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중심적 삶(7) 자기목적
자기중심적 삶(7) 자기목적
우리의 신앙은 한마디로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창1장에 천지창조에서와 창3장 선악과와 생명나무에서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주권의 상징인 선악과 먹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모든 생명과 풍요를 누릴 수 있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주권의 상징인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모든 공급이 차단되어 결핍이 찾아오게 된 것을 선명하게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풍요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까지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철저한 결핍의 삶은 아닌가요? 왜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통치 속으로 들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중심적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①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한 가지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모두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 우리의 자녀들이 법적으로 내 자녀라 할지라도 다 부모님의 주권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②또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주권에 순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 즉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은 세 가지의 큰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 목적을 위해, 하나님 자원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길)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모든 생명이 넘칩니다.
반면 타락의 본질은 자기중심적인 삶인데, 자기중심적인 삶 역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자기목적을 위해, 자기 자원으로, 그리고 자기방법(길)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할지라도, 우리 목적을 위해 살아가면 그것은 지극히 타락한 신앙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타락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모든 생명이 걷힙니다.
하나님의 목적으로 사는 삶이란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가운데 하나님의 의중, 의도, 길, 뜻을 알아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하나님 크기의 일을 이루는 것으로, 이때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요, 이것이 하나님 목적으로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타락하면 하나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이 삶의 목적이 변질되어 자기의 뜻을 이루는 자기목적의 살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중, 의도, 목적, 길과는 상관없이 자기의 의중, 의도, 뜻이 이루어지는데 그 목적을 둡니다.
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의 자아 중심에는 탐심과 개인적 야망이 있기 때문 입니다.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탐심이란 국어사전에서 살펴보면 탐내는 마음입니다.
현대어 성경에서는 “이 세상의 금전과 쾌락을 흠모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1.자기중심적 신앙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 한다 할지라도 그 중심에는 탐심이, 개인적 야망이 시퍼렇게 살아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타락한 사람이요, 우상숭배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삶에서 이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철저히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 당시 내려오는 모든 전통적인 가르침을 포함하여 율법을 지키려고 누구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보다 더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 속에서 탐심과 개인적인 야망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습니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23:5-7)
마23:16-19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마23:2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눅16:13-14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5:42) 그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누구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많은 의식들과 희생들을 하나님을 위해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목적을 위해 사는 우상숭배의 삶을 살고 있었을 뿐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주를 위해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그 중심을 보면 자기의 야망이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장로직분을 위해서,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위해서)
2.사울의 예
사울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당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습니다.
삼상9:2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 하더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그에게 놀랍게 임하였습니다.
삼상10“9-11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그러나 그는 사람 두려워함과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인하여 결국 버림을 받았습니다.
사울이 40세에 왕이 되어 블레셋과 전투가 벌어졌는데 블레셋의 군사력은 삼상13:5절에 “병거가 삼만 이요 마병이 육천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반면 사울의 군대는 3000명에 불과 했습니다. 절대 절명의 상황에서 사울은 7일 동안 사무엘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은 오지 않고 군사들은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흩으지는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스스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사람들을 붙잡는 것이 그에게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보다 앞섰습니다. 그 만큼 그는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그가 제사를 드리고 나자마자 사무엘이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불순종에 대해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삼상13:13-14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
그러한 그에게 사무엘상 15장에서 하나님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셨습니다. 만약 이번에라도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실 작정이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이 없었더라면 그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사울은 불순종했습니다.
아말렉을 심판하기 위하여 사람이건 짐승이건 모든 생명 있는 것을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그는 자기 취향에 따라 선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사람은 왕만 남기도 다 죽였고, 짐승은 가장 살진 좋은 짐승 일부를 남기고 나머지는 다 죽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시고 그를 최종적으로 버리셨습니다.
삼상15: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그런데 사울에게 있어서 문제의 핵심은 그에게 아직 개인적인 야망이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데에 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삼상15장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RP서 사울을 버리셨다는 사실을 알고 사울을 직면하러 간 사무엘이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사울이 자기를 위해 세워놓은 승전 기념비였습니다.
삼상15: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났더니 혹이 사무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돌이켜 행하여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또한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렸다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사울에게는 사람들 앞에서의 자기에 대한 평가가 소중했습니다.
삼상15:27-30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을찌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이처럼 사울의 삶 속에는 개인적인 야망이 가득했습니다. 그에게는 성령의 기름부음, 성령의 놀라운 은사, 하나님으로 인한 큰 영향력, 세상에서의 높은 지위와 젊음 등이 있었지만, 타락한 우상숭배인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하나님께 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의 목적과 취향과 이득에 따라 선별적으로 순종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관점에서 전적인 불순종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와 같습니다. 오늘 이러한 자세가 교회 안에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가득합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고갈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자기목적을 위해 사는 자기중심적인 삶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3.자기목적의 다른 열매들
탐심과 개인 야망에서 나오는 전형적인 열매는 사람 두려워함과 선별적 순종입니다. 그런데 그 외에도 많은 열매들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들은 시기, 경쟁심, 앞서고자 하는 자세, 잘 보이고자 하는 욕심, 조급함, 자기연민 등 여기서 나오는 것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열매들이 우리 삶 속에 있으면 우리는 철저하게 타락한 자기중심적인 신앙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곧 바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4.자기를 기쁘게 하기 원하는 삶
자기 목적을 위해 사는 삶을 성경적인 다른 용어로 표현하면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삶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삶은 참으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심지어 그것은 심문을 지나치게 많이 보는 것, 텔레비전 연속극, 인터넷, 지나친 운동 등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려면 이런 것들을 전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들 자체가 죄라는 말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에게는 정상적인 휴식이나 오락, 그리고 적절한 운동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정도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동기의 문제입니다. 결국 이러한 것들을 지나치게 하는 것 배후에는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자기중심적인 자세가 숨어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이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나올 때, 그것들은 최소한 몇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영향력을 끼칩니다.
첫째, 그것들은 우리들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세월을 아끼라고 말하고 있데 말입니다. 엡5:15-16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둘째, 그것들은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의 불씨를 꺼뜨립니다. 즉, 성령을 대적합니다.
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지 하다가도 드라마 보고나면 열정 열망은 기억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셋째, 영적인 분별력이 흐려집니다. 혼동이 찾아옵니다. 비전이 흐려집니다.
넷째,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방해됩니다. 어떤 때는 기도하려고 눈을 감고 있으면 어제 보았던 연속극이 생각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려면 자기를 기쁘시게 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면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자세를 내려놓아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제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기쁘게 할 따름입니다. 그러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5:3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여기서 “나의 원대로 하지 않고”라는 말은 “나를 기쁘게 하기를 추구하지 않고”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 NIV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 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자기를 기쁘게 하기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추구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판단을 알려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간순간 자기를 기쁘게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의 참 신앙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목적된 삶입니다. 반면에 타락한 자기중심적인 신앙은 자기목적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자기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