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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자료] 그리스도인은 제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발의무리 2007. 2. 23. 09:05

 

그리스도인은 제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고전 8:1-13

 

 

들어가는 말
기독교가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을 때 우리나라는 무속신앙과 더불어 불교와 유교문화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종교가 어떤 문화권속에 들어가면 기존 문화와의 충돌이 있다가 점차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기존문화의 가치관을 상당 부분 수용하게 되는데 그것이 기독교의 진리를 손상하게 될 때 그것을 혼합주의(syncretism)라고 부르는 형상이 생겨나게 됩니다. 여러분 중에 이 름난 승려들이 만들어준 부적같은 것을 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이나 매우 이기적인 기복신앙이 불교에도 있는데 사실 그런 것은 불교 고유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불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오자 마자 토속신앙과 혼합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무당 들의 신전에 부처상이 있는 것도 마찬가지 현상이라고 봅니다.
유교는 예(禮)를 존숭(尊崇)하는 사상체계로서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녀, 친구들과 같은 인간 관계에 있어서의 올바른 관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교회가 그 영향을 받게 되자 교회의 목사를 가부장으로 생각하는, 교회의 어른으로 모시는 풍토가 생겨난 것입니다. 또 무속신앙의 배경으로 인해 목사를 무 슨 신통력있는 shaman처럼 생각하게 되고 신자 개인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매개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저런 연고로 교회에서는 목사의 위치를 지나치게 높여놓고 불필요하게 의존하는 폐단이 많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잘못된 것이지 만 한 사회에서 문화의 비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런 문화적인 적응을 단시일에 모두 떨쳐버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교학자들이 거론하게 된 것이 상황화(contextualization)라는 작업입니다. 기독교의 진리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 서 그 나라 문화속에 납득할만한 형태로 접합시키자는 것이지요. 이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러나 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목회학을 배우기 전에 먼저 선교학을 공부했는데 선교학의 대부분의 일이 이 상황화의 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선교학 수업 중에 매우 인상 깊게 배운 것이 바로 한국 교회와 제사의 문제였습니다. 한국에 와있던 미국 선교사들이 경험했던 바-한국 신자들이 유교문화의 산물이 조상 제사에 부딪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연구와 신학을 접합시켜 상황화 작업을 해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제사문제로 겪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젊은 이들이 예수를 믿고서 집안의 제사를 불참하다가 아버지에게 매타작을 맞는 다든가...예수 믿는 며느리가 집안 제사를 거부하다가 소박을 맞는 등...제사를 참석할수도 없고 안하기도 어려운 그런 속사정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각 목장에서 거론되었으나 시원하게 해결치 못했던 질문을 제게 주면 저녁 예배 시에 '이것이 알고싶다' 프로그램으로 강론하겠다고 했었는데 실로암 목장에서 이 조상 제사 문제를 제기해 주었습니다.
조상제사의 유래
조상 제사는 유교문화의 핵심 내용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유래에 대해서는 1899년 중국 허난 성의 안양지역에서 갑골문 이 발견되기 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후대의 한자 문헌들 '시경' '상서' '주역' '주례'등 이른바 13경에는 그 기원이 나와있지 않다고 합니다. BC 14세기 중국 은(殷)나라에 조갑이라는 사람이 쿠데타로 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때까지 은나라는 모든 토템신-즉 황하신, 산신, 천신 등 온갑 잡신을 섬겨왔었는데 조갑이 등극하면서 모든 잡신 숭배를 강제로 폐하고 자신의 직계 혈족-조상에 대한 제례만을 강화하게 했읍니다. 그 조상 신은 전쟁, 농사, 날씨, 질병등을 조절할 수 있는 전천후적 존재로 인식하도록 조작하였는데 이것은 정권의 정통성이 없는 조갑왕이 주변 부족들에게 자신의 조상의 초월적 위상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수시로 수많은 제물-주로 소나 양-을 동원해서 전쟁의 승리나 풍년을 기원하는 제례를 통해 제례와 정치 적 설계를 통한 권위를 축적해 나갔습니다.
이런 개인의 정권의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한 조작은 오래 가지 못해서 주변의 약 200개에 달하던 부족들은 연합하여 은나라 를 깨뜨리고 주(周)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나라는 은나라의 문화를 파괴하고 백성들을 노예로 부리게 되었 으면서도 은나라의 제례문화를 살려둔 것입니다. 그런데 주 나라에서는 그러한 조상 제례가 왕가에만 국한되지 않고 신하들도 너 도나도 받아들이게 되어 점차 대중화 되어가게 된 것입니다. 후일(BC 551-479)에 노(魯)나라에서 태어난 공자는 성장기에 여러나라를 방랑하면서 공부할 때 주로 주 나라의 종법 제도와 제례문화를 깊이 연구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아마 그것이 공자가 세운 유 교문화의 핵심부에 자리잡게 된 것 같습니다.
조상신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이렇게 조상제례는 죽은 조상의 혼령을 천지의 조화, 개인과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초월적 존재(신)로 인식하고 그들을 예 배함으로 현실의 삶의 이득을 얻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속신앙의 한 부류로 보아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성 경은 사람이 죽어 그 혼령이 귀신 혹은 신이 된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사무엘서에 보면 사울왕이 무당의 channeling을 통해 죽은 사무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그것은 마귀의 장난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마귀의 존재를 인 정합니다. 사탄과 그 졸개들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중의 하나인 천사들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죽어서 그 혼백이 귀신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조상 신이란 사실 그 실체가 없는 셈입니다. 마치 산신, 하천 신, 태양신이 실체가 아니듯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 4절 이하를 보십시오.사람들이 착각해서 수많은 잡신들을 거론할 지언정 그것은 실체가 아니고 로마서 1:22절 이하처럼 타락한 인간이 어리석어 지고 우준하게 되어 실체도 없는 잡신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 자신의 탐욕을 투사하여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조상신 제례가 문제가 되느냐?
그러면 실제로 있지도 않은 조상신을 인식하고 섬기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라는 질문이 나오겠지요?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 것을 원하십니다. 그것이 참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제쳐 놓고 다른 힘센 대상을 의탁해서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아보고 싶어 한다든지 자신의 삶에 유익-복을 구하는 것을 악하게 보십니 다. 신명기 12장 29절 이하, 신명기 18장 9절 이하를 보십시오. 예를 들어 점을 보는 것이 왜 악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내 인생 을 선하게 인도하실 것을 믿지 못하고 길흉화복을 미리 알아보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숭배를 무 섭게 책망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그 우상이 뭐 하나님과 경쟁 상대가 될 실체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허황한 것이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허황한 존재에게 당신의 소중한 피조물인 인간이 그 운명을 의탁하는 것이 하나님으로서는 진노를 금치 못할 일인 것입니다. 조상 제례를 하는 집안, 심지어는 제사를 안 지내는 집안에서도 자손들의 삶에 운(?) 좋은 일이 생기 면 '조상님들이 음우(陰佑)하시는가 보다..'라고들 말하는 것을 들어 보셨읍니까? 인간의 막연한 상상이기도 하고 뭐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입니다.

그러면 효(孝)의 문제와 어떻게 상충되는가?

http://cafe.daum.net/fullsos 전도종합 제공

 

그러므로 제사가 일단 그러한 의미에서 조상제례가 된다면 그리스도인은 결코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context가 두드러진 조상제례를 강요받는 다면 목숨을 걸고 맞서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늘 대두되는 문제가 바로 효(孝)의 문제입니다. ' 어떻게 자식이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할 때 발목이 잡히기 쉬운 것이 우리 한국인 들입니다. 이것에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성경 에서도 물론 부모에 대한 공경을 중요시 합니다.(출 20:12) 그러나 부모가 살아있을 때 잘 해야지 죽어서 그 존재의 행방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를 신으로 잘못 인식해서 드리는 제례가 무슨 효(孝)와 관계가 있습니까? 돌아가신 선친들의 운명은 하나님 의 처분에 맡길 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을 그리워하고 생전의 은덕을 기리고 싶은 추모의 마음은 소중한 것인데 그것은 조금 후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절'만 하는 것도 문제가 되는가?
그런데 요즘은 사람들의 의식이 발달하면서 조상을 굳이 신이라고 생각치 않는 사람들도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례를 그냥 정기적인 의례정도로 생각하고 제사에 참석해서 절 한번 하는 것이 뭐 신앙적으로 문제가 되느냐고 설득을 받으신 분들 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좀 delicate한 문제입니다. 조상을 신으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에 대해 의존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냥 할아버지나 부모님을 기억하는 마음으로 절하는 것이 뭐가 문제일까?...생각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좀 찜찜하지요? 저는 이 문제를 일제치하에서 목사님들이 겪었던 신사참배의 문제와 동일한 선상에서 다루고 싶습니다. 일본 제국이 한국의 기독교 를 말살하려고 목사들을 일본 전통신전에 데려다 강제로 참배를 하게 했고 그것을 거부하다가 많은 목사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냥 참배하고 살아남은 목사들도 많았습니다. 후일에 이것이 문제가 되어 큰 교단의분열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사실 일본 태양 신도 허무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절은 하되 속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인식하고 더구나 그 신을 의지하는 마음 전혀 없이 한다면? 속으로 '엿 먹어라!'고 욕이나 하면서...문제가 되겠습니까?
저는 이 문제를 본문 7절에 나오는 우상 제물에 관한 말씀으로 풀어보고 싶습니다. (단 이 문제에 관한 말씀은 저의 사견임 으로 절대적이 아닌 것을 밝혀 둡니다.) 사실 우상신이 실체이거나 진정한 우상숭배라면 그 제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께 가증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상이 헛된 것인 줄 알고 전혀 무시하는 사람이라면 그 제물을 먹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 다. 사실 제물을 먹고 마심은 신과의 교제를 말합니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의 제물중에도 백성이 함께 먹고 마시는 부분이 있 는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요 사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 신봉자가 제물을 먹고 마심은 가상적인 신이지만 그에 연합되 고 의존하는 것이므로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7절 말씀대로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지식'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조차 금해야 할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언제 입니까? 9절-약한 자-아 직 그러한 지식이 없고 믿음 안에서 담대한 확신이 없는 동료 신자들이 볼 때는 먹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상 제물을 먹는 것 자체는 '가한 것'(고전 10:23절)입니다. 무방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유익하지 못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믿음 이 약한 자가 그것을 보고 시험에 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형제의 약한 양심이 상하게 될까 봐(고전 8:12) 안 먹어 주는 것 이 좋다는 것입니다.
제사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한 질문도 있었습니다. 제가 언급했듯이 제물을 먹는 것과 절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내 가 조상을 신이라 여기지 않고 그냥 추모하는 마음으로 절을 했다...그것 자체가 큰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우상 제물에 대한 해명을 참고로 하면 절하는 문제도 같이 풀 수 있습니다. 내 양심에 거침이 없고 투명하면 제물을 먹을수도 있고 부모님을 추모하는 마음으로-설날 세배하듯, 산소에 가서 절을 하듯-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하지만 '유익'하지 않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언제입니까? 다른 사람의 양심에 거치게 될 우려가 있을 때입니다. 이런 성경적 지식과 확신이 없는 초신자나 나의 행위를 유심히 바라보는 어떤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피해야 합니다. 이중적이라고요? 위선적 입니까? 성 경에서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네 양심이 견고하면 해도 된다. 그런데 믿음이 약한 지체가 볼 때는 하지 말라!! 어떻습니까?'
그러므로 제발 절 한번만 해달라고 애걸하는 부모님이 있다면 자신의 그러한 지식과 소신을 밝히고 그냥 할아버지를 추모하 는 마음으로 절하겠다고 하시면 됩니다. 속으로 하나님께 '주님 이것은 타협이긴 하지만 저는 주님께 대한 믿음과 정절에는 추호 도 다름이 없읍니다.'라고 화살 기도를 드리면서요.... 결국 우상 숭배란 하나님 아닌 다른 존재에게 나를 의탁하는 일이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제사 한번 안 드렸지만 사실 내 마음은 현대의 온갓 물신주의에 빠져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나는 고집스럽게 제사 참여를 (순교하는 마음으로) 거부했다고 하면서도 실상 나의 삶은 Mammon 즉 물신(物神)에게 기울어 있는 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문제는 우리의 중심(中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外貌)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그런 타협적인 태도가 나중에 부모님을 전도할 때 지장이 있지 않을까 염려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되면 이러한 지식을 전수해 드리면 됩니다.

상황화 작업
선교학에서는 제사드리는 사람들의 사고가 Ancient Worship(조상 예배)이냐 아니면 Ancient Veneration(조상 공경)이냐를 따져 봅니다. 물론 worship의 개념이 있다면 결코 안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효성이 지극하고 선친에 대한 사랑과 감사가 큰 사람들 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제례라는 문화에서 온전히 탈피하기가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제례를 Ancient Venerati on의 개념으로 인식하며 접근하면 됩니다. 그래서 제례의 기본 형태는 취하되 예식을 기독교의 예배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성 경을 읽고 찬송하며 기도합니다. 순서 중에 고인에 대한 추모담들도 나눕니다. 식사를 같이 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 이런 예식의 예식서도 나와 있으니 필요한 분을 빌려 가십시오. 사실 제례란 그 자체가 예배입니다. 그런데 조상은 신이 아니므로 예배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상황 속에서 고인을 추도하며 그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직 전통적 제사를 고집하는 부모님이 있으면 이러한 방식을 간곡히 권해 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부모님이 강경하게 거부하신다면 할 수 없지요. 한 세대가 지나가기까지 기다릴 것입니다.
나가는 말
http://cafe.daum.net/fullsos 전도종합자료 제공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생각할때도 크신 하나님의 선하심, 그분이 우리의 연약함을 하감하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수하거나 죄를 지었다고 지옥불에 내동댕이 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기다려 주시고 설득하시고 고쳐주시고 하면서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온전한 계획을 수행해 나가십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한 정절이 있으되 완고한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시고 제사 참여를 고집할 때 하나님께 그 사정을 자세히 아뢰고 타협점을 찾아 처신하는 것을 정죄하시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 지 않습니다. 사실 바른 대로 말하자면 우리의 일상 생활 중에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우상 숭배적인 요소를 갖고 있음을 아시는 지요? 유독 제사만 문제가 됩니까?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십시오. 내 마음이 주님을 향해 있고 나의 몸과 마음을 주님을 위해 쓰겠다는 전적인 헌신을 하십시오. 그리고는 상식에 따라 처신하시면 됩니다.