고 주님 앞에서 서려고 하는 한 십자가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루심을 통해 우리의 아담적 본성을 드러내시며,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어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고 실제로 주님과 함께 죽는 신앙의 실재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삶을 날마다 살게 합니다. 자기 의를 붙잡고 있는 한 그 사람은 계속 율법에 대해 상관이 있는 사람이며 영원히 죄인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 의가 하나도 없으며, 주님 앞에 내세울만한 선한 것이 자기에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주님의 공로만을 붙잡고 서는 자는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게 됩니다.

 

 

3. 십자가에 의한 삶의 유익한 결과들

 

이제 십자가에 의한 삶이 주는 유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즉 십자가에 의한 삶을 실제로 적용하며 사는 삶의 결과들입니다.

 

1)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게 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신분증과 같습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과거의 정체성과 현재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과거의 정체성과 현재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주님의 공로로 구원받은 자요, 은혜가 없이는 살수 없는 자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게 합니다. 거기서 선명하게 자신의 신분을 깨닫고 올바른 처신을 하게 됩니다. 즉 스스로의 자원도 아니고, 자기지혜도 아님을 알기에 주님을 찾게 됩니다. 오직 주님께만 소망이 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중심적일 때 자신의 신분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자기를 과대평가합니다. 그것이 아담적 본성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자원, 자기지혜를 가지고 자기의 목적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때 초점이 자기에게 있고 교만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월의식이나 또는, 죄책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심지어 실패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봅니다. 그러다 결국은 자신이 할 수 없으면서도 주님께 나오지 않습니다. 절대로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설교를 들어도 하나님이 찾아지지 않습니다. 며칠 동안은 찾으려 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 유일한 해결책인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자기 중심적인 자리에 있을까요? 하나님만 유일한 해결책인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자신에게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상태에서 자신의 신분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영적인 혼돈을 경험케 됩니다. 원수의 참소에 마음이 낙심되기도 합니다. 어떤 일이든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의 신분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분명히 알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만 반응하도록 일으켜 줍니다. 금방 환경이 뜻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가장 선함을 알고 하나님의 주권에 순복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구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게 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겸손케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게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목말라합니다. 이론으로 아는 지식에 만족하지 못하며 주님으로만 채울 수 있는 만족을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열매를 맺을 때 이렇게 외칩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전서 1510)

자부심에 빠지지 않습니다. 빠졌다면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순간, 겸손히 엎드려 주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많이 실패합니까? 그렇지만 그 사실을 알수록 더욱 주님을 구하게 됩니다.

 

 

2) 십자가 앞에서 참된 예배자가 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13-6)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은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누가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까?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본 자들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소망이 없는 자였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를 구원하셔서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요. 가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은 진정한 예배 자로 섭니다. 진정으로 경배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자신을 올바로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한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물에 빠졌습니다. 소방대원이 출동하여 한 사람을 먼저 건지고, 그 다음 사람을 건졌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물도 별로 먹지 않고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사람은 물을 많이 먹고 병원 응급실에까지 실려 갔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자기를 건져낸 소방대원들에게 감사할까요? 물을 많이 먹어 죽을 뻔 했던 사람입니다. 그냥 두었다면 둘다 죽었겠지만 그 사람은 죽음의 문턱에 가본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비슷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깨달은 자가 진정한 예배자로 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예배자로 서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배 하는 자를 찾으십니다(4:23). 온전한 예배자로 설때 주님을 기쁘시게 할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온전한 예배자로 세워줍니다.

 

3) 십자가에 의한 삶에서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역 하게 됩니다.

자기중심적일 때 사역을 앞두고 자신의 자원을 의지하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를 봅니다. 준비되었는가를 봅니다. 그러나 사역은 우리의 자원으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사역자입니다. 동역자로서 주님께 순종하는 자리에 설때 주님이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이때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십자가는 그 은혜의 끈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자원이 아님을 발견케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찾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21-5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4)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5)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자원으로 할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주님의 일입니다. 우리 자원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의 지혜로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은 고린도에 가기 전에 아덴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전한 복음은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그 메시지는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복음전파는 몇 사람이 받아들였지만 바울의 사역에서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간 도시가 고린도입니다. 그는 자기 말의 설득력으로 하지 않으려고 두렵고 떨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고린도 전서 22절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라고 말합니다.

왜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말할까요? 그가 왜 이 시점에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언급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하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성령의 사역은 인간적인 자기생각과 함께 갈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이 내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님께 민감하게 반응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수 있습니다. 아덴에서 실패한 바울은 고린도에서 그렇게 복음을 전하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점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말함으로 자신의 구원뿐 아니라 사역이 하나님의 자원이요, 하나님의 능력임을 고백하고, 성령님께서 일하시는 통로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역 전에, 특히 설교 전에 십자가 앞에 섭니다. 거기서 저는 겸손히 주님을 구합니다. 사역은 주님의 일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제 자원으로 사역할 수 없음을 압니다. 오직 주님의 자원임을 발견합니다. 주님의 은혜요, 그분의 능력임을 압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존합니다. 그리고 주님만 영광 받으시기를 구합니다. 잘 준비된 설교 원고도 아님을 압니다. 주님께서 은혜로 함께 하셔야만 됨을 깨닫고 주님을 구하게 됩니다.

설교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 앞에 서면 설수록 더욱 주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집회를 마친 후 사람들의 평가를 듣습니다. 칭찬을 듣습니다. 그때마다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음순간 저 자신을 주목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평가를 즐기고 있는 제 모습을 봅니다. 어떤 때는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반응이 별로 없을 때 순식간에 낙심하고 있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때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갑니다. 거기 계시된 과거의 정체성과 현재의 정체성을 봅니다. 그리고 거기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내 자원이 아니며, 내 영광도 아님을 발견합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요. 그분의 자원이며, 오직 주님의 뜻만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때마다 주님만 영광 받으시기를 구하게 됩니다.

 

 

4) 성령님께 주도권을 드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전서 122-24)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인간이 자기지혜로 구원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놓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이 지혜가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였습니다.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자기지혜, 자기방식으로 나아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일 때 자기지혜로 나아가려 합니다. 자기지혜를 따라 인본주의를 붙들게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오히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게 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라디아서 517)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곧 승리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자기지혜의 소망 없음을 선언합니다. 십자가는 자기중심성의 끝났음을 선포합니다. 자기자원이 끝났다는 것을 선포하고, 자기지혜가 끝장인 것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지혜를 구하는 겸손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종이 듣겠나이다. 말씀 하옵소서라고 엎드리게 됩니다.

 

5) 십자가는 친밀한 교제를 누리게 합니다.

 

친밀한 교제의 중요성은 이미 여러 차례 살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와 친밀한 교제를 원하십니다. 친밀한 교제는 우리의 모든 삶에서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을 때 열매 맺는 삶도 가능합니다.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 안에도 그 기쁨이 충만케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친밀한 교제 가운데 기도응답도 있습니다.

 

그런데 친밀한 교제를 방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첫째, 죄의 문제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얼굴을 가립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얼른 회개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럼에도 반복적으로 지을 때 죄책감에 빠지게 됩니다. 죄책감은 원수에게서 온 것입니다. 성령께서 죄를 지적하실 때는 무거운 짐으로 오지 않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분명하게 지적하십니다. 그러나 사단의 참소는 막연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정죄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친밀함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이때 우리는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해야 합니다.

반복적으로 실패한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십시오. 그것이 본래 내 모습이요. 나라고 인정하십시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가 필요했고, 지금도 주님의 그 은혜가 필요하다고 고백하십시오. 우리가 주님 보좌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10:19)

Therefore, brothers, since we have confidence to enter the Most Holy Place by the blood of Jesus

여기서 성소는 영어 번역을 보면 the Most Holy Place”, 지성소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공로가 십자가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초점을 죄에게 두지 마십시오. 주님의 공로에 초점을 두십시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한복음 656)

죄를 이길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로 하여금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옷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 공로를 의지하여 나아가되,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둘째, 혼돈이 친밀함을 방해합니다.

우리가 환경을 바라보거나 현실을 보면서 혼돈에 빠지는 것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방해합니다. 혼돈에 빠지면 마치 터널 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 듭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이런 경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잊으신 것 같았습니다. 제 상황을 전혀 모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이러한 혼돈은 내려집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사랑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내가 누군가를 개인적으로 사랑해도 내 아들을 내어주면서까지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안 됩니다. 절대 못 내어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내어주셨습니다. 설령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들이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오히려 혼돈만 가중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랑이 없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혼돈에 빠진 그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렇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절 사랑하시는 줄 알아요. 저의 모든 것을 아심을 알아요. 주님은 저의 필요를 아시잖아요. 주님은 저의 체질을 아시잖아요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묵상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저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저를 더 잘 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절 사랑하시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이 시간 보좌 앞으로 나아갑니다. 사랑합니다. 주님.” 이것이 십자가에 의한 삶입니다. 이게 친밀한 교제의 삶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십자가에 동의해 보십시오.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에 동의하십시오. 현실에 동의하기보다는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에 동의하십시오. 그 때 놀라운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무얼 달라는 대로 다 주십니까? 아마 아닐 것입니다. 달라는 대로 다 주었다간 자녀를 망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간혹 주시지 않는 이유는 때가 아직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아니란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줄 알고 원망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이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찬양과 경배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며 서면 모든 혼돈은 깨어집니다. 원수의 어떤 공격도 무력화됩니다. 하나님을 원망함도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원수가 아무리 불어넣어도 보호막이 물리쳐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가운데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며 놀라운 승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