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촌교회연합구역예배] 하나님의 다림줄
웅촌교회구역연합예배 2006.7.21
하나님의 다림줄
아모스7:7
우리의 신앙은 생활을 해 나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중 하나는 영적 분별력 즉 하나님의 다림줄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다림줄이란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관점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구원을 얻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개인적이고 실재적으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위해 1년 동안 철야기도를 하고, 재산을 다 팔아 헌금을 드렸다고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 없지요
왜?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신앙의 전반적인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기준에 맞아야 의미가 있지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과의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1.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똑바로 세워진 교회
이처럼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다림줄에 똑바로 맞추어 세워진 교회다. 이때 그곳에 하나님의 모든 생명이 넘치게됩니다.
요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여기 ‘생명’이란 하나님이 오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친밀함, 보호, 인도, 도우심,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나라의 확장 등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게 됩니다.
노아방주->창6:22 “노아가 그와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이렇게 하나님의 기준대로 준행하니 결과 - 하나님이 친히 동력이, 키가 되어주셨습니다.
성막->출40:34-35 “34-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성전->왕상8:10-11 “10-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11-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오늘 우리의 신앙이 예배가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세워질때 하나님의 그곳에 영광으로 임하셔서 우리들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세워지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마7:22-23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다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불법 -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아다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다 헛것입니다.
계3:1-2 사대교회 - 사람의 평가 ->살았다, 하나님의 평가 ->죽었다
살았다는 것은 활동적인 교회라는 겁니다.
계3:14 라오디게아교회 - 사람의 평가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의 평가 ->가난, 가련, 헐벗고 굶주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생각하는 관점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는 관점도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아야 바른 신앙생활인 하나님의 길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다림줄이 가리워질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 다림줄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워질 수 있다는 것은 그 말의 의미가 가리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신앙의 본질, 핵심인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부터 즉, 신앙의 ABC에서부터 가리워져있는 것이 더큰 문제입니다.
1.하나님을 아는 것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세요?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지식적으로 알면 하나님을 안다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만약 하나님에 관하여 교리적으로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면 성경에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바리새인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평가는 무엇입니까?
요5:37-38
너희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교리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 피자 선전지(보고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그런데 피자를 한번도 먹어보지 못함 ->피자를 아는거예요 모르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성경공부를 통해서 잘 알아요.
그분은 전능하신분, 능력의 하나님...그런데 그 하나님을 실제로 한번도 못만났어요, 그러면 이 사람이 하나님을 나는 거예요? 모르는 거예요?
중매쟁이를 통해 총각해 되해서 시진도보고 성격은 어떻고 집안은 어떻고, 학교는 어디를 졸업하고, 직장은....다 들었어요. 그러면 이제 실제 그 사람을 만나서 확인하야지요.
그럼 성경이 말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개인적이고, 실제적으고 경험적으로 알 때 하나님을 안다라고 하는 겁니다.
이사야6장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성경공부를 해서 안 것이 아니라 실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남으로 아는 것임.
다윗의 시편18: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다윗이 공부해서 안 것을 성경에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실제 나의 하나님만이 나의 힘이되심을 경험으로 안거예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를 배워서 그렇게 고백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사도행전 7:54- 스데반의 순교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성경공부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사야나, 다윗이나, 베드로나, 스데반은 실제 하나님을 개이적이고 실제적으로 만남을 통하여 안거예요. 이것이 성경이 말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을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그 십자가의 교리를 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아는 앎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성령의 조명으로
엡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성령)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특히 찬양과 경배가 중요함
주의 주권과 주의 통치와 주의 나라 힘과 권세 임하네 예수 하나님의 공의(사랑)
우리 모두는 다윗같이 하나님을 알기를 구해야 합니다.
시27:4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린이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2)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주일성수, 십일조, 성경공부, 전도, 기도하고......그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의직을 잘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여러분 만약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이사야 시대(사1장), 예레미야시대(렘6;20:시바에서 유향을 원방에서 향품을) 바리새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하나님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가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1:11-15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렘6:20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뇨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
요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왜 이렇게 안식일과 모든 절기를 철저하게 지키고, 월삭, 대회를 지키고, 무수한 제물을 드리고, 온 백성이 금식기도를 하였으며, 한국에서 필리핀 까지 가는 먼 거리를 가서 유향과 향품을 구해서 하나님께 드리고, 구제, 십일조, 성경을 연구하고 암송하고...이렇게 철저하게 하였는데 하나님의 평가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였을까요?
여러분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을까요?
당연히 사랑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니 그 많은 예배와 희생을 드렸습니다.
이해를 잘하셔야 합니다.
그럼 예배드리지 말고, 헌금도 하지말라는 말이압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당연히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예배를 잘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예) 밥, 빨래, 청소를 잘하는 것이 남편을 사랑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건가요?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을 잘하는 것을 가리켜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니다. 왜 사랑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잘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면 성경이 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나님이 나의 유일한 모든 것 되심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표요, 목적이요, 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 반석, 나의 능력,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나의 자랑, 나의 의지, 내사는 이유, 내 항해의 바람,
이것을 모세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출33장에서 볼 수 있음. 모세는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히 여김
출32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더디 내려옴을 보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섬김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그들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진멸하시고 모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심 -> 모세의 기도로 뜻을 돌이켜 화를 내리지 않으심 ->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그 모습을 보고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림 -> 그리고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 레위 자손이 다 모세에게로 나아옴 ->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문에서 저 문으로 왕래하며 형제를, 친구를 이웃을 도륙하라 -> 그날에 삼천 명이 죽인바 됨 ->이튿날 모세가 여호와 앞에 서서 백성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하고 하나님 앞에 섬 -> 이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 ->33장 1-
내가 너희에게 주마 약속한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내사자를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 아모리 사람, 헷 사람, 브리스 사람, 히위 사람,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겠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 하심.
이 때 모세의 대답 출33:15 “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한지 2년째 입니다. 그들이 먹는 것 만나(씨리얼), 목욕을 한번 못했어요, 옷, 신발을 갈아입지 못했어요, 이 광야에 비하면 가나안은 어떤 곳입니까? 두 사람이 포도송이를 막대기에 매고 올 정도로 풍요한 곳, 천국과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지금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친히 가시지 않으면 모세도 가지 않겠다는 겁니다.
모세에게는 목숨보다, 평안함 보다, 사역보다, 사람들의 평가보다, 많은 돈보다, 안락한 삶보다, 잘 먹고 사는 보다, 심지어 사역의 확장보다 하나님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긴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더 소중히 여긴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나의 모든 것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가운데 이러한 모세와 같은 자세를 몇 사람이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소중하다고 말로는 다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나안 땅이 더 소중하고, 사역의 성공이 더 소중하고, 사람의 평가가 더 소중하고, 평안한 삶이 더 소중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3.하나님을 믿는 것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으세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도 그 의미가 많이 가리워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의 힘이심을 믿습니까? 이 말은 하나님도 임이고 권력도 힘이고 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내 힘이라는 겁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힘이되심을 믿습니까?
예) 시장가는데 지갑에 천원짜리 몇장있어요. 힘이 생겨요, 힘이빠져요.
하나님은 여러분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까?
예) 5000만원 부도위기에서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이심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말 씀하실 때 까지 믿고 기다리나요?
하나님은 우리 모든 말을 들고 계심을 믿습니까?
예)그러면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아요, 뒤에서 후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왜 믿는다고 하면서 전혀 믿음과 상관없이 사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믿음의 성격부 이해를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열심이 곧 믿음’이라는 오해가 우리가운데 팽배해 있습니다. 그러나 열심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주변의 선배신앙인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기 쉽습니다. “열심히 다녀. 예배도 빠지지말고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도 열심히 읽어야 돼. 그래야 신앙이 자라는 법이야.” 열심 그 자체는 매우 귀한 것입니다. 실제로 믿음이 제대로 자라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은 일이나,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 일이나,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것이 곧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열심히 곧 믿음이라면 바리새인들의 믿음은 정말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믿지 않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열심히 있었습니다. 헌금, 봉사, 헌신 등 어느 면에서도 그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열심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보아도 열심이 곧 믿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경우, 소위 말하는 ‘열심이 특심’인 성도들로 인하여 많은 아픔이 교회 내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많은 봉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상처를 남기고 목회자와 갈등을 빚으며 아픔을 남겼던 일들이 많습니다.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처럼 ‘열심이 곧 믿음’이라는 오해는 불교에서 말하는 공사상 즉 공을 많이 들이면 복을 받고 형통할 것이라는 잘못된 신앙관을 낳았습니다. 물론, 믿음이 있으면 열심히 있게 마련이지만 열심히 곧 다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둘째, 환경에 의존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출14:31 “이스라엘이 애굽 사람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여기서 “믿었더라는”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환경을 믿은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 - 믿음을 시험하기 위하여
우리는 믿음은 광야에 가 봐야 믿음이 있는지 드러나게 됩니다.
히3:9.10 “9-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셨다 하였으니”
19절- “이로 보건데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셋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믿는 것이 성경이 말한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요5:46,47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을 안 믿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말을 들으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안 믿었구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시 바리새인들은 보수중의 보수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기적을 믿으세요? 그런데 요즘 자유주의자들은 이것을 신화라고 하고 안 믿었어요. 바리새인들은 이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중심으로 믿었어요.
바리새인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어요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우리의 모든 필요를 능히 채우시는 분이심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어요.
그런데 주님은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유가 뭔가요?
그들은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을 믿으면 그것을 믿음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을 어디에 두고있느냐하면, 주님에 관한 지식에 믿음을 두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을 그대로 믿는 것이 중요하지만 성경이 말한 믿음은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약2:19 “네가 하나님 한 분이신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히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수2:8-11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데 그럼 라합만 들었느냐? 아니에요. 여러고 모든 사람들이 다 들고 믿었어요. 간담이 녹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믿었어요.
하나님이 죄인을 심판하신데요. 이것을 확실하게 믿고 기절한 사람 있어요. 없어요.
그런데 여리고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어요. 그런데 그들이 구원 받았어요? 아닙니다.
라합만 구원받았습니다.
그럼 말씀을 듣고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성경이 말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라합의 믿음과 다른 사람들의 믿음의 차이가 보이시나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이 말한 믿음은 아니라는 겁니다.
셋째, 단순한 마음의 확신이 믿음이 아닙니다.
막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특히 사업하시는 분들 하나님 제가 이번에 사업을 시작하는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십일조를 잘 드리고, 또 십의 일조는 선교헌금을 드리겠습니다,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이것은요, 전혀 믿음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 외에는 뒷받침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선한동기로 하면서 축복해 주실줄 믿습니다가 믿음이 아님
히11장 자기 임으로 한 사람이 아무도 없음.
보세요. 히11장을 보면 그 누구도 ‘하나님 제가 방주를 지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합니다. 방주를 잘 짖도록 도와 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시작했나요? 아닙니다.
여호수아 요단강 앞에서 하나님 우리가 언약궤를 매고 건너가겠습니다. 그때 물이 갈라질 줄 믿습니다. 하고 들어갔나요?
여리고성도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돌격했나요?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와 있는 사람들 보십시오. 단 한 사람도 자기들이 계획해서 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시작한 사람은 단 함 사람도 없어요,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자기들이 계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는 겁니다.
그럼 성경이 말한 참된 믿음은 어떤 것인가, 믿음의 성격
1.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인격체이신 하나님께 두는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어떤 사실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인격체이신 주님께 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참다운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믿음이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열심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많았을지 모르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아는만큼 가지는 게 아니라,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만큼 가지는 것입니다.
2.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모든 것을 거는 것)
믿음은 성령의 조명으로 발견된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중요한 한 가지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히11장 믿음의 사람들 ->공통점 ->하나님께 자신을 다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노아 ->운동장보다 더 큰 방주를 만들어라, 그 당시 전기톱, 전기대패도 없었어요, 나무한그루 자르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겠습니까?
또 비가 올 기미도 안보여요, 만약 비가 안오면 인생 종치는 겁니다. 그가 가진것이라고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한가지입니다. 노아는 말씀하신 그 하나님께 자기의 모든을 걸었던 겁니다.
엘리야 ->아합왕 앞에서서 아합의 죄로인하여 이슬도 내리지 않을것이라고 말하라 당시 아합의 어떤존재인가? 5공의 전두환, 그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 쉽지 않음,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3.하나님께만 반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반응하기보다는 환경에 반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환경에 반응하세요, 아니면 하나님께 반응하세요?
문제가 없을땐 다 하나님께 반응해요, 그런데 문제를 닥처보면 알아요 누구에게 반응하는지
예) 여호수아 요단강 건널때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 하나님의 의도를 여호수아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제사장들이 벱궤를 메고 발을 내 딛는 것이였습니다. 이런일을 과거에 한번도 없었던 일입니다. 들어보지도 못한 일이죠
이때 여호수아가 어떻게 합니까?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나에게 말씀하시고 말씀하신대로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이심을 신뢰하고 환경에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반응하여 한 발을 믿음으로 내 딛을때 하나님 크기의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도들이여!
오늘의 문제가 뭔줄 아시요, 내가 못하면 하나님도 못한다 생각해요
누구와 같이 마르디와 같이(요11장)
하나님 그렇습니다, 내가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믿음이 하나도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난 주님이 필요해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라고 그 은혜를 부어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의 다림줄을 보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보아도 되고 안보면 그만이고가 아닙니다. 반드시 보아야합니다. 그래서 그 기준에 맞추어 신앙생활을 할때 생명의 풍성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임하셔서 하나님 크기의 일을 이루실것이여 이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 보고 주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1)하나님을 아는 것(음성, 형용, 말씀이 거함)
2)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만이 나의 모든 것, 즉 나의 구세주, 주인, 나의 생명되시는 것.
3)하나님을 믿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